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장 복음사역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20
서론
그리스도를 영혼에 적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어서 가장 궁극적인 핵심이다. 그 일은 복음의 최초 전파로부터 시작된다. 복음을 듣지 못하여 그리스도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그 영혼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이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4-15).
Ⅰ 복음전파의 목적
1 복음전파의 도구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사신들’을 준비하심으로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있을 신비로운 일을 전할 사명을 맡기셨다. 죄인들을 용서하려는 자비하심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얻게 될 놀랍도록 복된 은혜와 언약들로 채워져 있는 성경의 교훈과 율법을 해설하고 역설함으로써 영혼들을 그리스도께 더욱 효과적으로 인도하게 할 직임자들로 그들을 세우신 것이다.
2 복음전파의 목적
복음의 사역자들에게 맡겨진 직무의 궁극적인 목적은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일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대적하는 죄악적이고 허망하고 패역한 본성을 버리고 그 영혼이 그리스도께로 향하도록 하는 직무를 위임 받았다. 멸망의 상태에 있는 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보혈을 제안하는 것이 그들이 위임받은 직무의 주된 핵심인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대리인들이다.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이들을 통해 낮은 세상과 접촉하고 계시는 것이다.
Ⅱ 그리스도의 사신이 이 땅에 필요한 이유
그리스도 사신이 필요한 인간과 세상
하나님께서 사신을 쓰시다는 사실은 우리 인간이 매우 치명적인 타락과 결함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함축한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과 우호적이고 친밀한 교제의 상태로부터 이탈되지 않았다면 평화의 사신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목회직을 세상에 존재케 하신 사실 자체가 세상이 타락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인들과 어떠한 교섭을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죄인들을 향해 자비와 은혜를 베푸시기 위한 방편을 친히 마련하셨다. 이것은 타락한 천사들에게는 보이지 않으셨던 긍휼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멸망 가운데 내버려 두셨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천사들보다 더한 멸망을 받아 마땅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위해 평화의 조약을 제안하셨다. 완악하기 짝이 없는 원수인 우리와 화목하기 위해 사신들을 보내셨다. 만약 우리가 그들을 멸시한다면 그것은 곧 그들을 보내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된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눅 10:16).
갈라디아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어떻게 대했는지 보라. 그들은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로, 심지어 그리스도처럼 대우하였다(갈 4:14). 사도가 누구의 이름으로, 누구를 대신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Ⅲ 그리스도의 사신의 태도
1 보내신 이의 뜻을 충실하게 이행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과 접촉하시기 위해 사신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자기들을 보내신 그 뜻을 신실하고 충실하게 이행해야 할 사람들이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16).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다가 말씀을 혼란하게 만드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살전 2:3-5).
사역자들의 임무는 사람들을 자기의 제자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는 데에 있다. 사역의 내용과 방식과 목적에 있어서 자신들의 인간적인 유익을 추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고후 12:14).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본을 보이셨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 7:16)
2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평화의 조약을 세우시기 위해 사역자를 보내시는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평화의 조약이 세워지지 않는다면 죄인들은 결코 화해할 수 없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과의 화해를 얻어 낼 수 없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직접 하실 수 있으신 분이시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그렇다면 피조물인 죄인들은 하나님의 위엄 앞에 고개조차 들지 못할 것이다. “나로 다시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신 18:16, 히 12:21).
3 왜 천사가 아닌 인간인가?
천사는 피조물들 중 가장 높은 반열에 있는 존재들이다. 우리와는 전혀 다른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피조물들인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우리와 같은 타락의 비참에 속해 있지 않는 자들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회복의 은택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이 죄인 된 우리의 고통을 공감할 것이라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신들은 다르다. 그들은 죄인들이 느끼는 고통을 공감하는 자들이다.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는 죄의 작용이 무엇인지 그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육체와 성령님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들도 매일 그러한 영적 전투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일반이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내 위엄으로는 너를 두렵게 하지 못하고 내 권세로는 너를 누르지 못하느니라”(욥 33:6-7).
4 하나님께서 그렇게 비열하기 짝이 없는 피조물인 우리를 향하여 화평의 손을 내미셔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더욱이 그것은 우리보다 더 탁월한 반열에 있는 ‘천사들’에게도 주어진 바 없는 손길이다. 타락한 그들을 회복시킬 어떠한 자비의 손길이 주어진 적이 없다. 그들에게는 오직 심판의 날까지 자신들을 묶어 놓을 흑암의 사슬만이 허락되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탁월한 존재에게는 엄중하심을, 열등한 존재들에게는 온유하심을 베푸셨다. 당신이라면 황금 항아리를 버리고 질그릇을 택하겠는가?
