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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이작 암브로스, "예수를 바라보라1" 14장 예수님의 사역 적용

강대식 2015. 8. 5. 07:34

14장 예수님의 사역 적용

1. 삶에서 우리의 구원이라는 위대한 사역을 수행하신 예수님을 아는 것

무엇보다도 예수님의 삶에 대해 읽으라. 그것을 위해 하나님은 우리에게 네 명의 복음서 저자를 주셨다. 그 저자들은 복된 조화 속에서 그리스도의 삶을 선포한다. 아, 내 영혼아! 네가 그리스도에 대해 알고 있는 것은 아직 모르는 엄청난 것의 지극히 작은 일부분일 뿐이다. 바울은 “우리가 부분적으로 알고”(고전13:9)라고 말한다. 그럼에도 오라. 그리고 “우리가 여호와를 알자. 힘써 여호와를 알자.” 계속해서 그분에 대해 묻고 알아가라. 천사들을 닮아 가라. 천사들은 “그리스도가 우리 인간들과 우리의 구원을 위해 행하신 것들을 몸을 굽혀 살펴보기를 간절히 바랐다”(벧전2:12). 그것이 천사들의 기쁨이고 새로운 힘을 얻는 즐거움이었다. 바울도 마치 그런 천사들의 모습을 따라하는 것처럼 보인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세상에 알아야 할 만한 가치가 있는 것이 있다면 바로 그것이다.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빌3:8). 당신이 진정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얼마나 탁월한지를 알게 된다면 다른 모든 것을 배설물로 여기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2. 삶에서 우리의 구원이라는 위대한 사역을 수행하신 예수님을 생각하는 것

연구하고 아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아는 것이 유익한 결과를 낳을 때까지 생각하고 묵상하고 사고해야 한다. 그리스도를 묵상함으로써 우리는 알아차릴 수 없는 변화를 느끼거나 발견할 수 있다. 어떤 이유로든 태양 아래 서 있을 때 우리는 빛과 열을 받고 있는 것을 느낀다. 마찬가지로 거룩한 묵상 속에 거할 때 우리 영혼은 너무나 은밀해서 알아차리지 못한다 해도 변화될 수 있다. 진지한 묵상 속에는 언제나 변화시키는 미덕이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더 깊이 바라보라. 오 내 영혼아,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모든 말씀을 깊이 이해하라.

세례 요한의 설교를 생각하라

이 시대의 모든 사역자와 성도 가운데 그런 특별한 거룩함과 금욕을 가진 자가 있는가? 그의 설교를 요약하면 “회개하고 죄를 버리라. 그리고 변화된 삶에 합당한 열매를 맺으라” 였다. 요한은 모든 사람을 꾸짖었다. 여전히 뉘우치지 않는 자들을 신랄히 꾸짖었다. 심판과 영원히 꺼지지 않는 불을 선포했다. 오! 요한은 설교에 탁월한 열정과 격렬한 심령을 쏟아붓는 설교자였다. 그리고 그의 모든 설교를 가장 잘 보여 주는 주석은 바로 그의 삶이었다. 그는 세상을 경멸했고 유혹을 물리쳤다. 거짓된 영광을 누리기를 거부했다. 삶의 모든 여정에서 요한은 자기 부인과 금욕을 보여 준 특별한 본보기였다. 그리고 그런 모든 것을 통해 요한은 주님이 오시는 길을 탁월하고 합당하게 예비했다. 오 내 영혼아, 네가 이 설교자와 함께 잠시라도 있을 수 있다면! 네가 그의 설교를 반추하고 숙고할 수 있다면! 회개와 의, 절제와 장차 올 심판에 대한 그의 설교를 깊이 생각하라. 그리고 그것이 어떤 영향력을 가지고 있는지를 보라. 바울이 그러한 설교를 전했을 때 벨릭스는 “두려워하였다”(행24:25). “꺼지지 않는 불에 태워지는 쭉정이”에 대한 설교가 당신의 마음에 강력히 전달되고 깊은 사랑 속에서 받아들여진다면 그 설교는 분명히 당신의 마음을 두려움 속에서 떨게 만들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설교가 당신의 마음과 삶에 어떤 결과를 낳는지를 보라. 당신은 자신 안에서 금욕과 절제의 영을 느끼는가? 당신은 세례 요한처럼 세상에 대해 죽었는가? 당신은 본성적인 죄로 물든 모든 욕망을 향해 나아가려는 의지를 부인하는가? 당신은 쾌락과 감각적인 자기만족을 절제하는가? 당신의 육체는 영에 종속되어 있는가? 당신의 육체와 영이 모두 하나님을 섬기고 있는가? 당신은 정욕을 불태우는 연료와 자극을 제거함으로써 육체의 정욕을 죽이고 있는가? 오 내 영혼아, 생각하라. 그리고 거룩함과 자기 부인, 금욕을 위해 이 생각이 네 마음속에 온기를 갖게 하고 네 삶에 영향을 줄 때까지 그리스도보다 앞서 온 자의 설교를 생각하라.

그리스도의 세례를 생각하라

결코 죄를 짓지 않은 분이 우리를 위해 죄가 되셨다. 그래서 그리스도가 죄의 회개를 위해 죄인들의 할례와 세례를 받으신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그리스도가 세례를 받으신 것은 그것을 통해 우리의 본질을 깨끗하게 하기 위해서였다. 그리스도는 자신을 위해서가 아니라 바로 우리를 위해 세례를 받으셨다. 율법을 성취하신 그리스도의 순종이 믿는 모든 자에게 전가되어 의에 이르게 한다. 마치 그들이 성취한 것처럼 말이다. 오 내 영혼아, 그것을 깊이 생각하라. 그리스도의 세례 속에 얼마나 놀라운 복이 들어 있는가! 그리스도의 세례는 꽃밭이다. 그 속에 칭의, 양자 삼음, 거듭남, 성화, 영광과 같은 특권이 펼쳐져 있다. 오, 그러니 이 꽃들 가운데 몇 송이에라도 네 영혼을 고정시키라. 그리고 그 꽃들 속에서 꿀을 취하기 전에는 결코 떠나지 말라. 당신이 그리스도 안에 있다면 당신은 그분의 죽음속에서 세례를 받고 그분의 세례 속으로 들어간다. 그리고 그분의 죽음, 삶, 세례와 모든 것이 맺은 열매와 효과에 동참하게 된다.

