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성령론」 (홍정식역편), 새순출판사, 1986,2003
이 책은 홍정식목사가,
로이드 존스의 저서, 「로마서강해」, 「에베소서강해」, 「목사와 설교」에서
성령에 관한 내용만을 발췌해서 번역하여 편집한 책입니다.
한가족교회에서 사용했던 요약을 종합하여 회원들을 위해 강의안으로 올립니다.
제 1 장 성령과 신자와의 관계(롬 8:9-11)
Ⅰ성령과 그리스도인
롬 8:9-11,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또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이나 영은 의를 인하여 산 것이니라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의 영이 너희 안에 거하시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은 자 가운데서 살리신 이가 너희 안에 거하시는 그의 영으로 말미암아 너희 죽을 몸도 살리시리라
“그러나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나니,(단정하여) (그리스도의 영이 너희 속에 거하나니),
어느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
그리스도인이라면, 성령이 필연적으로 그 안에 있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인은 ‘육신에 있지 않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그 안에 있기 때문이다.
어떤 부차적인 축복을 받은 자들의 부류를 묘사한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가진다는 것’은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을 의미하며
그리스도인이라는 것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영’ ‘하나님의 영’ ‘그리스도의 영’- 정확히 같은 의미, 삼위일체의 제3위를 가리킨다.
Ⅱ 삼위일체
신격에는 세 인격(격위) 곧 성부 성자 성령이 계시다.
큰 한 위속에 세 위를 강조하며, 하나님은 오직 한분이시다.
구약은 성령이 ‘아버지의 약속’으로 지칭된다.
하나님은 그 백성들에게 그의 영을 보낼 것을 약속하셨다. ‘하나님의 영’
엡 1:13, 그리고 여러분도 진리의 말씀인 구원의 기쁜 소식을 듣고 그리스도를 믿게 되었으며
하나님께서는 이를 확인하는 표로 약속하신 성령을 우리에게 주셨습니다.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서 성령이 보내진 것으로 말하는 진술
요 14:16, “내가 아버지께 구하겠으니 그가 또 다른 보혜사를 너희에게 주사 영원토록 너희와 함께 있게 하시리니”
요 16:7, 그러하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
동방교회와 서방교회가 갈라진 것은 이 문제로 인함이었다.
동방교회는 성령께서 성부에게만 발생하셨다고 한다.
서방교회(로마카톨릭)는 그가 역시 아들에게서도 나왔다고 주장하였다.
“성령께서 아버지와 아들로부터 나오셨다.”라고.
프로테스탄트들은 “성령께서 아버지로 뿐 아니라 아들에게서도 나왔다”고 함으로
서방교회와 의견을 같이한다.
Ⅲ 그리스도인은 어떤 사람인가
1 그리스도인은 ‘육신에 있지 않는’ 사람이다.
더 이상 타락한 본성에 의해서 지배를 받지 않는다.
‘육신’이라는 말은, 타락과 죄의 결과로 성령의 감화가 전혀 없는 사람과 그의 본성을 가리키는 말이다.
롬 7:5, “우리가 육신에 있을 때에는 율법으로 말미암는 죄의 정욕이 우리 지체 중에 역사하여
우리로 사망을 위하여 열매를 맺게 하였더니”
요 14:7, “저는 진리의 영이라 세상은 능히 저를 받지 못하나니 이는 저를 보지도 못하고 알지도 못함이라
그러나 너희는 저를 아나니 저는 너희와 함께 거하심이요 또 너희 속에 계시겠음이라”
19절, “조금 있으면 세상은 나를 보지 못할 터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 이는 내가 살았고 너희도 살겠음이라.”
21절,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 그것은 육신적인 나타냄을 의미하지 않는다. 그것은 성령의 나타냄을 의미한다.
“영에 있나니”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 무엇을 하는 것과는 의미가 다르다.
육신에 있다는 것의 정반대의 의미이다. 우리의 조건이나 지위를 말함이다.
“육신에 있다”는 것도 죄에 빠진 그리스도인을 가리키는 말이 아니다.
그리스도인이 아무리 죄를 많이 짓는다 할지라도 그는 다시 ‘육신으로’ 되돌아가는 일은 없다.
‘육신에 있다’는 것은 하나의 상태요 조건이다. 그리스도인은 더 이상 그런 상태에 있지 않다.
그의 처지가 어떠하다 할지라도 그는 그리로 돌아가지 않는다.
‘영에 있다’는 말은 역시 하나의 조건을 지시한다.
그 말은 그리스도인이 새로운 영역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는 전에 ‘육신’의 영역에서 살고 있었다. 그는 이제 ‘영’의 영역에서 살아가고 있다.
성령이 그를 주관하고 그를 인도하고 있으며, 그는 영 안에서 행하고 있다.
그는 ‘영을 좇아 행하고 있다’.
이것은 회심할 때 일어나는 크고 심오한 변화이다.
그것은 사람의 신념이 변화한 것에 불과한 것이 아니다.
그는 전에 육신의 영역에 있었으나 그러나 이제 그는 영의 영역에 있다.
그는 전에 육신의 지배와 통제를 받고 있었다.
바울은 에베소서 2:2에서 그 점을 이렇게 묘사하고 있다.
“그 때에 너희가 그 가운데서 행하여 이 세상 풍속을 좇고”
그러나 그리스도인이 이 세상에 살아있지만 이 세상 풍속을 좇아 행하고 있지는 않다.
그는 이제 영에 의하여 지배 받고 복종받는 영역에 있다.
롬 5:21에서는 은혜의 왕노릇으로 표현하였다.
은혜의 왕노릇은 성령의 왕노릇이며 그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다.
그것은 그리스도인이 속한 영역인데 우리는 더 이상 ‘죄와 사망의 법 아래’ 있지 않다.
이제 새로운 법,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 아래 있다.
그래서 사도바울은 그리스도인은 육신 안에 있지 않다고 말한다.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은 ‘영 안에’ 있다.
더 놀랍고 기이한 것은 그리스도인이 ‘영’에 있을 뿐 아니라 성령이 ‘그 안에’ 있다는 것이다.
“만일 너희 속에 하나님의 영이 거하시면 너희가 육신에 있지 아니하고 영에 있나니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고전 6:19, “너희 몸은 너희가 하나님께로부터 받은 바 너희 가운데 계신 성령의 전인 줄을 알지 못하느냐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 거주의 개념 채용.
엡 2장 끝절, “너희도 성령 안에서 하나님의 거하실 처소가 되기 위하여 예수 안에서 함께 지어져 가느니라”.
딤후 1:14, “우리 안에 거하시는 성령으로 말미암아 네게 부탁한 아름다운 것을 지키라”.
롬 8:10,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시면--”
요 14:23, “사람이 나를 사랑하며 내 말을 지키리니 내 아버지께서 저를 사랑하실 것이요
우리가 저에게 와서 거처를 저와 함께 하리라”
‘거처를 삼는다’는 말은 그와 함께 ‘가정을 이루리라’라는 말이다.
하나님의 영이 그리스도인 속에 거하신다.
삼위 하나님 성부, 성자, 성령이 일체이기 때문에
성령의 말미암아 우리 속에 아버지 하나님과 성자 하나님이 함께 거하시고 포함되신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기쁨이여! 어떤 것이 그보다 크다고 생각하는가 !
우리만 그리스도 안에 있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도 우리 안에 계신다.
“이제는 내가 산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신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몸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 2:20).
포기한 것, 잃은 것, 손해본 것을 보라고 세상은 말한다.
세상은 성령을 받을 수 없고 그를 알지 못하며 이해할 수도 없다.
그를 거절했고 십자가에 못박았다.
계3;20,- 문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이렇게 말씀하고 계실지 모른다.
“어째서 너는 나와 교제를 즐기기를 싫어하느냐? 나는 너와 함께 먹고 더불어 교제를 나누기를 원한다”.
이것은 그가 이미 거기에 계시기 때문이다.
이것은 무엇이 우리에게 해당되는 진리이고 가능한 것인가를 깨닫게 하는 주님의 호소이다.
마귀가 공격할 때, 침체시키려 할 때, 피곤하고 지쳐 있을 때, 신앙에 회의가 올 때,
해결책은 단 하나이다. 여러분 속에 살고 있는 이가 누구인가를 기억하기만 하라!
죄의 유혹을 받을 때, 우리의 몸이 “성령의 전”인 것을 기억하라.
너무 소극적으로만 생각하여 자주 실패하였던 것이다.
“나를 이 죄에서 구해달라고 기도하고 있어요--”하는 사람.
사실상 필요한 것은 성령이 자기들의 마음 속에 거하고 있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다.
그것이 마귀를 대적하는 방식이다.
성령이 거하시는 몸을 남용하고 잘못 사용하는 것이 어려울 것이다.
이 사실을 숙고하는 데 시간을 많이 보내자. 매일 상기하자.
확신과, 그리스도인 삶을 즐기는 참된 비밀, ‘넉넉이 이기며’ 남을 돕는 비결이다.
2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것이 아니고, 그리스도께 속해 있지 않다.
고전 6;19, “너희는 너희의 것이 아니라 값으로 산 것이 되었으니”
요 17:6, “저희는 아버지의 것이었는데 내게 주셨으며”
우리가 누리는 모든 축복과 은혜들은 우리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온 것이다.
아무 것도 ‘우리를 그 손에서 빼앗아 갈 수가 없다.’
“내가 확신하노니 사망이나 생명이나 천사들이나 권세자들이나 현재 일이나 장래 일이나 능력이나 높음이니 깊음이나 다른 아무 피조물이라도 우리를 우리 주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하나님의 사랑에서 끊을 수 없으리라”
우리가 그에게 속해 있기 때문에, 그가 우리 속에서 시작하신 일을 계속 이루어 가실 것이며,
결코 중단하지 않고, 실패하지 않을 것이다.
시금석은 “누구든지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니라”. 이다.
어떤 전제들에 대한 신념을 가지고 지적으로 찬동을 했느냐가 아니다.
행위나 공덕의 문제가 아니다.
Ⅳ 그리스도의 영에 대한 그릇된 관점
1 간디는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는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 사람이 아니다.
- ‘가장 그리스도를 닮은 삶을 살았다.’ ‘20세기 중에서 가장 훌륭한 그리스도인들 가운데 하나다.’고.
평화주의자, 무저항주의자. ‘그리스도의 영을 소유한’사람?
- 그는 기독교를 공개적으로 반대하였다. 그는 힌두교인이었다.
알버트 슈바이쳐- ‘20세기의 가장 위대한 그리스도인’? 그리스도의 영이 그를 인도한 것 아닌가?
국제연맹을 세운 길버트 머레이교수- 기사 제목은 “성도 길버트!”
합리주의적인 불가지론자. 그는 공개적으로 노골적으로 하나님을 믿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지 않으며, 초자연적이나 기적을 믿지 않는다고 하였다.
그러나 그의 삶 속에서 그리스도의 영을 보지 않는가?
바울은 ‘그리스도의 정신’을 ‘붙잡으라’고 말하지 않는다.
‘그리스도처럼 사는 삶’이라 부르는 삶을 살라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영이 여러분 속에 계셔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영은 오직 더 이상 육신과 세상에 속하지 않은 자들 안에만 거하고 있다는 것.
오직 성령으로 중생한 자들에게 있으며, 중생하였기 때문에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로 믿으며,
그의 속죄 죽음과, 사도의 메시지 전부를 믿는 이들 속에서만 거하는 것이라는 의미이다.
그리스도인 안에 거하시는 성령은 주님 자신의 약속대로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기 위해서 보내심을 받았다.
“그가 자의로 말하지 않고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성령이 하시는 첫 번째 일은 하나님의 아들, 곧 그 인격과 사역을 영화롭게 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만일 사람이 하나님의 아들의 인격을 믿지 않는다면,
그리고 그의 속죄 사역과 그의 모든 다른 일을 믿지 않는다면
그는 전혀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지 못한 사람이다.
그는 매우 멋진 사람일 수 있고, 천성이 매우 착한 사람일 수도 있고,
매우 좋은 사람일 수도 있고, 매우 선한 일을 행할 수도 있다.
그러나 그는 자기 속에 그리스도의 영을 모시고 있지 못한다.
자기 속에 그리스도의 영이 있다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으로 경배할 것이다.
롬 3:25, 26 말씀대로, 자기 죄를 위한 화목제물이 되신 것이 자기를 구원한 것임을 깨닫는 자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 예수님의 피를 죄에서 구원하는 제물로 삼으시고
누구든지 그분을 믿으면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습니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지금까지 참으심으로 그냥 지나쳐왔던 과거의 모든 죄를 오늘날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해결하심
으로 자기의 의로우심을 나타내셔서 자기도 의로우시며 예수님을 믿는 사람도 의롭다고 인정하기 위해서입니다.
그리스도의 영을 모신다는 것은 성령께서 우리들 속에 거하시고 계시다는 뜻이요
더 이상 우리들이 ‘육신에’ 있지 않고 ‘영에 있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우리들이 거듭났으며, 새사람이 되었으며 새 피조물임을 의미한다.
제 2 장 성령이 우리 안에 계신 증거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이라”(롬 8:14)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인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것을 확신할 수 있는 증거의
첫째는, 성령의 인도를 받고 있다는 것이다.
갈 5:17,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고 성령의 소욕은 육체를 거스리나니
이 둘이 서로 대적함으로 너희의 원하는 것을 하지 못하게 하려 함이니라
너희가 만일 성령의 인도하시는 바가 되면 율법 아래 있지 아니하리라
‘소욕’이라는 용어는 ‘강하게 소원하다’, ‘강한 영향을 투입하다’라는 의미다.
육체는 성령을 거스려 강한 욕심을 내고 있다. 성령 역시 육체를 거스려 강한 욕심을 부린다.
우리를 위한 성령의 바램은 우리가 육체의 영향에서 구원받는 것이다.
이 때문에 성령께서는 우리를 인도하시고 지도하신다.
약 4:5, 너희가 하나님이 우리 속에 거하게 하신 성령이
시기하기까지 사모한다 하신 말씀을 헛된 줄로 생각하느뇨
어떤 부모든지 그 부모라면 자녀의 행복과 평판을 위해서 질투를 가지듯이,
사랑하는 애인이 그의 사랑하는 사람의 복락과 명성을 위해서 진력하듯이,
성령께서는 우리를 위해서 ‘질투하여 시기하는’ 성정을 가지는 정도로 그렇게 하신다는 것이다.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들로서 죄와 율법과 사망에서 구속받았다.
