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 요한계시록에 나타난 반복의 원리
요한계시록이 자연스럽게 나누어지는 부분들을 염두에 두는 것이 중요하다. 1-3장, 4-7장. 8-11장, 12-14장, 15-16장, 17-19장, 20-22장이다. 이 각각의 부분에 병행구가 존재한다는 것, 즉 그리스도의 초림부터 재림에 이르기까지 기독교 교회 이야기의 몇몇 요소가 반복되어 등장하는 것이다. 자기 백성과 함께 하신 그리스도, 그들이 겪는 특정한 경험들, 그리스도를 반대하는 자들이 등장하고 각 부분의 마지막은 최후의 심판으로 마무리된다.
1) 요한계시록에 등장하는 병행 구절들의 예
여러 부분들에 병행구가 존재한다고 단언할 수 있다. 반복되는 것이 더 있다. 시간을 나타내는 동일한 상징들이 8장부터 11장까지와 12장부터 14장까지에서 사용된다. 예를 들어, 계시록 11:2은 마흔두 달을 언급하고 있고, 3절에서는 1,260일이 나오는데 그것은 실제로 마흔두 달이다. 이어서 12:6에서 1,260일을 다시 언급하며, 14절에는 “한 때와 두 때와 반 때”, 즉 일년, 이년, 반년이라는 말이 나온다. 이 또한 삼년 반, 마흔두 달 혹은 1,260일이다. 그리고 13:5에도 마흔두 달에 대한 언급이 나온다. 그러므로 제가 같은 사건이라고 말씀드린 일들에 대해 동일한 숫자, 동일한 기간이 적용된다. 반복하건데, 병행구가 존재한다. 한 가지 형태로 아미 말한 일을 다른 형태로 다시 말하고 있다.
반복의 원리에 대한 또 하나의 예는 장차 있을 큰 전쟁에 대한 언급들이다. 헬라어 원문에서는 이것을 그 전쟁(the battle)이라고 부른다. 계시록 16:14, 19:19절, 그리고 20:8에서 그에 대한 언급들을 찾아볼 수 있다. 배경은 다르지만, 세 번에 걸쳐 같은 전쟁이 언급된다.
또 하나의 인상적이며 아마도 가장 설득력 있는 증거는 8장과 9장의 나팔을 부는 사건과 16장의 대접을 쏟는 사건에 대한 기사를 읽어보면 똑같은 일들이 언급되고 있음을 알 수 있다는 것이다. 첫 번째 나팔에서의 땅과 첫 번째 대접에서의 땅, 두 번째 나팔에서의 바다와 두 번째 대접에서의 바다, 세 번째 나팔에서의 강과 샘과 세 번째 대접에서의 강과 샘, 네 번째 나팔과 네 번째 대접에서의 해가 대응한다. 다음 다섯 번째 나팔과 다섯 번째 대접에서는 짐승의 보좌가 등장하며, 마지막으로 여섯 번째 나팔과 여섯 번째 대접에서는 유브라데 강이 나온다. 이것은 즉각 주의를 기울여야 할 사실이다. 이것은 다음 두 가지 주장을 지지하는 대단히 강력한 논증이다. 첫째, 요한계시록에는 반복, 혹은 대구의 원리가 있다. 둘째, 이 책의 여러 부분은 진리의 특별하고 다앙한 측면을 전달하기 위해 동일한 일을 약간 다른 방식으로 바라보고 있다.
2) 예언서가 대구법을 사용하는 이유
다니엘서 2장에는 머리, 가슴, 팔 등의 여러 부분으로 나누어지는 큰 형상에 대한 기사가 나온다. 이것은 다니엘서 7장에 나오는 네 짐승과 똑같은 것에 대한 묘사이다. 이 두 장은 분명 똑같은 거대한 제국을 묘사하고 있으며 이 말에는 누구나 동의한다. 하지만 많은 사람들이 다니엘서의 반복은 인정하면서도 요한계시록에서는 그것을 알아보지 못한다.
왜 다니엘은 두 가지 묘사를 했을까요? 왜 같은 것을 두 가지 다른 방법으로 이야기했을까요? 2장에서 한 말에 뭔가를 덧붙여 해야 할 말이 7장에 있었기 때문이다. 그것이 선지자들의 전형적인 방법이다. 그들은 뭔가에 대해 담대하게 진술한다. 그리고는 다시 돌아와서 약간 다른 용어 혹은 상징들을 사용해 이미 말한 내용에 뭔가를 덧붙인다.
