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청교도들, 1662년! 그들은 세상이 감당할 수 없는 사람들이었다/ 로이드 존스

강대식 2015. 9. 17. 11:15

 

1662년의 사건은 어느 한 시대의 마지막 혹은 한 이야기의 결말로 받아들여져야 한다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1662년은 마치 강의 하구와도 같다. 반드시 그 강을 거슬러 올라가 그 강의 수원을 찾아내야 한다. 언덕을 넘고 산을 올라가 작은 물방울이 똑똑 떨어지는 그 강의 수원지에 이르러야만 한다.

 

우리는 반드시 그로부터 100년 이상의 세월을 거슬러 올라가 보아야 한다. 1662년은 어떤 의미에서 청교도주의의 끝이라고 할 수 있다. 왜냐하면 그 전까지 통용되었던 청교도주의라는 말이 그 이후부터는 비국교도주의라는 말로 불려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100여년 전 영국에서 개신교 종교개혁이 일어날 당시 영국을 다스리던 왕은 헨리 8세였다. 그러나 이 종교개혁이 불완전하여 충분히 개혁되지 못했다는 사실을 깨닫기 시작했다. 이 사람들이 훗날 청교도라는 이름으로 알려지게 된다. 누군가가 청교도주의를 다음과 같이 정의했다.

 

청교도주의는 정화 운동이다. 영국 기독교에 덧입혀진 많은 요소들 중에 기독교의 본질에 어긋나거나 기독교의 능력이 발휘되지 못하도록 방해하는 모든 요소를 제거하려는 시도였다. 이것은 교리와 경건훈련과 교회의 의식 가운데 중세 시대를 지나는 동안 그리스도의 복음에 더해진 모든 것을 제거하려는 노력이었다.”

 

이것이 청교도주의의 핵심 내용이다. 교회의 특정한 형태를 바꾸는 데 있지 않고 오히려 청교도주의는 영적이고도 개인적인 경건생활과 하나님의 임재에 대한 강력한 인식, 그리고 그분이 친히 자신의 모든 것을 희생하셨다는 사실을 강조하는 시각이요 가르침이다. 영국 교회의 개혁이 완수되어야 한다는 열망이 바로 청교도주의의 핵심이다.

 

순결한 교회에 대한 열망이 청교도주의가 등장하게 된 주요 원인이며, 마지막 순간까지 그 생명을 유지할 수 있었던 생명력의 근원이었다. 순결한 교회란, 교리는 물론 교회의 관습이 순결해야 하며, 신앙이 순결할 뿐만 아니라 그 삶까지도 순결한 교회를 의미한다. 그 결과 사람들은 그것을 위해 싸우기 시작했다. 특히 위대한 사람 존 후퍼는 그 싸움의 최전방에 서있었다. 그는 글로체스터 교구의 주교를 지냈으며, 메리 여왕이 다스리던 때에 순교하였다. 후퍼는 여러 면에서 청교도주의의 아버지라고 할 수 있다. 우리는 반드시 이 사람 존 후퍼에 대해서 알아야 한다. 그에게서 1662년에 활동했던 사람들이 가진 모든 특징과 특성들을 발견할 수 있기 때문이다. 후퍼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

 

성경은 하나님의 율법이다. 그러므로 그 누구도 성경의 명령하는 것을 한편에 제쳐 두고서 등한시하거나 그 명령에 다른 것을 덧붙여서는 안 된다. 그리스도 왕국은 영적인 나라이다. 교황이나 국왕이라 해도 그곳에서는 다스릴 권세가 없다. 오직 그리스도만이 자신의 교회를 다스리시는 분이요 율법을 주시는 유일한 분이시다

 

헨리 8세는 단지 로마 카톨릭교회에서만 벗어나기를 원했다. 교황을 대신하여 국왕인 자신이 영국 국교회의 수장이 되는 것이었다. 그는 자신의 신앙을 바꾸지 않았다. 신앙적인 면에서 헨리 8세는 죽는 날까지 로마 가톨릭교도였다. 후퍼의 말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사도들과 모든 교회를 자신의 가르침 아래 두셨다. 인간의 양심과 관련하여 하나님의 말씀 이외에는 그 어떤 법도 언급될 수 없다. 믿음의 문제에 대해서 인간의 양심은 오직 하나님의 법에만 매여야 한다. 하나님께서 베푸신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성경을 읽을 수 있게 되었다. 그 성경에 대한 약간의 지식도 가지게 되었다. 하나님께서는 우리에게 성경을 주신 후에 이 성경을 통해서 주교들과 박사들, 설교자들과 보조 목사들의 설교가 쓸개즙과 같이 쓴지 아니면 꿀과 같이 단지, 혹은 그들이 자기 자신의 법을 전하는지 아니면 하나님의 법을 전하는지를 판단할 수 있게 하셨다. 인간이 만든 법이 그리스도의 교회를 얽맬수록 교회는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참되고도 올바른 이해로부터 멀어지게 된다. 우리가 따를 것은 오직 성경과 사도들의 교회뿐이다. 그 어떤 인간의 권위나 심지어 그룹이나 스랍과 같은 천사들도 따라서는 안 된다.” 이것이 바로 1662년에 활동했던 사람들이 믿고 가르쳤던 대표적인 내용이다.