하나님께서 또한 우리 속에 그의 영을 두셨다.
우리가 ‘몸은 죄로 인하여 죽은 것’은 사실이며
또한 죽을 몸에 남아 있는 죄가 갈등을 일으키는 원인이 되는 것도 안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리나니” 이 육체의 요소가 우리 속에 남아 있어서
우리의 가장 높은 유익에 대해서 반기를 들고 있다.
그러나 감사하게도 성령께서 그 육체에 대하여 대적하고 있는 것이다.
죄와 마귀에게 이용되는 극악한 영향에서 우리를 구출하고 구원하려고
성령께서는 ‘질투하는 시기’를 가지고 육체를 향해서 대적하고 계시는 것이다.
성령은 우리 속에 계신다. 그는 모든 형태와 모양으로 우리를 괴롭히는 죄로부터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해방을 갈망하고 계시며 우리의 궁극적인 영화를 갈망하고 계신다.
그 목표를 향해서 그는 우리를 인도하여 나가고 계시며
‘질투하는 시기’를 가지고 우리를 위해서 열심을 내시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므로 그는 이지(理智)와 마음과 의지에 역사하신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그를 위한 성령의 이 사모하심에 무릎을 꿇는 사람이라고 말할 수 있다.
둘째로, 내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자녀인 것을 실제로 어떻게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1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다면 나의 보편적이고 전체적인 사고방식을 그로 하여금 주장하시게 한다.
고전 2;12,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께로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하나님의 영의 인도를 받는다면 우리는 본질적으로 인생에 대하여 영적인 사고방식을 가질 것이다.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을 비교하는 첫째 요건은 이 영적인 관점이다.
비그리스인은 ‘육신의 생각’을 가지고 있다. “육신의 생각은 하나님과 원수가 되나니”(롬8:7).
그리스도인은 육적인 사고방식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는 영적인 관심을 가진다.
그는 신령한 일에 맛을 느끼는 사람이다.
그는 그리스도인이 함께 성경을 공부하는 모임을 즐거워한다는 것이다.
영적인 아닌 사람은 영적인 기능을 가지지 있지 않다. 그래서 그는 영적인 생활을 누릴 수 없다.
성경강해에 흥미가 없고 성경을 이해하고 싶은 마음도 없다. 그에게는 그것이 전혀 무의미하기 때문이다.
사람이 이런 일들에 대해서 순전히 지적인 관심만을 가질 수 있는 이면이 있음을 알아야 한다.
그러므로 누구든지 언제나 마음 속에 그 위험을 명심하고 있어야 한다.
영적인 사람은 영적인 생각을 가진 동료를 즐거워하고 그리스도인의 교제와 모임을 좋아한다.
그는 자기의 영혼과 영혼의 운명에 관심을 가진다.
이 생에서 가장 중요한 일은 보는 일이 아니라 보지 못하는 일이다.
고후 4:18, 우리의 돌아보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간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니라
성령을 자기 속에 모시고 있는 하나님의 자녀는 그에게 있어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기 자신과 자기 삶 중에서, 이 감추어지고 눈에 보이지 않는 부분이라고 말할 수 있다.
이 세상에서의 삶이 하나의 순례길이요, 나그네 길이요, 잠시 지나가는 것이라고 말할 수 있다면,
또한 세월이 갈수록 우리들이 참된 영역에 속해 있음을 의식할 수 있다고 말한다면,
우리들은 하나님의 자녀라는 것에 하등의 의심을 가질 필요가 없다.
우리도 한 때 다른 일에 관심을 가졌고, 볼 수 있고 만질 수 있는 것에 흥미를 가질 때가 있었다.
그러나 이제 엄청난 변화가 일어났다. 이제 문제되는 것은 속사람이지 겉사람이 아니다라고 말할 수 있다.
“겉사람은 날로날로 부패한다. 속사람은 날로 새로워진다”고 말할 수 있다.
“우리의 시민권을 하늘에 있다”(빌3:20-21)라고 말한 것과 같다.
고후 5:1, 만일 땅에 있는 우리의 장막 집이 무너지면 하나님께서 지으신 집 곧
손으로 지은 것이 아니요 하늘에 있는 영원한 집이 우리에게 있는 줄 아나니
라고 말하는 것과 같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그런 식으로 생각한다.
나는 여러분이 여러분의 시간 전체를 그런 것으로 생각함으로 소일하고 있는지를 묻고 있지 않다.
다만 여러분이 여러분 자신을 점점 더 영적인 사고방식으로 생각하며
여러분이 이 세상에서 갈수록 격리되어 가고 있으며,
여러분이 속한 영역이 점점 더 중요하게 여겨지고 있느냐를 묻고 있을 따름이다.
만일 여러분이 그렇다고 말한다면 전혀 의심할 필요가 없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자녀이다’.
다른 사람은 아무도 그런 식으로 말할 수 없다.
이것은 참된 그리스도들이 가진 표지들 가운데 하나다.
2. 하나님의 영의 인도함을 받는 사람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고 싶어 한다.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서 사람을 지으셨다.
웨스터민스터 소요리 문답에 있어서 제1문에 대한 대답은
“사람의 제일되는 목적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고 영원토록 그를 즐거워하는 것이다.”이다.
‘육에 속한 사람’, 아직도 ‘죄 가운데 있는 사람’, ‘율법 아래 있는 사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는 삶을 살지 않는다.
처음 사람 아담과 하와는 하나님의 영광을 살다가
마귀의 유혹을 받아 자신의 영광을 위해 살기 시작했다.
자기 최고 관심이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사는 것이라고 솔직하게 말할 수 있는 순간
그는 자기가 그리스도인이며 하나님의 자녀라고 확신할 수 있다. 중생한 사람에게만 그런 일이 있다.
3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더 크게 바라게 된다.
“그가 나를 영화롭게 하리라”, 성령은 주님을 영화롭게 하신다.
성령이 내 속에 계신지 그리고 그것을 확인하는 방법은, 환상을 본다거나 방언을 하는가보다
예수 그리스도를 크게 사모하는가? 그것이 최고의 표준이다. 성령은 언제나 그리스도께로 인도한다.
어디서 이 지식을 얻는가? 신약과 구약에서다.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을 진정으로 추구하는 사람은 성경과 함께 시간을 많이 보내게 된다.
위험은, 성경을 기계적으로 규칙적으로 읽으면서도 주님을 찾고 있는 것이 아닐 수 있다는 것이다.
성령이 하는 일은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을 찾게 하는 것이요
주님과 아버지를 찾아서 내가 이 지식에 친밀해지는 것이다.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아들됨은 기도에서도 나타난다. 성도들의 생애를 기록한 전기들을 읽어보라.
그러면 언제나 그들은 많은 시간을 기도함으로 보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기도할 때 그들의 소망은 그들이 이러한 지식을 가지는 것이었다.
4. 하나님을 위한 자기의 사랑이 부족하다는 것을 늘 염려하고
“주님, 내 사랑이 약하고 연약해서 늘 걱정입니다”라고 말하게 된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그런 관심으로 인도하지 않는다.
우리가 이 부족함을 느끼는 것은 성령이 역사하시는 증거이다. 그래서 최선을 다하게 된다.
5. 자기 속에 있는 죄를 더욱 더 깨닫게 된다.
성령은 빛의 영이며 진리의 영이며 거룩한 영이다. 우리 속에 있는 진정한 상태를 깨닫게 된다. 이런 일은 회심 전에 죄를 깨달을 때 일어난다. 거기서 머물지 않고 그것은 좀 더 깊어진다. 더 완전해지고 순결해지면 해질수록 모든 더러운 것이 더 나타나게 마련이다. 우리 속에 있는 죄 때문에 갈수록 더욱 더 애통하게 된다. 수세기에 걸친 모든 성도들의 간증은 “마음의 흑암이나 마음의 전염병”으로 불렀다.
6. 죄를 지은 것 때문에 고통을 당하는 것으로 괴로워 하게 된다.
그리스도인이 죄에 떨어질 때 그는 슬픔을 느낀다. 그것은 자기가 하나님의 율법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배반하였음을 알기 때문이다. 이것이 하나님의 자녀된 사람의 반응이다. 고린도후서 7장에서 “세상의 근심”과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을 구별한다. ”하나님의 뜻대로 하는 근심은 후회할 것이 없는 구원에
이르게 하는 회개를 이루는 것이요 세상 근심은 사망을 이루는 것이니라“(9,10절).
7. 점점 더 죄와 악과 유혹이 접근하는 것에 대해서 예민해진다.
8. 자기 속에서 의와 거룩을 사모하며 갈망한다.
9. 그 갈망을 행동으로 옮긴다.
“너희가 육신대로 살면 반드시 죽을 것이로되 영으로써 몸의 행실을 죽이면 살리니”(롬 8:13)
몸의 행실을 죽이기를 간절히 원하는 사람은 누구든지 육체에 기회를 주지 않는다.
그는 의도적으로 자기 속에 있는 어떤 요소들을 좌절시킨다. 눈과 귀를 조심스럽게 지킨다..
야고보, “세상과 합하는 것은 하나님과 원수가 된다.”
“세상이나 세상에 속한 것들을 사랑하지 말라. 누구든지 세상을 사랑하면 아버지의 사랑이 그 속에 있지 아니하니 이는 세상에 있는 모든 것이 육신의 정욕과 안목의 정욕과 이생의 자랑이니 다 아버지께로 좇아 온 것이 아니요.” -이것들은 영혼에 해를 끼치는 것들이다.
“사랑하는 자들아 나그네와 행인같은 너희를 권하노니 영혼을 거스려 싸우는 육체의 정욕을 제어하라.
너희가 이방인 중에서 행실을 선하게 가져 너희를 악행한다고 비방하는 자들로 하여금 너희 선한 일을 보고 권고하시는 날에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게 하려 함이라”(벧전2:11,12)
10.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있는지 여부는 성령의 열매를 나타내고 있는가 하는 것으로 알 수 있다.
갈 5장에서 사도는 ‘육체의 일’과 ‘성령의 열매’를 대조시키고 있다.
만일 우리가 영에 인도함을 받는다면 우리는 성령의 열매를 갈수록 맺게 될 것이라는 것은,
밤 다음에 낮이 온다는 것만큼 확실하다.
하나님과 사람에 대한 사랑.
화평. 오래 참음,
자비, “그는 상한 갈대로 꺽지 아니하고 꺼져가는 등불도 끄지 아니하신다”
이것은 의분과 모순되는 것은 아니다. 예수님은 바리새인의 외식 때문에 분노하셨다.
양선, 충성.
온유- 성령의 인도를 주장하면서도 온유와 겸손이 빠진 사람들의 예. 영적인 교만과 자기만족에 젖음.
절제- 자제와 훈련. “나님이 우리에게 주신 것은 두려워하는 마음이 아니요 오직 능력과 사랑과 근신하는 마음이니”(딤후1:7). 근신하는 마음은 절제와 자제와 일관성과 훈련을 의미한다. 근신하는 마음은 충동이나 느낌에 또 가시적인 변동에 흔들리지 않는다.
결론
나는 여러분이 이러한 내용에 대해 완전한가를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이런 일 가운데 어떤 증거라도 여러분 속에서 발견하느냐는 것을 말한다.
작은 증거나 흔적이 있으면 그리스도인이요, 매우 작은 영아요 갓태어난 사람일 것이다.
그것이 시초이다. 그러나 그 시점에서 머물지 말아야 한다.
은혜 속에서 자라고 하나님을 아는 지식에서 자라야 한다. 점점 성숙해가야 한다. 절망감을 갖지 말라.
성령의 인도를 받으면 그렇게 될 것이다. 여러분 속에 가냘픈 빛밖에는 없다 할지라도 그것으로 충분하다.
성령은 ‘질투심’을 가지고 여러분을 갈망하고 계신다.
그의 바램은 하나님께서 자랑할 수 있는 사람이 되도록 하는 것이다.
성령의 간절한 소원은 우리가 하나님께서 자랑할 거리가 되는 것이다.
“모든 사람들에게 알려지고 읽히울 수 있는 살아있는 그리스도의 편지들”이 되자!
제 3 장 성령이 우리를 각성케 하심
엡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술 취하는 것과 비교해서 성령의 충만을 말했을까?
1) 새 생명과 옛 생명의 완전한 대조를 보여주기 위해서
2) 유사점이 있기 때문.
행 2:12-17에 성령에 충만하여 방언으로 말하는 사람들을 “저희가 새 술에 취하였다”고 하였다. “다 놀라며 의혹하여 서로 가로되 이 어찐 일이냐 하며 또 어떤 이들은 조롱하여 가로되 저희가 새 술이 취하였다 하더라 베드로가 열 한 사도와 같이 서서 소리를 높여 가로되 유대인들과 예루살렘에 사는 모든 사람들아 이 일을 너희로 알게 할 것이니 내 말에 귀를 기울이라 때가 제 삼시니 너희 생각과 같이 이 사람들이 취한 것이 아니라 이는 곧 선지자 요엘로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가라사대 말세에 내가 내 영으로 모든 육체에게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성령으로 충만해진 사람들을 술에 취해 있다고 생각했다. 유사점이 있는 것이다.
‘술에 취한’은 ‘술에 흠뻑 취한’ 것을 말한다.
술 취하는 것이 방탕으로 이끌어 주어 방탕에 빠진다는 것을 진술한 것이다.
‘방탕’은 탕자의 비유에서 ‘허랑방탕’과 동의어다. ‘절약’의 반대어.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과 자유분방과 낭비와 결국에는 파멸로 인도한다. 오직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의 뜻이다.
1.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자제하는 생활이요 질서있는 생활이다.
과음은 무엇보다 이해력을 상실케 하고 품위를 일게 하고 판단력과 균형을 잃게 하는 것이 특징이다.
술은 각성제가 아니라 마비제이다.
술을 맨 청음으로 뇌 가운데 있는 모든 것 가운데 고등 중추기관들을 마비시킨다.
그 중추기관들은 사람에게 자율, 자제력, 이해력, 판별력, 판단력, 균형 등
모든 일을 가늠하는 힘을 제공한다.
음주는 갑작스레 조정능력을 제거해 간다.
“근신하는 마음”(딤후1:7).
2. 그리스도인의 생활은 낭비하는 생활이 아닌 생산적인 생활이다.
술 취함은 방탕으로 빠져들게 한다. 또한 허랑방탕과 자유분방과 파멸로 이끌어간다.
시간을 허비하고 그의 정력을 허비한다. 순결과 정조마저 내 팽개친다.
