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3장 신정통주의
이제 신정통주의가 독일을 넘어서서 세계에 퍼지고 일본이 특히 열열하여 한국에까지 건너 왔다.
Karl Barth는 계시가 수직으로 와서 시공내에 한 사건이 되지 않는다. 특히 성경계시의 핵심이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사역이고 특별히 고난주간 부터 부활후 40일간 까지의 사건이라면 성경은 그 사건을 기록한 증거들, 기록이고 증거물이다. 성경, 그 자체가 계시가 아니라 혹은 지시봉이라 한다. Karl Barth는 성경 자체가 계시 자체라 하지 않는다. 성경은 계시사건을 지시하는 지시물에 불과하고 증거물, 기록 뿐으로서 다만 계시사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부활 그리고 그후 40일을 회상하게 하는 보조물이다. 그러면 언제 하나님 말씀이 되느냐? 그것에 대한 하나님 말씀이 위에서 내려와 성경을 통하여 증거하는 그 십자가 사건과 일치할 때 비로소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 된다고 한다. 혹은 하나님 말씀으로 쓰였다고 한다.
브룬너도 마찬가지 진영에 있기 때문에 브룬너에 있어서도 계시는 둘의 만남이다. 만남 없이 무슨 사건이 생겼다고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야 별 연애경험도 없이 만나니까 만남의 의의가 별 의미가 없지, 소설들을 읽어보면 한 남자와 여자가 만날 때 얼마나 큰 사랑의 사건이 연출되는가? 둘이 말하는 자와 듣는 자가 만나 대화하는 사건이 계시라 하여 계시가 객관적으로 와 있는 것을 부인한다. 신정통주의자의 눈에는 객관적으로 와 있으면 그것은 전통적인 자유주의가 되고 보수주의가 된다. 그러니 변증법적 신학자들의 눈에는 보수주의와 자유주의가 다 같이 보인다. 이는 다 같이 하나님의 말씀, 계시를 소유했다고 하며 성경책을 가지고 있으면서 자유주의자들은 성경안에 하나님의 말씀이 들었다고 하고 보수주의자들은 성경이 계시 자체라고 하기 때문에 Karl Barth는 이를 둘 다 배척한다.
Karl Barth는 계시 곧 하나님의 말씀이 무엇이냐 할 때, 바로 예수 그리스도라 하여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말씀이라 한다. 왜냐하면 예수 그리스도안에서 神人의 구속이 이루어졌는데 구속의 궁극이 무엇인가? 神人의 연합이다. 그러면 Karl Barth의 그 다음 단계는 계시, 즉 하나님 말씀은 예수 그리스도 보다 더 올라간다. 그것은 예수 그리스도가 신인연합을 이루는 길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계시는 전부 다 예수 그리스도에게만 있다. 특별히 부활부터 40일간이 계시의 사건이라 한다. 죄도 예수 그리스도아 연관해서 생각한다. 사람이 언제 죄인임을 아는가? 예수 믿게될 때 안다. 그러면 죄의 문제가 어찌 되었는가? 이미 해결되었다. 예수를 떠나서 죄를 아는가? 모른다. 예수를 만날 때는 이미 예수안에서 죄의 문제가 해결되어 버렸을 때 이다. 그러니까 예수 믿지 않는가? 그렇기 때문에 Karl Barth는 자연계시를 인정하지 않고 예수 그리스도로 나타난 특별계시 뿐이다. 우리에게는 받을만한 능력이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에게도 변증법이 있는데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 이시다. 그런데 사람이 되셨으므로 정반대가 되었다. 하나님이 하나님 되시기를 포기하고 사람으로 존재하다가 부활하므로 다시 하나님의 존재로 되돌아간다. 그러니까 우리처럼 단순하게 하나님이 육신을 입으셨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하나님이 반대극으로 변화되었다고 한다.
칼세돈 신경에 의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兩 本性이 혼합없이 변동없이 분리없이 분별없이 계시지만 Karl Barth에 의하면 그것이 아니고 하나님이 사람이 되는 정 반대극이 된다. 그러니까 엄밀한 의미에서 Karl Barth에게는 성육신이 없다.
Karl Barth에 의하면 하나님이 하나님으로써 높으시다고 하면 무슨 의미가 있겠느냐? 그러니 하나님이 성육신해서 그 반대극으로 완전히 사람이 된 것이다. 그래서 다시 높아지신다. 하나님이 하나님으로 높으신 것은 의당한 것이라 하니 이것은 칼세돈 신경에 전적으로 배치(背馳)된다. 그러나 Van Til이나 Harvie M. Conn이 잘 모르고 성육신을 인정해 주는데 변증법적인 신학자들에게 실제로 성육신이 있는 것이 아니다. 다만 그들에게 변증법적으로 있는 것이지 실제로 성육신이 있는 것이 아니다.
