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라일, 「곧은 길」-실천적 기독교, CLC, 2013, (758면, 25000원)
제 1 장 자기 성찰
“우리가 주의 말씀을 전한 각 성으로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행 15:36)
“다시 가서 형제들이 어떠한가 방문하자” - 사도 바울이 바나바와 함께 첫 번째 선교여행을 마친 후에 했던 제안이다. 일찍이 신앙에 대한 자기성찰이 필요했던 것이 사실이라면 그것은 분명 오늘날에도 필요하다. 우리는 영혼이 구원되는 기회가 이렇게 주어진 특별한 영적 특권의 시대에 살고 있다. 그런데 우리들의 상태는 어떠한가? 더 나아졌는가?
우리는 특별한 영적인 위기의 시대에 살고 있다. 세상이 시작된 이래로 오늘날과 같이 그렇게 단순한 외적인 신앙고백이 엄청나게 많이 행해진 적은 아마도 없었을 것이다. 그들은 참다운 신앙에 대해 아는 바가 없으며, 매일의 생활에서 그리스도를 드러내지도 않는다. 씨뿌리는 비유는 언제나 생생하고 고통스러운 예화이다. 길가에 뿌려진 씨앗, 돌밭에 뿌려진 씨앗, 가시덤불 속에 뿌려진 씨앗들인 청중들은 항상 주변에서 찾아볼 수 있다. 두려운 것은 많은 신앙고백자들의 생활이, 영적으로 단지 한 모금의 맛만 보았을 뿐인 상태에 멈추어서 육체적인 자극을 병적으로 갈망한다는 것이다. 그 추구하는 바를 얻기만 한다면 정작 그것이 무엇인지 그 정체에 대해서는 거의 주의를 기울이지 않는다. 단지 똑똑하고 빈틈없는 처세술에 대해 들을 때만 기뻐하며 귀를 쫑긋 세운다. 걱정인 것은 그렇게 자극을 추구하는 태도에 감염된 사람들이 아직 믿음이 확고하게 서지 못한 수많은 나이 어린 젊은이들이라는 점이다. 그들은 의식하지 못하는 사이에 일종의 흥분적이며, 선동적이고, 감정적으로 기독교를 따르는 것이다. 그들은 ‘전통적 신앙’에 결코 만족해하지 못하며 아테네 사람들처럼 언제나 새로운 것을 추구할 것이다.
1. 먼저 자신들의 영혼에 대해 생각해 본 일이 있는지 묻고 싶다.
그들이 하는 생각에서 종교에 관한 문제가 차지하는 자리는 거의 없다. 그들은 마치 전혀 죽음을 향하여 가고 있지 않은 자처럼, 하나님의 심판대 앞에 서지 않을 사람들처럼, 살고 있는 것이다. 공공연하게 신앙을 거역하지는 않는다. 왜냐하면 그렇게 할 수 있을 정도로 그것에 대해 숙고해 보는 일 자체가 없기 때문이다. 그들은 흡사 종교란 단지 가공의 이야기에 지나지 않으며 실제가 아닌 양, 먹고 마시고 돈을 벌고 쓰고 있다. 그러한 생은 인간을 짐승과 같은 차원으로 끌어내리는 것이다. 옛날 유대인과 같이 그들은 “알지 못하고 깨닫지 못하며”(사1:3), “자기의 소위를 살펴보지”(학1:7) 않고 있다.
2. 우리가 자신의 영혼에 대해 무엇인가 행한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땅에는 종종 종교나 신앙에 대하여 생각하면서도 불행하게도 아무런 결실을 얻지 못하는 많은 사람이 있다. 설교를 들은 후에, 혹은 남의 불행을 보았을 때, 혹은 충격적인 글을 읽었을 때에 모호한 방식으로나마 신앙에 대해 이야기도 할 것이다. 그렇지만 마치 생각하고 이야기하는 것만으로 자신들이 능히 구원받기나 하는 양 이내 중단해 버리고 만다. 그들은 이 세상과 죄를 좇는 일을 실제적으로 단호히 중지하고 빠져나오지 않으며, 진정으로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좇지도 않는다. 흡사 주께서 비유로 말씀하신 저 아들과 같은 생을 살고 있다.(마21:28) 우리는 자신의 영혼에 대해 어떻게 행하고 있는가?
3. 우리가 혹 단지 형식적인 신앙으로 자신의 양심을 만족시키려하고 있지 않은지 묻고 싶다.
