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신학비판

[스크랩] 현대교회와 휴머니즘

강대식 2011. 2. 26. 08:27

현대교회와 휴머니즘
  
1 온 땅의 구음이 하나이요 언어가 하나이었더라 2 이에 그들이 동방으로 옮기다가 시날 평지를 만나 거기 거하고 3 서로 말하되 자, 벽돌을 만들어 견고히 굽자 하고 이에 벽돌로 돌을 대신하며 역청으로 진흙을 대신하고 4 또 말하되 자, 성과 대를 쌓아 대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 5 여호와께서 인생들의 쌓는 성과 대를 보시려고 강림하셨더라 6 여호와께서 가라사대 이 무리가 한 족속이요 언어도 하나이므로 이같이 시작하였으니 이후로는 그 경영하는 일을 금지할 수 없으리로다 7 자, 우리가 내려가서 거기서 그들의 언어를 혼잡케 하여 그들로 서로 알아듣지 못하게 하자 하시고 8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신 고로 그들이 성 쌓기를 그쳤더라 9 그러므로 그 이름을 바벨이라 하니 이는 여호와께서 거기서 온 땅의 언어를 혼잡케 하셨음이라 여호와께서 거기서 그들을 온 지면에 흩으셨더라(창 11:1-9)

Ⅰ. 들어가며
   우리는 3주 동안 중세의 기독교철학을 중심으로 신앙과 이성, 주지주의와 유의주의, 그리고 실념론과 유명론의 대립과 조화를 통하여 신학사상이 변천되어 온 과정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과정에서 때로는 철저한 인간의 이성과 의지를 배격하고 유의주의에 기초하여 하나님의 절대의지 또는 절대주권에 기초하여 신학을 정립하려는 신학자도 만났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의지보다는 이성을 중요시하는 주지주의 신학자들도 만났습니다. 교부철학자 어거스틴이 전자를 대표하는 신학자라면, 스콜라철학자 토마스 아퀴나스는 후자에 가까운 신학자로 평가될 수 있습니다. 그리고 인간의 이성보다는 의지를 강조하면서도 이성과 신앙의 분리, 학문과 종교의 분리, 교황권과 세속의 군주권의 분리 등을 시도한 프란치스코학파의 옥캄도 만났습니다.

신학사상은 시대 시대마다 성도들을 진리로 이끄는, 그리고 그리스도인이 되도록 하는 중요한 동인(動因)도 되었지만, 또 다른 한편에서는 신학이라는 매체를 이용하여 성도들의 삶을 오히려 비성경적으로 이끄는 경우도 있었습니다. 즉, 신학이 진리의 길, 하나님께로 나아가는 길이 아닌 인간의 부패상을 드러내는 수단으로 전락된 경우가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중세 로마 가톨릭의 면죄부판매였습니다. 이에 반하여 신학이 성도들에게 깊은 영성을 갖도록 하여 하나님과의 깊은 교제의 길로 나아가게 하는 매체가 된 경우도 있었는데, 이것이 바로 중세의 로마 가톨릭에 대항하여 등장한 종교개혁 운동이었음을 우리는 이미 3주차 특강에서 확인한 바 있습니다. 루터로부터 시작된 종교개혁이 쯔빙글리와 칼빈으로 이어지면서 개혁주의로 나아가게 하였는데, 이러한 개혁주의는 하나님의 절대적인 주권을 인정하고 ‘오직 성경’과 ‘오직 은혜’ 그리고 ‘오직 믿음’으로만 구원의 길, 그리고 주님께로 나아갈 수 있는 길임을 알게 하였습니다.

