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신앙

성경의 완전성과 충족성/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해설/로버트 쇼

강대식 2014. 4. 8. 06:27

 

1장 성경, 6항

 

“하나님의 영광, 인간의 구원, 믿음, 생명에 필요한 모든 것에 관한 하나님의 온전한 뜻은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되어 나타나거나 옳고도 모순 없는 논리를 통해 성경에서 추론할 수 있다. 따라서 성령의 새로운 계시든, 인간의 전통이든 아무 때라도 성경에 무엇을 더 보태서는 안 된다(딤후2:15-17, 갈1:8-9, 살후2:2). 물론 우리는 말씀에 계시된 진리를 이해해 구원에 이르려면 성령의 내적 조명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을 인정할 뿐 아니라(요6:45, 고전2:9-12)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교회의 정치에 관해서는 인간의 행위와 사회에서 공통적으로 발견되는 사정이 있을 수 있고, 또 그런 사정이 있을 때는 성경의 일반 법칙에 따라 본성의 빛과 기독교적인 신중함을 통해 해결해 나가야 한다는 것을 인정한다(고전11:13-14,14:26,40).”

 

- 7항

 

“성경에 있는 모든 진리가 그 자체로 다 명백하거나 모두에게 다 똑같이 분명한 것은 아니다(벧후3:16), 그러나 구원을 위해 꼭 알고, 믿고, 지켜야 할 진리는 성경 곳곳에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기 때문에 유식한 자들만이 아니라 무지한 자들까지도 일상적인 수단을 적절하게 사용한다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시119:105,130).”

 

해설

 

이 조항들은 성경의 완전성과 충족성을 다룬다.

 

1. 6항은 성경의 완전성과 충족성을 언급하면서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와 교회의 정치에 관해 성경에 분명한 지시가 기록되어 나타나지 않은 경우에는 성경의 일반 법칙에 따라 본성의 빛과 기독교적인 신중함을 통해 해결해 나가야 한다고 말한다. 즉 그런 경우에는 “모든 것을 품위 있게 하고 질서 있게 하라”(고전14:40)는 사도의 규칙을 따르면 된다.

 

그러나 이 일반 법칙은 하나님께 드리는 예배를 특별하게 돋보이고자 인간이 고안한 의식이나 형식을 교회에 도입하는 것을 용납하지는 않는다. ‘편의에 따라 적절하게 행동하라’라는 이 법칙은 교회의 예배를 좀 더 매혹적으로 보이게 만들려는 행위, 곧 의식과 형식을 바꾸어 불신자들의 관심을 끄는 행위를 정당화하지는 않는다.

 

알렉산더, “‘편의에 따라 적절하게 행동하라’라는 규칙을 너무나 자유롭게 적용한 것은 영감이 중단된 이후로 교회가 처음 저질렀던 가장 큰 실수 가운데 하나다. 교회는 이 규칙을 남용하게 될 것을 예견하지 못했다. 교부들은 의식 자체에는 아무런 해가 없다고 생각했다. 아마도 새로운 회심자들은 오랜 관습으로 인해 의식에 애착을 가졌을 것이다. 결국 그런 사정을 고려한 결과, 처음에는 의식에 구애 받지 않고 단순하게 행동했던 교회가 이상하게 변질되기 시작했다. 희고 깨끗한 옷 대신에 휘황찬란한 장식과 다채로운 색상을 지닌 화려한 예복이 등장했다. 새로운 의식을 고안하는 관습은 그 후로 계속 발전해 교회의 예전이 레위기의 율법에 규정된 의식처럼 번거롭기 짝이 없게 변했다. 지금 교회의 축일에 로마 가톨릭교회의 예배에 참석한 사람 가운데 그 예배가 신약성경의 종교와 관련이 있다고 생각할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성경의 완전성을 주장한다고 해서 그 말을 신앙에 관한 모든 조항이 성경에 온전히 진술되어 나타난다는 뜻으로 이해하면 곤란하다. 이 말은 성경의 진리로부터 올바로 추론해 낸 결론들이 성경에 명확하게 기록된 하나님의 계시만큼이나 확실하다는 뜻이다.

 

옳고도 모순 없는 논리를 통해 성경에서 추론한 결론을 믿음과 실천의 규칙으로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은 주님이 사두개인들 앞에서 부활의 교리를 증명하신 사례(마22:31-32)와 바울이 유대인들과 변론하는 과정에서 구약성경을 토대로 나사렛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시라는 사실을 증명한 사례(행17:2-3)를 통해 분명하게 입증된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 교훈과 책망과 바르게 함과 의로 교육하기에 유익”(딤후3:16)하다. 그러나 모순 없는 논리를 통한 추론을 시도하지 않으면 그런 목적을 모두 이룰 수 없다. 옳고 건전한 추론은 성경 말씀의 의미를 온전하게 살려 낸다. 우리에게는 이성의 능력과 더불어 성경을 연구하라는 명령이 주어졌기 때문에 명확한 말로 표현된 진리로부터 결론을 이끌어 낼 수 있다.