그리스도가 광야에서 감당하신 금식과 시험을 생각하라

이제 우리는 원수가 어떤 방식으로 공격하는지, 어떻게 싸우는지, 원수를 어떻게 물리쳐야 하는지, 어떻게 원수를 이길 수 있는지를 안다. 첫 번째 공격에서 사탄은 그리스도가 하나님 아버지의 섭리를 의심하도록 유혹한다. 두 번째 공격에서는 하나님 아버지의 보호하심을 시험하도록 유혹한다. 사탄은 명예를 가지고 다시 세 번째 공격을 시도한다. 두 공격이 모두 실패하면 쾌락과 이익, 명예와 유혹을 오른편에 꺼내 놓는다. 그것이 가장 위험한 시험이다. 오 내 영혼아, 네가 이런 전쟁 가운데 있을 때 유혹은 파도처럼 계속해서 너의 목을 내리치려고 다가올 것이다. 악한 영이 그리스도를 계속해서 시험했다면 너에 대해서는 어떻겠느냐? 하나의 유혹을 물리쳤다고 해서 또 다른 유혹이 찾아오지 않으리라고 어떻게 장담할 수 있겠느냐? 그러나 여기에 너의 위로가 있다. 너에게는 이런 구주가 계신다. “우리에게 있는 대제사장은 우리의 연약함을 동정하지 못하실 이가 아니요 모든 일에 우리와 똑같이 시험을 받으신 이로되 죄는 없으시니라. 그러므로 우리는 긍휼하심을 받고 때를 따라 돕는 은혜를 얻기 위하여 은혜의 보좌 앞에 담대히 나아갈 것이니라”(히4:15-16). 그리스도는 시험받는 자들을 구하기 위해 시험받으셨다. 오 내 영혼아, 네가 시험받을 때는 그리스도가 그 시험 속에서 언제나 너와 함께 계신다는 것을 알아라. 그분은 친히 하늘에서 너를 위해 중보하고 계신다. 그분이 친히 시험을 받으셨기에 누구보다도 시험당하는 우리의 마음을 잘 아신다. 그래서 우리가 혹독한 시험을 당할 때 그분의 사랑과 자비는 가장 강력히 역사한다.

그리스도가 그분의 증인들을 통해 처음으로 자신을 확증하신 것을 생각하라

우리는 하늘, 하나님 아버지,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 이 땅의 증인들을 통해 그리스도에 대한 증언을 들었다. 그리고 이 모든 증언은 복음을 설교할 때마다 생생히 선포된다. 그래서 오늘날에도 여전히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증언을 통해 확증된다. 또한 우리가 그리스도의 백성이라면 그리스도는 오늘날에도 여전히 우리 안에서 확증된다. 오 내 영혼아, 무엇보다도 이것을 생각하라! 너에게 가장 중요한 것은 내면의 확증이다. “너희가 아들이므로 하나님이 그 아들의 영을 우리 마음 가운데 보내사”(갈4:6). 만일 그리스도가 당신의 마음속에서 그분의 영을 통해 확증되지 않는다면 당신은 하나님의 자녀가 아니다. 그래서 사도는 진지하게 자신을 시험하라고 말한다. “너희는 믿음 안에 있는가 너희 자신을 시험하고 너희 자신을 확증하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너희 안에 계신 줄을 너희가 스스로 알지 못하느냐 그렇지 않으면 너희는 버림 받은 자니라”(고후13:5). 그리스도가 당신 안에서 확증되시는가?

사도는 성도들에 대해 말하며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하나님이 그들로 하여금 이 비밀의 영광이 이방인 가운데 얼마나 풍성한지를 알게 하려 하심이라 이 비밀은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골1:27). 오 이 신비스런 영광의 풍성함이여! 오 내 영혼아, 이것을 생각하라. 하나님이 네 안에 그리스도를 계시해 주셨는가? 하나님이 너로 하여금 그분의 영광의 기이함을 들여다볼 수 있게 하셨는가? 하나님이 너의 내면 속에 그분의 영광의 빛을 비춰 주셨는가? 오, 이것은 그리스도의 영이 증언하는 것이다! 이것은 그리스도인이 오직 경험을 통해서만 느낄 수 있는 것이다. 오직 영적인 사람만이 이런 것들을 알 수 있다. 그것들은 영적으로만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 내 영혼아, 하나님의 영이 네 심령 안에서 내면의 은혜롭고 영광스러운 확증을 보여 주시는 것을 느낄 때까지 이것을 묵상하라. “너희 안에 계신 그리스도시니 곧 영광의 소망이니라.”

그리스도의 설교를 생각하라

오, 이 위대한 선지자의 경탄할만한 설교여! 아가서의 신부는 말한다. “입술은 백합화 같고 몰약의 즙이 뚝뚝 떨어지는구나”(아5:13). 그리스도의 가르침은 백합화처럼 달콤하고 몰약처럼 몸에 좋다. “그의 입술은 달콤한 향기와 풍미를 발하는 백합화와 같다.” 그리스도의 입술은 하늘의 은혜와 달콤함으로 가득했다. 시편 기자는 “왕은 사람들보다 아름다워 은혜를 입술에 머금으니”(시45:2)라고 말한다. 그분의 가르침은 영혼을 지켜주고 보호해 준다. 영혼을 모든 부패와 더러움에서 벗어나게 한다. 그리스도가 말씀으로 남겨 놓으신 설교들을 살펴보라. 경건하고 거룩한 삶을 위해 그 설교들을 반추하고 묵상하라. 그리스도가 처음으로 전하신 설교가 얼마나 감미로운가! “회개하라 천국이 가까웠느니라”(마4:17). 그분의 설교가 또한 얼마나 영적인가! (요3:3을 보라) “사람이 거듭나지 아니하면 하나님의 나라를 볼 수 없느니라.” 오라. 그리스도의 설교를 당신의 영혼에게 말하라. 네 옆에서 입을 열어 너를 가르치시는 그리스도를 맛보라.

그리스도가 죄인들을 받아들이신다는 것을 생각하라

그리스도는 죄인들을 데려오라고 사도들을 보내셨다. 그리고 죄인들이 오기만 한다면 그분이 얼마나 즉시 그들을 받아 주신는가! 그것이 바로 그리스도가 하늘에서 내려오신 이유이자 사명이었다. “내가 하늘에서 내려온 것은 내 뜻을 행하려 함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을 행하려 함이니라 나를 보내신 이의 뜻은 내게 주신 자 중에 내가 하나도 잃어버리지 아니하고 마지막 날에 다시 살리는 이것이니라”(요6:38-39). 그리스도는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자를 한 사람도 잃어버리지 않고 모두 받아 주신다. 그리스도에게는 하나님 아버지가 주신 모든 자에 대한 책임이 있다. 아, 가엾은 영혼아! 왜 당신은 죄로 인해 절망하는가! 당신을 받아 주기 위해 두 팔을 벌리고 계시는 그리스도를 바라보라. 그리스도 안에 있는 은혜로운 성품과 본질을 바라보라. 그리스도의 직분을 바라보라. 그분의 직분은 죄인을 구원하고 자비를 보여 주시는 것이다. 죄인들을 받아 주시는 것이 그분의 직분이다. “인자가 온 것은 잃어버린 자를 찾아 구원하려 함이니라”(눅19:10). 방황하는 영혼을 하나님의 집으로 데려가는 것, 하나님과 인간 사이를 화평케 하는 것, 하나님을 인간과 화해시키고 인간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는 것, 그분의 백성의 머리와 신랑이 되시는 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직분이다.

그리스도의 멍에가 쉽고 짐이 가볍다는 것을 생각하라

많은 사람이 예수님을 기꺼이 자신의 구주로 받아들이려고 한다. 그러나 그분의 달콤한 방식대로 그분을 받아들이기는 꺼려한다. 그들은 그것을 어려운 일, 무거운 짐으로 여긴다. 요한은 “그의 계명들은 무거운 것이 아니로다”(요일5:3)라고 말했다. 다윗도 다른 사람들에게 이 진리를 시도해 보라고 권면한다. “너희는 여호와의 선하심을 맛보아 알지어다”(시34:8). 샌더스에 대해 다음과 같은 말이 전해 온다. 샌더스는 순교를 당하기 직전 아내에게 이렇게 말했다. “내게는 당신에게 남겨 줄 다른 재산이 없소. 오직 이것 외에는 말이오. 그것은 배고픈 양심에게 그리스도가 얼마나 달콤한 분인지를 맛보아 아는 보물이라오. 그것을 나는 아직 조금 밖에 맛보지 못했소. 나는 더 많이 알고 맛보고 싶소. 그래서 그것을 당신과 그리스도 안에서 내가 사랑하는 다른 모든 이에게 유산으로 남기오” 오 내 영혼아, 네가 단지 맛볼 수만 있다면 그리스도의 길에서 달콤함의 세계를 발견하게 될 것이다. 그분의 말씀 안에 달콤함이 가득하기 때문이다. “주의 말씀의 맛이 내게 어찌 그리 단지요 내 입에 꿀보다 더 다니이다”(시119:103).