Karl Barth에 의하면 하나님께서 인류의 인간성 자체를 높이셨다. 그리고 높이 보시되 하나님이 성육신 하시므로 그 인간성을 그 전보다 더 높은 차원으로 앙양시키셨다. 그러니 인간성 자체가 존귀하다. 그것은 그 인간성에로 하나님이 인성을 입으시고 성육신하셨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것은 하나의 언어사건일 뿐 실제 역사적 사실은 아니다. 인성이 얼마나 하나님께 존귀하게 여김을 받는 존재인가? 그가 나치를 반대하고 그 탄압을 반대할 때 바로 이 교리를 내세웠다. 모든 사람이 그리스도안에서 다 유기되었고 또 다 선택되었다. 그리스도가 바로 하나님의 유기된 자이고 선택된 대표자이다. 그러니까 그리스도안에서 유기되어 지옥 갈 자가 아무도 없다. 모두가 다 하나님의 큰 구원에 이른다. 왜 그런가? 하나님의 사랑이 크기 때문에 모든 인류를 다 그 사랑이 포용하신다. 그래서 다 구원을 얻는다. 그러므로 전도할 필요도 별로 절박하지 않다. 왜냐하면 모든 인류가 모두 다 그리스도안에서 구속이 되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신자와 불신자를 나누어서 적대시할 필요가 없어진다. 그러니까 그 회해교리가 한국에도 도입되면서 부터 화해하자 해서 화해교리가 유행했다. 그래서 죄악을 함께 나누기도 했다. 왜 그리스도인이라고 술 마시지 않고 담배 안피운다고 선을 그어놓고 그것을 적대시 하느냐? 그럴 필요가 없는 것이다 라고 한다.
흔히 Karl Barth에게 있어서는 하나님의 진노가 역사의 한 지점에서 진노가 공의로 건너감이 없다. Karl Barth에게는 타락도 마찬가지 이다. 에덴 동산이 어디 있는가? 성경에는 동쪽에 위치한다고 되어있다. 그러면 동쪽이 어디인가? 우리가 볼 때는 메소포타미아와 티그리스 강과 유프라테스 강이 발원하는 어느 지역으로 본다. 지금도 두루도는 화염검으로 지키는가? 볼 수 있으려면 땅에 있는 것이어야 하는데 안 보이니 땅에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회수시켰다고 하는데 언제 회수 시켰는가? Karl Barth에 의하면 에덴은 지도상의 한 지점이 아니라고 한다. 성경의 명확한 지점이 없다. 그러니 Karl Barth는 에덴동산은 지도상에 점을 찍을 수 있는 지점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타락도 지구상에 한 점을 찍고 하루 이틀을 셀 수 있는 역사상에 일어난 실제사건이 아니라고 한다. 그런데 분명히 우리 기독교는 역사상에서 생긴 사건이라고 믿는다. 아담의 존재를 역사적인 인물로 인정하지 않으면 예수 그리스도는 꼭 인정할 필요가 어디 있는가? 그럴 필요성이 없어져 버린다.
내가 그 문제를 가지고 암스텔담에서 토론할 때에 하나님께서 노아홍수로 에덴동산을 쓸어버리셨다 했는데 그것도 증거는 없는 이야기이다. 그러나 낙원을 홍수로 헐어 버리셨다. 그런데 Karl Barth에 의하면 역사상 원죄 상태에서 타락으로 넘어간 그런 것이 없다. 타락은 Geschichite 의미로서의 역사에서 이루어진 것이지 실제 Historie 사건이 아니다.
Karl Barth가 그렇게 훌륭한 신학책을 많이 내고 성경신학을 많이 했어도 Karl Barth 신학으로 교히가 새로워지지 못했다는 것이 자유주의자들의 평이다. 재래신학과 Karl Barth 신학의 차이점이 있다. 재래신학을 보면 성경만 인용해 놓고 말지만 Karl Barth의 조직신학 책의 다른 점은 주석을 실제로 해서 자기 신학을 전개하니 책이 방대해졌다. 그런데 문제점은 누구는 선택되게 하고 누구를 유기되게 할 수 있느냐? 아직 그들은 선택된 것을 모르고 있는 것 뿐이라 한다. 그러니 그것만 선포하면 된다는 것이다. 결국은 전도할 필요성이 없어진다. 있다 해도 소극적이다. 있다면 그 큰 사랑과 선택을 알려주는 것 뿐이다. 그래서 그들로 선택된 자들로 깨우쳐 살게 하는 것 뿐이다. 그러니 Karl Barth는 역사상에 하나님의 진노가 자비로 넘어가는 시점이 없다. 그의 선태가 유기도 마찬가지 선으로 구분할 수 없다. 그러니 선택교리만 있다. 밝은 빛만 있지 배면에 어두움이 없다.
