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존스

구원의 궁극적 목적은 영화이다(로마서강해6권1장)/ 로이드 존스

강대식 2013. 5. 22. 09:31

“자녀이면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우리가 그와 함께 영광을 받기 위하여 고난도 함께 받아야 될 것이니라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 할 수 없도다”(롬8:17-18)

 

구원의 궁극적인 목표와 표적은 영화이다. 사도가 “함께 영광을 받을 것이다”라고 하는 ‘영화’는 무엇을 의미하는가? 몸과 영과 영혼이 다함께 구원 받는 것을 의미한다. 그뿐만이 아니라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같게 될 것이고 완전한 사람, 평화롭게 된 사람들이 될 것을 의미한다. 우리의 영화도 우리가 그리스도와 연합되어 있는 결과이다. 바울은 5:12-21에서 그리스도와 연합의 이 위대한 교리를 설명하고 있다. 이 영화의 교리에 대해서 명백하게 이해해야 하는 것은 그것은 우리 구원의 궁극적인 목적이기 때문이다.

 

하나님께서는 사람을 지으시되 자기의 ‘형상과 모양’을 따라서 지으셨다. 그러나 불행히도 사람은 마귀의 유혹을 청종하고 죄를 짓고 타락했다. 그 타락의 무서운 결과는 인간이 자기가 전에 가졌던 원래의 지위를 상실했다는 것이다(3:23). 이것이 인간의 가장 본질적인 비극이며, 이것이 인류의 참된 문제이다. 이것이 오늘날 세상이 이런 모양으로 된 것에 대해서 바르게 이해하기 위한 유일한 방식이다. 사람은 여전히 자기가 전에 처해 있었던 그곳으로 돌아가려고 하고 있고, 자기는 성공을 하고 있다고 자신에게 설득하려고 노력하고 있다. 그러나 그는 결코 그것을 얻지도 찾아내지도 못한다. 안식이 없다는 바로 그 점이 죄인의 가장 특징적인 사실이다(사57:20). 그것은 자기가 가지고 있는 바에 만족을 얻지 못하기 때문이다. 세상은 야망과 경쟁의식과 질투심과 교만으로 가득 차 있다. 그것만이 옛날의 상태에 도달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주님은 요한복음 5장 41절에서 “나는 사람에게 영광을 취하지 아니하노라 다만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 너희 속에 없음을 알았노라 나는 내 아버지의 이름으로 왔으매 너희가 영접치 아니하나 만일 다른 사람이 자기 이름으로 오면 영접하리라. 너희가 서로 영광을 취하고 유일하던 하나님께로부터 영광을 구하지 아니하니 어찌 나를 믿을 수 있느냐”라고 말씀하셨다. 사람은 영광을 추구하고 있다. 이 내적 욕구는 그를 쉬지 못하게 만든다. 그것은 크게는 시련들과 고통들과 환난들과 인생의 불행들을 설명해 준다. 타락한 인간은 자신을 이해하지 못한다. 때문에 그는 끊임없이 자기는 자신의 노력으로 성취할 수 있다고 믿는 것이다. 인간은 원래 영장이요, 통제자로서의 지위를 지명받았었는데 이제는 자기가 다스려야 할 피조물의 희생이 되고 말았다.

 

그러나 아담과 그 후손들에게 불가능했던 그것이 이제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에게 하나님의 선물로서 값없이 주어지게 된 것이다. 또한 아담이 전에 가지고 있던 것보다 훨씬 우월한 복락을 허락받았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울이 17절 마지막 부분에서 말하고 있는 바이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우리는 아직 영화롭게는 되지는 못했지만 그것에 대한 맛을 조금 보았다. 멀리서 그곳을 보고 있으며, 그것을 위해서 예비하고 있는 것이다(고후3:18).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한다”.

죄가 우리의 죽을 몸에 아직도 남아 있어 우리는 몸의 행실을 죽여야 한다(8:13). 아직도 투쟁과 싸움이 있다. 이것이 영원한 영화의 상태에 들어가기 위한 예비 단계인 성화의 단계인 것이다. 그리스도인의 현재 위치가 그러하다.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라는 사실을 증거하는 확실한 증거들을 첫째, 우리가 하나님의 성령에 의해서 인도함을 받고 있다(14절). 둘째, 우리가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게 하는 양자의 영을” 가지고 있다(15절). 훨씬 더 확실한 증거는 셋째,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나니”(16절). 마지막으로 이제 고난까지 들어서 그 점을 증거하고 있다.

여러분은 이 사도바울이, 다른 모든 사도들이 영광을 말할 때 동시에 고난을 언급하지 않고는 직접적으로 그 영광을 말하지 않았다는 사실을 주목했는가? 그들은 영광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하는 순간 그들은 언제나 고난에 대해서 말해 나간다.

 

“우리의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이르게 하려 함이니, 우리의 바라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고후4:17-18)

영광과 고난! 그들은 언제나 함께 있다. 이 분명하고 명백한 가르침에도 불구하고 수 세기에 걸쳐 내려오는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 넘어지게 하는 가장 큰 거침돌 중의 하나가 이것이었다. 거의 모든 신자들은 아직도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되는 순간 그들은 결코 더 이상의 고난과 시련을 만나지 않을 것이라고 가정하는 것처럼 보인다.

 

바울은 그리스도인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빛을 얻어 마귀와 그의 모든 궤계와 교활함에 쉽게 동요하지 않게 하기 위해 그는 진정으로 다가올 영광의 빛에 비추어 고난의 문제를 거론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목화자적인 심정을 가지고 있기 때문에 영화와 고난의 문제를 그저 슬쩍 지나쳐 버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는 새롭고 놀라운 개념을 소개하고 있는 것이다. 그는 우리에게 우리의 영화가 오직 전 우주를 포함하게 될 더욱 장대하고 더 큰 영화의 일부분이라고 하는 것을 보여준다. 바울은 그렇게 함으로써 우리 개인의 구원에 절대적인 확실성과 확신에 대한 또 다른 증거를 제공한다. 만일 그가 우리에게 온 우주가 그리스도 안에서 영화롭게 되어야 한다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임을 증명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사역의 결과로써 그리스도에 속한 모든 사람들은 그것에 참여하게 될 것이 너무나도 분명하다. 동시에 우리는 이 세상에서 그리스도인의 삶이 어떠한 본질을 가지고 있는가를 이해하게 된다. 특별히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에 필연적으로 참아내야 된다는 권고를 받고 있는 그 고난에 비추어서 이다. 그것은 바로 8장 마지막까지의 주제이기도 하다. 바울은 우리의 영화가 임박하고 있다는 사실에 우리가 확신하기를 바라고 있고 또한 감격과 황홀감을 가지고 그것을 고대하기를 바라고 있다. 고난으로 인한 마귀의 간사한 궤휼에 대처할 방안을 제시한다.

 

현재의 고난과 장차, 그리스도와 함께한, 영광이 서로 관련되어 있다고 하는 이 가르침을 반드시 이해하는 것은 우리 그리스도인들의 복락을 위해서 매우 중요한 것이다. 그리고 그리스도인들의 행복과 무엇보다도 오늘날과 같은 이 세상에서의 그리스도인들로서 우리가 해야 할 간증에 매우 중요한 것이다.

 

- 한가족교회, 김영희사모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