기도 안에 달콤함이 있다. “주께서 모든 사람의 주가 되사 그를 부르는 모든 사람에게 부요하시도다”(롬10:12). 묵상 속에 달콤함이 있다. 어떤 이들은 이것을 의무라고 부르기도 하고 지친 영혼을 새롭게 하고 치유해 주는 것이라고 부른다. 내 영혼아, 너는 이 의무를 행하고 있느냐? 너는 그리스도의 짐이 가볍고 그 길이 달콤하다는 것을 묵상 속에서 느끼는가? 말하라. 묵상 속에서 하늘의 것을 느끼지 못하는가? 묵상이 네 영혼에 달콤한가 아니면 쓴가? 우리는 성경에서 묵상이 가져온 탄복할 만한 결과들을 볼 수 있다. 묵상은 우리가 아는 것을 견고하게 해 준다. “내가 나의 모든 스승들보다 더 명철하오니, 이는 주의 증거들이 나의 묵상이 됨이니이다”(시119:99, KJV). 묵상은 우리의 사랑을 불타오르게 한다. “오, 내가 얼마나 주의 법을 사랑하는지요! 그것이 온종일 나의 묵상이 되나이다”(97절, KJV). 묵상은 우리의 삶에 달콤한 영향력을 미친다. “내가 주의 법규들을 묵상하며 주의 길들을 존중하리이다”(15절, KJV). 묵상이 당신에게도 그러한가? 당신은 다윗처럼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내 속에 근심이 많을 때에 주의 위안이 내 영혼을 즐겁게 하시나이다”(시94:19). 그렇다면 당신은 진정으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맛본 것이다. 이 진리를 경험한 것이다. “이는 내 멍에는 쉽고 내 짐은 가벼움이라 하시니라”(마11:30). “그 길은 즐거운 길이요 그의 지름길은 다 평강이니라”(잠3:17). 오, 하나님의 길이 얼마나 달콤하고 황홀한지를 단지 알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그 길을 끌어안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3. 삶에서 우리의 구원이라는 위대한 사역을 수행하신 예수님을 갈망하는 것

예수님을 갈망해야 한다. 그리스도에 대한 우리의 묵상이 그분에 대한 우리의 감정들을 이끌어 내야 한다. 그 모든 감정 가운데서 나는 무엇보다 그리스도를 갈망하는 마음을 첫 번째 자리에 놓는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삶 속에 있는, 그토록 갈망할 만한 것이 무엇인가? 바로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것이 갈망할 만한 것이다. 그리스도에 대한 모든 것은 너무나 소중하고 탁월하며 필요하고 유익하며 평안과 위로를 준다. 따라서 갈망할 만하다.

1. 그리스도에 대한 가장 작은 것조차 갈망할 만한 것이다. 그 작은 조각도 그리스도라는 찬란한 금의 한 부분이기 때문이다. 보석의 가장 작은 파편이나 광채조차 얼마나 비싸고 가치가 있는가! 예수 그리스도와 연관된 가장 작은 것이라도 그분으로 인해 갈망할 만한 것이 된다. 성경은 오직 그리스도의 발을 씻고 발에 입을 맞추는 것 외에는 그분에게서 더 이상 아무것도 구하지 않은 한 여인에 대해 말한다. 성경에 나오는 또 다른 여인은 그리스도를 향해 다음과 같은 갈망을 토해 낸다. “그 겉옷만 만져도 구원을 받겠다”(마9:21). 막달라 마리아는 다만 돌아가신 그리스도의 몸이라도 두 팔로 안을 수 있기를 구했다. 아리마대 요셉도 그와 같은 마음이었다. 오, 돌아가신 그리스도를 품에 안고 있는 요셉에게 찢기신 그분의 몸과 그 몸을 감싸고 있는 피 묻은 세마포가 얼마나 귀하고 향기로웠겠는가! 그리스도의 흙은 은과 같고 그분의 놋은 금과 같이 귀하다. 세례 요한은 “그의 신발끈을 푸는 것도”(요1:27) 영광으로 생각했다. 한 시편 기자는 다음과 같이 그리스도를 향한 갈망으로 불타올랐다. “주의 궁정에서의 한 날이 다른 곳에서의 천 날보다 나은즉 악인의 장막에 사는 것보다 내 하나님의 성전 문지기로 있는 것이 좋사오니”(시84:10).

2. 그리스도가 행하신 행위들도 특별히 갈망해야 할 것들이다. 오 내 영혼아, 그리스도의 삶을 보며 그분의 친구들이나 적들에게 행하신 더 탁월하고 두드러진 행위들을 생각하고 싶지 않은가? (1)그리스도는 친구들에게 다정하고 관대하셨다. 찾아온 젊은 관원(무엇을 하여야 영생을?)이나 서기관(계명 중 첫째는?) 그리고 생명의 떡이 없어 기진한 사람들이 “목자 없는 양과 같이 고생하며 기진한 것”을 보시고는 “불쌍히 여기셨다”(마9:36). (2)그리스도는 적들에게도 친절하고 자비로우셨다. 처음 만나 사람도 친절하고 친밀하게 대하셨다. 간음을 행한 사마리아 여인에게 얼마나 다정히 대해 주셨는가? 그리스도가 얼마나 즉시 죄인들을 받아 주셨는가? 얼마나 즉시 죄인들의 죄를 사해 주셨는가? 죄를 사한 뒤에는 죄인들을 얼마나 은혜롭게 대해 주셨는가? 배신한 베드로, 그리스도는 그를 결코 내어 쫓지 않으셨다. 그를 비판하지도 않으셨다. 다만 이렇게 물으셨다. 요한의 아들 시몬아, 네가 나를 사랑하느냐? 자주 그리스도는 사람들에게 해를 입고 공격을 당하셨다. 그러나 그때마다 그분이 어떻게 행하셨는가? 분노로 불타올랐는가? 불이 하늘에서 내려와 그들을 멸하라고 명령하셨는가? 그러나 그리스도는 다정하고 온유하게 대하신다.

3. 무엇보다도 가장 찬양받기에 합당하고 거룩하신 그리스도가 가장 갈망할 만한 분이다. “내 사랑하는 자는 희고도 붉어 많은 사람 가운데에 뛰어나구나……입은 심히 달콤하니 그 전체가 사랑스럽구나 예루살렘 딸들아 이는 내 사랑하는 자요 나의 친구로다”(아5:10, 16). 그렇다. 그리스도는 온전히 사랑스럽고 갈망할 만한 분이다. 그래서 바타블루스는 그것을 다시 이렇게 표현한다. “그리스도가 모든 갈망이다.” 그리스도는 행위와 그분 자체로 사모할 만하다. 그러니 와서 그리스도를 향한 네 갈망을 토해 놓으라! 오 내 영혼아, 이 그리스도를 누리기를 갈망하라! 하늘에 거룩한 외침을 올려 드리라! “오, 이 그리스도가 나의 그리스도이기를! 오, 그리스도의 행위와 그리스도 자체가 나의 소유이기를! 오, 그리스도가 하신 모든 말씀과 행하신 모든 행동이, 그분의 머리부터 발끝까지 모두 나의 소유이기를!”

