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존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롬8;18) /로이드 존스, 로마서강해6권3장

강대식 2013. 5. 27. 10:36

제 3 장 바울의 확신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롬 8:18 )

 

하나님의 백성이 이 세상을 살아 있는 동안에 그들의 분깃이 되는 시련과 환난을 정확히 어떻게 대처하는지를 아는 것보다 우리에게 더 중요한 것이 있을 수 있는가? 환난과 시련과 절망과 고난 가운데서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라고 말할 수 있다면 그것을 가능케 한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우리를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모든 것 가운데서 넉넉히 이긴다”라고 말할 수 있게 한 것이 무엇이란 말인가?

 

첫째, 사도는 이 세상에서 정확한 시대관과 자기 인생관을 가지고 있다는 것이다. 세상 사람들은 이 현세가 그들에게 있어서는 전 인생이요, 이 세계 밖에는 없는 것이다. 그들의 전체 사고방식은 전적으로 잠시적이요, 현세적이요, 보이는 것이요, 본 것에 의해서 결정된다. 그들의 관점은 사람이 이 땅에 와서 살다가 이 땅을 떠나가는 것, 그것뿐이다. 이것이 그들의 시간관이다. 그래서 그들은 일이 잘못되었을 때 이 세상에 있을 동안에 개선되기를 바라는 것 뿐이다. 그러나 그 일들이 잘되어 나가지 않을 때, 전적으로 위로를 찾을 길이 없다.(엡2:12) 또한 기대할 만한 것도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인은 비그리스도인이 인식하지 못하는 하나의 구분을 알고 있다.

“현재” - ‘당분간’ 만을 의미하지 않고 그것은 ‘이 현재’ ‘우리가 사는 전체 시대’ ‘이 현존재’ 라는 의미이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신 이후부터 그리스도께서 다시 오시는 그 사이를 의미한다. 현세는 내세가 오게 될 때에 끝이 나는 것이다. 우리는 현세를 살고 있지만 우리 그리스도인은 현세만이 아님을 안다.

 

둘째, 그리스도인은 시간에 대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을 뿐 아니라 이 세상의 삶에 대한 다른 관점을 가지고 있다. ‘장차 나타날’이라는 구절에서 바울은 우리에게 그 점을 소개하고 있다. 우리의 전체 생각은 ‘현재’와 ‘장차 나타날’ 두 촛점에 의해서 통제를 받아야 한다. ‘나타날’ 이것은 장차 올 것이며 성경 전체가 고대하는 위대한 사건이다. 마태복음 24장과 25장 전체에서 또한 마가복은 13장과 누가복은 21장에서도 ‘장차 나타날 영광’을 나타내시며 우리 주님께서는 자기 백성들에게 세상에서는 ‘환난을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셨다. 주님께서 그들 앞에 들어 보이신 것은 장차 올 영광이다.

 

“내가 너희를 위하여 처소를 예비하러 가노니 가서 너희를 처소가 예비하면 내가 다시 와서 너희를 내게로 영접하여 나 있는 곳에 너희도 있게 하리라”(요14:1)

“우리의 시민권은 하늘에 있느니라 거기로서 구원하는 자 곧 주 예수 그리스도를 기다리노니 그가 만물을 자기에게 복종케 하실 수 있는 자의 역사로 우리의 낮은 몸을 자기 영광의 몸의 형체와 같이 변케 하시리라”(빌 3:20-21)

“그러므로 형제들아 주의 강림하시기까지 길이 참으라 보라 농부가 땅에서 나는 귀한 열매를 바라고 길이 참아 이른 비와 늦은 비를 기다리나니 너희도 길이 참고 마음을 굳게 하라 주의 강림이 가까우니라”(약 5:7 )

“모든 은혜의 하나님 곧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부르사 자기의 영원한 영광에 들어가게 하신 이가 잠간 고난을 받은 너희를 친히 온전케 하시며 굳게 하시며 강하게 하시며 터를 견고케 하시리라”(벧전 5:10 )

 

분명히 요한계시록은 성경의 마지막 책으로서 철저하게 그 주제를 할애하고 있다. 마지막의 부르짖음은 “아멘 주 예수여 오시옵소서”이다. 그리스도인은 큰 갈망을 가지고 “주 예수여 어서 오시옵소서” 라고 부르짖는다.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이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재림과 나타나심과 강림하심 안에서 밝혀지게 될 것이 분명하다. 그분은 단순한 나타남으로만 오실 것이 아니다. 영광의 몸을 입고 오실 것이다. 모든 사람의 눈이 그를 보게 될 것이다. 그것은 ‘이 현세’의 마지막이 될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인만이 역사를 바로 이해할 수 있다.

 

사도는 “생각건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라고 말한다. 그는 어느 의미에서 그 영광은 되어질 어떤 것이 아니고 이미 존재하고 있음을 말하고 있다. 이 위대한 날이 오게 될 때, 존재하는 영광이 나타나게 될 것이라고 말하고 있다. 더 명백해질 것이며 보여질 것이다. 그는 그 영광에 대한 어떤 희미한 체험을 가지고 있다.(고후12장) 다메섹 도상에서 그는 영광 중에 계신 부활하신 주님을 보았고 결코 그것을 잊지 못했다. 바울이 고대하고 있는 것은 그를 다시 보는 것, 그를 영구히 보는 것, 그것이다.

 

성령께서는 이것을 우리에게 증거하신다. 성령께서는 그것을 우리에게 인쳐 주신다. 성령은 그것에 대한 보증이다. 성령께서는 그 영광 자체에 대한 제 1차적인 몫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우리에게 나타날’ 이라기 보다는 ‘우리를 위해서 준비되어 있는’ 것이다. 우리는 단순히 관망자가 되는 특권만 가지지 않고 우리는 거기에 참예하고 누리게 될 것이다. 전 우주에 나타날 영광의 일부가 우리에게 일어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백성들은 그리스도의 영광이다. 그리스도께서 오셔서 말로 할 수 없는 영광으로 이 ‘장차 오는 세대’를 발하게 되시는 그 때에 우리로 그 자신의 강력한 영광의 일부가 되게 하실 것이다.

 

우리는 모두 그 점에서부터 출발해야 한다. 시간의 문제처럼 어려운 것이 어디에 있는가?

그리스도인은 자기로 하여금 마땅한 방식대로 시간을 요리 할 수 있게 하는 관점을 가지고 있다. 나는 이 세상에 살고 있다. 40년, 50년, 70년 살아가야 할지 모른다. 그것이 엄청나 게 길어 보인다. 그러나 영원을 생각할 때 모든 것은 변한다. 여러분은 100만년을 생각할 수 있는가? 그것을 100만 배, 또 다시 100만 배로, 그런 다음 영원토록, 영원토록 계속되는 것을 생각해 보라. 여러분이 그 영원을 생각할 때 우리의 인생이란 무엇인가? “너희의 인생이 무엇이뇨? 너희는 잠깐 보이다가 없어지는 안개 이니라”. 그것은 숨을 한번 들이키고 내 쉬는 것과 같다. 바로 이것이 기독교 교훈이요 우리를 돕는 방식이다.

 

우리의 “환난의 경한 것이” - 그것은 말하자면 한번 번쩍하는 것에 불과하다. 우리는 오늘 여기서 살다가 내일 가버린다. 그러나 ’나타날 영광‘이 있다. 이 생각을 꼭 잡으시기 바란다. 곧 우리는 이 현세에 속해 있지 않고, ‘우리의 시민권이 하늘에 있다’는 것을 말이다.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 한가족교회, 김영희사모 요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