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14 장 이 최고 최상의 구원의 확신(성령 체험)을 가졌는가?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8:16)
1. 체험을 구하라
분명하고 확실하게 그것은 추구되어야 한다. 그리스도인이 능히 갖추어야 할 것에 미치지 못하는 상태에서 만족해서는 결코 안되기 때문이다. 주 예수 그리스도로 인하여 그 안에 있는 하나님의 은혜의 ‘풍성한 부요’에 속한 모든 것을 누리기 위해서 언제나 열심히 사모해야 한다.
확실성을 요구하는 것은 언제나 사랑의 특성이다. 사랑은 줄 뿐 아니라 요구하기도 한다. 신약성경에서 이 축복을 위해서 기도하라는 성령의 권고가 없기 때문에 그것을 추구하는 것은 분명히 그릇된 것이라는 주장이 있다. 이는 잘못된 논증일 뿐 아니라 매우 위험스러운 것이다.
신약성경의 지면마다 묘사되어 있는 모든 것이 성령을 크게 부어주시는 시대에 일어났음을 기억해야 한다. 엡 1:13 “그 안에서 너희도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는 그리스도인들이 ‘믿고 하나님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은 것’을 기정 사실로 인정하고 있다.
오늘날에는 고린도전서를 쓸 필요가 있는 교회들이 그렇게 많지 않다. 특별히 영적 은사에 관한 12~14장에 기록된 것을 받을 만한 교회들이 많지 않다. 그러나 그때는 사람들이 성령의 세례를 받았기 때문에 그것이 매우 필요하였다. 우리는 우리의 부르심과 택하심을 확실히 알기 위해서 부지런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우리 영으로 증거하는 이 성령의 증거를 받는 것보다 더 좋은 길은 없다.
주님은 눅 11장 특히 13절에서 “누가 아들이 생선을 달라 하면 생선 대신에 뱀을 주며 알을 달라 하면 전갈을 주겠느냐 너희가 악할찌라도 좋은 것을 자식에게 줄줄 알거든 하물며 너희 천부께서 구하는 자에게 성령을 주시지 않겠느냐” 하셨다.
우리는 우리 아버지 하나님께 그 때처럼 오늘날도 성령을 주십사고 구해야 한다. 이 말씀의 정확한 병행구는 요한복음 7장 37-39이다. “누구든지 목 마르거든 나에게 와서 미시라”.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을 받을 것임을 의미하지는 않으셨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생명강수가 그들의 속에서 흘러나올 것이라’라고 말할 수는 없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이다 ‘너희가 성령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고 이 필요성을 느끼게 되면 하나님 아버지께 나가서 간구하라’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보편적인 권면은 우리가 그것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이다. 주님은 끈덕지게 요구하도록 강조하고 계신다. “구하라 찾으라 문을 두드리라” 계속해서 끊임없이 간구하라고 말씀하고 계신다. 급박하게 구하여 사모하는 축복을 받기까지 계속해서 간구하는 것의 중요성을 예증하고 계신다.
2. 구하는 방법
그 증거는 우리가 ‘취할 수’는 없다. 그것을 성령께서 행하시는 것이다. 다만 그것을 사모하고 그것을 간구할 따름이다. 믿음은 축복 그 자체에 매달려 있지 않으며 축복을 주시는 분에게 매달려 있는 것이다. 그리고 그에게 간청하는 것이다. 믿음은 우리 속에 긴박성과 사모하는 마음을 산출한다. 받으면 전에는 전혀 겪어 보지 못했던 감동을 받는다. ‘놀라움과 사랑과 찬양’의 분위기 속에 빠져 든다. 눈물이 터져 나오고 경건해진다. 이것은 본질적으로 체험적이며 경험적이다.
그러나 어느 집회에 참석하여 ‘안수’를 받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것은, 성령세례를 받으려는 사람들을 위한 기도 결과로 받을 수가 있다는 것은, 문제가 있다. 교회사에는 가톨릭의 ‘견진성사(안수례) 교훈을 말고는 이 점에 관한 언급이 하나도 없다.
새로운 신학적 해석은 20세기 동안에 일어났다. 특히 1907년쯤 해서 그 교훈이 대중화되었다. 사도들은 안수하여 성령세례를 받게 했다. 그러나 그 권능은 특별한 목적을 위해 의도된 사도들에게만 국한된 것이었다. 전도자 빌립마저 그것을 소유하지 못했다. 사도바울의 경우에도 아나니아에게 주어졌다.
‘사도적 계승’의 신비를 믿는 사람들은 로마 카톨릭이든 성공회든 간에 그것을 가졌노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그 열매로 그들을 알 것이다. 19세기 초엽 특히 미국에서 인기가 있었는데 며칠씩 묵으며 기다리는 집회를 말한다. 그것은 사실 자기가 그 권능이 오는 때를 ’결정하는 사람‘이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우리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때에 이것을 주시고 또 자신의 방법으로 이것을 주신다. 어느 집회를 떠나기 전에 그것이 일어나야 한다고 하는 것은 하나님을 모독하는 처사일 뿐 아니라 이상한 심리적이고 환각적인, 심지어 마귀적인 권세에 기회를 주는 것이 된다. 언제나 마귀의 권세들은 하나님의 자녀들을 잘못 인도하고 우리에게 거짓되고 기만적인 체험을 주려고 벼르고 있다는 것을 명심하자.
3. 이 체험의 축복은 어떻게 오는가?
1) 이 체험적 성격과 본질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이 성령의 증거를 가지지 않을 수 있다.
그러나 그 속에 성령이 없는 그리스도인은 있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서 ‘말로 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을 가지고’ 주 예수 그리스도를 즐길 수 있다고 믿자. 또한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사랑이 나를 강권한다’고 말할 수 있음을 인식하자. 또한 우리는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길이와 높이와 깊이가 어떠함을 깨달아 하나님의 모든 충만하신 것으로 너희에게 충만케” 될 수 있음을 인식하자(엡3:18,19). 그것을 얻기까지 쉬지 말고 전진하자.
2) 삼가 옳은 일을 추구하도록 하자. 단순히 어떤 체험이나 확증들만을 추구하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과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추구하자. ‘불덩어리’나 어떤 전선에 감전되는 것 같은 몸을 관통하고 지나가는 것을 구하지 말라. 오직 그를 찾자. 그를 알기 원하며 그의 부활의 능력과 그의 고난에 동참하기를 원한다고 말하자. 마음에 부어주시는 하나님의 사랑을 아는 지식을 원하도록 하자.
“이것이 아니면 나는 참된 증인일 수 없다. 나는 오순절 날이 되기 전에 제자들이 했던 것처럼 주님을 위한 증인이 될 수 없다”라고 고백하자. 그리스도께서는 그 권능이 오기까지 거기 머물라고 말씀하셨고 또한 그 권능이 오기까지는 그를 증거할 수 없음을 말씀하셨다. 우리 스스로에게 “그 권능 없이 증인이 된다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요, 그러한 것이 없이 내가 가련한 증인이 될 이유가 무엇인가?”라고 묻도록 하자. 그의 영광만을 구하되 우리들의 영광을 구하지 말자.
3) 최선을 다해서 그를 기쁘시게 하라. 바울이 13절에서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라’고 한 것과 같다. 최선을 다해서 거룩해지기 위하여 노력하라. “이러므로 너희가 더욱 힘써 너희 믿음에 덕을 덕에 지식을 지식에 절제를 절제에 인내를 인내에 경건을 경건에 형제 우애를 형제 우애에 사랑을 공급하라(벧후1:5-7)”는 명령을 준행하라. 기록된 말씀 가운데서 그를 부지런히 찾도록 하자.
흔히 그에 관해서 읽고 있을 때에 그를 만났다. 말씀을 읽자. 말씀과 함께 시간을 보내고 그것을 묵상하자. 이것이 성도들이 따랐던 방법들이다. 그런 다음에 모든 열심을 난 뒤 끊임없는 기도를 드리자. “구하고 찾고 문을 두드리라”.
계속해서 그렇게 해 나가도록 하자. 어떠한 것도 방해하지 못하게 하고 사모하는 바를 있는 힘을 다해서 그리스도에게 알리자. 다른 어떤 일보다도 그 일에 전념하면서 꾸준히 끈질기게 나가자. 응답이 없더라도 계속 추구해 나가라. 계속 문을 두드리라. 이사야가 “또 여호와께서 예루살렘을 세워 세상에서 찬송을 받게 하시기까지 그로 쉬지 못하시게 하라”(사62:7)와 같이 행하자. 이것이 성경의 교훈이다.
