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신학비판

[스크랩] 현대신학: 제 2장 1919년 이후(1)

강대식 2011. 6. 8. 19:39

현대신학: 제 2장 1919년 이후(1)
 
서철원


제 2장 1919년 이후


슐라이허막허가 전통적인 신학을 180도 회전시켜 놓았다. 하나님 말씀에서 인간의 감정으로 초월해 계신 하나님, 말씀하시는 하나님에서 인간의 체험내에 들어온 하나님으로 전환 시키면서 인간의 종교감정을 모든 신학과 종교의 원천으로 삼았다. 그러니까 신학이 하나님에게서 시작한 것이 아니라 인간에게서 시작하여 인간을 통해서 다시 인간에게 되돌아오게 되었다. 主語도 述語도 마지막 目的도 모두가 다 인간이 궁극적이 되어 버렸다. 神學은 人間學 외에 다른 것이 못되게 되었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모두가 인간의 감정안에 들어오게 되었다.

슐라이허막허는 개신교 전통에서 나왔다. 루터의 종교개혁 때 큰 중생의 체험, 그것이 합리주의 교의학인데 그 반박으로 모라비안파의 경건주의로 나왔다. 결국 루터에 의해서 계속되었다. 그것이 다시 웨슬레에게 넘어간다. 웨슬레도 영국교회를 떠날려고한 것은 아니었다. 그렇지만 칼빈주의 예정론을 배척하고 선행에 이르는데 좋게한 예정에 이르는 선행의 강조를 많이 했다. 그리고 웨슬레가 갔던 그 신앙의길로 감리교회가 가고 있다. 그것이 알미니안 신학과 합세를 해서 미국의 부흥운동이 되고 성결운동이 되고 오순절운동이 되었다. 오늘날 한국교회가 멀리 있는 알미니안은 배척하지만 오순절운동은 좋아한다. 교회를 부흥시켜 주기 때문에 그렇게 좋아하는데, 웨스트민스터 신앙이 되었든지 알미니안에서 왔든지 알 바 아니요, 교회부흥이라는 결과만 좋으면 좋다는 태도가 아니겠는가?

그러면 하나님은 어디에서 만나는가? 깊은 산으로 가서 만나는가? 큰 기도원에서 만나는가? 금식기도를 하면 거기서 하나님이 기다리고 계시는가? 언제 어디서 만나는가? 회개하고 중생할 때 만나지 않는가? 일반적으로 어디서부터 하나님을 이야기 할 수 있는가? 우리 민족은 경험을 강조한다. 중생의 체험이 있고 특별한 은사체험이 있어야 된다고 주장한다. 그러니 우리 개신교는 한결같이 중생의 체험을 강조한다. 하나님 만나는 자리가 어디인가? 중생 때 만나지 않는가? 중생하므로 오는 그 기쁨, 뿌듯한 느낌, 온 천하가 콩알만큼 작아져 보이는 그 느낌, 거기서 하나님을 만난다. 그러니까 개신교가 출발점으로 한 그것으로 슐라이어막허가 돌아온다.

이상과 같은 질문을 따라서 가다보니까 출발점이 하나님에게서 인간의 감정으로, 인간으로, 내 체험으로 간다. 그리고 인간으로 시작하여 인간을 거쳐 마지막 결정도 인간이 내리는 결론에 이르렀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이, 인간의 종교심이, 인간의 그 종교성이 모든 物의 근원으로 삼게 되었다.

그런데 칼 바르트는 그것을 180도로 다시 역회전 시키는 일을 시도했다. 본래 하나님이 말씀하셨다(Deusditit)는 데로, 하나님 말씀하신 데로 되돌아 간다. 그럴 때 하나님은 어떤 분인가 할 때 우리와 같은 내재해 있는 그런 분이 아니다. 그러나 바르트의 하나님도 우리와 구분되지 않는다. 하나님은 이제까지 우리가 해 오던 윤리, 즉 우리의 인간성을 잘 개발시켜서 나아가는 그 윤리, 그 윤리가 무엇인가? 서로 사랑하는 것, 법도 좋지만 사랑이라 하여 하나님을 그 윤리, 즉 사랑과 일치시킨다. 전쟁하지 않고 권력자들이 자기만 살려고 하지 않는 그런 사랑이 실현되는 사랑의 길을 목표로 한다. 그러니 기독교의 윤리도 이들에게는 하나님이 초월적으로 주신 계시가 아니다. 이들은 궁극적으로 종교가 목표한 길이 무엇인가를 사랑의 길에서 찾는다. 사랑의 길에 하나님이 붙어 있는 것이다. 그러니 문화에 대해 우리가 어찌해야 되는가? 간음하면 되는가? 그러면 안된다. 왜냐하면 우리 문화가 그렇게 규정하기 때문이다.

