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살전 5:21-22
종교개혁을 승리로 이끌었던 세 가지 중대한 원리가 있다.
1 성경의 충분성과 우월성
2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닌,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은 칭의
3 개인적 판단의 권한
만일 우리가 이 세 원리들 중 하나라도 포기한다면,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머리카락을 잘린 삼손 신세가 되고 만다.
기독교는 이 세 원리 위에 굳게 서 있고,
종교개혁은 이 원리에 의해서 개혁에 성공하였다.
이 세 원리는 지금도 기독교 안에서 전하는 가르침들을 판단하는 기준이 되어야 한다.
모 장로처럼 자기의 우익사상 또는 친일사상을 합리화하기 위해
역사적인 사건들을 왜곡하고 기독교를 우습게 만들어서는 안 된다.
1. 성경의 충분성과 우월성의 원리를 붙잡아야 한다.
기독교는 성경의 충분성과 우월성 위에 서 있다.
기독교는 성경으로 충분하다. 모든 것을 다 해결할 수 있다.
성경이 뭔가 부족해서 심리학, 경영학, 신비주의로 보충해야 하는 것이 아니다.
내면치유는 심리학으로, 외면성장은 경영학으로, 영성은 신비주의로, 현대 교회는 치닫고 있다.
성경을 사랑하고, 역사적으로 쌓인 성경 해석들을 연구하여 교훈을 받으면,
성경으로 충분한 것을 알 수 있고 확신을 가지게 된다.
(역사적인 성경 연구들을 공부하지 않으니까 현대사상들에 끌리고 성경과 멀어진다.)
단, 하나님께로부터 온 영을 받아야 하는 것이 첫째 조건이다.
고전2:12-14)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우리가 이것을 말하거니와 사람의 지혜가 가르친 말로 아니하고
오직 성령께서 가르치신 것으로 하니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
성경에 대해서 자꾸 딴 소리를 하는 사람들은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지 못해서 그런다.
그들은 세상의 영에 사로잡히고 오직 육에 속하여 사람의 지혜로만
모든 것을 판단하려고 하고 그것만이 진리인양 고집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한다.
그에게는 그것들이 어리석게만 보인다.
그들은 성령이 없으니, 그것들을 알 수도 없다.
성령의 일들은 영적으로만 분별되기 때문이다.
하나님으로부터 온 성령을 받은 사람만이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 수 있다.
성경으로 충분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심리학, 경영학, 신비주의로 보충할려다가 헤어나오지 못하고 그 포로가 되고 만다.
그것이 현대 기독교의 실상이다.
성경의 충분성을 알고 나면 성경의 우월성은 자연스런 귀결이다.
성경의 권위보다 더 우월한 것은 없다.
성경은 우리 기독교의 신앙과 생활의 유일하고도 절대적인 기준이고 최고 권위이다.
성경의 충분성이 무너질 때 성경의 우월성, 그 권위도 무너지고 만다.
우리의 모든 판단의 최종성은 성경의 우월성에 있어야 한다.
이 성경의 우월성으로 모든 것을 판단해야 한다.
2. 이신칭의의 원리를 붙잡아야 한다.
우리는 율법의 행위로서가 아니라, 오직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는다.
진실하고 성실하고 교양 있고 영향력 있으면 의로운 것이 아니다.
그 인간의 의로움은 하나님 앞에서는 걸레와 같은 의이다.
아무리 의롭고 행위가 뛰어나도 그 율법의 행위로는 하나님 앞에서 의로 인정받을 수 없다.
하나님의 거룩하심과 순결함의 완전하심과 탁월성을 모르니까 까부는 것이다.
바리새인들은 그 율법의 의로 인정받고 구원받는 줄로 알았다.
사람의 행위는 하나님께 의로 인정 받을려면 먼저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아야 한다.
믿음으로 말미암는 칭의가 행위의 의의 시작이요 터요 원인이요 증거요 핵심이다.
칭의가 없는 행위로써는 율법의 축복 약속들을 누릴 조건을 성립시킬 수 없다.
세상은 이신칭의를 받지 않고도 선을 행하고 도덕적으로 살 수 있다고 한다.
그래서 말로는 교육으로는 세상을 개혁과 변화를 시킨다고 하면서
더욱 악을 행하고 무질서와 혼돈의 열매들만을 양산하고 있다.
먼저, 속이 은혜로 변화되어야, 겉이 변화될 수 있는 것이다.
양심이 그리스도의 피로 씻음을 받고 마음이 영으로 새로워져야 한다.
성령으로 말씀으로 거듭남과 회심이 없이는 사람은 근본적으로 변화될 수 없다.