토마스 구드윈(1600년대 말), “성도라면 이 축복을 기다려야 한다. 유대인들이 그리스도의 오심을 기다렸듯이 여러분은 여러분의 심령 속에 성령이 임하시기를 기다려야 한다. 신앙의 위인들은 밥낮 이 약속을 기다리면서 하나님을 섬겼다. 밤낮 충실하게 여러분의 하나님을 섬기라 또 겸손하게 행하라. 성령께서 오셔서 여러분의 심령을 말로 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기쁨으로 채우시고 또한 구속의 날까지 여러분을 인치신다는 약속이 되어 있다. 이 약속을 간청하시고 기다리라. 여러분이 믿음을 가졌다면 성령으로 인침을 받는 일이 있다. 신자들에게 이루어지는 한 약속의 영이 있다.
휫필드, “확신의 교리들을 부정하는 것은 무서운 실수이다. 초대 교회시대에나 박해시대에만 국한되었다고 생각하는 것도 무서운 실수이다. 확신의 결과인 성령 안에서의 의와 화평과 기쁨은 우리 속에 있는 하나님 나라의 필수적인 부분이다. 나는 많은 사람들이 자기들의 일생을 신음하면서 보내고 있는 큰 이유 중의 하나는 자기들이 누릴 그리스도인의 특권들을 모르는 것이라고 단언한다. 그들은 그것을 간구하지 않기 때문에 확신을 가지지 못한다.”
스펄전, “누가복음 11장에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그 천부께서 성령의 권능을 요구하면 성령을 주실 것이라는 분명한 약속이 있다. 자 이제 우리는 즉시 우리 모든 마음을 다해서 성령을 구하자! 이 약속은 특별히 우리에게 주어진 것이다. 우리 스스로 성령을 마시운 만족한 신자들이 되게 하실 뿐 아니라 다른 이웃에게도 그 축복을 나눠주는 쓸모있는 신자가 될 수 있도록 성령께서 역사하시기를 간구하자.” “간절하고 살아있는 열망으로 그리스도를 사모하는 사람치고 얼마 되지 않아서 그를 만나지 못한 사람이 없다. 작은 은혜에 대해서 감사하라. 그리고 큰 은혜를 그에게 구하라. 그가 정하신 때에 당신에게 주실 것이다.”
약속의 영은 여러분에게 충만한 확신을 주실 것이다. 여러분이 하나님의 자녀라는 절대적인 확신과 또한 여러분을 위해서 기업이 준비되었다는 확신을 줄 것인데 그 영은 하나의 증인이요 인침이요 보증이다. 세상이 알았던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휼륭한 증인들은 언제나 충만한 확신을 가진 사람들이었고 그 결과 그 확신과 그 충만함을 즐겼던 사람들이다.
또한 그들이 스펄전이 말한 대로 영광을 목격하고 황홀경에 빠져 있었다. 이 최고 최상의 구원의 확신을 가졌는가? 그렇지 않다면 추구하고 지적된 방식을 따라서 충성과 순종과 모든 말과 모든 행실을 통해서 그것을 추구하라. 분명한 확신을 가지기까지 그렇게 나가라. 그러면 진실로 말로 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게 될 것이고 충만한 영광으로 즐거워하게 될 것이다.
제 15 장 성령세례를 어떻게 받는가?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장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1. 구원이 아닌 구원의 확신
양자의 영은 구원의 필수적인 것이 아니다. 양자의 영에 대해서 조금 밖에 모르는 그리스도인이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개혁자들의 대부분은 이에 동조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가르치는 경향은 구원의 확신은 구원의 필수적인 것이었다. 루터와 칼빈도 구원 자체와 구원의 확신 사이를 구별짓는 것에 실패하였다.
그들은 성도가 자기가 구원 받은 것을 알지 못하면 구원받지 못했다고 가르치는 경향이 있었다.
‘부르짖음’이라는 말은 매우 강한 말이며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절규이다. 그것은 단순히 ‘아바 아버지’라고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것이다. 사도는 양자의 영이 그러한 감정으로 인도한다고 말하고 있다.
구원의 확신을 구원의 절대적이고 필수적인 조건으로 가르치는 교훈이 왜 틀렸는가? 웨스트민스터 신앙고백 제 18장에서 ‘구원 받은 것’과 자기가 구원받은 그 사실을 ‘아는 것’ 사이를 구별하고 있다. 사람이 구원받았으면서도 구원의 확신에 대한 부족이 있을 수 있으며 그 확신은 구원의 절대적인 필수 요건이 아니라고 말한다. 믿음으로만 의롭다함을 받는다는 그 개념 자체가 믿는 것에 달려 있음을 의미한다.
자기가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다고 확신하고 있다고 말할 수 있으면서도,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는 ‘양자의 영’을 가지지 못할 수도 있는 것이다. 이 둘 사이에는 중차대한 구별이 있고 구원의 확신을 가지게 되는 단계들이다.
2. 부흥시대에 있어서 구원의 확신
본문을 보면, ‘양자의 영’을 받아 부르짖는 것이 로마에 있는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해당되는 진리라고 진술하고 있는 것 같다. 서신의 수신자들이 ‘양자의 영’으로 인도해 주는 위대한 체험을 모두 가지고 있을 것이라는 전제 위에 쓰여졌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신약성경시대에는 성령께서 참으로 엄청나게 부어졌기 때문에 초대교회의 그리스도인의 대부분은 전부가 아니라 할지라도 구원에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고 할 수 있다. 후에 부흥시대에도 그러한 일이 되풀이 되었다. 그러나 그러한 상태는 그 후 교회 역사에서 맛보지 못했던 상태였다.
3. 성령세례를 받는 방식
‘그것을 믿음으로 받으라’는 교훈은 잘못된 것이다. 믿음으로 의롭다함을 받았듯이 거룩함도 성령의 충만함도 믿음으로 받았다고 믿으면 된다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육신의 치료에 대해서도 같은 것을 주장한다. 그러나 이 교훈만큼 15절에서 묘사하는 체험을 하지 못하도록 막는 것은 없다. 성령의 세례는 어떻게 받는 것이냐? 하나님의 말씀은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갈3:2), ‘너희에게 성령을 주시고 너희 가운데서 능력을 행하시는 이의 일이 율법의 행위에서냐 듣고 믿음에서냐’(갈3:5),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아브라함의 복이 이방인에게 미치게 하고 또 우리로 하여금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갈3:14).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은 오직 믿음으로다.
그러면 어째서 이 선물을 받은 사람이 적은가? 이 선물은 갈급해 하는 사람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갈급해 하는 사람이 적기 때문에 그렇다. 또 중요한 사실은 이 은사를 주시는 분은 예수 그리스도라는 것이다.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 와서 마시라’. 성령의 세례를 받는 이 체험을 목이 갈한 사람이 물을 마시는 것에 비유한 말씀이다.
위 갈라디아서의 진술들에 대해 바울이 행위에 의지하는 것을 비난하고 있는 것이 성령을 받는 것도 칭의를 받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받음을 의미하고 있다고 주장하는 이들이 있다. 그러나 그들이 생각하지 못하는 것은 거기서 사도가 첫째, 칭의 외에 아무것도 다루고 있지 않다는 점이다. 둘째, 성령을 받는 것도 칭의를 받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받는다는 것을 사도는 의미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의 전체 지위가 믿음에서 나온 것이며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행위를 의뢰하고 있지 않다는 것이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의 삶에 있어서 모든 것은 믿음에 기초하고 있다. 그리고 바울은 사실상 그 이상 다른 어떤 것을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성령의 은사가 특별한 방식으로 갈라디아 사람에게 임하였다고 말하고 있지 않다. 그는 다만 우리가 성령을 선물로 받은 것은 우리가 믿음의 위치에 있기 때문이요 ‘율법 아래 더 이상 있지’ 않기 때문이라고 하는 것 뿐이다.
성령은 인격이시다. 그는 하나님이요 복되신 3위1체의 제3위되시는 분이시다. 우리 그리스도인은 성령을 언제 어디서나 공기를 마시듯이 마음대로 마실 수 있는 분으로 생각하면 안 된다. 우리는 성경에서 성령에 복종해야 한다고 배우고 있다. 우리는 성령을 ‘슬프게 하지 아니하고’ ‘소멸’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러나 성경 어디에서도 이처럼 단순하고 가장 간단한 방법으로 그를 취하라는 암시가 전혀 없다.
내가 볼 때 이 교훈 자체가 성령의 인격 자체에 대해서 무리를 가하고 있는 것처럼 보인다.