하나님께서 주신 가장 값어치 있는 선물들 중 사고능력과 이성과 계산 능력, 이해력을 상실해 버린다.
그리스도인 생활의 위대한 특징은 우리가 가지고 있는 것을 지키고 세우고 거기에 더한다는 것이다.
언제나 무엇인가를 얻고, 무엇인가 새로운 것을 배우고 있다.
구약성경은 경건한 생활은 “부를 이루는 생활”이라고 한다. 모든 면에서 부요함,
즉 경건한 생활은 실로 우리들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측량할 수 없는 풍부로 인도한다.
신약성경은 그리스도인을 “청지기”라고 한다. 돈의 청지기요 그밖의 모든 일의 청지기이다.
다른 모든 감화는 우리들을 고갈시킨다.
그 반면에 성령은 우리들 속에 능력을 불어 넣는다.
“전도대회 후의 허탈증(the Postj Campaign Exhaustion)"- 성령의 공작같고 언뜻 보기에 성령의 감화같이 보이는 다른 영향이 피곤에 지치게 했고 고갈하게 만들었다.
성령은 지치게 하지 않는다. 그는 우리 속에 능력을 주입시킨다.
성령은 지치게 하지 않으나 사람에 의해 산출되고 써버린 에너지는 지치게 한다.
“이것이 장래에 자기를 위하여 좋은 터를 쌓아 참된 생명을 취하는 것이니라”(딤전6:19).
우리는 세우고 있는가? 자라고 발전하고 있는가?
이 질문은 성령이 우리 안에서 충만하게 계신지 아닌지를 탐색하는 가장 좋은 지표이다.
본성적이고 죄 있는 삶은 고갈되어 아무것도 우리에게 남겨 두지 않는다.
3.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자제하는 삶이요 규모있는 삶이요 생산적인 삶을 말한다.
많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의 생활이란 단순히 부정적인 생활에 불과하다. 그것은 금지의 생활이며
언제나 질서와 절제와 훈련과 조심과 그와 유사한 것들만 강조하고 있다”고 말한다.
아니다. 천만 번이라도 아니다. 그리스도인에겐 ‘취한 사람’이라고 생각하게 할만한 일이 있다.
“이 사람들이 새 술에 취하였다” 이것은 소극적인 삶이 아니다.
오늘날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가장 큰 원수는 착하고 도덕적인 사람들이다.
기독교란 단순한 도덕률이 아니다. 오늘날 기독교가 당하고 있는 어려움들은
근 100여년간에 걸쳐 교회가 기독교 신앙을 설교하지 않고 도덕률이나 윤리를 전했기 때문이다.
기독교는 사람에게 새로운 생명을 준다.
4. 기독교란 고무적인 것이며 힘을 북돋우어 주는 가슴 벅찬 것이다.
술이란 각성제가 아니고 진정제이다. 뇌에 있어서 보다 더 하등한 요소들이 일어나 주도권을 잡는다.
보다 본능적이고 본태적인 요소를 풀어 놓게 한다. 더 동물적이 되고 자제력을 감소된다.
성령은 진정으로 각성시켜 준다. 활동적이고 적극적인 진정한 각성제이다.
우리의 모든 기능을 일으켜 세운다. 마음과 지성을 고무시킨다.
역사는 영적부흥과 각성 뒤에 교육열이 일어났다는 것을 증명한다.
성령처럼 심정의 가장 깊은 곳까지 움직일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다.
성령은 의지를 움직이고 고무시킨다.
그리스도인은 그의 마음이 확장되고 그의 심정이 자라나고 커지는 사람이다.
그는 무언가를 하고 싶어하고 무언가 공헌하고 싶어하고 하나님 나라를 확장하고 싶어하고
다른 사람도 그것을 누리길 원한다.
그것은 전인 즉 지성과 정서와 의지에 감화를 준다. 얼마나 고무적인가?
5. 그리스도인의 삶은 행복한 삶이다. 기쁨으로 충만한 삶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흥미진진하고 행복하고 기쁨이 가득한 삶이다.
구약은 “주를 기뻐함이 너희의 강력이라.”고 한다.
바울은 “주 안에서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리 기뻐하라.”(빌4:4)고 한다.
환난과 시험가운데서도 행복하고 즐거워질 수 있는 삶이다.
“그러므로 너희가 이제 여러 가지 실험으로 인하여 감깐 근심하게 되지 앟을 수 없었으나 오히려 크게 기뻐하도다”(벧전1:6).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1:8).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고 즐거워 하느니라. 이뿐 아니라 환난 중에도 즐거워 하나니”(롬5)
시편 4편, “주의 얼굴을 들어 우리에게 비취소서. 주께서 내 마음에 두신 기쁨은 저희의 곡식과 새 포도주의 풍성할 때보다 더하나이다.”
“내가 너희에게 내 기쁨을 주노라. 아무도 너희로부터 내 기쁨을 빼앗지 못하리라”.
하나님께 감사하자. 사람이 그렇게 할 수 있는 것은 그것이 주의 기쁨이기 때문이다.
그것이 성령이 주시는 기쁨이 되기 때문이다.
6. 그리스도인의 삶이란 명랑한 삶이다.
성령에 충만할 때 서로 사랑을 느끼고 서로에게 관심을 가지고, 긍휼을 가지고 돕고 싶어하고,
주를 찬양하는 영광스럽고 위대하며 쾌활한 정신으로 함께 모이고, 서로 노래로 화답하게 된다.
‘나는 행복하다’는 인상을 주려고 애쓰는 것보다 더 구역질 나는 것은 없다.
그리스도인은 그렇게 하지 않는다. 그는 행복하기 때문이다. 그것이 성령의 각성이요 주의 기쁨이다.
그것은 ‘성령 안에 있는 기쁨’이다.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화평과 기쁨--’이다.
우리는 기독교는 비참한 것이라는 인상을 주는 사람이나, 억지로 기독교란 기쁨과 명랑함과 바쁨 그리고 육신적인 것에 불과한 자기의 과대표현을 하는 사람을 동시에 혐오하고 비난하고 질책해야 한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
제 4 장 성령이 우리에게 능력을 주심
엡 5:18,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윤리는 취하고 교리는 버릴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만큼 비기독교적인 것은 없다.
교리에 연결되지 않은 윤리적 교훈을 신약 어느 곳에서도 발견할 수 없다.
모든 현대적인 가르침의 진정한 문제점은 사람을 타락과 죄의 결과인 차원에서 생각지 않는 데 있다.
성경에 의하면 인간은 정욕과 탐욕의 존재이다. 사람은 이성과 이지의 통제를 받지 않는다.
가인은 아직도 우리 속에 살아 있다.
그런 사람이 그대로 기독교 윤리를 실천할 수 있다고 믿는 것- 그 점이 근본적인 오류이다.
궁극적으로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을 신뢰하지 않아야 함은 전형적인 성경이 가르침이다.
사도 바울은 사람들에게 “피차 복종하라- 남편들과 아내들이여, 서로 바르고 옳은 정신을 가지고
복종하라. 그와 같이 ‘자녀들과 부모들’, ‘상전들과 종들’도 피차 복종하라”고 하지 않았다.
“성령의 충만을 받으라”는 말을 먼저 해 놓고야 그것들을 명한 것이다.
바울이 말하는 것은 그러한 행실이 필수적인 선결조건이 없이는 전혀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사람들은 오늘날 성령을 믿지 않는다. “그리스도인 정신”, “형제애와 자신의 정신”을 말한다.
그러나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도덕률이요, 이교적 교훈이다.
성령을 떠나서는 인간에게 아무런 소망도 없다고 하는 것이 성경의 가르침이다.
1. 성령은 세상에 대하여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해 책망(증거)한다.
세상은 죄를 믿지도 않으니 죄를 깨달아 알 필요가 있다. 성령은 그 일을 하기 위해 오신 것이다.
기독교가 거의 이천년 동안 전하였지만 세상은 죄와 의와 심판을 믿지 않는다.
인간을 믿고 세상 자체를 믿고 인간의 힘과 선을 믿는다. 이것은 그리스도의 가르침과 정반대이다.
성령은 우리의 죄를 깨닫고 책망하고 “그의 피로 말미암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구원을 보여 준다.
니고데모에게 주님은 “사람이 성령으로 나지 않고는 하나님의 나라를 보지 못한다.
너는 반드시 거듭나야 되고 성령으로 나야 된다‘(요3:3-8)고 하셨다.
성령은 인간을 중생시키고 새로운 본질과 새 마음과 새 사고방식과 새로운 모든 것을 주기 위해 오셨다. 그것을 떠나서는 어떤 소망도 없다.
2. 성령은 우리의 성화를 축진시키려고 보내심을 받았다.
다른 이들과 평화를 누리며 살 수 있는 자는 하나님인 성령의 조정을 받는 사람들 뿐이다.
이것이 결혼 문제나 가정 문제, 그리고 산업쟁의를 해결하는 열쇠이다.
3. 성령은 부흥과 신앙의 재각성을 일으킨다.
영국에서 기독교윤리가 사회생활 영역에 최대의 영향을 끼쳤던 시기는 신앙 부흥이 일어났던 뒤이고,
몇 수천의 사람들이 그리스도인이 된 결과였다.
성령께서 “충만하게 역사”하실 때는 하루에 수천의 사람들이 회개할 수 있다.
진정한 그리스도인 생활을 할 수 있는 길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 “성령의 중만”을 받는 것이다.
사람들에게 선해지라고 호소해 보았자 그것은 힘만 낭비하는 것이다.
사람은 그 일을 할 수 없다. 사람은 새로운 본질을 필요로 하며 변화될 필요가 있다.
하나님의 성령만이 그 일을 할 수 있는 것이다. “성령에 충만”할 필요가 있다.
부흥과 영적 소생을 위해서, 하나님의 성령을 능력있게 부어주심을 위해서 기도해야 한다.
“성령, 살아계신 하나님의 성령으로 충만해지십시오”
제 5 장 성령 안에서의 복종
엡 5:21,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이 권면은 18절의 “술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와 관련해서 해석해야 한다. 우리가 피차 복종할려면 술 취하고 방탕한 사람과 전적으로 달라야 한다. 그리고 성령에 충만해져야 하는 것이다. 술취한 사람은 누구에게도 복종하지 않는다. 그는 자신을 내세울 뿐이다. 자신을 자랑하고 뽐내고 자기를 굉장한 사람으로 생각한다.
성령에 충만하면 먼저 하나님과의 관계에서 달라진다. “시와 찬미와 신령한 노래들로 서로 화답하여 너희의 마음으로 주께 노래하며 찬송하며 범사에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으로 항상 아버지 하나님께 감사하며”. 우리가 성령에 충만해 있다면 행복과 기쁨이 있는 유쾌한 만남을 갖게 되고, 하나님을 경배하고 찬양하는 일에 하나가 될 것이다.
성령에 충만하면 인간관계에서도 달라진다. 피차 복종하게 된다. 어떤 의미에서 개인이 아닌 것이다. 성령에 충만하면 함께 노래하며 피차 복종하여 삶에 있어서 끊을 수 없는 관계를 가지게 될 것이다. 한 여단 내에 있는 군인들과 같다. 그리스도인은 한편으로 한 개인이지만 개인으로 머물러 있으면 안 된다. 개인적이 되는 순간 그릇되어진다.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피차 복종하라” 이 길을 추구하는 사람은 결코 개인의 외고집을 부리지 않는다. 앞에서 “지혜 있는 자같이 하라”고 하였고, “그러므로 어리석은 자가 되지 말고 오직 주의 뜻이 무엇인가 이해하라”고 하였다. 지혜로운 사람은 생각하는 사람이다. 그는 뛰기 전에 살피고 말하기 전에 생각하는 사람이다. 지혜있는 그리스도인은 절대로 자기 의견만 내세워서는 안 된다. 자기 의견만 내세우는 사람은 자기가 믿는 대상보다는 자기가 믿는다는 사실에 더 큰 관심을 쏟는 사람이다. 그는 항상 자기만 보고 있다. 그는 자기 신념을 과시한다. 자기 의견만 내세우는 사람들은 언제나 상대방과 충돌한다. 결국 이것은 또 다른 고통으로 연결된다. 사도 베드로는 벧전 5장에서 장로들에게 “주장하는 자세를 하지 말고” 했다.
자기 중심은 언제나 이기주의를 불러온다. 다른 사람에 관해서는 생각하지도 관심을 두지도 않는다. 이런 사람은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는다. 굉장한 모독이라고 생각한다. 자기 중심은 병이다. 이런 사람은 자포자기에 빠진다. 자기가 의심을 받고 있으며 사람들이 자기를 신뢰하지 않아 자기가 말한 것과 자기가 생각하는 것을 하거나 이해하지 않는다고 느끼게 된다. 불행하게도 그는 소외당하고 결국 체념에 이르게 된다.
“피차 복종하라”의 적극적 의미는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이다. 이것은 여러분의 눈이 ‘진리를 향해 열려진다’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어떤 결과를 가져오는가? 우리의 모든 문제들- 개인적이고 특별한 문제들, 결혼과 직업과 전문 직업에 있어서의 상호 관계들, 여러 계급들과 국가 사이의 상호관계에 있는 모든 문제에 대한 해결책을 가져온다.
성령으로 충만하여 우리 이해의 안목이 진정으로 열린다면, 맨 처음 우리가 아는 일은 우리 자신의 진정한 모습이다. 우리는 다 절망적이며 다 길을 잃고 있으며 모두 다 죄인들임을 깨닫게 된다.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다.” 그 말씀이 사실인 것을 아는 사람은 자기를 자랑하는 것을 즉각적으로 멈추게 될 것이다. 자기의 도덕성, 자기의 선행, 자기의 훌륭한 행동, 자기의 학식, 그밖에 자랑하던 모든 것을 자랑하지 않게 된다. 이런 일은 복음만이 할 수 있고 다른 어떤 것은 할 수가 없다. “모든 사람이 죄를 범하였으매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지 못하였다.”
“누가 너를 구별하였느뇨? 네게 있는 것 중에 받지 아니한 것이 무엇이냐? 네가 받았은즉 어찌 받지 아니한 것같이 자랑하느냐?”(고전4:7) 사람을 이 지점까지 인도하는 이는 성령 뿐이다. 성령의 빛에 의해서 나타난 그대로의 진리에 직면하게 될 때 사람은 자기는 초보자이며 어린 아이에 불과하고 실수와 실패투성이의 사람이라는 것을 느끼게 된다.