데이비드 윌커스의 “십자가와 깡패”란 책에 보면 창녀로서 마약을 사용하던 여자가 성령의 역사로 변화되어 신학을 하고 결혼을 해서 목회일을 했다. 깨끗한 숙녀가 되어, 미국사회의 중류 이상의 사회가 바른생활의 법으로 사는데 거기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 전에는 깡패 소굴에서 창녀로 마약을 쓰고 술을 마시고 타락했는데 변화했다. 윤리가 그를 변화시켰다고 한다. 그 윤리는 하늘에서 왔는가? 아니다. 우리 문화가 그러면 안 된다고 해서, 그 윤리에 의해 변화된 것이다 라고 하여 문화의 영역과 기독교 윤리와 동일시 취급한다.

지금 자유주의 이야기를 하고 있다. 하나님도 자유주의자들에 의하면 그들이 제시하는 윤리와 다른 것이 아니다. 본질적으로 서구가 지향하던 그 이상적 문화와 하나님이 구분되지 않는다. 그러니 하나님과 문화, 즉 윤리는 한 동일선상에 선다. 하나님은 단지 인간의 문화, 즉 이상세계를 말하는 대명사에 불과하게 되었다. 실제로 계신 분도 아니며 우리와 상관 없고 이상을 이루는 표어에 불과하다.

그러니 칼 바르트는 슐라이어막허의 내재주의를 때려 부수기 위해서 하나님을 전적인 他者로 해야 했다. 그 분은 그냥 우리 속에서 말씀하시는 분이 아니라 밖으로 부터 말씀으로 오셔야 한다. 와서 우리의 소유가 되면 또 내재가 되어버리기 때문에 말씀이 내 안에 들어와 일을 이루는 것을 부인하고 다만 밖에서 위기의식만 일깨우고 떠난다고 한다.

우리는 하나님 말씀을 받아가지며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자가 아닌가? 바르트의 주장에 의하면 말씀하실 때 거기에 계셔서 순간적으로 말씀하시고 그것로 심판하신다. 그 말씀이 와서 우리의 소유가 되면 다시 내재가 된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우선적인 타자로 보고 우리에게 말씀하신다고 주장한다. 이런 말씀은 순간적으로 반짝하는 불꽃이고 계시의 말씀은 아니다.


바르트의 계시관과 성경관


바르트에 의하면 성경과 계시가 일치하지 않는다. 다만 성경은 과거 계시사건의 기록일 뿐이다. 과거 계시사건의 기록은 그 사건 자체는 아니라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신문에 어떤 사건이 생겼으면 그 사건기록을 보고 사건의 전모를 쉽게 안다. 그렇지만 바르트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인간의 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을 하시면 그때 성경이 하나님 말씀으로 효력을 발생한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분명히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섰다. 그러나 그 의미는 우리가 생각하는 하나님 말씀의 의미와는 전혀 다르다.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할 때 Diebibelist의 ist가 하나님 말씀과 성경의 等値의 의미가 아니라 ‘된다’는 뜻이다. 그냥 ‘ist'는 ’이다‘란 뜻인데 바르트가 사용하는 ist의 의미는 그냥 등치가 아니라 말씀이 된다는 의미에로의 ’이다‘로써 하나님 말씀이 된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하나님 말씀이 되느냐? 성경에 기록되어 있는 사람의 말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시면 그때 우리에게 비로소 하나님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의 설교 문제와 생각해 보자. 우리는 바르트를 철저히 반대하는 입장에 있지만 그러나 바르트가 그냥 허공에서 만들어내서 이런 말을 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성경말씀을 늘 읽어도 잘 깨닫지 못하다가 훌륭한 말씀의 설교를 듣고 그 말씀을 깨닫게 된다. 그리고는 은혜를 받았다고 감사를 표한다. 그러면 은혜를 받았다고 할 때 어떻게 은혜를 받는가? 그 은혜 받았다고 하는 말을 하는데 어떤 뜻인지 잘 생가해 볼 필요가 있다.