 

성경의 완전성은 계시된 말씀이나 모순 없는 논리로 추론한 결과, 또는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필요한 모든 것과 관련된 그분의 뜻이 온전하게 계시되었음을 의미한다. 성경은 완전하며, 필요한 모든 목적을 충족시킨다(시19:8-9). 성경은 “하나님의 사람으로 온전하게”(딤후3:17) 하기에 충분하고, 신자들에게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에 이르는 지혜”(딤후3:15)를 허락한다. 성경은 완전하기 때문에 성경의 저자이신 하나님은 거기에 무엇을 보태거나 빼는 행위를 금지하셨다(신4:2, 계22:18-19).

 

인간의 전통도 하나님의 말씀에 덧붙여서는 안 된다. 세상에 오신 그리스도께서는 유대인들이 전통을 지키는 것을 믿음의 행위로 받아들일 만큼 크게 타락했다는 사실을 발견하셨다. 로마 가톨릭교회의 예배와 교리도 그와 똑같은 식으로 부패되었다. 사실 ‘사도적 전통’이라고 불리는 것들 가운데는 사도 시대 이후에 시작된 것이 대부분을 차지한다. 기록되지 않은 전통을 성경에 덧붙인다면 인간의 상상에서 비롯하는 변질과 부패를 부추겨 하나님의 율법을 공허하게 만드는 사태가 빚어질 것이 불을 보듯 뻔하다. 주님이 유대인들의 전통을 엄히 단죄하셨듯이 우리도 로마 가톨릭교회가 주장하는 전통을 거부해야 마땅하다.

 

2. 성경은 구원에 필요한 모든 것을 명확하고 분명하게 진술한다. 성경에 계시된 교리 가운데는 삼위일체, 성자의 영원한 발생, 성육신과 같은 인간의 이해력을 뛰어넘은 교리들이 존재한다. 그런 교리들은 우리가 이해할 수 없는 신비이지만, 성경은 그런 교리를 명확하게 가르친다. 따라서 우리는 성경의 증언에 따라 그런 교리들을 받아들여야 한다. 아울러 성경에는 불확실한 내용이나 이해하기 어려운 내용이 존재한다. 그러나 그런 불확실한 내용은 우리의 구원과 크게 관계없는 역사나 예언에 주로 국한된다.

 

성경에는 그것을 알지 못해도 영혼의 구원에 아무런 영향을 미치지 않는 진리(심지어는 뛰어난 지성과 학식을 소유한 사람들조차 이해하기 어렵고 난해한 진리)가 있다. 그러나 구원을 위해 꼭 알고, 믿고, 지켜야 할 모든 진리는 성경 곳곳에 명확하게 제시되어 있다. 진지한 태도로 일상적인 수단을 적절하게 사용하는 사람은 그런 진리를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성경의 저자가 하나님이시라는 사실 자체가 이 점을 분명히 한다. 하나님이 사람들에게 성경을 믿음과 실천의 규칙으로 허락하셨다면 그들이 이해할 수 있도록 배려하셨을 것이 분명하다. 성경은 여러 곳에서 말씀을 읽고 배우라고 명령한다. 이런 명령은 성경이 분명하고 이해할 수 있는 내용으로 이루어져 있다는 것을 암시한다.

 

또한 성경은 말씀을 상고하고, 기록된 말씀으로 스스로에게 전달된 교리를 시험하라고 명령한다(행17:11). 평범한 신자들이 성경을 이해할 수 없고, 교회가 그 의미를 해석해 전달하는 것이 필요하다면 그들은 확실한 믿음의 근거를 갖지 못할 것이다. 그럴 경우에는 신자들의 믿음이 인간의 증언에 의존할 것이 분명하다. 인간의 증언은 오류가 있기 때문에 확실한 믿음의 근거가 될 수 없다.

 

아울러 우리는 성경의 주관적인 명료성, 곧 성령의 내적 조명이 구원을 위해 성경에 계시된 진리를 이해하는 데 필요하다는 사실을 인정한다. 그 이유는 인간의 이해력이 타락과 부패로 인해 어두워지고 왜곡되었기 때문이다(고전2:14). 성령의 조명이 불필요하다면 학식이 뛰어난 사람들이 성경을 가장 잘 알 것이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마11:25). 하나님은 성령의 특별한 조명을 통해 자신에 관한 일을 이해할 수 있게 하겠다고 약속하셨고, 성도들은 그 약속을 믿고 기도할 수 있다(요14:26, 시118:18).

 

- 로버트 쇼,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해설』, pp 61-6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