성령은 우리의 이해를 돕는다. 우리 모두가 한 몸의 지체인 것을 깨닫도록 도우신다. “피차 복종하라” 여러분은 모두 한 몸의 다른 지체들이나 부분들과 같기 때문이다. “너희는 그리스도의 몸이요, 지체의 각 부분이라”(고전 12:27). 부분이 아니라 전체를 생각해야 한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깨닫는 순간 자기의 권리, 자기의 사적인 개인주의적인 모든 권리를 포기할 용의를 가지게 된다. 이제는 전체나 다른 모든 지체들의 발전이나 진보에 관심을 가지게 된다.
요약하면, 그리스도를 경외함으로 다른 이에게 자신을 복종시키는 사람만이 성령에 충만한 사람이다. 성령에 충만한 사람은 성령의 열매를 보여주기 때문이다.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온유와 믿음과 절제”이다. 이러한 특징들로 채워진 사람은 다른 사람을 위하거나 전체의 유익을 위해서 자발적으로 자신을 굽히는 사람일 것이다. 자기의 의견을 주장할 때도 성령의 열매를 가지고 할 것이다.
“술 취하지 말라. 이는 방탕한 것이니 ---” 뽐내지도 말고 과장되지도 무례하지도 말아야 한다.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 사랑을 가지고 진리를 주장하고 설교하고 가르치라,
그리하면 인격적인 관계들이 부드러워지고 사랑스럽게 되고 하나님의 이름이 온 세상에서 영화롭게 될 것이다.
제 6 장 성령세례와 충만이란 무엇인가?
-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는 양자의 영’을 받는 정확한 방식
성령을 모시지 않고는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 성령이 아니고서는 죄를 깨달을 수 없으며
성령이 아니고는 참으로 믿을 수 없다. 성령은 절대적이다.
1. 확신의 형태
구원의 확신의 제1의 유형은 롬 8:14이다. “무릇 하나님의 영으로 인도함을 받는 그들은 곧 하나님의 아들들이다”. 성령의 인도함을 받고 있다고 말할 수 있다면 그는 하나님의 아들임을 확신할 수 있다.
15절의 유형은 더 고차원적인 구원의 확신의 유형. 자기 속에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는 양자의 영을 의식하는 그리스도인이 가지는 확신이다. 매우 특별한 형태요, 유형이다.
성령세례에 대한 두 가지 표증, 두 국면, 두 확신
① ‘아바 아버지의 영’에 의한 확신.- 15절
②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니’- 16절,
성령의 세례 없이도 그리스도인이 될 수 있다. 오순절 날이 이르기 전의 사도들처럼.
2. 성령세례와 충만
양자의 영을 받는 것은 수동적이지 능동적인 것이 아니다. 내가 ‘취해야 하는’ 무엇이 아니다.
엡 5:18의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는, 성령을 받은 후 ‘계속 충만함을 받으라’의 의미이다.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고 그로 늘 충만해 있어야 한다. 우리 자신이 충만해지는데 대한 책임이 있다.
3. 자기설득의 위험
쿠에이즘; 육체의 질병은 없는데 고통하는 사람들을 돕는 방법,
독백하라,“나는 날마다 나아지고 있다고 믿고 느끼고 있으며 더 나아져가고 있다.”
“이 약속이 하나님의 말씀에 있으니 취하라 그것을 믿으라 영접하라 느낌은 문제되지 않는다.
나는 그것을 받았음에 틀림이 없다. 그리고 그것 때문에 하나님께 감사하며 가졌으니 즐거워하고 있으라”
- 거짓 평화, 거짓 해방감, 거짓되이 능력을 가졌다는 생각하는 위험이 있다.
- 암에 걸린 여인.목회자의 아내. 수술하는 것은 믿음이 없는 것, 간증도 했으나, 3개월만에 사망.
- 과거 수 세기에 걸친 성도들의 위대한 영적 체험에 대해서는 알라.
- ‘믿음으로 취하라’는 주장이 ‘아바 아버지로 부르짖 영’의 참되고 깊은 체험을 막는 가장 큰 장애.
4. 심오한 체험
‘부르짖다’라는 말은 겟세마네 동산에서 우리 주님께 대하여 사용된 말이다.
스펄전, “성령께서 우리로 하여금 우리 체험으로 엄격히 입증되지 않는 말을 하지 말게 하소서”.
“우리는 깊은 마음에서 우러나오는 그 부름(아바 아버지!)으로 아버지께 나아갔다. 우리는 그에게 안겼고 우리는 예수의 피로써 가까워졌다.” 토마스 구드윈, “갑자기 아버지가 멈춰서 그 어린 아이를 들어 올려 자기 팔로 껴안고 그에게 입추고 그를 얼어준다.”
5. 괴롭게 하거나, 기다리거나, 안수받는 것으로 되지 않음
우리 자녀들은 수고하고 애를 쓴 다음에 음식을 먹는 것이 아니다. 그냥 먹기만 하면 된다.
‘기다리는 집회’를 믿지 말라. 지치고 약하게 되고 흥분하게 되어 심리학적인 체험을 할 수도 있다.
안수로 받아지지 않는다. 기독교의 전체 역사가 안수가 통상적인 방식이 아님을 보여준다.
6. 갈망과 기도
①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순종의 삶을 살므로써 양자의 영을 사모함을 보여주라.
② 그 축복을 베풀어 주시기를 위해 기도하고 간절히 갈망하라. 탄식하고 탄원하며 울부짖으라.
- 눅 11:13, 마 7:7, “구하라 구하는 자에게 성령(좋은 것)을 주시지 않겠느냐,
시 42:1, ”하나님이여 사슴이 시냇물을 찾기에 갈급함 같이 내 영혼이 주를 찾기에 갈급하나이다“
제 7 장 성령 충만, 그 두 가지 의미
성령의 “세례”와 “충만”은 같은 것이 아니다. 사도행전 2장의 기록은 “성령의 세례”이다.
그러면서 “성령의 충만함”을 내포하고 있다. 엡 5:18의 “성령의 충만함을 받으라”와는 의미가 다르다.
성령세례에 대해서는 다음 장부터 자세히 다룬다. 여기서는 충만의 두 가지 의미를 살펴보고자 한다.
1. 특별한 경우에 주어지는 충만
출 31:2-3에서 브살렐은 특별한 사역을 수행키 위해서 특수한 성령 충만을 받은 것이다.
눅 1;15, 세례 요한에 관한 예언, “저가 모태로부터 성령의 충만을 입을 것이다.”
눅 1:41, “엘리사벳이 성령의 충만함을 입어”, 눅 1:67, “그 부친 사가랴가 성령의 충만을 입어”
행 8:4, “베드로가 성령이 충만하여 가로되” 오순절에 충만된 사람이 특별한 목적을 위해 재충만된 것.
행 4:31, “빌기를 다 하매-- 무리가 다 성령이 충만하여 담대히 하나님의 말씀을 전하니라”
- 이 충만은 여러 번 반복될 수 있는 것이다. 이상의 모든 성령 충만은 아주 선명한 체험이다.
그들은 성령이 자기들에게 임했구나 하는 것을 의식했고, 새로운 능력과 권위로 옷입었다는 것을 알았다. 교회의 위대했던 설교자들, 특별히 부흥시대와 영적대각성시대의 설교자들의 전기를 읽어보라.
설교하고 있던 사람이 갑자기 성령이 자기에게 임하여 자기를 사로잡는 것을 알게 된다.
듣고 있는 사람들도 알아차리게 된다. 이 충만은 하나님의 은혜를 인하여 여전히 계속 일어나는 일이다.
이것이 이 “충만”의 용어가 사용되는 한 모습이다.
2. 생활상의 성령충만
위의 사실이 엡 5:18의 내용을 뜻하는가? 그렇지 않다. 표현의 유사성 때문에 그렇게 여겨질 수는 있다. 엡 5;18의 진정한 의미는 무엇인가? 그것은 하나의 상태나 조건을 묘사한 것이다.
“바나바는--성령과 믿음이 충만한 자라”(행11;24), 제자들은 “기쁨과 성령이 충만하니라”(행13:52)
위 사람들은 특수 임무를 위해 “권능”으로 충만한 것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그들의 일상적인 상태나 조건에 대한 묘사이다. 영적인 “상태”에 관한 묘사이다.
스데반이 택하여 세움을 받은 것은 그가 “믿음과 성령이 충만한” 사람이었기 때문이다.
- 권능과 생활의 둘 사이를 구분하는 것이 중요하다. 우리는 늘 “성령 충만”을 받아야 한다.
그리고 평소에 성령 충만해 있는 사람은 특별한 목적을 위한 성령 충만을 갑자기 받을 수 있다.
- 이제 엡 5;18은 평소의 성령 충만을 지시한다는 것이 분명해진다. 동사의 시상이 현재인데 현재는 계속적인 것을 나타낸다. “계속 성령의 충만한 상태로 있으라- 끊임없이 성령의 충만을 입고 있으라”
임무수행을 위한 충만과는 다르다. 계속적이고 영구적인 상태, 멸하지 않고 변질되지 않는 조건을 말한다. 스데반이나 바나바나 바울이나 다른 사람처럼 “성령 충만”해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3. 성령의 지배
엡 5:18은 철저히 인격적인 차원이다. “술기운으로 살지 말라 성령의 기운으로 살아라”
이것이 본문의 정확한 의미이다. “충만하다”는 것은 “~의 기운으로(감화로) 산다”는 것을 뜻한다.
성령이 나를 조종하도록 하라는 것이다. “계속 성령의 통제를 받으라”와 같다. 체험이 아니고 명령이다.
성령의 통제를 받을 것인지 않을 것인지 결정하고 조종하는 이는 사람 자신이다. 수동적인 개념을 버리라.
4. 어떻게 생활상의 성령의 충만을 받을 수 있는가?
- 성령을 “근심”시키지 말아야 한다. “하나님이 성령을 금심하게 하지 말라”(엡4:30).
내 정욕과 탐심과 악한 소욕에 따라 살지 않아야 한다. 마귀를 대적하고 죄를 짓지 않아야 한다.
- 성령을 “소멸”해서도 안된다. 성령이 내 안에서 깨우치시고 생각들을 거절하고 무시하는 것.
- 성령에 취하면서 술에 취할 수는 없다. “빛과 어둠이 어찌 사귀며”(고후6:14). 몸을 쳐서 복종시켜야 한다. - 적극적으로는 성령께서 우리 안에 계신 것을 인식해야 한다. “너희 몸은 성령의 전이다”(고전6:19).
- 또한 그를 갈망하고 그와 함께 교제하며 교통하기를 간절히 바라야 한다.
- 또한 성령의 지시하심에 극히 유의해야 한다. 안에서 소원을 두고 행하시는 하나님. 기도하는 마음이 생기면 기도하라. 하던 일을 멈추고 기도하라. 그것을 미루지 말라. 성령이 지시에 예민하라.
- 성령의 충만은 하나의 체험으로 받지 않고 인격적인 문제이다. 말씀을 공부하고 말씀에 복종하라.
- 우리의 모든 행동을 말씀의 통제 아래 있게 하라. 그 결과는 성령의 열매 맺는 삶이 될 것이다.
제 8 장 성령세례(인침)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8:16)
Ⅰ 병행구절의 중요성
요 7:37-39, 누구든지 목마르거든 내게로 와서 마시라 나를 믿는 자는 성경에 이름과 같이
그 배에서 생수의 강이 흘러나리라 하시니 이는 그를 믿는 자의 받을 성령을 가리켜 말씀하신 것이라
롬 5:5, 소망이 부끄럽게 아니함은 우리에게 주신 성령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제자들은 오순절 사건 이후부터 완전히 달라졌다. 그들은 성령에 의해 세례를 받았다. 부활하신 주님의 나타나심도 오순절과 같은 획기적 결과를 가져오지 못하였다. 행 4장, 8장, 10장, 19장에서도 반복된다. 신약성경을 선입견 없이 읽을 때 누구든지 초대교회 그리스도인들은 영적인 체험을 가지고 있었으며 현대의 대부분의 그리스도인과는 전혀 다른 두드러진 방식으로 그들을 뛰어나게 하는 어떤 통찰력과 이해력을 가지고 있었음을 명확히 알게 될 것이다.
벧전 1:8,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
Ⅱ 교회사에 나타난 성령의 역사
“바로 그 순간 성령께서 친히 내 영으로 더불어 내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셨다”
그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었고 상당한 구원의 확신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부흥이 일어났을 때 하나님의 성령께서 그들 위에 부어졌을 때, 그들에게 일어났던 일은 너무나 놀라와서 그들이 전에는 전혀 그리스도인 아니었구나 하는 생각을 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갑자기 자기들이 전에는 결코 가지지 못했던 그들과 하나님과의 관계에 대한 절대적 확실성과 확신을 얻게 되었던 것이다.
Ⅲ 성령세례, 또는 인침이란 무엇인가?
성령세례의 가장 핵심적이고 본질적인 진수가 되는 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점에 대한 특별한 확신 형태를 가지는 것이다. 성령 자신의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증거. 이것은 성령의 인침과 같은 것이다.
고후 1:12, 저가 또한 우리에게 인치시고 보증으로 성령을 우리 마음에 주셨느니라
Ⅳ 성령의 직접적 사역
성령께서는 우리의 의지와 마음과 영에 직접적으로 역사하여 우리가 아들이라는 사실을 절대적으로 확신할 수 있게 한다. 이 증거는 ‘영자의 영’과는 다를 뿐 아니라 그것에 대하여 부가적인 것이고 초월적인 영역이다. 받은 자만이 알 수 있다. 이기는 자에게만 주시는 것이다. ‘감추어진 만나’, ‘흰 돌’, ‘새 이름’, ‘새벽별’.
Ⅴ 확신의 최고 형태
확신의 1단계- 순전히 말씀에 의거 논리적으로 하는 확신
2단계- 삶과 체험에 적용시키는 성경 말씀으로부터 오는 확신. 거룩해지고 싶은 마음, 집회를 즐거워하고.
3단계- 내 영 속에서 나로 하여금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게 하는 것.
4단계- 훨씬 더 높고 독보적. 성령 세례. 아들을 갑자기 들어올려 입맞추는 아버지의 행동.
Ⅵ 성령세례의 결과
하나님의 사랑이 마음에 부은 바 되어 더욱 하나님을 사랑하게 될 것이다. 모든 일에 있어서 그를 기쁘시게 하고 그의 계명들을 지키고 어느 것에서든지 그에게 범죄하지 않으려는 열정을 가져다 준다. 그의 법을 높이고 싶은 마음을 가져다 준다. 사도들처럼 하나님에 대한 증인이 되고 싶은 열망으로 가득차게도 한다. 은사를 동반할 수도 있다. 방언이 필수적인 것은 아니다.
