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5장 그리스도의 고난
1. 부분과 시간으로 나누어진 그리스도의 고난의 날
2. 그리스도가 건너신 시내
십자가에 달리시기 전날 밤에 대한 첫 번째 성경 본문은 그리스도가 기드론 시내를 건너 겟세마네 동산에 가신 내용을 담고 있다. “예수께서 이 말씀을 하시고 제자들과 함께 기드론 시내 건너편으로 나가시니 그 곳에 동산이 있는데 제자들과 함께 들어가시니라”(요18:1).
그리스도가 시내를 건넌 것은 예언을 성취하기 위한 것이었다. “길 가의 시냇물을 마시므로”(시110:7). 시내라는 말을 통해 우리는 하나님의 진노, 예수 그리스도에게 다가올 많은 고난을 알 수 있다. ①물은 고난을 상징한다(시18:4, 42:7, 69:1). ②그리스도가 물을 마신다는 뜻은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신다는 것을 뜻한다. 물과 고난이라는 두 단어는 서로 연관되어 있다. “내가 마시려고 하는 그 잔을 너희가 마실 수 있으며, 또 내가 받는 그 침례를 너희가 받을 수 있느냐?”(마20:22, KJV).
그리스도가 시내를 건너 동산에 가시면서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마태는 다음과 같이 적고 있다. “이에 그들이 찬미하고 감람산으로 나아가니라 그 때에 예수께서 제자들에게 이르시되 오늘 밤에 너희가 다 나를 버리리라 기록된 바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 하였느니라”(마26:30-31). 여기서 “하나님이 목자를 치실 것이다.”는 말로 예언자 스가랴의 예언을 통해 하나님의 명령임을 증명하신다. “칼아 깨어서 내 목자 내 짝 된 자를 치라 목자를 치면 양이 흩어지려니와”(슥13:7). 그리스도가 고난을 당하는 것은 하나님의 단순한 허락이 아니었다. 하나님의 적극적인 선포요, 능동적인 섭리였다. 그 계획은 오래전에 세워졌고 하나님의 품속에 숨겨져 있었다. 그리고 마침내 하나님은 그 일이 계획하신 그대로 세상에서 이루어지기를 원하셨다. 그리스도의 고난의 이야기는 오래전 하늘의 회의에서 이미 결정된 것이었다.
제자들이 그리스도의 말씀에 대한 대답
“내가 목자를 치리니 양의 떼가 흩어지리라.”는 계시를 들은 제자들은 놀라움을 금치 못한다. 베드로가 가장 먼저 말한다. “모두 주를 버릴지라도 나는 결코 버리지 않겠나이다.” 오, 이 얼마나 경솔한 자신만만함이란 말인가! ①베드로는 마치 다른 제자들은 모두 연약하지만 자신만은 강한 것처럼 스스로를 드러낸다. ②베드로는 영원 전에 세우신 하나님의 위대한 계획을 반대하고 나선다. ③베드로는 자신만만한 태도로 하나님의 도우심을 구하지 않는다.
하나님의 진노를 상징하는 시내를 건너시는 그리스도의 슬픔
기드론 시내는 우리 구주의 고난을 가리킨다. 다윗이 압살롬을 피해 예루살렘을 떠날 때의 모습을 성경은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온 땅 사람이 큰 소리로 울며 모든 백성이 앞서 건너가매 왕도 기드론 시내를 건너가니 모든 백성이 광야 길로 향하니라”(삼하15:23). 이 이야기 속에서 다윗 왕은 만왕의 왕이신 예수님을 예표한다. 지금 그리스도는 또 다른 다윗으로서 그분의 병사들인 제자들과 함께 머리를 가린 채 맨발로 예루살렘을 떠나고 계신다. 예수님이 어떤 눈물을 흘리며 건너가셨는지는 알 수가 없다. 그러나 분명히 예수님과 제자들 모두 깊은 슬픔에 젖어 있었을 것이다.
