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시 17:8-15
1. 하나님은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아래 감추신다
“나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주의 날개 그늘 아래에 감추사”(시17:8)
극심한 고난 가운데 하나님께 드린 다윗의 기도이다.
우리도 고난 가운데 있을 때 이러한 기도를 하나님께 드려야 한다.
그리고 하나님은 우리를 눈동자 같이, 주의 날개 그늘 아래 보호하심을 믿어야 한다.
“눈동자 같이”.
우리는 눈동자를 지킬려고 얼마나 신경을 많이 쓰는가?
위험이 닥치면 눈을 감고 손으로 움키고 눈물로 씻어내고 최선의 방어를 한다.
주님은 내 계명을 지켜 살며 내 법을 네 눈동자처럼 지키라고 하신다(잠7:2).
주님은 자기 백성들을 범하는 자들은 그의 눈동자를 범하는 것이라고 말씀하셨다(슥2:8).
눈은 몸의 등불로서 눈이 어두우면 다 어둡게 된다고 하셨다.
“눈은 몸의 등불이니 그러므로 내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마6:2)
“네 몸의 등불은 눈이라 네 눈이 성하면 온 몸이 밝을 것이요
만일 나쁘면 네 몸도 어두우리라”(눅11:34)
주님은 바리새인들이 ‘우리도 맹인인가?’ 하였을 때,
‘너희가 맹인이 되었다면 죄가 없으려니와 본다고 하니 너희 죄가 그대로 있다’고 하셨다.
내 눈이 무엇을 보느냐, 무엇을 멀리 바라보느냐에, 현세의 삶은 물론 내세의 삶이 갈린다.
안목의 정욕에 사로잡히면, 눈에 보이는 것들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게 된다.
믿음의 선진들은 눈에 천국을 넣고 그 눈으로 세상을 보았다.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하다.
눈에 보이는 것에 따라 끌려가다 보면 종착역은 죽음이고 멸망이다.
보이는 것의 그 너머를 바라보아야 한다.
보이는 것의 정체를 알고, 그 종말을 알아야 한다.
우리가 죽는 순간, 그렇게 보기를 좋아하던 것들의 영광은, 안개처럼 사라지고 만다.
세상이 끝나는 날, 그렇게 사람들이 보고 누리기를 좋아하던 것들은 한 줌의 재가 되고 만다.
세상의 제국, 바벨론은 무너질 날이 온다. 나의 바벨론도.
“천사가 하늘에서 내려 오는 것을 보니 큰 권세를 가졌는데 그의 영광으로 땅이 환하여지더라
힘찬 음성으로 외쳐 이르되 무너졌도다 무너졌도다 큰 성 바벨론이여
귀신의 처소와 각종 더러운 영이 모이는 곳과 각종 더럽고 가증한 새들이 모이는 곳이 되었도다
그 음행의 진노의 포도주로 말미암아 만국이 무너졌으며 또 땅의 왕들이
그와 더불어 음행하였으며 땅의 상인들도 그 사치의 세력으로 치부하였도다 하더라
또 내가 들으니 하늘로부터 다른 음성이 나서 이르되, 내 백성아, 거기서 나와 그의 죄에
참여하지 말고 그가 받을 재앙들을 받지 말라 그의 죄는 하늘에 사무쳤으며 --
그가 준 그대로 그에게 주고 그의 행위대로 갑절을 갚아 — 주라.
그가 얼마나 자기를 영화롭게 하였으며 사치하였든지 그만큼 고통과 애통함으로 갚아 주라 --
하루 동안에 그 재앙들이 이르리니 곧 사망과 애통함과 흉년이라
그가 또한 불에 살라지리니 그를 심판하시는 주 하나님은 강하신 자이심이니라”(계18:1-8)
우리의 눈은 영원한 것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세상 사람들처럼 눈에 보이는 것들에 온통 마음을 빼앗기고 살면,
바벨론이 무너지는 것처럼 하루 아침에, 한 시간에, 무너지고,
사치와 영광을 누린 만큼 그 만큼 고통과 애통으로 갚아지고 불에 살라질 날이 온다.
우리 눈으로 볼 것은 이 땅에서 보이는 잠시의 영광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하나님의 말씀이 약속하고 또 약속하는, 하늘의 영광이다.
그 영원한 영광에 비하면 이 땅의 영광은 참으로 안개와 같이 사라질 것들이다.