Ⅶ 성령 체험은 어떻게 오는가?
성령세례는 성령의 절대적 주권이고 성령의 행동이다. 다양한 방식으로 행하신다. 심리적 체험은 일률적.
어떻게 주어지는지 ‘우리가 전혀 알지 못한다는 것’, ‘들을 수 있는 음성’으로 일반적으로 임하는 것이 아니라는 것,
그러나 비록 그것이 들리는 소리는 아니라 할지라도 그 확신이 귀에 들리는 소리만큼 정확하고 뚜렷하다는 것.
곧 ‘내적인 영의 귀에 성령께서 말씀하심’이다.
말씀을 통해서 성경구절을 통해서 확신이 오기도 한다. 갑자기 그 구절이 책에서 튀어나와 특별한 방식으로 직접
말하는 것같이 보인다. 성경을 읽지 않을 때도 전에 읽었던 성경 말씀이 그의 마음에 밝혀진다.
예배시간에도, 특히 설교의 한 말씀이 자기에게 하는 하나님의 음성이 되는 경우가 있다.
성경을 떠나서 하나님의 영 자신에 의해서 주어진 영 속에서의 내적인 의식으로도 온다. -강조하는 관심.
스펄전, “말씀이나 사역자 없이도 하나님께서는 우리의 마음에 말씀하시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영은 비와 같이 임하시고 안개와 같이 역사하십니다.”
이것은 모든 그리스도인들을 위하여 계획된 일이며,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가능한 일인 것이다.
제 9 장 성령세례가 주어지는 때
롬 8:15-16, 너희는 다시 무서워하는 종의 영을 받지 아니하였고 양자의 영을 받았으므로 아바 아버지라 부르짖느니라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Ⅰ 중생의 때?
성령의 평범한 사역과 성령이 주어지는 때를 동일시하는 사람들은 그런 일이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중생할 때에 일어난다고 주장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이 성령의 세례를 받았으며 또한 성령에 의해서 인침을 받았다고 말한다. 그렇지 않으면 그리스도인일 리가 없다고 주장한다. 이 견해는 공정치 못하다. 성경에 대해서 거짓된 것이다.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우리 영과 더불어 증거하시는 성령의 증거를 알지 못할 수가 있다. 마치 그리스도인이면서도 “아바 아버지라 부르는 양자의 영”을 알지 못할 수가 있는 것과 같다.
사도행전 2장의 사건은 믿은 후 제자들에게 일어난 사건이다. 사도행전 8장의 빌립사역에 있어서 믿은 후에 베드로와 요한이 사마리아에 내려가 안수한 후에 성령을 받았다. 행 19장에도 “너희가 믿을 때에 성령을 받았느냐?” 안수함으로 성령을 받았다.
엡 1:13-14, “그 안에서 너희도 믿어 진리의 말씀 곧 너희의 구원의 복음을 듣고 그 안에서 또한 믿어 약속의 성령으로 인치심을 받았으니”- 분명히 믿는 것과 성령의 인침을 받는 것은 별개이다.
Ⅱ 중생 이후에
고전 12:13, “우리가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종이나 자유자나 다 한 성령으로 세례를 받아 한 몸이 되었고 또 한 성령을 마시게 하셨느니라”- “성령의 세례”와는 아무런 관계를 자기고 있지 않다. 고전 12장의 전체 주제는 그리스도의 몸으로서의 교회이다. 사도는 단순히 모든 그리스도인이 그리스도의 몸의 지체임을 말하는 있는 것이다. 바울은 ”우리 모두는 그 몸으로 세례를 받았으며 우리는 모두 그 몸의 지체요 분참자들이 되었다“는 것이다. 곧 동일한 한 성령에 의해서 그렇게 되었다는 것이다. 교회는 몸이요 모든 사람은 성령의 작용에 의해서 정확히 같은 방식으로 붙어있기 때문이다. 성령의 세례를 주는 것은 성령이 아니요 주 예수 그리스도의 사역이다. 이 모든 혼란은 단순히 ‘세례받다’라는 말이 사용되기 때문이다.
주님은 자신이 인내해야 되는 고난을 가리키면서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 이루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12:50) 하셨다. 롬8:15-16 사이에는 간격이 있다. “믿었고 너희가 약속의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느니라” 두 가지 일이 언제나 구별될 수 있다. 믿는 것이 성령의 증거보다 앞서야 되는 것이다.
Ⅲ 교회사적 증거
300년 전에 청교도였던 존 프레블, 어느날 산책을 하면서 그는 ‘믿음과 소망의 대상들’에 대해서 명상하기 시작했다. 오래지 않아서 그는 마치 하늘로 들림을 받는 것 같이 느껴졌다. 그는 영광의 광체를 받았다. 하나님의 사랑이 그가 시간 세계에 있는지 영혼 세계에 있는지 알지 못할 방식으로 그 마음 속에 부어졌다. 그 체험의 결과로 자기는 “그것으로 전에 읽었던 모든 책들이나 하늘에 대해서 들었던 수많은 강론에 의해서 보다도 그 체험에 의해서 하늘의 빛을 더 많이 이해하게 되었다”고 말하고 있다.
휫필드의 경우, ‘인침’이 체험되기 전에 이미 진리를 믿었고 알았다고 기록하고 있다.
웨슬리의 경우, 진리를 받아들인 지 2개월 후에 모라비안 교도의 집회에서 “이상하게 뜨거워” 졌다.
하웰 헤리스의 경우, 1735년 부활주일에 롬8:15의 전반부의 ‘두려워하는 종의 영’을 체험했고, 성령강림주일에 후반부 ‘양자의 영’을 체험했고, 그 다음 3주 후에 롬8:16의 ‘그의 영과 더불어 증거하시는 성령의 증거’를 체험하였다.
200년전에 위대한 영적 거성 조나단 에드워드, 동일하고도 명백하고 틀림없는 사실을 발견하게 된다.
무디의 경우, 두 부인들의 지적으로 구하기 시작한지 6개월 후에 윌 스트릿가를 걷고 있을 때 성령께서 강하게 그에게 임하였고 그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그의 영에게 증거하였다. 그는 사랑과 능력으로 가득 채워졌다. 목회사역에 있어서 전환점이 되었고 전 세계적인 복음전도자가 되었다.
찰스 시므온, “이 세상에서 받는 더 바랄 것이 없고 가장 큰 것은 성령이 인침이다. 이 확신과 성화의 높은 상태는 믿고 나서 하나님과 계속 동행하는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다.”
찰스 스펼전, “홍수같은 은혜가 필요한 교회들이 수없이 많다. 그 교회들은 헛간 마루장처럼 메말라 있다. 그 홍수는 얼마나 아름다울까! 주님께서 우리 모든 교회들에게 언제나 샘솟는 밀물을 보내시기를 바란다! 그러면 나태한 사람도 활발하게 움직이게 될 것이다. 반은 죽어 있던 자들이 힘이 넘쳐 일어나게 될 것이다. 열심히 있고 관대하고 모든 선한 일과 말 속에 은혜가 넘치게 될 것이다. 그렇게 되기를 간절히 바란다! 여러분 모두가 나와 함께 그 샘물 시냇물을 함께 들이키시기를 바란다! 여러분 속에서 생명수 강수가 흘러나올 것을 바란다. 하나님께서 예수님을 위하여 허락하시기를 바란다. 아멘.”
제 10 장 성령세례의 목적과 특징
롬 8:16,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
1. 성령세례의 목적
우리 주님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자기’를 인치셨다고 말씀하셨다. “썩는 양식을 위하여 일하지 말고 영생하도록 있는 양식을 위하여 하라. 이 양식은 인자가 너희에게 주리니 인자는 아버지 하나님의 인치신 자니라”(요6:27).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을 때에 두 가지 일이 일어났다. 성령이 비둘기 모양으로 그 위에 내리시고, 한 음성이 하늘로부터 나서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고 하였다. 그것이 주님께서 말한 인침이다.
주님은 언제나 하나님의 아들이셨다. 그러나 그가 인치심을 받은 것은 세례를 받을 때였다. 그는 성령께서 내리심으로 인침을 받았다. 우리가 성령으로 인침을 받았을 때 일어나는 일은 우리 주님께 일어났던 것에 비유될 수 있다.
그러므로 그것은 중생을 가리키지 않는다. 그리스도인은 하나님의 자녀요 성령이 그 안에 계신다. “만일 그리스도의 영이 없으면 그리스도의 사람이 아니라.” 성령께서 이러한 ‘인침’이라는 특이하고 특수한 방법으로 임하는 것은 주님 자신의 경우에서와 같이 그것에 대하여 부가적인 것이다. 공생애를 시작하시기 전에 그 사역을 감당하실 수 있도록 자신에 대한 특이한 자신감과 하나님의 관계에 대한 특별한 확신이 주어진 것이다.
성령께서 우리의 영으로 더불어 증거하시고, ‘인치시’기 위해서 이런 식으로 오심은 부가적이고 특별한 일이다. 그것이 가지는 주요 목적은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지위에 대한 절대적 확신을 가지게 하는 것이며 우리로 하여금 주님과 주님으로 말미암아 임한 은혜의 나라에 대한 증인이 될 수 있도록 능력을 갖게 하는 데 있다. 이 일은 이미 신자들이요, 중생하였고 이미 성령이 있는 자들에게 주어지는 것이며, 행해지는 것이다.
2. 성령세례의 특징
① 그것은 분명히 체험적이다. 성령의 세례와 중생을 동일시 하는 사람들은 비체험적이라고 주장한다. 그러나 행 2장에 묘사된 것은 성령의 ‘세례’나 ‘인침’이다. 이미 사도들은 믿는 자들이었고, 이미 중생하였고, 주님으로부터 성령의 ‘내쉼’을 받은 자들이었다. 그것은 제자들에게 자기들의 구원과 소명에 관한 절대적 확실성과 확신을 가지게 하기 위함이었다. 또한 그들이 주님의 증인으로 나갈 수 있도록 능력으로 충만케 하기 위함이었다. 우리도 마찬가지다. 이 확신의 목적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하나님의 후사임을 우리 자신이 확신할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그런데 그것이 어떻게 비체험적일 수 있겠는가? ‘성령의 인침’의 목적은 다만 우리로 하여금 우리의 기업에 대하여 확신케 하려는 것이다. 그것은 장치 올 좋은 일에 대한 보증이요, 계약금이며 그것은 본질적으로 체험이다.
② 그것은 큰 기쁨과 하나님께 대한 사랑으로 인도하는 체험이다. 이 사실을 빠트리고 이 체험을 말하는 곳이 성경에는 전혀 없다. 행 2장에서 명백하게 나타난다. 누구든지 성경상의 인물들 속에 있는 넘치는 기쁨을 느낄 수 있다. 그것은 그들로 하여금 환경을 초월하게 하고 그들에게 거룩한 담대함을 가지게 하였다. “예수를 너희가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이제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벧전1:8).
③ 성령의 증거는 은사나 현상을 동반할 수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 행 2장의 현상들이 이 체험의 본질적인 부분은 아니다. 그 체험을 어떤 차원 속에 국한 시키지 않도록 매우 주의해야 한다.
④ 매우 중요한 요점은 이 체험의 정도에 관계된다. 이 체험의 깊이를 부지불식간에 정형화시키려는 경향에 빠지기 쉬운데 그것은 실로 위험한 처사이다. 우리는 그렇게 할 권리가 없다. 우리가 말할 수 있는 것은 다만 그 깊이나 정도가 상당하게 다를 수 있지만 그 체험 자체는 언제나 분명한 것이라는 점이다. 그래서 간증을 조심해야 한다. 매우 강력하고 극적이어야만 이 체험을 한 것이 아니다.
⑤ 이 체험의 영속성의 문제다. 그것을 한 번 받으면 언제나 그것을 지니게 된다고 생각하는 자들이 있다. 그러나 그것은 대단한 잘못이다. 이런 경우를 나는 경우를 들어 본 적이 없다. 어째서 영구적이 아닌가? 성령이 인격이시기 때문이다. 이 체험을 말하는 문헌들을 보면 이 체험은 왔다가 가버리는 것이 틀림없다. 그러나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그것을 한번 받으면, 그것에 대한 기억이 살아 있는 동안 늘 떠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기억을 상실할 수는 없어도 그 즐거움은 상실할 수도 있다. 시험으로 말미암아 낙담해버리는 것 같은 어둡고 비참한 오염들 속으로 빠져들어 갈수도 있다”(필 포트). 이 체험은 성령을 ‘근심시키고’, ‘소멸하는 죄’로 인하여 상실될 수 있다. 성령께서 아무리 강하게 임하셔서 그 사람의 영과 더불어 승리하셨다 할지라도 만일 사람이 죄에 빠진다면 이 증거가 계속될 것이라고 기대할 수는 결코 없다. 그리고 이
체험을 전혀 경험하지 못하는 그리스도인들도 많다는 것이다.
감사하게도 그것이 반복될 수 있고 여러번 되풀이 될 수가 있다. 그 체험은 우리의 천부께서 어느 특별한 경우에 베풀어 주는 잔치와 같다(필립 다드릿지). 매일 잔치를 벌인다면 그것은 잔치가 아닐 것이다. 우리는 매일 일용한 양식으로 밥을 먹는다. 그러나 우리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서 파티를 준비하신다! 그것이 바로 이 문제를 바라보는 매우 훌륭한 자세이다.
3. 누구에게 주어지는가
행 2:39, “이 약속은 너희와 너희 자녀와 모든 먼 데 사람 곧 주 우리 하나님이 얼마든지 부르시는 자들에게 하신 것이니라.” 신약의 서신들은 그것이 그 당시 모든 그리스도인들에게 일반적인 체험이었다고 단정하는 것 같다. “그들이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한다.(벧전1:8). 그것은 모든 이들에게 열려져 있다. 사도들 뿐 아니라 모든 평범한 신자들에게 가능하다. 그것을 체험하기 위해서는 먼저 믿음이 있어야 한다. 그 체험은 그 믿음을 확신케 한다.
제 11 장 성령세례에 대한 간증들(역사적 고찰)
요한이서, ‘영을 다 믿지 말고 오직 영들이 하나님께 속하였나 시험하라’고 한다.