Karl Barth가 계시를 강조하는데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하는게 아니라 만남이라고 한다. 언제 만나는가? 매 순간 만난다. 성경이 그 자체로 하나님 말씀이 아니라 선포될 때 내 심령에서 내 존재 깊이에서 만나면 하나님 말씀이 된다. 만남, 대면, 대하로 된다. 그러니까 구체적인 명제형태로 계시가 오는 것이 아니다. 문장형태로 계시가 오는 것이 아니다. 계시가 내게 사건으로 와야 계시가 된다고 한다.
神話(Myth)와 史話(Saga) 즉, 전설은 다르다. 불트만이 말한대로 神話는 이 세계의 일을 저쪽 세계의 일로 말하는 것, 혹은 神의 일을 인간의 일인 것처럼 말하는 것이다. 불트만은 칸트가 설정한 두 세계의 일을 충실히 한 사람이다. 그래서 저 초월의 세계가 있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이 어디 초월의 세계의 보좌에 앉아 계시다가 우리에게 오셔서 여인의 몸에 들어가시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고 그 피가 무슨 마력이 있어서 죄를 씻겠는가?
그런데 전설은 완전히 역사성을 결여하지는 않는다. 상당히 많은 경우 역사와 연관되어 있다. 그런데 그것이 본래 우리의 인간구조와 연관되어 있는 것이다. 그런 것을 바꾸어 투사한 것, 그것이 전설이고 Saga라 한다. 그러니 에덴동산의 첫 조상의 타락 같은 것도 역사적인 시점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니까 원죄라고 하는 것도 칸트의 말처럼 우리에게 있는 근본악을 말하는 것이지 실제로 어느 시점에서 선한 사람이 악한 사람으로 전이되는 것이 아니다. 그리고 그리스도 안에서 구속같은 것도 Karl Barth에 의하면 실제로 그 큰 구속은 神人의 연합이고 하나님과 合一인데 예수 그리스도의 변증법적 성육신은 그 일을 위해서 이루어졌다. 그러면 실제로 Karl Barth는 솔직하고 단순하다. 동정녀 탄생을 못 믿으니까 전통적인 성육신을 못 믿는다고 했다. 그렇지만 Karl Barth에게 성육신이 있는가? 변증법적으로만 있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리스도가 영원부터 선재해 계셨다는 그런 것은 하나님께 두 神의 교리를 도입하는 것이라고 한다. 예수 그리스도가 성부와 구별된 第二位格, 혹은 인격으로 선재해 계셨다고 하는 것은 Karl Barth에게 있어서는 神話일 뿐이다. 그러니까 우리도 사변적으로 생각하면 머리가 멍멍하고 해결할 길이 없다.
하나님 말씀의 가르침에 늘 매어 있어야 할 것이다. Karl Barth 신학의 용어들은 다 반복을 하는데 그 안에 들어있는 내용은 전혀 다르다. 그러니 그런 것들은 사실을 혹은 실제를 지시하는 지시물이다. 예를 들어 타락이나 아담의 원죄 같은 것은 우리의 인간 본래의 구조를 말해 주는 것 뿐이라 한다. 그러니까 창세기 3장 같은 것도 역사적으로 실제로 일어난 사건이 아니다. 하나님 지식과 하나님의 경배란 제목으로 Karl Barth가 사도신경 강해를 했다. 그때 한 질문자가 질문을 했다. 낙원에서 뱀이 말한 것이 발생했느냐? Karl Barth에 의하면 그것이 역사적인 어느 시점에서 타락이 생긴 것이 아니다. 그러니 뱀이 말했다는 것이 무슨 의의가 있는가? 계속 Geschichite 이야기를 했을 터인데 청중들이 너무 단순했고 못 알아들은 것이다. 타락이 Geschichite에서 의미상 생겼지 우리사는 Historie 이런 역사상에서 사진 찍을 수 있도록 타락이 생긴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니 그런 질문을 하니까 그게 무슨 상관이 있느냐는 것이었다. 그러니 우리가 성경말씀에 부착하지 않고 사변적으로 이야기 하려면 정말 이해하기 어렵다. 우리의 설교에서 이와 같은 어려운 것을 과학적으로 증명하려고 노력해서는 참으로 어렵다. 성경적으로 제시해야 하고 하나님 말씀의 권위로 가야 한다. 그리고 성령의 역사가 있도록 해야 한다.
Karl Barth는 모든 계시가 그리스도와 연관해서 그리스도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에 자연계시를 소홀히 하고 도외시 한다. Karl Barth는 자연계시라는 것은 없다는 것이다. 그러나 그 자연계시도 그리스도 안에서 다 왔다. 그리고 창조자체에서 하나님께로 갈 수 없어도 거기에 모든 계시가 나타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종교개혁이 강조한 특별계시가 정점에 이르렀는데도 모든 것을 은혜화 해 버리니까 자연신학이 Karl Barth에게 흥한다. 변증법적으로 말하니까 요한복음도 그런 이야기를 하는데 그리스도가 십자가에 매달림을 영화로 생각했다. 십자가가 그리스도에게 있어서 제일 치욕의 극치인데 요한이 그것을 영광으로 보았다. 그래서 Karl Barth도 예수의 수난을 변증법적으로 본다. Karl Barth에게는 하나님의 신이 사람이 되신 그런 성육신이 없다. 실제 사건으로 있는 것이 아니고 그냥 변증법적 의미에서만 개념적으로 논리상 있는 것 뿐이요, 언어사건이지 실제사건이 아니다. 말장난일 뿐이다.