타락한 천사들은 하늘의 영광스러운 빛을 받은 자들이기에 더욱 엄중한 율법의 심판을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율법은 심판의 근거에 차등을 적용하지 않는다. 율법은 언제나 동등한 심판을 행사한다. 심판의 차이를 만드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다. 하나님의 자비하심만이 그 차이를 발생시킬 수 있다. 당신은 이 사실이 감격스럽지 않는가? 타락한 천사들이 쫓겨나 비어있는 영광스러운 자리를 버러지 같은 우리 인생들이 차지하도록 하락하시다니요! 천사는 버리시고 우리는 건지시다니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신 된 자들은 누구보다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깨어 있어야 한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만일 그리스도의 사신임에도 불구하고 은혜 속에 있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야말로 모든 이들 중에서 가장 비참한 자일 것이다. 죄인들을 향하여 외쳤던 교리가 자신의 양심을 더욱 무섭게 찌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수천의 진리를 연구하여 다른 이들에게 그 진리를 전하는 일보다, 진리의 능력을 직접 체험하는 일이 더 어렵다. 영적인 의무를 감당하라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보다 자신이 그 의무를 직접 감당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인 것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롬 2:21).
Ⅳ 화해의 의미
하나님은 우리와 완전한 화해를 원하신다. 그것은 죄에 대한 완전한 사면(赦免)을 의미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면의 대가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죄인들에게 완전한 화목의 조건으로 율법에 대한 완벽한 이행을 요구하지도 아니하시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천년 동안 지옥에서 받는 고통으로 죄의 빚을 완전히 변제할 수 있다면, 그것만이라도 우리에게는 한없는 자비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단 한 조각의 죄의 빚도 요구하지 않으시다니 놀라운 은혜로다.
사람들은 말한다. ‘죄책에 대한 변제 없이 어떻게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질문은 매우 바람직하다. 죄책이 남아 있는 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공의의 만족과 죄인의 사면은 결코 모순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중대한 사실을 놓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값비싼 대가를 치르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켰다는 사실 말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우리 구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속량의 방식으로 우리의 모든 빚을 대신 갚으셨다. 우리의 보증자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키신 것이다. 그를 위해 어린양 예수는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아내셔야 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그 일을 이루셨다. 우리가 대체 무엇을 계획하고 무엇을 했다는 말인가? 우리는 그저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그 놀라운 은혜를 받게 되었을 뿐이다.
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이루어진 화목의 특징
1 깨어지지 않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이루어진 화목은 결코 깨어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렘 32:40).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언약이다. 하나님은 미쁘신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결단코 우리로부터 돌아서지 않으실 것이다.
2 완전하게 보전됨
하나님과의 화목은 또한 그리스도의 ‘중재’로 안전하게 보전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요일 2:1-2). 그리스도는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시다. 그리스도가 계시는 한 하나님과의 화목은 와해되지 않을 것이다.
Ⅵ 복음 사역의 핵심과 성령의 역사
복음 사역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언약’과 그리스도의 ‘중재’를 알리는 일이 그들에게 부여된 직임의 핵심인 것이다. 복음 사역은 사람들의 마음을 깨우쳐 죄를 알게 함으로 영혼을 겸손하게 변화시키는 위대한 효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 10:4-5).
복음의 칼은 단단히 굳어 있고 둔한 양심을 찔러 상처를 내어 오랫동안 쌓아왔던 육적이며 허망한 이론들과 상상들을 훼파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한다. 오직 그 칼날만이 사람의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고 두려워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순절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자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들이 이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7).
이러한 복음의 능력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나온다. 설교자들로부터 전해지는 말씀 자체에서 그 능력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개입하셔야만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에 복된 효력을 산출할 수 있는 것이다. 성령과 분리된 개념적인 논리는 아무런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 그래서 사도는 전도를 ‘미련한 것’이라고 말한다(고전 1:21). 전도자들로부터 전해지는 말씀 자체가 가지는 능력의 한계를 말하고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사역자의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회심해야 한다. 그러나 실상은 어떤가? 주일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말씀의 능력을 느끼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 버리는가!(사 53:1, 고후 4:3-4).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성령의 역사하시는 능력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는가? 아니면 여전히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가?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두려워해야 한다. 사신들을 통한 화해의 간청을 번번히 무시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무슨 핑계를 댈 수 있을 것 같은가? 여러분은 누구도 치료할 수 없는 병에 걸린 사람과도 같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진노가 느껴지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한 오래 참으심과 유순함을 거두어 가버리신다면 어찌 할 것인가? 그때 여러분은 가공할 심판의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인내의 시간이 지금도 계산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눅 13:7). “유다의 왕 아몬의 아들 요시야 왕 열셋째 해부터 오늘까지 이십삼 년 동안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기로 내가 너희에게 꾸준히 일렀으나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렘 25:3). 세상을 향해서는 그토록 지혜로우며, 왜 그토록 큰 구원에 문제에 대해서는 어리석은 것인가?
