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펄전, “모든 진정한 회심에는 본질적인 공통점이 있다. 즉, 죄를 참회하는 고백이 있어야 한다. 그리고 그 죄의 용서를 위해 예수님을 바라보는 것이 있어야 한다. 또한 이후의 삶에 전적으로 영향을 미칠 정도의 진정한 마음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이런 본질적인 요소가 없다면 그것은 진정한 회심이 아니다.”
회심은 심오하고 신비하다. 회심은 선물이자 의무이기 때문에 두 가지 면을 지니고 있다. 바로 신적인 측면과 인간적인 측면이다. 인간적인 측면은 우리의 순종, 책임과 관계가 있다. 성경은 그것을 다음과 같이 말한다. “너희가 만일 그를 찾으면 그가 너희와 만나게 되시려니와 너희가 만일 그를 버리면 그도 너희를 벌하시리라”(대하15:2).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받으라”(행2:38). “누구든지 주의 이름을 부르는 자는 구원을 받으리라”(롬10:13). “그의 계명은 이것이니 곧 그 아들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을 믿고”(요일3:23).
신약은 이것에 관련해 상존하는 위험이 있음을 보여 준다. 사람들이 이런 의무를 행하지 않았음에도 자신들이 명령에 순종했다고 생각한다는 것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천국에 다 들어갈 것이 아니요”(마7:20). 믿음에는 영혼을 구원하는 진정한 믿음이 있다. 그러나 구원하지 못하는 거짓 믿음도 있다. 그래서 교회에 속한 자들에게 다음의 권면이 필요하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고후13;5).
성경은 또한 회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측면에 대해 많이 말한다. 인간은 성경의 많은 부분이 입증하듯이 회심에서 수동적이다. 따라서 오직 인간의 편에서만 하는 회심은 결코 회심이 아니다. 회심은 거듭남을 수반한다. 새로운 본성, 죽음에서의 부활, 새로운 생명의 부으심이 그것이다. 크리스천들은 “혈통으로나 육정으로나 사람의 뜻으로 나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들이니라”(요1:13). 회심은 하나님의 행위이다. 인간은 다만 수동적으로 반응할 뿐이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니”(요6:44). “살리는 것은 영이니 육은 무익하니라 내가 너희에게 이른 말은 영이요 생명이라”(요6:63). “너희는 그 은혜에 의하여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받았으니 이것은 너희에게서 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의 선물이라“(앱2ㅣ8).
회심에 있어서 하나님의 사역을 묘사하기 위해 가장 흔하게 사용하는 표현은 “거듭남”이다.
스펼전, “그것은 위대한 신비다. 그리고 전적으로 초인간적인 것이다. 우리는 그것에 기여할 수 없다. 인간은 스스로는 다시 태어나게 할 수 없다. 인간의 첫 번째 탄생은 자신의 능력으로 한 것이 아니었다. 그의 두 번째 탄생은 더욱 그렇다. 그것은 성령의 역사이며 하나님의 사역이다. 그것은 새로운 창조다. 그것은 소생시키는 것이다. 그것은 처음부터 끝까지 기적이다.”
타락한 인간이 자기가 그 동안 사랑하던 것을 후회하고 자기가 미워하던 것을 믿을 수 있기 전에는 반드시 먼저 본질의 변화가 있어야 한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4).이것이 사실이라면 회개와 믿음은 새로운 삶의 원인이 아닌 다시 새롭게 된 사람이 취하는 행동으로 이해해야 한다.
“한 가지 전환점이 있다. 그것은 구원과 영생을 보장하는 유일한 것이다. 그 전환점을 우리는 회심이라고 부른다. 회심은 거듭남이나 새로운 탄생에서 제일 먼저 일어나는 분명한 결과다. 거듭난 인간은 삶의 흐름이 바뀐다. 회심한다는 것은 바로 방향을 전환하는 것이다.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위해 인간은 하나님으로 인해 다시 태어나야 한다. 하나님이 먼저 그를 위로부터 다시 태어나게 하시기 전에는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를 마음 속으로 들어오게 할 수 없다.”
“크리스천이 되는 순간에 중요한 것은 거듭남에서 행하시는 하나님의 행위다. 그러나 거듭남은 결코 회심이 없이는 이루어지지 않는다. 그리고 회심은 독자적인 행위라기보다는 하나의 과정이다. 그러나 이것을 위해 인간이 해야 할 수고는 없다.”
그러나 율법이 복음보다 먼저 필요한 것은 성경의 원칙이다. “목사는 죄의 악을 날카롭고 신랄하게 선포해야 한다. 우리 주님이 하셨듯이 율법의 정신을 열고 인간의 악한 생각과 의도, 성향이 그것을 어떻게 깨뜨렸는지를 보여 주어야 한다. 이것을 통해 많은 죄인들이 찔림을 받을 것이다. 로버트 플록하트는 말했다. ‘우리가 율법이라는 날카로운 바늘로 들어가는 길을 뚫지 않는다면 복음의 은실로 바느질을 하려고 아무리 노력해 보았자 소용이 없다.’ 율법이 바늘처럼 먼저 간 후에 복음의 실이 끌려 온다.”
사역을 하면서 스펄전은 복음주의가 법의 선포 없이 전파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고방식을 깊이 우려했다. “많은 복음 설교자가 율법이 우리를 그리스도에게 인도하는 교사라는 사실을 잊어버렸다. 우리는 성령의 죄를 깨닫게 하는 날카로운 바늘 없이 바느질을 하려고 하는 사역자를 너무 많이 보아 왔다.”
- 이안 머리, 『오래된 복음주의』, pp 59-6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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