 

제가 확신하기로는, 목사가 반드시 예복을 입어야 한다는 규정은 하나님의 말씀 뿐만 아니라 가장 온전했던 초대교회에서도 그 근거를 찾아 볼 수 없다.”

 

원시 교회의 모습을 회복하시오.” 이 원시 교회의 회복! 바로 이것이다.

이 원시 교회와 견줄 만한 교회는 지금까지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우상숭배적이고 미신적인 모든 움직임과 징후들을 제거하라. 그리고 그 자리에 하나님의 참된 신앙을 세우라”.

 

왕이나 황제, 혹은 고위 관리들이 하나님의 말씀과는 반대로 마귀나 마귀를 섬기는 자에게서 전수받은 그 어떤 물건이나 촛불, 예복, 십자가나 제단과 같은 것들을 귀중하게 보관하고 있는 것은 심히 유감스러운 일이 아닐 수 없다. 왜냐하면 그런 물건들이 신앙과 관련하여 별로 중요하지도 않고 본질적인 것이 아니라는 이유로 교회에서 용납된다면 나중에는 그러한 것들이 교회에서 필수적인 것이 되어 계속 보존될 수밖에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이 얼마나 미래를 정확히 예측한 말인가!

 

그는 엄청난 압력을 받은 후에 결국 그로체스터의 주교직을 수락하였다. 자신을 나의 주님이라고 부르는 것을 강하게 거절했다. ‘주교들이 작성한 기도서를 조금도 변개하지 않고 성실히 지키겠다는 맹세를 하지 않아도 된다는 허락을 받아 냈다. 거기에 수치스럽고도 불경건한 내용을 담고 있다고 생각했다. 주교들이 입는 예복도 입지 않겠다고 했다. 그는 성경 어디에도 이 두 가지 행위를 뒷받침해 주는 구절을 찾을 수 없다고 말했다. 이러한 후퍼의 모습 속에서 우리는 1662년에 활동했던 사람들의 마음에 생명력을 불어넣어 그들이 그러한 행동을 감행하도록 이끈 원리들을 분명하게 볼 수 있다.

 

하나님의 말씀이 명령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것이 본질적으로 중요한 것이든 아니든 간에 그 어떤 것도 신앙의 조항이나 지켜야 할 규칙이라는 이름으로 그리스도의 교회와 그 교회를 구성하는 성도들의 양심을 구속해서는 안 된다는 점을 분명히 해야 한다.” 이와 반대로 다른 한 부류의 사람들은, “신앙의 본질적인 문제가 아니므로 중요하지 않은 것들이 성경에 위배되지도 않고 성경이 그것을 금하고 있지도 않다면, 교회의 권위나 어떤 적법한 권력에 의해서 신자들에게 부과될 수도 있다라고 주장했다. 교회에서 무엇이 옳고 무엇이 그르냐에 대한 상반된 두 견해 사이에 일어난 싸움은, 1662년까지 약 100년 동안이나 영국 교회 내에서 계속되었다.

 

후퍼는 당대의 영국 국교회 목사들이 착용했던 예복에 관해서 그가 한 말이다.

바울은 갈라디아서 3장에서 다음의 교리를 말한다. 곧 누구든지 그리스도 안에서 폐지된 것들을 다시 불러오는 것은 하나님의 뜻을 거역하는 행위라는 것이다. 바울은 아론의 제사장직이 그리스도의 제사장 직분 안에서 이미 폐지되었다는 것을 공개적으로 가르치고 있다. 그때 모든 의식과 예복과 기름 부음과 성별하는 것들도 함께 폐지되었다. 이처럼 아론의 제사장직에 드리워져 있는 그림자조차 그리스도의 제사장직과 양립할 수는 없다. 그렇다면 하물며 자신들이 가지고 있는 책의 기록에 따라 아론이나 이방인들에게서 기원된 것일 뿐인 교황의 제사장적 지위를 가진다고 하는 주장이 감히 그리스도의 제사장직과 양립될 수 없음은 말할 필요도 없다.”

 

하나님의 말씀이 분명히 명령하거나 금지하는 것이 아니라면, 그 어떤 것도 교회에 있어서는 안 된다. 만약 그것이 성경에 분명하게 나타나 있지 않은 것이라면, 우리는 반드시 그것을 일일이 확인하는 작업을 거쳐야 한다.”