Ⅶ 사신을 향한 세상의 태도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언제나 세상 가운데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그들의 직무가 그들을 위한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들은 존중받을 이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실상은 좋은 소식을 가지고 세상에 평화를 반포하는 그들이 슬픔의 보상을 받는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행 7:52).
어떻게 이런 이들이 일어나는가? 하나님의 목회 사역을 대적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사탄의 악의가 자리 잡고 있다. 사탄은 시기심으로 가득한 왕자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신들을 대적하는 일이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죄의 노예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나팔소리를 그는 견딜수 없기 때문이다. 사탄은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사신들에 맞설 대적자들을 준비한다. 그들을 통해 어떻게든 그리스도께 세상을 다스리시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것이다.
Ⅷ 하나님과의 화해
자신이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 너무나 많다. 그가 어떠한 사람이든 이것을 깊게 깨닫지 못하는 한, 하나님과의 화해는 불가능하다. 하나님과 화해하는 일은 죄에 대한 깨달음과 회개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죄에 대한 진지한 각성과 회개는 그저 몇 마디 말로 뱉어내는 자백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본성과 죄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애통한 적이 있는가? 죄로 인해 마음이 상한 적이 있는가? 가책이 주는 고통으로 심령이 상하길 원한다.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우리를 괴롭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고통이 우리를 하나님과의 화평으로 인도할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모든 불의를 자복하십시오. 영혼의 산고가 없다면 평화의 자식은 결코 태어나지 않습니다.
화해의 증거와 증명
1 하나님과 화해한 자들이라면, 성결의 의무가 있다. 성결의 길을 걸어가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화해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화해했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것에 ‘가까워졌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과 화해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방식을 멀리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시 107:10). 하나님과 화해한다는 것은 죄와 영원히 절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화평의 조건이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7).
2 또한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이것 역시 하나님과 화해했다는 것에 대한 또 다른 증거이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요일 5:1). 하나님과 화해한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과도 화해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3 하나님과의 화해를 점검할 수 있는 마지막 증거는 ‘그리스도와의 친밀함’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해를 이루시는 단 한 분의 중보자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과 평화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그리스도를 제외시키면서 자신들이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멸망을 부추기는 거대한 실수가 아닐 수 없다.
올바른 설교를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큼이나 우리 스스로가 올바른 삶을 살려고 애를 써야 한다. 바르지 못하게 전달한 강론의 잘못보다 우리 삶속에 나타나는 한 가지의 잘못된 행동이 더 악한 열매를 맺게 할 수 있다. 그것 또한 여러분이 받은 직무 중 하나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결론
그리스도의 사신이 전한 것을 믿고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얻은 영혼들에게 권면의 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여러분은 본래 하나님의 궁휼 밖에 있던 사람이었다. 하나님과 멀리 있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사 12:1).
하나님을 찬미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얼마나 크고 위대합니까? 그 자비하심으로 ‘마음과 행실로 원수’였던 여러분과 화평한 상태를 이루셨습니다(골 1:21). 여러분 중 그 놀라운 일을 스스로 이룬 사람이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중 누가 영원토록 이어질 화평을 능히 얻어냈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주님 앞에서 이렇게 외쳐야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주여 내가 누구관데 천사들에게조차 베푸시지 않았던 그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을 베푸셨나이까!
하지만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다시 새로운 틈이 생기지 않도록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무릇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시 85:8).
물론 하나님과의 화평은 그 무엇도 깨트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적인 눈앞에 먹구름이 낄 수는 있습니다. 그런 경우 하나님과의 화평에 대한 의식이 희미해진 나머지 화평이 주는 기쁨과 위로를 전혀 누리지 못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 중 아직 하나님과 화해하지 못한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알리십시오. 그들도 우리처럼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하십시오. 사도 바울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골육의 친척’으로 인해 눌려 있었습니다(롬 9:3).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을 기억하며 세상 가운데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환란의 무게를 줄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시는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청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 고후 5:20
서론
그리스도를 영혼에 적용하는 것은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어서 가장 궁극적인 핵심이다. 그 일은 복음의 최초 전파로부터 시작된다. 복음을 듣지 못하여 그리스도를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그 영혼에 그리스도를 받아들일 것이라고 기대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런즉 그들이 믿지 아니하는 이를 어찌 부르리요 듣지도 못한 이를 어찌 믿으리요 전파하는 이가 없이 어찌 들으리요 보내심을 받지 아니하였으면 어찌 전파하리요 기록된 바 아름답도다 좋은 소식을 전하는 자들의 발이여 함과 같으니라”(롬 10:14-15).