4. 삶에서 우리의 구원이라는 위대한 사역을 수행하신 예수님을 소망하는 것

참된 소망은 요동하고 흔들리며 의심하는 소망이 아니라 확신에 거하는 소망이다. 올바른 근거 위에 서 있는 소망이다. 내 소망을 세운 근거와 기초는 무엇인가?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살후2:16). 오, 당신의 영혼을 들여다보라! 그 안에 그리스도의 삶이 주는 은혜로운 영향들이 있는가? 우리가 그리스도의 지체이고 그리스도가 우리의 머리가 되신다면 분명히 그분의 삶은 우리의 영혼에 분명한 영향을 미칠 것이다.

1.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라면 나는 죄의 법에서 자유롭게 되었다. 이것은 사도가 분명히 입증한 것이다. “이는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생명의 성령의 법이 죄와 사망의 법에서 너를 해방하였음이라”(롬8:2). 그리스도의 생명은 그 온전함 때문에 ‘생명의 성령’이라고 불린다. 생명의 성령은 그 안에 놀라운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 능력을 여기에서는 ‘법’이라는 용어로 표현했다. 그 능력은 믿는 자들 안에서 율법이나 죄의 권세에서 벗어나게 하는 역사를 행한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게 미치는 영향력에도 불구하고 죄는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다. 나는 죄를 지니고 태어난다는 점에서 여전히 죄인이다. 그러나 죄의 권세, 즉 심판하는 권세라는 점에서 볼 때 나는 죄악에서 자유롭다. 또한 다스리고 통치하는 권세라는 점에서 볼 때 나는 죄의 더러움에서 자유롭다. “너희는 죄가 너희 죽을 몸을 지배하지 못하게 하여 몸의 사욕에 순종하지 말고”(롬6:12). 죄는 하나님의 백성 위에 왕이 아닌 폭군으로서 통치한다. 때로는 의지와 동의가 죄와 함께 할 수도 있다. 그러나 바로 그 순간에도 “하나님의 씨가 그의 속에 거한다”(요일3:9). 비록 그 씨가 죽은 것처럼 보일지라도 하나님의 때가 되면 다시 살아나서 폭군의 왕좌를 뒤집고 내어 쫓을 것이다. 따라서 경건한 자들 안에서는 악한 자들에게서 볼 수 있는 것처럼 전제로써 죄의 동의하는 일도, 죄의 결과에 대해 동의하는 일도 있을 수 없다. 죄는 내 안에서 결코 왕 노릇할 수는 없다. 이것을 보라! 그리스도의 생명의 능력과 다스림이 내 마음과 삶에서 죄가 왕처럼 군림하며 누렸던 권세와 통치를 던져 버리지 않는가! 여기에 소망의 한 가지 근거가 있다.

2.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라면 나는 그분이 행하신 것처럼 행동하게 될 것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의 효력이 너무나 크기 때문에 우리의 삶이 그에 합당한 열매들을 낳고 그분의 삶을 닮아 가게 된다. 사도는 우리와 그리스도의 연합이 우리의 대화와 행실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한다. “그의 안에 산다고 하는 자는 그가 행하시는 대로 자기도 행할지니라”(요일2:6). 이것과 연관된 말씀으로 거룩한 권면의 말씀들이 있다(엡5:2, 요13:15, 벧전1:15). 내 행실이 그분을 본받는다면 그리스도의 생명은 내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가 이룰 모든 거룩함의 형상이요, 이상이요, 전형적인 모습이요, 기준이다. 그러니 오라, 오 내 영혼아, 예수님을 바라보라! 그리고 너 자신을 들여다보라. 그분의 모습을 더욱더 닮아 갈 때까지 계속해서 바라보고 또 바라보라. 네가 그리스도와 같은 모습, 같은 형상을 지니도록 변화되는 방법이 바라보는 것 외에 무엇이 있는가? 복음서에서 선포하는 대로 그리스도의 성품을 바라보라. 그분의 태도와 그분이 집에서, 밖에서 나누시는 대화를 들여다보라. 그리고 너 자신을 되돌아보라. 그리고 내게 말하라. 네 안에서 그리스도의 성품과 어울리는 성품을 발견할 수 있는가? 그리스도의 태도와 어울리는 태도를, 그리스도의 대화와 어울리는 대화를 발견할 수 있는가? 너는 모든 면에서 그분을 조금이라도 닮아 가고 있는가? 그렇다면 여기에 소망을 가질 또 다른 근거가 있다. 오, 그것으로 인해 기뻐하라. 그것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하라.

3.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라면 나는 그리스도를 경탄하고 사모하며 믿고 순종하게 될 것이다. (1)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자들은 그분의 가르침과 표적들에 경탄한다(눅4:22, 마15:31, 막6:51, 눅9:43). (2)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자들은 그분에게 경탄할 뿐 아니라 그분을 경배한다(마8:2, 9:18, 14:33). (3)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자들은 그분을 경배할 뿐만 아니라 그분을 믿었다(막9:23-24, 요6:66-69). (4)그리스도의 생명을 소유한 자들은 그분을 믿을 뿐만 아니라 그분에게 순종했다(롬6:17, 마4:19-20, 요8:31). 너는 그리스도의 생명과 삶에 대한 아름답고 놀라운 말씀들을 보고 들었다. 너는 이제 그리스도를 경탄하고 사모하며 믿고 순종하기 시작하는가? 네 마음이 뜨거워지는가? 네 감정에 불이 일어나고 있는가?

4. 그리스도의 생명이 내 생명이라면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노라. 그러나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갈2:20, KJV).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으나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노라.” 바울은 하나의 영혼 안에서 그리스도의 죽음과 그리스도의 생명을 결합시킨다. 오직 그리스도의 생명의 미덕을 느끼는 자 외에는 어느 누구도 그리스도의 죽음의 유익을 알 수가 없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서 사시는 것을 우리가 느끼지 못한다면 그리스도가 우리를 위해 죽으셨다고 확신할 수 없다. 그리스도의 죽음의 능력이 내 욕망을 죽인다면 그리스도의 생명의 미덕이 내 영혼을 일깨울 것이다. “그럼에도 나는 살아 있노라. 그러나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그리스도께서 내 안에 사시는 것이라.” 이 말은 다소 역설적으로 들리지만 다음과 같은 뜻을 갖고 있다. ‘나는 하나님에 대해서는 살고 나 자신에 대해서는 죽는다. 나는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살고 세상에 대해서는 죽는다. 나는 하나님의 뜻에 따라 살고 나 자신의 욕망과 계획을 따라 살지 않는다.’ 어떤 이들은 다음과 같이 해석하기도 한다. “나는 은혜 아래 살고 율법 아래 살지 않는다.” 그 말은 이런 뜻이다. “전에 나는 전적으로 율법 아래 살았다. 그로 인해 나는 하나님의 교회를 핍박하는 자가 되었다. 그것이 내 안에서 모든 탐욕의 방식으로 역사했고 나를 죽였다. 나는 죄 속에서 죽은 자였다. 그러나 이제 나는 그리스도를 받아들였고 더 이상 과거의 내가 아니다. 이제 나는 그리스도가 성령을 통해 나를 깨우고 다스리며 인도하고 힘 주시는 것을 느낀다. 이제 나는 나 자신의 힘이 아니라 그분이 주시는 힘으로 영적으로 거룩하게 산다.” 그리스도인들의 모든 것이 그리스도에게서 온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를 채우시는 샘인 동시에 우리를 소생시키는 생명이다. 그리스도의 생명은 우리가 영적인 삶을 살 수 있도록 우리 안에 들어오고 능력과 영향력을 부어 준다. 오 내 영혼아! 다음과 같은 질문을 스스로에게 해 보라. 너는 하나님에 대해 살고 너 자신에 대해서는 죽었느냐? 너는 그리스도에 대해 살고 세상에 대해서는 죽었느냐? 그리스도의 생명이 특별한 영향을 네 영혼에 주었느냐? 네 감정 속에 그분이 살아 있게 하느냐? < 617-649쪽 >

