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들에게 그리스도인의 영성이란 신자 개인이 하나님을 향하여 인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일 뿐만 아니라 교회라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하나님을 향하여 인격적으로 반응하는 것이었다. 왜 청교도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영성 생활을 그토록 강조하였던 것일까?
첫째, 하나님에 대하여 폭넓은 관점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모든 교회의 하나님이라고 넓게 생각하였다. 하나님 앞에서 영성 생활을 한다는 것은 단순히 개인적으로만 하나님과 관계를 맺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가족과 함께 살아가면서 그 가족 안에서 하나님과 관게를 맺는 것이라고 청교도들은 믿었다. 그래서 그들은 교회를 중심으로 하는 영성 생활을 강조하고 또 강조하였다.
루이스 베일리, “전능하신 하나님께서는 어떤 개인이나 가족이 은밀하게 자신을 예배하는 것을 바라실 뿐만 아니라 모든 경건한 신자들이 가시적인 교회에 함께 모여서 좀 더 공적으로 예배하는 것도 바라신다. 이런 공적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은 자기 자신이 모든 개인의 하나님과 주로 알려질 뿐만 아니라 우주에 존재하는 모든 피조물의 하나님과 주로도 알려지기를 바라신다.”
둘째, 거듭난 신자가 지역 교회의 회원이 되어 그 교회의 가르침과 돌봄아래서 성장하는 것이 하나님의 보편적인 방법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교회 안에 심길 때 우리는 성장할 수 있다”(리차드 십스). 이것이 청교도 영성 생활의 모토였다. 윌리엄 퍼킨스, “교회 밖에 있는 사람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교회를 자신의 어머니로 삼지 않는 사람은 하나님을 자신의 아버지로 모실 수 없다.”
리차드 십스, “물론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하지만 그렇다 하더라도 그리스도인은 반드시 포도나무의 가지가 되어야 한다. 어떤 지역 교회의 회원이 되어야 한다. 행2:47,”주께서 구원받는 사람을 날마다 더하게 하시니라“. 하나님께서 구원받은 무리에 들어온 사람을 반드시 지역 교회에 속하도록 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반드시 지역 교회에 소속되어야 한다.”
토마스 굿윈, “하나님께서 세워 주신 교회 안에서 이루어지는 모든 일에는 더 큰 복이 있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기도한다. 그러나 교회에 모여 함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우리의 기도를 더 열납하신다. 우리는 개인적으로 형제를 책망한다. 그러나 교회 안에서 형제를 책망할 때 더 만족스러운 결과를 얻을 수 있다. 시의 적절하지 못한 설교가 있을 수도 있지만, 교회 안에서 행해지는 설교는 항상 우리에게 적합하다. 평일의 설교도 복되지만 주일의 설교에는 그 날과 그 의무를 숙고할 때 두 배나 더 특별한 복이 있다.”
리차드 십스, “교회 안에서 공적으로 행해야 할 의무들을 도외시한 채 개인적인 영적 훈련에만 집중하는 것은 우리에게 축복은커녕 저주만 될 뿐이다. 그것은 마치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만나를 먹을 때에 하나님께서 정하지 않은 시간에 만나를 거두어 그 만나가 결국 썩어 악취만 날 뿐 아무 유익을 주지 못한 것과 같다. 하나님께서는 자신이 교회 안에 세워 놓으신 여러 가지 규례마다 자신의 복된 성령의 임재로 함께 하신다.”
십스는 교회의 돌봄과 가르침을 무시하거나 소홀히 하고 자기 혼자서 하나님을 일애일로 독대하여 영성을 형성하려고 하는 소위 ‘신령하다는 사람들’을 따끔하게 책망한다. “그리스도께서 자기를 한없이 낮추시고 교회 안에서 여러 가지 규례와 통치로 우리를 돌보시는데, 이것을 마음에 안 들어 하는 사람들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설교를 어리석을 일로 여기기도 한다. 이런 사람들은 마음이 잔뜩 교만해져서 교회에서 선포되는 말씀이나 성례의 도움 없이 얼마든지 영성 생활을 잘해 나갈 수 있다고 생각한다. 매사를 자기 자신들의 방법으로 해결하려 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긍휼히 여기셔서 여러 가지 도움을 베풀어 주셨는데, 그 모든 도움을 무시하는 것보다 더 큰 배은망덕이 어디 있겠는가?”
존 칼빈, “하나님께서는 자기 자녀들을 교회의 품으로 불러 모으기를 기뻐하신다. 이는 자기 자녀들이 갓난아기와 어린아이일 동안 교회의 도움과 사역을 통하여 양분을 공급받게 하려 하심도 되지만, 자기 자녀들이 교회의 모성애적 돌봄을 통하여 잘 인도받아 성인으로 성숙하고 마침내 완전한 믿음에 도달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 이렇게 ‘하나님이 짝지어 주신 것을 그 누구라도 나누어 놓을 수 없다’(막10:9).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시고 있는 사람은 반드시 교회를 어머니로 모셔야 한다. 이것은 구약시대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강림 이후에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원칙이다. 그래서 바울은 우리를 일컬어 새로운 예루살렘, 곧 하늘에 있는 예루살렘의 자녀라고 선포한다(갈4:26).
- 이태복, 『영성 이렇게 형성하라』, pp 259-26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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