Ⅰ 복음전파의 목적
1 복음전파의 도구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할 ‘사신들’을 준비하심으로 그리스도와 우리 사이에 있을 신비로운 일을 전할 사명을 맡기셨다. 죄인들을 용서하려는 자비하심과 그리스도와의 연합을 통해 얻게 될 놀랍도록 복된 은혜와 언약들로 채워져 있는 성경의 교훈과 율법을 해설하고 역설함으로써 영혼들을 그리스도께 더욱 효과적으로 인도하게 할 직임자들로 그들을 세우신 것이다.
2 복음전파의 목적
복음의 사역자들에게 맡겨진 직무의 궁극적인 목적은 ‘세상을 하나님과 화목시키는’ 일이다. 그들은 하나님과 대적하는 죄악적이고 허망하고 패역한 본성을 버리고 그 영혼이 그리스도께로 향하도록 하는 직무를 위임 받았다. 멸망의 상태에 있는 죄인들에게 그리스도의 보혈을 제안하는 것이 그들이 위임받은 직무의 주된 핵심인 것이다. 그들은 그리스도의 대리인들이다. 하늘에 계신 그리스도께서 이들을 통해 낮은 세상과 접촉하고 계시는 것이다.
Ⅱ 그리스도의 사신이 이 땅에 필요한 이유
그리스도 사신이 필요한 인간과 세상
하나님께서 사신을 쓰시다는 사실은 우리 인간이 매우 치명적인 타락과 결함을 가지고 있는 존재라는 것을 함축한다. 만약 인간이 하나님과 우호적이고 친밀한 교제의 상태로부터 이탈되지 않았다면 평화의 사신이 필요치 않을 것이다. 목회직을 세상에 존재케 하신 사실 자체가 세상이 타락했음을 말해주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께서 죄인들과 어떠한 교섭을 시도한다는 것 자체가 놀라운 일이다. 죄인들을 향해 자비와 은혜를 베푸시기 위한 방편을 친히 마련하셨다. 이것은 타락한 천사들에게는 보이지 않으셨던 긍휼이다. 하나님께서는 그들을 멸망 가운데 내버려 두셨다. “또 자기 지위를 지키지 아니하고 자기 처소를 떠난 천사들을 큰 날의 심판까지 영원한 결박으로 흑암에 가두셨으니”
하나님께서는 천사들보다 더한 멸망을 받아 마땅한 우리에게 긍휼을 베푸시기 위해 평화의 조약을 제안하셨다. 완악하기 짝이 없는 원수인 우리와 화목하기 위해 사신들을 보내셨다. 만약 우리가 그들을 멸시한다면 그것은 곧 그들을 보내신 하나님을 멸시하는 것이 된다. “너희 말을 듣는 자는 곧 내 말을 듣는 것이요 너희를 저버리는 자는 곧 나를 저버리는 것이요”(눅 10:16).
갈라디아 사람들이 사도 바울을 어떻게 대했는지 보라. 그들은 바울을 하나님의 천사로, 심지어 그리스도처럼 대우하였다(갈 4:14). 사도가 누구의 이름으로, 누구를 대신하고 있는지를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Ⅲ 그리스도의 사신의 태도
1 보내신 이의 뜻을 충실하게 이행하라
그리스도께서는 죄인들과 접촉하시기 위해 사신들을 보내셨다. 그들은 자기들을 보내신 그 뜻을 신실하고 충실하게 이행해야 할 사람들이다. “내가 복음을 전할지라도 자랑할 것이 없음은 내가 부득불 할 일임이라 만일 복음을 전하지 아니하면 내게 화가 있을 것임이로라”(고전 9:16).
사람들을 기쁘게 하려다가 말씀을 혼란하게 만드는 일을 해서는 안 된다. “우리의 권면은 간사함이나 부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속임수로 하는 것도 아니라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 너희도 알거니와 우리가 아무 때에도 아첨하는 말이나 탐심의 탈을 쓰지 아니한 것을 하나님이 증언하시느니라”(살전 2:3-5).