바르트는 성경에 있는 인간의 말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하나님 말씀이 된다고 한다. 그러니 설교가 성경의 핵심을 전달할 경우에 하나님이 함께 말씀하시므로 하나님 말씀이 된다는 것이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구속의 사건을 말하면 그것이 우리에게 은혜가 되고 영향력을 미친다고 한다.

우리는 예수 믿으면 옛사람이 죽고 그리고 새사람이 산다고 말한다. 어떻게 그렇게 되는가?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 그 십자가의 권세로 우리의 옛사람이 죽는다고 믿는다. 사실 믿을 때 원리적으로 옛사람이 죽고 새사람이 된다. 그러나 옛사람이 다 없어져 버린 것은 아니다. 그리고 실제로 옛사람과 새살람을 시기적으로 나눌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옛사람과 새사람을 역사적으로 시간상에 줄을 그어놓고 명확하게 구분하여 말할 수 있는가? 물론 옛사람과 새사람을 나누는 분기점을 시간적으로 정할 수 있다. 그 전에는 옛사람 뿐이었는데 예수 믿어서 그 순간에 새사람이 되기 때문이다. 그렇지만 언제라고 규정하기는 불가능하다. 옛사람이 다 없어지고 새사람만 현재 진행되는 것은 아니다. 우리안에는 옛사람과 새사람이 동시적으로 역사한다. 그러면 어떻게 해서 옛사람이 죽는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것은 십자가를 하나님의 심판의 선포로 믿고 그래서 내 죄를 사죄해 주신 것으로 믿고 받아들이며 그 십자가의 권능이 내 옛사람을 처형했다고 믿음으로 된다. 그러니까 하나님 말씀을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내게 큰 역사가 온다. 여기까지는 우리가 믿는 바와 같다. 그러나 이런 주관적인 십자가의 효능은 이미 하나님의 경륜안에서 객관적으로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진 것이다. 바르트는 이것을 부인한 채 결과 만을 보고 믿음으로 받아들일 때 비로소 그것이 하나님 말씀이 된다고 말한다.


바르트의 주석은 변증법적이라고 한다. 여기서 변증법적이라고 할 때 이 말은 하나의 진술이 진술대로 있는 것이 아니고 동일하게 역 진술이 가능한 것을 말한다. 이것은 실존주의 철학자 키에르케골의 변증법에서 빌려 왔는데, 사실 우리가 갖는 신학적 진술은 역설적이지 종합할 수 없다. 헤겔처럼 무엇이든지 두루두루 뭉치면 더 높은 단계로 올라가는 그런 것이 되는게 아니고 역설적이다.

가령 우리가 계시자 혹은 성육신을 생각해 보자. 성육신은 하나님의 사건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무한하신 분이시다. 무한하신 분이 어떻게 유한 시공세계에 공간으로 들어 오실 수 있는가? 들어 오실 수 없지 않는가? 우리는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만 하나님은 천지를 창조하신 무한하신 분이다. 그런 무한하신 절대자가 유한세계에 들어오시는 것이 성육신인데, 어떻게 유한이 무한을 붙들고 있을 수 있는가? 종교개혁의 전통적인 명제 중의 한 원칙이 “유한은 무한을 파악할 수 없다”인데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하단 말인가? 이 절대자가 어떻게 상대자의 속에 오시며 그 영원하신 분이 어떻게 시간내에 들어 오시는가? 하나님은 하나님이신데 어떻게 여인의 몸으로 들어 가시는가? 우리는 전통적으로 당연하게 믿어왔는데 이런 기독교의 진리는 모두 역설적이다.

내게 있어서도 제일 견디기 힘든 것이 하나님이 여인의 몸으로 들어 가셨다는 이 진리이다. 그러니 바르트는 어떻게 그것을 하나의 문장으로 바로 말할 수 있느냐? 그러니까 부정되는 문장이 동시에 와야 한다고 한다. 그러니 변증법적이다.