 

독일과 스위스와 스코틀랜드에 흩어져 있던 개혁주의자들도 이 모든 개혁에 일제히 동의했다. 이는 로마교회의 교리는 물론 그 의식까지도 완전히 거부하는 방식으로 진행되었다. 그러므로 영국 국교회 내에서도 이와 동일한 작업이 이루어져야 하며, 국교회는 로마교회라는 하는 마녀의 잔에 들어 있는 사술을 비워 내고 그 사술의 매력적인 빛깔로 사람들을 유혹했던 잔을 치워 버려야 한다라는 청교도들의 주장은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다.

 

제임스 1세가 펼친 정책으로 인하여 약 300명의 청교도 목사들이 영국 국교회를 떠났다. 그 가운데 어떤 사람들은 화란으로 떠났으며 또 어떤 사람들은 그 밖의 여러 나라로 떠났다. 그리고 1620년에는 잘 알려진 대로 필그림 파더스가 메이플라워를 타고 미국을 향해 떠났다. 이들은 화란에서 거주하다가 다른 사람들과 함께 신앙의 자유를 누릴 수 있는 새로운 삶을 찾아 뉴잉글랜드로 향한 것이다.

 

1625년에 왕좌에 오른 찰스 1세는 곧바로 교회와 관련된 모든 문제를 대주교 라우드에게 일임하였다. 혹독한 시련이 시작되었다.

 

1645년부터 1653년까지 장로교주의자들은 강력한 세력을 형성하고 있었다. 그들은 의회를 장악하고 있었으며, 교회에서도 그 세력이 대단히 컸다. 그러나 1653년 공화정이 막이 내릴 때까지는 독립교회주의자들에게 그 주도권을 빼앗겼다. 독립교회주의자였던 크롬웰은 새로운 장로가 예전의 사제만큼이나 위험하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래서 그는 강력하게 독립교회주의자들의 편에 섰으며, 이로 인해 장로교주의자들은 세력을 잃고 말았다.

 

참된 종교적인 관용의 면에서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 다름 아닌 올리버 크롬웰이었다. 장로교주의자들은 관용의 면에서 매우 인색했으며, 5왕국파들과 다른 분파들도 마찬가지이다. 이들은 각각 자신이 가진 견해를 관철시키기 위해서 투쟁했다. 반면 올리버 크롬웰은 이들의 모든 요구에 대해서 저항했으며, 자신의 생각을 끝까지 밀고 나갔다. 그는 로마 가톡릭교도들을 제외하고는 누구든지 자유를 누릴 권리가 있다고 말했다. 유대인들에게도 거할 수 있는 보호시설을 마련해 주었다. 두말할 것도 없이 올리버 크롬웰은 영국의 종교적인 관용의 면에서 아버지와 같은 사람이다. 그로 인해서 그는 장로교주의자들과 제5공화국파와 수평파, 그리고 퀘이커 교도는 물론이요 감독교회주의자들에게도 끊임없이 시달려야 했다.

 

1651년 올리버 크롬웰이 죽자 그의 아들인 리차드 크롬웰이 잠시 권력을 잡았지만, 그의 통치는 별로 신통치 못했다. 그래서 엄청난 혼란이 일어났고, 대부분의 사람들은 왕정이 복고되어야 한다고 생각하기에 이르렀다. 당시에는 장로교주의자들이 다시 실권을 장악하여 의회의 주축을 이루어 있었다.

 

찰스 2세가 돌아 왔을 때 백스터와 그의 동료들은 그를 영접하러 나가 그에게 관용을 구하는 탄원서를 제출할 수 있었다. 만약 백스터에게 어떤 잘못이 있다면 그것은 그가 너무나 합리적이며 양보와 타협을 하는 데에 지나칠 정도로 열려 있었다는 점이다. 장로교주의자들은 왕이 모든 사람들을 다스리는 최고의 통치자이며, 국가뿐만 아니라 교회의 제반 문제에 대해서도 최고의 권위를 가진다는 것을 인정한다라고까지 말했다. 존 낙스였다면 꿈에서라도 이런 말을 하지 않았을 것이다. 칼빈도 마찬가지이다. 그러나 자신의 의견을 고집하기보다 타협하고자 했던 백스터는 이 정도까지 양보할 각오를 했던 것이다. 주교들은 그의 제안을 거부했다.