이 땅에 무수히 많은 사람들이 옛날 바리새인들과 같이 기독교의 외적인 부분들에 많은 정성을 쏟고 있다. 그들은 모든 예배에 빠짐없이 참석하고, 속한 교파와 속한 교회에 대해서도 강한 자부심을 가지고 있다. 이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그들의 신앙에는 진심이 없다. 그들은 외적인 형식에 과다하게 치우침으로써 기독교 정신의 내적인 결핍을 메우려고 하고 있다. 그들은 내적인 기쁨, 평안 같은 것은 알지도 못한 체, 무엇인가 잘못되었음을 내밀히 감지하고는 있지만 무엇이 잘못되었는지는 알지 못한다.
만일 여러분의 생을 사랑한다면, 종교의 빈 껍질 내지 찌기라든가 비계 덩어리에 해당하는 부분으로 만족해서는 안 된다. 은혜의 수단들과 종교의 형식들이 유익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항로를 가르쳐 주는 데 도움이 되게끔 항구에 세워놓은 바로 그 등대에 부딪쳐 난파되지 않도록 조심해야만 한다.
4. 우리가 죄 사함을 받은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우리가 필요로 하는 죄 사함을 온전히, 값없이, 완벽하게 영원히 우리에게 허락해주는 것, 그것이 바로 기독교 신앙의 영광이다. 그렇지만 이 크고도 온전한 그리고 영광스러운 속죄는 단지 교인이라는 이유만으로 얻게 되는 특권이 아니다. 각자가 자신의 개인적인 믿음으로 자신의 소유로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아들을 믿는 자는 영생이 있고 아들을 순종치 아니하는 자는 영생을 보지 못하고 도리어 하나님의 진노가 그 위에 머물러 있느니라”(요3:36)
믿음 없이는 죄 사함이란 없다. 참으로 두려운 일은, 이 땅의 많은 사람들이 영원히 잃어버려진 바 될 위험의 문턱에 서 있는 점이다. 실제로 믿음으로써 그리스도를 붙들고, 그리스도와 하나가 되며, 자기 안에 그리스도를 모시는 그러한 상태까지는 결코 이르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그분이 구주라고 말할 수는 있으나, ‘나의 구주’라고 말하지는 못한다. ‘나의 구속자’, ‘나의 제사장’, ‘나의 대언자’이시라고 고백할 수는 없다.
“많은 사람들이 소유대명사를 사용하지 못함으로 말미암아 잃어버려진 바 되었다”(루터)
“두 가지는 절대 잊어서는 안 된다. 하나는 우리가 살아 있는 동안 죄를 사함 받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죄 사함 받았다는 그 사실을 알고 느끼는 것이란다.”(어느 노신사가 어린 소녀에게)
5. 우리가 하나님께로 회심하는 체험을 통해 무엇인가를 깨달은 적이 있는지 묻고 싶다.
회심 없이는 구원은 없다.(마18:3, 요3:3, 롬8:9, 고후5:17) 철저한 변화 없이는 하나님을 섬길 수 없으며, 죽은 후에도 그분을 기쁘시게 할 수 없을 것이다. 이 변화는 성령의 특별한 사역을 통하여 우리에게 주어진다. 우리가 그것을 소유하게 된다면 변화가 눈에 나타나게 될 것이다. 죄의식과 죄를 혐오하는 마음,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과 사랑, 성결을 기뻐하고 그것을 더욱 더 갈망하는 마음, 그리고 하나님의 백성들을 사랑하고 이 세상 것들을 싫어하는 마음, 이러한 것들이 바로 회심에 의례히 수반되는 징표들이자 증거들이다.
그런데 많은 사람들은 그 사실에 대해 전혀 알지 못하고 있다. 그들은 죽은 자들이며 잠자고 있는 자들이고 눈먼 자들이고, 그리고 하나님 나라에 부적합한 자들이다. 아마도 그들은 틀림없이 “성령을 믿사오며”라고 사도신경을 되풀이하여 외우고 있을 것이다. 속 사람에게 역사하시는 성령의 다양한 작용들에 대해서는 알지 못한 채, 자신들이 거듭났다고 스스로 위안하며 살고 있을 것이다. 이와 같이 종교적으로 흥분되고 선동된 시대에는 많은 거짓된 회심이 있기 마련이다. 악화의 통용이 곧 양화가 없다는 증거는 아닌 것이다. 외식하는 자들과 거짓 그리스도인들은 바로 사람들 가운데 참된 은혜가 있다는 간접적인 증거라고 할 수 있다.
6. 우리가 실천적인 그리스도인의 거룩함에 대해 알고 있는지 묻고 싶다.