그러나 중세를 넘어 근세에 들어오면서 이처럼 철저하게 성경으로 돌아가려는 종교개혁과 개혁주의의 등장도 있었지만, 또 다른 한 편에서는 중세의 교회로부터…더 정확히 말하면 하나님(신)으로부터 이탈하여 인간중심주의, 인간의 경험 내지는 지성(이성)주의에 바탕을 둔 휴머니즘(Humanism) 사상도 등장하였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휴머니즘사상은 종교개혁으로 시작된 개혁주의 정신과는 오히려 대립과 갈등을 일으킬 수 있는 인본주의에 그 바탕을 둔 사조인데, 이는 현대에 이르기까지 끝없이 기독교와 조화 내지는 순응하기 보다는 저항하며 대립과 갈등을 일으키는 쪽으로 진화해 왔습니다. 따라서 이하에서는 반기독교적인 사상 내지는 정서라 할 수 있는 휴머니즘 사상이 등장한 배경과 그 의미를 살펴보고, 이러한 휴머니즘적인 사상이 종교개혁 내지는 개혁주의 사상으로부터 현대교회가 이탈하도록 직․간접적으로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그리고 종교개혁이 한 시대로 종결된 것이 아니라 개혁이란 계속되어야 한다는 점에서, 우리가 개혁주의신앙의 후손들이라 자처하고 있다면 향후 교회는 이러한 휴머니즘적인 사조에 대하여 어떻게 대처해 가야 할 것인지, 그리고 현대교회가 반성해야 할 문제들은 무엇인지에 대한 그 과제를 살펴보고자 합니다.

Ⅱ. 휴머니즘의 등장배경과 그 의미
    휴머니즘이란 중세의 붕괴를 통하여 등장한 사조로 간단히는 ‘인간중심주의’ 내지는 ‘인간의 본성에 충실하려는 태도’를 말합니다. 다시 말하면 Humanism은 라틴어 humanista에서 유래한 것으로, 원래 모든 인간적인 것을 의미함과 동시에, 인간으로서 당연히 갖추어야 할 자세 또는 인간을 인간답게 하는 본성을 옹호하고 실현하려는 입장을 뜻하는 말입니다. 이러한 휴머니즘 사상은 중세의 경우 스콜라철학의 이성주의에서 그 잔재를 찾을 수도 있지만, 그 사조가 분명해 진 것은 근세에 들어와 인간중심주의에 기초하여 주체는 하나님(신)이 아닌 인간이며 나아가 이러한 인간의 경험과 이성에 기초한 이성주의 인간본성론을 근간으로 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휴머니즘을 좀 좁게 파악을 한다면 고대 그리스와 로마의 문학·수사학·웅변술·철학에 대한 연구를 통해 중세를 지나면서 상실했던 ‘자유의 정신의 재생’을 목표로 하는 것으로, 휴머니즘을 달리 표현하면 바로 ‘르네상스’(renaissance)라고 할 수 있습니다. 르네상스는 곧 그리스의 자유로운 인간, 이성적 인간에 뿌리는 두고 있는…객체로 전락한 인간상을 전제로 한 중세에서 다시 “인간이 주체이다”라고 할 수 있는 고대 그리스로 돌아가자는 인간성의 회복운동을 말합니다. 따라서 르네상스적인 인간상은 인간이 정신을 가진 실존이라는 점을 염두에 둔 것으로, 인간의 정신은 인간이 합리적 자율성을 지니고 있다는 주장에 대한 근거를 제시해 주는 것이며, 또한 인간의 정신은 인간 스스로를 자연과 역사와 관련시켜 이해할 수 있도록 해주고 그것들을 인간의 영역으로 소유할 수 있게 하는 것이라 봅니다. 이러한 점에서 보면 휴머니즘은 또한 ‘인본주의’로 표현될 수 있습니다. 그래서 인본주의 사상가들은 낡은 내세주의적 세계관에 맞서 개인의 권리와 존엄성을 옹호했으며, 기독교의 금욕주의적 교리와 규범으로부터 사회도덕을 해방시키고자 했던 것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인본주의자들은 또한 ‘인문주의자’로 표현할 수도 있습니다. 여기서 말하는 인문주의자란 낡은 중세주의와 부패한 교회의 세속화 및 기타 사회제도의 불합리성에 맞서 있는 그대로의 인간과 자연적인 인간성을 옹호하고 그에 기초하여 진리를 탐구하고자 하는 원리입니다.