전통적인 견해로 산위일체 제 2위격은 Karl Barth에게는 없는데 없는 하나님이 어떻게 사람에게 내려와 있겠는가? 다시 반복하지만 칼세돈 신경이 변화없이, 변동없이, 혼합없이, 분열없이, 분리없이 그리스도의 양 본성이 있다는 그 내용중에 변동이라고 한 그 구절에 의해서 Van Til이 Karl Barth의 성육신 교리를 비판하지만 내가 보는대로는 Van Til이 그 면에서는 Karl Barth를 잘못 보았다. 전통적인 성육신이 Karl Barth에게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하나님이 자기 자신을 주권적인 자의에 의해서 반대극인 자리로 가서 인간이 되었다가 또 반대극에서 다시 반대극인 하나님으로 되돌아오는 자유와 능력을 가지신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완전히 하나님이 사람이 되었다가 완전한 그 사람에서 다시 완전한 하나님에로 되돌아가는 주권적인 자유를 갖는다고 Karl Barth가 말했다.
그런데 내가 이해한대로는 Karl Barth에게는 진정한 의미의 성육신이 없고 변증법적인 말장난 뿐이지 실제로는 없다. 그렇게 따져서 전통적인 성육신 교리가 Karl Barth에게 없으면 결국 Schleiermacher를 180도 되돌이키려고 하는 것이 설득력이 없어진다. 예수도 한낱 사람으로 머물러 있을 뿐이기 때문이다.
Karl Barth에게 제일 중요한 것은 소위 화해교리, 혹은 구속인데 그 구속은 하나님과 사람이 연합하고 사람과 사람이 연합하는 것이다. 이것이 그에게 제일 중심이다. 그래서 연합함으로 인간의 존재를 하나님이 존재까지 끌어올린다. 그것을 예수 그리스도를 통해서 하신다고 한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그 죽음가 피로 하나님과 화해했다는 성경적 교리와는 맞지 않는 것이다. 근본이 무엇인가? 그것은 인간의 존재를 이 피조수준에서 하나님의 자기 존재의 수준까지 끌어올리는 것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구원사역의 궁극의 목표라 한다. 지금 성경의 선포대로 하나님과 사람 사이에 원수되어 있는 것을 그의 아들의 죽으신 그 피로 회복하고 화해하여 화목하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Karl Barth의 화해가 무엇인가? 神人合一, 즉 연합으로 피조물이 하나님의 존재의 수준까지 올라가는 것이다. Karl Barth의 주장은 종말에 인간이 피조수준을 넘어가는데 그것을 구원이라고 말한다. 그런 면에서 Karl Barth와 로마 카톨릭이 완전히 일치한다. 그래서 로마교회가 Karl Barth를 카톨릭이라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Karl Barth에게서 만인구원설은 불교도와 유교도와 힌두교도 다 포함한다. 한스 킹(Hans Küng)은 그런 방면에서는 전제는 안했지만, 현대 사상들이 다 같다. 한스 킹은 교황무오설을 반대해 교황의 노여움을 사서 교수직에서 물러나간, 튀빙겐 대학의 교수였다. 그런데 종교개혁으로 로마교회가 구라파의 많은 교회를 빼앗겼다. 영국, 스칸디나비아 제국들, 뎀마아크, 화란, 독일 등. 그러나 전통적인 라틴계, 이태리, 불란서, 스페인, 포르투갈, 오스트레리아 그리고 서구의 반 정도는 전통적인 로마교회의 영역으로 남아 있었다. 그래서 그 실세회복을 아시아 선교에서 추구했다. 그러므로 종교개혁이 한창일 때 로마교회는 아시아로 선교사를 보낸 이유가 거기 있다. 인도, 중국, 일본으로 선교사를 파송했고 그들이 와서 열심히 16세기 부터 400년 가까이 아시아에서 선교했다. 그러나 구라파에서 잃은 것을 결코 회복하지 못했다. 그러면 신대륙은 어찌 되는가? 미국과 카나다가 전통적인 개신교의 아성으로 남았다. 물론 그 위 19세기에 미국에서 로마교회가 반동 종교개혁을 일으켜 미국을 카톨릭화 하는데 숫자로는 열세여도 상당히 많은 영역에서 로마교회가 미국에서 그 실세를 많이 회복했다. 그래서 남미는 다 로마교회 이다.