예수님의 말씀이다.
마23:25-26) “화 있을진저 외식하는 서기관들과 바리새인들이여
잔과 대접의 겉은 깨끗이 하되 그 안에는 탐욕과 방탕으로 가득하게 하는도다
눈 먼 바리새인이여 너는 먼저 안을 깨끗이 하라 그리하면 겉도 깨끗하리라”
믿음으로 칭의를 받을려면, 예수 그리스도께서 십자가에서 내 죄를 대속하셨음을 믿고
그 피로 씻음을 받고 그리스도와 연합하고 성령으로 새롭게 함을 받아 새 존재가 되어야 한다.
고후5:17) “그런즉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 있으면 새로운 피조물이라
이전 것은 지나갔으니 보라 새 것이 되었도다”
갈 2:20)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믿음은 내 의지의 결단이 아니요, 내 육의 결단이 아니다. (찰스 피니는 그 원흉이다)
하나님께서 은혜로 선물로 주셔야 한다.
엡2:8-9)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
행위에서 난 것이 아니니 이는 누구든지 자랑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라”
그 은혜를 사모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선물로 믿음을 주신다.
요7:38)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오리라 이는 그를 믿는 자들이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3. 개인적 판단의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
개인적 판단의 권한이란, 모든 그리스도인들 개개인이,
자기 앞에 종교적인 진리로 제시된 것이, 하나님의 진리인지 아닌지 여부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판단할 권한을 가지고 있다는 의미이다.
성경의 충분성과 우월성을 믿는 사람이라면,
우리가 율법의 행위로가 아니라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 함을 받음을 믿는다면,
우리는 각자가 우리 앞에 제시된 진리들을 성경을 기준으로 판단할 권한이 있다.
우리는 완전히 충족하고도 우월한 성경을 가지고 있기에,
그 안에 있는 믿음의 진리들을 믿기에,
그 성경으로 우리 앞에 제시되는 진리들을 시험하고 분별하고 판단해서 취해야 한다.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고, 악은 어떤 모양이라도 버려야 한다”.
천하보다 귀한 나의 영혼을 사랑하고, 진리 아닌 것들에 기만당하지 않을려면,
개인적 판단의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
더욱이나 현대와 같이 교회와 세상에 철학과 속임수가 판을 치고
미혹의 영과 거짓의 영이 사람들의 심령을 사로잡는 때에는
개인적 판단의 권한은 너무도 중요하고 절대적이다.
개인적 판단을 무시하니까, 쉽게 속아 넘어가고 영혼까지 팔어먹게 된다.
진리와 거짓을 둘 다 존중하는 것은 이단의 특징이다.
도둑은 도적질하고 죽이고 멸망시킨다는 주님의 말씀을 유념해야 한다.
구원파와 같은 무리들이 어느 시대에나 나타나 혹세무민하고 교회를 멸망의 길로 끌고 갔다.
사도 바울은 오늘 본문의 말씀으로 “범사에 헤아리라”(살전5:21)고 한다.
그는 “사도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복음 전도자들, 목사들, 선생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너희의 감독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너희 목회자들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간에 너희는 그것을 믿어야 한다”라고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범사에 헤아리라”고 말하고 있다.
그는 “교회가 참이라고 선포하는 것은 무엇이 되었든지 너희는 따라야 한다” 하지 않고 있다.
“지극히 선한 것을 분별해야 한다”(빌1:10)고 말하고 있다.
“범사에 헤아리라”는 것은 성경의 저울에 모든 것을 달아보라는 말씀이다.
더 자세히 표현하면 다음과 같다.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모든 것을 헤아리라.
모든 목회자들, 모든 가르침, 모든 설교, 모든 교리,
모든 복음전도, 모든 저술, 모든 견해, 모든 실행을 검증하라.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모든 것을 시험해 보라.
성경을 기준으로 삼아 모든 것을 측정해 보라. 성경의 표준에 의해 모든 것을 비교해 보라.
성경의 저울에 모든 것을 달아보라. 성경의 조명에 의해 모든 것을 비추어 보라.
성경의 도가니 안에서 모든 것을 시험해 보라.
그리하여 성경의 불을 견뎌 낼 수 있는 것들은 받아들이고 지키고 믿고 따르라.
그러나 성경의 불을 견뎌 내지 못하는 것은 부인하고 거부하고 질책하고 던져버리라”.
바로 이렇게 하는 것이 개인적인 판단이다.
이것이 우리가 자신의 영혼을 사랑한다면 행사해야만 하는 권한이다.