성경은 “모든 사람으로 더불어 화평함과 거룩함을 좇으라 이것이 없이는 아무도 주를 보지 못하리라”(히12:14)라고 분명히 말하고 있다. 그것은 구원에 이르는 믿음의 변함없는 결과이다. 그것이야말로 참으로 중생했는지 시험해 볼 수 있는 진정한 척도가 되며, 내재하는 은혜에 대한 유일하고도 정통적인 증거이며, 그리스도와 살아있는 연합의 확실한 결과라고 할 수 있다. 거룩은 끊임없는 투쟁과 분투 없이 얻을 수 없으며 지속될 수 없다. 그것은 말하기보다는 행하는 것이며, 사람들의 귀에 들리기보다는 사람들의 눈에 보이는 것이다. 진정한 성경적 거룩함은 가정에서 임무를 행하게끔 하고, 일상생활의 사소한 문제들에서 교리를 수행하게 만들 것이다. 그것은 분명히 오늘날 같은 시대에 찾아보기 힘든 실천적인 기독교 정신에서 나오는 것이다.
7. 우리가 은혜의 수단들을 활용하는 것에 대해서 알고 있는지 묻고 싶다.
성경 읽기, 개인적인 기도, 예배, 성찬예식, 주일성수 이것이 하나님께서 은혜로 정하신 수단들이며 성령을 통하여 사람들의 마음에 은혜를 전해주기 위한 것이다. 세상이 계속되는 한 인간의 영혼의 상태는 언제나 그 사람이 은혜의 수단들을 사용하는 그 태도와 정신에 달려 있는 것이다. 거룩한 이들 수단들에 대한 형식적이고도 기계적인 참예는 전혀 무가치하고 무익함이 분명하다. 단순한 의무감에서 말씀을 읽는 사람이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마음이 있겠으며, 영혼의 수고와 고심이라고는 해본 적이 없는 사람이 어떻게 그리스도와 만날 준비가 되어 있다고 생각이나 할 수 있겠는가? 주일날을 피곤해하고, 설교자의 말이 참된 것인지에 대해 관심도 없고, 혹은 설교를 거의 듣지도 않는 사람이 어떻게 천국에서 영원한 행복을 느낄 수 있겠는가?
만일 은혜의 수단들이 어떤 다른 유익을 주지 않는다면, 그리고 천국을 향하여 나아가는 데 있어서 어떤 유익을 주지 않는다면 그것들은 하나님 앞에서의 우리의 상태가 어떠한지 진단해 볼 수 있는 하나의 척도를 제공해 줌에 있어서 무익한 것이다. 우리는 어떻게 행하고 있는가?
8. 우리가 이 세상에서 선을 행하고자 노력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천국에 가고자하는 그리스도인이 다른 사람들에게 아무런 관심이 없다면, 그는 그리스도의 영을 지니지 못했던 원시시대의 괴물과 다를 바가 없다. 아무런 열매를 맺지 못하는 무화과나무들은 주님의 시대에도 “땅만 버리는”(눅13:7) 것으로 간주되어 찍어버려졌던 것이다. 이것은 참으로 진지한 성찰, 그리고 진지한 답변이 요구되는 문제이다. 오늘날에는 자칭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면서도 오로지 자신과 자신의 가족들에 대한 관심뿐이며, 먹고 마시고 돈을 벌고 쓰며 한 해를 보낸다. 이러한 태도가 선한 사마리아인의 비유를 말씀하시며 우리에게 “가서 너도 이와 같이 하라”(눅10:37)라고 명하셨던 말씀과 유화될 수 있는가?
서글프게도 부요하건 가난하건,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고백하는 많은 사람들이 혐오할 만한 이기심의 악마에 사로잡힌 듯하며, 선을 행하는 즐거움을 알지 못하는 것 같다. 예배형식, 교회연합과 같은 흡사 마른 뼈나 다름없는 그런 문제들에 대해 논할 수는 있다. 그러나 많은 교구민들에게서 참된 사랑은 거의 죽어버린 듯하다. 교회에서도 당파를 짓는 것과 논쟁하는 것만이 기독교 정신이 낳을 수 있는 유일한 결실로 여겨질 정도이다. 우리는 자신의 친구들이나 친척들 이외의 사람에게, 그리고 자신이 속해 있는 그룹 이외의 사람에게 선을 행하려 노력해 본적이 있는가? 우리는 항상 “착한 일을 행하셨던”(행10:38) 그분, 그리고 제자들에게 자기를 저희의 ‘본’(요13:15)으로 삼으라고 명하셨던 그분의 제자들같이 살고 있는가?