그러면 기독교의 복음은 만인을 위한 복음인데 선교를 해도 실패하고 되지 않는다. 그리스도의 복음으로 교회에로 들어와야 할텐데 아시아가 들어오지 않는다. 일본이 1억이 넘는 인구에 개신교가 50만, 카톨릭이 100만이나 200만 정도 될까 한다. 그러니 전체에 비해서 얼마나 되는가? 중국은 10억 인구이니까 좀 많을 것이다. 그러나 전체 비율로 얼마 안된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온 인류를 위하여 구속하셨다는 사실에 선교의 당위성이 성립하는데 이렇게 오래도록 전도해도(그들은 전교라고 하는데) 성공하는 것이 없다. 그러면 그들을 구원의 밖에 두어야 하느냐? Karl Barth에게는 구원의 길에 다른 길이 없다. 불교도 자비를 말하지 않는가? 유교도 仁(어짐)을 말한다. 그리고 높은 윤리적인 차원을 제시하지 않느냐? 그렇다면 그 종교들은 결국은 하나님께 가는 것이다. 출발은 달라도 귀결은 같다는 것이다. Karl Barth는 하나님이 만인을 위해서 구속의 사건을 이루셨으니까 만인이 다 그리스도안에서 유기되었고 선택 되었으니까 그리스도가 최종적으로 선택된 자라고 한다. 그러니 그리스도안에서 다 선택되고 다 구원에 이르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만 천당가고 불신자는 못 간단 말인가? 그런 식의 구원은 Karl Barth에게 없다. 그러니까 Karl Barth가 신학운동을 구라파에서 크게 일으켰어도 선교사를 보낸 교회가 몇 되는가?
제 4장 양식비평-불트만의 방법
(Form Criticism-Bultman's Method)
불트만의 비평을 양식비평이라 하는데 불트만이 처음 시작한 것이 아니고 헤르만 궁켈이 소위 양식비평을 구약의 연구에 도입했다. 불트만은 궁켈의 제자이다. 그런데 마틴 디벨리우스(Martin Dibelius)가 신약학에는 처음 도입했다. 그리고 완전히 정착한 사람이 불트만이다. 그러나 많은 사람이 불트만의 과격한 이 양식비평을 반대하고 비판해도, 상당히 많은 사람들이 이를 수납한다. 이 비평적 방법은 성경도 고대의 다른 종교적 문헌과 역사적 문헌과 똑같이 다루어야 한다고 최초에 말한 사람이 있는데 소위 경건주의 학파에서 나온 Semler란 사람인데 성경도 완전히 역사적인 책으로 생각하고 그러니 역사적 비평적 방법으로 다루어야 한다고 했다. 성경이 계시에 의해서 이루어진 것이 아니라 고대 역사적인 종교적 산물로 이루어진 것이라고 하여 실제로 성경을 말해도 계시를 부인한다. 불트만 이전 학파의 A. von Harnack이나 V. Hermann이 다 불트만의 선생인데 이들 중에 헤르만의 영향이 더 크다. 왜냐하면 하르낙과 거의 동시대 사람으로 불트만에게 실존적인 사고를 본격적으로 시작할 수 있도록 준비하고, 일을 연 사람이 헤르만이다. 그런데 19세기 말엽에서 20세기 초엽까지 이들에 의해서 역사적 예수 탐구가 있었다. 이것은 역사적 비평적 방법으로 가장 믿을 만한 예수상을 건설하려고 하는 것이 19세기 말엽에 모든 학자들의 이상이었다. 복음서가 제시한 가장 믿을 만한 신빙성있는 역사적인 예수상의 건설, 그것을 비평적 방법으로 공관복음서를 연구하기 시작했다. 이것이 변증신학이 등장하기 전의 역사적 예수 탐구이다.