그리고 ‘받다’라는 말과 관련해서 어려운 문제가 제기된다. 그들은 ‘받는 것’을 우리 편에서의 행동과 취함의 차원에서 해석하고 있기 때문이다. ‘받다’라는 단어가 여러 다른 헬라어 말을 번역하는데 쓰여지고 있음을 발견하게 된다. 모든 헬라어의 단어들이 여기 로마서 8:15에서 사용되는 것을 제외하고는 ‘받았다’라는 말이 수동적인 의미가 아니라 능동적인 의미로 번역되고 있고, 그 말들은 우리의 행동에 강조점을 두고 있으며 우리가 취한다는 행동에 치중하고 있다. 예를 들면, 행 2:41, “그 말을 받는 사람들은 세례를 받으니 이 날에 제자의 수가 삼천이나 더하더라”. 고전 2:14,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 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매우 능동적인 의미를 전달하고 있으며 우리 편의 취하는 행동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농부가 이른 비와 늦은 비를 취하지 않는다. 그것은 그 농부에게 부어지는 것이고 농부는 그것을 받을 뿐이다. 이러한 ‘받다’라는 말의 의미들은 전적으로 수동적이다. 벧전 4:10, 벧후 1:17도 같은 해석을 해야 한다. ‘지극히 큰 영광 중에서 이러한 소리가 그에게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 하실 때에 저가 하나님 아버지께 존귀와 영광을 받으셨느니라’. 요일 3:22도 같은 용법이다. ‘무엇이든지 구하는 바를 그에게 받나니 이는 우리가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그 앞에서 기뻐하시는 것을 행함이라’.
“우리가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이것은 전적으로 수동적인 의미이다. 이 양자의 영은 내가 하고 싶을 때는 언제나 취할 수 있는 어떤 것이 아니다. ‘받다’라는 말이 '취하다‘는 의미를 가질 수 없다는 피할 수 없는 추론에 우리는 도달하게 된다.
제 16 장 성령의 주권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롬 8:15)
1. 수동적으로 받음에 대한 신약적인 용법
성령을 ‘받는 것’에 관한 교훈을 살펴 보면 모든 진술들은 예외없이 수동적인 의미를 가르치고 있다. 기본적인 진술은 눅 3:16에서 발견되며 다른 복음서의 병행구절에서도 나타난다. “나는 물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거니와 --그는 성령과 불로 너희에게 세례를 주실 것이요”. 전체 교리에 대한 열쇠다. 그 능동성은 세례를 베푸는 사람에게 주어져 있지 세례를 받는 사람에게 주어져 있지 않다.
주님은 세례요한의 말을 인용한다. “요한 물로 세례를 베풀었으나 너희는 몇 날이 못되어 성령으로 세례를 받으리라”(행1:5). “오직 너희에게 성령이 임하시면 너희가 권능을 받고 -- 내 증인이 되리라”(8절).
두 진술에서 주님은 ‘주님’에 강조점을 두고 있다. 그는 그들에게 성령을 보내실 것이다. 그는 그들에게 제공된 것을 그들이 ‘취하다’는 의미에서 그들 편의 어떤 행동을 가리키고 있지 않다.
행 2장의 오순절 사건에서 전체를 꿰뚫고 있는 강조점도 같다. 그들에게 일어난 일에 주어졌다. 성령은 그들에게 보내졌고 그들이 성령을 마시기로 결정하지 않았다. 그들은 수동적인 위치에 있었다. 주님도 받아서 주셨다. “하나님이 오른 손으로 예수를 높이시매 그가 약속하신 성령을 아버지께 받아서 너희 보고 듣는 이것을 부어주셨느니라”. 성령은 주님에게 주어지셨으며 그래서 주님은 그 성령을 우리에게 주실 수 있었던 것이다. “너희가 회개하여 각각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세례를 받고 죄사함을 얻으라. 그러하면 성령을 선물로 받으리니”(행2:38). 성령께서 그들에게 ‘주어진다’는 것이다. ‘받다’라는 동사는 이 문맥에서 능동적일 수가 없다. 분명히 수동적이다.
“우리는 이 일에 증인이요 하나님이 자기를 순종하는 사람들에게 주시는 성령도 그러하니라”(행5:32).
언제나 강조점은 아버지나 또는 주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주심’에 강조점이 있다. 절대로 우리에 대한 능동적인 취함을 강조하지 않았다. 행 8장의 진술들은 이 주제에 큰 빛을 준다. “이는 아직 한 사람에게도 성령 내리신 일이 없고 오직 주 예수의 이름으로 세례만 받을 뿐이러라”(15). 성령이 오순절에 단번에 주어졌다고 가르치는 대중적인 교훈에 따르면 우리는 지금 그저 ‘공기를 마시듯이’ 그를 취하기만 하면 될 것이다. 그런데 전도자 빌립이 그러한 교훈을 알지 못했다. 그저 믿음으로 취하라고 했으면 될 일이지 사도들이 내려갈 필요가 없었을 것이다. “그들이 내려가서 성령 받기를 기도하니” 기도할 필요도 없었을 것이다. 성령을 받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에게 ‘내리시는’ 결과이다 우리가 그를 ‘취하지’ 않는다.
2. 안수
17절, “이에 두 사도가 저희에게 안수하매 성령을 받는지라” 행 11:15, “내가 말을 시작할 때에 성령이 저희에게 임하시기를 처음 우리에게 하신 것과 같이 하는지라” 모든 강조점은 주시는 하나님의 능동성에 있으며 ‘받는’ 자리에 있는 제자들의 수동에 있다. 행 19:6, “바울이 그들에게 안수하매 성령이 그들에게 임하심으로 방언도 하고 예언도 하니” 성령은 우리에게 주어진다. 롬 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성령은 우리에게 주어진다. 계속적으로 사용되는 용어들이, ‘부어지다’, ‘내리다’, ‘넘쳐 흐른다’는 말들임을 주목하자. 어떤 말도 우리가 자발적이고 능동적으로 ‘취하다’는 것을 암시하는 말은 없다. 갈 4:6, “너희가 아들인 고로 하나님이 그 아들을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 아바 아버지라 부르게 하셨느니라”. 요일 2:27,“너희는 주께 받은 바 기름부음이 너희 안에 거하나니”.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른다.
1) 강조점이 언제나 ‘취함’에 있는 것이 아니라 ‘주심’에 있음을 알게 되며 그것은 명백히 수동적이다.
2) ‘믿음으로 말미암아 이것을 취하기로’ 어느 사람이 결정했다는 경우가 한 번도 없다.
3) 안수했다는 사실 자체가 ‘취함’이 아니라 선물을 ‘주심’이라는 점이 이 체험에 있어서 중요한 요소임을 강력히 암시한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것은 이 선물이 안수하는 사람들을 통해서 임하여지도록 정하셨다. 이 안수하는 사람들은 다른 사람에게 안수하여 선물을 주는 능력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었다. 손이 그들 위에 얹혀지고 그들은 수동적으로 그것을 받는다. 그것이 로마서 8:15의 ‘받는다’는 말의 의미이다.
3. 성령의 주권
우리가 성령을 ‘취할 수’ 없다. 성령은 인격이시오 주권적인 주님이시다. 고전 12장에서 그 점을 강조하고 있다. 성령께서 그 뜻대로 각 사람에게 나눠주신다(11절).
칭의마저도 그런 식으로 ‘취해지지’ 않는다는 것을 상기하자. 일반적인 주장은 이렇다. “여러분이 믿음으로 의롭다 함을 받았듯이 믿음으로 또 다른 축복을 취하라”. 그러나 칭의는 사람이 원할 때는 언제나 취해질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하나님이 행하시는 일이요,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이다. 그 점을 잊지 말자. 우리의 칭의마저도 주어지는 것이며 그것은 믿음이라는 도구를 통해서 우리에게 임하는 어떤 것이다. 그리고 믿음은 통로 이상의 아무것도 아니다. 칭의를 붙잡고 있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다.
오히려 칭의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에게 임하는 것이다.
우리를 의롭다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 아니라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우리가 의롭다 함을 받는 것이다. 믿음이 홀로 있는 일은 없다. 믿음은 결코 혼자 있지 않다. 롬 10:8-10를 잘못 해석하는 사람들이 많다. "그러면 무엇을 말하느뇨 말씀이 네게 가까와 네 입에 있으며 네 마음에 있다 하였으니 곧 우리가 전파하는 믿음의 말씀이라 네가 만일 네 입으로 예수를 주로 시인하며 또 하나님께서 그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것을 네 마음에 믿으면 구원을 얻으리니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하여 구원에 이르느니라" 만일 사람이 “예, 나는 주 예수 그리스도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내 죄를 위해서 죽었음을 믿습니다” 라고 말하면 그는 그 말을 통해서 구원을 받는다고 한다.
그러나 성경은 그렇게 말하지 않는다. 너희 존재 전체를 드려서 믿으면 구원을 받는다는 것이다. ‘마음’이라는 것은 인격의 중심이다. 그것은 느낌만이 아니고 전인의 중심이다. 만일 사람이 자기 마음으로 이 진리를 믿으면 그의 전체 삶은 그것에 의해서 지배를 받게 될 것이다. 그 다음에 ‘너희는 구원을 얻으리라’고 말할 수 있다. 이 느낌의 요소가 수반되지 않으면 참된 믿음이 아니다. 그러한 요소가 없으면 그것은 지적인 승인에 불과할 것이며 ‘역사적 믿음’에 불과할 것이다.