 

주교들은 주교들을 통해서 성직을 받지 않은 모든 사람들은 반드시 다시 사제로서의 서품을 받아야 한다고고 주장했다. 1662년 전에는 결코 영국 국교회에서 누군가가 하나님의 사역을 감당하기에 적합한지를 검증하기 이전에 반드시 주교에게 안수를 받아야 한다는 법을 제정한 적이 없었다. 1662519, 왕은 이 통일에 관한 법령에 대해서 승인했고 이 법안은 마침내 통일령이 되었다. “영국 국교회에 속한 모든 목사들은 1662824, 성 바돌로매의 날까지 반드시 이 법령의 요구에 복종해야 한다라고 규정되어 있었다. 최종 기한과 관련하여 예상되었던 성 미카엘 축일이 아니라 성 바돌로매의 날인 824일로 정한 데에는 다음과 같은 가혹한 이유가 있었다. 성직자들이 일 년의 십일조를 받는 날이 바로 성 미카엘 축일이었기 때문이다. 이들이 반대자들을 대하는 모습과 청교도들이 공화정이 실시되는 동안 그들을 대했던 모습이 얼마나 다른지요!

 

청교도들은 통일령에 따라 자신들에게 강요되는 요구에 저항하고 거기에 동의하기를 거부했다.

<불신자들을 향한 경고>(Alarm to the Unconverted)라는 책의 저자인 경건한 조셉 얼라인의 부인 얼라인 여사는 이렇게 말했다. “통일령이 공표되기 전, 제 남편은 자신이 어떻게 선택해야 하는지를 분명히 알고, 또 자신의 영혼에 부담을 느끼면서도 영혼을 구원하는 이 복된 사역을 단념하는 일이 일어나지 않기를 구하여 밤낮으로 하나님과 동행하기 위하여 매우 열심히 노력했습니다. 그가 이미 동의했을 것이라고 우리는 생각했습니다. 또 그는 종종 자신은 절대 사소하고 불분명한 일로 인하여 이 사역을 그만두지 않을 것이라고 말해 왔습니다. 그러나 그의 동의와 찬성을 구하는 조항들을 본 후에 거기에 서약하지 않겠다고 했으며, 그러한 자신의 결정에 만족해했습니다.”

 

얼라인이 옥스퍼드에 있을 때 친구로 지낸 사무엘 비치는 이렇게 기록하고 있다.

나의 주님이시여, 저는 지금 당신의 발 앞에 있습니다. 선한 것을 얻기 위하여 악을 행하지는 않을 것입니다. 저는 제가 섬기는 하나님은 물론 제 양심에도 반하는 이 큰 죄악을 범하지 않을 것입니다. 저는 제 자신과 저의 영혼은 물론이요 제가 담당했던 사역과 제가 거하는 집과 아내와 자녀를 비롯한 제가 가진 전부를 주님의 손에 내어 드립니다. 저에게 이 모든 것을 주신 주님의 손에 다시 내어 드립니다. 주님, 부디 저에게 자비를 베푸셔서 제가 믿음과 선한 양심을 지킬 수 있도록 영원토록 함께하여 주소서!”

 

교구 목사 에드워드 베리도 다음과 같이 기록하고 있다.

제가 할 수 있는 한 가장 객관적으로 판단하여 이렇게 결정합니다. 제 자신이나 저의 가족이 어떤 고난을 당하더라도 제 양심을 강요할 수는 없습니다. 이는 마치 어떤 일에 대해서 제가 임으로 변경할 수 없는 마땅한 판단이 내려진 것과 같습니다.”

 

로렌스라는 사람은 다음과 같이 밝힌다.

제가 통일령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이유는 열한 가지나 됩니다. 하지만 그리스도께서는 누구든지 나보다 아내와 자녀들을 더 사랑하는 자는 내게 합당하지 않다고 말씀하셨습니다.” 그에게는 통일령에 동의할 수밖에 없는 열한 가지 이유보다 이 한 가지 이유가 더 중요했던 것이다.

 

솔태시 지방에 사는 존 학스는 가족들을 어떻게 부양할 것이냐는 질문을 받고서는, 수많은 병아리들과 함께 있는 어미 닭을 가리키면서 이렇게 말했다. “설령 저에게 저 닭처럼 많은 자녀들이 있다 하더라도 하나님께 과연 그들 모두를 먹이실 것이냐고 묻지 않을 것입니다.” 또 어떤 사람은 하나님께서는 어린 까마귀를 먹이실 뿐만 아니라 나의 자녀들도 먹이실 것입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리차드 백스터는 말했다.

내가 이상 연구를 하지 못하게 되는 것입니까? 집에서 쫓겨나고 재산을 빼앗기고 사랑하는 친구들과 헤어져야만 합니까? 하지만 그토록 아름답고 인자한 주님의 모습을 한 번 뵈옵는 것만으로도 나에게는 이 모든 것들을 보상하고도 남습니다. 주님께서 나의 주님이 되실 때 일용할 양식이 부족하여 구걸해야 할지라도 나는 만족하겠습니다

 

청교도들은 이러한 이유로 통일령에 서명하고 동의하기를 거절했다.