사역자들의 임무는 사람들을 자기의 제자로 삼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의 제자로 삼는 데에 있다. 사역의 내용과 방식과 목적에 있어서 자신들의 인간적인 유익을 추구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고후 12:14).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본을 보이셨다. “내 교훈은 내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의 것이니라”(요 7:16)
2 그렇다면 하나님께서 왜 평화의 조약을 세우시기 위해 사역자를 보내시는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의 평화의 조약이 세워지지 않는다면 죄인들은 결코 화해할 수 없다. 그 어떤 것도 하나님과의 화해를 얻어 낼 수 없다. 물론 하나님께서는 이 일을 직접 하실 수 있으신 분이시다. 그러나 만약 하나님께서 그렇다면 피조물인 죄인들은 하나님의 위엄 앞에 고개조차 들지 못할 것이다. “나로 다시는 나의 하나님 여호와의 음성을 듣지 않게 하시고 다시는 이 큰 불을 보지 않게 하소서 두렵건대 내가 죽을까 하나이다”(신 18:16, 히 12:21).
3 왜 천사가 아닌 인간인가?
천사는 피조물들 중 가장 높은 반열에 있는 존재들이다. 우리와는 전혀 다른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 피조물들인 것이다. 더욱이 그들은 우리와 같은 타락의 비참에 속해 있지 않는 자들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은 회복의 은택을 필요로 하는 자들이 아니다. 그들이 죄인 된 우리의 고통을 공감할 것이라는 것은 기대하기 어려울 것이다. 하지만 하나님의 사신들은 다르다. 그들은 죄인들이 느끼는 고통을 공감하는 자들이다. 마음속에서 끊임없이 활동하고 있는 죄의 작용이 무엇인지 그들도 잘 알고 있기 때문이다. 그들은 육체와 성령님 사이에서 벌어지는 갈등이 무엇인지 알고 있다. 그들도 매일 그러한 영적 전투를 겪고 있기 때문이다. “나와 네가 하나님 앞에서 일반이니 나도 흙으로 지으심을 입었은즉 내 위엄으로는 너를 두렵게 하지 못하고 내 권세로는 너를 누르지 못하느니라”(욥 33:6-7).
4 하나님께서 그렇게 비열하기 짝이 없는 피조물인 우리를 향하여 화평의 손을 내미셔야 할 이유가 무엇인가?
더욱이 그것은 우리보다 더 탁월한 반열에 있는 ‘천사들’에게도 주어진 바 없는 손길이다. 타락한 그들을 회복시킬 어떠한 자비의 손길이 주어진 적이 없다. 그들에게는 오직 심판의 날까지 자신들을 묶어 놓을 흑암의 사슬만이 허락되었을 뿐이다. 하나님께서는 탁월한 존재에게는 엄중하심을, 열등한 존재들에게는 온유하심을 베푸셨다. 당신이라면 황금 항아리를 버리고 질그릇을 택하겠는가?
타락한 천사들은 하늘의 영광스러운 빛을 받은 자들이기에 더욱 엄중한 율법의 심판을 받았다고 말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러나 율법은 심판의 근거에 차등을 적용하지 않는다. 율법은 언제나 동등한 심판을 행사한다. 심판의 차이를 만드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 한 분 뿐이다. 하나님의 자비하심만이 그 차이를 발생시킬 수 있다. 당신은 이 사실이 감격스럽지 않는가? 타락한 천사들이 쫓겨나 비어있는 영광스러운 자리를 버러지 같은 우리 인생들이 차지하도록 하락하시다니요! 천사는 버리시고 우리는 건지시다니요!
그러므로 그리스도의 사신 된 자들은 누구보다 끊임없이 자신을 돌아보는 일에 깨어 있어야 한다. “내가 내 몸을 쳐 복종하게 함은 내가 남에게 전파한 후에 자신이 도리어 버림을 당할까 두려워함이로다”(고전 9:27). 만일 그리스도의 사신임에도 불구하고 은혜 속에 있지 않는 자가 있다면, 그야말로 모든 이들 중에서 가장 비참한 자일 것이다. 죄인들을 향하여 외쳤던 교리가 자신의 양심을 더욱 무섭게 찌르게 될 것이기 때문이다. 수천의 진리를 연구하여 다른 이들에게 그 진리를 전하는 일보다, 진리의 능력을 직접 체험하는 일이 더 어렵다. 영적인 의무를 감당하라고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것보다 자신이 그 의무를 직접 감당하는 것이 훨씬 더 어려운 일인 것이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가르치는 네가 네 자신은 가르치지 아니하느냐 도둑질하지 말라 선포하는 네가 도둑질하느냐”(롬 2:21).