우리는 진정한 믿음을 위한 여러 가지의 전제들에 대해서 그저 순전히 지적인 태도로만 그것을 승낙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믿음은 깊은 것이다. 사람이 참된 믿음을 정말 가지고 있다면 자기 영혼 속에서 안식을 체험하지 않을 리가 없다. 롬 5:1은 “믿음으로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으로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고 한다. 평화와 안식에 대해서 무엇인가 알기까지 자기가 믿음을 가졌다고 말하지 않아야 한다. 그러므로 ‘그저 믿음만’이라는 말에 관해서 매우 주의해야 한다.
참된 믿음은 느낌을 수반해야 하며 지적인 이지뿐만 아니라 의지까지를 수반해야 한다.
‘행위가 없는 믿음’은 죽은 것이다.
4. 받은 자들은 알았다.
신약성경에서 성령의 선물을 받은 사람들의 경우에 언제나 강한 느낌을 수반하고 있으며 그들이 그것을 받았음을 의식하게 된다는 사실을 강조하고 있다. 다른 사람도 그것을 안다. 오순절날의 사도들을 보라. 그 이후에 기독교의 역사 곧 부흥시대에서나 개인적인 경우에서 보편적으로 그러하였다. 우리는 성령의 ‘세례를 받거나’, ‘충만해질 때’ 그것을 결코 모를 수가 없다. 우리가 전혀 아무 것도 느끼지 않을 수 있다고 설득하는 그 교훈은 전적으로 성경의 교훈에 위배될 뿐 아니라 수세기에 걸쳐서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체험기록과도 전혀 부합되지 않는다.
제 17 장 성령과 말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라(엡 6:17)
1. 성령의 검의 특징
적의 특정한 방식의 공격을 물리친다기 보다는 적을 ‘송두리채’ 물리친다. 적 자체를 제압하는 것을 도와준다. ‘공격적’인 무기이다. 검은 공격과 방어라는 이중의 목적에 쓰인다. 그것으로 “마귀를 대적하라 그리하면 너희를 피하리라”(약4:7). 우리가 그를 물리칠 수 있는 것이다. 마귀는 우리 안에 공포와 무력감이 생기게 한다. 검에 대한 바울의 말은 그런 감정에 대한 궁극적인 구제책이다. 신약성경은 우리가 마귀에게 두려운 마음으로 위축되어서는 안되며 그를 대적할 수 있는 우리의 능력을 확신해야 한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이것은 마귀에 대한 무모함이나 마귀를 우습게 여기도록 하려는 것이 아니다. 벧후 2:10과 유다서의 경고를 기억해야 한다. “영광있는 자를 해방해서는 안되며” “마귀를 거스려 훼방하는 송사를 하여서도” 안된다. 이 큰 원수의 힘과 능력과 세력을 과소평가해서는 안된다. 동시에 겁을 내어서도 안된다.
우리는 ‘서서’ ‘대적하고’ 이 ‘성령의 검’을 사용하여 마귀가 우리로부터 도망가도록 해야 한다. 우리들이 기독교인이기 때문에 걱정이 없다는 지나친 자신감에 빠져서는 안된다.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 동시에 마귀를 두려워해서도 안되며 그의 거대한 능력과 권세 때문에 완전히 무력감에 빠져서도 안된다.
2. 성령의 검이란 무엇인가?
새영어성경에서 이것을 ‘하나님께로부터 온 말씀’이라고 번역하였는데 잘못된 것이다. ‘성경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이다. 또 하나의 그릇된 해석은 ‘성령이 곧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는 것이다. 성경의 어느 곳에서도 성령이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기록된 곳은 없다. 바울이 말하는 바는, 성령이 여러분에게 주는 검, 즉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붙들라’는 것이다. 주님은 성령이 충만하여 마귀에게 시험받으실 때,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을 인용하여 물리치셨다. 우리 주님께서 사용하신 무기는 하나님의 말씀 곧 성경이었다. 여러분과 나도 마귀와 그의 모든 권세에 대해 똑같은 무기, 즉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가지고 싸워야 한다. ‘성령의 검’이라는 말은 그것을 주신 이가 하나님이라는 것을 의미한다. 검은 모두 하나님께로부터 온다. 성경을 기록한 사람들에게 영감을 주시는 것은 성령이시며 바로 그런 의미에서 ‘성령의 검’이다.
“모든 성경은 하나님의 감동으로 된 것으로”(딤후3:16). 이는 성경이 성령이신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이라는 사실을 확인시켜 준다. “예언은 언제든지 사람의 뜻으로 낸 것이 아니요 오직 성령의 감동하심을 입은 사람들이 하나님께 받아 말한 것임이라”(벧후1:21). 우리는 우리 자신의 힘과 능력, 그리고 생각으로 마귀와 싸워서는 안되며 하나님의 자신의 영이 내신 말씀으로 싸워야 한다. 성령이 성경의 저자이다. 이 말은 성경을 기록한 사람이 기계적으로 썼다는 뜻이 아니라 그들을 택하시고 인도하시고 영감을 주셔서 잘못없이 기록할 수 있는 계시와 능력을 주시는 장본인이 성령이라는 뜻이다.
3. 말씀과 성령의 관계
우리로 하여금 말씀을 이해하고 받아들일 수 있게 하는 것은 오직 성령 뿐이다.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여 하심이라”(고전2:12). 어떻게 사람들이 주를 믿게 되는가?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도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도 생각지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성령은 모든 것 곧 하나님의 깊은 것이라도 통달하시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을 받지 아니하나니 저희에게는 미련하게 보임이요 또 깨닫지도 못하나니 이런 인은 영적으로라야 분변함이니라 신령한 자는 모든 것을 판단하나 자기는 아무에게도 판단을 받지 아니하느니라”
오직 성령만이 우리에게 말씀을 ‘해석’할 수 있다. 그것은 전적으로 성령이 하시는 일이다. 이 말씀에 관계된 모든 일은 처음부터 끝까지가 항상 성령께서 작용하신 결과이다. 육체적인 의미에서 아무리 유능한 사람이라도 그 능력은 성경을 해석하는데 도움이 안된다. 그는 천재이거나 위대한 학자일 수도 있지만 그런 것은 여기서는 도움이 안된다. 진리는 ‘영적으로 분변하는’ 것이다.
성령과 말씀과의 관계는 매우 중요한 관계이다. 그것을 깨닫지 못하였기 때문에 기독교 교회의 오랜 역사속에서 많은 어려움이 있었다. 사람들은 어느 한쪽이나 다른 한쪽만을 강조하려 한다. 성령과 말씀을 나누자 마자 여러분은 어려움에 처하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성령의 빛만 받으면 말씀은 전혀 필요없다고 주장한다. 바로 이 주장이 퀘이커교도들의 비극이었다. 죠지 폭스는 올바르고 균형있게 그의 사역을 시작했었는데 계속해 나가면서 점점 말씀에는 주의를 더 기울이고 ‘내적인 빛’ ‘성령의 조명’ ‘즉시 받는 말씀’에 보다 주의를 기울이려고 하였다. 그것이 새영어성경의 번역 ‘하나님께로부터 온 말씀’이 얼마나 위험한가를 말해준다. 바로 이것이 광신자들이 주장하는 것이다. ‘열성분자’ 곧 광신자들의 모든 견해는 항상 그런 것에 근거를 두고 있다. 또 다른 극단적인 경향은 성령을 무시하고 성경 말씀을 앞에 펴놓고 기계적으로 알기만 하면 더 이상 아무것도 필요없다고 주장하는 것이다. 그러면 성령은 잊혀지고 생명없는 교리와 성경에 관한 단순한 지적이고 이론적인 지식만을 가지게 된다. 그러나 그것은 마귀와 그의 정사와 권세에 맞서 참으로 싸움을 싸울 수 있게 해 주지는 못한다.