5. 삶에서 우리의 구원이라는 위대한 사역을 수행하신 예수님을 믿는 것

많은 영혼이 감히 그리스도와 그분의 삶을 자신에게 구체적으로 적용하지 못한 채 저만큼 멀리 떨어져 있다. 그러나 여기에 믿음의 속성이 있다. 믿음은 그리스도와 그분이 하신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되게 하고 적용하고 활용할 수 있게 해 준다. 그리스도가 생애 동안 하신 모든 일과 행위가 그분의 모든 백성에게 끼친 영향력을 묵상한다고 해도 그 속에 내가 속해 있음을 믿지 않는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는가!

삶에서 그리스도에게 믿음을 두고 행하는 법을 생각하라

먼저 명령하겠다. 영혼들이여, 삶에서 그리스도에게 믿음을 두고 행하는 법을 배우라.

1)믿음은 직접 그리스도에게 나가야 한다. 하나님이 맨 처음 주신 약속이 단순히 말씀이 아니라 그리스도에 대한 약속이라는 것에 주목해야 하는 것이다(창3:15, 창22:18). 그리고 그리스도는 무엇보다도 먼저, 그리고 직접적으로 모든 곳에서 구원에 이르는 믿음을 끌어안는 분이다(요3:16, 11:25, 행13:39, 16:31). 그래서 믿음은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이라고 부른다. (갈2:16, 빌3:9을 보라.) 믿음이 붙잡는 분은 그리스도이고 다른 모든 약속이 그리스도에게 달려 있기 때문이다(요3:36, 6:47). 오, 무엇보다도 먼저 이것을 기억하라. 믿음은 그리스도에게 나가야 한다. 그러나 추상적이고 맹목적인 개념 속에 있는 그리스도가 아니라 모든 약속, 특권, 혜택으로 둘러싸인 그리스도에게 달려가야 한다.

2)믿음은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에게 나가야 한다. 그리스도가 단지 약속 안에만 계시고 아직 육신을 입고 오지 않으신 구약 시대에는 하나님 백성의 믿음 안에 그리스도보다는 하나님을 향한 더 보편적인 의지가 있었다. 그리스도에 대해 구약 백성은 단지 희미하게만 알고 있을 뿐이었다. 그래서 구약에서는 백성이 그리스도에게 의지했다는 말씀을 볼 수 없고 오직 하나님에게만 의지했다는 말씀을 볼 수 있다(대하20:12, 20, 시78:21-22). 그러나 신약 시대인 지금은 중보자로 약속되었던 그리스도가 오셨기 때문에 우리의 믿음이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으로서 그리스도에게 더 일반적이고 직접적으로 나아갈 수 있다. 우리의 본질 속에 거하시는 하나님은 단지 신성만을 지니신 하나님 아버지보다 우리의 믿음에 더 친숙한 분이 되셨다.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은 신약에서 더 분명히 선포된다. 그래서 모든 믿는 자의 믿음이 그분을 더 분명히 이해하고 붙잡을 수 있게 되었다. 오, 이것을 명심하라! 당신의 믿음을 더 직접적이고 즉각적으로 행사해 육신을 입고 오신 하나님으로서의 그리스도에게 고정시키라.

영혼들이 그리스도에 대해 그런 믿음을 가질 수 있도록 다음의 것들을 생각하라

1)그리스도의 삶이 얼마나 충만한지를 생각하라. 그리스도의 삶은 거룩과 행복, 성화와 칭의를 담고 있다. 오, 오라! 우리의 성화를 위해 그리스도의 삶이 얼마나 충만한지를 보라. 그분의 삶이야말로 완전함을 보여 주는 가장 정확한 본이 아닌가? 하나님의 말씀 전체를 가장 잘 드러낸 본이 아닌가? 하나님 마음의 이상과 형상을 가장 온전히 나타낸 삶이 아닌가? 모든 사람이 따라 행하며 살아가는 온전한 기준이요 선례가 아닌가? 칭의에 대해 말한다면 그리스도의 삶이야말로 믿음과 칭의의 대상이 아닌가? 그리스도의 죽음, 부활, 승천, 중보뿐만 아니라 그분의 삶을 믿음으로 의롭게 하는 대상이 아닌가?

2)그리스도의 삶이 얼마나 탁월하고 영광스러운지를 생각하라. 그리스도의 삶은 영광스럽다. 그래서 그리스도의 의는 하나님의 성도들이 입는 가장 영광스러운 옷이다. 요한은 환상 속에서 본 교회를 다음과 같이 묘사한다. “하늘에 큰 이적이 보이니 해를 옷 입은 한 여자가 있는데 그 발 아래에는 달이 있고 그 머리에는 열두 별의 관을 썼더라”(계12:1). 나는 이것을 그리스도의 전가된 의를 묘사한 가장 고상하고 시적인 표현이라고 생각한다. 해로 만들어진 옷을 우리가 입고 있다고 상상해 보라. 우리의 모습이 얼마나 영광스럽겠는가! 오,그러나 그리스도의 옷은 그보다 훨씬 더 영광스럽다. 오, 그리스도의 의가 지닌 비교할 수 없는 영광이여! 오, 그리스도의 의가 지닌 탁월함이여!

3)그리스도의 삶이 지닌 합당함을 생각하라. 그리스도의 삶과 미덕은 우리 조건에 가장 합당하다. 그래서 그리스도를 우리의 모든 조건에 적용할 수가 있다. 당신이 병이 들었다면 그리스도가 의사다. 당신이 죽음을 두려워한다면 그리스도가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다.’ 당신이 굶주려 있다면 그리스도가 생명의 떡이다. 당신이 목 마르다면 그리스도가 생수다. 아, 여기에 믿는 모든 자의 복이 있다. 오, 그러니 믿으라.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 당신의 몫이 있음을 굳게 믿으라!

6. 삶에서 우리의 구원이라는 위대한 사역을 수행하신 예수님을 사랑하는 것

사랑이 무엇인가? ‘멋지고 아름답게 보이는 것과 연합하려는 영혼의 역동적인 갈망’이 아닌가! 그렇다면 오, 그리스도의 삶은 얼마나 사랑스러운 대상인가! 그리스도의 삶을 끝까지 읽고 그리스도의 성품, 관계, 행동, 사역 속에서 그분의 가치에 대해 깊이 생각해 본 사람이라면 특별한 사랑으로 그분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스도는 사랑으로 이루어진 분이다. 머리부터 발끝까지 그리스도 안에는 사랑스럽고 갈망할 것들로 충만하다.