적용. 1. 기드론 시내는 깨달음을 준다. 기드론 시내는 그리스도인의 삶을 올바르게 보여 준다. 우리의 삶이 어떠한가? 바로 눈물의 골짜기를 지나 고난의 시내를 건너는 것이 아닌가! “의인은 고난이 많으나”(시34:19). “우리가 하나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많은 환난을 겪어야 할 것이라”(행14:22).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요16:33). “무릇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경건하게 살고자 하는 자는 박해를 받으리라”(딤후3:12). 우리의 안식은 이 세상에 있지 않다. 이 세상에 있는 것이 무엇인가? 오직 고생의 방주요 헛됨의 학교요 기만의 전시장이며 오류의 미로, 황량한 광야, 돌투성이의 들판, 폭풍이 몰아치는 바다, 범람하는 시내, 온갖 비참함으로 가득한 눈물의 골짜기가 아닌가!
2. 기드론 시내는 책망한다. 십자가를 지고 그리스도를 따르는 것을 배우는 것은 기독교의 기본이다. 오! 왜 우리는 눈물의 골짜기에서 기쁨을 구하려고 하는가? 땅은 기쁨의 장소가 아니다. 오히려 슬픔과 어려움, 애통과 고난의 장소다. 아, 이 땅의 작은 만족을 위해 천국을 잃어버린 어리석은 아담의 후손들이요! 이 모든 이 모든 쾌락이 단지 이 땅 위에 있을 때뿐이고 결코 영원히 계속될 수 없음을 기억한다면 그때도 여전히 세속적인 기쁨이 당신을 만족시키겠는가! “너는 살았을 때에 좋은 것을 받았고 나사로는 고난을 받았으니 이것을 기억하라 이제 그는 여기서 위로를 받고 너는 괴로움을 받느니라”(눅16:25).
3. 기드론 시내는 가르침을 준다. 아, 형제 자매들이여! 기억하자. 우리는 이 땅 위의 순례자요 나그네일 뿐이다. 우리의 길은 시내를 건너 기드론 골짜기로 뻗어 있다. 우리는 ‘그 길에서 먼저 그 시냇물을 마시지’ 않고서는 그리스도와 함께 영광 속으로 들어가기를 기대할 수 없다. 우리는 수많은 고난을 견뎌야 한다. 당신은 말할 것이다. ‘그것은 너무나 어려운 말입니다. 누가 그 많은 고난을 견딜 수 있겠습니까?’ 예수님이 예루살렘에서 온전히 이루실 그분의 고난에 대해 제자들에게 말씀하셨을 때 베드로는 그렇게 하지 말라고 주님을 말렸다. 그러나 예수님은 그 말로 인해 베드로를 사탄으로 부르신다. 그것은 고난을 피하는 것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계획을 막는 가장 큰 반대임을 보여준다. 우리 안에도 이런 베드로의 기질이 얼마나 많은가! 오, 이 고난의 교리는 난봉꾼이나 도덕률 폐기론자들과는 어울릴 수 없다. 그래서 우리 회중이 그들의 회중보다 수가 적은 것이다. 순종의 멍에를 깨어 버리고 제자라는 결속력을 풀어 버리는 자들, 값싼 신앙을 설교하고 꽃밭 한가운데 있는 천국을 제시하는 자들, 종려나무를 융단처럼 흩뿌리고 죄 아래서 자유롭게 살라고 제안하는 자들, 현재의 즐거움과 영원함을 화해시키려는 자들, 그런 자들의 학교는 제자들로 가득 찰 것이다. 그러나 십자가와 고난, 어려움과 거룩한 삶의 엄격함을 설교하는 자들은 찬양받으실 주님을 소유하게 될 것이다. 비록 세상에서 비난받고 버림받겠지만 그것이 그리스도가 우리를 인도하신 길이라면 그분을 따라가자. 다른 사람들이 시온에서 쉽고 편안하게 있는 동안 우리는 계곡으로 그분을 따라가자. 그리고 기드론 시내를 건너자.
