이 둘은 모두 하나님과 관계한다는 면에서는 동일하다. 칭의에 의해서 우리는 하나님과 화해하게 되고, 거듭남으로는 하나님과 동화되고 닮게 된다. 이 둘은 언제나 함께한다. 구세주의 부활은, 주님께서 스스로 취하신 그 죄책들로부터 의롭다고 여김 받은 것이며, 주님께서 의로우신 종임을 공적으로 선언하신 것인데, 그 부활을 새로운 출생(a new begetting)이라고 부른다.
이와 마찬가지로 죄책으로부터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 새롭게 출생하는 것, 그리그 우리가 천사들에게 하나님의 자녀로서 드러나게 되는 것은, 모두 한꺼번에, 그리고 동시에 일어나는 일이다. 또한 이 모든 것은 은혜로 말미암는다.
1) 변화의 본질에 있어서 거듭남과 칭의는 다르다.
칭의는 관계적(relative)인 변화이다. 칭의로 인해서 사람이 죄책의 상태에서 의의 상태로 옮겨진다. 노예의 상태에서 자유의 상태로, 행위언약의 의무를 진 상태에서 은혜언약의 특권을 누리는 상태로, 진노의 자식에서 약속의 상속자로 옮겨진다.
반면, 거듭남은 실제적인(physical) 변화이다. 죽었던 사람이 사망에서 생명으로 옮겨지는 것과 같은 실제의 변화이다. 또한 그것은 영혼을 새로운 본성으로 채우는 것이다.
거듭남의 변화는 본성(nature)의 변화이다. 바로 우리를 진노의 자식이 되게 하는 본성, 곧 첫 번째 범죄뿐만 아니라, 세상을 살아가는 동안 매일의 행동으로 죄를 짓게 하는 그 본성이 변하게 된 것이다. 세상적인 삶에 빠져들기 쉬운 본성, 그리고 육체의 욕망을 충족시키기에 급급한 그 본성에 변화가 있는 것을 말한다.
칭의가 상태(state)의 변화라면, 거듭남은 기질(disposition)의 변화이다. 종이나 노예가 자유인이 되면 그 사람의 상태에 있어서 변화가 있다. 그러나 그 변화 자체가 그 사람의 마음에 새로운 원리들을 채워 넣거나 그의 본성에 새로운 뼈대를 세워주는 것은 아니다.
칭의는 우리가 죄책으로부터 자유케 되어서 생명을 누릴 권리가 주어진 것이라면, 거듭남은 죄의 오염으로부터 자유케 되어서 우리 속에서 부분적으로 회복된 하나님의 형상의 순수함을 갖게 되는 것이다.
2) 칭의와 거듭남은 그 원인과 방식이 서로 다르다.
칭의는 그리스도의 보혈의 직접적인 열매이다.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롬5:9). 반면, 거듭남은 성령의 직접적인 역사하심에 의한 것이다. 그래서 그것을 ‘성령의 새롭게 하심’(딛3:5)이라고 부른다. 칭의의 질료(matter)는 우리들 밖에 있는 그리스도의 의이지만, 거듭남의 질료는 우리들 내부에 있는 은혜로 말미암은 습관이다. 칭의의 형상(form)은 ‘전가하는(imputing)’ 것이고, 거듭남의 형상은 ‘주입하는(infusing)’ 것, 혹은 우리들 안에 ‘들여 넣어지는(putting into)’ 것이다.
결국 이 둘은 서로 다른데, 칭의는 ‘저주받음(condemnation)’에서 ‘무죄언도(absolution)’로의 변화이며, 거듭남은 ‘오염(pollution)’에서 ‘친교(communion)’로의 변화인 것이다. 즉각적인 효과를 보자면 칭의는 우리에게 ‘자격(right)’을 주는 것이고, 거듭남은 ‘적절함(fitness)’을 제공하는 것이다.
칭의에 의해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의 머리가 디시는 분 안에서 ‘완전한(perfect)’ 것이고 그 완전한 것이 ‘우리에게(to)’ 전가되는 것이다. 거듭남에 의해서 우리가 의롭게 되는 것은, “우리 안에서(in)” 활동하는 것이며, 완전함에 이르기 위한 열망을 갖게 하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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