9. 우리가 그리스도와 언제나 교제를 나누고 있는 생활을 하고 있는지 묻고 싶다.
‘교제’는 “그리스도 안에 거하는”(요15:4-8) 습관을 의미한다. 그리스도인이 과실을 많이 맺기 위해 필요한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과 교제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이 없이는 교제 또한 있을 수 없다. 그러나 그리스도와의 연합은 있으되 그 후에 그와의 교제가 거의 없을 수도 있다. 이 둘 차이는 완전히 구분되는 단계의 차이가 아니라 경사진 면의 높고 낮은 양 끝의 차이라고 할 수 있다.
참으로 두려운 일은 너무나 많은 신자들이 이 단계에 이르지 못하고 있다. 무지, 게으름, 사람에 대한 두려움, 세상을 사랑하는 마음, 끊지 못하는 죄의 유혹으로 말미암아 적은 소망, 적은 평안, 미약한 성결 생활로 만족해 하며 삶을 영위한다. 그리스도와의 교제는 매사에 있어 그리스도의 은혜 안에서 성장하고자 끊임없이 노력하는 모든 사람들이 누릴 수 있는 특권이다.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싹이라고 한다면, 교제는 꽃이 피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연합이 어린 아이 상태라고 한다면, 교제는 장성한 사람이라고 할 수 있다. 그리스도와의 교제가 지니는 큰 비밀은 계속하여 그를 믿는 산 믿음의 생활을 영위하는 것이며, 매시간 모든 것들을 그로부터 공급받는 것이다. 바울의 고백과 같은 교제(빌1:21, 갈2:20)가 바로 믿음 안에서 기쁨과 평강을 지니는 비결이다.
그들은 가만히 게으르게 앉아서 “나는 그리스도께서 친히 나를 위해 모든 일을 하시도록 맡기었다”라고 말하지 않았다. 그들은 하나님 안에서 힘 있게, 하나님께서 그들 안에 넣어주신 거룩한 성품들을 담대하고 확신있게 사용하였으며, “사랑하시는 이로 말미암아 넉넉히”(롬8:37) 이겼다. 대부분의 신자들이 아주 초보적인 지식만으로 만족해하며 천국을 향해 나아가는 길을 의심하며 머뭇거리고 절름거리면서 고통스러워하며 가고 있다. 이 시대 교회들은 연약함과 무력함, 그리고 감화되지 못한 신자들로 가득 차 있으며, 그러한 신자들은 결국 “구원을 얻되 불 가운데서 얻은 것”(고전3:15) 같을 것이다. 그들은 결국 세상을 일깨우지 못하며 영원한 나라에 “넉넉히”(벧후1:11) 들어가는 것에 대해서도 알지 못한 자들이다.
10. 우리가 그리스도의 재림을 위해 무엇을 준비해야 하는지 묻고 싶다.
그는 권세와 큰 영광과 함께 하늘의 구름 가운데로 다시 오실 것이다.(행1:11) 그는 그의 성도들에게 보상해 주시기 위하여, 악인을 징벌하시기 위하여, 땅을 새롭게 하시기 위하여, 저주를 소멸하시기 위하여 다시 오실 것이다. 그리하여 거룩함이 곧 보편적인 법칙이 될 것이다. 옛 시대의 그리스도인들은 그가 다시 오시기를 기다리면서 사도신경을 신앙의 한 구성조건으로 삼았다. 뒤로 십자가와 속죄를 바라보면서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기뻐하였다. 위로는 하나님의 우편에 계신 그리스도를 바라보면서 중보하시는 그리스도를 기뻐하였다. 그리고 앞으로는 저희 주인이 다시 오신다고 하신 약속을 바라보면서 그를 다시 만나게 되라는 생각에 기뻐하였다.
우리는 실제로 그리스도로부터 무엇을 얻었는가? 그가 나타나시기를 준비한다는 것은 다름 아니라 참되고 꾸준한 실제적인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다. 우리 각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일은, 각자가 맡은 바 임무를 행하며 그리스도인으로서 떠날 준비를 갖추고 정리된 마음으로 그 일을 행하는 것이다. 롯의 처를 생각하라.(눅17:32)
11. 맺는 말
1) 이 책의 독자 가운데 혹 신앙에 대해 잠든 상태이며 전혀 생각해 보지도 않은 사람이 있는가?
이제 깨어 더 이상 잠들지 말라. 그리고 묘지를 바라보라. 언젠가는 거기에 눕게 될 것이다. 여러분은 마치 폭포를 향해 강 아래쪽으로 미끄러져 흘러가고 있는 보트 안에서 잠자고 있는 사람과 같다.