Ⅳ 화해의 의미
하나님은 우리와 완전한 화해를 원하신다. 그것은 죄에 대한 완전한 사면(赦免)을 의미한다. 하지만 하나님께서는 사면의 대가를 요구하지 아니하신다. 죄인들에게 완전한 화목의 조건으로 율법에 대한 완벽한 이행을 요구하지도 아니하시는 것이다. 만약 우리가 천년 동안 지옥에서 받는 고통으로 죄의 빚을 완전히 변제할 수 있다면, 그것만이라도 우리에게는 한없는 자비일 것이다. 그런데 우리에게 단 한 조각의 죄의 빚도 요구하지 않으시다니 놀라운 은혜로다.
사람들은 말한다. ‘죄책에 대한 변제 없이 어떻게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있단 말인가?’ 그들의 질문은 매우 바람직하다. 죄책이 남아 있는 한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시킬 수 없다는 것은 사실이다. 공의의 만족과 죄인의 사면은 결코 모순될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들은 매우 중대한 사실을 놓치고 있다. 그리스도께서 값비싼 대가를 치르심으로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켰다는 사실 말이다.
“그리스도 예수 안에 있는 속량으로 말미암아 하나님의 은혜로 값없이 의롭다 하심을 얻은 자 되었느니라”(롬 3:24).
우리 구주이신 그리스도께서 속량의 방식으로 우리의 모든 빚을 대신 갚으셨다. 우리의 보증자 되신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대신해 하나님의 공의를 완전히 만족시키신 것이다. 그를 위해 어린양 예수는 십자가에서 물과 피를 쏟아내셔야 했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일이었다. 하나님께서 계획하시고 그리스도를 통해 그 일을 이루셨다. 우리가 대체 무엇을 계획하고 무엇을 했다는 말인가? 우리는 그저 그리스도의 속량으로 말미암아 값없이 그 놀라운 은혜를 받게 되었을 뿐이다.
Ⅴ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이루어진 화목의 특징
1 깨어지지 않음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이루어진 화목은 결코 깨어지지 않을 것이다. “내가 그들에게 복을 주기 위하여 그들을 떠나지 아니하리라 하는 영원한 언약을 그들에게 세우고 나를 경외함을 그들의 마음에 두어 나를 떠나지 않게 하고”(렘 32:40). 이것이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주신 언약이다. 하나님은 미쁘신 분이시다. 하나님께서는 약속을 지키시는 분이시다. 결단코 우리로부터 돌아서지 않으실 것이다.
2 완전하게 보전됨
하나님과의 화목은 또한 그리스도의 ‘중재’로 안전하게 보전된다. “나의 자녀들아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씀은 너희로 죄를 범하지 않게 하려 함이라 만일 누가 죄를 범하면 아버지 앞에서 우리에게 대언자가 있으니 곧 의로우신 예수 그리스도시라 저는 우리 죄를 위한 화목 제물이니”(요일 2:1-2). 그리스도는 ‘죽임 당하신 어린양’이시다. 그리스도가 계시는 한 하나님과의 화목은 와해되지 않을 것이다.
Ⅵ 복음 사역의 핵심과 성령의 역사
복음 사역의 핵심이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의 ‘언약’과 그리스도의 ‘중재’를 알리는 일이 그들에게 부여된 직임의 핵심인 것이다. 복음 사역은 사람들의 마음을 깨우쳐 죄를 알게 함으로 영혼을 겸손하게 변화시키는 위대한 효력을 가지고 있다. “우리의 싸우는 무기는 육신에 속한 것이 아니요 오직 어떤 견고한 진도 무너뜨리는 하나님의 능력이라 모든 이론을 무너뜨리며 하나님 아는 것을 대적하여 높아진 것을 다 무너뜨리고 모든 생각을 사로잡아 그리스도에게 복종하게 하니”(고후 10:4-5).
복음의 칼은 단단히 굳어 있고 둔한 양심을 찔러 상처를 내어 오랫동안 쌓아왔던 육적이며 허망한 이론들과 상상들을 훼파할 수 있는 능력을 발휘한다. 오직 그 칼날만이 사람의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진노를 깨닫고 두려워하게 할 수 있는 것이다. 그래서 오순절 베드로의 설교를 들은 자들은 이렇게 말하였다. “그들이 이말을 듣고 마음에 찔려 베드로와 다른 사도들에게 물어 이르되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하거늘”(행 2:37).
이러한 복음의 능력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성령으로부터 나온다. 설교자들로부터 전해지는 말씀 자체에서 그 능력이 나오는 것이 아니다. 성령께서 개입하셔야만 말씀이 사람들의 마음에 복된 효력을 산출할 수 있는 것이다. 성령과 분리된 개념적인 논리는 아무런 능력을 가지지 못한다. 그래서 사도는 전도를 ‘미련한 것’이라고 말한다(고전 1:21). 전도자들로부터 전해지는 말씀 자체가 가지는 능력의 한계를 말하고 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사역자의 설교를 듣는 모든 사람들은 하나도 빠짐없이 회심해야 한다. 그러나 실상은 어떤가? 주일마다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말씀의 능력을 느끼지 못한 채 집으로 돌아가 버리는가!(사 53:1, 고후 4:3-4).
