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씀의 신성
“말씀”은 하나님과 더불어 거하는 영원하신 지혜를 의미하는 것으로, 모든 신탁들과 예언들이 거기서부터 비롯되는 것이다. 베드로가 증언하듯이, 옛날의 선지자들도, 사도의 경우(벧전1:10-11,벧후1:21)나 또한 그 이후 하늘의 도리를 섬긴 모든 사람들의 경우와 똑같이 그리스도의 영으로 말미암아 말했던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아직 나타나지 않으셨으므로, 우리는 그 말씀이 영원 전에 성부에게서 나신 것으로 이해해야 할 것이다. 또한 선지자들은 성령의 도구들이었는데, 그 성령께서 말씀의 영이셨다면, 우리는 그가 진실로 하나님이셨다는 것을 의심 없는 사실로 받아들이게 된다.
사도들은 세상이 성자로 말미암아 창조되었고 또한 그가 능력의 말씀으로 만물을 붙드신다고 말한다(히1:2-3). 여기서 우리는 말씀이 성자의 명령 또는 지령의 뜻으로 사용되는 것을 보게 되는데, 그 성자 자신이 성부의 영원하시고 본질적인 말씀이신 것이다.
솔로몬은 지혜가 영원 전에 성부에게서 나셨고, 또한 세상 창조와 및 기타 모든 하나님의 활동을 주관하셨다고 소개한다(잠8:22). “내 아버지께서 이제까지 일하시니 나도 알한다”(요5:17)라는 그리스도의 말씀도 이를 가리킨다. 그는 세상의 창조 때부터 자신이 성부와 더불어 끊임없이 일해 오셨음을 천명하심으로써, 모세가 창세기에서 간단하게 언급한 바를 더 확실하게 설명하시는 것이다.
무엇보다 가장 분명한 설명은 요한의 다음과 같은 진술에서 나타난다. “말씀이 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 이 말씀은 곧 하나님이시니라 그가 태초에 하나님과 함께 계셨고 만물이 그로 말미암아 지은 바 되었으니 지은 것이 하나도 그가 없이는 된 것이 없느니라”(요1:1-3). 요한은 곧바로 그 말씀에 견고하고도 영원한 본질을 부여하며, 또한 무언가 고유한 것이 그에게 있음을 드러내며, 또한 하나님께서 어떻게 말씀으로 세상을 창조하셨는지를 확실히 보여 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발설하신 모든 계시들을 가리켜 “하나님의 말씀”이라는 용어로 칭한 것이 마땅하듯이, 실체를 지니신 이 말씀이야말로 모든 영감의 근원으로 최고의 위치에 계신 것으로 보는 것이 합당할 것이다. 그 말씀은 불변하시며 영원토록 하나님과 동일하시고, 친히 하나님 자신인 것이다.
말씀의 영원성
여기서 몇몇 개 같은 자들이 짖어대고 있으니, 이들은 말씀의 신성은 노골적으로 부인하지 않으면서도 은밀하게 그의 영원성을 제거하려 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말하기를 말씀은 하나님이 세상을 창조하시면서 그의 거룩한 입을 여신 바로 그때에 비로소 처음 존재하기 시작하였다고 한다.
무언가가 어느 특정한 시기에 드러나기 시작한다고 해서, 그것이 그 이전에는 전혀 존재하지 않았다는 식으로 추리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어불성설이다. 나는 그것과는 완전히 달리 결론짓는다. 곧, 하나님께서 “빛이 있으라”(창1:3)고 말씀하셔서 그 말씀의 능력이 드러나기 이전에 이미 그 말씀이 존재하고 계셨다는 것이다. 그에게는 시작이 없다는 것을 알게 될 것이다. “아버지여 창세 전에 내가 아버지와 함께 가졌던 영화로써 지금도 아버지와 함께 나를 영화롭게 하옵소서”(요17:5)라는 말씀에서 나타나듯이, 그는 시간의 한계를 규정하지 않으시는 것이다. 요한은 세상 창조의 문제를 거론하기 전에, 먼저 “태초에 말씀이---하나님과 함께 계셨으니”(요1:1)라고 말씀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말씀은 하나님께로부터 영원히 나신 바 되셨고, 영원 전부터 그와 함께 거하신 것이다. 그 말씀의 영원성, 그의 참된 본질, 그리고 그의 신성이 이로써 입증되는 것이다.