2. 요한계시록의 내용과 의의
계시록 전체를 상세하게 설명하려는 것이 아니다. 저는 단지 우리가 이 책의 일반적인 메시지, 특히 우리 주님이시자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다시 오시는 시기에 대해 무엇을 말해 주는지 이해하기를 바랄 뿐이다. 그러므로 세부 사항들은 남겨 놓고 개요와 해석 방법만 제시하도록 하겠다.
1) 요한계시록의 두 단락
일곱 부분을 다시 두 개의 큰 단락으로 무리지을 수 있다. 그 분기점은 12장 초반이다.
첫 번째 주요 단락은 처음 세 부분, 즉 1-3장, 4-7장, 8-11장으로 구성된다. 두 번째 단락은 12-14장, 15-16장, 17-19장, 20-22장의 네 부분으로 구성된다. 12장을 보자. 이 장이 우리를 기독교 시대의 처음으로 되돌아가게 만들고 있음이 분명하다. 이 장은 우리 주님이시며 구세주이신 예수 그리스도, 여기에서 아들로 묘사되어 있는 분의 탄생으로 우리를 돌아가게 한다. 하지만 마귀는 성육신하기도 전에 그분이 탄생하는 순간 죽이려고 결심했다고 기록되어 있다. 그리고 우리는 복음서들에서 마귀가 어떻게 해롯 왕을 통해 그 일을 하려 했는지 알고 있다.
단락 구분의 분기점- 12장
여기 12장에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그를 죽이려는 마귀의 첫 번째 시도가 실패로 돌아가는 장면을 보게 된다. 이어서 이 “아들”은 하늘로, 하나님과 그의 보좌 앞으로 올려간다. 이는 분명 우리 주님의 부활과 승천에 대한 완벽한 설명이다. 그와 관련하여 하늘에는 전쟁이 있으며(7절), “옛 뱀 곧 마귀라고도 하고 사탄이라고도 하는”(9절) 큰 용이 쫓겨난다. 주님이 이미 “이제 이 세상에 대한 심판이 이르렀으니 이 세상의 임금이 쫓겨나리라.”(요12:31)고 말씀하신 바 있다. 둘의 대응관계를 알겠는가? 이 일은 그 때 정말로 일어났다. 주님의 죽음과 부활에 수반하여 사탄이 하늘에서 땅으로 쫓겨나는 일이 일어났다. 이어서 계시록 12장은 마귀가 여자와 “여자의 남은 자손”(17절)에게 그의 원한과 분노를 돌린다고 말한다. 이 남은 자손은 다름 아닌 그리스도인들, 여자가 낳은 성자께 속한 사람들임이 분명하다. 그리하여 마귀는 교회를 핍박하기 시작한다. 이것이 12장에 대한 해석이다. 12장은 다시 한 번 우리를 처음으로 데려간다. 이 사실은 계시록을 첫 열한 장과 두 번째 열한 장이 두 단락으로 크게 나눌 수 있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계시록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두 단락의 차이를 인지하는 것이 중요하다
명확하고도 두드러진 차이가 있으며, 계시록을 해석하기 위해서는 이 차이를 인지하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고 말씀드리고 싶다. 첫 번째 부분에는 그리스도와 그의 교회가 인간 세상에 대항하여 싸우는 기사가 나온다. 그것이 첫 번째 부분의 메시지이다. 하지만 12장부터 시작되는 두 번째 부분에 이르면, 우리는 그리스도와 거의 교회가 믿지 않는 사람들보다도 세상의 배후에 있는 악한 권세들에 대항하여 싸우는 것을 보게 된다. 즉, 마귀와 그의 모든 조력자나 연합하는 세력과의 싸움이다. 12장까지는 마귀가 언급되지 않는다. 그는 물론 사람들의 배후에 있지만 12장에 이르기까지는 전면에 등장하지 않는다.
두 번째 단락은 더 깊은 차원의 투쟁, 즉 마귀와의 투쟁을 보여준다
두 번째 부분은 첫 번째 부분과 똑같은 역사를 다루지만 더 깊은 차원의 투쟁을 보여 준다. 그것은 같은 투쟁이지만 첫 번째 부분에서는 단지 사람들 사이의 싸움으로 나타나는 반면, 두 번째 부분에서는 “통치자들과 권세들과 이 어둠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엡6;12)에 대한 싸움으로 나타난다. 교회가 이것을 이해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하겠는가!