그러면 우리의 경우 어떻게 받아 들이는가? 지성으로는 안된다. 그러니 신앙으로 신앙의 도약으로 받아들인다. 그러니 이 역설은 기독교 신앙에 있어서의 우연적인 것이 아니라 본질이요, 핵심이다.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이 되시는가? 어떻게 무한자가 유한자가 되시는가? 그런데 하나님은 감추어지셨지만 계시되었다고 했다. 우리는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혹은 자기의 뜻을 계시 하시니까 안다. 특별히 하나님의 삼위일체의 본성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뜻, 즉 하나님의 구원경륜을 우리에게 알리셨다. 그것이 십자가와 부활의 사건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안다는 것은 그가 계시 하셨으니까 아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 바르트는 다음과 같은 질문을 한다. 그러면 다 알 수 있는가? 만일 다 알 수 있다면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서 계시를 그친 것이라고 반론을 편다. 그리고 “하나님이 더 계시할 필요가 없을 정도로 다 계시했으면 하나님이 계시를 그친 것이고 그 귀결은 하나님이 이 현상계의 사물의 하나가 된다”라고 역진술을 하면서 우리가 믿는 근본 진리를 뒤엎는다. 사실 하나님은 자신을 자세히 알리셔도 우리는 다 알 수 없다. 그것이 하나님의 不可解性인데 그것도 인식론으로 생각해 보면 또 어려운 문제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不可解性을 늘 말하면서도 우리는 하나님을 안다고 말하기 때문이다.

그러면 안다고 할 때 어떻게 아느냐고 하면 이것은 사변적인 문제가 된다. 종교개혁자 루터의 후계자 멜랑톤(Melanchton)이 유명한 말을 했는데 그것이 멜랑톤 이후 독일신학을 지배했다. 그것은 그리스도를 아는 것은 그 본질을 아는 것이 아니라 그 사역을 앎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하여 성육신하시고 고난 받으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부활하신 것을 아는 것이다. 그러면 그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본질 자체를 알 수 있는 것이냐? 요한복음 1장 14절에 보면, “말씀이 육신이 되어 우리 가운데 거하시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 은혜와 진리가 충만하더라”했는데 언제 제자들이 그의 영광을 보았는가?

내가 리델보스(Herman Ridderbos)와 이야기할 때 그 내용을 한번 토론해 본적이 있었다. 불트만 학파에서는 부활의 사건을 가지고 이야기하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 언제 그 영광을 보았겠느냐고 물었는데 리델보스도 예수님 在世기간에 다 보았다는 것이다. 그래서 내가 말하기를 부활전 사건을 가지고 말해야 바르지 않느냐고 반문했더니 아무런 답이 없었다.

그러니 바르트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로 자신을 계시하셨지만 백성들은 알지 못했다. 더구나 부활체를 보이신 것은 누구에게나 보이신 것이 아니고 믿는자들에게만 자신을 나타내시고 타인에게는 은폐하셨다. 그리고 하나님의 지식과 우리의 지식을 생각해 보면 우리는 하나님은 무한하다고 신학을 배워서 안다. 그러나 무한이 무엇인가? 또 하나님은 영원하다고 배운다. 그러나 영원이 무엇인가? 하나님이 단순하다고 할 때 단순하다는 것이 무엇인가? 그리고 여기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 안에서 선택되고 유기되엇다고 말했는데 그런 逆陳述은 완전히 辨證法的 思考이다.

바르트는 우리가 믿는대로 일부가 선택되고 일부가 유기되었다는 것은 믿지 않는다. 바르트의 선택교리는 어떤 사람의 말대로 찬란한 빛 뿐이고 바르트는 유기가 없다. 칼빈주의 같은 일정한 수가 선택되고 일정한 상당수가 유기되는 그와 같은 빛과 어두움이 동시에 있는 것이 아니라 빛만 있다. 그 이유는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에게서 유기 되었으므로 예수 그리스도와 함께 모든 인류는 유기 되었다. 주님은 “엘리 엘리 람마 사박다니,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왜 나를 버리셨습니까?”하고 십자가 상에서 말했다. 예수 그리스도가 단 하나의 대표로 하나님에게서 유기 되었으므로 모든 인류는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가 유기 되므로 유기됭ㅆ다. 그리고 하나님께서 그리스도를 다시 선택하셨다. 그러므로 그 안에서 모든 인류가 선택되었다고 한다. 바르트에게는 선택 뿐이고 유기는 없다. 그러니 만인 구원이 가능하다. 그러니까 화해론이 바르트에게서 나온 이유가 있는데, 그것은 그리스도의 성육신으로 모든 인류의 인성이 귀한 값을 가지고 앙양되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처럼 천당갈 사람과 지옥갈 사람이 나누이는 것이 아니라 한 밝은 빛 뿐이어서 선택 뿐이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Yes와 No로, 십자가에 못 박으셨으나 다시 부활시키셨다. 버리셨으나 다시 선택하셨다. 그러니 Yes라 한다.

