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은 단지 역사의 기록 자체에만 관심을 기울이지 않는다. 역사의 의미를 이해하고 이 기록들과 사건들 속에서 하나님의 목적이 인간 세계에서 어떻게 성취되어 가는지를 보는 일이 절실히 필요하다. 하나님은 모든 것을 알고 계신다. 모든 역사는 궁극적으로 하나님에 의해 통제된다.
역사에는 두 가지 형태가 있다. 하나님이 허용하시는 역사가 있고, 하나님이 만들어 내시는 역사가 있다. 성경에 기록된 역사의 형태를 볼 때, 여러분은 즉시 특별한 인상을 받게 될 것이다. 일반 역사책에서 그토록 많은 공간을 할애하고 주의를 집중했던 역사에 대해, 성경은 간단히 언급만 하는 방식으로 다룬다. 성경은 바벨론의 역사를 몇 문장으로 간단히 처리한다. 앗수르와 이집트, 메대와 바사를 생각해 보라. 성경에서는 그 모든 것이 아주 간략하게 축소된다. 그런 종류의 역사는 단지 하나님이 허락하시고 허용하신 역사에 불과하기 때문이다. 심지어 그것을 다소 경멸하는 어조로 다루기까지 한다.
2차 대전이 발발하기 직전에 월터 루디라는 스위스의 설교자는 다니엘서에 대한 아주 놀라운 책을 출간했다. 그 책에서 재미있는 진술을 한다. “알렉산더 대왕처럼 세상이 알아주고 주목하는 사람이 성경에서는 숫염소로 묘사될 뿐이다!”.
중요한 역사는 하나님이 결정하시는 역사, 곧 하나님이 진행하시는 역사이다. 그것은 성경의 커다란 주제이며, 요한계시록이 아주 특별한 방식으로 우리에게 상기시키는 주제이다. 하나님이 오른손에 있는 두루마리의 일곱 인을 떼는 것은 이미 결정된 일이 일어나게 한다는 것을 의미한다. 이 역사는 하나님의 개입에 관한 기록이다. 그것은 인류 역사의 영역으로 들어오시는 하나님의 개입에 관한 기록이다. 그것은 하나님께서 자신의 위대하고도 은혜로운 목적을 성취해 나가시는 일에 대한 기록이다. 인간의 영역에서 펼쳐지는 하나님의 구속 목적에 관한 장엄한 역사이다.
성경은 또한 하나님께서 자신의 무한한 지혜 안에서, 악이 생겨나도록 허용하셨다는 것과, 악이 존재한다는 사실을 말씀한다. 성경은 어떻게 악이 유래하였는지에 대해서는 우리에게 정확히 알려주지 않는다. 악의 문제는 여전히 큰 신비이다. 악은 매우 다양한 형태를 취할 수 있다. 악은 언제나 같은 모양으로 나타나는 것이 아니다. 매우 추악한 형태로 또는 아주 좋은 모양새를 취하기도 한다. 성경에 따르면, 악은 때때로 종교라고 하는 매우 영적인 형태로 자신을 나타낸다. 이상주의나 휴머니즘, 혹은 유물론으로 나타나기도 하고, 심지어 국가에 대한 사랑, 학문에 대한 사랑, 문화에 대한 사랑의 형태로 나타나기도 한다. 그리고 악의 다양한 형태가 종종 서로 충돌하며 싸우기도 한다는 것이다.
성경이 궁극적으로 관심을 가지는 것은 바로 이것, 인류와 하나님의 관계이다. 성경은 하나님이 없는 학문이나 지혜에는 관심이 없다. 성경은 하나님을 대적하는 국가와 하나님을 망각하고 무시하는 국가를 구별하지도 않는다. 오직 한 가지만이 중요하다. 그것은 하나님과 악 사이의 싸움이다. 우리가 어떤 정부에 속하였느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하나님 편에 서 있느냐 하는 것이 중요하다. 하나님께 속하지 않았다면, 그 어떤 것이라도 필연적으로 어둠과 죄악의 왕국에 속한 것이다.
성경의 역사에 있어서 비관주의와 낙관주의라고 묘사할 수 있는 것이 있다. 인간이 죄의 노예가 되어 버린 것, 인간이 홀로 방치되었을 때에 사탄과 지옥의 무기력한 희생자가 되어 악의 세력들에 의해 파멸당하는 것은 비관주의 측면이다. 역사의 중간 과정에 있는 동안에는 명백한 패배와 일시적인 고통을 피할 수 없다는 것을 성경은 기록하고 있다. 성경의 관점으로 역사를 묘사하자면, 중간 과정에서의 역사는 비관적이다.
그러나 그 비관주의가 단지 중간의 과정에만 해당된다는 것에 대해 하나님께 감사드린다. 최종적으로 역사에 대한 성경의 관점은 낙관적이다. 인간의 역사에 있어서, 성경은 언제나 이상주의에 기초한 다양한 운동에 대해 조롱과 조소를 퍼붓는다. 그것은 결코 목적을 이루지 못할 것이기 때문이다. 문명은 발생했다가 소멸된다. 세계는 마치 완벽한 상태에 막 도달하려는 듯이 보이다가도 어느 순간 붕괴되고 만다. 언제나 그런 식이었다.
역사의 중간의 과정에 대하여 성경은 언제나 비관적이다. 봉하여진 일곱 인이 떼어지고, 대접이 쏟아지며, 모든 것이 택한 백성들을 대적하는 듯이 보인다. 고통이 당면해 있으며, 명백한 패배가 있다. 그러나 그것은 오직 중간 과정일 뿐이다. 마지막은 언제나 낙관적이다. 최후에 이르러서는 언제나 그리스도의 능력을 깨닫게 된다. 마지막에 우리는, 영광의 주를 대적하여 머리를 들었던 모든 원수들이 패배하고 불못에 던져지는 것을 목격할 것이다. 하나님과 그의 성도들은 승리하며, 새 하늘과 새 땅이 임하고, 하나님의 영광이 나타나는 것이다.
하나님은 앞으로 일어날 일들을 알고 계신다. 그러므로 어떤 일이 일어나더라도, 그것을 위대하고도 영광스러운 종말의 배경에 비추어 바라보자. 두 가지의 형태의 역사가 있다는 것을 마음에 새기시라. 하나님과 악 사이의 싸움의 중요성을 직시하시라. 그리고 무엇보다도 패배할 수 없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능력으로 인해, 최종적인 전망이 영광스럽다는 것을 기억하시라.
- 로이드 존스, 「위기의 그리스도인」, PP 344-36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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