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빈

존 칼빈, 기독교 강요, 1권13장(1), 하나님은 한 본질이시며 그 안에 삼위가 계심

강대식 2014. 9. 12. 14:44

13장 성경은 태초부터 하나님이 한 본질이시며 그 안에 삼위가 계심을 가르침

 

하나님은 본질이 무한하시고 영적임

 

하나님의 무한하시고 영적인 본질에 관한 성경의 가르침은 일반 사람들의 헛된 망상들을 물리치는 데에는 물론 세속 철학의 교묘한 이론들을 반박하는 데에도 충분하다. 하나님의 무한하심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 자신의 잣대로 그를 재지 못하도록 우리에게 두려움을 주며, 또한 그가 영이시라는 사실은 그에 관한 어떤 세속적이며 육신적인 상상에 빠지지 못하도록 만드는 것이다.

 

그리고 똑같은 목적으로, 하나님은 하늘을 자신의 거처로 자주 말씀하신다. 물론 하나님은 사람으로는 도저히 파악할 수 없는 분이셔서, 동시에 땅 위에도 충만히 거하신다. 그러나 우리의 더딘 마음들이 땅 위에 가라앉아 있기 때문에, 하나님은 우리의 게으름과 무기력함을 흔들어 깨우시기 위하여, 우리를 세상 저 너머로 높이 올리시는 것이다.

 

마니교도들의 오류는 마귀를 하나님과 동등한 것으로 여김으로써 하나님의 유일성을 무너뜨리고 그의 무한하심을 제한하는 것이다. 신의 의인화를 주장하는 자들도 성경이 마치 하나님께 입과 귀와 눈과 손과 발이 있는 것처럼 자주 묘사한다는 사실을 근거로 형체를 지닌 하나님을 꿈꾸는 오류를 범하는데, 그것은 유모가 어린 아기들을 대할 때에 흔히 하는 것처럼, 우리의 연약한 역량에 맞추어서 하나님에 관한 지식을 전달하는 방식일 뿐이다. 우리에게 맞추시기 위해서, 그렇게 높이 계신 하나님께서 무한히 낮게 내려오셔서 말씀하신 것이다.

 

삼위로 계신 하나님

 

하나님은 자신을 또 다른 특별한 표지로써 지칭하셔서 자신을 우상들과 더 분명하게 구별하신다. 그는 자신을 유일하신 하나님으로 선언하시는 한편, 동시에 분명히 삼위(三位, three persons)로 바라보도록 그렇게 자신을 제시하시는 것이다. 삼중적 존재라거나 하나님의 단일 본질이 삼위로 분할되었다는 식으로 상상하면 안 된다.

 

위라는 용어는 인간이 만들어낸 것이 아니다. 사도는 하나님의 아들을 가리켜 그 본체(휘포스타시스)의 형상”(1:3)이라 부르고 있는데, 이는 성자와는 다른 어떤 특질이 성부에게 있음을 의미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실체는 하나요 나뉘어지지 않으며, 또한 하나님은 그 자신 속에 전체를어떤 분할이나 축소가 없이 완전한 상태로- 포괄하고 계시므로, 성자를 그른 의미에서 성부의 으로 본다는 것은 부당하며 어리석은 것이다. 그러나 성부께서는 그의 정당한 본성 속에서 구별되어 계시면서도 성자 안에서 자신을 온전히 표현하시기 때문에, 그가 자신의 본체(휘포스타시스)를 성자 안에서 나타내신다고 말해도 충분히 일리가 있는 것이다. 또한 바로 그 앞에 있는 말씀- , 아들이 하나님의 영광의 광채시라는 것(1:3)-도 이와 일치한다. 사도의 말씀에서 우리는 성자에게서 비쳐 나오는 그 본체(휘포스타시스)가 성부 안에 있다고 추론하게 된다. 또한 이 사실에서 성자의 본체가 그를 성부와 구별지어 준다는 것도 쉽게 확인하게 된다.