이상에서 보는 바와 같이 휴머니즘은 르네상스와 인본주의와 인문주의를 그 내용으로 담고 있는 것입니다. 따라서 르네상스의 인문주의는 인간과 신의 관계, 인간의 자유의지와 자연에 대한 인간의 우월성을 강조하는 모든 정신적 태도를 포괄하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철학적으로 휴머니즘은 인간을 모든 사물의 매개로 만들었으며, 이러한 사조에 기초한 계몽주의 사상가들은 과학의 정신과 휴머니즘의 통일을 목표로 하여 비단 자연에 대해서만이 아닌 인간사회의 여러 분야를 과학적으로 탐구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하여 자연과 역사의 영역에서 인간의 합리적인 자율성을 실현하고자 했던 것입니다. 나아가 현대에는 전쟁과 질병, 죽음 앞에 선 인간의 한계상황을 자각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하여 생의 철학과 실존주의철학을 넘어 오면서, 결국은 지구상의 모든 인류가 인종·국경·종교·사회체제를 떠나서 인간적인 존엄성을 보호해나가야 한다고까지 역설하기에 이른 것입니다. 이처럼 휴머니즘은 14세기 이후의 르네상스 운동에 뿌리를 두고 있지만 시간과 공간의 차이를 떠나서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이 위협받는 순간에 항상 그 모습을 드러내왔으며, 이것이야말로 휴머니즘의 본질이라고 그들은 말합니다.

그러므로 결국 휴머니즘이란 인간중심주의, 인본주의, 인문주의에 기초한 ‘인간에 의한’, ‘인간을 위한’, 그리고 ‘인간의’ 철학이며, 인간의 자유와 존엄성 보호가 가장 중요한 본질로 인정되는 원리로 요약될 수 있습니다.

Ⅲ. 현대교회와 휴머니즘(휴머니즘에 젖은 현대교회)
   휴머니즘의 사상은 철학이라는 영역에서만 그 지평을 열고 있다면 더 이상 논의할 필요가 없겠으나, 지금 교회 속에서도 인간중심주의, 인본주의 및 인문주의 형식으로 이러한 사상이 흐르고 있다는 점에서 염려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이하에서는 현대교회가 현실적으로 지향하고 있는 가치들, 그리고 그 교회를 구성하고 있는 목회자와 성도들의 가치관 내지는 세계관을 중심으로 휴머니즘 사상이 잠입해 있는 실체를 확인해 보고자 합니다.

(1) 교회의 정체성 내지 본질을 잃어가고 있는 현대교회

우리가 잘 아는 바와 같이 교회란 에클레시아, 말하자면 ‘거룩한 부르심을 받은 자들의 무리’를 말합니다. 그리고 이러한 교회는 ‘가르치며’, ‘치료하고’ ‘전파하는’ 사명을 지닌, 특히 주님의 “땅 끝까지 이르러 내 증인이 되라”는 지상명령을 수행해야 하는 공동체라는 것은 아무도 부인할 수 없을 것입니다. 또한 이러한 교회는 그리스도의 피의 대가로 세워진 그리스도를 머리로 한 공동체인 것입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교회는 인간중심주의에 너무 치우쳐 있습니다. 바로 휴머니즘, 즉 인본주의에 사로잡혀 있다는 것입니다.

1) 주님은 우리를 스스로 낮추라고 합니다. 즉 낮은 자에게 은혜가 임할 것이라 합니다. 세상은 큰 자, 높은 자, 지식이 많은 자, 영향력이 큰 자를 존경하지만 교회는 주님의 겸손을 배워 자기를 비우는 겸비한 자를 원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현실은 그 반대가 아닌가요?

