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호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부흥과개혁사, 2009, 350면, 16,000원
호튼은 웨스트민스터 신학교와 바이올라 대학교를 마치고 프랑스에 있는 국제인권문제연구소와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교에서 연구활동을 했으며, 영국 옥스퍼드 대학교의 위크리프홀에서 박사학위를 취득하였다. 그의 저서로는 ‘복음이란 무엇인가’, ‘기독교의 핵심’. ‘삶의 목적과 의미’, ‘세상의 포로 된 교회’ 등이 있다.
호튼의 책을 읽으며 느끼는 강한 인상은 그가 현대의 이사야 선지자가 아닌가 하는 생각이다. 개혁주의와 청교도의 확실한 입장에서 현대교회의 왜곡된 모습을 정확히 진단하고 다시금 종교개혁의 정신으로 신약의 복음으로 돌아올 것을 외치고 있다. 세례 요한의 모습도 오버랩 되는 21세기에 참으로 기대되는 선지자 목자이다. 그의 책들은 안심하고 다 구입해서 읽고 우리의 중심을 바로 잡고 세상과 교회를 복음으로 바로 보는 시각이 열리길 바란다.
- 윌리엄 윌몬(연합감리교회 감독)의 추천의 글에서
호튼은 지금 우리의 교회 현실을 “그리스도 없는 교회”라고 한다. 호튼은 우리가 기독교 역사 전체를 들여다보아도 결코 떠오르지 않는 괴물을 만들었노라고 일갈한다. 십자가에 달린 그리스도를 우물쩍거리며 설교를 하지만, 찔림을 받는 사람은 거의 없다. 한 때 화염과 연기를 발하시던 하나님은 갑자기 상냥해지셨다. 복음에는 거치는 요소가 하나도 없다. 우리 입맛에 맞는 신을 하나 고안해 냈다. 현대적인 기독교가 바로 그 결과물이다.
이 책은 거칠다. 그러나 역작이다. 거리낄 것 없이 치고 나가고, 정통한 개혁 기독교에 제대로 뿌리를 내리고 있다. 우리의 오냐오냐 하는 교회는 이 책에서 도마 위에 올라 날카로운 신학적인 비판을 당한다. 우리가 현재 앓고 있는 신학적 질병의 근원이 노출되고, 하나님보다 우리 자신을 더 애지중지하기 시작할 때 어떤 전복이 일어나는지 보게 된다.
그는 심리요법적이고 공리적인 이신론을 들취내서 못 박아 버린다. 하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물리쳐 버린다. 으레 말하는 복음주의란 바람 빠지고, 문화적으로 절충된 자유주의의 최신판에 지나지 않는다. 책을 읽다가 나도 찔림을 받았다. 로버트 슐러의 내용 없는 교회론이 우리 모두에게서 발견되기 때문이다. 내 설교도 조엘 오스틴의 설교에 비해 약간 덜 우스꽝스럽고 약간 덜 물 탄 것에 불과하다. 내 탓이다. 내 탓이다.
- 백금산목사의 추천의 글에서
문: 사탄이 한 도시를 완전히 장악하면 어떤 모습일까?
답: 교회는 매주일 문전성시를 이룰 것이다.
그러나 교회에서는 그리스도가 선포되지 않을 것이다.
16세기 종교개혁자 마르틴 루터가 그리스도 없는 중세 교회를 ‘바벨론의 포로 된 교회’라 불렀듯이 호튼은 ‘그리스도 없는 미국 기독교’를 ‘미국 문화의 포로 된 교회’로 생각한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의 가장 중요한 특징은 복음이 없다는 것이다.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고, 결국 각기 독특한 복음 없는 율법을 주장한다. 자력 구원을 가정한다.
복음과 율법은 성경 전체를 이해하는 열쇠요, 그리스도로 충만한 교회를 형성하는 기초다. 이 책은 복음과 율법의 참된 의미를 깨닫고 복음의 중심인 그리스도로 충만한 기독교가 되는 불씨가 되어 줄 것이다.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라는 질병의 증상
조지 바나의 말이다. “점점 더 많은 미국인들이 하나님은 인간을 기쁘게 하기 위해 존재한다고 믿고 있다. 하나님은 하늘에 거하지만 철저하게 우리의 편의와 유익을 위해서 존재한다. 우리가 너무 영악해서 드러내 놓고는 말하지 않지만, 진정 힘은 위를 바라봄으로써가 아니라 우리 안으로 돌아섬으로써 얻어진다는 개념으로 살고 있다.” “대부분의 미국인들은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천사들에 대한 한 최소한의 지적인 동의를 보낸다. 이들은 성경이 중요한 이야기들과 교훈으로 가득 찬 좋은 책이라고 믿는다. 또한 종교는 자신들의 삶에서 소중하다고도 믿는다. 하지만 바로 이런 사람들이, 더구나 스스로 신앙을 고백하는 기독교인이라고 하는 사람들조차도, 인간은 선하게 태어났으며, 우리의 일차적인 목적은 가능한 한 삶을 즐기는 것이라고 믿는다.”
82%의 미국인(이 비율의 대부분은 복음주의자들이 차지하고 있다)은, “하나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도우신다”는 벤저민 프랭클린의 격언이 성경의 인용이라고 믿는다. 많은 수의 사람들이, “모든 사람은 같은 신 혹은 영에게 기도드린다. 이 영적 존재에 어떤 이름을 갖다 붙이든 상관없다.” 나아가 “어떤 사람이 한 평생 착하게 살아가는 동안 다른 사람들을 위해 선한 일을 많이 하면, 하늘나라에 들어갈 수 있다”고 믿는다. 조지 부시 대통령이 이렇게 말한 것은 전혀 놀랄 일이 아닌 것이다. “무슬림이든, 기독교인이든, 아니면 다른 종교인이든 전 세계인이 같은 신에게 기도한다고 저는 믿습니다. 저는 이렇게 믿습니다.”
바나는 여러 보고서를 인용한 후에 아래와 같이 결론지었다.
“미국의 영성은 명목상으로만 기독교적이다. --- 우리는 지식보다는 경험을 갈망한다. 절대적인 것보다는 선택의 가능성을 선호한다. 진리보다는 기호에 기울어진다. 성장보다는 안일함을 찾는다. 신앙도 우리의 조건에 맞아야지 그렇지 않으면 거부한다. 우리는 정의의 최종적인 결정권자. 경험과 운명의 궁극적인 통치자로 우리 자신을 옥좌에 앉혔다. 우리는 새로운 천년에 등장한 바리새인들이다.”
바나의 연구 결과는 대부분의 미국인들이 다른 무엇보다도 시간과 효율을 중시함을 보여 준다. 그 결과 장기적인 헌신을 기피하고, 제도, 사람 그리고 권위에 대해 회의적일 정도로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독립성과 개별성’을 확보하려고 한다. 무엇보다도 사람들의 귀에 하루도 빼놓지 않고, “당신은 독특합니다.”라는 말이 들린다. 그래서 다른 사람의 기대에 닿으려고 애쓸 필요가 없다. “당신의 감정이 당신을 이끈다는 걸 믿으세요. 절대적인 원리들을 의지하면 비현실적인 제한만 떠안게 됩니다. 오직 당신만이 그 어떤 순간, 어떤 환경에서 당신에게 무엇이 옳은지 혹은 최선인지 알 수 있어요” 여기가 압권이다. 그리고 이런 말로 마무리를 장식한다. “목표를 설정하고 달성하세요. -- 즐기세요 --- 건강을 유지하세요. 당신 인생의 목적을 발견하고 힘차게 달려 나가세요.” 바나의 여론 조사에 따르면 이것들이 오늘날 미국의 성인들이 가지고 있는 중요한 가치관이다. 그러나 바나는 자신이 내놓은 진단과는 달리 병증을 치료하기보다는 악화시키는 것처럼 보이는 처방을 내놓는다.
로버트 슐러 목사는 인터뷰에서 “자존심: 새로운 종교개혁”이라는 말을 거듭 입에 올렸다. 슐러는 교회가 하나님 중심보다는 인간을 중심에 놀려 놓는 일이 시급하다고 말한다. “칼빈이나 루터가 신 중심의 사고를 한 것은 적절하다. 하지만 지금은 저울추를 정반대로 놓아야 할 때다. 인간의 필요에 대해 접근해야 하는 것이다.” 사실 “고전적인 신학은 신학이 ‘신 중심’이고 ‘인간 중심’이어서는 안 된다고 고집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죄는 “나 자신 혹은 다른 인간 존재에게서 자존심을 박탈하는 어떤 행위 혹은 생각”으로 규정할 수 있다. “‘지옥’이란 무엇인가? 지옥은 하나님으로부터 분리되면 자연스럽게 나오는 자존심의 상실이다. 자존심이란 우리 영혼의 자기 존중감의 궁극적인, 결코 마르지 않는 원천이다. -- 지옥에는 자존심을 잃은 사람이 들어간다.” “십자가는 자아로 향하는 길을 신성하게 닦아 준다.”
모순이다. 메닝거 같은 일반 심리학자는 죄를 주제로 책을 쓰고, 많은 기독교 지도자들은 죄를 역기능으로, 구원을 회복으로 바꿔치기 하고 있다. 죄란 우리 스스로가 빠져나올 수 없는 하나의 조건인데도 말이다. 필립 리프는 베스터 셀러가 된 저서 ‘심리요법의 개가’에서 대중 심리학이 종교를 포함해 우리의 세계관 전체를 어떻게 바꾸어 놓았는지를 밝히고 있다. “기독교에서 말하는 인간은 구원받기 위해서 태어난다.” 그는 이어 말한다. “심리학에서 말하는 인간은 즐겁게 되기 위해서 태어난다.”
로버트 슐러가 미국 개혁교회에서 안수를 받았다는 것은 역설이다. 그는 사람들에게 죄와 칭의와 같은 개념들을 수치와 자존심 등의 단어로 바꾸라고 선전한다. 세속주의를 연구하는 베어리 커즈먼은 말한다. “세속적인 사람들은 여전히 죄, 심판 그리고 형벌이 있다고 믿고 있다.” 그러나 세속주의는 하나님이 세워 놓은 어떤 보편적인 기준도 무시하고, 이 하나님 앞에서 도덕적으로 별 허물이 없는 양 군다. 그러나 사람들은 실수하고 서로에게 상처를 입힌다. “그러나 사람들에게 죄가 있다면, 형벌은 물론 내세가 아니라 현세에 내려져야 한다. 세속적인 사람들은 지옥에서 불에 붙어 신음하는 것이 아니라, 공중의 견해라는 재판정에서 불에 타고 있다.”
신앙을 포함해 자신의 인생을 심리요법의 관점에서 접근하는 사람들은 풀어야 할 주요 문제가 하나님과의 화평이 아니라 인간의 마음의 평화를 내세움으로써 전체 복음을 근본적으로 재정의한다. 여기서 끝나지 않는다. 심리요법의 세계관은 심지어 여전히 같은 용어들을 사용하고 있다 할지라도 복음의 용어들을 크게 왜곡한다. 기분 좋은 것이 좋은 사람이 되는 것보다 중요하다. 아니 자아에 대한 외부로부터의 규범적인 판단은 아예 들어설 자리가 없다.
심리요법에서 “죄인인 내가 어떻게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올바른 사람이 되는가?”는 완전히 인식 밖의 문제이다. 원천, 재판관 그리고 인생의 목표로 자아가 등극한 이후로도, 복음을 부인할 필요는 없다. 그러나 스스로의 유익을 위해서 조심해야 한다. 자기실현, 자기완성 그리고 자기계발은 오래 된 이단을 현대적으로 변형시켜 놓은 것에 불과하다. 바울은 이 이단을 공로를 통해 얻는 의라고 이름 붙였다. (pp 49-61)
도덕적이고, 심리요법적인 이신론
2001년에서 2005년 사이에 노스 캐롤라이나 대학(현재의 노트르담)의 사회학자인 크리스천 스미스는 오늘날 미국의 십대들의 영성에 대한 놀라운 연구를 수행하기 위해 연구팀을 이끌었다. 스미스는 광범위한 인터뷰를 통해 미국 젊은이들의 종교 혹은 영성의 두드러진 형태는 “도덕적이고, 심리요법적인 이신론” 이라는 결론올 내렸다.
어찌 보면 형태가 없는 이 영성을 규정하기란 쉽지 않다. 특히 그리고 다분히 역설적이게도 “22%의 십대 ‘유신론자들’이 하나님에게 매우 혹은 극단적일 정도로 친근감을 느낀다”고 대답했다는 점에서 그렇다.(그러나 그들이 믿는 하나님은 현실 세계에는 관여하지 않는다). 하나님은 분명히 개인의 은밀한 내면세계에만 관여한다.
스미스는복음주의 교회에서 자라 신앙이 “매우중요하다”며, 자신의 삶에서 큰 차이를 만들어 낸다고 말하는 대부분의 십대들이 신앙의 실제적인 내용에 대해서는 “기겁하리만치 무지”함을 발견했다. “십대들을 인터뷰 하면서, 우리는 미국에서 종교적인 사회화의 동인들, 즉 부모, 목회자 그리고 교사들이 상당수 젊은이들에게 대단히 효과있고 성공적이라는 증거를 그다지 발견하지 못했다,” 최소한 성경과 기본적인 기독교 교리에 대하여 남아 있는 지식이나마 가지고 있던 전 세대들에 비해서, 자신의 신조를 진술, 반성 혹은 검증할 진지한 능력이 거의 없고 그것을 실생활과 연결시키기에는 한참 부족해 보였다는 것이다. 많은 젊은이들이 또래 젊은이 집단에서 친구들에 둘러싸여 붕 떠서 사는 듯 보였다. 그들의 흥분한 모습과 집단주의 때문에 특히 대학에서의 영향력은 미미했다.
스미스는 “도덕적이고, 심리요법적인 이신론”이 아래와 같은 잠재적인 신학을 표현하고 있는 것으로 규정한다.
1.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셨다.
2. 하나님은 사람들이 착하고, 멋지고, 서로 공평하기를 원하신다.
이것은 성경을 비롯한 거의 모든 세계 종교의 가르침이다.
3. 인생의 중심 되는 목표는 행복이고, 자신에 대해 뿌듯하게 느끼는 것이다.
4. 하나님은 문제를 해결하는 데 필요할 때 외에는 사람의 삶에 굳이 간섭하지 않는다.
5. 착한 사람은 죽어서 천국에 간다.