성령과 말씀은 항상 하나가 되어야 한다. 성령이 없으면 성경을 이용하지 못한다. 그것은 우리에게 생명 없는 글자일 뿐이다. ‘의문은 죽이는 것이요 영은 살리는 것이다!’ 필요한 것은 말씀을 열어주시고 지성과 감정을 열러주시는 성령이다. 우리는 사도가 그런 것처럼 말씀과 성령 이 두 가지를 합한다면 잘못에 빠질 리가 없다. 그것을 분리해 버린다면 마귀가 벌써 정복하려고 분리시켜 버린 셈이 된다. 마귀는 여러 가지 방법으로 총 공격을 행한다. 태초로부터 진리의 적이었던 철학을 통해 공격한다. 그리스도교회가 치러야 했던 첫 번째 싸움은 헬라 철학과의 싸움이었다. ‘인간은 탐구함으로써 신을 발견할 수 있으며 명상과 이론의 완성의 결과로 진리에 이를 수 있다’고 하는 거대한 철학적 전통과 견해가 있었다. 우리는 아직도 이런 류의 싸움을 하고 있으며 이전보다 더 심한지도 모른다. 철학과 결부된 것은 일반적으로 ‘지식’이라 불리우는 인간이 가진 모든 지식을 말한다. 특별히 ‘과학적’ 지식의 경우도 그러하다. 대부분의 사람들이 기독교를 배척하는 것은 현대의 발달한 과학적 지식에 의해서다. 이 특별한 공격을 격퇴할 수 있는 유일한 길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들고 휘두르는 것 뿐이다. 달리 방어할 방법은 없다.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몸소 하신 것이었다. 예수님을 반대하던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학자들도 그들의 세력이었다.
4. 성경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주님도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들어 율법사를 맞섰다. “율법에 무엇이라 기록되었으며 네가 어떻게 읽느냐”(눅10:26). “성경은 폐하지 못하나니 - 너희가 참람하다 하느냐?”(요34-36). 주님은 항상 그런 방법으로 행하셨다. 오늘날 우리는 모든 계시와 복음의 근본마저 불신하려는 시도에 맞서 있다. 그런 공격에 맞서는 유일한 길이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이라고 바울은 가르치고 있는 것이다.
바울은 선교하며 항상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였다.’ “성경을 가지고 강론하며 뜻을 풀어 --이 예수가 그리스도라”고 했다. 그의 서신들은 구약으로부터 유래된 성경의 인용으로 가득차 있다. 복음서들도 같은 식으로 기록되어 있다. ‘선지자로 하신 말씀을 이루려 하심이라’. 사도들이 행한 그대로 순교자들과 신앙 고백자들도 행하였다. 루터도 항상 성경의 입장을 취하였다. 비록 그가 홀로 선한 개인에 지나지 않았지만 천 이백년이나 된 교황제도의 전통에 맞서 싸울 수 있었다. 그는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붙들고 그런 일을 하였던 것이다 영국의 신교 교부들도 청교도들도 역시 똑같이 하였다.
현대의 신교도들은 철학과 과학과 새로운 지식으로 악과 싸울 것을 주장하지만 그것은 철저한 패배를 초래할 뿐이다 적이 변절시킨 교회이거나 혹은 현대의 지식과 과학과 철학을 가진 이단이거나를 막론하고 기독교의 모든 복음에 도전하는 어떠한 적에 대해서도 싸울 수 있는 방법은 한 가지 뿐이다. 원수와 싸우고, 그를 물리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은 ‘성령의 검 곧 하나님의 말씀’을 붙드는 것이다. 이 검을 들고 성령의 능력 안에서 그것을 사용하도록 하자. 우리가 주님이 이기셨던 것처럼 이기려면 구원의 방법과 우리가 구원을 받았다는 사실을 알아야 할 뿐만 아니라 성경도 알아야 하며 그것을 자세하게 알아야 한다. 누가 우리를 동요시키려 할 때 성경을 이용하는 방법과 가장 효과적인 말씀을 인용하는 방법도 알아야 한다. 잘 훈련된 그리스도인이면 누구든지 자기 자신의 경험으로 이런 것을 알아야 한다. ‘검’이라는 말은 우리 주님께서 시험을 당하실 때처럼 성경을 이용하고 어떤 특정한 문제에 대해 적당한 대답을 할 수 있는 능력에 관계되는 것이다. 검은 우리에게 주어져 있다.
우리는 성경을 알아야 한다. 성경 전체를 알고 있어야 한다. 단지 단편적인 방어의 말씀만을 배우는 것으로는 충분치 않다. 모든 성경을 알아야 한다. 주님께서 신명기를 인용하셨던 것을 보라. 주님은 분명히 신명기 전체를 아셨음을 보여 주고 있다. 우리는 성경 속에 잠겨야 하며, ‘성경에 통달해야 한다.’ 그래야 시험을 당할 때 적당한 말씀이 떠 오를 수 있게 하시고, 직접 말씀을 주시며, 우리를 성경으로 인도해주시는 능력을 우리가 감지하게 된다. 성령은 우리를 깨우쳐주시고 이끄시고 인도하실 것이다. 우리는 몇 구절을 읽고 스스로 만족해 버리거나 하루의 몫을 다 읽고나서 참으로 성경을 공부했다고 생각해서는 안된다. 우리는 성경공부에 시간을 들여야 하며, 깊은 곳까지 파고들어야 하며 모든 성경을 읽어서 성경 각 부분을 아는데 정말로 몰두해야 한다. 그러면 어떤 순간에도 우리는 합당한 대답을 할 수 있게 되며, 마귀는 꺽일 뿐 아니라 쫓겨서 우리로부터 도망할 것이다.
우리 모두 그렇게 하여 주의 영광을 드러내고 주를 찬양하기 위해 성령의 검을 사용하도록 하자.
제 18 장 성령과 기도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고 이를 위하여 깨어 구하기를 항상 힘쓰며
여러 성도를 위하여 구하고(엡6:18)
1. 기도의 필연성
사도 바울은 우리가 하나님의 백성으로서 마귀와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과 싸우며, 투쟁해야 한다는 것에 대해서 강하게 진술하고 있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말은 분명히 우리가 해야 할 것과 또 계속하고 있어야 할 어떤 것이며, 전신갑주를 사용할 때나 싸울 때, 그리스도인으로 마귀와 육체와 이 세상과 투쟁함에 우리의 모든 처지에서 실제로 해야 할 어떤 것이다.
이것은 ‘갑옷’의 한 부분은 아니다. “기도”와 “전신갑주”에 대해서 정확하게 설명했다고 생각하는 찬송이 있다. 죠지 다필드의 ‘십자가 군병들아’라는 찬송가 중 “복음의 갑주 입고 늘 기도하면서 --”이다.
‘모든 부분이 기도로 덧 입은’ 정신과 태도 가운데서 행해져야 한다. ‘갑주’는 ‘하나님과의 교통과 사귐이 있는 가운데서만 사용할 수 있도록 주어졌다’. 우리가 항상 하나님과 생생한 관계에서 하나님으로부터 힘과 능력을 얻지 못한다면 이 모든 부분들이 그 자체로서는 만족을 주지 못할 것이다.
진리의 허리띠, 의의 흉배, 평안의 복음의 신, 구원의 투구, 성령의 검. 이 모든 것을 가지고서도 패배할 수 있다는 것이다. 비록 정통일지라도 충분치 않다는 것. 물론 우리는 정통이어야 하고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가져야 한다. 그것을 갖지 않으면 소망이 없다. 우리는 철학을 가지고 마귀와 싸울 수 없고 이상주의를 가지고도 싸울 수 없다. 오직 하나님께서 주신 진리로만 싸울 수 있다. 그러나 요점은 우리의 힘과 능력으로 그것들을 사용하려 한다면 정통교리를 가지고도 마귀와 싸워서 이길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만으로는 패배히는 생활이고 죽은 생명일 뿐이다. 죽은 정통 교회만큼 비극적인 것은 없다. 그 까닭은 그들이 이 심오한 권고를 망각했다는 것이다. “항상 기도하라”는 절대 필수성이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것을 사용하기 위해서는 항상 “살아있는” 본질인 “힘” 그리고 “능력”이 있어야만 한다. “종말로 너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 지고”(6:10). 바울은 “항상 기도하라”고 한다. 우리가 “주 안에서와 그 힘의 능력으로 강건하여 지는 것”은 이와같이 기도하는 것으로 가능하다. 만일 하나님과 계속 교통하며 접촉하는 가운데 있지 않으면 우리가 갑주를 입고서 했다는 어떤 것도 전혀 무용할 것이다. 우리는 하나님과의 필수적인 친교를 유지해야만 한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기도는 필수조건이다.
신약성경 중에 기도에 대한 언급한 부분은 대단히 중요하다. 우리 주님의 생애 가운데 기도의 예를 보자. 그는 밤을 새워 기도하는 데 보내곤 하셨으며, 하나님께 기도하시려고 새벽 일찍 일어나셔야 했고, 그래서 이 교통을 유지하셨다. 그러므로 제자들에게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될 것”(눅18:1)을 가르쳤다. 그것은 무기력에 대한 강장제이며 무기력을 피하는 바른 길이기도 하다.