하나님은 하늘의 영광을 위하여 이 땅에서 우리를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그분의 날개 그늘 아래 우리를 보호하시는 것이다.
그 지키심과 보호하심이 다윗처럼 우리의 소망이고 기도가 되어야 한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그 날개 그늘 아래 품는 주님의 마음과 뜻을 알지 못하였다.
“예루살렘아, 예루살렘아, 선지자들을 죽이고 네게 파송된 자들을 돌로 치는 자여,
암닭이 그 새끼를 날개 아래에 모음 같이, 내가 네 자녀를 모으려 한 일이 몇 번이더냐?
그러나 너희가 원하지 아니하였도다”(마23:37)
주님이 날개 아래 모으는 것은 참교회의 날개 아래 모으는 것이다.
이 날개 아래 모이기를 싫어하는 자들, 장로 대제사장 서기관들이 주를 십자가에 못 박았다.
그들은 세상의 부와 영광의 날개 아래 모여 그것들이 영원할 줄 알았다.
성도들은 묻곤 한다.
눈동자 같이 지키시고 날개 아래 모으신다는데,
왜? 악인들은 번영하고, 우리는 고난의 연속이냐?
2. 악인들은 현세의 분깃과 소유로 만족하고 의인들을 괴롭힌다
“내 앞에서 나를 압제하는 악인들과 나의 목숨을 노리는 원수들에게서 벗어나게 하소서
그들의 마음은 기름에 잠겼으며 그들의 입은 교만하게 말하나이다”(시17:9-10)
하나님을 경외하고 그 말씀대로 순종하여 살려고 하는데,
축복이 아니라 악인들과 원수들이 압제하고 목숨을 노리는 일이 일어난다.
악인들은 권세와 풍요로운 기름에 잠겨 교만한 말을 한다.
다윗의 목숨을 노리며 쫓아다니던 사울의 무리들을 생각하면 된다.
요셉을 노예로 팔아먹던 열 형들을 생각하면 된다.
모세를 죽이려고 하던 바로와 무리들을 생각하면 된다.
욥에게 하루 아침에 밀어닥친 열 자녀의 죽음과 몰락이 그러하다.
가까이는 한가족교회의 이곳에서의 13년 6개월의 모습을 보면 그러하다.
우리 주님도 베들레헴 마굿간에 나시고 나사렛에서 30년 목수생활하시고
공생애 3년 반만에 십자가에서 강도들처럼 죽임을 당하셨다.
“환난이나 곤고나 박해나 기근이나 적신이나 위험이나 칼이랴 --
우리가 종일 주를 위하여 죽임을 당하게 되며 도살 당할 양 같이 여김을 받았나이다”(롬8:35,36)
사도 바울도, 사방으로 욱여쌈을 당하고 답답한 일을 당하고
박해를 받고 거꾸러뜨림을 당하였다고 하였다.
그런데 악을 행하고 교만한 자들은 왜 그렇게 형통하느냐?
그들이 왜 의인들을 괴롭히느냐?
그들을 도구로 하여 하나님은 의인들을 훈련하고 연단하시는 것이다.
우리는 그의 만드신 바라. 고난의 연단을 통하여 만드시고 또 만드시는 것이다.
이 땅에서의 삶이 다가 아니고 영원한 세상에서의 삶이 기다리고 있기 때문이다.
‘영원한 세상보다 나는 이 세상에서의 행복과 번영을 원해요’ 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이를 악용하여 형통의 신학으로 그것을 보장하는 거짓 목사들과 교회들 또한 많이 있다.
여러분, 세상에서 사느라고 온통 세상에 눈과 마음을 빼앗겼지만,
이 예배를 통하여 말씀을 통하여 영원 세상을 바라보시기 바란다.
주님이 하늘에서 오셔서 우리 죄를 처리하시고 다시 올라가신 것은
그곳에서의 우리의 영원한 삶을 위한 우리의 처소를 예비하기 위함이다.
이 땅에서 우리에게 주시는 고난도 축복도 결국은 영원한 삶을 위한 것이다.
아브라함과 욥과 요셉과 모세와 다윗의 결국은 축복과 영광으로 열매를 맺는다.
이 땅에서의 천국과 영원한 천국을 예표로 우리에게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악인들은 심판이 없는 줄 알고 큰 소리치지만,
역사는 줄곧 하나님이 통치하시고 심판하고 계심을 보여 주고 있다.
이 땅에서 겪는 재앙과 사고들은 우연한 것이 아니고 하나님의 손 안에서 이루어지는 것이다.