우리는 어떠한가? 우리는 성령의 역사하시는 능력을 통해 하나님과 화목하게 되었는가? 아니면 여전히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 머무르고 있는가? 만약 후자의 경우라면 두려워해야 한다. 사신들을 통한 화해의 간청을 번번히 무시한 여러분이 하나님 앞에서 무슨 핑계를 댈 수 있을 것 같은가? 여러분은 누구도 치료할 수 없는 병에 걸린 사람과도 같다. 여러분은 하나님의 진노가 느껴지지 않는가? 하나님께서 여러분을 향한 오래 참으심과 유순함을 거두어 가버리신다면 어찌 할 것인가? 그때 여러분은 가공할 심판의 하나님을 만나게 될 것이다. 하나님의 인내의 시간이 지금도 계산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라. “포도원지기에게 이르되 내가 삼 년을 와서 이 무화과나무에서 열매를 구하되 얻지 못하니 찍어버리라 어찌 땅만 버리게 하겠느냐”(눅 13:7). “유다의 왕 아몬의 아들 요시야 왕 열셋째 해부터 오늘까지 이십삼 년 동안 여호와의 말씀이 내게 임하기로 내가 너희에게 꾸준히 일렀으나 너희가 순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렘 25:3). 세상을 향해서는 그토록 지혜로우며, 왜 그토록 큰 구원에 문제에 대해서는 어리석은 것인가?
Ⅶ 사신을 향한 세상의 태도
그리스도의 사역자들은 언제나 세상 가운데 있었다. 그러나 세상은 그들을 어떻게 대했는가? 그들의 직무가 그들을 위한 것이었는데도 말이다. 그들은 존중받을 이유를 가지고 있는 사람들이다. 그런데 실상은 좋은 소식을 가지고 세상에 평화를 반포하는 그들이 슬픔의 보상을 받는다. “너희 조상들이 선지자들 중의 누구를 박해하지 아니하였느냐 의인이 오시리라 예고한 자들을 그들이 죽였고 이제 너희는 그 의인을 잡아 준 자요 살인한 자가 되나니”(행 7:52).
어떻게 이런 이들이 일어나는가? 하나님의 목회 사역을 대적하는 사람들의 마음속에는 사탄의 악의가 자리 잡고 있다. 사탄은 시기심으로 가득한 왕자이다. 그는 그리스도의 사신들을 대적하는 일이라면 수단을 가리지 않는다. 죄의 노예들에게 자유를 선포하는 그리스도의 복음의 나팔소리를 그는 견딜수 없기 때문이다. 사탄은 언제나 그리스도께서 보내신 사신들에 맞설 대적자들을 준비한다. 그들을 통해 어떻게든 그리스도께 세상을 다스리시지 못하도록 훼방하는 것이다.
Ⅷ 하나님과의 화해
자신이 하나님과 원수 된 상태에 있다는 사실을 깨닫지 못하고 있는 자들이 너무나 많다. 그가 어떠한 사람이든 이것을 깊게 깨닫지 못하는 한, 하나님과의 화해는 불가능하다. 하나님과 화해하는 일은 죄에 대한 깨달음과 회개로부터 시작되기 때문이다. 죄에 대한 진지한 각성과 회개는 그저 몇 마디 말로 뱉어내는 자백과는 전혀 다른 성질의 것이기 때문이다. 자신의 본성과 죄에 대해 하나님 앞에서 무릎을 꿇고 애통한 적이 있는가? 죄로 인해 마음이 상한 적이 있는가? 가책이 주는 고통으로 심령이 상하길 원한다. 그 고통은 상상을 초월할 정도로 우리를 괴롭게 할지도 모른다. 하지만 그 고통이 우리를 하나님과의 화평으로 인도할 것이다. 눈물을 흘리며 주님께 나아가십시오. 그리고 모든 불의를 자복하십시오. 영혼의 산고가 없다면 평화의 자식은 결코 태어나지 않습니다.