우리가 성경의 교훈을 깨달았다는 궁극적인 증거는 기도에 쏟는 양에 좌우된다. 신학은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지만 더욱 나은 신학은 그것이 나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고 알도록 만들어야 하는 것이다. 하나님에 ‘대해서’ 아는 것이 아니고 하나님을 아는 것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8). 만일 나의 모든 지식이 나를 기도하도록 하지 않으면 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지식은 기도하는 것을 뜻한다. 지식의 진가는 그것이 나에게 기도해야겠다는 의의를 깨닫게 하고 그래서 내가 기도에 시간을 쏟고 기도하기를 기뻐하는 데 있다.
마귀는 우리를 지식으로 자만하도록 한 후 공격한다.
2. 기도의 형태
“모든 기도”는 모든 수단과 방법으로 하는 기도를 말한다. 기도라는 제목밑에 속힌 모든 기도를 의미한다. 언제든지 수많은 방법으로 기도하라. 개인적으로 기도해야 하며 공적으로 기도해야 한다. 은밀한 기도, 골방의 기도, 외딴 곳의 기도가 있으며 항상 이런 기도를 시행해야 한다. “함께 기도하는” 공기도, 교회기도, 대중기도가 있다. 소리내어 하는 기도가 있고 말없이 하는 기도도 있다. 기도할 때 꼭 무릅을 꿇을 필요는 없다. 거리를 산보할 때라도 지성과 감성과 영으로서 기도를 할 수 있다. 기도는 규칙있는 의식의 형태이기도 하다. 분명한 질서가 있고 계획이 있으며 순서가 있다. 기도가 형식만 있어서는 안된다. 절규하며 탄식하며 통곡하기도 한다. “성령의 말할 수 없는 탄식으로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은 탄식할 필요가 없으며 그것은 우리가 해야 할 탄식이다.
특별한 형태의 기도가 간구이다. “간구하라”. “탄원”이라고 하는 기도의 한 형태로 확정한 것이다. “구할 것들”을 계속 구해야 한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빌4:6). 일반적인 기도나 특별한 기도가 간구되어야 한다.
3. 성령 안에서의 기도
이것은 참된 기도의 진수이자 생명이며 혼이다. 엡 2:18, “저로 말미암아 우리 둘이 한 성령 안에서 아버지께 나아감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무엇보다도 먼저 “성령 안에서”하는 기도여야 한다. 부정적으로는, 중언부언하는 것은 기도가 아님을 의미한다. 바리새인들은 “말을 많이 해야”만 그것 때문에 들으실 줄로 생각했다. 참된 기도는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그것은 형식과 의식을 의지함과는 반대되는 것이다. 형식과 예식과 의식이 아니라, 우리의 심령이 하나님 앞에 경배하는지 그렇지 않은지가 중요하다. 그것은 바로 성령 안에 있는지 그렇치 않은지를 나타내 주는 것이다.
“성령 안에서”의 기도는 쌀쌀하고 냉냉하고 형식적인 기도와는 상반된다. 본인은 판에 박은 듯한 기도를 좋아하지 않는다. 그것은 굉장히 유창한 기도일 수도 있다. 물론 전능하신 하나님 앞에 아뢰일 때 사람의 용어나 말씨가 대단히 중요한 것은 사실이나, 아무리 완전한 문장과 교리적인 정확도를 기할지라도 그것이 참된 기도를 만들지는 못한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라“는 성령님이 우리 안에서 기도를 주장하시고 조성하시며 기도드릴 수 있고 빌 수 있는 힘을 제공하신다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마땅히 빌 바를 알지 못하나 오직 성령이 우리를 위하여 친히 간구하시느니라“. 성령님은 우리 안에서 이렇게 행하시며 소원을 주시고 생각을 명하시며 기도케 하시고 지도하시며 기도할 수 있는 힘을 부여하신다.
이것이 늘 참 경배가 되게 하고 기도와 찬양이 되도록 하며 우리 안에서는 온화한 심정과 자유스러운 특징을 갖게 한다. 이 세상에서 기도 가운데 있는 자유보다 더 놀라운 것은 없다. 성령이 임하시면 자아가 사라지고 입에서 말이 쏟아져 나오며 여러분은 하나님께 말씀 드리고 있음을 깨달을 것이며 성령님이 우리를 주장하고 계심도 알 것이다. “성령 안에서 기도”를 체험해 본 자는 누구나 그것이 무엇인지를 정확히 알 것이다.
성령 안에 거하는 것은 기도의 가장 중요한 근본 요소이다. “성령 안에서” 기도하는 법을 배우기에 전력을 다하자. 그것 외에 참된 기도가 어디 있겠는가!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성령님께 붙들리는 것, 곧 그가 우리의 지식에 빛을 비추시고 마음을 감동시키며 자유로이 말하게 하고 더듬거리지 않는 표현을 하게 하고 신령한 나라에 속한 것들을 깨닫게 하는 것이다. 우리가 이렇게 되면 영적 원수와 싸울 수 있을 뿐 아니라 “이기고도 남게” 될 것이다.
“쉬지말고 기도하라” “항상 기도하라”고 한다. 고통 가운데 있을 때 뿐만 아니라 언제든지, 일이 잘못되어 갈 때 뿐만 아니라 “항상” 기도하라고 요구한다. 항상 경성하라! 잠에 빠지지 말고 깨어 있어 정신을 바짝 차리고 경계하고 결코 방심하지 말라. 스스로를 일개우고 태만해 지지 말며, 만일 스스로 기도를 게을리 한다고 느껴지거든 스스로를 질책하도록 하라! 잠깐 시작하는 정도에 그치지 말고, 번득 경련을 일으키는 듯한 기도를 하지 말라! 인내를 가지고 견디며 계속하되 결코 기도하기를 멈추거나 쉬지 말라! 항상 기도하고 낙망치 말아야 한다.
우리는 사도 바울의 명령대로 하나님의 전신갑주를 가져야 하고 입어야 하지만 모든 부분이 기도로 무장되어야 한다. 살아있는 기도를 하자. 뜨거운 기도를 하자. 여러분의 지식이 빛을 발하게 하고 성령님께서 형언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지식 속으로 인도하시도록 하자. 모든 기도와 간구로 하되 무시로 성령 안에서 기도하자.
(19장 생략)
제 20 장 성령을 소멸하는 죄(1)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 5:19)
신약성경의 사도행전과 여러 서신서에 나타난 초대교회의 기록은 그리스도의 교회의 생명을 주관하시는 ‘성령’에 대한 기록이다. 최초의 그리스도인들은 성령의 권능과 영향과 지도 아래에 살았다.
성령의 주요 사역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성령의 다른 임무는 주께서 이루신 큰 구원을 전해 주시고 우리에게 적용시키는 일이다.
주님이 이루시고 완성하신 완전한 구원을 우리의 생활과 체험 속에 가져다 주시는 분은 바로 성령이시다. 성령은 우리에게 죄를 깨닫게 하시고 생명을 주시고 믿음을 주셔서 믿을 수 있게 하시고 새로운 품성을 만들어내시며 우리를 중생케 하시며 성화와 여러 가지 다른 방법으로 우리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신다.
바로 이것이 성령께서 하시는 일이기 때문에 마귀의 궤계의 매우 중요한 공격목표가 된다. 마귀의 주된 목적은 하나님의 일을 파멸시키는 것이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에 대한 것이 아니요” 우리를 둘러싸고 있는 “정사와 권세와 이 어두움의 세상 주관자들과 하늘에 있는 악의 영들에 대한 것”이다. 이 권세들의 모든 목적은 하나님의 아들이 성취하셨고 그가 교회 안에서, 우리 안에서, 교회에 속해 온 모든 사람들 속에서 성령을 통하여 이루어가시고 있는 구원의 대업을 망쳐버리는 것이다.
교회사를 통해서 보면 마귀는 우리를 극단에서 극단으로 나아가게 한다.
성령과 성령의 교리에 관하여 우리들은 지나치도록 유도한다. 이 문제를 다루고 있는 서신서는 고린도전서이며 특히 12, 13, 14장이다. 사도 바울은 마귀가 고린도 교인들로 하여금 도가 지나치도록 하는데 성공하였기 때문에 야기된 혼란에 대하여 말하고 있다. 퀘이커 교도들은 내적 조명이라고 부르는 자신 속에 있는 성령 외에는 아무 것도 중요치 않다고 주장했다. 마귀의 궤계의 영향 아래서 그들은 오직 자기들의 느낌과 충동, 그리고 자기들의 영적 감응에 의해서만 살게 되는 극단으로 치우치게 되었다. 그들은 오직 신앙의 주관적인 면의 영역에서만 살아가고 기록되어진 말씀인 성경에는 관심을 기울이지 않았다. 일부는 성경은 필요없다고 하였다. 성령의 저자가 직접 자기들에게 말씀하고 계시는데 수세기 전에 쓰여진 성경을 볼 필요가 없다고 하였다. 그로 인해서 그들은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유일성을 부정하였으며 성경 자체가 영감되었다는 교리를 부정함으로써 자신들과 다른 사람들에게 큰 혼란을 야기시키게 되었다.