“자는 자여 어쩜이뇨 일어나서 네 하나님께 구하라”(욘1:6)
“잠자는 자여 깨어서 죽은 자들 가운데서 일어나라 그리스도께서 네게 비추시리라”(엡5:14)
2) 이 책을 읽는 독자 가운데 혹 자신이 저주받았다고 생각하고 있으며, 자신의 영혼은 아무런 희망도 없다는 생각으로 두려워하는 사람이 있는가?
두려움을 멀리 던져버리라. 그리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에게 하신 제안을 받아들이라.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 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마11:28)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요7:37)
“네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 쫒지 아니하리라”(요6:37)
바로 오늘 그리스도께로 나아가라. 여러분의 모든 죄, 불신, 연약함, 죄의식을 가져가라.
3) 이 책의 독자 가운데 혹 그리스도를 믿는 신자라고 스스로 고백하면서도 풍성한 기쁨과 평안과 위로가 없는 그러한 사람이 있는가?
오늘 주어지는 권고를 취하라. 그 잘못이 전적으로 자신에게 있지 않은지 자신의 마음을 살펴보라. 여러분의 적은 믿음, 부족한 회개, 적은 은혜, 불충분한 성화에 만족하며 편안히 앉아 있음에 틀림없다. 여러분의 심중을 바꾸라. 단호히 행하라. 여러분의 기독교 정신에 있어 철저하게, 아주 철두철미하게 되어야 한다. 생명의 원천을 마시고자 노력하라.
4) 이 책의 독자 가운데 혹 자신의 연약함이나 부족함, 죄의식으로 의심과 두려움 때문에 압박받고 있는 신자가 있는가?
여러분의 믿음이 연약하면 어떤가? 믿음이 아예 없는니보다 낫다. 육신을 입고 있는 자신에게서 아무것도 기대하지 말라. 그리스도를 보다 더 바라보라.
5) 이 책의 독자 가운데 혹 하늘로 향하는 길에서 부딪치게 되는 시련들로 때때로 좌절하는 사람이 있는가?
구세주를 바라보라. 그분도 많은 시련을 몸소 겪으신 분이시다. 여러분은 혼자인가? 중상모략과 비난을 받고 있는가? 핍박 받고 배반당하였는가? 육신이 고달프고 고통 받고 있는가? 그도 그러하였다. 그분은 여러분을 위해 느껴질 수 있을 뿐만 아니라 도울 수 있다. 잠깐이면 모든 것이 극복될 것이다.
제 2 장 자기 분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눅 13:24)
그 교훈은 분명히 한 위대한 진리, 우리 영혼의 구원에 대한 자신들의 개인적인 책임에 대해, 그리고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범하고 있는 신앙이라는 중요한 업무를 뒤로 미루어놓는 큰 위험을 지적해 주고 있다.
1. 여기에 구원의 방법에 대한 설명이 있다. 주 예수는 그것을 ‘좁은 문’이라고 부르신다.
죄는 사람과 하나님 사이에 놓인 커다란 산이고 깊은 심연이라고 할 수 있다. 어떻게 사람이 그 산을 넘고 심연을 건널 수 있겠는가? 하나님은 하늘에 계시고 순전하시고 영이시고 어두움이 전혀 없는 빛이시고 악이나 불의를 견디실 수 없는 존재이시다. 사람은 비참하게 타락하여 기어 다니는 벌레요, 죄많고 더럽고 오류투성이인 존재이다. 생각해내는 것이라고는 오로지 악 뿐이며 기만하는 마음을 가진 어찌할 수 없을 정도로 사악한 존재이다. 어떻게 사람과 하나님이 함께 있을 수 있겠는가?
그러나 하나님은 자비로우시므로 거기에 한 문이 있다. 곧 ‘좁은 문’이다. 이 문은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죄인들을 위하여 만들어진 문이다. 그리스도는 그 자신의 몸과 피의 대가로 한 위대한 문을 세우셨다. 그는 꼭대기가 하늘까지 닿는 한 사다리를 땅위에 세워 놓으셨다. 그는 죄인 중의 괴수도 하나님의 거룩하신 존재 앞으로 두려움 없이 나아올 수 있는 한 문을 만드셨다. 그 문은 항상 좁고, 엄격하게 제한되어 있으며, 어떤 사람들에게는 통과하기가 심히 어려운 문이다. 그 문은 세상이 지속되는 한 서있는 문이다.