 

성령의 경우도 동일한 논리가 적용된다. 그는 하나님이시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가 성부와 다른 분이신 것으로 생각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본질을 구별하는 것이 아니다. 본질이란 여러 가지로 분할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사도의 증거를 신빙성 있는 것으로 받아들인다면, 하나님 안에 세 본체(휘포스타시스)가 계신 것이 되는 것이다. 라틴 교부들도 위(persona)라는 단어를 사용하여 동일한 개념을 표현하고 있다. 희랍의 교부들도 하나님 안에 세 프로소파가 있다고 가르침으로써 그들도 동일한 의견임을 입증하고 있다.

 

삼위일체등의 용어 사용의 정당성

 

삼위가 거명되며 또한 그 각 위가 완전하신 하나님이시며 그러면서도 오직 한 분 하나님밖에는 안 계시다는 우리의 확신은 결코 흔들리지 않는다. 그러나 성경이 선언하고 확증해 주는 것을 그저 설명해 주기밖에 달리 하는 것이 없는 이 단어들을 공격한다는 것이 얼마나 사악한 일인지 모르는 것이다.

 

그러나, 그 음절 하나하나가 성경에 기록되어 있지 않다고 해서 그 용어들을 가리켜 이질적이라 칭한다면, 분명 그것은 성경에 나타나 있는 단어들로 표현되어 있지 않는 모든 성경 해석들을 다 정죄하는 그런 부당한 법칙을 부과하는 것이다.

 

무언가 기준이 있어야 한다. , 생각과 말에 대한 확실한 규범을 성경에서 찾아서 그것에 준하여 생각하고 말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성경에 우리가 이해하기 곤란한 난해한 내용이 있을 경우에 그것들을 좀 더 명확한 언어로 설명하지- 성경의 진리를 높이고 그것을 신실하게 전달할 수 있는 언어를, 그것도 지극히 삼가는 자세로, 필요한 경우에 조심스럽게, 사용하지- 못할 이유가 어디 있겠는가? “삼위일체등의 용어들을 교회가 불가피하게 사용할 수밖에 없게 되어 있다는 것이 입증된 마당에,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위격의 구별성

 

라는 것은 하나님의 본질에 속하는 하나의 실재”((subsistence)를 의미하는 것으로서, 다른 위격들과 관계하는 동시에, 비공유적 특성에 의하여 구별되는 것이다. 우리는 실재라는 용어를 본질”(essence)과는 무언가 다른 것으로 이해한다. 만일 말씀이 그저 하나님이시고, 그러면서 그 외에 다른 특징적인 표지가 전혀 없었다면, 말씀이 항상 하나님과 함께 계셨다는 요한의 말(1:1)은 잘못된 것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요한은 곧바로 그 말씀이 하나님 자신이시라고 덧붙임으로써 우리에게 하나님이 하나의 단일한 본질이심을 상기시켜 주고 있다. 그러나 성부 안에 거하지 않으며 그가 하나님과 함께 계실 수가 없으므로 , 실재의 개념이 제기된다. 그런데 그 실재는 본질과 분리할 수 없도록 연결되어 있으면서도, 특별한 표지가 있어서 그것을 통해서 본질과 구별되는 것이다. 내 말의 뜻은, 세 실재들이 각기 다른 실재와 연관되어 있으면서도, 그 자체의 특성을 통해서 다른 실재와 구별된다는 것이다. 관계가 여기서 분명하게 표현되고 있다. 왜냐하면 그저 하나님이라고만 언급되고 그 외에 다른 구체적인 내용이 없을 때에는, 그 이름이 성부에게는 물론 성자나 성령에게도 적용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성부를 성자와 비교하게 될 때에는 각자의 특성이 서로 구별되는 것이다.

 

뿐만 아니라, 각 위에게 개별적으로만 해당되는 것은 상대방과 공유할 수 없다고 본다. 왜냐하면 성부를 구별하는 하나의 표지로서 그에게 속하는 것은 그것이 무엇이든 성자에게 적용될 수도 없고 또한 성자에게 전이될 수도 없기 때문이다. 또한 올바로 취하기만 한다면 다음과 같은 터툴리안의 정의에 대해서도 반론을 제기하지 않을 것이다. “하나님의 본질의 단일성에 영향을 미치지 않는 일종의 분배 혹은 경륜이 하나님 안에 있다.”

 

존 칼빈, 기독교 강요, 상권(크리스챤다이제스트), 144-15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