2) 교회는 성공한 자, 자기를 들어내는 자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병들어 의원이 필요한, 상하고 찢긴 자들을 부르시는 곳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의 구성원들은 비천한 자를 인정하려 들지 않는 경향이 있습니다. 심지어 성도를 돈으로 계산(?)하는 참으로 감히 생각할 수 없는 어리석음을 저지르기도 합니다. 그래서 웃지 못 할 일도 있습니다. 성도를 붙여 교회를 넘긴다는 것입니다.

3) 교회는 상처받고 소외된 자들을 예수님의 사랑으로 감싸줄 수 있는 능력을 겸비해야 할 당위적인 의무를 가진 곳임에도 불구하고 약한 자, 힘없는 자에게는 조롱과 자신의 우월성을 드러내려는, 그래서 이들에 대해서는 내 발등상에나 앉으라는 가치관이 전도된 자들의 모임이라면 이는 세상의 여느 모임과 다를 것이 무엇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사실 많은 경우 세상적인 가치관에 따라 기독교적인 가치가 전도(顚倒)된 현상을 목격하는 것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닌 것 같습니다.

4) 교회는 스스로 자유자가 되어 자기의 삶의 중심에 자기를 두는 ‘자기의존적인 존재’를 원하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종이 되어 겸손히 종의 도리를 다하며 자기 삶의 중심에 주님을 두고 모든 것을 주님의 뜻 안에서 나를 인도하시도록 맡기는 ‘주님의존적 존재’를 원하는 곳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의 삶의 중심에는 항상 우리가 존재하며, 자신의 자존감 내지는 존재감을 높이는 쪽으로 나아가고 있는 것이 현실입니다.

5) 교회는 “구하라 찾으라 두드리라”고 하신 주님의 말씀에 의지하여 무조건 자기의 이익을 위하여 생떼를 쓰는 기도꾼 들이 모이는 곳이 아니라, 이렇게 얻은 것들을 자신이 아닌 남을 위하여 사용하도록 명령받는 곳입니다. 그래서 주님도 네가 대접을 받고 싶으면 먼저 남을 대접하라고 하신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는 나의 유익을 위하여, 찾고 두드리고 구하는 존재들입니다.  

(2) 세상 사람들이 지향하는 목표와 동일한 목표를 지향하는 현대교회

1) 교회는 수능고사를 칠 때 온 성도들이, 또는 그 아이들이 시험을 다 칠 때까지 릴레이식으로 기도하면서 하나님을 마치 부적처럼 사용하는 곳도 아닙니다. 대구 동화사에 가면 갓바위가 있다고 합니다. 그곳에는 입시철이 되면 미어질 정도로 불교신자들이 많이 와서 절한다고 하지 않습니까? 이러한 행태와 우리의 기도행태에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예수 믿으면 “가화만사성”(家和萬事成)이라는 구호처럼 만사형통할까요? “사랑하는 자여 네 영혼이 잘 됨같이 네가 범사에 잘되고 강건하기를 내가 간구하노라”(요3 2절). 예수를 믿으면 영혼이 잘되고 그 다음으로 범사가 잘 되며 강건하게 되는 ‘삼박자축복’이 허락되는 것일까요? 예수를 믿는다는 것은 분명 우리의 영혼이 구원을 받게 된다는 것에는 의문이 있을 수 없습니다. 그러나 범사가 항상 잘 될 수 있는 것일까요? 특히 모 설교자가 말하는 것처럼 물질적인 복을 풍족하게 받는 것일까요? 그렇다면 예수를 열심히 믿는 신실한 성도에게도 경제적인 어려움이 올 수 있는데, 이 경우 어떻게 해석할까요? 이는 하나님의 저주일까요? 뿐만 아니라 질병에 걸렸을 때 이것 역시 하나님의 징계나 벌로만 무조건 볼 수 있을까요? 그럼에도 불구하고 공공연히 목회자들은 왜 강단에서 예수 믿으면 복 받고 만사가 형통하게 된다고 설교하고 있을까요? 이러한 기복주의 복음(?)이라면 사찰에 가서도, 아니면 무속인에게 복채를 주고서도 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닐까요?