3. 그리스도가 들어가신 동산
“이에 예수께서 제자들과 함께 겟세마네라 하는 곳에 이르러”(마26:36). 겟세마네 즉 ‘풍요로운 계곡’이라고 불리는 곳에 우리 구주가 들어가신 이유가 분명히 있다고 나는 믿는다. ①동산은 한적한 장소이기 때문에 묵상과 기도를 하기에 적합했다. ②죄를 지어 타락한 곳이 바로 동산이었기 때문에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속이라는 가장 위대한 사역을 시작하는 장소로써 동산을 택하셨다. 첫 번째 동산에서는 모든 악이 시작되었다. 그러나 이 동산에서는 우리가 모든 악에서 벗어나 회복되는 역사가 시작되었다. 첫 번째 동산에서는 첫째 아담이 사탄에게 넘어가 패배했다. 그러나 이 동산에서는 둘째 아담이신 예수 그리스도가 사탄을 이기고 제압하셨다. 첫 번째 동산에서는 인간이 금지된 열매를 먹는 어리석음과 탐욕을 범했지만 이 동산에서는 그리스도가 땀이 피로 변할 정도로 간절히 기도하셨다. 첫 번째 동산에서는 죽음이 처음으로 세상에 들어왔다. 그러나 이 동산에서는 우리를 죽음에서 생명으로 다시 회복시키기 위해 생명이 들어온다. 첫 번째 동산에서는 죄를 범할 수 있는 아담의 자유가 우리 모두를 속박으로 이끌었다. 그러나 이 동산에서는 그리스도가 결박당하고 고랑에 차였기 때문에 우리가 속박에서 풀려나 자유로운 자로 회복되었다. ③그리스도는 특별히 적들이 더 쉽게 그분을 찾아낼 수 있도록 이 동산으로 들어가셨다(요18:2).
4. 그리스도가 동산에서 하신 기도
그리스도의 기도
그리스도는 하늘에 계신 아버지에게 기도하신다. 그분은 무릎을 꿇으실 뿐만 아니라 땅에 완전히 엎드리신다. 그리스도는 슬픔만큼이나 확고한 목적을 가지고, 마치 그분이 마실 잔이 어떤 것이든 전혀 개의치 않고 언제라도 순종하겠다는 마음으로 기도하신다. “내 아버지여 만일 할 만하시거든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 그러나 나의 원대로 마옵시고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마26:39).
1)그리스도가 기도를 드린 분은 바로 그분의 아버지, 하나님이었다. 그리스도가 신성 속에서 기도하신 것이 아니라 인성을 따라 삼위일체 하나님의 한 분이신 성부 하나님께 기도하셨다.
2)그리스도가 기도하신 것은 “이 잔을 내게서 지나가게 하옵소서”이다. 그리스도의 기도가 잔을 거두는 것으로 들으심을 얻은 것이 아니라 그 잔을 모두 마셨다. 하지만 그 잔은 그리스도가 기도한 대로 아주 짧은 시간 안에 그분을 지나갔다. 짧고 순간적인 죽음을 통해 그리스도는 그분의 백성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값을 지불하셨다.
3)그리스도가 하신 기도의 제한은 “만일 할 만하시거든……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이다. 그리스도는 아버지의 뜻이 무엇인지를 알고 계셨다. 그리고 그 뜻에 따라 기도하시며 기꺼이 순복하려고 하신다. ‘만일 할 만하시거든’이라는 표현은 기도의 간절함을 나타낸다. ‘아버지의 원대로 하옵소서’라는 표현은 하나님 아버지에 대한 그리스도의 순종을 나타낸다. 기도는 짧지만 이 한 문장의 기도 속에 필요한 것들이 얼마나 많이 들어 있는가! 이 안에는 겸손한 마음과 낮아진 태도, 끈질긴 갈망과 뜨거운 마음, 합법적인 문제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온전한 순복이 들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이 기도가 그리스도가 이 땅 위에서 하신 가장 뜨거운 기도라고 말한다. 나는 이 기도가 이 땅 위에서 볼 수 있었던 가장 위대한 포기와 하나님의 뜻에 대한 순복이라고 생각한다.
그리스도의 고난
그러나 그 잔 속에 무엇이 들어 있기에 그리스도로 하여금 그 잔을 그분에게서 지나가게 해 달라고 그토록 간절히 기도하게 만들었을까?
1)그리스도가 감당하셔야 하는 커다란 고통. 매를 맞고 채찍질을 당하며 피를 흘리고 십자가에 못 박히시는 고통을 당하셔야 하는 것이다.