그들이 가지고 있는 전제적인 신학에서 “종교적이라는 것은 멋지게 되는 것이지, 용서에 대한 것은 아니다 --- 보수적인 개신교 십대들의 상당 비율이 은혜와 칭의 같은 복음의 기초 개념조차 파악하지 못하고 있는 듯 보이는 것은 차마 믿기 힘들다 --- 이것은 교파와 교단을 망라한 현상이다.” 심지어 교회에 적극적인 루터교 젊은이들조차 은혜 혹은 칭의라는 용어를 정의하지 못했고, 교회에서 믿는다고 내세우는 바와 한 주 한 주 그들이 실생활에서 실제로 전해지는 바 사이에는 엄청난 격차가 드러났다고 그는 말한다.
교회가 이런 교리를 믿는다며 온갖 말을 해도, 그 사역을 맡은 자들이 제시하는 상충하는 해답을 보면, 자력 구원이라는 도덕 종교는 타락한 피조 세계의 기본값이라는 내 주장에 힘이 실린다. 교리에서 벗어난 가르침을 여봐란듯이 대놓고 받는 것은 아니지만, 우리는 늘 구원하시는 하나님에 대한 메시지를 자기 계발의 메시지로 바꿔 놓을 것이다.
우리는 여기서 영지주의적인 영성(개별적이고, 구체성을 결여하고 있고, 은밀한)과 “도덕적이고, 심리요법적인 이신론”이 합류하는 모습을 본다. 기독교적인 세계관에 의하면 죄의 고백은 옳고 그름에 대한 것이다. 실제적인 죄는 우리의 일상에 살갑게 관여하시는 그런 하나 님에 의해서 용서받는다. 심리요법의 세계관에 의하면, 하나님이 용서해야 할 죄와 죄책은 없고, 오직 자신 혹은 다른 인간 존재에 대한 기대만큼 살 수 없도록 막는 부담감과 죄책감이 있을 뿐이다.
달리 말해서, 기독교에서는 객관적인 죄책과 청의를 말하는 반면, 도덕주의적인 심리요법에서는 주관적인 죄책감과 단지 다른 누군가에게 이를 털어놓기만 하면 되는 카타르시스적인 해소만이 있을 뿐이다. 고백이 하나님에 대한 거슬림으로 인해 마음이 산산조각 나고 그분의 용서를 받는 문제가 아니라, 평균보다 더 나쁘지 않은 자신을 정당화하는 문제가 되었음을 보여준다.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하나님과의 개인적인 관계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하지만, 자신과의 관계를 제외하고는 도무지 관계가 많아 보이지는 않는다. “고백은 영혼에 좋다” 이 말은 일종의 심리요법이다. 예수님과 나의 인격적인 관계를 이리도 강조하는 것을 보면, 이것은 예수가 나의 분신(alter ego)이 되었다는 뜻일 수도 있다.
그러나 다윗은 시편 51편에서 완전히 다른 고백을 하고 있다. “내가 주께만 범죄하여 주의 목전에 악을 행하였사오니 --- 내가 죄악 중에서 출생하였음이여 어머니가 죄 중에서 나를 잉태하였나이다 --- 나를 주 앞에서 쫓아내지 마시며”(4-5,11절).
이 고백은 밧세바와 간통을 저지르고 그녀의 남편 우리아를 살해하고 난 후에 한 것이나, 죄를 그토록 추악하게 만드는 사실은 그것이 궁극적으로 하나님을 거슬러 저질러졌다는 데 있다. 우리가 고백을 이웃(도덕론) 혹은 우리의 내적 자아(심리치료)라는 수평선적 행동으로 축소해서는 안 되는 이유는 바로 하나님과의 이 수직적인 관계 때문이다. (pp 61-65)
펠라기우스주의(Pelagianism)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의 병증의 신학적인 명칭은 펠라기우스주의이다.
4세기에 살았던 영국 수도사 펠라기우스는 기독교 국가의 중심지인 로마에 도착해서 그 타락상을 보았을 때 경악했다. 아프리카 주교 아우구스티누스의 인간의 전적무능력과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강조가 문제의 뿌리라고 추측해서 펠라기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원죄가 문제의 뿌리라고 추측하면서 펠라기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은 원죄를 부인했다. 죄는 보편적인 인간의 인간의 조건이 아니라 우리 각자의 선택이다. 우리는 자유의지로 아담의 악한 사례를 따를 수도, 예수의 좋은 모범을 따를 수도 있다. 비록 펠라기우스주의는 교회(심지어 반 펠라기우스주의 형태를 취하고 있던)에 의해 공식적으로 정죄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상존하는 위협이었다. 결국 펠라기우스주의는 우리의 가장 자연스러운 신학이다.
착하고 악하고는 우리 자신의 능력에 달렸다-영원한 생명이냐 죽음이냐 역시-고 말하면서도 반 펠라기우스주의는 하나님 은혜의 어떤 도움이 필요하다고 믿었다 16세기 후반에 출현하여 칼빈주의를 배격한 네럴란드 신학자의 이름에서 유래한 아르미니우스(Arminiamism)는 펠라기우스주의자들이 가지고 있던 확신에서 한 걸음 이탈해서, 은혜의 필요를 인정했다. 그러나 아르미니우스주의는 여전히 구원이 하나님과 인간의 협력적인 노력이라고 주장 한다.
2차대각성 이후, 특히 찰스피니의 메시지와 방법론에서 드러나는 바와 같이 미국 개신교는 아르미니우스주의보다는 펠라기우스주의적이었다. 피니는 원죄를 부인하면서, 죄를 짓기로 선택하는 순간에만 죄인으로 떨어지고 타락한다고 주장한다. 십자가에서 그리스도가 하신 일은 우리의 빚을 청산할 수 없고, 단지 회개를 권유하는 도덕적 모범과 영향력으로 작용할 뿐이다. “만약 그가 우리를 대신 해서 율법에 순종했다면, 왜 구원에 필수적인 요소로서 우리 자신이 개인적인 순종을 해야 한다는 말인가?” 속죄는 “미덕을 권장하기 위한 자극제”일 뿐이다. “속죄가 빚의 실제적인 청산”이라는 견해를 거부하기 때문에, 피니는 이렇게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속죄 그 자체가 누구의 구원도 보장하지 않는다는 말은 사실이다.”
그리스도의 의를 전가함으로써 발생하는 칭의는 피니의 말에 의하면 “어리석을” 뿐 아니라, 개인의 거룩의 촉진을 저해한다. 신생은 하나님의 선물이 아니라 죄에서 순종으로 돌이키는 합리적인 선택의 결과이다. 기독교인은 선택하기만 하면 하나님께 완벽하게 순종할 수 있고, 나아가서 이런 선택만이 의롭다 하심올 받는 길이다. 사실 그는 이렇게 말한다. “온전하게 나타나는 순종은 청의의 조건이다”. “어느 정도든 죄가 있는 한” 사람은 의롭다 하심을 받을 수 없다. 피니는 종교개혁의 명제에 관련해서 이렇게 선언한다. “자발적으로 의롭다 하심도 받고 자발적으로 죄인도 된다”. 세상을 망쳐 놓은 모든 종류의 만인구원설보다 이 오류가 더 많은 영혼들을 살해했다고 보는 것이 내 견해이다. 왜냐하면 “기독교인은 죄를 지을 때마다 정죄를 받고 회개한 후 처음에 했던 일들을 해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멸망”하기 때문이다.
피니의 메시지는 분명히 도덕주의적이다. 이 복음 전도자는 자기 변혁을 만들어내는 부단한 위기 경험 등 여러 방법으로 회개를 끌어낼 수 있었다. 이것은 명백하게 심리요법적인 방향설정이다. 그를 비판하는 사람들이 관찰한 대로 이것은 하나님을 필요로 하는 것처럼 보이지 않는 하나의 종교 체계다. 구원과 도덕적인 개선은 복음 전도자와 회심자의 손에 전적으로 달려 있다. 이신론적인 함의도 명백하게 드러난다. 형식적으로는 복음을 주장하지만, 복음은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정당한 진노가 충족되었고 보상을 바라지 않은 특전이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값없이 부여되었다는 선언보다는, 개인적이고 공적인 삶(행위로 말미암는 구원)으로 격하된다. 피니의 가장 유명한 설교들 중 하나인 “죄인들은 마음을 바꿔야 한다” 의 제목에서 감지되듯이, 우리의 구원을 위한 하나님의 직접적이고, 인격적이고, 기적적인 개입은 불필요해 보인다.
연합감리교회감독인 윌리엄 윌몬은 “자력 구원은 우리가 행하는 설교 중 상당수의 목표다”라고 간파했다. 윌몬은 주류교단, 복음주의를 막론하고 이 시대 설교의 다수가, 회심을 우리 자신의 말과 성례를 통해서 일어나는 어떤 일인 양 전제하고 있다고 꼬집는다. “이 면에서 우리는 찰스 피니의 후예다”. 우리는 회심이 기적이 아니라 “옳은 것으로 공인된 방법을 썼을 때 나오는 순전히 철학적(다시 말해서 과학적)인 결과”라고 생각한다.
윌몬은 말한다. “안타깝다. 내가 아는 거의 모든 ‘전도’ 설교는 더 깊은 자기주관에 빠지도록 끌어들이려는 노력이다. 사람들을 꺼내려는 시도와는 한참 거리가 멀다.” 느끼든 못 느끼든, 우리의 실제 필요는 진리를 조직적으로 왜곡, 무시하는 것이다. 우리에게 “외부에서 오는 말씀이 필요한 까닭은 이것이다 --- 어떤 의미에서 우리는 복음을 발견하지 않는다. 복음이 우리를 발견한다. ‘너희가 나를 택한 것이 아니요 내가 너희를 택하여 세웠나니’(요 15:16)." “이 이야기는 유앙캘리온, 좋은 소식이다. 은혜에 대한 소식이기에 그렇다. 복음은 물 흐르듯 오지 않는다. 복음은 예수에게서 온다.”
미국 기독교에서 현저하게 나타나는 펠라기우스주의적 경향은 종교개혁에 역사적 뿌리를 둔 교회들에서조차 드러나고 있다. 크리스천 스미스와 제임스 헌터와 같은 종교사회학자들은, 루터파 교회와 개혁교회의 평신도들이 이와 똑같은 전제를 공유하고 있음을 우리에게 기억시킨다. 로버트 슐러도 그렇지만, 노만 빈센트필이 미국 개혁교회에서 안수 받은 목사였음을 눈여겨볼 필요가 있다. 더 나아가서 좀더 보수적인 장로교와 개혁교회들에서도 스미스가 지적한 도덕론적이고 심리요법적인 이신론에 딱맞아떨어지는 설교들을 들을 수 있었다. 시카고 대학에서 가르치는 주류교단의 신학자인 브라이언 게리쉬)는 위기의 본질을 이렇게 진술한다. “은혜에 대한 개혁주의자들의 증언이 16세기보다 현재 더 절박하게 필요하다. 지금은 개혁교회들에서도 펠라기우스주의가 버젓이 활개를 치고 있는 것처럼 보이는 실정이기 때문이다.” (pp 65-71)
현대 교회 설교가 보여 주는 세속주의적인 경향
우리 시대의 대중적인 기독교에서 감지되는 펠라기우스적인 경향, 즉 스미스가 “도덕론적이고 심리요법적인 이신론”이라 부른 경향성은 사회학자 마샤 위튼의 연구에 의해서도 뒷받침된다, 위튼은 「다 용서되었네: 미국 개신교의 세속적인 메시지」라는 저서에서 1986년에서 1988년까지 미국 장로교회와 남침례교단, 두 교단의 여러 설교자들이 행한 47편의 탕자 비유(눅15:11-32) 설교 본문을 분석한 연구 결과를 내놓는다.
자신을 기독교인이 아니라고 밝힌 위튼은 마태 수난곡과 새로 개척하는 교회의 전단이 대조가 된 이 일화를 면밀한 연구 끝에 도달한 결론과 수미상응하게 연결시키고 있다. 마태 수난곡이 진정한 믿음을 얻기 위한 고투뿐 아니라 하나님의 위엄, 거룩 그리고 자비로 가득 차 있다면, 새들백 교회 전단지는 제품을 소개하는 여느 광고지와 마찬가지로 “낙관적이고, 고통 따위는 없고, 시시콜콜할 정도로 일상적”이다. 오늘날 미국의 기독교는 “영적인 것과 심리학적인 것, 초월적인 것과 실용주의적인 것” 사이에서 좌충우돌하고 있다.
막스 베버의 유명한 “세속화 이론”에 의하면, 근대화의 상황에 놓인 종교는 여러 단계를 통과한다. 먼저, 종교는 사적 영역으로 후퇴한다. 은밀한 주관성이라는 무인도로 영역을 축소하는 것이다 “예수는 살아 계시다”와 같은 진술은 역사적 사실에 바탕을 둔 객관적이고 공적인 주장으로 더 이상 취급되지 않고, 사람의 개인적인 경험을 가리키는 말이 된다. “예수는 살아 계시다”는 유명 복음성가의 가사가 말해 준다. “그분이 살아 계신 걸 어떻게 아냐고요? 그분은 내 마음에 살아 계신답니다”. 판에 박힌 “예수는 주님이시다"는 말은 내가 예수를 내 주님과 구주로 삼기로 결정했다는 뜻이다.
사도들은 그들 스스로가 증인이 된 역사적 사건들을 증언한 반면에, 오늘날 복음주의 교회들에서 “간증해 주시지요"라는 말은 더도 덜도 없이 자신의 내면적인 경험과 도덕적인 변화에 대해 말해 달라는 뜻이다. 종교는 한번 사적 영역으로 후퇴하고 나면 상대화 과정을 밟는다. 더 이상 진리가 아니라 너의 진리다. 종교적인 신조들은 더 이상 공적인 사건에 대한 주장이 아니기 때문에, 그것들은 각 개인이 의미 있고 유용하며 그리고 변혁을 일으킨다고 인정하는 조건 아래서 정당화될 수 있다.