화해의 증거와 증명
1 하나님과 화해한 자들이라면, 성결의 의무가 있다. 성결의 길을 걸어가는 것으로 하나님과의 화해를 증명할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과의 화해했다는 말은 우리가 하나님의 모든 것에 ‘가까워졌다’라는 의미를 가진다. 하나님과 화해했다고 하면서 하나님의 방식을 멀리하는 것은 합당치 않다. “여호와를 사랑하는 너희여 악을 미워하라”(시 107:10). 하나님과 화해한다는 것은 죄와 영원히 절교하는 것을 의미한다. 이것은 하나님께서 요구하시는 화평의 조건이다. “악인은 그 길을, 불의한 자는 그 생각을 버리고 여호와께로 돌아오라 그리하면 그가 긍휼히 여기시리라 우리 하나님께로 돌아오라 그가 너그럽게 용서하시리라”(사 55:7).
2 또한 하나님의 자녀 된 자들을 사랑하고 있습니까? 이것 역시 하나님과 화해했다는 것에 대한 또 다른 증거이다. “예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자마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자니 또한 낳으신 이를 사랑하는 자마다 그에게서 난 자를 사랑하느니라”(요일 5:1). 하나님과 화해한 자들은 하나님의 백성들과도 화해한 자들이라는 사실을 명심하라.
3 하나님과의 화해를 점검할 수 있는 마지막 증거는 ‘그리스도와의 친밀함’이다. 하나님과 사람 사이의 화해를 이루시는 단 한 분의 중보자가 바로 그리스도이시다. 그리스도의 피를 통하지 않고 하나님과 평화를 이룰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러나 너무나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의 평화에서 그리스도를 제외시키면서 자신들이 하나님과 화평한 관계를 이루고 있다고 생각한다. 이는 멸망을 부추기는 거대한 실수가 아닐 수 없다.
올바른 설교를 하기 위해 노력하는 것만큼이나 우리 스스로가 올바른 삶을 살려고 애를 써야 한다. 바르지 못하게 전달한 강론의 잘못보다 우리 삶속에 나타나는 한 가지의 잘못된 행동이 더 악한 열매를 맺게 할 수 있다. 그것 또한 여러분이 받은 직무 중 하나라는 것을 잊지 마십시오.
결론
그리스도의 사신이 전한 것을 믿고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얻은 영혼들에게 권면의 말씀을 드리고자 한다. 여러분은 본래 하나님의 궁휼 밖에 있던 사람이었다. 하나님과 멀리 있던 자들이었다. 그러나 그리스도의 피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화평을 누리게 되었다. “그 날에 네가 말하기를 여호와여 주께서 전에는 내게 노하셨사오나 이제는 주의 진노가 돌아섰고 또 주께서 나를 안위하시오니 내가 주께 감사하겠나이다 할 것이니라”(사 12:1).
하나님을 찬미하십시오. 여러분에게 베푸신 하나님의 자비하심이 얼마나 크고 위대합니까? 그 자비하심으로 ‘마음과 행실로 원수’였던 여러분과 화평한 상태를 이루셨습니다(골 1:21). 여러분 중 그 놀라운 일을 스스로 이룬 사람이 누구입니까? 여러분은 중 누가 영원토록 이어질 화평을 능히 얻어냈다는 말입니까? 우리는 주님 앞에서 이렇게 외쳐야 마땅한 사람들입니다. ‘주여 내가 누구관데 천사들에게조차 베푸시지 않았던 그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을 베푸셨나이까!
하지만 경계를 게을리 하지 마십시오. 하나님과 다시 새로운 틈이 생기지 않도록 말입니다. “내가 하나님 여호와께서 하실 말씀을 들으리니 무릇 그의 백성, 그의 성도들에게 화평을 말씀하실 것이라 그들은 다시 어리석은 데로 돌아가지 말지로다”(시 85:8).
물론 하나님과의 화평은 그 무엇도 깨트릴 수 없습니다. 하지만 우리의 영적인 눈앞에 먹구름이 낄 수는 있습니다. 그런 경우 하나님과의 화평에 대한 의식이 희미해진 나머지 화평이 주는 기쁨과 위로를 전혀 누리지 못하게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는 또 나아가 다른 사람들을 하나님과 화해시키려고 애를 쓰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들과 친밀한 관계를 맺고 있는 사람들 중 아직 하나님과 화해하지 못한 자들이 있을 것입니다. 그들에게 그리스도를 알리십시오. 그들도 우리처럼 하나님과 화목하도록 하십시오. 사도 바울의 마음은 언제나 하나님과 화목하지 못한 ‘골육의 친척’으로 인해 눌려 있었습니다(롬 9:3).
우리는 하나님과 화목한 사람들입니다. 이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이것을 기억하며 세상 가운데서 우리가 만나는 모든 환란의 무게를 줄이십시오. 그러면 하나님의 평강이 우리의 마음과 생각을 지키실 것입니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PBA
글쓴이 : 박성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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