오늘날에도 어떤 교회들과 개인들이 이러한 잘못으로 흐르는 경향이 있다. 그들은 마귀의 이런 속성을 분별없이 옳은 것으로 확신해 버린다. 그들은 성경에서 영들을 분별하고 시험하고 검토해보라는 말씀을 깨닫지 못한 것이다. 살전 5:19, “예언을 멸시치 말고 범사에 헤아려 좋은 것을 취하라”. ‘범사’라는 말은 사람들의 마음에 떠오르는 모든 느낌을 의미한다. 적그리스도들이 있고 거짓 영들이 있기 때문에 시험해 보고 분별해 보고 판단해 보아야 한다. “하나님은 어지러움의 하나님이 아니시오, 오직 화평의 하나님이시니라”. “모든 것을 적당하게 하고 질서대로 하라”
오늘에 필요한 말씀은 “성령을 소멸치 말라”는 것이다. 오늘날의 교회의 상태는 대부분 성령을 소멸하는 것 때문에 침체되어 있다고 주저없이 단언할 수 있다. 개개의 그리스도인과 교회들에 대한 기록을 신약성경에서 읽어보라. 그리고 자신과 오늘날의 교회를 비교해보라. 고린도전서가 오늘의 교회에 필요하겠는가? 성령의 부문에 있어서 지나침을 억제해야 할 필요가 있는가? 오늘날 가장 큰 죄악이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라는 것을 깨달아야 한다. 종교개혁과 신앙부흥의 시대의 기록들을 보라. 그들은 초대교회의 유형으로 돌아가고 있음을 알 수 있을 것이다.
우리는 여러 가지로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범하고 있다. 교회는 신약성경에서 가르치고 있는 교회 본연의 자세를 유지해야 한다. 교회가 성령을 소멸하는 일 가운데 하나는 성령에 대한 진리와 성령의 인격과 성령께서 우리 안에 내주하심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주님은 요한복음 14장에서 말씀하셨다. “내가 지금 너희를 보고 너희에게 말하고 있는 것과 같이, 그리고 내가 너희와 함께 있는 것을 너희들이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성령께서 너희와 함께 계실 것이다. 즉 성령께서 너희 안에 거하신 것이다” 이어서 “아버지와 내가 와서 우리가 너희와 거처를 함께 하리라”. 성령께서는 오순절날 교회에 임하셨을 뿐 아니라 믿는 자들인 우리 안에 거하신다. 우리는 언제나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이라는 것을 생각해야 한다. 이 사실을 상기함으로써 죄를 극복해야만 한다.
우리는 성령께서 당연히 우리 속에서 역사하시도록 해야 함에도 그렇게 하지 않음으로써 성령을 소멸한다. 성령을 상징한 것 중에서 불이 가장 자주 사용되어지고 있다. 주님은 성령과 불로써 세례를 주시는 분이시다. 우리는 성령을 소멸함으로써 성령을 근심케 한다. 정상적인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성령으로 충만한 생활이다. 성령 안에서의 생활이다. 성령님이 다스리시고 통제하고 인도하시는 영적생활을 뜻한다.
마귀는 이 일을 못하게 한다. 오늘날 많은 사람들이 교회 밖에 있는 것은 그리스도인들이 성령 있는 이 생활의 능력을 나타내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는 먼저 영적인 교회가 되어야만 한다. 그리고 나서야 교회가 세상에 도전할 수 있다. 마귀의 주된 목적은 우리가 성령을 소멸하도록 설득하는 일이다.
불로 역사하는 성령의 일을 고찰함으로써 성령을 소멸하고 있는가 아닌가를 알아볼 수 있다.
성령은 빛과 깨달음을 주신다. 불이 임하자 베드로는 즉시 성경을 전파하고 강해하였다.
성령은 뜨거움을 주신다. “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은사를 불일듯하게 하라”. ‘불을 부채질하라’는 뜻이다.
뜨거움과 불 그것이 기독교인 것이다. 그 불을 소멸하지 말라. 열을 발산해야 한다.
우리는 너무 점잖고 스스로 억제하며 체면과 예절에 따라 모든 것을 행하고 있다. 그래서 생명이 없고 뜨거움이 없고 능력이 없는 것이다. 그것은 신약성경의 기독교가 아니다. 그토록 많은 사람들이 교회 밖에 있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성경에 나타난 기독교의 본질은 언제나 성령의 임재하심의 결과로 나타나는 뜨거움에 있다. 우리는 사도행전을 읽으면서 그러한 것을 느껴야 한다.
우리는 사도행전 속에서 살아가야 한다. 그것은 영의 세계에 있어서는 가장 훌륭한 강장제이다.
그리스도인의 영은 뜨거운 영이다. 여러분의 믿음이 여러분의 마음을 감동시키고 있는가?
믿음이 얼음장같이 냉냉하고 굳어버린 여러분의 마음을 녹여버리고 있는가?
성령은 확신을 준다. 성령으로 충만된 참된 그리스도인은 자기의 죄를 용서받았다는 것과 자기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을 알고 있다.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다. 하나님의 사랑에 마음에 부어진 것이다! 한 두 방울이 떨어진 것이 아니라 대량으로 쏟아진 것이다. 우리 마음에 성령을 부어 주시는 것이다.
우리들의 마음 속에 그러한 사람이 있는가? 그렇지 않다면 우리는 어느 정도 성령을 소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사랑에 감동하는 사람이다. 여러분이 성령의 불을 마음 속에 간직하고 있을 때면 언제나 하나님을 사랑하는 것이다.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고 있는가”?
성령께서 오실 때는 감사하게 되고 하나님을 찬양하고 그의 영광을 위하여 살고자 하는 마음을 가지게 된다. 우리는 녹아지고 감동하게 되고 사랑하게 된다. 성령의 열매는 스스로 나타나기 시작하는 것이며, 그것은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이다.
우리는 모두 타오르는 불과 같이 되어야 한다. 우리 속에 있는 모든 찌꺼기를 태워버리고, 하나님을 사랑하는 큰 사랑으로 채워져야 하고, 타올라야만 한다. 하나님께서는 우리 중 그 누구라도 마귀가 우리에게 성령을 소멸하거나 그 어떤 방법으로든 설득하도록 놓아두는 것을 절대 금하신다.
우리는 이 불에 대한 어떤 것을 알고 있는가? 만일 모른다면 그것을 하나님께 고백하고 회개하라.
그리고 여러분이 녹아지며 감동을 받아, 하나님의 거룩하신 사랑으로 채우심을 받고,
하나님의 자녀로서 즐거워하고, 장차 올 영광의 소망을 바라보게 되도록,
성령을 주시고,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시라고 하나님께 간구하라.
“성령을 소멸치 말고”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그리고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즐거워 하도록 하자.
제 21 장 성령을 소멸하는 2
“성령을 소멸치 말며”(살전 5:19)
성령이 ‘불’이라면 우리는 그 불을 끄고 있지는 않는가?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범하고 있지 않는가? 불에는 열과 빛 뿐만 아니라 힘의 특성이 있다. 불이 가는 곳은 어느 곳이나 진보와 파괴가 있다. 능력은 성령의 특성이다. 성령은 하나님의 영이다. 대단히 강대한 능력이시다. 그런데도 우리가 성령을 “소멸”하고 “저항”하고 “근심”하게 할 수 있다. 그것은 큰 신비이다. 성령의 능력은 전능하심에도 불구하고 성령께서는 상처입기 쉬운 온순한 비둘기로도 오신다.
“두렵고 떨림으로 너희 구원을 이루라 너희 안에서 행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니 자기의 기쁘신 뜻을 위하여 너희로 소원을 두고 행하게 하시나니”(2:12). 하나님은 모든 그리스도인 안에서 성령(불과 능력)에 의하여 그리고 성령을 통하여 역사하신다. 성령은 우리를 자극하시고 강권하시며 인도하신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생명과 원기와 활기를 주신다. 그리스도인이 아닌 자는 죽은 자요 생명이 없는 자이다. 그들은 살고 있지 않고 다만 존재하고 있을 뿐이며 그것이 오늘날 세상의 비극이다. 하나님의 영을 떠나서는 생명이 없다. “각 사람을 그리스도 안에서 완전한 자로 세우려 함이니 이를 위하여 나도 내 속에서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이의 역사를 따라 힘을 다하여 수고하노라”(골1:28). “그리스도의 사랑이 강권하시는도다”.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생동적이어야 한다. 무기력하다면 그것은 성령을 소멸하고 있기 때문이다.