구약성경에 나타난 성자의 신성
시편 45편에서 “하나님이여 주의 보좌는 영원하니이다”(6절)라고 말씀하는데도 불구하고, 유대인들은 이를 무시하고 “엘로힘”(하나님)이라는 이름을 천사들과 최고의 권세들에게까지 적용시키고 있다. 그러나 피조물을 위하여 영원한 보좌가 베풀어지는 것으로 묘사하는 구절을 성경 어디에도 없고, 성경은 그를 그냥 하나님이라고만 부르는 것이 아니라 영원하신 통치자로도 부르는 것이다.
이사야는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또한 하나님의 고유한 속성 가운데 하나인 최고의 권능을 지니신 분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의 이름은 기묘자라, 모사라,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영존하시는 아버지라, 평강의 왕이라 할 것임이라”(사9:6). 그런데 유대인들은 본문을 “전능하신 하나님이요 영존하시는 아버지께서 그를 불러 이르시되”라는 식으로 고쳐 읽고는, 오로지 “평강의 왕”이라는 칭호만 성자에게 해당된다는 식으로 반론을 제기한다. 그러나 조금 앞에서 그를 “임마누엘”이라 칭했을 때(사7:14)와 동일한 목적으로 지금 그를 가리켜 여기서 “전능하신 하나님”이라 칭하고 있다는 것이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인 것이다.
완벽한 증거가 예레미야서에 나타나 있다. “내가 다윗에게 한 의로운 가지를 일으킬 것이라 — 그의 이름은 ‘여호와 우리의 공의’라 일컬음을 받으리라”(렘23:5-6). 유대인들은 ‘여호와’라는 이름만은 너무도 고귀하여 입으로 발설할 수도 없는 것으로 그것이 하나님의 본질을 사실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라고 가르치고 있으니, 그리고 그 여호와께서도 “나는 내 영광을 다른 자에게 주지 아니하리라”(사42:8)고 선언하고 있으니, 독생하신 성자께서 영원한 하나님이시라는 것을 본문에서 알 수 있는 것이다.
여호와의 사자
여호와께서 천사의 모습으로 자주 나타나셨다. 거룩한 족장들에게 나타나서, 자신을 영원하신 하나님의 이름으로 불렀다는 말씀들이 나타난다(삿6:11,12,20,21,22,7:5,9). 그 천사는 음식을 먹기를 거부하고, 여호와께 드릴 번제를 자기에게 드리라고 명령한다(삿13:16). 이 사실부터가 그가 결국 여호와 자신임을 입증해 주는 것이다. “어찌하여 내 이름을 묻느냐? 내 이름은 기묘자라”(삿13:18).
하나님의 말씀이 최고의 천사이셨고 그가 그때에 이미- 말하자면 일종의 예비 단계로서- 중보자의 직분을 수행하기 시작하셨다는 교회의 정통 신학자들의 해석이 올바르고 지혜로운 것이다. 그 말씀이 아직 육체를 입지는 않으셨으나, 말하자면 중재자로서 강림하셔서 신자들에게 더욱 친밀하게 접근하셨고, 이처럼 더욱 친밀한 교류 때문에 그가 천사라는 이름으로 불려지셨다는 것이다. 그러나 한편, 그 자신의 고유한 속성, 즉 하나님으로서 지니신 말할 수 없는 영광은 그대로 유지하고 계셨다.
호세아도 동일한 사실을 전해 주고 있다. 그는 야곱이 천사와 함께 씨름한 사실을 서술한 다음, “여호와는 만군의 하나님이시라 여호와는 그를 기억하게 하는 이름이니라”(호12:5)고 말씀하는 것이다. 야곱은 “내가 하나님과 대면하여 보았다”(창32:29)고 하였다. 그리하여 바울도 그리스도께서 광야에서 백성들의 지도자이셨음을 말씀하는 것이다(고전10:4).
스가랴서 2장을 객관적으로 살펴보면, 다른 천사를 보내시는 천사(슥2:3)를 가리켜 곧바로 만군의 여호와라 선포하며, 그에게 최고의 권능을 부여하는 것을 보게 된다(9절). 이사야는 “이는 우리의 하나님이시라 우리가 그를 기다렸으니 그가 우리를 구원하시리로다 이는 여호이시라”(사25:9)라고 말씀하는데, 눈이 있는 사람이면 누구나 이것이 하나님을 지칭하며, 그가 그의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새로이 일어나실 것을 말씀하는 것임을 볼 수 있을 것이다. 여기서 이렇게 두 번씩 거듭 강조하여 나타나는 이 분은 어느 누구도 아니고 오직 그리스도이실 수밖에 없는 것이다.
