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교도주의는 전통이나 권위의 문제보다 성경의 진리를 앞세우는 것을 의미하며, 진리라고 믿는 방법으로 하나님을 섬길 자유를 주장한다. 청교도주의의 핵심과 특징은 종교개혁이 불완전하며, 단순히 교리를 바꾸고 거짓된 로마 카톨릭 교훈을 제거하는 것만으로는 충분치 못하며 실제의 차원에서 이행되고 구체화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서 로마 카톨릭의 잔재를 제거하고 국교회의 중립적인 태도를 거절한 것이다. 청교도주의는 초대교회의 단순하고 순전한 교회, 개혁된 교회에 관심이 있었다. 은혜의 교리를 강조하고 목회신학에 강조점을 두었다. 청교도주의는 철저한 개혁에 대한 관심으로부터 출발하여 교회의 교리 전체로 나아갔다.
내픈(Knappen)은 ‘튜더 왕조 시대의 청교도주의’에서 “청교도주의는 1524년 ‘윌리암 틴데일’에게서 최초로 모습을 드러냈다”고 한다. 내픈은 청교도주의를 일종의 사고의 형태, 즉 태도와 정신에서 찾는다. 청교도의 조부가 되는 틴데일은 일반인들도 성경을 읽어야 한다는 불타는 열정을 가졌다. 그는 복음을 이해했고 율법과 복음의 차이를 강도 있게 해설하면서 율법은 모든 사람들을 구속하고 정죄를 하나 복음은 해방시킨다고 했다. 성경을 읽으면서 무엇보다도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 만들어진 언약들을 찾도록 강조했다. 그래서 그는 감독들의 승인이나 재가를 받지 않고 성경을 번역하였다. 그는 왕의 허락 없이 영국을 떠나 독일로 가서 루터의 도움을 얻어 성경 번역의 위대한 일을 마무리했다. 그는 신앙과 삶을 일치시켰다. 그의 이런 자세 정신 사조를 청교도의 전형적 행동으로 본다.
윌리암 틴데일(William Tyndale, 1484-1536)은 청교도주의의 지성적 영적 선조이며 유능한 신학자였다. 그는 루터와 동시대인으로서 청교도라는 말이 만들어지기 한 세대 전에 청교도주의의 불씨를 심어 주었다. 그는 1515년 옥스퍼드대학에서 고전 연구를 하여 문학석사 학위를 받고 후에 케임브리지대학에서 희랍어 신약성경을 수학하였다.
그는 개신교의 중심 이슈인 오직 믿음과 은혜에 의한 칭의 문제에 공이 크며 언약 개념을 광범위하게 활용해야 하는 그리스도인의 책임을 강조했다. 그는 언약이란 하나님의 은혜를 인간의 책임에 연결시키는 친밀하고 궁극적인 결속 접착제의 의미로 사용했다. 그는 하나님께서 당신의 백성과 맺으신 언약은 영원하며 그래서 모든 사람들이 반드시 율법 준수를 훈련받아야 한다고 믿었다. 하나님의 약속을 도덕법으로 규정하고 언약의 조건적 성격과 윤리적 의미를 강조하였다.
틴데일은 1526년 3월부터 신약 성경과 모세오경 및 요나서를 번역하여 영국으로 보냈다. 그래서 메리의 재위기간 중 이단의 혐의로 쫓기는 몸이 되었다. 그 정직한 신학자의 여정의 마지막 부분은 매우 비극적이었다. 그가 영국 왕의 하수인에 의하여 밀고 되어 체포당하여 브루셀 근처 빌보드 성에 투옥을 당했는데 이곳에서 16개월간 죄수가 되어 고난을 겪으면서도 구약성경 번역을 계속했다. 거기서 그는 이단으로 사형을 선고 받고 1536년 10월 6일 교수형을 당했다. 그의 시체는 재가 될 때까지 불태워졌다. 틴데일은 마지막으로 “주여, 영국 왕의 눈을 뜨게 하여 주소서”라는 말을 남겼다. 틴데일은 우리가 다시 상기해야 할 청교도 가족의 선구자였다.
- 박영호, 「청교도 실천신학」, pp 69-7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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