청교도들은 무지한 광신자들도 아니고 분별력 없는 고집불통도 아니며 병적으로 소심한 양심을 가진 사람들도 아니었다. 그들은 위대한 학자들이었다. 영국 국교회가 배출해 낸 가장 탁월한 학자들 가운데 일부였다. 또한 그들은 경건하고 의로우며 거룩한 사람들이었다. 신학박사였던 로버트 핼리 목사는 그들을 이렇게 묘사했다.

 

백스터의 설교와 오웬의 신학, 하웨의 감화력과 굿윈의 박식함, 차녹의 논리력과 베이츠의 설교, 플로벨의 헌신과 아이삭 암브로우스의 묵상록, 매튜 폴의 주석과 올리버 헤이우드의 수고 그리고 조셉 얼라인의 생애는 얼마나 칭송받을 만한지요! 이전의 영국이 지금처럼 위대하고도 자유로우며 영광스럽고 강력한 뿐만 아니라 신실한 개신교 국가로 변하는 데 지대한 공을 세운 이 사람들을 칭송하는 것은 결코 제가 아닙니다. 그들은 이 나라와 여러 기관에 지워지지 않는 깊은 흔적을 남겼습니다. 이들이 남긴 책들은 매우 깊고 경건하며 실제적이어서 비국교도는 물론 경건한 국교도들도 이것이 성경의 권위보다는 못하더라도 교회의 재산이요 우리 설교자들의 힘이라고 생각했습니다. 이들이야말로 로마 가톨릭과 인간 위주의 합리주의 확산을 막는 최선의 방어 수단이라 여길 정도입니다.”

 

청교도들은 위대하고 능력있는 학자요 탁월한 설교자요 인격자였으며, 확신에 찬 용감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이 사실을 증명했다. 약 삼 년 후에 런던에서 전염병이 돌고 화재가 발생했을 때, 수많은 감독교회주의자들은 자신의 생명과 안전을 위해 피신했지만, 그들은 남아서 사람들에게 설교했고, 회중들을 모음으로써 그들의 얼마나 훌륭하고 고귀한지를 스스로 증명하였다.

 

조셉 얼라인의 장인이자 톤턴의 전도자였던 리차드 얼라인의 설교이다.

저 저물어 가는 태양 빛을 받고 있는 사람은 단지 소수의 선각자들만이 아니다. 우리에게까지 밤의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다. 우리의 사역이 이미 끝나고 있는 거 같다. 그렇지만 이 모든 것 역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다. 그러므로 온 땅은 그분 앞에서 잠잠해야 한다. --- 권세자에게 충성하려는 마음이 없어서 그들에게 굴복하지 않는 것이 아니다. 제 자존심이나 기질적인 문제도 아니다. 그렇다고 저에게 당파적인 성향이 있는 것도 아니다. 제가 통일령에 동의할 수 없는 이유는 제가 알고 있는 사실과 모순되는 행동을 할 수 없기 때문이다. 제 마음에 하지 말라는 주님의 말씀이 떠오르는데 주님이 금하신 것들과 관련된 일을 제가 감히 어떻게 할 수 있겠는가!

 

저는 이 사실을 하나님과 천사들과 사람들 앞에서 분명히 고백한다. 할 수 있는 한 객관적으로 자신을 살펴보고, 또 전심으로 주님의 지혜를 구한 후에 저는 결론을 내렸다. 목회 사역을 그만두든지 제 양심을 포기하든지, 둘 중 하나를 선택해야 한다는 것이다. -- 그러므로 저는 거짓으로 사역을 계속하기보다는 차라리 고난과 함께 사역을 마무리하고자 한다. 비록 사람들이 저를 책망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저는 살아 있는 동안 양심에 아무런 가책을 느끼지 않을 것이다.

 

이는 우리 마음이 혹 우리를 책망할 일이 있어도 하나님은 우리 마음보다 크시고 모든 것을 아시기 때문이라”(요일3:20).

저는 제가 섬길 사역지와 제 마음의 평안 가운데 한 가지를 포기해야 한다. 그러하기에 저는 기꺼이 사역지에서 떠나는 고난을 감수한다. 그리고 이제 기쁨으로 그리스도의 십자가를 맞이한다. 또한 저를 향해 비난이 쏟아지더라도 그 비난을 달게 받아들인다. 궁핍한 삶을 살고 냉소와 모욕을 당하더라도, 이 일로 인하여 저에게 무슨 일이 일어난다고 해도 저는 그 모든 것을 기꺼이 감수하겠다. --

 

이제 저는 양 떼 없는 목자가 되었고, 여러분은 목자 없는 양 떼가 되었다. 오늘 아침까지 저에게는 집이 있었지만 이제 저에게는 아무것도 없다.