그러나 악인들의 구원도 기다리시기에 심판을 다하지 아니하시고 마지막 심판에 남겨 두신다.
마지막 심판 날에는 자비와 용서가 없는 심판인 것을 알아야 한다.
“사랑하는 자들아 주께는 하루가 천 년 같고 천 년이 하루 같다는 이 한 가지를 잊지 말라
주의 약속은 어떤 이들이 더디다고 생각하는 것 같이 더딘 것이 아니라 오직 주께서는
너희를 대하여 오래 참으사 아무도 멸망하지 아니하고 다 회개하기에 이르기를 원하시느니라
그러나 주의 날이 도둑 같이 오리니 그 날에는 하늘이 큰 소리로 떠나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풀어지고 땅과 그 중에 있는 모든 일이 드러나리로다
이 모든 것이 이렇게 풀어지리니 너희가 어떠한 사람이 되어야 마땅하냐
거룩한 행실과 경건함으로 하나님의 날이 임하기를 바라보고 간절히 사모하라
그 날에 하늘이 불에 타서 풀어지고 물질이 뜨거운 불에 녹아지려니와
우리는 그의 약속대로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을 바라보도다
그러므로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이것을 바라보나니
주 앞에서 점도 없고 흠도 없이 평강 가운데서 나타나기를 힘쓰라
또 우리 주의 오래 참으심이 구원이 될 줄로 여기라”(벧후3:8-15)
의인들도 고난만은 아니고 고난 중에 형통을 맛보게 하시고 하나님의 손길을 느끼게 하신다.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먼저 구할 때 모든 것을 더하게 하시는 복을 누린다.
그러나 이 땅에서의 어떤 복락도 영원 세상에서의 복락과 비교할 수 없다.
다윗은 기도한다.
“여호와여 일어나 그를 대항하여 넘어뜨리시고 주의 칼로 악인에게서 나의 영혼을 구원하소서
여호와여 살아 있는 동안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나를 구하소서
그들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로 만족하고
그들의 남은 산업을 그들의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니이다.”(시17:13-14)
악인들은 은밀한 곳에 엎드린 젊은 사자 같이 의인들을 움켜 찢고 땅에 넘어 뜨리려 한다.
그들은 하나님이 우리를 성화시키고 거룩하게 하시는 하나님의 도구들이고 방법들이다.
그래서 우리의 싸움은 혈과 육에 대한 싸움이 아니라고 하시는 것이다.
하나님은 이스라엘을 망하게 하고 징계하시는 도구로 앗수르와 바벨론 제국을 사용하셨다.
그렇지만 그들은 쓰임을 다한 후엔 악을 행한 대로 심판을 받게 하셨다.
우리의 원수가 집안식구들인 것도 서로 성화를 위한 도구 역할을 하는 것이다.
결혼도, 가정도, 직장생활도, 사업도, 하나님의 섭리 속에서 우리의 거룩함을 위한 장치들이다.
그 욱여쌈과 충돌과 답답한 일과 거꾸러뜨림들을 통해,
우리는 우리의 성화를 이루어야지, 내 의와 내 욕구만을 이룰려고 해서는 더욱 낭패가 된다.
다윗은 악인들의 하는 짓을 부러워하고 나도 그렇게 해달라고 하지 않는다.
그들의 분깃을 받은 사람들에게서 주의 손으로 구해달라고 기도한다.
그들이 받은 분깃이 무엇인가?
주의 재물로 배를 채우고 자녀들로 만족하고 남은 산업을 어린 아이들에게 물려 주는 것이다.
그들에게 다음 세상은 없다.
심판이 기다리고 있는 줄은 모르고 내세의 고통과 애통이 기다리고 있는 줄을 모른다.
산업을 물려받은 자녀들은 그것으로 인해 비참하게 망하는 것을 본다.
우리가 자랑할 것은 성취와 성공이 아니고, 세상의 영광이 아니고,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성결이요 성화요 거룩함이다.
그것만이 이 땅에서의 천국의 평안은 물론, 영원 세상에서의 영광을 보장해 준다.
우리 주님이 우리를 십자가를 통하여 구원하신 것은
이 땅에서의 기름진 복락을 위해서가 아니고, 흠이 없고 거룩한 영혼을 만들기 위함이다.