2)그리스도가 겪으셔야 하는 커다란 수치. 조롱, 비난, 비웃음 이것은 고통보다 더했다.
3)사람들의 무시와 무관심. 이것이 앞의 두 가지 보다도 더 그리스도의 마음을 찢는 아픔이었을 것이다. 그리스도가 그토록 모진 고난과 비난을 받으셨음에도 그분에 대해 생각하고 마음을 기울이는 자가 거의 없었다는 사실이다. 오, 그것은 그 잔에 담긴 더 쓰디쓴 맛이었다. 오! 그것은 그리스도의 심장을 뚫는 또 다른 창이었다.
4)그리스도가 담당하실 죄악. “우리 모두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시키셨도다”(사53:6). 창조의 처음 때부터 마지막 심판 때까지 세상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모든 죄를 그리스도에게 담당시키신 것이다. 오! 그것이 얼마나 무거웠을까! 다윗은 이렇게 부르짖었다. “내 죄악이 내 머리에 넘쳐서 무거운 짐 같으니 내가 감당할 수 없나이다”(시38:4). 그렇다면 그리스도가 유대인들과 이방인들, 자유자와 종들의 모든 죄를 지시고 “내 마음이 심히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라고 부르짖으신 것은 당연한 일이 아니겠는가! 죄가 그분의 영혼을 무겁게 짓눌렀다. 죄의 무게는 그리스도의 잔에 들어 있는 또 다른 쓴 맛이었다.
5)사탄의 권세와 적의. 악한 영은 이제 지옥의 모든 권세와 적의가 결합한다. 만일 사탄을 그 악한 본질의 관점에서 본다면 사납게 으르렁거리는 사자에 비유할 수 있을 것이다. 또한 사탄을 그 권세의 관점에서 본다면 우리 영혼이나 몸의 어느 한 부분에도 사탄이 도달하지 못할 곳은 없다. 이런 지옥의 악한 영이 하나님의 아들을 향해 무장을 한 채 공격한다면 그것이 어떤 싸움이겠는가! 분명히 그 또한 그리스도의 잔 속에 들어 있는 쓴맛이었다.
6)하나님의 진노 자체. 그것은 그 어떤 것보다도 가장 쓴맛이었다. 하나님의 진노는 그리스도가 마실 잔의 가장 밑바닥에 있었다. 그리스도는 그것까지 모두 마셔야 했다. 그리스도가 받으실 고통은 하나님의 진노 가운데서 주신 고통이었다. 이 진노는 하나님의 가장 강렬하고 맹렬한 진노였다. ‘오 내 아버지여, 당신의 진노 속에 제가 압도당하고 멸망당하지 않게 하소서. 당신의 진노가 제가 견딜 수 있는 것 이상, 제 순종이 감당할 수 있는 것 이상 계속되지 않게 하소서.’
5. 그리스도가 동산에서 겪으신 슬픔과 고뇌
그리스도가 겪으신 슬픔
복음서 저자들은 그리스도의 슬픔이 매우 깊고 컸다는 것을 다양하게 표현한다(마26:37, 막14:33, 눅22:44, 요12:27). 그리스도도 친히 그렇게 말씀하신다. “이에 말씀하시되 내 마음이 매우 고민하여 죽게 되었으니”(마26:38). 아, 그리스도인들이여! 누가 이 슬픔을 말로 표현할 수 있겠는가! 그리스도의 영혼은 슬픔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 표현이 부족하다면 그리스도의 영혼은 극도의 슬픔으로 인해 죽을 만큼 괴로웠다. 이와 같은 슬픔과 고통은 창조 이후에 결코 없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슬픔, 그래서 나는 그것을 감히 언어로 담아낼 수가 없다.
그리스도가 흘리신 땀
누가만이 그리스도가 흘리신 땀에 대해 언급한다. “땀이 땅에 떨어지는 핏방울 같이 되더라”(눅22:44). 그 말씀 속에서 나는 슬픔과 고뇌의 절정을 본다.
1)그리스도가 흘리신 땀은 실제로 피였다. 여기에 그리스도가 겪으신 슬픔과 고뇌의 첫 번째 단계의 절정이 있다.
