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이클 호튼

미국의 제 2차 대각성 운동은 제 1차 대각성 운동의 계승이 아니다/ 마이클 호튼

강대식 2015. 2. 24. 08:38

 

계몽주의자들은 하나님 중심적인 초자연적 전망에서 인간 중심적인 자연주의적 전망으로 변화시키는 기여했지만 청교도 이후의 미국인들은 계시도 이성도 진리의 중재자로 결코 받아들이지 아니하였다. 대신에, 그들은 심판자의 자리에 직관을 앉혀 놓았다. 직관이란 진리에 대한 즉각적이며 본능적인 지각으로서 사유의 과정 없이 직접적으로 이해하는 것이다.” 미국인 각각은 각자 개인적인 상표를 단 철학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그 상표는 한 번도 써먹어 보지 않은 상표이다. 소박한 농부라 할지라도 어떤 사상 체계나 어떤 의식에 준하거나 참조하기 않고 자기 식대로 자기 종파를 만들 수 있었다. 이리하여 19세기 동안에 이단 종파들이 양산되었다. “1883년 일리노이 주의 한 익살꾼은 보도하기를, 한 열정적인 부흥사가 성경을 들고 큰 소리로 울고 불고 소동을 내면서도 성경 본문에 대해서는 일언반구의 설명도 없이 우리의 독립선언서만 외치고 있었다는 말이 기록되어 있을 정도였다.

 

이러한 직관주의적 개인주의는 제 1차 대각성 운동에서 제 2차 대각성 운동으로 넘어가면서 심해지기 시작하였다. 이 변화가 바로 사건의 진원지라는 주장이 나의 책의 기본 골격이다. 최초의 각성 운동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합리적인 확신의 기초 위에서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을 촉구하였다. 에드워즈는 상당히 폭넓은 사상 체계를 가지고 있었으며 그와 같은 폭넓은 사상 때문에 그는 유럽을 휩쓸고 있던 새로운 사상들과 교류할 수 있었다. 성경신학이나 철학에 대한 그의 이해는 아주 정확하여 심지어 그리스도를 변호하는 일에 존 로크를 끌어다 사용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지만 그의 설교는 심대한 정서적 영향력을 끼첬다. 1차 대각성운동은 계몽주의의 자연주의에 직면하여 일어난 초자연주의에 대한 대중의 갈급한 외침이었다. 그렇지만 제 1차 대각성 운동은 전혀 비이성적이거나 비합리적이 아니었다. 오히려 전인(全人)의 회심(回心)을 불러일으켰다.

 

그러나 제 2차 대각성 운동에서는 그 초점이 하나님께서 사람들에게 어떻게 하시는가에서 사람들이 하나님께 대하여 어떻게 하는가로 변하였다. 그 변화는 신학으로부터 감성으로의 변화를 포함하고 있다. 2차 대각성 운동의 목표는 듣는 사람들의 마음 중심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그들의 감성을 변화시키는 것이었다.

 

이리하여 제 2차 대각성 운동은 개척 지대의 톱밥 먼지를 따라 모이는 캠프 운동으로 확산되었다. 이러한 집회들은 종종 중세 유럽이나 현대 유럽의 이단 종파에 비교될 수 있는 분파적 민중 종교를 반영하고 있다. 개척지 설교자였던 피터 카트라이트는 19세기 초의 캠프 집회에 대해서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첫 경련이 일어난 다음 여자들의 끈 달린 모자나 남자들의 모자나 빗 따위가 공중에 날아다니는 것을 보게 될 것이다. 그리고 갑자기 머리를 숙였다가 젖혔다 하는데 그들의 긴 머리채가 흔들리는 모양이 마치 채찍이 휘돌려지는 것 같았다.”

설교자들 자신들이 히스테리컬해져서 땅바닥에서 딍구는 이상한 사람들이 되어버렸다. 그들은 정신없이 웃어댔는데 그들은 이를 가리켜 거룩한 웃음이라 했다.” 그런 다음 그들은 개처럼 펄쩍 뛰며 사방을 돌아다녔으며 다람쥐를 쫓아다니며 짖어대는 개처럼 귀신을 쫓는다고 소리쳐댔다. 그리고 다른 모든 것이 실패로 돌아가자 그들은 알 수 없는 말을 횡성수설했는데 이들은 이것이 성경에서 사도들이 했던 다른 방언들이라고 믿었다.”

 

합리주의적인 이신론과 냉랭하고 죽어버린 정통에 대한 반작용으로 일어난 이 새로운 감정주의를 제 2차 대각성운동이라고 부르고 있는데, 사실상 이것은 제 1차 대각성운동의 계승자가 아니다. 이 시점에서 있어서도 미국의 개인주의는 계속해서 살아남았다. 합리주의는 사람이 알 필요가 있는 것은 다 자신의 이성을 통하여 알 수 있다고 주장했던 반면에 새로운 부흥 운동은 사람이 알 필요가 있는 것을 다 그의 경험과 직관을 통하여 알 수 있다고 주장하고 있다. 그러나 정통적인 기독교의 주장은 다음과 같은 것이다. , 경험과 이성 모두 다 우리의 신앙에 필요한 측면들이지만 이 둘에 대하여 판단하고 어떤 사람의 명제나 감정의 타당성을 입증해 주는 것은 계시라는 것이다.

 

- 마이클 호튼, 미국제 복음주의를 경계하라, E-BOOK, PP 197-2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