오 내 영혼아, 너에게 믿음을 갖도록 설득하려고 얼마나 많은 말을 했는가! 이제 그리스도의 다음과 같은 행위들 속에 네가 속해 있음을 믿는다면 네 믿음이 네 손을 잡고 한걸음 더 앞으로 나가도록 인도해야 하지 않겠는가? 여기에 사랑을 더 뜨겁게 불태울 충분한 연료가 없는가? 사랑의 역사(그리스도의 삶의 역사)를 읽었을 때 그 안에 있는 모든 것이 네 마음에 사랑을 불타오르게 하지 않는가? 오라, 그리고 다시 읽으라! 그리스도 안에는 우리의 사랑을 얻고 우리의 마음을 사로잡는, 온전히 사랑스러운 것들로 가득하다.

7. 삶에서 우리의 구원이라는 위대한 사역을 수행하신 예수님을 기뻐하는 것

그리스도의 삶 속에 혹은 그분의 삶을 다룬 모든 말씀 속에 기쁨을 불러일으킬 만한 것이 무엇이 있는가? 사실 기쁨과 감정을 불러일으키는 것은 주로 그리스도의 삶을 적용할 때 일어난다.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할 수 있도록 이것에 대해 잠시 살펴보기로 하자.

1)그리스도의 삶을 묵상하자. 마음속에서 그분의 삶을 생각하자. 그리스도의 삶, 그분의 은혜, 미덕, 거룩한 행위, 우리를 향한 귀한 사랑이야말로 진정 선한 것이 아닌가? 와서 그리스도에게 우리의 마음을 기울이자! 분명히 그리스도는 우리가 그분 안에서 기뻐하게 하실 것이다. 그리고 그것을 위해 우리의 생각을 붙잡아 우리가 어디를 바라보든지 계속해서 그분을 생각할 수 있게 하신다. 우리가 기쁨을 놓치는 이유는 구주를 거의 묵상하지 않기 때문이다.

2)그리스도 안에서 생각하자. 우리가 그리스도의 삶 속에서 누리게 될 분깃과 은혜를 선한 근거들 위에서 소망하자. 오, 이것은 우리의 기쁨에 힘을 줄 것이다. 우리를 말할 수 없는 기쁨과 영광으로 가득 채워 줄 것이다. 참된 기쁨이 있는 곳에는 첫째, 우리 생각 안에 선한 것에 대한 생각이 있고 둘째, 우리 마음 안에서 그것을 기대하는 마음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의 소망을 격려하는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우리의 기쁨을 확장시켜 준다. 사도는 이 둘을 결합시킨다. “소망 중에 즐거워하며”(롬12:12). 소망과 기쁨은 함께 한다. 그리스도의 생명이 나의 생명이라는 것에 대해 확실한 소망을 가지고 있다면 나는 그것으로 인해 기뻐하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바울 사도는 이렇게 말한다.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2:3). 그러나 아! 내게 그 보물 창고에 대해 주장할 권리가 없다면, 그 모든 보화가 내게 무슨 소용이 있단 말인가! 나 자신이 비참하고 처참하며 가난하고 눈이 멀고 벌거벗었다면 다른 사람이 부유하다는 것이 내게 무슨 기쁨을 줄 수 있겠는가? 이것을 보라! 오 내 영혼아, 계속해서 앞에서 제시했던 대로 네가 가진 소망의 근거들을 잘 살펴보라. 그것을 대강 보며 넘어가지 말라. 그리스도에 대해서는 아무리 많은 확신을 가져도 지나치지 않다. 너는 복음서에서 예수님에 대한 이런저런 말씀들을 읽는다. 너는 그 말씀 한 구절 한 구절에 손을 얹고 이렇게 말할 수 있는가? ‘이 말씀은 나를 위한 말씀이다. 이 설교는 나를 위해 선포되었고 이 표적은 나를 위해 행해진 것이다. 나로 믿고 그 이름을 힘입어 생명을 얻게 하려 함이니라.’ 오, 그렇다면 네가 어떻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는가?

3)그리스도의 기쁨으로 점점 더 가까이 나아가자. 그리스도에게 속하는 것, 그리스도를 소유하는 것, 이것은 우리의 기쁨을 크게 확장시켜 준다. “나는 내 사랑하는 자에게 속하였고 내 사랑하는 자는 내게 속하였으며 그가 백합화 가운데에서 그 양 떼를 먹이는도다”(아6:3). 그리스도는 믿음을 통해 나의 주님이 되셨고 나는 사랑을 통해 그분의 소유가 되었다. 나와 그리스도는 결코 갈라놓을 수 없는 연합을 통해 긴밀히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그리스도를 영혼이 받아들이고 적용하는 것, 이것이 우리의 기쁨을 온전히 채워 준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아버지, 우리의 형제, 친구, 남편, 왕, 제사장, 선지자시다. 그리스도는 우리의 칭의, 성화, 지혜, 구속, 평화, 중보자, 대속자, 화목자, 우리의 모든 것이 되신다. 아! 나는 자신을 바라본다. 그리고 내가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깨닫는다. 내게 예수 그리스도가 없다면 나는 아무것도 없는 자다. 그러나 그리스도가 나의 주님이시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 권리가 있다. 그리스도가 내게 속했고 내가 그리스도에게 속해 있다.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모든 결핍과 필요를 채워 주고 공급해 줄 수 있는 충분한 것을 발견한다. 오,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적용하는 것이 영혼에 가져다주는 놀라운 기쁨이여! 그리스도가 없다면 그 기쁨은 결코 느낄 수 없다. 그래서 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기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그분이 아닌 다른 어떤 것에서도 기뻐할 수가 없다.

오, 내 영혼아! 너의 기쁨의 능력이 어디에 있느냐? 오라, 이 찬양받으실 대상에게, 주 예수 그리스도에게 그 능력을 가지고 오라. 어떻게 그것을 해야 할지를 모른다면 먼저 그리스도를 묵상하라. 그분의 삶에 대한 말씀들을 생각하라. 네 소망의 근거들과 그리스도에 대한 확신을 바라보라. 확신 가운데 거하라. 그분과의 연합을 더 뜨겁게 열망하라. 그리스도의 기쁨을 더 뜨겁게 열망하라.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8. 삶에서 우리의 구원이라는 위대한 사역을 수행하신 예수님을 간구하는 것

1)우리는 기도해야 한다. 예수님이 생애 동안 혹은 이 땅 위에서 사역 하시는 동안 행하신 모든 것이 우리의 것이 될 수 있다. 우리는 그렇게 되기를 소망한다. 그리고 그렇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우리는 그렇게 되게 해 달라고 기도한다.

2)우리는 그리스도의 삶에 대한 모든 말씀으로 인해 하나님을 찬양해야 한다. 아 내 영혼아, 그리스도가 너를 위해 이 모든 일을 하셨는가? 너의 영혼을 구속하고 너를 하늘의 유업을 받을 자녀로 삼기 위해 그분이 율법 아래 나셨는가? 너에게 믿음을 갖게 하기 위해 그분이 그토록 많은 설교를 전하고 그토록 많은 표적을 행하셨는가? 오, 네가 얼마나 그분의 이름을 찬양하고 높여야 하겠는가! 네가 얼마나 이 복된 찬양을 발해야 하겠는가!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의 아버지 하나님을 위하여 우리를 나라와 제사장으로 삼으신 그에게 영광과 능력이 세세토록 있기를 원하노라 아멘”(계1:5-6).