영적인 증거와 간증을 다룰 때에 거짓된 체험에 빠지지 않도록 조심해야 한다.
17,18,19세기의 탁월한 신앙인들의 남긴 저작물에 기록된 간증을 살펴보는 것이 좋을 것이다.
많은 사람들이 이 체험에 대해 생소하고 이상하게 생각하며 무시되고 망각되어 왔다. 오늘날 교회들에서 나타나는 상태의 원인은 이 교리를 무시한 데 있고, ‘그것을 믿음으로 취하라’는 거짓된 교회의 영향이라고 생각한다.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중생할 때 성령의 세례를 받으며 비체험적이라고 한다.
1. 17세기 스코틀렌드의 존 낙스의 후계자 로버트 부르스의 전기인 <로버트 부르스의 생애>라는 책의 기록이다. “그리스도의 부요한 보화들이 내게 열렸다. 그의 영이 참된 기쁨과 영적이고 고상한 빛으로 뿐만 아니라 내 속에서 공공연하게 음성으로 내게 증거하셨다. 그 음성이 어찌나 분명하게 들렸는지 눈물이 왈칵 쏟아졌다. 나의 죄됨을 깨우쳐 줌으로써 곤고한 나에게 그러한 은혜로운 말씀을 부어주시는 방식에 감탄하게 되었다. --같은 달 둘째날 나는 분명하게 또 다른 성령의 지지를 얻었는데 성령께서 어찌나 강하게 내 영에 증거하시는지 소리가 들리는 것 같았다. 그래서 나는 엄위하신 그 분이 어쩌면 그렇게 작은 일을 그렇게 크게 보시고 그렇게 작은 섬김을 그처럼 많이 보시는가 하는 데 감탄할 뿐이다.”
2. 존 프레스톤의 경우, 그는 위대한 지성을 지니고 있던 사람이었으며 석학이었다. 그의 에베소서 1:13의 인침을 이렇게 설명했다. “성령의 인침이나 증거가 무엇이냐?는 의문을 가질 것이다 내 사랑하는 이여, 그것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것이다. 그것은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임을 확증시키는, 말로 할 수 없는 확신이요 하나님의 빛에 대한 나타냄이시다. 또한 하나님이 우리를 받으셨으며, 죄를 사해 주셨다는 확실하고 은밀한 확증이다. 받는 자 밖에는 알 수 없는 것이다. ‘누구든지 내 음성을 듣고 문을 열면 내가 그에게로 들어가 그로 더불어 먹고 그는 나로 더불어 먹으리라’(계3장) 그와 함께 거하시겠다는 것이다.”
“계 14:21, ‘나의 계명을 가지고 지키는 자라야 나를 사랑하는 자니 나를 사랑하는 자는 내 아버지께 사랑을 받을 것이요 나도 그를 사랑하여 그에게 나를 나타내리라’ 그는 그러한 사랑과 화평의 표현을 가지게 되어서 평화와 기쁨, 그 사람 밖에는 알 수 없는 그러한 것을 갖게 될 것이다. 이것이 성령의 증거다. 이 영은 물과 피로 씻음을 받은 뒤, 신자가 되어 정결케 한 뒤에 오는 것이다. 앞서 오는 것이 없다면 (아무리 크고 화려한 체험을 했을지라도)그것은 잘못된 것이다. ‘먼저 문을 열면 들어가겠다!’이다.”
“주께서 자기의 순전한 말씀을 믿고 의탁하는 것을 보실 때 주님은 그 사람과 더불어 한 단계 나아가서 약속의 성령으로 같은 일을 그에게 인친다. 말하자면 하나님께서 자신의 영으로 인간의 영혼을 향해서 ‘나는 너의 구원이로다’라고 말씀하시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가 어떻게 표현할 지 알 수 없는 성령이 인간 영혼을 향하여 하시는 확실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그것이 ‘감추인 만나’로 불리우기도 하며 ‘흰 돌’이라 불리우기도 한다.”
3. 청교도인 토마스 홀튼의 경우, 1674년에 그는 로서 8장에 대한 46편의 설교를 출판한 적이 있다. “그 증거가 실상으로 충만하게 나타나고 그것이 영혼에 머물러 있는 한 모든 유혹은 침묵하게 되며, 아무리 어떠한 의심과 회의가 있더라도 그 모든 것을 제거하며, 우리의 심령을 완벽한 안식상태에 고정시켜 준다. 그것은 은밀하고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어떤 것이고 그러면서도 동시에 확고하고 틀림없는 것이다.”
4. 17세기 설교자 윌리암 구드리의 <그리스도인의 위대한 관심>에서, “나는 성경에 따라서 그의 백성들 가운데 어떤 사람들에게 때때로 허용되는 성령의 교통하심이 있다면 그것은 아들됨의 증거를 훨씬 초월하는 것은 아니라 할지라도 어딘지 그것보다는 뛰어난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은 영혼에 대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확신이요, 마음에 하나님의 사랑을 부어주는 것이다. 그것은 느껴지는 것이다. 그것을 들리는 소리가 없다. 그러나 그것은 빛과 생명과 사랑과 자유이신 하나님으로 우리 영혼을 채우는 영광의 광선이요 그것은 저 들리는 소리인 ‘너는 크게 은총을 입은 자라’(단9:23)는 말에 상응하는 것이다. 이것은 가장 고차원적인 의미에서 ‘기업의 보증 또는 첫 열매라고 불려질 수 있는 정도의 영광의 빛이니이다’(엡1:14). 왜냐하면 그것은 현재적이고 거룩한 하나님에 대한 느낌이고 발견이며 알려주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현재에 나타난 확증 이외에 모든 것이 잊어질 정도로 그 충만한 것에 사로잡히는 것이다. 이 성령의 확증은 얼마나 영광스러운가! 여기서 믿음은 임재 속으로 용해되어 들어간다. 이것은 느껴질 수 있는 임재라는 칭호를 받기에 가장 훌륭한 것이다. ‘사랑 안에 두려움이 없고 온전한 사랑이 두려움을 내어 쫓는다’(요4:18)라는 말씀이 해당된다.”
5. 경건한 청교도인 리차드 십스, 그는 ‘하늘나라 십스 박사’라 불리웠다. 매우 지성적인 그는 <인봉된 샘>이라는 저작에서, “우리의 영이 성화되었다 하더라도 교묘하게 밀려오는 시험을 버릴 수가 없을 때가 있다. 곧 범죄에 대한 가책이 흔히 보혈의 증거를 넘어설 때가 있다는 말이다. 그래서 성령의 즉각적인 증거가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을 증거하기 위해서 필요한 것이다. 특별히 우리에게 ‘나는 네 구원이로다’(시35:3) ‘네 죄사함을 받았느니라’(마9:2)고 말씀하심으로 증거하시는 것이 필요하게 된다. 그 말씀이 증거가 되어 말로 할 수 없는 기쁨으로 마음이 격동되고 위안을 받게 된다. 그래서 우리의 영과 양심 또한 그리스도의 영이 하나가 되어 은혜 안에 있는 우리의 지위, 곧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임을 강력하게 증거하신다. 성령은 물과 피로 행하신다. 그리스도에게 속한 것은 무엇이든지 성령을 통해서 우리에게 적용되는데 그러나 이러한 증거들로 증거하시는 외에 성령께서 영혼을 크게 하시는 방법을 통한 직관적인 증거를 행사하신다.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의 사랑과 그리스도께서 영혼을 해방시킨 것을 아는 기쁨이다. 그래서 ‘말로 할 수 없이 영광스러운 기쁨’ 일어나게 되고(벧전4:7)‘모든 지각에 뛰어난 평강’이 오게 되는 것이다(빌4:7).”
6. 17세기에 뛰어난 신학자 에드워드 엘톤은 1623년 로마서 8장에 대한 일련의 설교들을 묶어서 책을 냈다. “성령의 증거는 세밀하고 말로 할 수 없는 성령의 영감이라고 간주한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내면적으로 은밀하게 말로 할 수 없는 방식으로 하나님이 우리의 아버지임을 깨닫고 확신케 하시고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달콤한 의식과 느낌을 준다. 일반적인 사랑이 아니라 특별한 아버지 하나님으로서의 사랑을 알려 주시는 것이다. 바울 사도는 우리에게 주신 하나님의 성령은 우리의 마음에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사랑과 감흥과 느낌을 부어주신다고(롬5:5) 진술한 바 있다.”
7. 17세기의 경건한 청교도인 토마스 구드윈은 에베소서 13:8을 강해하면서 말했다. “인간의 영혼에 와서 부어지며, 그로 하여금 하나님은 그의 하나님이며, 그는 하나님의 것이며, 하나님은 영원토록 그를 사랑하신다는 것을 확신케 하는 빛이 있다. 그것은 평범한 신앙이라는 빛을 초월하는 빛이다. 곧 하늘 나라에 가는 것이다. 여러분이 저 하늘나라에 가기까지 그보다 더한 것을 가질 수 없다. 그것은 평범한 수준이상으로 끌려 올려지고 고양된 신앙이다. 그것은 영혼에게 밝혀진 하나님의 선택적인 사랑이다.”
8. 18세기의 조지 휫필드, 그의 일기에서 “그 전에는 정말 탄식의 나날들이었다. 버려짐과 유혹이라는 긴 밤을 지난 후 전에 멀리서 보였던 별이 다시 나타나게 되었고, 이제 하나님의 성령께서 내 영혼을 사로 잡았고, 내가 겸손히 희망하듯이 구속의 날까지 나를 인치셨다. 이제 하나님으로부터 긍휼을 얻었고, 내 마음으로 양자의 영을 받았으며, 나에 관해서 그렇게 많을 것을 알고 있었던 내 친구들은 내가 그처럼 활기차게 행동하고 그렇게 보이는 것을 보고 모두 깜짝 놀라기도 하였다. 나의 기쁨은 점점 더 정착하게 되었고 그 기쁨은 내 영혼 속에거 거하면서 점점 더 증가하였다.” 1740년 11월5일에 일어난 일, “나의 집회에서 길버트 테넬씨가 설교하였고 내가 그 다음에 기도하기 시작하였다. 약 6분 가량이 지났을 때 어떤 사람이 ‘성령이 오셨다! 성령이 말하신다!’고 소리쳤다. 그는 자기 영혼에 대한 예수님의 확증을 제어할 수가 거의 없었던 것이다. 다른 사람들도 기뻐서 어찌나 소리를 지르는지 내 기도를 멈추지 않을 수 없었다. 나는 그들이 고통과 번민이 증가하고 있는 것을 보고 그들을 위해 기도하였다. 그리스도를 받는 그 사람은 계속해서 그 찬양을 하였고 밤중이 되기까지 그에 관해서 말했다. 나 자신의 영혼이 어찌나 충만했던지 나는 자신의 비열함과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의 주권과 위대함을 깊이 의식하며 주님 앞에 엎드려 울어버렸다. 거의 모든 사람들이 기도와 찬양으로 그 밤을 보냈다. 그 밤은 결코 잊지 못할 엄청난 밤이었다. 하나님의 임재가 내 영혼을 어찌 충만케 했는지 나는 그 앞에서 있기가 어려울 정도였다.”
9. 조나단 에드워즈의 간증, “1737년 어느 날, 건강을 위해 나는 말을 타고 숲 속으로 들어가 호젓한 곳에 내렸습니다. 경건한 묵상과 기도하며 걷는 것이 흔히 하는 나의 습관이었습니다. 그날 나는 내게는 특이한 한 모습을 보게 되었는데, 그것은 하나님과 인간 사이의 중보자이신 성자의 영광과 그의 놀랍고, 크며, 충만하고 순결하며, 감미로운 은혜와 사랑 그리고 온유하고 부드러운 낮아지심이었습니다. 그토록 고요하고 감미롭게 나타난 이 은혜는 하늘보다 높게 보였습니다. 그리스도의 모습은 형언할 수 없이 탁월하여 모든 사상과 개념을 삼켜 버리기에 충분했습니다. 이런 광경은 내가 판단하기로는 거의 한 시간 동안 계속 되었습니다. 그래서 나는 눈물로 뒤범벅이 된 채 소리쳐 울게 되었습니다. 나는 영혼의 열심이 텅 비어 사라져 버리는 느낌을 느꼈습니다. 그리고는 티끌 속에 앉아 오직 그리스도만으로 충만해지고 싶고, 거룩하고 순순한 사랑으로 그리스도를 사랑하고 싶고, 그리스도를 의뢰하고 싶고, 그리스도를 의지하며 살고 싶고, 그리스도를 섬기며 따르고 싶었습니다. 또한 내 영혼이 완전히 성화되고 신적이고 천상적인 순결로 깨끗해진 것 같이 느꼈다. 나는 이 외에도 몇 차례 이와 아주 유사한 모습을 보았습니다.
그것들도 역시 동일한 효과를 내게 미쳤습니다. 나는 여러 차례 성삼위 되시는 성령의 영광을 감지했고, 거룩하게 하시는 그의 직무를 느꼈습니다. 그리고 그의 거룩하신 역사를 통해서, 영혼에 하나님의 빛과 생명을 전달하시는 것을 의식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성령의 교통하심을 통해서, 신적 영광과 상쾌함의 무한한 샘으로 나타나셨고, 충만하시며, 내 영혼을 채우고 만족하게 하시기에 충분하신 분으로 나타나셨습니다. 그리고 은밀한 교통을 통해서 자신을 부어 주셨고, 영광의 광채로 빛나는 태양처럼, 생명과 빛을 달콤하고 즐겁게 나누어 주셨습니다. 그리고 생명의 말씀이며, 생명의 빛이며, 달콤하고 탁월하며 생명을 주는 말씀인 하나님의 말씀의 탁월함을 감지했습니다. 그때는 말씀을 간절히 갈망하는 마음이 생겼고, 말씀이 내 마음 속에 풍성하게 거할 수 있기를 간절히 바라는 마음도 뒤따랐습니다.”
10. 조나단 에드워즈 부인이 1742년에 그녀에게 일어났던 것에 대해서 말한 것을 들어보자.