그런데 불트만은 자기 선생들의 그런 주장에 대해서 전면적으로 반대를 했다. 공관복음서를 아무리 연구를 해도 믿을 만한 예수상을 건설할 수 없다. 그것은 공관복음서는 예수의 전기집이 아니기 때문에 역사적인 사실을 전달하는데 의미를 가지는 것이 아니라 초대교회 신앙으로 완전히 조직된 초대교회(여기에서 한국의 미신적 토속신앙이 단군을 역사적 인물로 만들고 그들이 믿는 내용을 논리화 하고 조직화 해서 그들의 경전을 만들듯이) 신앙고백의 산물로 성경을 생각한다. 이들은 성경을 순전히 역사적인 사실의 보고 같아도 초대교회의 믿는 내용, 즉 신앙으로 활동했던 역사적인 예수상을 건설할 수 없다고 했다. 그리고 불트만이 변증법에서 이신득의의 교리에 근거해서 우리가 예수 믿어 구원 얻음이 역사적인 예수에 관한 지식을 얻어서 그 지식에 근거한 신앙을 가져야 구원을 얻는다고 하지 않는다. 우리가 구원 얻은 것은 행위로 말미암지 않고 믿음으로 의롭다 하듯이 선포된 말씀을 믿음으로 우리가 의롭다 하고 구원에 이르는 것이지 역사적 지식을 소유하므로 의롭다 함을 갖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러면 공관복음서에 나와있는 것은 무엇이냐? 순전히 초대교회 신앙의 산물이다. 그래서 이들이 말하기를 공관복음서를 보면 초기단계에서는 역사적인 나사렛 예수를 랍비라고만 했다. 그 다음 단계는 주님으로, 그 다음은 하나님의 아들로, 메시야로, 세상의 구속주로 점점 더 높은 단계로 표현하여 말하여진다는 것이다. 그러니 교회가 어떤 상황에 처했을 때 예루살렘 교회는 예수를 퀴리오스 예수스(κㄷρθξζ ⅩΘσξυζ) 즉 主 예수라고 불렀다. 그리고 메시야라고 까지 발전했는데 이 교회가 예루살렘을 벗어나서 희랍세계로 들어가서는 그 희랍의 종교사상들과 동방의 여러 신비종교들을 만났다. 그때 그들이 자기들의 신앙고백의 대상을 채택했다. 그 상황에서 예수에 대한 이해, 예수에 대한 교회의 신앙고백이 복음서라는 내용으로 결과한 것이라고 한다. 그러니 그들에 의하면 복음서가 역사적인 예수의 실제를 기록한 것이 아니다. 그렇기 때문에 복음서는 실제로 예수가 말한 것이 아니라 이들이 자기들의(초대교회) 신앙을 정당화 하기 위해서 실제로 예수가 말하고 행한 것처럼 꾸몄다. 그러니 초대교회의 그 상황에 따라 예수의 신앙고백 내용도 변화되고 변천한다. 그래서 그냥 일률적으로 나타난 것이 아니라 일정한 양식으로 나타난다.
그러니까 불트만은 계시고 뭐고 그런 것은 관계도 없고 그냥 이방 종교들의 발전과정과 똑같이 취급하므로 이 세상 여러 종교들 중에 조금 고등한 종교 정도를 만들었다. 예를 들면 퀴리오스(κㄷρθξζ)를 어떻게 예수에게 붙일 수 있었느냐? 로마 황제들에게 붙인 퀴리오스(κㄷρθξζ), 主란 칭호를 초대교회가 예수에게 붙였다고 말한다. 하나님의 아들이란 칭호도 마찬가지이다. 그리스도는 메시야, 혹은 주님이란 칭호도 예수 자신이 한 것이 아니고 초대교회가 그런 신앙고백을 했을 뿐이다. 그러니까 복음서는 초대교회의 신앙의 산물이며 실제 역사가 결코 아니다. 그런데 그 신앙이 희랍세계로 가면서 넓어지므로 예수에 대한 이해의 영역도 넓어지는데 이것이 공관복음으로 표현되었다는 주장이다.
그런데 이 양식사학파 다음, 후기 불트만의 제자들이 편집사학파라는 편찬가설을 말한다. 이것은 양식사학파가 공관복음을 초대교회의 신앙고백이라고 하는데 편찬가설은 초대교회 신학이 공관복음을 결정했다고 했다. 그러니까 편찬가설은 초대교회라고 하는 공동체가 아니라 편찬자들이 자기들의 신학에 따라 편찬해낸 그 편찬자들의 신학이 복음서를 만들었다고 한다. 그러니 양식비평과 편찬가설은 큰 차이가 있는 것이 아니다.
신성종 박사는 템플대학에서 학위를 받았는데 주임교수가 인정을 했다. 그는 편찬가설을 박사학위 논문으로 써서 학위를 받았다. 거기다 한국의 토착화 신학까지 겸했다. 웨스트민스터에서 한국학생들이 요청해 그 논문발표를 했다. 그런데 공격하고 문제를 지적한 사람이 아무도 없고 나만 문제를 지적하고 공격했다. 그러니까 한국에 토착화를 부르짖는 사람은 다 불트만의 이 신학을 이용해서 말한다. 옷을 한국식으로 하고, 노래를 한국식으로, 그림을 한국식으로 표현해야 한다고 한다. 한국사람이 신앙체험을 우리식으로 설명한다고 하는 것은 반대할 사람이 별로 없을 것이지만, 그러나 뒤에 있는 신학이 문제가 된다. 그런 것을 일관성 있게 밀게 되면 윤성범의 단군신화격으로 표현하는 데로 귀착하지 않겠는가? 현대신학도 모두 다 자기시대의 사상의 토착화인 것이다. “그러면 한국의 무속신앙을 인정하여 표현하란 말인데 다를 것이 무엇인가? 소박한 수준에서는 어느정도 이해가 가지만 그것을 신학으로 일관성 있게 믿는다면 어떻게 되겠는가? 윤성범의 단군신화의 삼위일체로 하나님의 삼위일체를 푸는데로 귀착하지 않는가?” 그랬더니 어떤 사람이 말하기를 편찬가설은 사탄의 신학이 아니라고 큰소리로 일축해 버렸다. 사탄의 역사에서 나온 것이지 어떻게 성경을 허는 이 신학이 사탄적이 아니라고 하겠는가? 이 사람들의 주장은 예수님 자신이 자기를 하나님의 아들로 주장한 것이 한번도 없도 신학자들이 그렇게 꾸몄을 뿐이라고 한다. 나도 편찬가설을 잘 모르지만 양식사학파와 별다른 것이 없다. 다만 양식사학파는 복음서를 초대교회의 산물로 보고 편찬가설은 편찬자의 신학적 산물로 보는 차이 뿐이다.