그리고 죄인이 하나님 앞에 의롭다함을 받고 그러면서도 죄인이라 한다. 이것은 루터가 한 말인데, 루터는 우리 인간은 의인이자 곧 죄인이라 했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의롭다함을 받았다(Dustus Sum et peccator). 그러니까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의 의를 덧입은 면에서는 의인이지만 우리 자체로는 죄인이라는 뜻이다. 이렇게 하면 기독교신학은 역설적으로 전개할 수 밖에 없다. 그러니까 이런 역설적인 면을 바르트는 변증법적으로 끌고간다. 그리고 Yes와 No에 있어서 마지막은 No로 기울어지면서 결국 부정적인 면으로 기울어진다. 그리고 계시라고 하는 것은 요한복음 9장에 보면 원칙적으로 하나님께서는 죄인의 말을 들으신 것이 아니라 의인의 말을 들으신다고 했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다면 죄인에게 말씀하실 수 없다. 그렇지만 죄인에게 계시가 이르러 온다. 어찌 그럴 수 있는가? 이제까지 하나님께서 죄때문에 못오셨는데 어떻게 죄인에게 오실 수 있느냐? 그런데 성육신으로 오시고 계시가 이른 것을 보아서 우리가 의인이라는 것을 안다고 한다. 이런 변증법적 모순으로 진리를 결정하려는 것은 결국 기독교의 복음진리를 파괴하는 귀결에 이른다.

이제까지는 전적으로 하나님의 내재였는데 바르트는 그 반대극인 하나님의 전적인 초월을 말한다. 그러니까 완전히 우리와 같은 존재여서 이제 전적인 他者로, 하나님을 우리하고는 무한한 질적인 차이를 갖는 그러한 존재라고 한다. 바르트의 초월성은 우리의 사물중에 하나처럼 다룰 수 있는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하나님은 어떤 형태로 계시되는가? 사람형태 인가? 관념의 형태로 계시는가? 바르트에 의하면 하나님은 세계내에 있는 어떤 대상을 다루듯이 결코 대상으로 취급할 수 없다. 하나님이 말씀하시니까 우리는 들어야 되는 것이지 우리가 하나님에 대해서 논할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아니다. 무엇을 논한다는 것은 그것을 대상으로 다룬 것이 아닌가? 하나님은 그런 분으로 생각할 수 없고 다만 하나님은 말씀하시며 그 말씀을 듣고 말씀을 건낼 수 있는 분이지 결코 사물처럼 대상으로 삼을 수 없다. 그러니까 바르트는 성경도 마찬가지여서 하나님이 말씀하시되 그것이 현상계 내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우리가 붙잡을 수 있는게 못딘다. 만일 붙잡으면 벌써 하나님 말씀이기를 그친다. 그것은 우리가 말슴을 붙잡는다면 우리가 마음대로 요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하나님을 타자로 생각하듯 그의 말씀(계시)도 우리의 논의의 대상이 못된다. 그래서 하나님 말씀이 우리에게 오되 탄젠트(Tangent) 형식으로 온다. 그래서 그림에서와 같이 A란 점에서 만난다. 그러나 B 지점 같이 안으로 오지는 못한다. 안으로 들어오면 그것은 우리의 소유가 되기 때문에 그때는 벌써 우리가 그 말씀을 어거하고 조종하게 되기 때문에 말씀이기를 그친다. 그래서 자유주의나 보수주의나 다같이 그렇게 하나님 말씀을 소유했다고 하는 자들은 “복된 소유자들”(Possident beati)이라 했다. 하나님의 말씀이 우리에게 들어와서 하나의 대상으로 우리의 것으로 다룰 수 있을 만큼 들어와 버리면 그 사람에게는 하나님 말씀이 말씀되기를 그친다는 것이다. 그러니 말씀이 수직으로 오시는 오는데 그 경우 말씀이 안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탄젠트 형태로 오는데 그때는 반드시 심판으로 온다. 질적으로 우리와 전혀 다른 분이 우리에게 오셔서 말씀하실 때는 우리의 죄악을 심판하시는 심판주로 오신다. 그것을 받아들이며 그것이 곧 의미로서의 역사, 즉 부활이라고 한다.