2) 교회는 이러한 삼박자 축복론만이 현대교회의 본질을 흩트리게 한 것이 아니라, 이를 근간으로 하는 물질만능주의, 물량주의, 대교회주의, 패권주의, 계급주의 등도 교회를 교회되지 못하게 하는 더욱 중요한 요인입니다. 만약 앞의 사조들이 바로 교회가 지향해야 할 목표라면, 여타 종교와 기독교는 어떠한 차이가 있는 것일까요? 이러한 세계관으로 과연 현대 포스트모더니즘 시대의 종교다원화에 과연 대응할 수 있을까요? 저는 아니라고 생각합니다.

3) 교회는 가르치고 전파하고 치료하는 것을 사명으로 삼고 있지만, 이러한 교회가 교회의 본질에 부응하도록 노력하기보다는 오히려 교회성장에 치중하는 것이 현실입니다. 그래서 목회자는 목자이기보다는 경영전문가라고 할 수 있는 CEO가 되기를 원합니다. 그러다보니 갖가지의 프로그램을 도입하여 사람들을 많이 모아 성공한 목회자가 되고자 하는 욕망을 버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성공한 목회자란 어떻게 정의할 수 있을까요? 세속적으로 본다면 성공한 목회자의 조건이란 “수만 명이 모이는, 교회를 근사하게 짖고 각종 기독교 언론매체에 자주 등장하면서 인기를 얻고 있는 자”라고 정의할 수 있을 것입니다. 그리고 일반적으로 이러한 조건을 충족하는 경우 이구동성으로 “그 목사님은 성공했어”라고들 합니다. 과연 이것이 성공한 목회의 척도 내지는 시금석이 될 수 있을까요? 성도의 수, 교회당 건물의 크기, 1년에 집행되는 예산의 액수, 노회나 총회에서의 영향력… 등등. 주님도 이 조건에 동의하실까요? 저의 소견으로는 주님은 단호하게 아니라고 말씀하실 것 같습니다. “그것은 단지 세상적인 기준에 불과하다고….”

4) 또한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로 값 주고 세운 것임에도 대형교회의 목사님들이 은퇴를 앞두고 있을 때에 자주 세속적인 소식으로 우리를 슬프게 할 때가 있습니다. 그것은 다름이 아니라 은퇴할 목회자 자신의 후임으로 자신의 아들이나 또는 사위를 세우는 등 마치 교회가 족벌(?)화 되는 것인데, 이러한 현상이 교회 중 극히 예외적인 것이라면 참 다행이겠으나 너무 우리는 자주 목격할 수 있다는 사실에 우리를 좌절케 합니다. 물론 인간적인 면에서 보면 평생 목회를 하여 큰 교회를 만들어 놓았는데 정년이 되어 은퇴를 하는 것이 못내 아쉬운 것은 인정합니다. 그러나 교회는 예수 그리스도의 피의 값으로 세운 것인데, 마치 세상의 기업처럼 자신의 자식에게 물려준다는 것은 세상으로부터 충분히 비난을 받을 수 있습니다. 왜냐하면 교회는 기업이 아니기 때문입니다.