“나는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이 얼마나 확실하게 나타나는지 산과 봉우리들이 그 앞에서는 작은 그림자들에 불과하였다. 나의 인정함과 행복함과 하나님의 변치 않는 사랑의 영원한 기쁨은 하나님 자신처럼 불변하고 영구한 것처럼 보였다. 이 확신의 뜨거움에 나는 눈물이 왈칵 쏟아졌고 소리내어 울지 않을 수가 없었다. 하나님의 임재가 너무나 가깝고 현실적으로 느껴진 나머지 나는 다른 것은 아무 것도 의식할 수 없을 정도였다. 그 밤에 내 영혼은 하나님과 하나님의 자녀들에 대한 표현할 수 없이 순수하고 깊은 사랑으로 충만해 있는 것 같았고 나로 하여금 기꺼이 하나님의 종들의 가장 밑바닥에 내려가서 나를 다루시는 그의 영광스러운 대접을 선포하고, 내 사랑과 감사와 찬양을 그들 앞에서 드리게 하는 위안과 위로로 채워져 있는 것 같았다. 밤새도록 나는 그리스도의 탁월하고 뛰어난 사랑에 대한 느낌과 그가 내게 가까이 계시고 내가 그 안에 완전히 안식하면서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영혼의 달콤한 평온을 가지고, 그에게 내가 가까이 있다는 하늘에 속한 느낌을 생생하게 가질 수 있었다. 내 영혼은 하늘나라의 낙원에 머물러 있었다. 나는 그런 상태가 계속되는 동안 매 분마다 느껴지는 것이 내가 내 생애 전체를 통해서 누렸던 외부의 위안과 즐거움보다 더 가치 있었다고 생각한다.”
11. 감리교도인 위대한 존 웨슬리, “우리가 미리 기쁨과 평화와 사랑에 대하여 맛보는 일이 있을 수 있다. 그러한 것들은 기만적인 속임수가 아니고 진정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것이다. 우리가 자신 속에 증거를 가지고, 하나님의 영이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예수의 피로 구속받았고 죄사함을 받을 것을 증거하기 오래 전에 그런 일이 있을 수 있다.”
12. 18세기 말엽과 19세기 초를 살펴 보자. 초기 감리교는 하나님의 허락 아래 휴 보온이라는 사람에 의해 시작되었다. 그는 대형 집회를 열었던 사람으로 유명하다. 집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회심하였고 크게 복을 받았다. 그는 성경을 명상하고 연구하려고 조용한 시간을 가졌을 때 ‘갑자기 하나님의 영광이 위압적인 능력으로 그에게 나타났다’고 고백하였다.
13. 19세기 초의 침례교의 위대한 설교자 크리스마스 에반스의 체험. “지금도 기억에 생생하다. 어떤날 돌게리에서 메킨레쓰로 가고 있었다. 나는 내게 기도할 기회가 주어인 것이라고 생각했다. 내 마음이 아무리 굳어있고 또한 내 영이 아무리 세상적인 것으로 가득찼어도 나는 기도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예수의 이름으로 기도를 시작하자마자 나는 말하자면 마음의 착고가 풀리는 것을 느꼈고 마음의 곧은 것이 녹고 있는 것을 발견하였다. 이슬과 눈으로 덮힌 산들이 내 안에서 용해되고 녹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이것은 내 영혼 속에 성령의 약속에 대한 확신을 불러일으켰다. 나는 내 마음 전체가 어떤 큰 굴레에서 벗어나는 것같이 느꼈고 눈물이 쏟아져 나왔다, 나는 하나님이 은혜롭게 찾아오심에 대해서 너무 감격해 소리 내어 울 수 밖에 없었다. 내 영혼에 구원의 즐거움을 회복시켜 주신 은혜에 대한 감격이었다.”
14. 19세기 초의 미국 장로교회의 목사, 에드워드 페이슨의 전기, 그가 임종하기 전 “목사님은 평안하십니까?”라는 질문을 받았다. “참, 그 질문은 너무 냉랭한 질문이요. 난 즐겁소, 이 행복은 하나님이 계시는 동안 계속될 것이요! 나는 내 행복을 표현할 말을 모르겠소. 나는 나를 큰 섬으로 이끌어가는 즐거움의 강 속에서 헤엄을 치고 있는 느낌이오.”
15. 멜레드 아우비그니는 스위스 사람으로서 <종교개혁사>라는 유명한 책을 쓴 사람이다.
“에베소서 3장 마지막 두 구절, 곧 ‘우리 가운데서 역사하시는 능력대로 우리의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한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는 이에게’를 읽을 때, 그 말씀이 내 영혼에 하나님께로부터 오는 한 계시로 임하였다. ‘그는 능히 하신다. 그는 온갖 구하는 것이나 생각하는 것에 더 넘치도록 능히 하실 이시다.’ 내 가난한 심령 안에 이루어지는 일을 그리스도께서 하실 것이라는 확신이 내 영혼 속에 넘쳤다. 우리는 다 같이 무릎을 굻고 기도하였다. 내가 일어날 때 나는 마치 내 날개가 독수리의 날개처럼 새로와진 것 같이 느꼈다. 내 모든 의문들은 사라지고, 내 고뇌는 진정되었고, 주님께서 평화를 강처럼 쏟아 부으셨다. 그래서 나는 능히 모든 성도와 함께 지식에 넘치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알아 그 넓이와 깊이와 높이와 길이가 어떠함을 깨달을 수 있었다.”
16. 존 멕켄지의 경우, 1840~1849 복음 잡지의 편집장, 에베소서 1:13-14에 관한 설교에서 말한다.
“심령을 인치는 직관적인 행동과 특이한 느낌들에 대해서, 그것들은 말로나 관념들로써 전달될 수 있기 보다 그런 행복한 체험에 의해서 더 잘 알려지고 이해되는 것이다. 성령께서 이 부요한 축복을 주실 때 어떤 특별한 방편에만 국한하시는 것이 아니다. 설교를 할 때, 말씀을 읽을 때, 또는 전혀 그런 일이 없을 때도 그런 축복을 주실 수 있다. 그것은 성령이 정하신 때에 시온에 은혜를 베푸시기 위해서 자기의 기쁘신 뜻을 따라(빌2:13) 역사하시는 것이다. 본문에서 인침은 하늘 기업의 보증이요, 그리스도 안에 있는 없어지지 않을 하나님의 영광의 일부요 계약금이다. 그것은 성령에 의해서 마음에 인쳐지거나 생겨지는 하나님의 영광에 대한 서약이다. 또한 성령께서 이 복된 인으로 심령을 찍으실 때, 그는 그 마음에 내려 오셔서 그 마음을 부드럽게 하시고 기름을 바르신다. 또한 하나님의 사랑과 부요한 긍휼을 거기에 쏟아 부으신다. 그리고 예수의 생명과 사랑과 피와 죽음을 심령에 부어주시는 것이다. 그리하여 마음은 용해되고 압도 당하고 영혼은 사랑과 긍휼과 은혜와 영광과 복락으로 녹아지며 사랑과 기쁨으로 눈물이 넘쳐 나게 될 것이다. 그에 대한 사랑으로 그 마음이 터지기까지 하나님의 모든 속성이 그 마음에 사랑스러워진다. 이 느낌은 특이한 천상적이고 거룩한 기쁨과 복락을 포함하고 있다. 그리고 그것은 마음에 너무 강력하고 만져질 정도가 되어서 결국 불멸의 영광의 보증이 되고 구속된 자들의 영혼이 영원토록 누릴 영광의 계약금으로 즐겨지게 될 것이다. 그것은 용서와 하나님께 대한 확신을 동반하고 말로 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이 거기에서 흘러나오게 되는 것이다. 그는 하늘의 일부가 자기 영혼에 내려온 것을 느낀다. 말로 할 수 없고 특별하고 행복한 사랑의 감정과 감사와 겸손과 통회가 그 마음에 섞여 충만케 된다! 그는 죄나 죄책이나 진노나 무서움을 전혀 느끼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이 다 물러간다. 그 마음에 행복한 평온과 고요함이 안주한다. 성부, 성자, 성령께서 그와 함께 거처를 삼으신다. 성령께서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니’라는 말씀이 그 속에서 나타난다. 이 인침은 마음을 크게 하고 눈을 밝게 하고 이해를 도우며, 온유한 마음을 주신다.”
17. 무디의 경우, “전에 없이 나는 기도하기 시작했다. 갈증은 더해 갔고 나는 실로 사역을 위해서 능력을 받을 수 없다면 더 이상 살고 싶지 않다고 느낄 정도가 되었다. 나는 언제나 내내 하나님께서 성령으로 나를 충만케 해달라고 기도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나는 묘사해 낼 수 없는 너무나 경외로운 체험을 하게 되었다. 바울도 14년 동안 결코 말하지 않았던 한 체험을 가지고 있었다. 나는 다만 하나님께서 내게 자신을 계시하셨노라고 말할 수 밖에 없다. 나는 그러한 그의 사랑의 체험을 어찌나 강하게 한 나머지 나는 그에게 하나님의 손을 그만 멈추어 달라고 간구해야 할 정도였다.”
나는 히브리서 기자처럼 “다 말하려면 내게 시간이 부족하니”라고 말하고 싶은 충동을 느낀다. 나는 여러 세기들, 여러 곳 매우 다른 유형과 기질의 사람들의 다양한 경우들 중에서 몇 가지만 인용하였다. 이들은 비상한 재능과 학식을 가진 자들이거나 자기들의 감정을 엄격히 통제를 해오던 사람들이며, 흥분과는 거리가 먼 사람들이었다. 다른 이들은 평범하였다. 그러나 성령께서 자기들의 영과 더불어 자기들이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실 때 그들에게 있었던 일에 대하여 간증하는 것을 보면 한결같이 일치하고 있다.
체험에 마음을 고정시키다 보면 참된 체험을 받기가 용이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체험을 가질 수도 있지만 참된 체험은 아닐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을 섬기는 일에 특별한 충성심과 능동성을 보일 때, 때때로 일어난다. 자기들의 죄로 인하여 신음하고 탄식하는 이들에게 거의 예외없이 일어난다. 또한 어떤 큰 시련에 직면하려면 이들에게 이 체험이 자주 주어지는 것을 보게 된다. 그 체험이 죽기 바로 직전에 사람들에게 주어지는 것을 흔히 발견한다.
제 12 장 성령의 참된 체험과 거짓 체험의 특징들(역사적 고찰)
“성령이 친히 우리 영으로 더불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인 것을 증거하시나니”(롬 8:16)
Ⅰ 초기 플리마우스 형제단의 증거
1) 다비(J.N.Darby)- 그 창시자. <성령의 인침>이라는 책에서 ‘사람이 거듭났다 할지라도 성령은 받지 못한다는 것이 성경에 의하면 확실하다’.
2) 맥킨토쉬- ‘사도행전 19:1~7의 말씀이 제자들과 신자들이면서 아직도 성령의 인침을 받지 않았음을 분명하게 보여준다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과 인침을 받는다는 것은 별개라는 사실을 매우 분명하게 나타내 주고 있다’
3) 윌리암 케리- 믿음과 회개는 특별한 의미에서의 성령을 받지 않고도 가능하다고 주장한다. 물론 성령이 아니고서는 사람은 복음을 믿을 수 없다. ‘그것은 후차적인 작용이요, 부가적인 것이요 별개의 축복이다. 그것은 이미 마음 속에 적극적으로 역사하고 있는 신앙에 기초하는 하나의 특권이다. 사람이 믿는 순간에 성령의 선물을 받는다는 것은 진리와는 거리가 멀다. 그 어떤 것만큼 뚜렷하고 분명한 것이 틀림없다.’ 이 체험은 독특하고 개별적이며 깊이 체험되는 어떤 것이요 그가 이 성령의 증거나 성령의 인침을 받았는지 어떤지를 그 사람은 확실히 알 수 있다. 사람이 일단 그것을 받으면 결코 잊을 수 없다. 그리스도인의 체험 가운데서 가장 큰 높은 고지로 생각하고 그 체험을 늘 회상할 것이다.
Ⅱ 바울과 갈라디아 교인들의 경우
바울이 다메섹 도상에서 주 예수 그리스도를 보았을 뿐 아니라 그리스도를 믿고 그 안에 있었음이 분명하다. 그러나 그가 그로부터 사흘이 되기까지 성령으로 세례를 받지 않았음이 분명하다. 아나니아가 찾아와서 ‘너로 다시 보게 하시고 성령으로 충만하게 하신다 하니’ 충만해졌다.
갈 3:2, ‘너희가 성령을 받은 것은 율법의 행위로냐 듣고 믿음으로냐’ 했다. ‘너희가 그리스도인이 된 것이’ 하지 않았다. 모든 신자가 중생할 때 회심할 때 성령을 받는다면 그렇게 말했을 것이다.
갈 3:14, ‘믿음으로 말미암아 성령의 약속을 받게 하려 함이니라’. 신자들은 이 위대한 성령의 약속을 받을 수 있다는 것이다.
Ⅲ 참된 체험과 거짓된 체험의 구별
신약은 영들을 ‘시험하고 검증하고 따져 보라’고 권면한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은 거짓 영들, 적그리스도의 영이 있기 때문이다. 기독교역사가 강력하게 증거하고 있다. 거짓 영들은 초대교회시대에도, 종교개혁시대에도, 17세기의 청교도 부흥시대에도 현저히 나타났다. 청교도운동의 막판에 성령의 체험의 중요성을 강조하다가 너무 지나치게 나아가 신비주의로 떨어지고 만 사람들이 있었다. 초기 퀘이커 교도들이 그랬다. 체험을 강조하는 순간, 마귀는 어떤 사람들을 극단으로 몰고 갈려고 애를 쓴다. 그래서 모든 체험을 검증해 보고 시험해보아야 한다. 18세기의 복음적인 부흥운동은 체험과 구원의 확신에 큰 강조점을 두었다. 휫필드나 웨슬리의 형제들이 그랬다. 그러나 많은 사람들이 방종과 무절제에 빠졌다.
그렇다고 ‘이 체험을 추구하는 것은 위험하다. 가장 안전한 것은 체험이 아니라 말씀만 붙들고 말씀의 사람이 되는 것이다’고 하는 것은 ‘성령을 소멸하는 무서운 죄’를 범하는 것이다. 옳은 방법은 참된 체험을 추구하는 것이고, 참된 것과 거짓된 것을 구별해내는 것이다.
청교도들은 참된 체험과 거짓된 체험 사이 소위 체험의 ‘선행사’들을 봄으로써 검증할 수 있다고 하였다.