전근대기의 기독교인들 대부분이 거의 이단이라 간주했을 현상이 미국인들의 경험에서는 정통성의 전형이 될 수 있다. 그리고 유럽에서 전통적인 기독교(즉 교리적인) 신앙과 실천의 거부를 가져온 이 동일한 근대적 세속화의 과정이 미국에서는 꼬리를 물고 일어난 종교 부흥의 동력이 되었다. 그 결과, 종교적인 언설이 개인의 변혁과 웰빙을 위한 규칙, 절차, 기법 그리고 프로그램이라는 실용주의적 합리성으로 격하됐다. 철학자 윌리엄 제임스가 적시했듯이, 진리는 “경험적 조건 안에서 그것이 갖는 현찰 가치”로 검증된다. 그러나 아주 오래 전에, 이미 상대주의의 역사는 기독교의 주장을 실용주의적인 효율성으로 동화시켜서, 회심자의 숫자 뿐 아니라 돈의 액수로도 측정 가능한 무엇으로 만들어 놓았다.
기독교가 영원한 말씀을 통해 전달된 공적 진리에 대한 것이라면 사역과 복음 전도는 자신들의 돌봄을 받는 자들의 유익을 위해 그 진리를 연구하여 적용할 수 있는 교육 받은 지도자들에 의해 전개되어야 한다. 반면 기독교가 개인적인 경험으로 축소된다면, 지도자들은 가장 성공적인 기업가와 비범한 무대 행사의 기획자들이 될 것이다.
윌리엄 제임스가 하버드에서 실용주의적 유용성의 기세등등한 가치를 선언했다면, 피니와 그의 계승자들은 이미 미국 개신교에게 실용주의라는 세례를 그 즉시로 베풀었다. 효율성은 비즈네스에서와 마찬가지로 종교에서도 성공의 철칙이다. 그리고 복음주의자들은 그 이후로 주관적인 경험과 도덕적인 변화를 바탕으로 ‘사역’하는지 아닌지로 새로운 운동을 판단하게 됐다.
위튼의 연구는 이 해석을 지지한다. 첫째, 능력과 거룩함의 초월적인 하나님은 가벼운 친근함으로 전락한다. 둘째 종교가 심리요법적인 유용함이라는 개인적 영역으로 졸아들면, 죄와 구속은 객관적인 것이 아니라 주관적인 범주로 옮겨 간다. 그러면 그리스도는 하나님 앞에서 적의 혹은 죄책의 상태가 아니라 나쁜 기분을 해소하는 답이 된다.
더 이상 그리스도의 성육신, 삶, 죽음 그리고 부활 안에서 역사로 들어오신 하나님의 독특한 개입을 주장하는 순교자-증인-는 없으며, 우리는 예수와 우리의 개인적인 관계가 우리의 삶을 얼마나 개선하였는지 간증하는 만족스러운 소비자들이 되었다. 실용주의와 심리요법이 득세한 상황에서, “길이요 진리요 생명”(요14:6)이요 그를 떠나서는 구원이 없는, 예수를 논하는 것은 거의 의미가 없다.
성장하는 교회와 성장하는 기업은 실용주의적 효율성이라는 똑 같은 표준 절차를 따르고 있다. 위튼은 말한다. “이 담화는 극단으로 흘러 하나님 혹은 신앙, 기도 등을 슬쩍 끼워 가끔 언급해 줌으로써 ‘종교적’으로 보이게 했지만, 개인 만족을 위한 ‘스스로 해보세요’ 지침이 된다.” 위튼은 이런 과정의 결말로서 “종교의 가르침이 더 이상 이 세상에 사는 추종자들의 삶에 의미를 주지 못한다. 오히려 세상에서의 삶이 그들이 지닌 신조의 의미와 중요성 모두를 결정한다.”
위튼의 연구는 주류 장로교와 남침례교 설교에 차이가 거의 없었음을 폭로한다. “식민 미국의 칼빈주의적인 종교 관행의 뿌리”는, 인간이 “자신의 구원에 기여할 바가 없다는 견해는 그다지 설득력이 없다”는 견해를 내세움으로써, “자력주의, 민주주의 그리고 실용주의라는 인기 높은 이념들”에 의해 점점 갉아 먹혔다고 쓰고 있다.
설교 샘플들은 하나님을 전적으로 과도한 사랑을 보이는 연인으로 다루고 있다. 사실 사랑이 율법을 압도한다. 하나님은 어떤 공로, 의무 혹은 업적을 한쪽으로 치워 놓고, 탕자를 받아 주신다. 하나님은 결코 우리를 놀라게 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행동은 언제나 예측 가능하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우리를 질리게 하는 어떤 일도 하지 않는다. 그러므로 이런 설교들에 의하면 중재자가 필요하다는 어떤 조짐도 나타나지 않는다.
하나님의 사랑을 하나님의 거룩, 공의 그리고 공평과 연결해서는 안 된다. 만사형통이다. 화해의 유일한 길로서 그리스도의 자기희생에 대한 언급도 필요 없다. 하나님의 사랑은 법칙이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공평과 거룩을 뒤로 물러가게 한다. 여기 제시된 “복음”은 복음서가 기록한 실제 이야기를 무용지물로 만든다. 하나님의 사랑이 하나님의 공평, 거룩 그리스도 공의를 그렇게 쉽게 외면할 수 있다면, 그리스도의 십자가 죽음은 참담한 낭비로 보인다. “초월적인, 위엄에 가득 찬, 경외감을 자아내는 루터와 칼빈의 하나님, 인간과 신의 관계에 관하여 초기 개신교도들의 상념을 형성한 이 두 사람이 지녔던 이미지는 미국인의 개신교 경험을 통해서, 그것도 단지 사소한 끼어듦 정도일 뿐, 부드러운 모습으로 깎여 나갔다.”
하나님을 우리 자신의 경험 그리고 행복과 동일시하는 인간 중심의 접근 방법을 따를 때, 세상은 더 이상 하나님의 창조물이 아니다. 세상은 마치 하나님처럼 우리 자신의 개인적인 안녕을 위해서 존재한다. 존재하는 모든 것은 우리의 행복을 위해 소비되기 위해 거기 있다. 예를 들어 약물 남용과 성적 문란은 하나님을 거스르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 아니라, 이런 설교 대부분이 말하는 바에 의하면, 하나님의 방법을 좇아 사는 기쁨과 행복과 비교가 되지 않기 때문에 잘못된 것이다. 모든 강조점은 축제와 행복에 있다. 어떤 설교는 “기독교인이 된다는 것은 신나는 일이죠” 하고 외친다. 심리치료에서 말하는 변혁 따위의 물건을 팔려고 할 때, 모호함은 있을 수 없다. 불안, 긴장, 그리고 망설임은 말도 안 된다.
이런 설교들에서 재차 강조되는 또 하나의 강조점은 인간이 희생자이고 잃어버린 영혼으로, 더 이상 저주받은 존재가 아니라 인생의 방향을 잃었을 뿐인 존재라는 것이다. 이런 설교에서 지적되는 탕자의 실책은 요약하자면, 그가 자신의 존엄성과 자존감을 거절했다는 것이다. “반면 장로교 설교자들에게는 죄의 상징으로 등장하는 인물은 의무감에 충실하고, 종교적으로 순종적이나, 기쁨이 없었던 큰 형이다.”
설교에서 죄에 대해 말할 때는, 죄를 비인격화, 일반화하고, 그것을 외부인들에게로 돌려 버린다고 위튼은 지적한다. 한 남침례교 목회자는 자신들의 죄를 인정하지는 않고, “우리는 가난한 사람들 흑인들, 라틴 아메리카인들, 술에 중독된 사람들, 그리고 이혼한 사람들에게 다가가야 합니다.”라고 외쳤다. 죄를 “외부자들”에게 돌리는 것이 은밀하고 교묘할 수도 있다. 그러나 주류 장로교의 전략은 평가를 꺼리고 형과 동생 모두를 동정하는 것이었다. 신학적인 용어로 죄에 대해 말하는 어떤 설교도 “원죄라는 근본 교리의 누락을 보여 주는 예가 된다.”
마지막으로, 위튼은 이런 설교들에서 주요 강조점으로 보이는 “변혁된 자아”를 집어낸다. 미국의 초기 설교에서도 변혁이 중요한 위치를 차지했지만, 그것은 옛 자아의 죽음과 그리스도 안에서 새로운 자아의 생활을 가능하게 하는 “하나님의 은혜를 통해서만”이었다고 그는 지적한다. 그러나 이 언설들은 곧 “현재를 계속 이어 가는 개선”에 눌려 버리고 말았다. 초기에는 자기 사랑이 원죄의 뿌리로 여겨졌으나, 부흥사들은 자기 사랑을 회심의 동기로 호소했다. 인간의 능력을 좀 더 광범위하게 신뢰하는 분위기 그리고 “자유의지라는 아르미니우스 교리의 강조”로 말미암아, 죄는 “행동의 실수, 적절한 도덕 교육으로 바로잡을 수 있는 개념으로” 변질되어 버렸다. 다른 모든 행등들과 마찬가지로, 죄는 예측 가능한 원리들을 따라 조절될 수 있다.
자유주의자들과 부흥주의자들 모두는 하나님의 초월을 막후로 돌려놓고, 하나님의 말씀을 밖으로부터 한 사람에게로 다가오는 그 무엇이 아니라, 한 사람 안에서 솟아나는 그 무엇으로 보는 경향이 짙다. “따라서 구원의 열쇠는 자아 안에 있다. 개인을 추동하는 힘은 내면의 목소리를 듣고 그것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물론 죄는 크게는 실수 혹은 무지로 간주되기에 행동의 변화가 윤리적이든 도덕적인 주제에 관련한 교육을 통하여 나올 수 있다는 견해가 지배적이다.”
이로써 하나님을 믿는 신앙을 “현실 세계의 요구들과 관련하여 사람들을 돕는 일종의 심리요법”으로 이해하는 심리학적인 이해에 문이 열리게 됐다. 회심은 기본적으로는 자기성취다. 회심은 우리에게 달려 있다. 그리고 상대적으로 얻기 쉽다. 회심은 “정서적인 자기발견, 개방성, 그리고 수용성”만을 필요로 한다.
한 남침례교의 설교는 아래 인용문과 같은 말로 결말을 맺고 있다.
부를 얻으려고 애쓰다가 부를 얻을 때,
세상에서 왕이 된 듯 기쁜 일이 있을 때,
거울 앞으로 달려가서 당신을 들여다 보세요.
거울에 비친 사람이 무슨 말을 하는지 보세요.
당신의 아버지도 어머니도 아내도 아닙니다.
당신이 통과해야 할 판단을 내리는 사람은,
당신의 인생에 가장 큰 영향을 끼칠 판결을 내놓는 사람은
거울에서 당신을 응시하고 있는 바로 그 사람입니다.
“당신의 인생에서 가장 큰 영향을 끼칠 판결을 내놓는” 측은 하나님이 아니라 자기 자신이라는 말에 주목하라. 변혁에 대한 이 같은 강조에서 발견하는 더 심각한 요소는 “개방성, 신뢰와 자기폭로, 진솔함의 심리학”이다. 초점은 하나님 중심적이 아니라 거의 전적으로 인간 중심적이다. 아울러 인간관은 기본적으로 펠라기우스주의 또는 적어도 반(半) 펠라기우스주의적이다.
한 목회자는 탕자 비유를 통해 인지, 자각, 책임 그리고 회복이라는 공식을 만들어 놓았다. 회복은 기본적으로 의지와 행동을 통한 인간 성취이다. 아니, “다양한 인간의 노력”이 반드시 있어야 하는 “효과적인 과정”을 논하는 한에서, 회심은 “떠들어 댄 것처럼 그렇게 쉽지는 않은” 것으로 보인다. 전형적인 설교의 맺음말 가운데는 이런 것이 있었다. “당신의 삶에서 하나님이 베풀기 원하시는 구원에 당신 자신을 여십시오”.
그러므로 비단 탕자의 비유 설교 외에도 이러한 설교는 자신을 구원할 수 없는 자들을 구원하기 위해 자비로 몸을 굽히시는 위엄의 하나님을 사람들에게 소개하기는커녕, 도덕론적이고 심리요법적인 이신론으로 요약될 수 있는 메시지를 선포하고 있다. 그 결과, 하나님 경험은 소비자가 왕이라는 믿음과 함께 팔릴 수도 살 수도 있다. 따라서 전 세대의 주류 개신교인들이 경악할 선언들이 조지 바나가 “메시지가 아니라 청중에게 주도권이 있다.”고 변호한 것처럼 오늘날에는 심지어 복음주의자들에게조차도 당연하게 여겨지고 있다.(pp 71-86)
조엘 오스틴의 형통 복음과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
유다가 신실하지 않을 때 하나님은 거짓 선지자들이 인정과 인기를 쫓는다고 꾸짖으셨다. “그들이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 --- 아니라 조금도 부끄러워하지 않을 뿐 아니라 얼굴도 붉어지지 않았느라 ---”(렘6: 14-15) 바울도 비슷하게 그가 “대단한 사도들”이라 부른 사람들에 맞서 그의 사역을 변호했다. 이들은 절세의 언변과 그리스사람들의 입맛에 잘 맞게 한 메시지로 그들 자신에게 제자들을 끌어들였다.
“만일 누가 가서 우리가 전파하지 아니한 다른 예수를 전파하거나 --- 혹은 너희가 받지 아니한 다른 복음을 받게 할 때에는 너희가 잘 용납하는구나 -- 이것을 우리가 모든 사람 가운데서 모든 일로 너희에게 나타내었노라” (고후11:4-6)
바울은 로마서 말미에서 성도들에게 이렇게 호소하고 있다. “--- 너희가 배운 교훈을 거슬러 분쟁을 일으키거나 거치게 하는 자들을 살피고 그들에게서 떠나라 이 같은 자들은 우리 주 그리스도를 섬기지 아니하고 다만 자기들의 배만 섬기나니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로 순진한 자들의 마음을 미혹하느니라”(롬16:17-18). 바울은 디모데에게, 사람들이 듣고 싶은 말올 해주는 선생들에게 모일 것이라고 경고했다(딤후3:2-4,4:3-5). 현대적인 적용이라고 부르는 것의 상당 부분을 바울은 이 본문에서 불경이라고 지적하고 있다.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은 오늘날 성공하는 미국 종교의 단골 메뉴다. 그리고 그것은 언제나 더 효율적이고 현대인에게 맞는다는 식으로 광고된다. 예일 대학교의 신학자언 조지 린드백은 이렇게 논평한다. “노만 빈센트 필의 시대에 자유주의적인 청중들은 성경을 가지고 노는 일이 필요했다. 그러나 지금은 로버트 슐러의 경우가 보여주듯이 자신을 보수주의자라 부르는 사람들이 이것에 더 열중하고 있다”. 노만 빈센트 필은 자신의 베스트셀러 『적극적 사고방식의 능력』으로 유명해지기는 했지만, 보수적인 개신교도들로부터 기독교 선포의 가장 중요한 측면을 버리고 낙관적인 자기계발의 메시지를 선호했다는 이유로 맹비난을 당했다.