그 문이 들어오도록 허용하지 않을 그들은, 죄가 사함받기에는 너무나 많아서가 아니라 그들이 하나님의 방법으로 구원을 얻으려고 하지 않기 때문이다. 지난 18세기 동안 수많은 사람들이 그 문을 좀 더 넓혀보고자 노력했다. 그 문은 융통성 있게 커졌다 작아졌다 하는 문이 아니다. 그 문은 좁은 문일 뿐 아니라, 또한 사람들이 하늘에 이를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이다. 거기에는 옆문이나 구멍 뚫린 곳도 없다. 오로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 것이며 단순히 그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는다. 어떠한 사람도 자신의 행위로 말미암아 구원을 얻지 못할 것이다. 사람이 할 수 있는 최선의 행위도 근사한 죄보다 별반 나을 바가 없다. 그 좁은 문으로 들어가게 되는 오직 한 가지 조건은 여러분의 죄와 욕망이 하나님의 방법인 예수 그리스도를 통하여 구원을 받아야 한다는 참된 필요를 느끼고 있느냐는 것이다. 문제는 아주 간단한 바로 이것이다. 문은 즉각적으로 열릴 것이며, 바로 들어가라.
여러분이 단지 교회당 내지 예배에 참석하는 것이 아니라, 참 마음과 영혼으로 그 생명의 문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그러한 문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우리는 얼마나 놀라운 특권을 누리고 있는지 생각해 보라. 그 문이 여러분 앞에 뚜렷이 볼 수 있게 서 있다. 그 문에 대해 알고 있으면서도 지체하며 밖에서 서성이느니 차라리 그 문에 대해 알지 못하는 편이 천배는 더 나을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그 좁은 문에 실제로 들어서 있다면, 죄사함 받았고, 용납되어 의롭다 여김을 받았으며, 질병과 죽음, 심판, 영원에 대하여 두려워 할 필요가 없게 되며, 분명 이것은 매일 같이 찬양과 경배를 드려야 할 일이다. 두려운 일인진대 자신들이 본래 어떠한 자들이었는지, 그리고 얼마나 빚진 자가 되었는지를 마땅히 기억해야 할 만큼 기억하는 사람은 너무도 적다. 마음에 불평이 가득 차있고 찬양은 적다면, 그것은 건강한 영혼의 상태를 나타내주는 징표가 아니다.
2. 여기에 분명한 명령이 있다. 주 예수는 “들어가기를 힘쓰라”라고 말씀하신다.
‘힘쓰라’라는 말은 구원받고자 한다면 부지런히 수단들을 활용해야만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어떠한 사람도 자신의 힘으로는 죄 가운데 한 가지도 씻어 없앨 수 없다는 것은 의심할 나위없는 사실이다. 그러나 만일 사람이 아무런 일을 할 수 없다면 결코 ‘힘쓰라’라고 말씀하지 않으셨을 것이다. “우리로서는 아무것도 할 수 없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만족하게 하며 계속 죄 가운데 거하게 하는 종교가 있다. 분명히 알 수 있는 사실은 우리의 구원이 처음부터 끝까지 전적으로 하나님께 달려있다는 것이다. 또한 그와 마찬가지로 명확하게 알 수 있는 사실은 만일 우리가 잃어버려진 바 된다면 우리의 멸망이 전적으로 완전히 우리 자신에게 달려 있다는 것이다. 죄인들은 언제나 셈을 해야 하는 존재, 책임있는 존재로 불리고 있다.
‘힘쓰라’라는 말은 구원받기를 소원한다면 많은 역경과 힘든 싸움을 각오해야 한다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특히 영적인 일에 있어서는 수고 없이 거두는 결실이란 없다. 감각적이고 세속적인 마음은 매일의 투쟁 없이는 결코 영적인 속성으로 변모되지 않을 것이다.
십자가와 투쟁 없이는 천국에 이를 수 없다. 얻고자 하는 자는 ‘힘써야만’ 한다.
‘힘쓰라’라는 말은 구원을 소원하는 것이 가치있는 일임을 가르쳐 주고 있다. 부와 권세, 지위와 학식 등은 ‘썩은 면류관’과도 같다. 썩지 아니하는 것들은 모두 좁은 문 안에 있다. 우리의 사고영역을 초월하는 하나님의 평강, 다가올 좋은 것들에 대한 빛나는 소망, 우리 안에 거하는 하나님의 영에 대한 인식, 무슨 일이 있더라도 사함을 받았으며 안전하며 보증되었으며 현재에나 영원에서나 하나님의 돌보심 안에 잇다는 의식, 이러한 것들이야말로 진정한 황금이며 불변하는 부이다. 그러므로 ‘힘쓰라’라고 요구하고 계신다.