그것은 죄의식이요 실패의식이다. 죄의식과 실패로 영적인 궁핍을 느꼈다면, 확신과 능력을 갈망하였다면, 그것은 참된 체험이라는 일차적인 증거가 된다. 많은 기도가 선행되었으며 성령의 증거를 매우 열심히 추구하는 일이 먼저 있었다. 그들은 거룩한 삶을 통하여 그들이 추구하는 것과 열망하는 것이 순전하다는 것을 증거했다. 그들은 ‘하나님을 두려워 하면서 거룩함을 이루기 위해서’ 있는 힘을 다했다. 그들은 이 체험이 우리가 하나님의 자녀라는 사실에 ‘일종의 도장’ 찍는 것과 같은 것으로 임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러나 그 결과로 반드시 그 체험이 일어난다는 것을 의미하지는 않는다. 부모로부터 특별한 것을 얻고 싶으면 바른 자세를 갖추어야 하는 것은 상식이다. 어떤 사람이 이 체험을 바라면서도 거룩함에 대한 노력이나 경건하게 살고자 애쓰는 것이 생활 속에 나타나지 않는다면 잘못된 것이다. 체험보다 앞서는 일들은 매우 중요하다. 보편적인 체험도 하나님의 말씀도 그렇게 가르친다. 성령은 그 자신의 인을 친다. 그는 악하게 행동하는 사람에게 이 인침을 허락하지 않는다. 의무를 다하지 않는 자녀에게 허락한다면 그것은 성령 자신에게 모순되는 일이 된다.
체험에 따르는 일들은 무엇인가? 말씀과 동떨어지면 안 된다. 퀘이커 교도들과 청교도들 중 극단의 사람들이 성경의 가치를 절하하는 경향이 있었다. ‘내적인 빛’을 가지고 있으므로 성경이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그런 사람들은 환상이나 환각에 대해서 많은 말을 한다. 빛의 덩어리를 보았다느니 예수의 환상을 보았다느니 한다. 현상적인 국면에 큰 강조점을 두고 극적인 사건에 관심을 나타낸다. 뜨겁게 달궈진 쇠나 전류가 자기들을 통과하고 있는 것처럼 느꼈다고 말한다. 과장하고 자랑하고 체험 자체에 대해서 흥미를 갖는다. 참된 체험은 그 정반대다. 하나님의 말씀과 함께, 또는 말씀을 통해서 온다. 그 체험은 언제나 성경의 가르침을 확증한다. 성경에 일치한다. 말씀과 성령은 일치하며 함께 역사하며 서로 짝이 맞는다.
참된 체험의 표지는 외경스러운 느낌이요, 그것과 동반하는 자기 자신이 무가치하다는 것에 대한 느낌이다. 성령께서 거룩한 영이기 때문에 필연적이다. 이사야 6장,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 밧모섬의 요한도 ‘발 앞에 엎드려져 죽은 자 같이 되었다’고 했다.
예외 없이 필연적으로 오는 요소는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영화롭게 된다는 점이다. 받은 체험만을 생각하고 예수 그리스도께는 관심이 없다면 그것은 거짓 체험이다. 성령이 강하게 임할수록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과 주 예수 그리스도에 대해서 말하고 싶은 욕망이 더욱 더 높아지고 영화롭게 하고 싶어질 것이다. 부흥은 많은 사람들이 동시에 이런 체험을 하는 것이다. 두드러진 사실은 성령을 많이 노래하기 보다는 주 예수 그리스도를 찬송한다는 점이다. 성령께서 부어주시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화롭게 하는 찬송들이 만발하게 된다. 또 다른 증거는 하나님께서 나를 향하여 사랑한다고 하는 그 사랑에 대한 의식을 받게 된다.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 마음에 부은 바 됨이니’.
또한 그 시간에 마치 들려 올라가 이 시간 세계에 속해 있지 않는 것처럼 느꼈다고 말한다. ‘자녀이면 또한 후사 곧 하나님의 후사요 그리스도와 함께 한 후사니’. 모든 반대되는 환경에도 불구하고 이것은 진리이다. 약속된 영광에 가고 있다는 것을 너무나 확신한 나머지 어느 의미에서 다른 것은 도무지 문제가 되지 않는 것이다. ‘생각컨대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로8:18).
체험이 가져오는 결과는 겸손이다. 거짓 체험은 교만으로 나타난다. 체험을 떠벌리고 강조한다. 체험을 받을 때나 후에도 완고하다. 참된 체험은 묘사하기가 어렵다. 떠벌리지 않는다. 그것은 ‘감추어진 만나’요 ‘흰 돌’이기 때문이다. 거짓 체험은 과장으로 인도하고 기만을 당한 사람은 불덩어리를 묘사하고 전류나 뜨거운 기운을 말한다. 참된 체험은 은밀한 거래이다. 우리 자신과 하늘 아버지 사이의 거래요 성자와의 성령과의 은밀한 거래이다. 돼지 앞에 진주를 던지지 않는다.
참된 체험이 가져오는 특징적인 결과들은 하나님께 대한 위대한 사람과 그를 기쁘시게 하려고 열망하는 것이다. ‘아바 아버지’라는 부르짖음을 빼 놓을 수 없다. 참된 체험은 언제나 기도에 있어서 전에는 전혀 알지 못하던 자유로움을 가져온다. 기도와 예배와 찬양에 있어서 자유롭게 된다. 공적인 기도에도 해당된다. 사람들을 두려워하거나 복음을 두려워하지 않게 된다. 설교자라면 전에는 없었던 능력이 자기 설교속에 있음을 알게 된다.
이 모든 것들 중에 가장 중요한 것은 이러한 참된 체험을 아는 사람은 그것을 더욱 더 알고 싶어하는 바램을 가지고 있는 사람이라는 점이다. ‘내가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함을 알려 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아 어찌하든지 죽은 자 가운데서 부활에 이르려 하노니’(빌 3:10). 이러한 체험에 대해서 무엇인가를 알고 있다는 것은 주 예수그리스도를 더욱 더 친근하고 친밀하고 능력있게 아는 것을 가장 큰 소원으로 가지고 있음을 의미한다. 일단 사람이 이 체험에 대해서 알게 되면 그는 ‘내게 사는 것은 그리스도니 죽는 것도 유익함이라’고 말한다. 그 이후 영원토록 그것이 영혼에 최고의 욕망과 바램이 된다는 것을 의미한다. 어으면 하고 바라는 것이 아니다. 그리스도와 그 부활의 권능과 그 고난에 참예하고 알려하여 그의 죽으심을 본받으려 간절히 사모하게 되는 것이다.
제 13 장 성령의 체험과 성화
영적인 체험은 더 높이 올라가면 갈수록 마귀의 공격은 더 맹렬하다.
교회의 중추적인 교리는 항상 마귀의 공격의 특별 목표였다.
1. 성령의 체험과 성화와의 관계
‘성령의 인침’이나 ‘성령의 세례’의 특별한 체험을 기초로 해서 완전주의 교리를 가르친 사람들이 많았다.
이 혼란은 존 웨슬리에 의해서 가장 큰 영향을 입어 시작된 것이었다. 그는 이 체험과 성화를 동일시하는 효시이다. 그들의 주장은 다음과 같다. 그리스도인이 성령의 세례를 받는 것은 가능하며, 그것을 받고 난 뒤에 그는 죄로부터 완전히 깨끗함을 입는다는 것이다.
새롭고 깨끗한 마음이 주어지고 완전한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받게 되어 하나님을 향하여 완전한 사랑을 나타낸다고 한다. 죄는 그로부터 완전히 제거되고 그의 전체 성품 가운데서 축출되어 나간다. 그래서 완벽하고 철저하게 성화된다는 것이다.
그들이 제시하는 성경적 근거는 두 가지다. 1) 행 15:8. “또 마음을 아시는 우리에게와 같이 저희(고넬료가족)에게도 성령을 주어 증거하시고 믿음으로 저의 마음을 깨끗이 하사 저희나 우리나 분간치 아니하셨느니라” ‘깨끗이 하다’는 ‘(마음이 믿음으로) 완전히 깨끗함을 입었다’ 는 것을 의미한다고 한다.
2) 행 26:16-18. “죄사함과 나를 믿어 거룩해진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하리라” 신자들이 ‘믿음으로 거룩하게 된다’는 것이다. 그들은 이것을 기초로 해서 그리스도인이 완전히 성화되며 정결케 되는 것이 가능하다고 가르친다. 자기들은 완전히 성화되고 정결케 되어서 더 이상 자기들 속에 죄가 없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조차 있다. 그들은 대체로 매우 진지하고 성령을 사랑하는 유능한 그리스도인들이다.
성경의 난해한 진술을 만날 때 먼저 해야 할 일은 그것을 문맥과 흐름에서 살펴 보는 것이다. 이 원리는 매우 중요하다. 문맥을 살펴 볼 때 성화의 교리가 어느 곳에서도 진술되고 있지 않기 때문이다. 행 15장에서 베드로는 그들의 성화의 상태를 다루고 있지 않다. 다만 그들이 기독교회로 들어오는 것이 정당하다는 것을 입증하는데 관심을 가질 뿐이다.
당시 예루살렘 공회는 ‘할례는 구원의 진수가 된다’고 했다. 베드로는 유대인들이나 이방인들이나 이제 같은 방식으로 곧 믿음으로 깨끗함을 입고 그리스도인이 된다는 것이다.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이다. 바울에게 주신 사명에서도 마찬가지다. 유대인이나 이방이나 “나를 믿어 거룩케 된 무리 가운데서 기업을 얻게 한다”. 성화는 전혀 언급되지 않았다. ‘깨끗해졌다’는 말이나 ‘믿음으로 거룩함을 입었다’는 말이 모두 ‘하나님의 백성으로 구별되었다’는 것이다. 그 이상은 아니다.
고전 6:9-11,“너희 중에 이와 같은 자들이 있더니 주 예수 그리스도의 이름과 우리 하나님의 성령 안에서 씻음과 거룩함과 의롭다 하심을 얻었느니라”
- 의롭다함 앞의 거룩함은 성화가 아니라 구별(건짐)이다.
그러나 고전 1:30, “예수는 -- 우리에게 지혜와 의로움과 거룩함과 구속함이 되셨으니”
- ‘의로움’(칭의), ‘거룩함’(점진적 성화), ‘구속’(영화)의 순서가 맞다.
살후 2:13,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케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얻게 하심이니”
- 믿음보다 거룩을 앞에 놓고 있다. 이 거룩은 성화의 의미가 아니고 구별이다. 시내산이 구별되어 ‘거룩한 성산’으로 불리는 것과 같이, 이들도 성령에 의해서 구별되었으며, 믿음의 진리를 따르는 것이다.
벧전 1:2,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의 거룩케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입은 자들에게”
- 거룩케 하심(구별)으로 진리에 순종케 된 것이다.
성화의 교리의 순서는 먼저 믿고 의롭함을 받고 거룩하게 되는 일(성화)이 점진적으로 진행된다.
한 마디 말로 논증을 세워서는 안 된다. 전후 문맥에서 취급되어야 한다. 성경과 성경을 비교해 봐야 한다. 고전 7:14, “믿지 아니하는 남편이 아내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고 믿지 아니하는 아내가 남편으로 인하여 거룩하게 되나니 그러나 이제는 거룩하니라”
- ‘거룩’은 구별이지 성화가 아니다.
그러므로 모든 상상할 수 있는 입장을 다 동원한다 하여도 성령의 세례가 믿음으로 완전한 성화를 의미하는 것이라고 가르치는 교훈에 대한 증거가 전혀 없다. 만일 ‘완전한 성화’ 교훈이 진리라면 신약의 모든 서신들은 아무런 필요가 없을 것이다. 몸의 행실을 죽이고 성령의 인도를 받는 것이 불필요하게 된다. 완전 성결케 하는 성령세례만 받으면 되기 때문이다. 죄는 갑자기 우리 가운데서 제거되지 않는다. 그 주장은 잘못되었음이 틀림없다.
2. 성령 체험과 성화는 간접적 관계이다.
직접적인 관련이 없고 간접적인 매우 중요한 관계를 갖고 있다. 성령 체험을 할 때 그들은 거룩한 하나님의 존전에 있음을 알게 된다. 전체 분위기가 ‘빛과 거룩’이다. 그런데도 같은 순간에 그들은 자기들이 죄인이라는 것을 느낀다. 그들은 죄를 미워하고 다시는 죄를 짓고 싶지가 않아진다.
죄를 죄로 생각하게 만드는 것은 주의 임재하심이다! 여전히 그들의 지체 속에서는 죄가 있다. 사람들이 그 체험을 하는 순간 자기들이 완전히 죄로부터 깨끗해졌다고 느끼는 것을 쉽게 이해할 수 있다. 그러나 그것이 우리들의 체질 자체를 변화시키지는 않는다. 우리는 여전히 같은 사람이다. 어느 순간에 죄를 지을 수 있는 것이다.
신약시대의 거의 모든 그리스도인들은 아마 성령세례를 받은 것 같다. 그러나 그것이 성화를 보증하지는 않았으며 또한 성결을 보증하고 있지도 않았다. 그들이 은사를 받았다 할지라도 마찬가지다.
그러나 성려세례는 성화를 촉진시키고 자극시키는 것만은 사실이다.
실로 그것은 성화를 도우는데 있어서 가장 최대한의 가능성을 가지고 있다. “주를 향하여 이 소망을 가진 자마다 그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하느니라”(요일3:3). 그러므로 이 성령의 증거는 성화를 촉진시키고 우리로 하여금 성화를 추구하도록 용기를 북돋아 준다.
그러나 자동적으로 그것을 보장하는 것은 아니다. 우리가 거듭나는 순간 성화의 과정이 시작된다. 생명과 거룩의 씨앗이 우리 속에 심기워져 있다. 성령 체험은 그 생명의 씨앗이 움터 자라나고 발전하고 모든 사람을 놀랠 정도로 나타내 보이도록 한다. 그것은 직접적이고 즉각적인 관계가 아닌 간접적인 관계다. 그것은 성화를 이루는데 최대의 자극을 주지만 성화자체는 아니다. 떤 놀라운 체험들을 가지거나 방언을 말할 수 있거나 어떤 다른 은사들을 사용할 수 있다.
'로이드 존스' 카테고리의 다른 글
로이드 존스, 성령세례, 1장~6장 요약(강의안) (0) | 2015.05.20 |
---|---|
로이드 존스, 「성령론」, 홍정식역편(강의안) (2) 14장~21장 (0) | 2015.05.20 |
[스크랩] 자기의 절대율이 있어야 한다/ 로이드 존스 (0) | 2015.04.27 |
믿음의 진정한 척도/ 로이드 존스 (0) | 2015.04.08 |
토마스 아퀴나스의 체험, 그의 「신학대전」을 짚으로 보이게 하다/ 로이드 존스 (0) | 2014.03.25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