성령께서는 당신의 능력을 통하여 우리가 살아가고 증거할 수 있는 대담성과 힘을 부여하신다. 성령이 능력이 주어지면, 베드로 뿐 아니라, 교회사를 통하여 비천한 사람들이 큰 증인들이 되었다.
성령께서는 언제나 기도하도록 인도해 주신다. 기도하는 가운데 능력을 주신다. 교회가 왜 그토록 무기력한가? 교회에 기도의 능력이 결핍되었기 때문이다. 교회의 대부흥의 역사를 읽어보라. 그러면 한번도 공중기도를 해본 적이 없는 사람들이 기도하기 시작하고 전에는 기도를 하지 않던 자들이 개인적으로 기도를 시작한 것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이다. 성령께서 능력으로 임하시어 기도할 수 있는 힘을 주시는 것이다.
성령을 소멸치 말라. 기쁨과 찬양과 감사를 하고 있는가? 아니라면 어느 면으로든 성령을 소멸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인들에게는 대단히 큰 책임이 있다. 우리는 교회를 우선적으로 생각해야지 세상을 우선으로 생각해서는 안된다. 교회는 밖에 있는 자들에게 우리가 가장 영광스러운 것을 소유하고 있다는 인상을 주지 못하고 있다. 교회는 이 세상에서 가장 활력있고 감동적인 곳이어야만 한다. 만일 교회가 그렇지 못하다면 우리는 “성령을 소멸하고 있는” 것이다.
1. 성령을 소멸하는 여러 경우들
중생과 성령의 세례를 동일하다고 가르치는 것보다 더 성령을 소멸하는 것은 없다고 확신한다. 중생할 때 성령세례를 받았다면 여러분은 왜 사도들과 그토록 차이가 나며 왜 신약성경의 그리스도인들과도 같지 않은가? 사도들은 오순절 전에 중생하였다. 성령의 세례는 중생과 동일한 것이 아니다. 그것과는 별개의 것이다. 그토록 많은 그리스도인들이 비참하고 불행한 상태에 있는 것은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그들은 “아바 아버지”라고 부르짖는 일이나 “양자의 영”에 대하여는 아무것도 알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들에게는 하나님은 멀리 떨어진 존재이며 사랑하는 아버지로서의 하나님을 알지 못한다. 그들을 그것을 지적으로, 이론적으로만 믿을 따름이다.
1) 성령의 인치심과 보증과 확신과 증거에 대하여 조금이라도 의심한다면 여러분은 성령을 소멸하고 있다. 우리는 “양자의 영”을 받아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는다. “성령께서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 영을 초월하여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신다.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으로 충만하게 하는 성령의 역사가 있다.
2) 그것을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에게만 적용된다고 믿는 자들이 많이 있다. 오순절의 사건은 일회적이며, 두 번 다시 반복되는 것이 아니라고 한다. 그들은 성령을 소멸하고 있다. 베드로는 이렇게 답변하고 있다. “이 약속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우리 주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라” 이 축복은 우리와 자녀와 후손들에게까지 수세기를 통하여 계속되는 것이며 종말까지 계속될 것이다.
교회사를 통해서 볼 수 있는 모든 위대한 부흥운동도 그들에게 대답이 될 것이다.
성령의 역사가 그 당시와 마찬가지로 오늘날에도 가능하다는 것을 하나님께 감사하자.
3) 그것은 몇몇 위대한 성도들에게만 해당된다고 함으로써 성령의 사역을 부인하는 죄를 범하는 자들이 있다. 신약성경 전체에서 이 성령의 능력과 열정의 축복이 어떤 특별한 성도나 설교자나 하나님께서 특별한 방법으로 사용하시고자 하는 어떤 사람들에게만 한정되는 것이라는 말씀은 어느 곳에도 없다. 참으로 감사하게도 그것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들에게” 주신 약속인 것이다.
예배 드릴 때 무엇인가 기대하는 바가 있는가? 우리는 하나님을 뵙고 서로 사람을 만나보기 위해서 모두 함께 모일뿐 아니라, 성령의 은혜스러운 감화를 받으려고 모이는 것이다. 그리고 그것은 우리의 지극히 고귀한 특권이다. 어느 순간에라도 성령께서 오셔서 그곳을 당신의 영광과 임재와 광체로 충만하게 하실 것을 우리는 믿고 그것을 기대하는 것이다. 우리의 모임에 이런 기대가 없다면 그것이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다. 성령과 성령의 사역에 대해 우리의 교리는 완전하고 분명해야 한다.
4) 형식주의는 교회 안에 있는 가장 큰 독이다. 유감스럽게도 형식주의는 오늘날 모든 교회의 모습이다. 형식주의는 로마 카톨릭에서 극도로 발달하였다. 그 화려함과 진행의 순서나 의복 등등의 지극히 세세한 부분에 이르기까지 그 장엄한 의식이 진행되고 있는 동안 사람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고 앉아 있다. 사람들은 실제로 그 예배에 참가하는 것이 아니다.
신앙부흥이 카톨릭에서는 일어나지 않는다. 그들은 할 수도 없고, 할 여유도 없다. 모든 것이 인간들에 의하여 통제된다. 예배는 세목에 이르기까지 연출되어지고 모든 것은 완벽하고 질서 정연하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그리스도의 교회의 모든 종파에서 그런 방법을 모방하고 있다. 이렇게 물어보자. 성령의 자유와 병존할 수 있는 어떤 규정의 예배의식이 있는가?
예배가 형식적이고 기계적으로 반복될수록 성령께서 역사하실 기회가 적어진다. 예배는 아름답고 완벽하지만 성령의 숨결이 어느 곳에 있는 것일까? 소박하고 경건한 목사들이 큰 교회의 담임목사가 되기를 열망하고 있다. 성령이 떠난 것처럼 보인 것은 바로 19세기 중엽에 품위와 고상함과 학문과 지식과 교양에 대한 열망이 교회 내에 만연된 때였다. 인간들이 “성령을 소멸”하기 시작한 것이다. 형식주의는 언제나 성령의 능력과 생명과 자유의 가장 큰 적이다.
이 사실은 우리의 생활에도 적용되어야 한다. 교훈도 알고 말을 유창하게 잘하면서도 그러나 참 생명과 능력과 자유가 없다. 형식적인 그리스도인들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무의식적으로 자기가 아직도 교회 밖에 있는 사람들과는 같지 않다는 것을 감사하는 바리새인들이 되어 버리는 것이다. 자신을 위하여 앞으로 더 매진해야 할 어떤 일이 있다는 것을 깨닫지 못하는 것이다.
우리가 신약성경 안에 있는 생명의 여러 가지 가능성에 대한 가르침을, 번거로운 것이 두렵고 그것이 가져올 결과가 무엇일지 모른다는 두려움 때문에 거부하고 있다면, 우리는 성령을 소멸하고 있는 것이다. 지나침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아무 일도 하지 않는 쓸모없는 그리스도인이 되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우리가 성령께 응답하지 않는다면 우리는 성령을 소멸하고 있는 것이다. 성령께서 오셔서 그의 자비로운 감화로 여러분의 마음을 민감하게 해 주실 때에 성령을 거절해서는 안 된다. 성령께서 오셔서 소생케 하시고 감화하실 때에, 성령께서 여러분에게 성경 공부를 하라고, 기도하라고, 무언가 일을 하라고 촉구하실 때 성령을 소멸하지 말자. 저항하지 말자.
또한 우리 안에 주신 은사를 힘껏 활용하지 않으며 열정적으로 하지 않을 때 성령을 소멸하고 있는 것이다. 어떠한 불도 꺼지기 쉬운 법이다. 가끔 그 불을 북돋아 주어야 하는 것이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여러분의 열정은 식어버릴 것이다. 풀무질을 하고 부지깽이로 재를 제거하여 불이 활활 타오르도록 하라. 뜨거움이 사라지고 능력이 점점 적어져 가고 있는가? 불길을 돋우라. 깨어나라. 그렇게 하지 않으면 성령을 소멸하는 죄를 범하고 있는 것이다.
게으름으로 우리가 가지고 있는 적은 것에 만족하는 것과, 연료를 공급하지 않고 부채질을 하지 않는 것과, 성령께 기회를 제공하지 않는 모든 행위는 성령을 소멸하는 것이다. 여러분이 활동하면 할수록 성령께서는 더욱 충만하게 임재하실 것이며, 자신을 분기시면 시킬수록 성령께서 더욱 여러분을 분기시킬 것이다. 이것이 영적생활의 철칙이다.
오늘날 무엇보다도 가장 긴요한 일은, 개개의 그리스도인들과 모든 교회에, 성령의 능력, 성령의 불꽃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사랑하는 그리스도인들이여, 성령을 소멸하지 말자. 오히려 성령을 갈구하며 성령께 기회를 드리고, 그의 자비로운 인도하심에 자신을 복종시키도록 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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