말라기에는 이보다 더 분명하고 더 충실한 구절이 있다. “너희의 구하는 바 주가 갑자기 그의 성전에 임하시리라”(말3:1)는 말씀이 그것이다. 성전은 분명 오직 전능하신 하나님께만 봉헌된 것이다. 그런데 선지자는 여기서 그것이 그리스도를 위한 것임을 말씀하는 것이다.
신약성경에 나타난 성자의 신성
무수한 증거들이 즐비하다. 몇 가지를 선택하여 제시하고자 한다. 우선 특별히 주목할 것은 영원하신 하나님에 관하여 과거에 이미 에언되었던 사실이 이미 그리스도 안에서 나타났거나 아니면 언젠가 그 안에서 완성될 것이라고 한 사도들의 가르침이다.
바울은 만군의 여호와께서 “이스라엘의 두 집에는 걸림돌과 걸려 넘어지는 반석이 되실 것이라”(사8:14)는 이사야의 예언이 그리스도에게서 성취되었다고 선언하고 있다(롬9:32-33). 그러므로 결국 그는 그리스도께서 만군의 여호와이심을 천명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가 다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리라 기록되었으되, 주께서 이르시되 내가 살았노니 모든 무릎이 내게 꿇을 것이요 모든 혀가 하나님께 자백하리라 하였느니라”(롬14:10-11,사45:23의 인용)고 한다. 아사야서에서는 하나님께서 자기 자신에 대하여 이 말씀을 예언하셨고 그리스도께서 이를 자기 스스로 드러내 보이셨으니, 결국 그리스도께서 바로 하나님 자신이- 그는 자기의 영광을 절대로 다른 존재에게 넘기지 않으시는 분이다- 되는 것이다.
“그가 위로 올라가실 때에 사로잡혔던 자들을 사로잡으시고 그 사람들에게 선물을 주셨다”(엡4:8,시68:18). 이것은 오직 하나님께만 적용되는 것이다. 그런데 바울은 이런 승천이 하나님께서 열방들을 향하여 그의 권능을 발하셔서 큰 승리를 거두셨을 때에 미리 그림자로서 나타난 것으로 이해하고서, 그렇게 그림자로 나타나 승천이 그리스도 안에서 충만하게 이루어진 것으로 말하는 것이다. 마찬가지로, 요한도 이사야의 이상을 통해서 계시된 것이 성자의 영광이었음을 증언하고 있다(요12:41, 사6:1). 이사야 선지자는 자신이 하나님의 위엄을 보았노라고 기록하고 있는데 말이다.
히브리서에서 사도는 성자에게 무엇보다도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칭호들을 부여하고 있다. “주여, 태초에 주께서 땅의 기초를 두셨으며 하늘도 주의 손으로 지으신 바라”(히1:10, 시102:25인용). “하나님의 모든 천사들은 그에게 경배할지어다”(히1:6,시97:7의 인용). 그 시편의 본문들에서 칭송하는 내용이 오직 그리스도께서 성취하신 것이기 때문이다. 일어나사 시온을 긍휼히 여기시는 분이 바로 그리스도이신 것이다(시97:1).
바울은 “세세에 찬양을 받으실 하나님”(롬9:5)이라고 말씀하여 그리스도의 신성을 노골적으로 선포한 바 있다. 다른 구절에서는 하나님이 “육신으로 나타난 바 되시고”(딤전3:16)라고 기록하기도 하였다. 하나님이 영원토록 찬양을 받으실 분이시라면, 바울이 다른 곳에서 단언하듯이, 오직 그만이 모든 영광과 존귀를 받으셔야 마땅한 분이시다(딤전1:17).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셨다”(빌2:6-7)고 공개적으로 선언하고 있다. 요한은 불경스러운 자들이 그리스도를 가짜 신이라고 비방하지 못하도록 하기 위하여, 한 걸음 더 나아가 그를 가리켜 “참 하나님이시요 영생이시요”(요일5:20)라고 말씀한다. 도마도 그리스도를 가리켜 “나의 주님이시요 나의 하나님이시니이다”(요20:28)라고 공개적으로 선언하였고, 그리하여 그분이야말로 자신이 항상 경배를 드린 그 유일하신 하나님이심을 고백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성이 그의 사역에서 드러나고, 그리스도의 신성이 그의 이적에서 드러난다.
-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상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153-16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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