수정교회의 설립 목사이며 빈센트 필의 가장 유명한 제자인 로버트 슐러는 이 순수한 미국적 복음을 복음주의 진영에서 더욱 성공시키는 데 기여했다. 『자존심: 새로운 종교개혁』,『자아 사랑』, 『당신을 믿어 주시는 하나님을 믿어라』이 그리고 『행복의 태도』등 슐러의 저서들은 그의 텔레비전 사역의 힘을 받아 베스트 셀러가 됐다. 복음주의자들은 종교를 세속문화에 순응시키는 일에 있어 자유주의적인 경쟁자들을 따라잡았을 뿐만 아니라 이제 분명히 앞서 가고 있다. 어떤 세속적 자기계발 스승도 이들을 따라잡지 못하고 있다.
“적극적인 사고방식”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믿음의 말씀 운동(Word of Faith movement) 으로 알려진 적극적 사고방식의 오순절주의적 버전이 땅 끝까지 형통복음(prosperity gospel)을 확산시키고 있다. 널리 선전되는 것처럼 2/3세계(과거 제3세계를 일컫는 말, 이 범주에 들어가는 국가들이 전 세계의 2/3가 된다고 해서 붙여진 명칭)에서 기독교의 팽창을 자축하는 것은, 형통복음이 적극적 사고방식의 가장 폭발적인 버전이라는 사실 앞에서 자제 되어야 한다.
상당수 신학자들이 이러한 형통의 메시지와 고대 영지주의 사이에 놀랄만한 유사성이 있음을 지적하곤 한다. 믿음의 말씀 메시지는 마치 저 고대의 이단처럼 영과 물질을 날카롭게 구별하는 이원론을 당연시한다. 그리고 보이지 않는 영역의 비밀스러운 원리를 습득함으로써 인간이 처한 외적인 환경들을 지배할 수 있다고 약속한다 (“자연”이라고 흔히들 부르는) 창조 세계 자체는 타락했지만, 내적 자아는 신성하다고 이 교설의 교사들은 주장한다. “당신 안에 사는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 아니다”. 케니스 코플런드는 이렇게 가르친다. “당선이 신이다. 당선이 하나님의 일부고 하나님의 한 조각이다.”
조엘 오스틴의 화려한 성공보다 미국판 교회의 포로 상태를 더 잘 보여 주는 사례는 찾기 힘들 것이다. 조엘 오스틴의 메시지는 그것이 어떤 신학을 조금이라도 반영하고 있다면, 펠라기우스주의의 자기계발과 영지주의의 자기 신성화가 접목된 형태를 보여 준다. 개신교 자유주의에서 나온 일종의 부드러운 도덕주의가 슐러를 통해 복음주의의 주 메뉴가 됐다면, 오스틴은 케니스 코플런드와 베니 힌의 “입으로 시인하고 믿음으로 얻으라”의 철학올 주류 의 반열에 올려놓는 의아한 성공을 거뒀다.
오스틴은 오늘날 미국 대중 종교를 특징짓는 도덕론적이고 심리 요법적인 이신론을 다소 덜 극단적인 형태로 다양하게 제시한다. 기본적으로 하나님은 당신과 당신의 행복을 위해 존재하신다. 하나님에게는 어떤 법칙과 원리가 있어서, 당신이 인생에서 무엇인가를 꺼내려면 이것들을 사용해야 하고, 당신이 그것들을 준수하면 원하는 것을 얻을 수 있다. “선언만 하라. 그러면 형통이 당신을 따라온다”. 하나님은 나를 위해 일하는 구매 대리인이다.
노골적으로 형통의 복음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그들이 끼치는 영향력보다 수가 적을지 모르지만, 유명한 인사이며 베스트셀러 작가들 (제이크, 베니 힌, 조엘 오스틴 그리고 조이스 마이어)은 각별히 미국적인 입맛에 맞는 이교적인 세계관을 유포하는 공급업자들이다. 그 밑바닥에는 루터가 “영광의 신학”이라 한 사상이 깔려 있다. 하나님이 고난의 삶을 살고 난 우리에게 약속하신 영광을, 어떻게 하면 사다리를 기어올라 지금 여기서 얻을 수 있을까? 이 반대는 십자가의 신학이다. 엄청난 값을 지불하고 우리에게 내려오신 하나님의 자비에 대한 이야기이다. 바울에 의하면, 그리스 사람들에게는 거치고 어리석게 보이는 메시지다.
미국인들에게 이 “영광스러운 이야기”가 주는 매력은, 조엘 오스틴의 베스트 셀러인 『긍정의 힘』과 『잘 되는 나』에서 거둔 숨이 막힐 정도의 성공에서 여실히 입증된다. 친화력 있는 인품과 편안한 스타일을 넘어서, 오스틴이 보여 준 전대미문의 매력은 미국제 복음의 단순하고 부드러운 샘플과 연결되어 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이것은 기독교와 문화적 요소의 혼합물이다. 지금은 컴팩센터의 소유주며 휴스턴에 있는 레이크우드 교회의 그 목사가, 자가용 비행기와 요트를 타는 초상류충 복음 전도자이면서도 늘 멋진 말을 하는 옆집 아저씨같은 이미지를 우연히 지닌 것은 아니다. 오스틴의 가르침은 대부분의 대형 교회, 그리고 다른 구도자 중심의 사역과 구별하기가 힘든 용어들과 고급스러운 분위기 속에서 전달되고 있다. (pp 93-98)
조엘 오스틴의 가벼운 율법: 최선을 다함으로 구원받는다
오스틴의 메시지에는 하나님의 공의로운 율법을 지키지 못한 데에 따르는 정죄가 일체 없다. 그런가 하면 칭의도 없다. 이 두 메시지 대신에, 이 두 메시지의 중간 어디쯤 있는 낙관적인 도덕주의가 있다. 즉 최선을 다하라. 내가 말하는 지침들을 따르라. 그러면 하나님이 당신의 인생을 성공으로 이끄실 것이다. “영거주춤 뒤처지 마십시오". 그는 경고한다. 그러나 부드럽게 애원하는 어조로, 그가 주는 충고를 따라야 할 유일한 이유는 그것이 우리가 원하는 바를 얻는 데 유용하기 때문이라고 제시한다. 하나님은 무엇보다도 우리를 행복하게 해 주기 위해 존재하는 친구이자 파트너다.
“당신이 해야 할 몫을 하세요. 그러면 하나님이 자기 몫을 하십니다". “물론 우리는 잘못했습니다". 그러나 “복음이 있습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아무튼 사랑하신다는 것입니다". 우리의 의에 대한 하나님의 공정한 판결을 받아들이고, 의롭다 하심을 받기 위해 그리스도께로 달려가기는커녕 오스틴은 독자들에게 죄책과 정죄를 무조건 거부하라고만 권유한다.
모든 것이 우리에게 달렸다. 그런데도 쉽다. 오스틴은 우리가 기본적으로 선한 사람들이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우리 자신을 구원할 수 있는 아주 편안한 방안을 주셨다고 생각하는 듯하다. 하나님의 심판에서 벗어나는 것이 아니라 성공하지 못한 인생에서 벗어나는 것이 구원이라 보는 것 같다. “하나님은 여러분이 지금까지 행한 모든 선행을 차곡차곡 기록하고 계십니다". 마치 이것이 좋은 소식이라도 되는 양 오스틴은 말한다. “당신이 절박한 그 순간에, 당신이 행한 선행 때문에, 하나님은 하늘과 땅을 움직이셔서 당신을 돌보아주십니다".
가벼운 율법(Law Lite)이다. 그러나 결코 혼동하지 말라.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언급을 피하려는 미소 띤 얼굴의 베이비부머 복음 전도자 뒤에는, 복음을 율법으로, 승리의 선언을 승리해야 한다는 분발의 촉구로, 좋은 소식을 좋은 충고로 격하시키려는 결심이 도사리고 있다. 나쁜 소식은 옛날에 비하면 그다지 나쁘지 않은 소식이 된 반면에, 좋은 소식은 나 쁜 소식을 살짝 완화시켜 놓은 것, 다시 말해서 더 열심히 해 보라가 되었다. 하지만 이번에는 아주 쉽다! 하다가 잘 안 되면 염려하지 말라. 하나님은 당신이 최선을 다하기만을 바라실 뿐이기 때문이다. 나머지는 하나님이 다 알아서 해 주신다.
시장이 좌지우지 하는 문화에 대해 마르크스가 말했듯이, “견고한 모든 것이 공기 중으로 사라져 버린다”. 하나님 역시 소비재가 된다. 우리의 개인적인 웰빙을 위해 사서 쓸 수 있는 제품 또는 심리치료요법이 되는 것이다. 도덕적이고 심리요법적인 종교 접근의 전범을 보여 주는 오스틴의 메시지는, 베이비부머들이 하나님의 심판 앞에서 비통해 하거나 하나님의 구원하는 자비의 해방하는 소식에 맞춰 춤출 수 없는 모습을 그대로 보여 주는 단면이기도 하다. 달리 말해서, 모든 중력이 사라졌다. 우리가 당면한 문제 그리고 하나님의 가슴 벅찬 은혜라는 두 중력 모두가 사라진 것이다. 우리는 약간의 훈계와 동기부여가 필요한 선량한 사람들일 뿐이다.
이러한 심리요법적인 분위기 속에서, 죄는 하나님의 영광에 미치지 못한 것이 아니라 우리의 잠재력을 최대한 계발해서 살지 않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믿지 않는 것은 ‘죄’고, 이러한 죄의 삯은 현실에서 최고의 인생을 놓쳐 버리는 것이다. 어쨌든 권면, 요구 그리고 부담은 끊이지 않고 제시된다. “내가 제시하는 대로 하십시오. 여러분의 인생이 복 될 것을 내가 보증합니다”.
2006년 「타임」지는 한 기사를 통해, 한 루터파 교회가 사순철 내내 『긍정의 힘』을 묵상 자료로 따른 일을 한 예로 전하며, 오스틴이 좀더 전통적인 개신교 진영에서 더 성공적이었다고 했다. 그러면서 기고자는 이렇게 꼬집었다. “예수는 당시 최악의 삶을 살고 있었다”. 공식적으로 십자가의 신학을 표방하던 교회들조차 대중적인 미국제 영성이라는 환경에서 영광의 신학에 무릎을 꿇고 말았다. 우리는 자기도취적인 도덕주의의 바다에서 유영하고 있다. 자기계발이라는 경음악 편곡 구원관이 그것이다.
불신자의 비위를 거스르게 하는 말은 한 마디도 없다. 그리스도 안에 있는 신자에게는 훨씬 더 그렇다. 하나님의 거룩하심, 우리의 정죄 혹은 그리스도가 우리 대신 그 정죄를 젊어지심에 대한 말은 전무하다. 오스틴의 메시지에는 삼위일체 혹은 죽은 자의 부활 그리고 오는 세상에 대한 말은 전혀 없다. 사실은 그리스도에 대한 언급도 아주 드물다. 이 텔레비전 복음 전도자는, 사람마다 서로 다른 “은사들”이 있고, 자신의 사명은 사람들이 더 나은 삶을 살도록 돕는 것이라고 한다.
거듭 말하지만 오스틴의 메시지에는 미국의 낙관주의 문화에서 전에 들어본 적이 없는 요소란 거의 없다. 디즈니의 지미니 크리켓은 이 점을 아주 잘 표현했다. “별에게 소원을 빌어 봐요. 모든 꿈이 이뤄질 거예요". 오스틴의 메시지는 도덕적인, 심리요법적인 이신론의 최고봉이다. 복음 없는 복음 전도가 가능한가? 기독교적인 메시지 없이도 기독교적인 전도가 가능한가?
이런 메시지는, 우리를 위한 그리스도의 객관적인 사역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은총과 복을 확실하게 내 것으로 만드는 일련의 일을 통해 주관적으로 예수와 개인적인 관계를 맺음으로써 구원받는다는 결론을 쉽게 내리게 만든다. 하나님의 위엄에 대한 감각을 상설할 때, 죄는 그것이 가리키는 바를 잃어버리고 만다. 죄는 이제 더 이상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함(롬3:23)이 아니라, 자아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는 상태다. 그리스도 없이도 모든 것이 잘 통제된다. 하나님은 여전히 점수를 매기시지만, 우리가 하는 선행에만 그렇다.
오스틴의 책 어디서도 그리스도는 하나님과 사람의 중보자로 나오지 않는다. 죄인을 위해 율법을 완성하고 그들의 죄책을 짐으로써 자신의 의를 그들에게 전가시켜 준 대속자를 찾을 필요가 없다. 성육신하였다가 죽고 살아나 승천한, 불경건한 자들을 통치하는 구세주보다는 눈에 보이는 친구와 같은 이에게 모호하게, 또 정서적으로 밀착하는 결과가 나타난다.
이런 맥락에서 예수는 그것이 무엇이든 당신 인생에게 되어 주었으면 하는 그런 존재가 된다. 나의 가장 큰 문제가 외로움이면 믿을 만한 친구 예수가 복음이다. 가장 큰 문제가 불안이면, 예수는 우리를 안정시켜 준다. 예수는 결혼과 가정을 단단하게 붙여 주는 접착제이다. 우리에게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 투쟁할 목적을 준다. 날마다 지혜를 공급해 준다. 이러한 호소에는 절반의 진리가 들어 있으나, 이것들은 결코 회중이 진정한 문제에 직면하도록 하지 못한다.
복종, 헌신, 결단 그리고 승리하는 생활이라는 이 복음은 하나님이 이루신 일에 대한 복음이 아니라, 우리 자신을 하나님의 도우심을 입어 구해 내려는 요구에 불과하다. 성경이 복음을 예수와 맺는 개인적인 관계로 말하는 법도 없으려니와 믿음을 예수께 내 마음에 들어와 달라고 부탁하는 결단으로 정의하는 일도 없다는 사실은 그렇다고 쳐도, 이런 구원관은 이미 모든 사람이 공정한 재판관 앞에 서 있는 선고받은 범죄자로든 아니면 그리스도와 더불어 의롭다함을 받은 공동 상속자 그리고 입양된 아버지의 자녀로든, 개인적인 관계를 맺고 있음을 놓치고 있다.