2)커다란 핏방울. 그리스도가 흘리신 피땀은 작은 이슬 방울같이 흘러내린 것이 아니라 커다란 방울, 커다란 핏방울, 굵은 방울로 흘러내렸다. 그래서 사람들은 그 피땀을 초자연적인 현상이라고 결론짓는다.
적용. 1.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가 피와 땀을 쏟으실 정도로 죄의 짐이 그분을 얼마나 무겁게 짓눌렀는지를 볼 수 있다. 첫째 아담이 처음으로 죄를 범했을 때 그가 받은 형벌은 이것이었다. “네가 흙으로 돌아갈 때까지 얼굴에 땀을 흘려야 먹을 것을 먹으리니”(창3:19). 그러나 이제 둘째 아담이 세상에 있는 모든 믿는 자의 죄를 모두 짊어지신다. 그리스도는 얼굴에서 땀을 흘리실 뿐만 아니라 온몸에서 땀을 흘리신다. 오, 그분의 얼굴을 땀방울이 아닌 엉긴 핏덩어리, 핏방울들이 온통 덮은 채 흘러내리고 있다면 그 얼굴이 어떠했겠는가? 이제 베드로와 함께 울고 다윗과 함께 말하라. ‘내가 여호와께 죄를 범하였노라’ 오, 그렇게 몸의 모든 부분에서 땀을 흘리고 피를 물줄기처럼 흘리신 그리스도를, 굵은 핏방울을 뚝뚝 떨어뜨리신 그리스도를 나의 이 두 눈으로 어떻게 바라보아야 하겠는가!
2. 우리는 여기에서 그리스도의 놀랍고 특별한 사랑을 볼 수 있다. 펠리컨에 대해 다음과 같은 이야기가 있다. 어린 새끼들이 독사의 꼬리에 쏘였을 때 어미 펠리컨은 즉시 자기 가슴을 부리로 내리친다. 자기 피를 뽑아 어린 새들을 치료할 약으로 사용하기 위해서다.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도 우리가 죄에 중독되어 있는 것을 보시고 유대인들이 채찍과 가시, 못으로 그분에게 피를 흘리게 할 때까지 기다릴 수가 없었다. “나는 받을 세례가 있으니 그것이 이루어지기까지 나의 답답함이 어떠하겠느냐”(눅12:50). 그리스도의 심장은 사랑으로 한껏 부풀어 올랐다. 그래서 그분의 뜻에 따라 모든 땀 구멍을 열어 피가 온몸에서 솟구쳐 오르게 하셨다. 그리고 그 피로 우리의 상처를 치료할 귀한 향유를 만드셨다. 오, 그리스도의 사랑이여! 엘리후가 말했듯이 “보라 내 배는 봉한 포도주통 같고 터지게 된 새 가죽 부대 같구나!”(욥32:19). 그리스도의 심장이 사랑으로 충만히 차서 더 이상 사랑의 피를 담아둘 수가 없었다. 그래서 마침내 그분의 몸의 각 부분과 기관을 통해 그 피가 핏방울로 터져 나온 것이다. 내가 할 말은 오직 이것뿐이다. 그리스도의 모든 핏방울은 세상을 구원할 만큼 귀하고 충분히 가치가 있다! 그러나 채찍이나 가시, 창에 의해 강제로 흘러나온 피가 아니기 때문에 그 피는 더 특별히 영광을 받아야 한다.
6. 유다의 배반, 그리스도가 체포되고 결박당한 채 안나스에게 끌려 가심
그 무렵 배반자 유다가 겟세마네에 도착했다. 그리스도는 다음의 말씀을 하신다. “보라 때가 가까웠으니 인자가 죄인의 손에 팔리느니라 일어나라 함께 가자 보라 나를 파는 자가 가까이 왔느니라”(마26:45-46). 그것은 그리스도가 자유로운 선택을 통해 고난을 감당하셨음을 보여 준다.
유다의 배반
열두 제자 중 한 사람인 유다가 배반했다는 사실이 그리스도의 고난과 유다의 죄를 얼마나 더 무겁게 하고 있는가!