9. 삶에서 우리의 구원이라는 위대한 사역을 수행하신 예수님을 닮아가는 것

우리는 예수님의 어떤 모습을 닮아 가야 하는가

1)닮아 갈 수 없는 영역. 표적을 행하는 것처럼 그리스도의 신성에만 합당한 사역에서는 그리스도를 닮아 가서도 안 되고 닮아 갈 수도 없다. 나는 표적이 특권을 통해 일시적으로 사도들과 몇몇 사람에게 허락되었다는 것을 부인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은 단지 사역과 섬김을 위해 허락된 것뿐이다. 그들의 성화나 구원을 위한 것은 결코 아니었다. 또한 영혼을 구속하는 것이나 우리 죄를 위해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키는 것처럼 중보자로서의 사역에서도 그리스도를 닮아 갈 수 없다. 예루살렘에 절기마다 올라가 의식을 행하신 것처럼 그분을 닮아 갈 필요가 없다.

2)닮아 갈 수 있는 영역. 다음의 영역들에서는 적극적으로 그리스도의 삶을 닮아 가야 한다. ①그리스도의 판단과 의지, 사랑과 긍휼에서. “너희 안에 이 마음을 품으라 곧 그리스도 예수의 마음이니”(빌2:5). ②그리스도의 미덕과 은혜, 내재적인 거룩함에서. “나는 마음이 온유하고 겸손하니 나의 멍에를 메고 내게 배우라”(마11:29). “나 바울은 이제 그리스도의 온유와 관용으로 친히 너희를 권하고”(고후10:1). ③그리스도의 말씀과 그분이 사용하신 천상의 영적인 언어에서. “그 사람이 말하는 것처럼 말한 사람은 이때까지 없었나이다”(요7:46). “그는 죄를 범하지 아니하시고 그 입에 거짓도 없으시며 욕을 당하시되 맞대어 욕하지 아니하시고”(벧전2:22-23). ④그리스도의 태도와 대화, 하나님과 나눈 친밀한 동행에서. “너희는 택하신 족속이요……너희를 어두운 데서 불러내어 그의 기이한 빛에 들어가게 하신 이의 아름다운 덕을 선포하게 하려 하심이라”(벧전2:9). 아름다운 덕은 예수 그리스도가 보여 주신 미덕을 당신의 삶과 대화 속에서 드러내라는 뜻이다. ⑤그리스도의 모든 행위, 실천과 도덕적인 순종을 행할 의무에서. 그리스도가 구체적인 도덕에 대해 무엇을 명령하고 무엇을 행하셨든지 그 속에서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가야 할 의무와 책임이 우리에게 있다.

우리는 왜 예수님을 닮아 가야 하는가 무슨 동기로 그분을 닮아 가야 하는가

1)그리스도가 바로 그 목적을 위해 많은 일을 하셨고 너무나 큰 고통을 당하셨기 때문이다. 예수님이 보여 주신 거룩함과 미덕의 모든 본과 예수님이 당하신 모든 고난, 예수님이 흘리신 모든 피는 부분적으로 이것 때문이었다. 바로 예수님이 친히 우리에게 본이 되기 위해서다. 예수님이 친히 세상의 모든 세대가 천국으로 가는 여정 길에 빛을 비추어 길을 안내하는 별이 되고 불기둥이 되기 위해서다. 오, 내 영혼아! 이것이 너에게 그리스도를 따라가라고 어떻게 요구하고 있는가!

2)그리스도가 세상에 존재한 최선이자 최고의 본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는 그리스도를 닮아 가야 한다. 우리는 네로의 이야기에서 그 예를 볼 수 있다. 네로의 목이 삐뚤어져 있었는데 당시 정치적 야심에 불타는 사람들에게는 네로처럼 목을 삐뚤게 하고 다니는 것이 유행이자 정중한 표현이었다고 한다. 그렇다면 그리스도야말로 성도들이 무엇보다도 닮아 가야 할 그들의 왕이 아니신가? 그분을 우리의 삶과 방식의 안내자로 삼자.

3)그리스도가 친히 본을 보여 주실 뿐만 아니라 그 본을 우리에게 쉽고 만족스러운 것이 되게 하며 상황에 맞게 제시해 주심으로써 우리를 도우시기 때문이다.

4)그리스도가 말씀으로 그분의 발자취를 따라오라고 우리에게 명령하셨기 때문이다(마11:29, 요13:13-15, 골3:12-13, 벧전1:15-16).

우리는 어떻게 예수님의 삶을 닮아 가야 하는가

1)그리스도의 생각을 우리 자신에게 이루어 가자. 성경에서 발견하는 그리스도의 삶을 전체로써 뿐만 아니라 세밀한 모든 부분까지도 우리 앞에 세워 놓자.

①나는 그리스도의 마음을 본다. 그분의 판단과 의지, 감정을 본다. 사랑, 기쁨, 즐거움, 그 외의 다른 감정들을 본다. 특별히 예수 그리스도의 긍휼을 본다. 오, 그리스도가 인간을 향해 품으신 그 귀한 감정과 긍휼이여! 그리스도의 긍휼, 감정, 불쌍히 여기심이야말로 그분이 하늘에서 내려와 이 땅 위에서 행하신 이유였다.

②나는 그리스도 안에서 은혜를 본다. 오, 그분은 은혜로 충만한 분이었다. 첫째, 그리스도 안에는 온유함이 있었다. 둘째, 그리스도 안에는 겸손함이 있었다. 셋째, 그리스도 안에는 인내가 있었다. 넷째, 나는 말씀과 행동 속에서 그리스도의 대화를 바라본다. 그분의 말씀이 은혜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입술에서는 한 마디도 무익한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리스도는 모든 말씀을 모든 상황과 때, 장소, 방식과 주제에 가장 합당하게 하셨다.

2)그리스도를 본받는 위대한 일을 감당하기 위해 겸손해지자. 우리 앞에 얼마나 탁월한 본이 있는가! 그러나 우리는 이 찬양받으실 분에게서 얼마나 멀리 떨어져 있고 그분을 본으로 삼고 따라가기에 얼마나 부족한 자들이란 말인가! 내 마음을 점검할 때 그분과는 정반대인 내 모습을 발견할 뿐이다. 나와 그리스도가 지옥과 천국만큼이나 서로 상반된다는 것을 깨달을 뿐이다.