“내가 어떻게 하나님과 바른 관계에 있을 수 있을까?”는, 하나님의 거룩하심보다 내 행복이 주요 관심사가 될 때는 더 이상 문제가 안 된다. 구원은 이 세상에 임하고 있는 심판으로부터 하나님의 구출을 받는 문제가 아니라, 자신의 최고 인생을 지금 살기 위한 자기개선의 문제다. (pp 98-104)
오스틴의 「잘되는 나」는 복음의 진술이 아니다
오스틴은 『잘되는 나』(원제; 더 나은 자신이 되라: 당신의 삶을 매일 진보시키는 일곱 가지 열쇠)를 저술했다. 미의회 도서관 분류표를 보면 이 책은 이렇게 분류돼 있다. “1. 자기실현(심리학)-종교적인 측면-기독교” 미의회 도서관조차도 이 책이 표방하는 메시지의 종류를 간파한 것 같다.
“당신은 더 나아질 수 있다" 오스틴은 초대한다. “문제는 ‘어떻게?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이다. 나는 첫 번 째 책 『긍정의 힘』(원제: 지금 누리는 당신의 최고 인생)에서 당신의 잠재력을 극대화할 수 있는 일곱 단계를 소개했다" 그러나 그는 『잘되는 나』를 통해 좀 더 깊이 들어가고자 한다. “나는 독자들이 자신의 내면을 들여다보고, 하나님이 당신 안에 심어 놓으신 위대함의 소중한 씨앗을 발견하도록 돕기를 원한다. 이 책에서 나는 당신에게 일곱 가지 열쇠를 보여 줄 것이다. 당신은 이 열쇠로 저 위대함의 씨앗들을 발아시킬 수 있다. 그 씨앗들이 복되고 풍성한 삶으로 싹 틀 것이다 --- 기억하라. 하나님은 승리하는 인생을 사는 데 필요한 모든 것을 당신 안에 허락하셨다. 그것을 꺼내는 일은 이제 당신에게 달렸다 --- 더 나은 자신이 된다는 것은 무슨 뜻인가? 먼저 하나님이 당신을 지으신 그대로 되길 원하심을 아는 것이다. 두 번째로, 하나님이 그분의 일을 하시기에, 당신도 당신의 몫을 해야 하는 것이 당연함을 아는 것이다". 따라서 당신이 오스틴에게서 들을지도 모를 최악의 소식은 당신이 이미 알지 못한 것은 아무것도 없고, 최고의 소식은 그의 충고를 따름으로써 더 많이 얻을 수 있다는 것이다.
오스틴이 말하는 일곱 가지 열쇠들은 복음의 진술이 아니다. 달리 말해서,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일으킨 구원의 일에 대한 선언이 아니다. 선지자적인 메시아 기대, 성육신, 죄인들을 위한 그리스도의 적극적인 순종, 그리스도의 죄를 치워 버리는 죽음과 한 몸의 머리로서 당당한 부활, 우리를 아버지께 소개하고 성령을 우리 마음에 보내심, 이로써 그리스도가 영광가운데 돌아와 산 자와 죽은 자를 심판하실 세대의 마지막에 우리 육체의 부활을 위한 보증으로 삼으심 등이 들어 있지 않다. 이것들은 도리어 요청(명령)이다. 성경에 일체 호소하지 않고서도 수많은 자료에서 뽑아낼 수 있다. “더 나은 자신이 되기 위해 당신은 이런 것들을 해야 한다. (1) 앞만 보고 나가라. (2) 자신에게 긍정적이 되라. (3) 더 나은 관계를 발전시키라. (4) 더 건전한 습관을 형성하라. (5) 현재 처한 환경을 받아들이라. (6) 내면생활을 풍성하게 하라. (7) 인생을 활기차게 살아가라". 이것들은 모두 당신이 해야 할 목록이다. 그러나 여기에는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행하신 일에 대한 좋은 소식이 담겨 있지 않다.
주제는 다시 영광의 신학 계열의 “상승”이다. 하나님의 겸손하고 자기희생적인 낮추심이 아니라 우리의 자기 확신에 찬 상승에 강조가 놓인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스틴은 많은 독자들에게 마치 한 사람 한 사람이 “지극히 높으신 하나님의 자녀”인 양 말하지만, 어디에도 이런 관계의 중재자인 그리스도가 언급되지 않는다. 아니,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되었기에 모든 사람에게는 그 안에 이러한 “위대함의 씨앗”, 이러한 신적인 DNA가 심겨 있다. “모든것이 당신 안에 있다. 당신은 잠재력 덩어리다. 그러나 당신의 몫을 하고 그것을 풀어 놓아야 한다 --- 당신 안에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씨앗이 있다 --- 그 잠재력이 펼쳐질 모습을 우리는 믿어야 한다". 케니스 코플런드와 TBN에 출연하는 다른 유명 인사들과 같은 형통주의 텔레비전 전도자들의 상궤를 벗어난 가르침, 즉 우리 안에 신성의 핵심을 지니고 있는 “작은 신들”이 바로 우리라는 가르침은 약간은 덜 구체적으로 그러나 이주 노골적인 용어로 번져 나가고 있다.
오스틴의 저서 여기저기 성경에 호소하는 대목들이 많이 나오는 것은 틀림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거의 모든 경우, 성구는 문맥과는 상관없이 마치 포춘쿠키(덕담이 적힌 작은 종이가 들어 있는 과자. 보통 중국 음식점에서 후식과 함께 나온다-역주)처럼 자기 자신을 위해 되뇌거나 주장하는 약속 비슷하게 쓰이거나, 아니면 오스틴의 관점에 맞게 잘못 인용되고 있다. 창세기 3장 11절에서 하나님은 그의 죄를 추궁하기 위해서 아담에게 “누가 너의 벗었음을 네게 알렸느냐"고 물으셨다. 그러나 오스틴은 아담이 시험에서 실패했고 성공을 위해 넘었어야 할 관문을 넘지 못했다고 사탄이 아담에게 말한 양 해석하고 있다.
오스틴은 『잘되는 나』에서 좀 더 노골적으로 형통복음으로 기울어졌다. 오스틴은 마치 타락 같은 것은 있지 않았다는 식으로 말한다. 비록 승리를 성취하는 것은 당신에게 달려 있지만 “하나님은 숭리에 필요한 모든 것을 당신 안에 심어 놓으셨다". 매일 자신에게 이렇게 말해야 한다. “나는 비결을 알아. 나는 위대한 정복자야. 나는 똑똑하고 재주가 많아. 나는 성공할 위인이야. 나는 매력적이야. 나는 극복할 수 있어".
이 책은 형통복음의 요설로 도배질이 되어 있다. 우리가 하나님의 복을 선언하고, 형통을 말하며, 건강, 부 그리고 행복이 우리 삶에 찾아 오도록 예언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모든 것들이, 하나님은 우리의 승리를 위해 모든 것을 마련하셨으나 능력의 원천에 플러그를 실제 꽂고, 적절한 원리들과 절차를 따름으로써 복을 창출하는 것은 우리에게 달렸다는 인상을 심어 준다.
초자연적인 수사에도 불구하고 결국에 가서는 이 모든 것이 이신론으로 들린다. 하나님이 형통의 법칙에 맞도록 모든 것을 마련하셨으니, 이제 공은 우리 코트로 들어왔다. 승리하는 삶의 길을 가르치는 진부한 선생들을 따름으로써, 오스틴은 영원한 영역을 끌어들이는 일을 말한다. 이 길에서는 심지어 종교도 일종의 기술이 된다. 옳은 원리, 공식 그리고 단계를 알면 형통, 복 그리고 특혜는 지금 여기서 당신의 것이 될 수 있다는 식이니 말이다. 다시 한번 영지주의적인 영성이 쉽게 감지된다. (pp 112-116)
십자가 없는 영광은 영광의 신학의 미국식 종교적 변형판이다
지금 영광을 거머 쥐라. 십자가, 저주, 심판은 없다. 되고 싶은 대로 되어라. 우리는 타고난 자아도취에 호소하는 시대의 문화 속에서 허우적거린다. 오늘날 가끔은 자유주의자들과 많은 복음주의자들이 나팔을 불고 있는 이러한 메시지의 종교적인 변형판에서는 하나님이 우리를 존재하게 하는 목적이 아니라,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이다. 변형은 많지만, 이것은 영광의 신학이다. 그러나 이 영광은 이 땅에서 그리스도의 고난과 치욕을 나눈 자들에게 복음이 약속하는 그런 영광이 아니다. 지금 여기서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죄와 죽음의 현실을 부정하면서 취하려는 영광이다.
그리스도는 증상을 다루지 않으셨다. 그리스도는 근원으로 곧장 가셨다. 아담의 죄에 참여한 우리에게 하나님의 율법이 정당하게 내래는 형벌인 저주를 다루셨다. 첫 아담이 죄를 가져왔다면, 미자막 아담은 영원한 생명을 가져왔다(고전15:20-24).
오스틴을 비롯한 요즘 활동하는 다른 많은 설교자들이 약속하는 것들을 얻기 위해서라면 그리스도가 없어도 된다. 성경이 필요한 것도 아니다. 복음서들에 약속된 구속과 같은 것도 필요 없다. 조엘 오스틴의 메시지는 복음과 문화를 비벼 놓는 일반적인 형상을 대언하고 있다. 우리가 동의할 만한 교리들이 있는지 없는지는 따지지 않는다. 그 안에 미국의 종교가 들어가 움직이고 그 특성을 가지고 있는 담론은, 보수주의, 자유주의, 침례교, 뉴에이지, 오순절 혹은 로마 가톨릭, 개혁주의 혹은 아르미니우스주의, 유니테리언 교회 혹은 루터교 등 가릴 것 없이 기본적으로는 동일한 메시지를 실어 나르고 있다. 오늘날 이렇게 말하면 이단 시비가 붙겠지만, 미국인들에게는 더 나은 가정, 재정, 건강 혹은 나아가서 도덕성을 함양하는 위해서라면 굳이 예수가 필요 없다고 말해 줄 필요가 있다. 십자가로 나온다는 것은 회개한다는 뜻이다. 조연 정도로 예수를 취급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코칭과 개선이 아니라 죽음과 부활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삶의 동기로 맞추려고 할 때는, 줄거리가 죄다 빗나가 버린다. 사소해지고 만다. 바울은 환경 때문이 아니라 복음의 약속 때문에 항상 즐거워했다. 복음은 우리가 잠시 고난을 당하고 나면 그리스도의 부활 영광을 나누게 될 것이라고 약속한다. 그는 “교활한 말과 아첨하는 말”(롬16:18)로 교회를 속이는 거짓 교사들에게 경고했다.
오스틴이 전파하는 건강과 부의 복음은 고난을 다룰 수 없다. 그것은 지금 여기에 있는 세상 왕국을 제공하는 영광의 신학이다. 이 전형적인 미국 종교에는 현재에도 우리의 죄를 위한 그리스도의 고난 혹은 그리스도와 연합한 자로서 우리의 고난 등 고난이 없다.
(pp 125-131)
기독교는 더 나은 삶, 더 나은 자기를 위한 자기 개선 방법론이 아니다
기독교를 좋은 조언으로 축소시키면 인생 코칭 문화에 딱 들어 맞는다. 기독교는 도덕주의적 치료법 시장에서 실종되고 만다. 기독교를 개인적인 개선의 최고 방법론으로 간증할 때, 비신자들은 “무슨 권한으로 기독교가 행복, 의미, 도덕적 향상의 유일한 원천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라고 정당하게 따질 수 있다. 예수는 더 나은 삶으로 향하는, 아니면 더 나은 내가 되기 위한 효과적인 방법은 분명 아니다. 사람은 예수 없이도 체중을 줄이고, 결혼생활을 개선하고, 더 멋진 사람이 될 수 있다.
기독교를 구별시켜 주는 핵심은 기독교의 도덕적인 계율이 아니라 기독교의 이야기다. 즉 자기 형상으로 창조한 자들에 의해 거절 당했음에도 불구하고 그들을 자기 아들을 통해 자기와 화해하도록 스스로 낮아지신 창조주의 이야기다. 기독교는 개인이 하늘로 올라가는 여행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하나님의 성육신, 속죄, 부활, 승천 그리고 다시 오심이라는 역사적인 사건에 대한 이야기이며 그것이 지닌 풍성한 의미를 탐구하는 것이다. 이 이야기의 중심에 복음 즉 하나님이 우리를 그리스도 안에서 자신과 화해시켰다는 좋은 소식이 있다.
진짜 능력과 지혜는 승리하는 삶을 위한 원리들에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의 승리를 선언함에서 발견된다. 사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를 보여주지 않으신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원함이 되셨다.” 개신교 자유주의의 면전에서 메이첸이 외친 경고다. “내게 가장 필요한 것은 권면이 아니라 복음이다. 나를 구원할 수 있는 방향이 아니라 하나님이 어떻게 나를 구원하셨는가를 아는 지식이다. 당신에게 복음이 있는가? 나는 이것을 당신에게 묻는다. 당신이 주는 권면은 나를 도울 수 없을 것이다. 그러나 나를 구원하기 위해 어떤 일이 행해졌다면, 그 사실을 내게 말해 주지 않겠는가?”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기 위해서는 무화과 나뭇잎으로 만든 옷을 벗어 버려야 한다. 그래야 거룩하신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설 수 있다. 문제는 오늘날 사역의 목표가 우리의 무화과 나뭇잎 옷을 찢어버리고 그리스도로 옷입는 것인가 아니면 나뭇잎을 몇 장 더 얹는가 하는 것이다.
기독교의 중심 메시지는 세계관, 처세 방법 혹은 개인과 사회 개혁 프로그램이 아니다. 그것은 복음이다. “좋은 소식”에 해당하는 그리스어는 전형적으로 승전보로 쓰였다. 이런 배경에서, 복음은 전장에서 닿은 특별한 전령이 전한 보고이다. 신약이 사도의 직분을 선포자와 복음 전도자로 기술하고, 목사를 전령, 대사 그리스도 증인으로 묘사한 데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이들의 임무는 그 이야기를 바로 파악하고 그 다음에 보고하는 것이다. 이 메시지가 말(설교)과 행동(성례전)으로 말미암아 제대로 전달되고 있는지를 살피는 것이다. 그 결과물이, 이 지나가는 악한 세대 한가운데에 있는 삼위일체 하나님의 대사관인 교회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능하신 구속 행동을 증거하는 하나님의 모든 백성과 함께 한다.