주신 이도 여호와시오 거두신 이도 여호와시오니 여호와의 이름이 찬송을 받으실지니이다’(1:21).

우리를 위하여 기도하라 우리가 모든 일에 선하게 행하려 하므로 우리에게 선한 양심이 있는 줄을 확신하노니’(13:18).

 

우리를 위해서 기도해 주시오. 우리가 지금까지 입으로 설교한 바로 그 거룩한 교리가 하나님의 은혜로 말미암아 우리가 침묵해야 하는 이 현실 속에서도 선포될 수 있도록 기도해 주시오. 주님께서 우리에게 힘을 주셔서 앞으로 당한 모든 고난을 잘 감내할 수 있도록, 그리고 우리의 간절한 기대와 소망을 따라 살든지 죽든지 우리에게서 그리스도가 존귀하게 되시도록’(1:20) 기도해 주시오.

 

성도 여러분, 저는 사도의 말로 여러분에게 작별을 고하고자 한다.

마지막으로 말하노니, 형제들아 기뻐하라. 온전하게 되며 위로를 받으며 마음을 같이하며 평안할지어다 또 사랑과 평강의 하나님이 너희와 함께 계시리라’(고후13:11)

양들의 큰 목자이신 우리 주 예수를 영원한 언약의 피로 죽은 자 가운데서 이끌어 내신 평강의 하나님이 모든 선한 일에 너희를 온전하게 하사 자기 뜻을 행하게 하시고 그 앞에 즐거운 것을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 가운데서 이루시기를 원하노라 영광이 그에게 세세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13:20,21)”

 

이 설교는 일반적으로 청교도들이 사랑하는 양 떼들과 어떻게 헤어졌는지를 잘 보여준다.

이들이 당한 고난에 대해서 전하기에는 시간이 부족하다. 이 박식하고 경건했던 사람들은 교회에서 쫓겨나 교회로부터 아무런 수입을 얻을 수 없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대학을 비롯한 각급 학교에서 가르칠 수도 없었다. 또 생활비와 성직자에게 지급되는 십일조를 포기해야 했으며 집도 남겨 두고 떠나야 했다. 그들을 따르던 사람들은 대개 매우 가난했는데, 그들 대부분이 극도로 빈곤한 형편에 처하게 되었다.

 

그러나 그들이 처한 곤경을 더욱 심각하게 만든 것은,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강해를 듣고자 모일 때에 가족을 제외하고 다섯 명 이상이 모이는 것을 금지하는 법령인 비밀집회 금지령이 통과되었다는 사실이었다. 게다가 청교도들이 이전에 사역했던 곳 근처 5마일 이내로 접근하는 것을 금지하는 ‘5마일령도 통과되었다. 나중에 이들 중 많은 사람들은 이 모든 법령을 어기고 끊임없이 설교를 감행했다는 이유로 투옥되기도 했다. 존 번연도 같은 이유로 베드퍼드에 있는 감옥에서 12년 동안이나 갇혀 있어야 했으며, 다른 많은 사람들도 그와 같은 대접을 받았다.

 

토마스 브라우닝은 고난 앞에서 다음과 같이 행동했다.

노샘프턴의 감옥에서 자신의 양 떼들에게 편지하면서 이렇게 말한다.

우리의 온유하신 아버지께서는 우리의 눈물을 닦아 주시려고 손에 손수건을 들고 계신다. -- 복음을 위해 당하는 잔은 다른 어떤 잔보다도 더욱 달콤하다. 그리고 바닥이 가까워질수록 우리의 마음이 더욱 굳세어진다. 제가 말하는 바닥이란 바로 죽음을 의미한다”.

 

번연은 베드퍼드의 감옥에 갇혀 있는 동안 자신의 역작인 <천로역정>을 저술했다.

그들도 바울과 같이 고백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4:11,13)

 

청교도들이 이 모든 고통을 당해야 했던가? 그들이 통일령에 동의하지 않는 이유는 무엇인가?

첫째, 그들은 오직 예수 그리스도만을 교회의 유일한 머리로 인정할 뿐, 그 외의 어떤 것도 인정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둘째, 그들은 교회와 관련된 모든 문제에 대하여 최종적으로 판결할 수 있는 유일한 재판관은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믿었기 때문이다.

셋째, 그들은 생명과 영혼과 영성을 어떠한 제도나 조직, 혹은 전통보다 더 우선시했기 때문이다.

넷째, 그들은 평안한 삶을 비롯한 그 어떤 것보다 양심을 더 중요하게 여겼기 때문이다. 양심의 자유와 개인이 양심에 따라 어떤 결정을 내릴 수 있는 권리를 자신들이 감당하게 될 그 어떤 고난보다 더 중요하게 여긴 것이다.