우리는 단지 교황이나 추기경의 말이라는 이유로, 감독이나 사제들의 말, 장로나 집사의 말,
교회나 종교 회의의 발표라는 이유로, 청교도들, 혹은 종교개혁자의 말이라는 이유로
종교적인 어떤 사항들을 믿어서는 안 된다.
반드시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모든 것을 헤아려 보아야 한다.
“우리는 교회에서 가르치는 일을 하는 모든 사람을 믿어서는 안 된다.
대신에 그들의 가르침이 올바른지 아닌지에 대해 주의해야 하며 진지하게 검증해 보아야 한다.”(다베넌트 감독)
이것은 선지자 이사야도 강조하는 교리이다.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계시들을 직접 전달하는 사람들이 있었던 시대에 쓰인 말씀이다.
사8:19-20) “혹이 너희에게 고하기를 지절거리며 속살거리는 신접한 자와 마술사에게 물으라
하거든, 백성이 자기 하나님께 구할 것이 아니냐 산 자를 위하여 죽은 자에게 구하겠느냐 하라
마땅히 율법(성경)과 증거의 말씀(가르침)을 좇을지니
그들이 말하는 바가 이 말씀에 맞지 아니하면 그들이 정녕히 아침 빛을 보지 못하리라”
이것은 산상수훈에서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시하시는 원리이다.
교회의 머리 되시는 분은 거기에서 이렇게 말하고 있다.
(마7:15) “거짓 선지자들을 삼가라
양의 옷을 입고 너희에게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라 그의 열매로 그들을 알지니”.
그의 열매로 거짓 선지자들을 알려면 우리는 개인적 판단의 권한을 행사해야 한다.
사도행전에서의 베뢰아 성도들의 태도를 본받아야 한다.
그들은 사도 바울이 저희에게 설교하였을 때에 그의 말을 무조건 받아들이지 않았다.
“이것이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였다.
그리고 “그러므로 그 중에 믿는 사람이 많았다”라고 말한다(행17:11-12).
사도 바울은 무조건 믿지 말고 성경의 저울로 스스로 판단하라고 한다.
(고전10:15) “나는 지혜 있는 자들에게 말함과 같이 하노니
너희는 내 이르는 말을 스스로 판단하라”.
(골2:8) “누가 철학과 헛된 속임수로 너희를 노략질할까 주의하라”.
사도 요한도 말씀한다.
(요일4:1) “사랑하는 자들아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
(요일1:10) “누구든지 이 교훈을 가지지 않고 너희에게 나아가거든
그를 집에 들이지도 말고 인사도 하지 말라”.
한때 기독교계 전체가 아리우스 이단설을 받아들인 적이 있었다.
천년 동안 중세 기독교는 성경과 멀어져 암흑시대라 불리운다.
교회의 종교회의도 실수들을 범했다.
오늘날 에베소 교회가 어디에 있는가? 사데 교회가 남아 있는가? 다른 다섯 교회들은?
교회가 행한 잘못이라고 해서 거기 속한 내 영혼에 대한 책임이 모면되겠는가?
교회와 더불어 잘못을 행하고 함께 망하기 보다는
나 홀로일지라도 자신의 입장을 고수하고 구원받는 것이 천 배나 더 낫지 않은가?
“나는 도저히 스스로 판단할 수는 없다”면서 지옥에 가는 것보다는
“범사에 헤아려” 천국에 가는 것이 훨씬 낫다.
교회와 마찬가지로 목회자들 역시 결코 실수를 범하지 않는 완벽한 자들이 아니다.
그들도 기껏해야 단지 인간일 뿐이다.
교황들이든 탁월한 포로테스탄트들이든 마찬가지다.
루터는 공재설을 고수하였다. 그것은 중대한 잘못이었다.
칼빈은 세르베투스의 화형을 권면하였다. 그것은 심각한 잘못이었다.
국교도들은 청교도들을 박해하였다. 그것은 중대한 잘못이었다.
웨슬리와 토플레디는 칼빈주의에 대하여 격심한 언쟁을 벌였다. 그것 역시 중대한 잘못이었다.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지 않고 목회자들을 붙들고 있다면, 상한 갈대를 의지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는 결코 목회자들을 교황으로 만들어서는 안 된다. 맹목적인 목사 추종자가 되지 말라!
우리는 목회자들이 그리스도를 좇는 한, 성경을 좇는 한, 그들을 좇아야 한다.
그렇지 않는 한 단 한 마디도 더 믿어서는 안 된다.
성경을 사랑하고 역사적인 성경 해석들을 공부해야 한다. 그 길이 살 길이다.
(마15:14) “만일 소경이 되어 소경을 인도하면 둘이 다 구덩이에 빠지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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