이 사명을 잊고 다른 데 신경을 쓸 때, 우리 자신을 위대한 왕의 대사, 우리를 위해 누군가가 이미 성취해 준 일의 증인이 아니라, 쇼의 스타로 생각하기 시작한다. 그 소식을 보도하는 대신 소식이 된다. 사실 오늘날 우리는 마치 우리가 어떤 일을 할 수 있으며, 하나님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거두신 승리에 보조 수단이 될 수 있는 것처럼, 기독교인들이 “복음을 산다” 그리고 “복음이 된다”고 하는 말을 자주 듣는다. 대사, 전령, 기자 그리고 증인 대신, 목사들은 경영인, 관리자, 코치, 심리치료가, 마케팅 대가 그리고 의사소통 전문가가 되고 있다.
이런 변화에 맞춰서 초점은 필시 우리가 하는 일로 옮겨 가고, 예수의 모범은 하나의 사례로 축소되고 만다. 좋은 조언을 제시하는 책들과 설교들은 이 좋은 소식을 제시하는 쪽보다는 사람들에게 적합한 것이 무엇인지 찾는 쪽으로 더 기울어진다. 기독교 서점에 나가서 그리스도의 인격과 사역에 대한 책들의 숫자와 “기독교” 자기계발류의 책들이 있는 서가를 비교해 보라. 오늘날 우리가 하는 사역의 상당 부분이 “예수께서 무엇을 하셨는가?”가 아니라 “예수라면 어떻게 하실까?”에 강조를 둔 복음 없는 율법, 소식 없는 권면, 선언 없는 지침, 교리 없는 행위이다.
율법과 복음이 각각 단순히 십계명과 요한복음 3:16을 가리키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해 두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의 도덕적 기대를 보여 주는 성경의 모든 것이 율법이고, 하나님의 구원하시는 목적과 행동을 보여 주는 모든 것이 복음이다. 우리는 하나님의 명령을 알아야 깨끗해질 수 있고, 우리의 죄를 인정할 수 있으며, 그리스도에게로 도피할 수 있다. 또한 그래야만 이것들이 우리를 감하가 넘치는 순종으로 이끌어 줄 수 있다. 무엇을 하는 것이라면 우리는 율법(행위들)에 부응하고 있는 것이고,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하신 일을 믿는 것에 대해서라면 복음(믿음)에 부으하고 있는 것이다.
믿음을 하나님의 선물을 얻는 수단으로 착각함으로써, 우리의 ‘선행’은 하나님을 거슬리는 가장 공격적인 죄고 되고 만다. 그러나 오직 믿음만으로 이 선물을 받을 때, 믿음은 즉시 의의 열매를 생산해 내기 시작한다. 심지어는 좋은, 거룩한 그리스도 적절한 것들조차 복음과 섞여 버릴 때는,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가 되는 것은 시간 문제일 뿐이다. 즉 끝없이 펼쳐지는 드라마 안으로 우리를 끌어들이시는 삼위일체 하나님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라 우리에 대한 이야기가 된다.
개인적이고 사회적인 현안들에 대해서 어떤 태도를 취하실지에 대해 말해 주는 성경 구절이 단 하나도 없음에도 불구하고, 성경에서 그토록 중요하다고 명백하게 선언하고 다루는 문제들에 대해서는 모호한 태도(겸손한 척 하면서)를 취하는 바로 그 사람들이 이런 문제들에 대해 예레미야처럼 울분을 토하는 것을 우리는 흔하게 대한다.
산상수훈이 사랑이라는 일반 윤리로 축소되고 교리가 뒷전으로 밀려나면 어떤 일이 생기는가? 그리스도는 심지어 다른 종교의 추종자들이 더 좋은 사람이 되도록 도와주는 단순한 모범이 된다. 이것은 교리가 아니라 행위다. 그리스도를 믿는 명백한 믿음이 있든 없든 예수를 좇는 것이 가능하다. 칸트가 만든 대조 즉 교회적 신앙(교리)에 반대되는 개념으로서 순수한 종교(도덕성)로 기울어진다. 시대정신으로 향하는 마차를 잡아타고 나면, 이런저런 형태의 문화 기독교, 달리 말해서 우리의 타고난 펠라기우스주의를 향해 달려가게 된다.
(pp 139-151)
도덕주의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변두리로 몰아낸다
스티브 초크는 대리 형벌이 “하나님의 아동 학대”라고 말한다. 맥클라렌은 그리스도의 속죄에 대한 ‘전래적인 견해’를 한껏 희화화한 후에, 그의 대안적인 ‘새롭게 떠오는 견해’를 제시한다. “하나님은 은혜롭게 모든 이, 자신의 길을 돌려서 새로운 길을 따르는 그 누구라도 초대하신다. 이것이 좋은 소식이다.” “예수가 인간의 역사 안으로 결코 사그라지지 않을 은혜, 진리 그리고 희망의 씨앗을 심었다. 예수 안에서 하나님의 희망과 진리를 발견하는 모든 이들을 개인적이고 전 지구적인 변혁과 악과 불의로부터의 해방을 위한 그리스도의 계속 되는 일에 동참하는 영예를 누리게 되는 것이다.”
이 견해가 놓치고 있는 것은 과거에 우리를 위한, 우리와는 상관 없는, 우리 밖에서 일어난 그리스도 단번의 영원한 사역, 그리고 영광 가운데 돌아오실 때만이 이루실 수 있는 사역의 유일무이성이다. 예수와 그의 공동체, 그의 사역과 우리의 일은 하나의 구원하는 사건으로 합쳐진다. 이 떠오르는 종교적인 좌파는 예수를 국가적이고 전 지구적인 구속이라는 우리 자신의 프로그램들을 대표하는 하나의 마스코트로 끌어들이는 데에 아주 능숙한 듯 보인다.
오스틴은 구원을 전적으로 지금 여기서의 형통이라 말하는 반면 맥클라렌은 주로 지금 여기에서의 평화와 정의라고 말한다. 두 경우 모두에서 이 구원을 가져오는 것은 우리의 몫이다. 복음은 그리스도가 죽음, 정죄 그리고 죄의 폭정을 종식시켰고, 장차 영광과 권세 가운데 다시 오셔서 먼저 심판하신 후 이어 만물을 새롭게 하신다는 하늘의 선언과 함께 그리스도를 따르라고 명령하는 것이다.
선교와 사역의 초점이 자신의 왕국을 가져왔고, 가져오고 있으며, 우리와 우리의 청자들을 자신의 복음을 통해 자기 왕국으로 데려가시는 분이 아니라, 우리의 살아 있는 왕국(kingdom living)에 맞춰질 때, 최소한 실천의 차원에서는 모범인 그리스도가 구세주인 그리스도를 아무렇지도 않게 대체할 수 있다.
말과 행동이 달라 복음을 욕되게 사는 것은 참으로 비극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교리는 훌륭했지만, 노예 제도, 인종차별주의, 물질 만능주의 그리고 하나님의 말씀에 부합하지 않는 이런저런 생활방식을 잔득 가지고 있었던 기독교인들은 언제나 있어 왔다. 젊은 복음주의자들은 예수 그리스도를 고백하고 헌신을 말하면서도, 소비주의, 탐심, 군사주의 깊이 빠져 있고 하나님의 창조 세계에 청지기로서 무관심한 태도 등을 보이는 운동의 모순과 위선에 상당히 민감하다. 킴벌은 마하트마 간디를 인용함으로써 정곡을 찌른다. “나는 당신들의 그리스도를 좋아한다. 그러나 당신들 기독교인은 좋아하지 않는다. 당신들 기독교인들은 당신들의 그리스도와는 다르다”. “기독교인들은 좀 모자라고, 생각이 없으며, 심지어는 사교 집단에 빠진 사람들처럼 보인다. 사회악을 일소하겠다며 성난 운동을 벌이고 사람들이 자신들의 견해에 동조하도록 돌려놓는다. 그런데도 목사 혹은 사제가 성범죄로 대중이 지켜보는 앞에서 체포된다.”
율법과 복음을 온당하게 선포하는 것만이 모든 자기 의를 진정시키는 바른 해독제가 된다. 사도 바울이 고린도 교회에 성적 부도덕, 위선, 분쟁 그리고 교만 등의 문제를 다루기 위한 편지를 써야 했을 때, 복음을 완전히 다시 선포함으로써 포문을 열었다. 교회가 특정한 윤리 문제로 혼란을 겪고 있다면, 복음 메시지를 아직 깨닫지 못한 것일 수 있다고 전제한다. 다시금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를 전파하고 나서야, 바울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고상한 부르심에 맞게 살라는 실천적인 권면으로 들어가곤 한다.
어느 경우든, 도덕주의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변두리로 몰아내는 것은 마찬가지다. 우파, 좌파 그리스도 중도를 가릴 것 없이 우리는 전적으로 궤도를 이탈했다. 아무리 좋은 모범과 교훈이라 하더라도, 설령 그것이 최고의 교리라 할지라도 그것들은 마지막 숨을 쉴 때까지도 내 안에 거하는 죄와의 싸움에서 나를 건재 내지 못한다. 내가 예수의 발자취를 따를 수 있다고 생각하기에 내가 기독교인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나를 데려가 줄 수 있는 유일한 분이기에 기독교인이다. 나는 복음이 아니다. 예수 그리스도만이 복음이다. 그리스도의 이야기는 나를 의롭다 할 뿐 아니라 나를 자신의 부활 생명 안으로 세례 주심으로 나를 구한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감(성화)은 자아에 대해 죽고(죽임) 하나님에 대해 살아나는(살림) 과정이다. 이 일들은 그리스도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이라는 복음 이야기에 정기적으로 잠길 때에 나오는 결과다. 달리 말하면 탈출(아담과 죄 그리고 죽음의 통치로부터)과 정착(그리스도 안으로)이다. 내 삶이 복음이 아니라는 말은 나와 내 이웃에게 좋은 소식이다.
우리는 우리 자신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전파한다. 성경이 펄치고 있는 신비로서 그리스도에 대해 더 말할수록, 그리스도 우리 자신의 변혁에 대해 덜 말할수록, 우리는 자기 의에 빠지거나 절망에 빠지지 않고 실제로 변혁될 수 있을 것이다. 우리 기질에 반하면 반할수록, 복음은 의롭다 함과 거룩함을 주는 하나님의 구원 능력이다. 믿음의 열매는 실제적이다. 그것은 행위에서 나오는 의의 열매와는 비교가 되지 않는다.
우리 자신의 ‘변화된 삶’에 목을 맬 때 위선이 고개를 든다. 보수주의건 자유주의건 가릴 것 없이, 교리가 아니라 행위에 초점을 두어야 한다는 말을 듣고 있다. 사람들은 실생활에서 교리는 하등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는 말들을 많이 한다. 이제 우리는 거룩한 행동으로 미국과 세계를 구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학교, 교단 본부 가릴 것 없이 이런 말들을 하고 있다.
대립관계에도 불구하고 개신교 자유주의는 실제로 경건주의에서 나왔으며 특히 미국에서 개신교 현대주의는 부분적으로 부흥주의에서 나왔다. 메이첸의 말이다. “자유주의와 기독교 사이에 가장 근원적인 차이가 발견된다. 자유주의는 전적으로 명령법이다. 반면 기독교는 승리의 분위기가 나는 서술법으로 시작한다. 자유주의는 인간의 의지에 호소하고, 기독교는 먼저 하나님의 은혜로운 행동을 선언한다. 자유주의는 그리스도를 모범과 길잡이로 간주하나 기독교는 신앙의 대상으로 여긴다.”. 자유주의는 종교적인 경험을 토대로 움직이지만, 기독교는 우리 밖에서 오는 하나님의 말씀에 집중한다. 모든 세대에 걸쳐 내면적인 생활, 경건, 공동체 그리스도 행동의 결단 등 우리 자신에게로 다시 초점을 두려는 자연스러운 경향은 사랑과 봉사를 낳는 믿음의 뿌리 자체를 시들어 버리게 한다. 한 프로그램에 시들해지면, 언제나 또 다른 베스트 셀러, 운동 혹은 계획이 코앞에 기다리고 있다. (pp 153-166)
율법과 복음을 혼동하면 칭의도 해방의 능력도 맛보지 못한다
율법과 복음은 다 필요하지만 각각은 다른 일을 한다. 율법과 복음을 혼동할 때, 하나님의 거룩하심이 주는 의상도, 하나님의 은혜에 있는 해방하는 능력도 맛보지 못하고 만다. 마치 복음이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사역이 아니라 우리와 우리의 일에 대한 메시지인 듯, 복음을 살아내고, 복음을 행하며, 심지어 복음이 되는 것에 대해 말하기 시작한다. 율법에서 등을 돌리는 것도, 율법의 요구를 완화시켜 도움을 주는 조언으로 만드는 것도 합당한 반응이 아니다.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인식하는 것이 바른 반응이다. 우리에게 복음을 살아내라고 하신 적이 없고, 복음을 믿고 하나님의 자비의 관점에서 율법을 따르라고 하셨다. 복음을 율법으로 만드는 것은 우리가 식은 죽 먹듯 할 수 있는 일이다. 아주 자연스럽게 된다. 이것이 복음을 당연시할 수 없는 이유다.
어뗜 유형의 복음을 행함은 범주 오류이다. 율법은 우리에게 무엇을 하라고 말하지만, 복음은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위해 무엇을 하셨는지 말한다. 우리가 하나님과 어떻게 연결되어야 할지에 대한 질문이 나올 때 행함은 틀린 답이다. 바울은 이렇게 말한다. “일하는 자에게는 그 삯이 은혜로 여겨지지 아니하고 보수로 여겨지거니와 일을 아니할지라도 경건하지 아니한 자를 의롭다 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 그의 믿음을 의로 여기시나니”(롬4:4-5). 어떤 종류든 우리의 일 전체가 배제된다. “만일 은혜로 된 것이면 행위로 말미암지 않음이니 그렇지 않으면 은혜가 은혜되지 못하느니라”((롬11:6).
생활을 위한 원리, 실천적인 조언, 승리하는 생활의 비결, 제자도의 촉구 그리고 지침 등은 모두 율법이라는 범주 아래 들어간다. 엄중하게 재시하든 부드럽게 하든, 하나님의 명령이든 사람의 것이든 상관없다. 요점은 이 말들을 흘려버리라는 것이 아니다. 다만 a) 이것들이 우리의 말이 아니고 하나님의 말씀임을 확인하고, b) 하나님의 말씀이라 하더라도, 복음의 하나님의 말씀과는 다른 것임을 명심하라는 것이다. “하겠다”고 한 일들을 하나도 하지 않았다 하더라도, 그리스도가 우리의 “의, 거룩과 구속”(고전1:30)이 되어 주셨다는 것이 복음이다.