①내 생각에서. 내 내면은 교만과 악의로 가득하다. 나는 세상의 영으로 가득하다. 내 마음 안에 무엇이 있는가? 오직 욕망과 반역, 어둠과 선한 것에 대해서는 죽은 마음밖에 없지 않은가? ②내 안에 있는 샘이 그토록 탁하고 진흙투성이라면 내게서 깨끗한 시내가 나오기를 기대할 수 있는가? 내게서 수없이 나오는 말들이 무슨 말이란 말인가? 내 입술에서는 얼마나 무익하고 악하며 죄를 물든 말들이 매일같이 쏟아져 나오고 있단 말인가? ③이 모든 것이 내가 얼마나 자주 행한 일들이었는가? 이웃에게 한 잘못, 세상의 무대에서 드러낸 교만, 세상에서 나 자신에게도 다른 사람들에게도 선한 일을 하지 못하며 보낸 시간, 악을 저지를 뿐만 아니라 선을 행하지 못한 모든 일이 아닌가? 오 내 영혼아, 그것이 누구의 형상인가? 그리스도의 형상인가? 사탄의 형상인가? 내 마음과 삶에서 그토록 많은 더러움과 오류를, 그리스도의 삶과는 너무나 대조적인 모습을 발견한다면 티끌 속에 누워 한탄해야 하지 않겠는가? 아 슬프도다! 그리스도의 삶과 내 삶 사이에 얼마나 커다란 불일치가 있는가! 그러니 오 내 영혼아, 겸손하라!

3)그리스도를 닮아 가도록 잠자고 있는 우리 영혼을 깨우자. 엄격하게 우리 마음을 살핀다면 이 의무에 대해 얼마나 뒷걸음질치고 있는지를 알게 될 것이다. 사도가 무엇이라고 말하는가? “하나님이 미리 아신 자들을 또한 그 아들의 형상을 본받게 하기 위하여 미리 정하셨으니”(롬8:29). 이것은 영원 전부터 하나님이 품고 계셨던 위대한 목적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데 오 내 영혼아, 너는 하나님이 이미 정하신 영원한 계약을 깨뜨리려고 하느냐? 오, 하나님이 그것을 금하신다! 악한 영의 일을 멸하고 깨뜨리는 것, 특별히 내 안에서 사탄이 일하는 것과 사탄의 형상을 깨뜨리고 내 영혼에 인을 치시는 것이 그리스도가 세상에 오신 목적 가운데 하나라면 어떻게 내가 그분을 닮아 가려고 하지 않을 수 있단 말인가! 오 내 영혼아, 너는 그리스도가 육신을 입고 세상에 오신 목적을 파괴하려고 하느냐? 오, 그것은 하나님이 금하시는 것이다! 너를 앞서 걸어간 성도들의 본을 생각하라. 예수님처럼 되는 것이 그들의 거룩한 야망이었다. 그러니 그것에서 그들의 모습을 따라가라. 그렇게 따라가는 것이 복된 일이기 때문이다.

4)그리스도의 삶을 기준으로 우리의 삶을 세워 가자. 어떤 행동을 하든지 이 규칙 위에서 행하자. ①그리스도가 피하신 죄악된 행위들 속에서. 부패함이나 사탄에 이끌려 술 취하고 방탕하게 사는 죄를 짓도록 유혹당할 때, 죄악되고 패역한 자들과 어울리고 하나님을 비방하며 저주하는 죄를 짓도록 유혹당할 때 나는 이렇게 물어야 한다. “이것이 그리스도가 사셨던 삶인가? 그리스도가 다시 이 땅 위에 사신다면 이렇게 사실까?” ②본보기와 말씀 모두를 우리에게 주신 도덕적인 순종의 경우 나는 그리스도를 나의 규범으로써 바라본다. ③예수 그리스도에게 시선을 고정하고 그분만을 바라보자. 그분의 본을 닮아 가고 있다고 느낄 때까지 우리의 영적인 눈으로 계속해서 그 본보기를 바라보자.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은 강력한 능력이 있다. 그리스도를 바라볼 때 변화시키는 미덕이 그분에게서 흘러나오기 때문이다. 그리스도의 겸손함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우리가 겸손해지지 않을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온유하고 다정한 심령을 생각하면서 어떻게 우리가 계속해서 불같이 화를 내고 거칠게 짜증내는 마음을 가질 수 있겠는가? 결코 그럴 수 없다. 마음은 품고 있는 것과 조화를 이루어야 한다. 우리가 그리스도를 옳게 바라보고 있다면 분명히 우리 마음과 그리스도 사이에 합당한 어울림이 있어야 한다. 우리의 영적인 눈이 볼 수 있도록 그리스도의 본을 우리 눈 앞에 놓으라. 그리고 그 본을 우리 두 눈으로, 이성과 믿음의 눈으로 바라보자.

그러나 우리가 그리스도를 닮아 가고 있다는 것을 느낄 때까지 어떻게 우리 믿음의 눈을 이 복된 대상에게 고정시킬 수 있는가? ①이 점에 대해 의도적으로 우리의 믿음을 행사하자. 매일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일에 따로 시간을 떼어 놓는다면, 기도할 때처럼 진정한 마음으로 그분을 바라본다면 그가 얼마나 놀라운 복을 누리게 되겠는가? ②방해물을 제거하자. 사탄은 세상이라는 티끌을 사용해 영혼이 그리스도를 바라보는 것을 방해하려고 한다. 오, 우리 눈을 세상의 헛된 것들에 두지 않게 주의하라! ③우리 눈을 오직 이 복된 대상에게만 고정시키자. 이리저리 두리번거리는 눈은 어떤 것도 명확하게 볼 수 없다. 우리 믿음의 눈이 그리스도의 삶에 한결같이 고정되어 있어야 한다. 마치 온 세상도 우리를 움직일 수 없다는 듯이, 뒤에 있는 모든 것은 잊어버리고 이 세상에서 오직 바라보는 일 외에는 다른 할 일이 전혀 없는 것처럼 그분을 바라보아야 한다. ④소망하고 열망하면서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눈에는 단순히 보는 능력만이 아니라 감정도 깃들어 있다. 성전 문 앞에 나면서 못 걷게 된 이가 베드로와 요한에게서 “무엇을 얻을까 하여 바라보았던”(행3:5) 것처럼 말이다. 그렇게 우리도 그리스도에게서 은혜를 받을 수 있기를 겸손히 기대하면서 열망하는 눈으로 바라보자. ⑤(믿음 안에 있다면) 우리 기도를 지금 이 순간에도 하나님이 들으신다는 것을 확신하라. 은혜를 받을 것이라는 강한 기대감과 그 기도를 통해 유익을 얻을 것이라는 확신을 가지고 그리스도에게 나온다면 결코 빈 손으로 돌아가지 않을 것이다. ⑥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지금은 우리 안에서 그리스도를 닮아 가는 것을 느끼지 못한다면 적어도 앞에서 말한 것들을 계속해서 행동으로 옮겨 보자. 은혜의 은사들은 조금씩, 조금씩 점차적으로 주어진다. 우리가 과거에 받은 은혜의 줄기만을 의지해 살아가지 않게 하기 위해서다. 또한 우리가 계속해서 샘으로 달려가 물을 마실 수 있게 하기 위해서다. 아! 그리스도가 그분 자신을 우리 마음속으로 흘러보내주시는 은혜가 우리에게 얼마나 끊임없이 필요한가! 그래서 우리는 우물의 머리이신 그리스도를 기다려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가 우리의 거룩함을 시작하시는 분이요 완성시키는 분으로 정하신 그리스도를 의지적으로 바라보아야 한다. 그리고 그리스도가 결코 하나님이 맡기신 일을 미완성 상태로 내버려 두지 않으신다는 것을 믿어야 한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는 확신하노라”(빌1:6). 오, 그러니 그리스도가 당신 영혼의 갈망을 완성하실 때까지 결코 그분을 바라보는 일에 지치지 말라.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PBA
글쓴이 : 말씀을사모하는자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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