다섯째, 그들은 이 땅에서의 삶이 단지 나그넷길이요 순례의 길일 뿐이라고 여기고 자신들을 지켜보시는 하나님을 의식하면서 살았기 때문이다. 모세처럼 그들의 시선은 항상 하나님께서 주실 상급에 고정되어 있었다.

 

청교도들이 선택한 이러한 행동으로 어떤 선한 결과를 얻게 되었을까?

첫 번째 선한 결과와 관련하여, 높은 신분에 있던 어떤 사람은 다음과 같이 기록했다.

만약 모든 목사들이 복종했었다면, 사람들은 기독교 신앙이 공허하다고 생각했을 것이다. 또한 신앙이라는 것이 고작해야 강단에서나 드러나고, 국가가 어떤 국가적인 과제를 성취하도록 도울 뿐이라고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청교도들은 자신들이 선포하는 복음에 배치되는 사항에 복종하기보다는 그들이 가진 소유를 포기하고 악의 세력에 의해서 자신들은 물론이요 가족들까지 고난당하는 편을 택했다. 그 결과 이 사람들을 통해 다른 사람들은 신앙에 어떤 실체가 있다는 사실을 확신하게 되었고, 이는 무신론이 확산되는 것을 방지하는 역할을 했다.”

 

이와 같이 청교도들은 그들의 행동과 그들이 당해야 했던 모든 고난을 통해서 신앙이라는 것에는 무언가 실체가 있다는 사실을 증명했다. 또한 그들은 말과 행동이 일치하며 이를 위해서는 고난도 감수할 수 있다는 것을 사람들에게 증명했다. 바로 이것이 그들의 행동을 통해서 얻게 된 선한 결과이다.

 

두 번째 선한 결과는, 그들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놀라운 작품을 남겼다는 것이다. 존 오웬, 토마스 굿윈, 존 플라벨과 토마스 브룩스, 그리고 존 하웨를 비롯해서 그들과 함께했던 사람들이 저술한 책들이다. 이렇게 많은 책들이 남겨질 수 있었던 결정적인 이유는 설교할 수 있는 자격을 박탈당한 그들이 대부분의 시간을 책을 기록하는 데 사용했기 때문이다. 결국 전세가 역전되어 그들의 교활한 대적들이 불리해졌고, 이 쫓겨난 청교도들은 자신들의 작품을 통해서 그후 3세기 동안이나 계속해 설교할 수 있게 된 셈이다. 만약 그들이 축출당하지 않았더라면 결코 그렇게 할 수 없었을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악한 상황 속에서도 선한 것을 만들어 내시는 분이다. 그분은 다스리시되 모든 것을 다스리시는 분이다. 결국 그들을 통해서 우리가 이와 같이 풍성한 유산을 보유하게 된 것이다.

 

그러나 무엇보다도 귀한 것은, 그들이 우리에게 고결하고도 영광스러우며 놀라울 정도로 경건한 삶의 본보기를 보여 주었다는 사실이다. 그들은 고난을 당할 때에도 인내하는 모습을 보여 주었다. 비록 그리스도를 위한 바보로 취급 당하고 만물 가운데 찌꺼기와 같이 여겨지는 한이 있더라도, 그들은 하나님의 말씀과 그 말씀이 담고 있는 메시지를 충성스럽게 전했다.

 

여러분은 종교개혁에 대해서 어떻게 생각하는가? 오늘날 기독교회의 모든 교파에서 많은 사람들이 종교개혁은 재앙이었다는 목소리를 높이고 있다. 우리는 그들의 주장에 동의하면서 로마 가톨릭으로 회귀하고 있는가? 아니면 1662년의 그들처럼 어떤 희생을 치르더라도 신약성경과 그 속에 등장하는 복음 교회의 모습으로 돌아가고 있는가? 이 위대한 사람들은 우리에게 더 구체적으로 질문한다.

 

첫째로, “어느 것이 우선인가?” 하는 질문이다. 우리가 그저 출생과 교육과 전통이라는 우연한 사건의 결과라는 관점을 견지해야 하겠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진리가 먼저이어야 하겠는가? 우리에게 가장 큰 영향을 끼치는 것이 자신이 우연히 어떤 교단에서 성장하게 되었다는 사실이어야 하겠는가, 아니면 하나님의 말씀이어야 하겠는가?

 

둘째로, 우리에게 서명하도록 요구되는 법률 조항이나 신앙고백에 대해서 심중 유보하거나 사적인 해석을 하는 것이 과연 정당하도고 정직한 것인가? 청교도들은 우리로 하여금 바로 이 질문과 대면하게 한다. 그들은 자신이 어떤 비난을 받게 되더라도 정직하게 행동했다. 그들은 거짓 진술을 하거나 심중 유보하지도 않았다.