어떤가? 우리의 설교가 심판하는 설교가 아니기 때문에 하나님을 잘 못 만나는 것은 아닌가? 우리의 설교가 교인들이 그저 들어도 좋은 정도로, 그저 통상 쓰는 용어로 은혜되는 정도가 아닌지...? 진짜 하나님을 만나면 통회하고 애통하고 할텐데 그런 것이 없고 “그것 들어서 좋다”, “교회 올만 하다”는 반응이다. 그러니까 자유주의는 성경에 하나님 말씀이 들어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그 하나님의 말씀을 찾아내는 것이 자유주의의 작업이었다. 그렇지만 칼 바르트는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바르트는 그 성경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실 때에 우리에게 하나님 말씀이 된다고 한다. 그럴 경우는 위에서 직접 말씀하시는 형태로 와서 심판한다고 한다.

바르트에게 있어서 하나님은 전적인 타자로 항상 주체로 계신 분이지 우리의 대상이 되실 수 없는 분이다. 그러니 우리가 소유하고 어거할 수 있는 존재가 못되는데, 그런 존재를 우리가 말해야 되니까 항상 역설적인 진술 밖에는 못한다. 무한한 존재를 유한한 말로 해야 하기 때문에 역설적으로 밖에 할 수 없다. 그리고 말씀하실 때는 위에서 직접 순간순간 말씀하신다. 말씀이 우리의 시공내로 들어와 버린 것이 아니다. 그러면 우리가 마음대로 어거할 수 있기 때문이다.

이전까지는 소위 하르낙(Harnack)과 빌레몬 헤르만(V. Hermann)등 유명한 바르트의 선생들에 의하면 성경 속에서 비평적 방법으로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가장 확고한 예수상을 건설하는 것이 바르트 이전까지의 자유주의 신학의 목표였다. 복음서에 나타나 있는 신앙으로 착색되지 아니한 예수상을 구체적으로 믿을 수 있는 재료들을 모아가지고 정말 예수가 어떤 존재인가를 구성해 내는 것이 그들의 과제였다. 그 방법으로는 역사적 비평적 방법들을 사용했다. 그러니까 이들에게는 예수상을 건설하는데 복음서에서 핵심되는 것들을 찾아내는 것이 가장 중요한 과제였다. 그래서 가장 정확한 신뢰할 만한 예수상을 건설하는 일이 주 과제였는데 불트만과 함께 바르트는 전적으로 이것을 배척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말씀하시면 그 말씀이 속으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는 그들의 신학이론 때문이다. 이미 설명했지만 하나님의 계시, 즉 하나님의 말씀이 역사속으로 혹은 시공내로 들어오는 것이 아니라 원의 외부의 한 점에서 탄젠트 식으로 만나고 지나간다. 그 순간 위에서 부터 직접 심판하는 형태로 오는 것이지 그것이 우리의 소유가 되도록 오는 것이 아니다. 이에 근거헤서 한 예수상을 건설하는 시도가 쓸모가 없다고 생각했다. 이들은 만일 역사적인 사실들에 의해서 예수상을 건설해서 신앙한다면, 예수가 어떤 존재인가를 믿을 수 있는 여부를, 역사가 결정하게 되고 우리가 믿음으로 받아들이지 못한다. 믿는다 해도 역사가 믿을 수 있는 재료들을 다 모아서 정리하여 완전한 예수상을 만들어 놓기까지 우리는 예수를 믿을 수 없다고 키에르케골이 말했는데 그것을 그대로 이들이 말한다.

이러한 역사주의는 예수가 진짜로 부활했는지의 여부를 역사적인 사실에 의해서 받아들이려면 역사가 정확한 검증을 해 가지고 사실을 구성해야 한다. 그때까지 기다려야 하니 역사가의 손에 우리의 신앙이 결정되고 좌우된다. 그렇게 되면 우리의 믿음의 도약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못되게 된다. 그 이유는 역사는 과거의 사건들의 기록이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이 역사가 결정한 역사적 사실에 의존하기 때문에 죽고 사는 사활의 문제가 못되게 된다. 만약 다른 역사가가 다른 이론을 내세우면 회의주의에 빠져 버린다. 그러니 바르트에게는 역사적 사실이 중요한 것이 아닌 것이다.