불트만에게는 본래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고 초월해 계신 하나님이시라는 그런 것은 찾아볼 수 없다. 그런 것은 초대교회 신앙공동체가 자기들의 신앙을 한갖 인간인 예수에게 채색하여 덧입힌 신화적인 것이지 다른 것은 없다고 한다. 불트만은 바울의 인간이해를 기독교 이전의 영지주의 인간이해로 전부 풀었다고 했다. 그 이해를 지금 현대적으로 바꾸는데 좋은 것이 무엇인가? 하이덱거의 실존주의 철학이라고 한다. 그러니까 초대교회 당시 고대인들의 인간이해를 그 당시 형식을 빌려서 했다. 그러니 우리는 현대적 방법으로 이해하는데 제일 좋은 방식이 하이덱거의 실존철학이라고 한다.
예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메시야요, 구주라는 것은 다 신화라는 것이다. 우리의 일을 저쪽(하나님의 일)의 일로 투영해 내는 것 뿐이기 때문에 신화이지 다른 것이 아니라 한다. 그러니 복음서가 역사적인 하나님이 아들된 인간 예수에게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초대교회가 예수에 대한 신앙을 가지고 자꾸 헬라세계로 확장해 갈 때 그들의 종교에서 자기들의 신앙의 대상을 주님으로 호소해 가고 하나님의 아들로 고백하고 하나님으로 고백하고 메시야로 취택했을 뿐이다. 갈수록 신학적 이해가 깊어짐에 따라 교회가 도를 신격화 시킨 것이라고 한다. 그들은 신약을 보면 그렇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믿는대로 예수께서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주장하고 그리고 말씀으로 제자들을 가르쳐서 신앙을 성장시키고 또 사도들이 그 복음을 전파하고 가르쳐서 교회를 세운 것이 아니고 초대교회가 그와 같은 신앙을 가지고 복음서를 썼다는 것이다. 초대교회 신앙이 혹은 초대교회 신학이 복음서를 만들었다고 한다.
양식사학파와 다른 것은 편찬가설이 편찬자의 혹은 편찬학파의 신학이 복음서를 만들었다고 하는 차이만 있다. 그러니까 그들의 주장대로 그 시대의 사상들의 영향을 완전히 다 받은 것이며 예수는 한낱 나사렛 사람이지 계시가 어떻고 하는 것은 다 신화적인 이야기라고 말한다. 물론 우리도 예수를 나사렛 사람이라고 인정을 한다. 또 그들이 한가지는 인정하는데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가 하나님의 세상을 향한 마지막 최후의 선언이다 하는데 그것은 맞는다. 그러면 부활은 무엇이라고 하는가? 그 십자가의 의의를 받아들이는 것을 부활이라고 할 뿐 역사상의 실제 부활은 이들에게 없다. 하나님의 최종 심판을 믿음으로 받아들이면 내가 죄에서 놓여난다는 것이다.
지금 현대교회의 추세를 생각하지 말고 우리가 한번 생각해 보자. 예수 믿으면 세상것을 추적하고 사는데서 벗어나지 않는가? 하이덱거의 분석에 의하면 일상생활은 항상 조르게(Sorge)라 한다. 이 조르게란 말은 근심과 염려란 말도 되지만 관심이란 말이다. 우리는 항상 대상을 바란다. 우리의 의지도 그냥 허공으로 올라가는 것이 아니라 무엇을, 어떤 대상을 바란다. 우리가 안다고 할 때도 그냥 허공에 구름잡듯 아는게 아니라 어떤 대상을 지향한다. 대상 지향주의로 우리는 일상의 관심을 항상 대상을 지향한다. 좋은 주택, 좋은 음식, 좋은 가구, 좋은 자동차, 아름다운 장식, 호화로운 세상 榮華에로, 은숫가락 금젓가락으로 향한다.