“찬송하리로다 하나님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우리에게 주시되 곧 창세 전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택하사
우리로 사랑 안에서 그 앞에 거룩하고 흠이 없게 하시려고 그 기쁘신 뜻대로 우리를 예정하사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자기의 아들이 되게 하셨으니 이는 그가 사랑하는 자 안에서
우리에게 거저 주시는 바 그의 은혜의 영광을 찬송하게 하려는 것이라”(엡1:3-6)
하늘에 속한 모든 신령한 복을 주셨다.
이 땅에 속한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을 위한 복을 주신 것이 아니다.
미혹의 영과 귀신의 가르침들이 교회 안에 들어와 이 땅에서의 축복들만 노래하고 있다.
하늘을 보지 못하게 하고 영원 세상에서의 영광과 신령한 복들을 보지 못하게 한다.
말씀과 성령으로 잘 분별하고, 넓은 멸망의 길로 인도하는 철학과 헛된 속임수를 물리쳐야 한다.
3 의인들은 인내하고 주의 형상과 복락으로 만족한다
“나는 의로운 중에 주의 얼굴을 뵈오리니 깰 때에 주의 형상으로 만족하리이다”(시17:15)
마음이 청결한 자가 복이 있나니 하나님의 얼굴을 본다고 하셨다.
심령이 가난한 자와 의를 위하여 박해를 받은 자가 복이 있나니 천국이 저의 것이라고 하셨다.
주의 성산에 오르는 자는 마음이 청결하고 손이 깨끗한 자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의로 옷 입고 의로운 삶을 사는 가운데
믿음으로 하나님의 얼굴을 바라보아야 한다.
우리 앞에 항상 하나님을 모시고, 날마다 기뻐하고 감사하는 삶을 살아야 한다.
매일 아침 잠에서 깰 때에 주의 형상과 그 영광을 바라보며 만족해야 한다.
일용할 양식을 주시고 눈동자 같이 지켜 주시고 날개 아래 품어주시는 은혜에 만족해야 한다.
주님이 주시는 은혜와 평강으로 하루를 시작하고 살고 영생과 천국을 묵상해야 한다.
이 땅에서 부자가 되고 출세하고 성공하는 일에 눈과 마음을 빼앗기지 않기를 바란다.
그러한 것들에 대한 탐심에서, 눈동자 같이 지켜 주시고 날개 아래 품어 달라고 기도해야 한다.
내 마음이 탐욕에 향하지 말고, 주의 증거들에 향하게 해달라고 기도해야 한다(시119:36).
여호와의 증거들을 지키고, 주의 약속들을 소망으로 붙들고,
전심으로 여호와를 구하는 자가 복이 있다.
그들은 불의를 행하지 아니하고 주의 도를 행한다.(시119:2-3)
악인들의 꾀를 따르지 아니하고, 죄인들의 길에 서지 아니하며,
오만한 자들의 자리에 앉지 아니하는 자들에게 하나님은 복을 주신다.
오직 성경을 즐거워하고 그의 말씀을 주야로 묵상하여 지키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선을 행하다가 낙심하지 아니하고 포기하지 않는 자에게 때가 되면 하나님은 복을 주신다.
악인들의 형통을 부러워하지 않고 그 때문에 원망하고 불평하지 않는 자에게 복을 주신다.
결국 땅을 차지하는 자도, 영원한 천국을 차지하는 자도 거룩함을 이룬 자이다.
광야의 훈련과 고난은 긴 것 같아도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에 비하면 잠시일 뿐이다.
사방의 욱여쌈과 답답한 일과 박해와 거꾸러뜨림은 무거운 고난 같지만,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에 비하면 그것은 잠시 받는 가벼운 고난일 뿐이다.
우리의 믿음이 진정한 것인지는,
고난 앞에서, 죽음 앞에서, 우리가 어떤 반응을 하느냐 에서 여실히 드러난다.
어떤 지독한 끈질긴 고난 앞에서도, 우리는 이렇게 고백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이루게 될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에 비하면,
우리는 받는 고난은 잠시 받는 가벼운 것이라고 말이다.
우리의 모든 고난과 연단은 이 고백을 할 수 있게 하기 위한 것이다.
'설교' 카테고리의 다른 글
4/26 설교, 영광의 광채 (0) | 2015.04.26 |
---|---|
4/19 설교, 승리자의 면류관 (0) | 2015.04.19 |
4/5부활절, 성경대로 살아나사 (0) | 2015.04.05 |
3/29 설교, 성경대로 죽으시고 (0) | 2015.03.29 |
3/22 주일설교, 생수의 강 (0) | 2015.03.2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