(3) 예배가 너무 세속화 되어 가고 있는 현대교회

1) 최근 잘 나간다는 목회자들의 설교를 자세히 관찰해 보면, 어김없이 설교가 너무나 인간중심주의로 흘러가고 있는 것을 발견하게 됩니다. 목회자의 설교란 하나님의 말씀을 대언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그렇기 때문에 목회자는 말씀을 연구하고 그 말씀에 따라 성도가 좋아하건 그렇지 않건 상관없이 죄를 지적하고 우리 죄로 인하여 주님이 십자가 지심을 선포하는 것입니다. 물론 성도들은 날마다 강단에서 “우리가 죄인이기 때문에 회개해야만 합니다”라고 선포할 때, 우리 모두 편안하게 들을 수 없는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설교는 성도들의 비위를 맞추기 위한 것이 아닙니다. 설교자는 천국과 지옥을, 그리고 죄를 지적하는,  마치 유다백성들 앞에서 그들의 반역에 대하여 거침없이 하나님의 심판을 선언했던 선지자와 같은 마음으로 임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러나 오늘날 이러한 설교는 정말 인기(?)가 없습니다. 그리고 이러한 방향으로 설교를 많이 하는 교회는 양적으로 성장되지도 않습니다. 그러다보니 어쩔 수 없이 목회자는 설교를 마치 쇼와 같이 진행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우리는 인기 있는 설교가들의 설교를 듣노라면 지금 개그맨들이 개그를 하는 것처럼 들리는 경우를 종종 볼 수 있습니다. 심지어 설교 중에 욕설을 하는 등 사용하는 언어마저도 신중치 못한 경우를 자주 접하곤 합니다. 개그에 잘 훈련(?) 된 성도들은 이러한 유형의 설교를 좋아할는지 모르겠으나, 이는 분명히 잘못되었습니다. 예배자는 하나님 앞에서 하나님을 경외하며 들여지는 산제물인데, 그럴 수 없는 것 아닐까요?

2) 설교를 듣는 성도들 역시 문제가 있습니다. 우리가 어떨 때 아멘 하는지를 한번 살펴보세요. 여러분을 위로하고 마음의 평안을 얻게 하는 경우일까요, 아니면 죄를 지적하며 자복하라고 할 때일까요? 거의 100% 전자가 아닐까요? 그리고 이러한 위로의 설교를 들었을 때 “목사님, 은혜 많이 받았습니다”라고 하지 않습니까? 그런데 이 때 말하는 은혜는 도대체 누구로부터 주어지는 것입니까? 목회자입니까? 아니면 하나님으로부터 입니까? 목회자로부터라면 이는 하나님의 자리에 목회자가 대신 위치하는 것입니다. 왜 목회자의 설교가 이처럼 나약해 졌을까요? 당연한 결론입니다. 목회자가 성도들의 눈치를 보기 때문입니다. 그래야 인기를 얻고 지지를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러나 이것은 완전히 잘못된 인본주의, 휴머니즘입니다. 목회자의 반성 이전에 성도들의 반성 없이는 불가능한 것입니다.

3) 미국의 A.W.토저 목사는 “예배인가 쇼인가?”(규장, 2004)라는 책에서 목회자들이 교인의 수적인 성장을 위해서 대기업 경영 방식을 무차별적으로 갖고 오며, 할리우드 엔터테인먼트 방식을 예배에 도입하는 것에 대해 통렬하게 비판한 적이 있습니다. 그는 “우리 마음을 안정시키고 달래기 위해서 교회에 간다는 사람들의 말에 나는 동의할 수 없다(p.14). “하나님을 불쾌하게 만드는 것이 우리 안에 전혀 없을 때까지는 어떤 예배도 하나님을 온전히 기쁘게 해드릴 수 없다(p.19).” “만일 월요일부터 토요일까지 계속 삶의 예배가 이어지지 않는다면 주일의 공예배 또한 참예배가 아니다(p.23).” “현대의 종교는 시끄러운 소리, 지속적인 활동, 자기주장이 강한 목소리, 그리고 대형화가 우리를 하나님께 가게 만든다는 해괴한 이단을 받아들였다(p.75).” “하나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더 이상 격식이나 인위적인 자극이 필요 없을 정도로 서로 편안해지기 전까지는 만족하시는 법이 없다(p.91).” “우리의 기독교가 ‘복음주의적 휴머니즘’으로 전락할 위험이 늘 도사리고 있다. ‘복음주의적 휴머니즘’은 영적 문제에 대한 고민도, 깊은 묵상이 주는 평안도 모른다(p.100).” “하나님을 더욱 깊이 알 수 있는 길은 ‘영혼의 가난과 고도의 절제’라는 외로운 골짜기를 가는 것이다. 하늘나라를 소유한 복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것들을 거부하고 마음속 소유욕을 근절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심령이 가난한 자들이다(p.103).” “갈보리 언덕의 십자가가 성령님의 기적적인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 마음의 십자가로 바뀔 때 우리는 십자가의 의미를 알게 될 것이다(p.135).” “오늘날의 교회는 예루살렘보다는 할리우드에서 더 많은 영향을 받을 정도로 세상의 정신 및 세상적인 방법들과 맞닿아 있다. 젊은이들은 과거의 성인들보다는 오늘날의 연예계 스타들을 모범으로 삼는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 전혀 합당하지 않는 저속하고 퇴폐적인 대중음악이 참기독교의 순결한 위엄과 반짝이는 순수성을 밀어내고 대신 그 자리를 차지하였다(p.211).” “기독교는 인간의 본능에 야합하지 않고 그것을 비판한다. 그리스도의 메시지는 인간의 생각과 정면으로 충돌한다(p.224).”고 말하였습니다. 우리가 드리는 예배의 중심이 하나님께로 맞추어져 있습니까? 아니면 예배의 중심이 우리에게 맞추어져 있는 것일까요?