‘힘쓰라’라는 말은 신앙에 있어서 나태함이 하나의 큰 죄라는 사실을 가르쳐 주고 있다. 단순히 핑계로, 동정심으로 넘겨버릴 그런 문제가 아니다. 이 말은 명백한 일종의 명령이다. 하나님의 법을 어긴 사람은 죄인이다. 그런데 보라. 여전히 꿈적도 하지 않고 앉아만 있다.
‘힘쓰라’라는 말은 좁은 문 밖에 있는 모든 사람은 매우 위험에 놓여 있다는 사실을 가르쳐 준다. 그들은 영원히 잃어버려질 위험에 처해 있다. 그들과 죽음 사이에는 단지 일보 간격밖에 없을 뿐이다. 주 예수께서는 인생의 불확실함과 시간의 절박함을 알고 계셨다. 그는 죄인들이 영혼의 일을 지연시키지 않게끔 재촉하셨으며, 지체하지 않기를 간절히 원하셨다.
‘힘쓰라’라는 말은 나로 하여금 진지하게 생각지 않을 수 없게 한다. 스스로를 그리스도인으로 칭하는 그들은 물론 헛되이 맹세하지도 않았으며, 살인도 않았으며, 간음도, 도적질도, 거짓말하지도 않은 사람들일 것이다. 그들은 세상적인 일에 수고하고 애쓰고 일하며 주의 깊게 행한다. 하지만 오직 한 가지 참으로 필요한 일에 있어서만은 결코 ‘힘쓰지’ 않는다.
때때로 낙담될 때만 예배에 참석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하겠는가? 규칙적으로 빠짐없이 예배드리기 위해 나오기는 하나 전적으로 형식적으로 출석하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하겠는가? 성경을 읽지 않고, 결코 기도하지 않는 사람들에 대해서는 어떻게 말해야 하겠는가?
복음을 전하는 사역자는 참으로 숙연해지지 않을 수 없는 자리에 있다고 하겠다. 우리 손에는 하나님의 위대한 법전이 들려있다. 사람들에게 회개하고 믿어 구원을 얻으라고 권면한다. 그렇지만 우리는 사람들이 구원받기 위하여 ‘힘쓰지’ 않음을 한 주간 동안 분명히 알게 된다. 월요일 아침마다 오는 마귀가 있어 끊임없이 많은 올가미들을 늘어놓고, 그럴듯한 상품들을 내걸곤 한다. 그들은 사단이 입찰해 놓은 물품을 따내기 위해 애써 수고한다. 삼십칠 년간 목회생활을 통하여 얻은 체험적인 결론을 적고 있다. 내 눈에는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 원하여 ‘힘쓰는’ 자가 거의 보이지 않는다. 큰 잔치의 비유는 목회를 시작한 이래로 직접 보아온 것들을 정확하게 그대로 묘사하고 있다.(눅14:16)
여러분에게 혹 ‘힘쓰기’를 소홀이 하여 영원히 멸망받는 자리에 서지 않도록 경고하고 싶다. 어떤 크고 중대한 죄가 있어야만 그 곳에 선다고 생각지 말라. 분명 지옥에 이르는 또 다른 길, 즉 영적인 태만, 영적인 나태, 영적인 게으름의 길이 있는 것이다. 사단은 교회에서 십일조를 내고, 주일마다 교회에 안락하게 앉아 있는 존경받는 교인이 되는 것에 대해서는 아무런 반대도 하지 않는다. 사단은 ‘힘쓰지’ 않음으로 결국에는 잃어버려지고 말 것을 잘 알고 있다. 혹시 ‘힘쓰라’라는 가르침으로 인해 지나칠 정도로 힘을 쓰게 되지나 않을까하는 우려는 하지 말라. “모든 수고에는 이익이 있다”라는 말씀을 명심하고 영혼에 대한 수고만큼 이익이 많은 수고도 없음을 기억해야 한다. 사람들이 여러분에 대해 무엇이라고 생각할까에 대해서는 신경 쓰지 말라. 오직 당신의 주인이 ‘힘쓰라“라고 말한 그 점에 있어서 당신이 모자라지 않도록 하라.
3. 여기에 두려워할 만한 예언이 있다. 주 예수는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라고 말씀하신다.