우리는 불신자들과 기독교를 반대하는 사람들과 대결한다는 것이 무엇인지, 때로 이것들이 때로 우리의 삶을 얼마나 어렵게 만들 수 있는지 안다. 그러나 그것이 전부가 아니다. 우리는 그들 개개인이 단지 세상의 배후에 있는 큰 권세의 도구일 뿐이라는 사실을 인지해야 한다. 성경은 하나님과 싸우는 것이 마귀라는 진리를 우리에게 각인시켜 준다. 우리는 그것을 잊어버리는 경우가 너무 많다. 그래서 혼란에 빠지게 되고, 벌어지는 일들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육신의 눈으로 보는 것은 다른 영역에서 진행되고 있는 커다란 영적 전쟁의 눈에 보이는 부분일 뿐이다. 이 전쟁에서 우리는 말하자면 도구로 사용된다.
2) 요한계시록의 의의
요한계시록의 목적은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의 최후 승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표면적 묘사와 보다 깊은 묘사가 모두 나와 있다. 그것은 같은 사건, 같은 역사이다. 그렇기 때문에 반복과 대구가 존재하는 것이다. 이런 식으로 보면 성경 전체에서 요한계시록만큼 우리에게 중요한 책도 없다는 것을 즉각 알게 되리라 생각한다. 그 주제는 큰 투쟁을 드러내 보여 주는 것이다. 감사하게도 요한계시록의 궁극적 목적은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의 최후 승리를 보여주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이 승리가 각 부분에 모두 나타나 있다. 승리를 위해 마지막까지 기다리라고 요구하지도 않는다. 그 책은 우리에게 “그렇다. 이 일이 너희에게 일어날 것이지만 문제 없다. 주님이 너희와 함께 하시고 너희는 승리할 것이다”라고 말해 준다. 요한계시록의 목적은 우리의 것임이 분명한 그 승리의 영광을 드러내 보여 주고, 그 때까지 세상은 우리를 매우 잔인하게 다룰 수도 있고 심지어 우리를 죽이기까지 할 수도 있지만 결코 우리를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지 못한다는 확신을 주는 것이다.
요한계시록은 모든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을 위한 실제적 교훈을 담고 있다
계시록은 사도바울이 로마서 8장에서 말한 것과 똑같은 내용을 특유의 회화적이고 극적인 방식으로 말해주는 책이다. 그것은 성경 전체에서 발견되는 메시지이다. 그러므로 계시록은 더 이상 성도들이 갑자기 휴거된 후 지상에 남아 있을 일부 사람들만을 위한 책이 아니다! 또한 정치적 사건들에 대해 그럴듯하게 설명할 수 있게 해주는 때와 시기와 날짜들에 대한 일종의 직소 퍼즐이 아니다. 이 책은 모든 시대 교회의 그리스도인들에게 말해 왔다. 그들 모두 이러한 일을 겪어야 했기 때문이다. 그렇게 해서 이 책은 살아 있고, 생생하며, 영적인 책이 된다. 이 책은 여러분의 마음과 여러분의 경험에 말하는, 그리고 여러분이 하루하루를 살아가도록 돕는 영적인 책이다. 이 책은 위로만이 아니라 경고와 교훈도 담고 있다. 그리하여 이 책은 성경 전체에서 가장 실제적이고 매일매일 꼭 필요한 책중 하나가 된다.