4) 최근 읽은 책 중에 “바벨탑에 갇힌 복음”(새물결플러스, 2010)이라는 것이 있습니다. 본 책의 발행인의 글에서 “지난 수 십 년간 이 나라에 광풍처럼 밀어닥친 경제만능주의에 편승하여 사실 한국 교회 역시 아무런 반성과 분별없이 오로지 성공과 번영의 복음만을 뇌까리기에 바빴습니다. 그 결과 교회가 어느 정도 외형적인 성공과 번영을 쟁취한 것은 맞지만 내면적으로 이미 한국교회는 만신창이 상태를 넘어서 빈사상태에 도달하고 말았습니다. 성공과 번영의 복음이 한국교회에 가져온 결과는 참으로 끔찍합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참 제자는 실종되고 강단에는 바알의 사제들만이, 강단 밑에는 바알의 신도들만이 우글거리고 있습니다. 성경과 현실을 올바로 분석하고 연결하는 심도 깊은 신학은 사라지고, 오로지 세속의 성공과 반영의 구호와 선동만이 넘쳐나고 있습니다. …공교회에 대한 신앙고백은 온데간데없고 성장과 번식만을 꿈꾸는 개교회주의만이 판을 치고 있습니다. 교회는 점점 대형마트 혹은 문화센터화 되었고, 기독교는 갈수록 인기 스타 목사들의 종교가 되고 있습니다. …이제 성공한 것이 복음이고, 성공한 것이 십자가이며, 성공한 것이 기독교가 된 것입니다. 이런 상황에서 귀족들의 종교가 되어 버린 한국 개신교는 더 이상 이 땅의 고단하고 배고픈 사람들의 친구가 될 수 없습니다. …출세와 황금, 자아성취와 자기실현의 복음을 빙자하여 강단을 더럽히고 있는 어두움의 영들을 순수한 십자가의 복음의 능력으로 물리치지 않고는 교회에 소망이 있을 수 없습니다.”고 말함으로서, 돈과 건강과 권력이라는 바벨탑에 ‘참된 복음’은 무참히 갇혀버렸다는 것입니다. 참으로 이 시대에 귀담아 들어야 할 목소리가 아닐까요? 이 책에서는 미국에서 잘 나간다는 목회자들이 쓴 많은 글들이 번영과 성장에 사로잡혀 있으며, 나아가 성경과는 동떨어진 자기주장만을 내세우는 많은 어리석음을 드러내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성도들은 비판능력이 갖지 못한 것인지, 아니면 이러한 사조에 동의하는 것인지 모르지만 베스트셀러로 등극하고 있는 현실의 안타까움을 잘 지적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결론은 복음의 순수성, 성경에 기초하여 기본으로 돌아갈 것을 권하고 있습니다(p.457 이하).    