율법은 하나님이 우리에게 기대하시는 것을 말하지만, 복음은 우리를 위해 하나님이 하신 일을 말한다. 따라서 율법과 복음은 본래적으로 상반되지 않는다. 우리가 어떻게 구원받느냐의 문제와 관련하여 이 두 원리는 반대의 입장에 있지 않다.
매순간 우리의 자연적인 성향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그 대상인 그리스도를 놓칠 위험에 늘 노출돼 있는지라, 믿음의 시초만이 아니라 기독교인으로 사는 동안 우리 앞에 복음이 플래카드처럼 걸려 있어야 한다. 우리는 매주 복음화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의 모범을 좇음으로가 아니라, 그리스도 안으로 들어감으로써, 그리스도로 옷 입음으로써,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가능하다. 성령께서 복음을 통해 믿음을 일으키실 때 우리는 의롭다 하심만 아니라 거룩하게 된다. (pp 166-168)
표지 없는 사명은 눈이 멀었으며, 사명 없는 표지는 죽은 것이다
성경이 말하는 언약은 하나님의 은혜로운 결정, 구속하는 행동 그리고 복음을 통한 효과적인 부르심, (우리 자신의 친밀함, 취미, 음악적인 취향 혹은 정치적인 견해를 기본으로 선택한 것이 아닌), 한 가정의 형제자매 관계 안에 우리를 놓으심에 그 뿌리가 있다. 그러나 미국의 언약은 개인의 선택, 도덕적인 개선 그리고 그리스도를 본받는 자가 되기 위해 하나님과 맺는 계약에 그 뿌리가 있다.
그리스도가 왕이 아니신 곳에서는, 선지자 또는 제사장도 아니시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교회를 다스리신다. - 교회의 구조와 방법을 제정하심으로써- 그렇게 그리스도는 자신의 좋은 선물을 세상에 효과적으로 나누 주신다.
내가 속해 있는 신앙고백을 중시하는 신앙 진영에서 우리는 상응하는 사명지향성 없이 표지만 가지고 있는 현상을 발견할 수 있다. 말씀, 성례 그리고 치리를 신실하게 수행하는 것이 사명이다(마28:18-20). 밖을 바라보지 않고, 세상 끝까지 이 좋은 소식을 실어 나르려 하지 않는 교회는 이미 모여 있는 그리스도의 양 떼에게 이 소식을 진정으로 퍼 나르지 않는다.
참된 복음주의적인 교회는 복음 전도적인 교회일 것이다. 즉 복음이 말씀과 성례를 통해 전달되는 장소이며, 복음을 세상에 증거하는 사람들이다. 신자와 비신자들 모두 하나님의 좋은 소식을 듣는 곳이 될 것이다. 우리는 율법과 복음이라는 하나님의 말씀을 받고, 그리스도와 함께 장사 지내고 부활하기 위해 교회에 온다. 우리의 빈약한 대본을 포기하고 하나님의 펼쳐지는 드라마에 편입된다. 그러고 나서 이 세상으로 들어가 이 대본에서의 우리의 새로운 역할을 수행한다.
더 많이 용서받은 자들이 더 많이 사랑한다(눅7:47).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가 베푸시는 온갖 선물들의 수혜자일 때만이 하나님의 새로운 창조의 일부가 된다. 그리스도의 증인이요 이웃의 종이 되는 것이다. 표지 없는 사명은 눈이 멀었으며, 사명 없는 표지는 죽은 것이다. 레슬리 뉴비긴이 강조한 것처럼, 교회는 사명에 뛰어들지 않는다. 교회가 사명이다. 그러나 우리의 사명이 아니라 하나님의 사명이다. (pp 263-264)
왜 많은 기독교인이 교회 일로 지치는가?
스스로를 그리스도 중심이라고 말하는 교회들에서조차 지금 많은 신자들이 그리스도 없는 기독교를 경험하게 되는 중요한 이유 가운데 하나는, 전반적인 강조점이 은혜의 수단이 아니라 봉사의 수단에 맞춰져 있기 때문이다. 오늘날 많은 기독교인들은 지쳐 있으면서도 그 이유를 찾지 못하고 있다. 그 이유는 복음은 뒷전으로 물러나고 신자들에게는 끊임없이 요구가 쏟아지기 때문이다.
만인 제사장설과 만인 사역자론을 혼동하면 안 된다. 마치 그리스도께서 신약의 서신서들에서 찾아낼 수 있는 직분들을 하나도 세우지 않으신 것처럼 행동한다. 사역을 이런 식으로 접근하면 모든 양 떼가 목자가 되어야 한다. 양 떼에게 자급자족하라고 요구하는 것은 이렇게 빈약한 사고를 한 결과다.
교회에 지워진 짐은 그렇게 많지가 않다. 교회에게 대안적인 이웃, 친구들의 모임, 정치적인 행동 위원회, 사교 클럽 혹은 공공 봉사 단체가 되라고 하신 적이 없다. 교회는 그리스도를 명확하고 온전히 전달하여 신자들이 하나님의 부르심을 좇아 세속의 임무들을 수행하는 소금과 빛이 되도록 준비시킨다.
아주 오래전 옛날 저 아득히 보이는 언덕 위에서뿐 아니라 매주 하나님의 아들이 우리를 섬기러 오신다. 하나님을 섬겨야 할 자들은 우리이지, 하나님이 어찌 우리를 섬기냐고 생각할 수도 있다. 그렇지만 예수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그렇지만 예수는 베드로에게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에게도 말씀하신다. “내가 너를 씻어 주지 아니하면 네가 나와 상관이 없느니라”. 그것은 사실은 모독이요 일종의 교만이라고 하신다. 목욕하고 새 옷으로 갈아입고 음식을 취해야 할 사람은 우리이지 하나님이 아니다.
이제 예수께서는 우리 각자를 통해서 우리를 섬기신다. 특히 교회 안으로 부르신 직분자들을 통해서 섬겨 주신다. 지도자든 교인이든 목사와 교사라는 공적 사역은 전체 몸의 원활한 일을 방해하는 전제(專制)적 기구가 아니라, 승천하신 그리스도가 성도들을 준비시켜서 사랑 안에 서로 살고 이 세상에서 그들의 부르심을 이루게 하시려고 주신 선물이다(엡4:8-15). 사역자들은 말씀의 사역을 통해서 그리스도를 전달한다. 잘 준비한 설교뿐 아니라 봉사의 일 전체를 통해 그렇게 하는 것이다. 사실 교회에서 노래를 부르는 가장 중요한 이유는 우리의 내면적인 경험, 경건 그리고 열성을 표출하기 위함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말씀이 너희 속에 풍성히 거하여 모든 지혜로 피차 가르치며 권면하고 시와 찬송과 신령한 노래를 부르며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을 찬양하고”(골3:16)라는 말씀대로 서로 섬기기 위함이다. 우리는 말씀을 듣고 말씀을 노래하며, 성도의 교제라는 형태로 말씀을 묵상한다.
목사와 교사는 선원들이 아니다. 이들은 사람들의 재능과 정력을 교회로 빨아들이지 않는다. 이들은 그리스도에 대한 메시지를 전달하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그를 전파하여 각 사람을 권하고 모든 지혜로 각 사람을 가르침은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1:28-29).
사람들이 성경의 가르침에 정기적으로 푹 빠지지 못한다면, 이웃을 향한 우리의 그리스도 증거가 경박하고, 자충수를 두며 나아가 혼동스럽기조차 한다고 해도 놀랄 일이겠는가? 주의 만찬에서 배불리 먹는 자들이 일상의 세속 천직이라는 빵과 그리스도를 증거하는 생명의 빵으로 다른 사람들을 먹이길 원할(그리고 준비할) 것이다. 다른 사람들을 먹이기에 앞서 배부르게 먹어야 한다. 섬기기에 앞서서 섬김을 받아야 한다. 딱 한 번이 아니라 매주 그래야 한다.
교회는 복음이 아니다. 교회는 구세주가 아니다. 교회는 언제나 구원받은 죄인들의 공동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리스도가 세우고, 설교자, 교사, 장로 그리고 집사라는 선물을 주신 하나의 제도로서 교회는 우리의 영적 여정 내내 우리의 어머니 노릇을 한다. 칼빈, “하나님을 아버지로 모신 사람마다 교회를 어머니로 받는다”.
많은 사람이 교만, 혐오 혹은 오기에 혼자 성경을 읽고 묵상하는 것으로도 충분히 유익을 얻을 수 있다는 확신에 사로잡힌다. 이 사람들은 공적인 집회를 무시하고 설교를 미신적인 것으로 판단한다. 그러나 후회 막급한 실수와 어리석기 짝이 없는 망상으로 자신을 홀린 이 거룩하지 못한 분리에 합당한 벌에서 빠져나갈 자가 없을 것이다.
열광주의는 근대에 들어 온갖 형태를 취했다. 계몽주의의 세련된 이성주의에서부터 미국이 앞정 선 반 지성주의적인 감정주의까지 다양하다. 경건주의의 효과(특히 2차 대각성에서 극치를 이룬)는 윌리엄 맥라플린이 관찰한 것처럼 “집단적인 신념, 신조의 기준과 전통적인 형태의 적절한 준수에서 개별적인 종교 체험의 강조로” 강조점이 옮겨지는 것이었다. 계몽주의가 “종교의 궁극적인 권위”를 교회에서 “개별 지성”으로 옮겼다면, 경건주의와 낭만주의는 궁극적인 권위를 개인의 경험에 놓았다. 이 모든 것은 일정 기간 복음주의가 근대 세속주의의 희생자라기보다는 유포자에 더 가깝다는 점을 시사한다.
이생에서의 성장은 끝이 없는 과정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와 그리스도의 몸 안으로 자라난다. 교회를 떠나서 성장한다는 것은 몸의 머리와 연결을 잃는다는 것이다(엡4:12-15). 우리의 믿음은 결코 충분히 강하지 않고, 우리의 소망은 밝아야 할 만큼 밝지 않으며, 우리의 사랑은 알아서 먹는 자가 될 만큼 그렇게 온기 있지는 않다. 성숙도는 교회를 덜 중요하다고 밀쳐 이끌지 않는다. 믿음과 성숙의 원천이 항상 그리스도의 대사들을 통한 그리스도의 사역임을 알기 때문이다. 교회는 신실한 부모로서 자녀들이 자신을 돌보도록 하거나, 온갖 교훈의 사조에 밀려 오락가락하도록 내버려 두지 않는다. 교회는 그리스도의 양 떼를 지상의 순례 기간에 잘 인도할 것이다. (pp 290-295)
주님은 “내 교회를 세워라” 하지 않고, “내 교회를 세우리니” 하셨다
교회의 사역은 목사, 교사, 장로 그리고 집사를 통하여 우리를 섬기시는 ‘하나님의 사역’이다. 이 사역은 세상을 향해 넘쳐흐르는 진정한 선물의 시혜를 받는 감사하는 공동체를 만든다. 하나님의 나라는 우리가 세우는 무엇이 아니라, 우리가 받는 무엇이다(히12:28). 교회의 주께서는 “내 교회를 세워라” 하고 말씀하지 않으셨다. 예수가 그리스도라는 신앙고백이라는 “반석” 위에 “내 교회를 세우리니 음부의 권세가 이기지 못하리라”(마16:18)고 말씀하셨다.
지상 명령을 주면서도 부활하신 그리스도는 “내가 지금 떠나니 내 자리를 승계하여 내가 끼친 모범을 좇음으로써 내 구속의 일을 확장하도록 하라”고 하지 않으셨다. 오히려 이런 말씀을 주셨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내게 주셨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가서 모든 민족을 제자로 삼아 아버지와 아들과 성령의 이름으로 세례를 베풀고 내가 너희에게 분부한 모든 것을 가르쳐 지키게 하라 볼지어다 내가 세상 끝날까지 너희와 항상 함께 있으리라 하시니라”(마28:18-20).
복음이 우리 뒤에, 우리 앞에, 그리고 우리보다 먼저 가는 것이다. 교회는 무엇보다 먼저 복음에 의해 창조되어 의롭다 함을 받고 새로움을 입은 백성으로서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고 예수 그리스도를 증거하기 위해 다시 세상으로 이끌려 들어가는 존재다. 따라서 교회는 하나님이 심판과 은혜 안에서 활동하시는 장소이며 동시에, 심판당하고 의롭다 함을 받아 이 세상에서 자신의 부르심을 살아가는 사람들이다.
교회는 그리스도가 창설한, 그리스도가 세례, 설교 그리고 성찬 안에서 죄인들에게 자신을 내어 주는 역사적인 조직이면서 동시에, 믿음을 통해 살아 계신 머리에 연합해 있는 영적인 유기체다. 복음이 다른 모든 인간 활동에 앞서 우위를 갖는다. 그리고 어떤 특정한 교회도 그리스도가 그분의 말씀과 성령으로 다스리셔야만 진정한 교회라는 뜻이다.
예수는 제자들을 거느리셨다. 제자는 학생이다. 물론 1세기 유대의 학생은 오늘날 대학생과는 다르다. 선생이 교훈과 개인적인 교제를 위해 정기적으로 만나는 추종자들을 모은다. 강의를 하곤 교실을 떠나는 오늘날의 거리감 있는 교수(목사도 아주 자주 이런 식이지만)와는 달리, 이런 선생들은 학생들과 시간을 보냈고 학생들은 랍비로부터 정보를 받을뿐더러 그의 지혜와 모범을 통해 인격을 형성한다.
루터가 사도신경, 십계명 그리고 주기도문이나 겨우 아는 무지한 서민들에게 칭송을 받았지만, 그들을 아랫사람 취급하지 않았고, 그 자녀들에게 주중이면 교리문답을 써 가르쳤다는 점에 늘 감명을 받는다. 칼빈과 다른 개혁자들도 주로 교리문답 선생으로서 목사에 대한 이러한 기대를 수용했다. 그리고 이러한 노력으로 말미암아 그들 역시 일부요 그 안에서 자라나고 있는 공동체에 젊은이들이 연결되었다. 이와 반대로 오늘날의 사람들은 언약의 상속자가 아니라 고아들 마냥 영적인 지도자, 코치 그리고 멘토들에게 환호한다.