그의 선생 빌레몬 헤르만과 하르낙 등에 의해서 20세기 초엽에 역사적 예수 탐구가 있었다. 그런데 거기에 대한 반동으로 후기 불트만 학파에서 새 역사적 예수 탐구가 나왔다. You quest historical Jesus.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새 탐구 혹은 새 물음”. 왜 여기 You가 붙었는지 이 배경을 알아야 이해할 수 있다. 그러니 바르트는 신앙의 역사는 역사적 사실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다. 아브라함에게 임해온 하나님의 음성은 아브라함 만이 받았고 그에게만 죽고 사는 명령이었지 다른 사람에게는 별 의미가 없게 되었다. 그러니 우리의 믿음의 도약으로 받아들이는 것이다. 그러니까 변증학파 불트만이나 바르트는 역사를 둘로 나눈다. 믿음은 지식에 의거하거나 역사적인 사실에 의거하지 않는다. 왜냐하면 우리가 의롭다함을 받은 것은 행위가 아니라 믿음 만으로 되엇으니 구원에 이르는 것은 지식으로 되는 것이 아니어서 역사적인 예수 지식은 상관이 없아는 것이다. 그래서 Historie와 Geschichte 둘로 나누는데 Historie는 달력의 역사로써 해가 뜨고 지고 그리고 우리가 일어나서 세수하고 법먹고 출근하여 일하고 웃고 울고 싸우고 다투고 즐거워하고 좋은 음식과 좋은 환경과 욕망을 충족하므로 만족해하는 달력상의 일기장의 역사를 말하는데 그런 인간사는 별 의미가 없다는 것이다. 그런데 그런 사람의 생에 큰 삶의 轉機가 일어났다. 그가 죽을 병에 들었다. 죽을 병이 든 사람에게 고급 자동차나 절세 미인이나 좋은 불갈비며 하려한 권세나 명예가 무슨 가치와 의미가 있는가? 모든 것이 다 허무로 떨어진다. 그 불치의 병으로는 그 고통이 얼마나 기가 막히겠는가? 물론 세상에 견디기 힘든 일이 많지만 그래도 힘든 것은 육체적인 고통 같다. 병으로 오는 고통 시자가 예수의 고통은 마취주사도 없이 당했는데 그래도 로마 군인들은 인정이 있어서 어떤 성경에는 쓴 쓸개즙을 탄 포도주를 주었다고 했는데 그것은 일종의 마취제이다. 그들은 너무 예수의 고통이 크니 마취를 시키려고 했다. 예수는 거절하셨다. 그 고통이 얼마나 심하겠는가? 조직이 무너져 내리는 그 고통, 정말 힘들 것이다. 그런 사람에게는 내가 지금까지 잘 살려고 남을 미워하고 시기하고 분망하던 삶이 아무 의미가 없는 것이다. 죽음 앞에 모든 것이 허무로 떠내려 가는데 무슨 의미가 있겠는가? 그때 부터 얼마동안은 물질과 탐욕에 연연한데서 벗어나서 선한 생각을 하며 자기 본래적인 삶에로, 인간적인 본래의 심정으로 되돌아 온다. 이제까지 인색하던 생각을 버리고 나누어 주기도 하고 다 그런다는 것은 아니지만 대개의 경우 그런다. 죽음을 앞에둔 사람의 生과 돈을 모으려고 아둥바둥하는 生과는 그 의미에 있어서 같은 生이 아니다. 시간의 의미나 인생의 가치가 같은 것이 아니다. 바로 그런 가치있고 의미있는 생의 역사를 가리켜서 Geschichte 라 하는데 독일어 밖에 이런 구분의 단어가 없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부활이 역사적으로 발생되엇느냐 하는 것은 의미 없으니 부활했든지, 神話가 되었든지, 거짓이 되었든지, 있든지 없든지 상관할 바 아니고 그 부활의 의미를 받아들여서 내가 기쁨이 생기고 소망이 생기고 평안이 오면 되기 때문에 구태어 빈무덤을 확인할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바르트는 성경을 하나님의 말씀, 그 자체로 인정하지 않고 그 안에 오류도 많이 있고 고대 동방 종교들의 神話들도 많이 들어 있다고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실 때 하나님 말씀이 된다고 하니 그는 현대주의자 이다. 그러니 바르트에 있어서는 글자 하나에 오류가 있고 없고에 죽고 살고 따질 필요가 없어진다. 나는 죽고 살게하는 책을 아직 발견하지 못했다. 여러분은 어던지 모르겠다. 그러니 성경도 오류가 있는 인간의 책이라 하면서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 말씀을 통해서 하나님이 말씀할 때 그것이 내게 神言이 되니까 성경 자체에 오류가 있느냐 없느냐, 어느게 진짜냐 가짜냐를 따질 필요가 없다. “그런 점에서는 옛날 자유주의자들도 옳은게 아니고 보수주의도 옳은 것이 아니다” 라고 하면서 하나님 계시를 전적인 他者로 강조한다.