Ⅳ. 맺으며
   오늘 본문으로 보았던 창세기의 기사는 어떠합니까? 특히 4절의 “자, 성읍과 탑을 건설하여 그 탑 꼭대기를 하늘에 닿게 하여 우리 이름을 내고 온 지면에 흩어짐을 면하자 하였더니”에 주목해 보십시오. 바벨탑을 쌓게 된 것은 자기들의 이름을 낼 뿐만 아니라, 하나님을 대항하여 하나님의 심판을 면하기 위하여 스스로 탑을 쌓고 있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휴머니즘입니다. 다시 말하면 인간중심주의, 인문주의 내지는 인본주의의 대표적인 사례인 것입니다.

현대교회와 휴머니즘, 다소 제목은 어렵게 들리지만 사실상 인본주의적인 태도가 교회에 들어와서는 안 되는데, 현실은 그 반대임을 확인해 보고자 한 것입니다. 그런데 사실 우리는 알게 또는 모르게 우리가 속한 교회 안에 하나님이 아닌, 우리 인간이 주체가 되어 우리의 이름을 높이 쌓고 있는 현상들을 군데군데에서 확인할 수 있었습니다. 목화자이건 성도이건 가리지 않고 필요하다면 하나님의 이름을 동원하여,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동원하여 자기의 잇속을 극대화 시키려는 것이 오늘을 살아가는 현대교회의 실상인 것 같아 참으로 씁쓰레합니다. 심지어 신학이라는 수단을 이용하여 하나님을 위한다는 가면을 쓰고 자신의 이익을 추구하는 이단들이 얼마나 많이 득세를 하는지…. 우리는 무엇을 버리고 무엇을 지녀야 할 것인가를 바로 인식하여 이 시대정신이 아닌 이 시대를 초월한 하나님의 정신에 부합하는 그리스도인이 되어야 할 것입니다.

마지막으로 토저 목사님의 글을 소개하면서, 본 특강을 마치고자 합니다. : 복음주의 신자들 중 대다수가 이 세상을 더 이상 전쟁터로 보지 않고 놀이터로 보게 되었다. 그들에게 “당신은 영적인 차원에서 이 세상을 놀이터로 보는가, 아니면 전쟁터로 보는가?”라고 질문해보면 그들은 분명한 입장을 밝히지 않고 얼렁뚱땅 넘어갈 것이다. 그러나 그들의 행동을 보면 그들의 입장을 알 수 있다. 그들은 양쪽 모두 쳐다보고 있다. 즉, 그들은 그리스도도 보고 세상도 본다. 그들은 아주 밝은 얼굴로 모든 사람들에게 “그리스도를 영접한다고 해서 즐거운 것들을 포기할 필요는 없다. 기독교야말로 이 세상에서 가장 즐겁고 재미있는 것이다.”라고 말한다. 이런 인생관을 가진 사람들이 드리는 예배는 그런 인생관만큼이나 본질에서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런 예배는 샴페인과 잘 차려 입은 술꾼이 없는 성화(聖化)된 나이트클럽에 비유할 수 있다.(p.189) …우리는 영적인 곤고함과 비참함에 애통해 하여 하나님 앞에 주저앉아 울어야 함에도 불구하고, 오히려 우리는 종교적 오락에서 위로를 얻으려고 애쓴다.(p.197) …방향 부재는 많은 교회 활동이 비극적 실패를 가져온 원인이다. 방향을 잡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은 ‘새롭고 그럴싸한 것들’ 이라면 무조건 발 벗고 나서서 도와주는 경향이 있다. 왜냐하면 그들은 무엇이 성경과 하나님의 뜻에 부합되는지를 판단할 능력이 없기 때문이다.(p.204).(2010년 12월 5일 주일 오후예배 구모영장로 특강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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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영적 분별력
글쓴이 : 진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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