적용. (크리소스톰은 다음과 같이 말했다.) “유다가 이 죄를 홀로 범했다는 것은, 하나님의 백성 가운데 기만하고 배반하는 자가 유다 외에 더 이상 없다는 것이 세상, 특별히 하나님의 자녀들에게 얼마나 다행스런 일인가!” 그러나 오! 세상이 악한 이단자들로 얼마나 가득 차 있는가! 사회 속에는 거짓말하고 비난하며 속이고 은 삼십보다 더 하찮은 것을 위해 그리스도와 자신의 영혼을 팔아 버리는 자들이 얼마나 많이 있는가! 교회 속에도 말씀을 듣고 인을 받는 것을 통해 그리스도에게 입 맞추지만 정작 삶과 대화 속에서는 그리스도를 부인하는 세속적이고 잠자는 신앙 고백자가 얼마나 많은가! 모든 회중 가운데 우리가 유다와 같은 자를 만나지 않는다면 참으로 다행스런 일이다.
그리스도의 체포
“이에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예수를 잡아 결박하여”(요18:12). 그들은 세상이 감히 담을 수도 없는 분을 체포했다. 그러나 그들이 체포하기 전에 그리스도가 먼저 그들에게 물으셨고 할 일을 하도록 그들을 이끄신다. 이제 폭도들은 그리스도의 허락을 받았다. 오! 얼마나 사납고 잔혹한 얼굴로, 얼마나 위협적이고 비열한 표정으로, 얼마나 악의적이고 앙심을 품은 마음으로 그들이 우리 구주를 공격하는가!
적용. 우리는 유다와 유대인들을 쉽게 비난한다. 그리고 이렇게 생각한다. ‘오, 우리가 그들의 입장에 있었다면 결코 그렇게 하지 않았을 거야.’ 그러나 그리스도가 고난을 받으신 과정을 잠시 내려놓고 그 주된 원인을 바라보라. 우리가 이 모든 행위에 대해 전혀 무관한 자인가? 우리가 그리스도의 죽음과 체포에 함께 공모한 자가 아닌가? 오, 나의 죄, 나의 죄여! 나의 죄가 바로 그리스도를 결박하러 온 군대와 천부장과 유대인의 아랫사람들이 아닌가! 나의 죄가 바로 그리스도를 잡으러 온 무리가 아닌가! 만일 내게 그들을 비난하라고 한다면 천 마디의 말도 더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그 천 마디의 말 가운데 단 한 마디도 나는 감히 할 수가 없다. 나의 죄가 바로 그리스도를 체포한 군인들이고 그리스도를 둘러싼 바산의 힘쎈 소들이며 그 입을 벌림이 찢으며 부르짖는 사자이기 때문이다. 오 내 마음이여, 너는 왜 유대인들을 향해 비난의 소리를 높이느냐? 네 안에서 바로 그 배반자와 그리스도를 잡으러 온 무리들을 발견하지 않느냐? 오, 너의 혐오와 증오의 강물을 올바른 방향으로 돌리라!
7. 그리스도에 대한 심문과 재판
이제 그들은 예수님을 안나스에게서 가야바에게로 데리고 간다. 그리고 즉시 대제사장과 서기관, 장로들의 공회로 끌고 간다.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무엄하게 예수님의 얼굴을 침
“곁에 섰던 아랫사람 하나가 손으로 예수를 쳐 이르되 네가 대제사장에게 이같이 대답하느냐 하니”(요18:22).
적용. 와서 인내에 대한 이 생생하고 아름다운 그림을 보라. 예수님은 얼굴을 맞으셨다. 그러나 그분은 마음에서는 조금도 동요가 없으셨다. 욕설과 비난에도 예수님은 적들을 향해 완전한 온유함과 부드러움을 보여 주셨다. 오, 한 마디의 비난의 말조차 견디지 못하는 당신, 수치스러운 한 마디의 말도 참지 못하는 당신은 누구란 말인가! 당신의 구주가 잠잠히 크나큰 모욕을 감당하시는 것을 보면서 당신은 어떻게 그토록 작은 모욕에도 쉽게 동요한단 말인가? 와서 그리스도에게 배우라. 예수님의 고난을 함께 나누고 그 고난의 유익을 함께 얻고자 한다면 그분의 온유함과 인내를 본받으라.