 

셋째로, 항상 다수의 결정을 따라야 하는가? 혹은 우리가 생각하기에 다수의 결정이 매우 잘못되었다면 비록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의 수가 적다 하더라도 남아서 진리를 증거하며 다른 이들을 설득해 진리로 이끌어 나가야 하는가? 청교도들은 100, 아니 그보다 더 오랜 시간을 그렇게 하기 위해 노력했다. 그러나 1662년에 이르자 그 일을 이룰 수 없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우리는 과연 언제쯤 1662년에 그들이 취했던 입장에 설 수 있겠는가? 과연 어느 시점에 가서야 우리 자신이 지금 진리에 대해 타협하면서 자신의 양심을 거스르고 있다는 것을 깨닫게 되겠는가?

 

넷째, 우리는 모든 권위주의적인 경향과 교회들이 추진하는 여러 가지 활동, 혹은 여러 교회들로 구성된 연합체나 교회회의에서 이루어지는 활동의 측면에서 교권주의나 성직계급주의적인 원리를 따르려는 경향을 경계해야 하지 않겠는가? 그리고 무엇보다 교회들이 로마교회를 닮아 가고 로마교회와 형제처럼 지내려는 경향에 대해서 항상 빈틈없이 경계해야 하지 않겠는가?

 

다섯째로, 우리는 오늘날 점점 예전을 중시하는 모습으로 변해가는 예배와, 설교 대신 예배 의식을 높이려는 경향에 대해서 항상 주의를 기울여야 하지 않겠는가? 왜냐하면 저는 교권주의적인 경향뿐만 아니라 가운이나 예복을 입는 데서 드러나는 의식주의적인 경향이 증가하고 있다는 사실을 이미 알고 있기 때문이다. 교회의 직분을 높이고 받들어서 지역 교회와 그리스도인 개개인에 대한 지배력을 증가시키려는 관료주의를 더욱 가속화시키려는 경향이 교회 내에서 증거하고 있는 것에 대해서도 알고 있기 때문이다.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드리고자 한다. 문제의 핵심이 교리적이 아닌데도 1662년에 축출당한 청교도들은 이렇게까지 과감하게 행동하고, 또 당시의 다른 사람들과 분리되는 것도 주저하지 않는 등 엄청난 고난을 감수했다. 이렇게까지 행동할 준비가 되어 있었던 것이다.

 

그렇다면 기독교 신앙의 근본 진리와 가장 핵심적인 신앙원리를 부인하는 사상에 대해서, 그리고 1962년 오늘날 교회에서 쉽게 발견할 수 있는 교리에 대한 무관심에 대해서 우리는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겠는가? 1662년과 같이 오늘날 우리 앞에 놓인 선택은 그러한 현실에 순응하느냐 아니면 끝까지 순결함을 고수하느냐 둘 중 하나이다.

 

워즈워드의 시이다.

지금 이 나라는 물이 고여 있는 늪과 같습니다. ---

! 우리를 일으켜 주십시오. 우리에게 예의와 덕과 자유와 힘을 주십시오.

그대의 영혼은 아득한 별과 같이 고고했고, 그대의 목소리는 바다의 파도 소리같이 울려 퍼졌습니다.

그대는 맑은 하늘처럼 순결하고 웅장하며 자유로왔습니다.“

히브리서 저저가 말했듯이, ‘세상이 감당하지 못하는’(11:38)

이 능력 있는 인물들 가운데 어느 누구의 목소리라도 들을 수 있으면 좋겠다.

 

한 찬송시이다.

저 택함 받은 사도들은 주 성령받은 후 큰 환난 고통당할 때 다 참고 이겼네

그 험한 고개 넘어서 저 천성 갔으니 주 예수 믿는 우리도 본받게 하소서.”

 

하나님의 말씀이다.

이러므로 우리에게 구름같이 둘러싼 허다한 증인들이 있으니 모든 무거운 것과 얽매이기 쉬운 죄를 벗어버리고 인내로써 우리 앞에 당한 경주를 하며 믿음의 주요 온전하게 하시는 이인 예수를 바라보자. 그는 그 앞에 있는 기쁨을 위하여 십자가를 참으사 부끄러움을 개의치 아니하시더니 하나님 보좌 우편에 앉으셨느니라”(12:1,2)

 

그렇다. 그들은 예수님을 바라보고 그분을 따랐기 때문에

무력으로 그들을 정복했던 사람들보다 더 위대한 사람이 될 수 있었다.

우리 조상들의 하나님! 그 하나님께서는 그들의 발자취를 따르는 사람들의 하나님도 되실 것입니다.”

 

- 로이드 존스, 타협할 수 없는 진리, PP 195-29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