3. 1-3장의 내용 분석
1) 일곱 교회- 초림부터 재림까지의 모든 교회의 상태에 대한 묘사
여기에 교회 가운데 계신 주 예수 그리스도, 그의 백성과 함께 하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묘사되어 있다. 일곱 교회는 당시에 실제로 존재했던 일곱 개의 특정한 교회인가? 아니면 일부 사람들이 주장하듯 여러 시대와 시기의 교회의 일반적 상태를 묘사한 것인가? 둘 다 아니라고 말씀드리고 싶다. 일곱은 완전수이므로, 여기에는 초림부터 재림까지 기독교 교회의 전체 상태에 대한 기사가 나와 있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교회사 전체를 읽어 보면, 지상의 보편적 교회 안에서 일곱 교회들에 보낸 편지의 묘사와 일치하는 교회들과 그리스도인들의 상태를 발견하게 된다. 라오디게아는 우리 주님이 오시기 전 끝 무렵에 있는 교회의 상태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종교개혁이 있기 전에도 더할 나위 없이 라오디게아 같은 교회가 있었으며, 그 이후 개신교 교회도 여러 차례 라오디게아 교회의 모습을 보여 줬다. 이백 년 전 복음주의적 각성이 있기 전의 영국 교회도 전형적인 라오디게아 교회였다. 이제야 교회가 라오디게아의 상태로 들어가고 있다고 주장하는 것은 터무니 없는 말이다. 에베소 교와 같은 교회도 현재 존재한다. 서머나 교회 같은 교회도 존재하며 나머지 교회들도 마찬가지이다. 계시록 1장부터 3장까지에 나오는 모든 교회는 언제나 존재한다. 한 걸음 더 나아가 오늘날의 어떤 모임이든 그 안에는 일곱 교회에 대한 묘사에 해당하는 사람들이 존재한다고 확신한다. 그렇기 때문에 일곱 교회를 향한 편지는 언제나 새롭게 느껴진다. 그것이 첫 번째 부분의 핵심이다.
4. 4-7장의 내용 분석
1) 역사의 주인이신 주님
4장과 5장에는 하늘의 위대하고 영광스러운 장면이 나오며, 하나님의 영광과 힘과 엄위하심과 위대하심과 거룩하심을 희미하게나마 보게 된다. 그 다음 세계 역사에 있어서 중요한 질문이 제기된다. 봉인된 책이 있는데 그 인을 제거할 만큼 강한 자가 아무도 없다는 것이다. 울기 시작한 요한에게 천사가 “유대 지파의 사자 다윗의 뿌리가 이겼으니”(5:5)라고 말한다. “어린 양이 서 있는데 일찍이 죽임을 당한 것 같더라”(6절). 그렇다. 그 분은 십자가에 달리셨다가 부활하신 주님, 승리하신 주님, 영원하고 위대한 왕이신 주님이시다.
5장은 우리 주님이 역사의 주님이시라고 말한다. 주님이 역사를 주관하신다. 요한계시록은 우리 주님이 보좌에 계시며, 그분이 주인이시며, 모든 원수들이 그의 발등상 되기까지 다스리고 계신다는 것을 상기시킨다.
2) 일곱 인의 환상
6장에서 요한은 우리를 인을 떼는 장면으로 인도한다.
첫째 인-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
활을 가지고 흰 말을 탄 사람을 보게 된다. 19장에서 비슷하게 묘사된 바로 그 인물이다. 그분은 주 에수 그리스도 자신이시다. 우리 주님이 말을 탄 자이며 그 때문에 그분의 말은 흰색이다. 그분은 복음을 시작하셨으며 자기의 말씀을 보내신다.
둘째 인- 핍박 받는 그리스도인
붉은 말이며 거기 탄 자는 “큰” 칼을 받는다(4절). 붉은 말은 그리스도인들이 그리스도인이라는 이유로 핍박을 받고, 심지어 죽임 당하기까지 하는 것에 대한 묘사이다. 여기서 칼이라는 헬라어 단어는 학살이라는 개념을 전달한다. 그것은 개인적이고 직접적인 공격에 사용되는 짧고 넓은 칼이다. 그것은 큰 전쟁이 아니라 때로 죽음에 이르기까지 하는 성도들의 핍박을 상징한다. 붉은 말을 탄 자가 흰 말을 탄 자의 뒤를 따른다. 그것이 순서이다. 말씀이 전해지고, 이어서 반대가 온다.
셋째 인- 그리스도인이 겪는 가난의 고통
밀과 포도주와 감람유가 있지만 오직 부자들만 그것을 살 여유가 있다. 기독교는 노예들과 가난한 사람들 가운데서 시작되었으며, 어려움이 일어났을 때 그들은 포도주와 기름을 살 돈이 없었다. 그러므로 여기에서 시사하는 모습은 결핍과 빈곤이며, 교회의 오랜 역사를 읽어 보면 그리스도인들이 종종 가난을 겪어야 했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넷째 인- 전쟁
때로는 그리스도인들이 연루된 신앙의 대충돌 즉 종교 전쟁이다. 6장에 나오는 장면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제자들, 주님이 보내신 말씀을 받은 사람들의 고난을 묘사한다.