하이덱거에 의하면 우리는 항상 대상에 매어 물질적인 것에 매여서 산다. 우리가 그런 대상 지상주의로 대상에 매어사는데 우리가 죽음에 직면하면 무슨 의의가 있겠는가? 그러니까 죽음 앞에서는 세상에 그와 같이 귀한 것들이 다 無와 같은 것이 된다. 그때 본래적인 자아에로 되돌아 온다고 한다. 기독교 신앙을 소유한 우리도 세상을 전부로 하고 사는데서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선포를 받아들여 신앙을 가지면 그 전의 것은 별로 중요하지 않은 것처럼 참 신앙은 본래적인 자아에로돌아와서 이제는 주님을 전부로 하고 산다. 그와 비슷한 이야기로 하이덱거가 실존을 멋지게 잘 묘사를 했다. 바로 그런 하이덱거의 실존주의 식으로 현대적으로 번역할 수 있다는 것이 非神話化 다음에 실존주의적인 해석이다.
그러니까 양식사학파에 의하면 성경에 나와 있는 예수의 말이라는 것들도 예수가 실제로 한 이야기가 아니라는 것이다. “배에서”, 혹은 “때에”, “길 가실 때에” 이런 단어들은 편찬자가 전부 다 예수가 한 말인 것 처럼 만든 말이라는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예수에 대해서 직접 알 수 있는 길이 없고 제 삼자들의 예수에 대한 대강적인 이야기만 가지고 있을 뿐이다. 초대교회가 다 그렇게 만들었다. 초대교회 신앙의 산물이 곧 복음이 된 것이다.
그러나 복음서는 다 역사적 사실이다. 겨우 예수의 인간적인 행적만 기록한 정도가 아니다. 왜냐하면 지금 하나님의 큰 구원사건이 진행되고 있는데 “공자님이 어디 가시고 자공에게 말씀하기를” 하는 그런 식의 논어와 같은 것이 아니다. 그러니가 한동안 진짜 예수가 존재했느냐 하는 이야기까지 나왔다. 안 그러겠는가? 그런 주장을 적극적으로 밀면 그런 결론에 도달하지 않겠는가? 예수가 實在했느냐, 가공의 인물이냐를 의심하게 된다.
내가 “인도에서 예수의 생애”란 책을 한권 사 놓았는데 다 읽으면 서평을 쓸려고 한다. 그 책에서는 예수가 십자가에 못박히기 까지는 인정을 한다. 그런데 죽지 않고 인도로 갔다는 것인데, 인도와 연결된 것에 대해서 내가 이해하기로는 초대교회의 중요한 사상 하나가 가현설(可顯設)이었다. 이것은 영지주의 주장의 영향으로 물질은 악하다고 생각하므로 하나님이신, 영이신 그리스도가 실제로 인간 예수와 결합할 수 없었는데 실제로 결합하신 것처럼 나타났다고 하는 것이 가현설이다. 실제로 성욱신한 것이 아니고 가현이었다. 영지주의 영향에 의해서... 그러면 예수는 물질은 악하기 때문에 물질과 결합할 수 없다는 귀결이다. 그러니까 예수는 실제로 십자가에 못박혔느냐? 도마가 쓴것이 아니고 도마의 이름으로 영지주의 사상이 많이 들어가서 쓰여진 도마복음에 의하면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박을 때 예수는 변형하여 구레네 시몬이 되었고, 구레네 시몬이 실제로는 예수 자리에 대신 들어가고 말았다. 그런에 도마가 인도로 전도하러 갔기 때문에 그렇게 연결시켜서 소설을 하나 쓴 것이다. 그런 책은 사기꾼의 거짓말일 뿐이다.
양식비평으로 따지면 복음서는 예수에게서 실제로 나온 말이 아니고 예수와 그 제자들에 관한 이야기일 뿐이며 계속 밀면 예수가 존재했다고 꼭 할 필요도 없고 존재할 아무런 의의도 갖지 않는다. 한동안 그와 같은 예수가 실재했느냐는 가설들에 대한 책이 나온 일도 있다.
지금 이렇게 여기저기 돌아다니는 구전들 혹은 단위들을 교회가 엮었는데 지금 복음서 이전에 원천이 되는 것이 단위로 돌아다녔다. 그것들이 어떤 형태를 거쳐서 교회신앙에서 인위적으로 결합되었느냐? 그러니 그 껍데기를 벗기면 처음 출발한 본래 알맹이가 나올 것이다 하여 전승의 기본되는 기본단위를 찾아내자고 한다. 이것이 양식비평인데 이것은 오히려 온건한 것이다. 다시 말하면 어떤 복음서의 기본단위에서 지금의 복음서까지 왔느냐? 그 역사를 추적하는 것이 양식사들의 하는 일이다. 그런데 불트만의 이야기는 십자가를 인정하니까 역사적인 예수를 인정하는 것 같으나 그렇게 생각하지 않고 단지 예수에 관한 이야기들이 교회에서 만들어져서 돌아다닌 것이다.
http://www.reformednews.co.kr/sub_read.html?uid=612§ion=sc26§ion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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