하나님의 오래 참으심이 마침내 끝이 날 것이다. 은혜의 보좌는 무너질 것이며, 대신 그 자리에 심판의 보좌가 들어서게 될 것이다. 좁은 문은 그때에 봉해질 것이며 빗장이 걸릴 것이다.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성경의 모든 예언은 결코 실패한 적이 없다. 엄청난 수의 무리들의 비참한 종말이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늦게 그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그들은 드디어 왜 사역자들이 그토록 애태워 길게 설교하고 회심을 강조했는지를 이해하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늦게 후회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뼈저린 뉘우침과 심장을 관통하는 슬픔을 느끼게 될 것이다. 저희의 죄짐의 무거움에 견딜 수 없어 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늦게 믿게 될 것이다. 그들은 중대하고도 실제적인 진실을 자신들의 눈으로 보고 자신의 몸으로 체험하게 될 것이다. 그들은 비로소 복음주의적인 신앙이 위선도, 터무니없는 생각도, 광신도, 열광도 아님을 깨닫게 될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너무도 늦게 구원에 대한 열망을 갖게 될 것이다. 그들은 비로소 사함을 받을 기회를 얻으며, 부르심 받게 되기를 갈망할 것이다. 이미 너무 늦은 것이다!
저는 그리스도가 오시는 날, 이 세상에 있는 온갖 사물들의 가치와 그에 대한 평가가 어떻게 변하게 될까 하는 생각을 해본다. 지금에 있어 소중한 것은 무엇일까? 금, 은, 보석, 통장, 집, 차와 같은 것들을 소중하게 여긴다. 보잘 것 없는 것은 무엇일까? 하나님을 아는 지식, 복음의 값없는 구원, 하나님의 은혜, 결코 썩어지지 않을 유업에 대한 약속, 그러한 것들은 돈 없이 거저 얻을 수 있고 누구라도 가질 수 있는 것들이다. 그러나 슬프게도, 요구하는 사람도 없고 쳐다보려고도 않는다. 두려운 점은 오늘날 자칭 그리스도인이라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것을 실제로 체험함으로써야 깨닫게 되리라는 사실이다. 종종 잠 1:24-31의 말씀보다 더 두려운 말씀은 성경에서 찾아보기 힘들다는 생각을 하곤 한다.
그리스도의 복음을 믿지도 않고 그 복음이 요구하는 바를 실천하지도 않는 사람들이 있을 것이다. 우리가 회개하고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좇으라고 권면할 때 우리가 너무 지나치게 많은 것을 요구한다고 생각한다. 우리의 증언이 이 땅에서는 조롱거리가 될 수 있고 무시될 수도 있지만, 진실이 훌륭하게 입증될 날이 오고 있고, 그 때에 당신들은 당신들이 틀렸음을 인정하게 될 것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진심으로 사랑하는 사람들이 있을 수 있다. 지금 당신의 신앙으로 종종 오해받고 비방거리가 되고 핍박을 받을 것이다. 그러나 당신은 앞을 바라보며 주의 재림을 생각하며 용기를 얻을 수가 있다. 그 날, 이 모든 것들은 바로잡힐 것이다. 그때,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있다는 이유로 지금 당신을 비웃고 있는 사람들을 보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사람들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말라. 당신의 주인을 부끄러워하지 말라. 시간이 촉박하다. 십자가는 단지 잠시일 뿐이다. 아무것도 불확실한 상태로 남겨두지 말라.
적용)
“들어가기를 힘쓰라”,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리라” 그것은 좁은 문이다.
당신은 좁은 문으로 들어갔는가? 만일 지금 안에 있지 못하다면, 당신은 죄사함을 받지 못했으며, 하나님과 화해하지도 못했고, 거듭나지도, 천국에 적합하게 되지도, 않았다. 당신의 삶은 한낱 물거품에 지나지 않는다. 이 세상에서의 당신의 자리는 곧 다른 사람에 의해 메워지게 될 것이다. 당신의 육신은 구더기들의 먹이가 될 것이며, 당신의 영혼은 영원에 대하여 잃어버려질 것이다. 바로 지금 당신 앞에는 구원의 문이 열려 있다. 오직 한 가지가 부족하다. 즉 당신이 기꺼이 구원받고자 해야 한다는 것이다. ‘힘쓰지’ 않고 좁은 문으로 들어간 사람을 알고 있다면 말해 보라. 하루라도 지체하지 말고 들어가라.
이미 좁은 문으로 들어간 모든 사람들에게 요청한다. 당신이 발견한 그 축복들을 다른 사람들에게 말하라. 모두가 선교정신을 가지고 이웃들에게 좁은 문을 보여주고자 애쓰는 사람은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에 동조하고 있는 셈이다.(벧후3:9)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사람이 많으리라” 이 말씀을 깊이 명심하라. 그리고 나서도 만일 당신이 다른 사람들의 영혼에 대해 무관심할 수가 있다면 그렇게 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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