바르트의 눈에 자유주의자들 까지도 옳은게 아닌 것은 성경을 하나님 말씀이요 계시의 문서라고 마음대로 비평적 방법으로 쪼개고 나누고 어거했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바르트는 그것을 막기 위해서 하나님을, 계시를, 전적인 他者로 하여 하나님 말씀을 성경책 하고 일치시키는 데서 떠나서 분리 시켰다. 그런 의미로는 말씀하시는 하나님께로 돌아가려고 했어도 결국 계시가 성경으로 형태화 하여 나타나지 못하게 막는다. 만약 계시와 성경을 일치하지 않고 분리하면 성경은 인간의 심리의 결정으로 끝나고 만다. 그래서 결국 바르트도 근세주의자 이다.

그러면 성경이 성경 계시로써와 하나님 말씀이 된다는 것과의 차이가 무엇인가 하는 점인데, 어떤가? 어디를 읽으면 하나님 말씀으로 역사할 것인가? 일본에서 강도가 성경을 읽다가 손이 범죄하거든 찍으라는 말씀을 읽고 손을 찍었다는 예가 있다. 그러면 그런 말씀은 현실적이어서 하나님 말씀으로 역사했다고 한다. 도적질 하던 자가 그때 그 말씀이 임하니 말씀의 큰 세력을 행사하여 손을 찍게 했으니 하나님 말씀으로 역사했다고 했다.

바르트는 항상 진리가 변증법적으로 이루어져야 하기 때문에 바르트에게는 진리가 항상 명제 형태로 오는 일은 불가능하다. 그러니까 결국 진리의 개념만을 가르친다. 본래 진리는 그 말의 진실이 사실과 일치해야 되지 않는가? 말이 한가지 진술을 했어도 그 다음 반대되는 부정적인 진술로 보충되게 되면 주된 사실과 맞지 않는 것이라고 Harvie M. Conn이 비판했는데 그도 단순하게 비판하고 있다.

변증법적 방법으로 이해하면 하나님을 전적인 他者로 강조하니까 계시하셔도 손에 잡히는 것이 없다. 그러면 결국 알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른다. 하나님과 무한한 거리가 있기 때문에 하나님(혹은 계시)을 결국 알 수 없다는데 이르지 않느냐는 것이다. 그러면 우리는 하나님의 존재에 대해서 본질에 대해서 다 안다고 말할 수 있는가? 그렇게 말할 수 없다. 우리는 하나님께서 이루신 그 사역을 보고 아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하나님에 관해서 계시된 만큼은 바로 아는 것이 확실하다.

계시를 Geschichte 영역에 넣으면 우리 기독교는 역사적 사실에 근거하고 있는 종교인데 역사적 사실이 사건으로 취급되지 않으면 기독교가 기독교로 존립할 수 없다. 그러니까 항상 내재론의 신학자들 처럼 하나님의 말씀계시를 마음대로 조종하고 가르치는 것을 교정하려는 시도는 그런대로 인정할 수 있지만 부활을 Historie 달력상의 역사에서의 일이 아니라고 부인하고 실존주의 線의 영역의 일로 하면 기독교가 서있는 그 기초가 상실된다. 결국 기독교를 허는 일이 된다

 

http://www.reformednews.co.kr/sub_read.html?uid=611§ion=sc26§ion2=

출처 : 영적 분별력
글쓴이 : 진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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