불경건한 거짓 증언들
적용. 우리가 그리스도의 종이라면 이 세상에서 거짓 참소를 받는 것을 피할 수 없다. 그러나 용기를 가지라. 어떤 경우에는 한 마디의 말도 하지 말아야 할 때도 있을 것이다. 가장 무죄한 자가 가장 잠잠하셨는데 어떻게 우리가 자신을 변명하고 옹호하기 위해 나설 수 있겠는가! 물론 잠잠해야 할 때가 있듯이 말을 해야 할 때가 있다는 것을 안다. 만일 말을 하는 것이 하나님을 영광스럽게 하고 하나님의 진리를 전하는 길이며 그렇게 할 만한 올바른 상황이 된다면 우리의 입을 열어야 한다. 비록 그로 인해 우리가 죽음에 처한다 할지라도 말이다. 우리의 찬양받으실 구주도 그렇게 하셨다. 오, 그분에 대해 배우자.
베드로의 배반적인 부인
오 베드로여, 예수님을 인정하지 않을 정도로 그토록 비열하고 타락한 자가 되었다는 말인가! 당신은 전에 예수님을 그리스도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고백하지 않았던가! 그런데 어떻게 당신이 “내가 그 사람을 알지 못하노라.”고 말할 수 있단 말인가! 이런 베드로의 모습은 인간이 얼마나 연약한지를 보여 주는 너무나 가슴 아픈 예다. 베드로가 그토록 어리석고 잘못된 죄에 빠질 수 있다면 그보다 연약한 우리들은 얼마나 더 쉽게 그런 죄에 빠지겠는가! 그러나 여기에는 진지하고 철저한 회개의 복된 예도 있다. 닭이 울고 그리스도가 돌이켜 베드로를 보시자마자 베드로는 밖에 나가 심히 통곡했다. 닭이 곧 설교자이고 예수님의 시선은 그 설교가 열매 맺게 하는 은혜였다. 오, 그리스도의 자비여! 그리스도는 자신을 잊은 베드로를 돌이켜 보셨다. 그리스도는 그분의 종의 기억을 다시 회복시켜 주님의 말씀을 생각나게 하셨다. 그리스도는 심히 통곡할 수 있도록 베드로를 밖으로 내보내신다. 베드로가 자비로운 그리스도의 은혜 속으로 다시 회복될 수 있도록 말이다.
적용. 이 이야기를 통해 우리 자신에 대해 겸손히 생각하는 법을 배우자. “그런즉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 그러나 우리가 베드로처럼 죄에 빠졌을 때도 유다처럼 절망하지 말라. 대신 회개하며 계속해서 하나님을 신뢰하자. 그리스도가 베드로를 바라보셨을 때 베드로는 심히 통곡했다. 오, 절망 속에 침잠하지 말자. 대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자. 그분이 우리를 바라보실 수 있도록 말이다. 결코 회개를 가볍게 보지 말자. 오히려 회개를 활용하고 훈련하자. 여기에 복음이 있지 않은가? 고대 작가 글레멘드는 베드로의 회개에 대해 다음과 같이 표현한다. 베드로가 매우 깊은 회개를 해서 ‘베드로의 두 빰 위에 고랑이 파일 정도였다. 그 깊게 파인 고랑을 통해 베드로의 눈물이 끊임없이 흘러내렸다.’ “밖에 나가서 심히 통곡하니라”는 말에 다음과 같이 덧붙인다. “베드로는 살아 있는 동안 닭이 우는 소리를 들을 때마다 자신이 주님을 부인했던 일을 떠올리며 통곡하고 애통해했다.” 다윗 역시 회개가 어떤 것인지를 보여 주는 또 다른 예다. “내가 탄식함으로 피곤하여 밤마다 눈물로 내 침상을 띄우며 내 요를 적시나이다”(시6:6). 복음은 회개를 가져온다. 우리는 자주 죄를 짓는 만큼 자주 회개해야 한다. 회개는 우리가 죄를 애통해하고 하나님께 돌아갈 수 있도록 일깨워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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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크랩] 아이작 암브로스, "예수를 바라보라1" 9장 그리스도의 탄생 적용 (0) | 2015.07.15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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