다섯째인- 순교 당한 성도들의 외침
어떤 영혼들이 제단 밑에서 “주여 어느 때까지 하시려 하나이까?”(10절)라고 부르짖는 모습이 나온다. 자신들의 믿음으로 인해 순교를 당한 그리스도인들이 외친다.
여섯째 인- 대적 자들에게 임하는 심판
그리스도와 그의 백성에게 대적하는 권세들에게 임하는 장엄하고 극적인 심판이 묘사되어 있다. 해가 검은 털로 짠 상복같이 검어지고-예언서에서 심판을 묘사할 때 종종 사용하는 어휘이다- 달은 피같이 되며, 하늘의 별들이 떨어진다. 이것은 하늘이 종이 축이 말리는 것같이 떠나가고 각 산과 섬이 제자리에서 옮기우는 엄청난 대격변의 심판을 극적으로 묘사하는 것이다. 이어지는 말씀이다. “땅의 임금들과 왕족들과 장군들과 부자들과 강한 자들과 모든 종과 자유인이 굴과 산들의 바위 틈에 숨어 산과 바위에게 말하되, 우리 위에 떨어져 우리를 가리라” 누구에게서 가리라는 말인가? 놀라운 대답이 이어진다. “보좌에 앉으신 이의 얼굴에서와 어린 양의 진노에서 우리를 가리라 그들의 진노의 큰 날이 이르렀으니 누가 능히 서리요“(계6:15-17).
3) 인침 받은 하나님의 백성
계 7:1-3, 이 일 후에 내가 네 천사가 땅 네 모퉁이에 선 것을 보니 땅의 사방의 바람을 붙잡아 바람으로 하여금 땅에나 바다에나 각종 나무에 불지 못하게 하더라 또 보매 다른 천사가 살아 계신 하나님의 인을 가지고 해 돋는 데로부터 올라와서 땅과 바다를 해롭게 할 권세를 얻은 네 천사를 향하여 큰 소리로 외쳐 가로되 우리가 우리 하나님의 종들의 이마에 인치기까지 땅이나 바다나 나무나 해하지 말라 하더라
이 마지막 심판이 임하기 전에 모든 그리스도인의 머리에 인이 쳐지고 하나님의 백성은 안전하게 지켜질 것이다. 다음 절에 , “내가 인 맞은 자의 수를 들으니 이스라엘 자손의 각
지파 중에서 인 맞은 자들이 십 사만 사천이니”라고 말한다. 이들은 이스라엘 사람들이 아니다. 9절을 읽어보라.
“이 일 후에 내가 보니 각 나라와 족속과 백성과 방언에서 아무라도 능히 셀 수 없는 큰 무리가 흰 옷을 입고 손에 종려 가지를 들고 보좌 앞과 어린 양 앞에 서서”
그러므로 4절에 나오는 숫자는 상징적인 숫자이다. 그것이 144,000명의 유대인을 의미한다고 주장하는 것은 정말로 우스꽝스러운 일이다.
144,000명은 구약과 신약의 모든 성도들
성경에서 상징적 숫자에 관례적으로 부여되는 의미를 살펴 보자. 먼저 숫자 3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나타낸다. 네 짐승의 경우 등장하는 숫자 4는 온 땅, 인류 전체를 나타낸다. 삼과 사를 곱하여 얻어지는 열둘은 온 세상에 관심을 가지시는 성부, 성자, 성령 하나님을 나타낸다. 삼위 하나님은 옛 세상과 새 세상에 관심을 가지셨다. 구약에는 열두 지파가 있으며, 신약에는 열두 사도가 있다. 열둘에 열둘을 곱하면 144이다. 또한 성경에서 10은 언제나 완전의 수이다. 계시록을 연구할 때, 이 숫자를 유의해서 살펴보면 언제나 전체, 완성을 나타낸다는 것을 알게 된다. 그래서 10의 세 제곱인 1,000은 절대적인 완전함을 나타낸다. 그러므로 144,000은 모든 것의 최고점이라고 볼 수 있다. 그것은 복되신 성삼위일체의 구원사역, 즉 구약 시대와 신약 시대의 성도들이 모두 함께 모인 온전함과 완전함을 의미한다.
- 로이드 존스, 교리강좌 3권, 17장 구속받은 자들의 고난과 안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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