성공하는 과학자는 선배들의 권위에 순복한다. 좋은 과학자가 된다는 것은 좋은 바이올린 주자 혹은 양조 기술자가 되는 것과 비슷하다. 사물의 이치를 터득하기 위해서는 시간을 써야 한다. 성숙과 질보다는 효율성과 규모를 중시하는 이런 사대에서 우리는 쉬운 네 단계로 바이올린 켜는 법 혹은 와인 만드는 법을 가르쳐 주는 전문가를 훨씬 더 원한다. 그러나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예인(藝人)이 되기 위한 장기적인 헌신을 가치 우위에 두는 실천이다.
기독교인의 제자도는 목사와 교사들이라는 선물을 통해 “다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엡4:11-13,14-16)으로 세워지는 평생 과정이다. 이 사역은 부모와 가정의 친구들, 조부모와 어린이 체육 활동 코치들을 어린이들을 위해 말씀의 종이 되도록 한다. 또한 우리는 “굳센 데서 떨어질까 삼가”며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은혜와 그를 아는 지식에서 자라”(벧후3:17-18) 가기 위해 함께 부르심을 받았다.
공증된 복음이 공증된 사역과 함께 온다. 하나님 말씀의 사역자들은 자신의 사리사욕을 추구하고, 스스로의 체험을 유포하며, 강조하고 싶은 것을 강조하는 자들이 아니다. 훈련과 시험 그리고 인정으로 하나님이 자격을 보증하고, 우리에게 하나님의 이름으로 그분의 선물을 가져오는 자들이다. 우리의 목표는 우리 자신의 유산을 남기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유산을 골고루 나눠 주는 것이다. 교회는 하나님의 창조물이요 하나님의 선택하고 구속하고 새롭게 하시는 은혜의 결과이다. (pp 296-299)
우리는 걸어다니는 시체들이고, 우리의 최고급 의상은 수의(壽衣)이다
우리는 걸어다니는 시체들이고, 우리가 최고급 의상인 양 뽐내는 종교와 도덕이 사실은 수의임을 잊고 있다. 예수님의 말씀을 풀어 설명하자면 우리는 립스틱을 바른 시체와 같으며, 우리의 개과천선이 화장술에 불과하다는 점조차 깨닫지 못하고 있다.
우리의 무화과 나뭇잎은 좀 더 세련됐다(그리고 비싸다). 하지만 하나님의 임재 앞에서 우리의 벌거벗음을 감추는 데 성공하지 못한다. 우리의 시조들이 입었던 가죽옷과는 다르다. 우리의 죄뿐 아니라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사64:6) 같다. 이사야 59장은 여호와와 이스라엘이 맞서는 재판정의 모습을 보여 준다. 백성이 수많은 재난이 공정하지 않게 그들에게 임했다며 볼멘소리를 하지만, 하나님을 대신한 기소자인 선지자는 불평을 늘어놓는 사람들 하나하나를 희생자가 아닌 범죄자로 단죄한다. “그 짠 것으로는 옷을 이룰 수 없을 것이요 그 행위로는 자기를 가릴 수 없을 것이며 그 행위는 죄악의 행위라 그 손에는 포악한 행동이 있으며”(6절), 증거가 제출된 후에야 백성은 자신의 죄를 고백하고, 하나님의 심판을 자초했음을 인정하기에 이른다(9-15절).
이런 상황에서, “중재자가 없음을” 보신 그 재판장은 스스로 전투 복장을 입고 자기희생을 무릅쓰면서까지 백성의 구원을 성취한다.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구속자가 시온에 임하며 야곱의 자손 가운데에서 죄과를 떠나는 자에게 임하리라”(16,20절). 교회는 이 주체를 바꾸었을 뿐만 아니라, 그 주체를 우리로 바꿨다.
“그들이 딸 내 백성의 상처를 가볍게 여기면서 말하기를 평강하다. 평강하다 하나 평강이 없도다”(렘8:11). 이런 자들은 거짓 선지자들이다. 예레미야는 여기에 덧붙여 말한다. “그들은 너희에게 헛된 것을 가르치나니 그들의 말한 묵시는 자기 마음으로 말미암은 것이요 여호와의입에서 나온 것이 아니니라 항상 그들이 나를 멸시하는 자에게 이르기를 너희가 평안하리라 여호와의 말씀이니라 하며”(렘23:16-17). 거짓 선지자들이 위기에 대한 진실을 말할 수 없었던 근본적인 이유는 백성을 불쌍히 여기거나 하나님의 집을 아끼는 열심 때문이 아니라 인기에 급급했기 때문이었다.
개인적인 취향이라는 좁디좁은 세계에 갇힌 우리는 하나님의 말씀이 지으신 진정한 세계를 제대로 볼 수가 없다. 실제로 우리의 뿌리에서부터 참된 변혁을 가져오는 새롭고 놀라운 무엇 대신에, 부드럽게 현상을 인정해주는 발라드풍의 배경 음악을 더 많이 듣고 있다. 장대 끝에 매달려서 다른 모든 안전의 수단들을 놓아 버리고 하나님의 자비로운 팔로 떨어지기보다는, (그래도 말만은) 하나님의 도움을 받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 다른 수단을 찾아보도록 권유받는다. 우리가 대본을 쓸 때 죄와 구속은 하찮은 것이 된다.
라오디게아 교회는 에베소 교회처럼 첫사랑, 그리스도를 잃어버렸다. 그리고 미지근해졌다. 덥지도 차지도 않아서 온기를 느낄 수도 그렇다고 청량함을 느낄 수도 없었다. 거룩하신 하나님 앞에서 자신의 곤궁과 헐벗음을 깊이 자각한 교회는 모든 것을 지닌 구세주에게 떨어지지 않게 붙어 있을 것이다. 그러나 자기확신에 빠져 있고 내재하는 죄성을 상대적으로 무디게 인식하고 있는 교회는 편리한 대로 종교와 도덕에 손을 내밀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모든 사람이 올바른 규칙을 따르게 되면, 메시아의 왕국이 도래할 것으로 생각했다. 그러나 메시아 자신이 오셨을 때, 그들은 자신의 불의와 무기력함에 맞부딪치게 됐다. 그리스도는 괜찮은 사람들이 더 나아지도록 오신 것이 아니라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러”(눅19:10) 오셨다. 이것이 우리의 자존심을 짓뭉개는 것이라면, 또한 이것은 우리가 들을 수 있는 최고의 희망적이고 놀라운 소식이기도 하다. 구원은 획득하는 것(자기의 의를 쌓으려 하는)이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을 통하여 “하나님의 의”(롬10:3)를 선사 받는 것이다.
우리 자신을 신뢰하면 우리는 가만히 있어도 도덕주의로 향한다. 젊은 부자 관원처럼 예수께, “선생님이여 내가 무슨 선한 일을 하여야 영생을 얻으리이까” 하고 묻는다. 율법의 진의가 무엇인지 직면하게 될 때까지, “이것은 내가 어려서부터 다 지키었나이다”하고 스스로 지레짐작할 것이다. 우리가 비뚤어지고 가난하며 눈멀고 벌거벗었다고 저절로 알지 않는다. 밧줄의 끝으로 내몰리기를 좋아하지 않는다. 아니 제자들도 물었다. “듣는 자들이 이르되 그런즉 누가 구원을 얻을 수 있나이까 이르시되 무릇 사람이 할 수 없는 것을 하나님은 하실 수 있느니라”(눅18:26-27). (pp 307-310)
회심시뿐 아니라 순례 기간 내내 복음만이 “하나님의 구원 능력”이다
신자는 성도인 동시에 죄인으로 남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이 제정하신 은혜의 수단들을 통해 복음으로 먹어야 하는 필요 이상으로 자라날 수가 없다. 회심시뿐 아니라 순례 기간 내내 복음만이 “하나님의 구원 능력”(롬1:16)이다. 주일마다 그리스도가 창세기부터 요한계시록까지 선명하게 선포된다면, 성도는 믿음과 선행 가운데서 힘을 얻을 것이고, 비신자들은 그리스도의 거듭나게 하는 말씀을 접할 수 있을 것이다.
말씀과 성령을 통해 외부인은 내부인이 된다. 사람들을 외부인으로 만드는 낯선 요소들을 제거함으로써가 아니라, 하나님이 제정하신 낯선 메시지와 낯선 방법으로 하나님의 강력한 일에 기도하는 마음으로 참여함으로써, 우리는 설교와 성례라는 표지를 통하여 교회의 사명이 성공적으로 수행되는 모습을 보게 될 것이다.
교회의 직분자들을 통한 교회의 제자화는 참된 선교의 핵심이다. 목사는 선포하고 가르치며 성찬을 시행한다. 장로는 신앙과 행위의 교정을 비롯하여 양무리의 영적 필요를 돌본다. 집사들은 교회가 모은 물질을 급박한 필요에 처한 사람들에게 나누어 준다. 이런 표지를 가지고 있고, 이런 표지에 충실하게 하려고 노력하는 교회들이 선교적이다. 우리의 순례 여정에서 어떤 기독교인의 성숙도 이 사역을 넘어서 자급자족하는 자가 되지는 않는다. “너희를 인도하는 자들에게 순종하고 복종하라 그들은 너희 영혼을 위하여 경성하기를 자신들이 청산할 자인 것 같이 하느니라 그들로 하여금 즐거움으로 이것을 하게 하고 근심으로 하게 하지 말라 그렇지 않으면 너희에게 유익이 없느니라”(히13:17).
성령으로 말씀과 성례를 통해 하는 그리스도의 사역은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는 데 충분할뿐더러, 세상을 향한 우리의 선교에도 충분하다. 승천하신 우리의 왕이 수단을 제정하셨다. 그 나라를 받은 평생의 신자들은 저 멀리 떨어져 있던 자들을 이끌어 오기 위해서 더 커져 나가는 원을 그리며 활동한다.
바울은 디모데에게 종말의 자기중심적 성향에 대해 경고한 후에, 복음을 듣는 자들의 현실적인 필요에 끼워 맞추거나 신조를 행위로 바꾸지 말라고 명령한다. 오히려 “말씀을 전파하라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항상 힘쓰라”고 한다. 즉 인기를 끌든 그렇지 못하든 그렇게 하라는 것이다. “범사에 오래 참음과 가르침으로 경책하며 경계하며 권하라 때가 이르리니 사람이 바른 교훈을 받지 아니하며 귀가 가려워서 자기의 사욕을 따를 스승을 많이 두고 또 그 귀를 진리에서 돌이켜 허탄한 이야기를 따르리라 그러나 너는 모든 일에 신중하여 고난을 받으며 전도자의 일을 하며 네 직무를 다하라”(딤후4:2-5).
자아도취의 해결책은 우리에 대해 더 많이 논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말씀을 세상에 전하는 것이다. 우리 증거의 초점이 우리의 변화된 삶이면, 우리만이 아니라 우리의 증언을 듣는 사람도 쉽게 실망할 수 있다. 사도들은 예수 그리스도와 역사 안에서 일어난 사건에 너무 압도되어 자신들의 영적 전기에 초점을 맞추는 것에 열중하지 못했다. 사도들은 사람들을 죽음에서 생명으로 변화시키는 능력을 가진 것은 그리스도의 삶, 죽음 그리고 부활에 대한 자신들의 증언이라는 것을 알았다. 자신들의 내적 변화 혹은 경험을 결코 부인하지 않았지만, 이것조차도 복음의 결과라는 것을 알았다. 그들이 중생한 것은 어떤 단계에 이르는 공식을 따랐기 때문이 아니라, “살아 있고 항상 있는 하나님의 말씀 — 너희에게 전한 복음이 곧 이 말씀(벧전1:23,25)으로 되었다. 사도들은 자신들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해 증언했다.
하나님은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다. 하나님의 말씀은 우리 자신의 도덕적인 활동으로 보완되기를 기다리는 죽은 무엇이 아니다. 천만에 그렇지 않다. 하나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운동력이” 있으며(히4:2) 언제나 의도한 사명을 성취한다(사55:11). 사실, 기독교는 선교적 신앙이다. 왜냐하면 기독교는 전권대사들이 나르는 교서요 선언서이기 때문이다.
마르틴 루터는 자신의 시대에 많은 개혁자가 있었지만, 그들은 모두 컵의 바깥을 씻으려 했다고 지적한다. 종교개혁은 사람들에게 그들 자신으로부터 나오라고, 죄뿐 아니라 선행으로부터도 도망치라고 했으며 오직 믿음을 통해 오직 그리스도만을 붙잡으라고 했다. 전체 예배가 그리스도의 복음에 선명한 우선순위를 두도록 개혁되었다. 이제 예배는 더 이상 교회가 하나님을 향해 드리는 희생이 아니라 하나님이 백성을 향해 베푸시는 구속의 섬김이 되었다. 이제 백성은 자신의 일상적인 부르심을 통해 이웃을 사랑하고 섬기기 위해 예배를 마치고 일어서게 되었다.
종교개혁자들은 참된 변혁, 즉 그리스도 안에서 일어나는 성화가 자신의 알량한 의를 버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발견됨의 결과 외에는 아무것도 아님을 알았다. 엘리자베스 악티마이어, “사람들이 들을 때까지 하나님의 말씀을 통해 하나님이 말씀하신다고 믿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를 떠나서 비신자들에게 복음을 확증할 수 있는 어떤 논증도 없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 그러므로 교회를 깨우고 새롭게 할 수 있는 것은 그리스도를 선포함뿐이다. 그리스도를 선포함은 인간의 말 너머의 초월적인 말씀이 있다는 믿음의 증거다.” “미국의 수많은 교회들은 더 이상 성경을 통해 말씀하시는 하나님의 음성을 듣는다고 믿거나 기대하지 않는다. 그래서 더 이상 기독교가 아니다.”
예수께서는 사역을 하시면서 언제나 이적으로 군중을 모으셨지만, 설교를 하실 때에는 그 중 상당수를 내치셨다. 예수는 여기서 사람들이 찾지 않는 것이 그들에게 가장 필요한 것임을 선언하신다. 그것은 예수 자신인 영원한 “하늘에서 내려온 떡”(요6:31)이다. 실망하여 떠나는 자들이게 이렇게 덧붙이셨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44절). 시몬 베드로의 대답이다. “주여 영생의 말씀이 주께 있사오니 우리가 누구에게로 가오리이까”(68절). (pp 320-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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