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플라벨

[스크랩] 존 플라벨 은혜의 방식 7장

강대식 2015. 11. 12. 19:37
7장 믿음의 적용

“영접하는 자 곧 그 이름을 믿는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권세를 주셨으니”(요 1:12).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의 행사는 영혼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영접하고 그리스도의 인격과 특권들에 참예하는 권리를 가져다준다. 그러나 이와는 정반대로 ‘불신앙’으로 그리스도를 거부하는 일은 그리스도로부터 영혼을 끊고, 영혼을 그리스도께서 피로 사신 모든 은택들과 분리시켜 영원한 저주아래 멸망케 한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에 생명이,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에는 사망이 있는 것이다.

‘믿음보다 더 탁월한 은혜는 없다’라는 사실에 비추어 본다면 불신앙만큼이나 혐오스럽고 가증한 죄는 없다. “믿고 세례를 받은 사람은 구원을 얻을 것이요 믿지 않는 사라은 정죄를 받으리라”(막 16:16).

죄인이 의롭다하심을 받기 위해서는 반드시 그 복된 효력을 내기 위한 요인들이 함께 작용해야 하는데 그것은 바로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와 하나님의 공의를 만족케 할 그리스도의 피이다. 또한 그것을 받아들일 도구인 믿음도 있어야 한다. 하나님의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와 그리스도의 피의 공로를 자신에게 적용하기 위해서는 반드시 믿음이 필요하다. “그에 대하여 모든 선지자도 증언하되 그를 믿는 사람들이 다 그의 이름을 힘입어 죄 사함을 받는다 하였느리라”(행 10:43).

그리스도께서 죄인들을 위해 육체로 오셨고 십자가에서 죽으셨다. 그리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셨다. 하지만 이 사실을 믿지 않는다면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일은 죄인을 오히려 ‘죄 가운데서’ 죽게 하는 것이 된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말하기를 너희가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 하였노라 너희가 만일 내가 그인 줄 믿지 아니하면 너희 죄 가운데서 죽으리라”(요 8:24). 불신앙처럼 우리의 영혼을 파멸로 몰아가는 것은 없다. 불신앙으로 하나님을 모독하고, 예수 그리스도를 우습게 여기는 것은 그리스도의 피를 통한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구속의 계획을 업신여기며 좌절시키는 일이다. 그러므로 불신앙은 가장 나쁘고 위험한 죄 중에 죄이다.

그러나 바른 믿음을 가지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세상에 참된 믿음을 가지고 진실로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사람은 많지 않다. 많은 사람들이 어처구니없게도 자기 자신의 의를 의지하고 있다.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 10:3).

하나님께서는 사람들의 의를 ‘행하는 곳’에서 ‘믿는 곳’으로 옮겨 놓으심으로 사람들이 자신의 의를 내려놓고 그리스도의 의를 향하도록 하셨다. 그러나 사람들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새로운 자리로 나아가려 하지 않는다. 자기들의 의를 부인하려들지 않는 것이다. 그러니 그들은 차라리 저주를 받는 모험을 택할 것이다. 믿음에는 복종이 함축되어 있다. 바른 믿음에는 하나님께서 새로이 정하신 명령에 복종하고 자신을 부인하는 일이 있어야 하는 것이다.

Ⅰ 믿음의 반론들

1 수많은 그리스도인들의 마음을 고통스럽게 만드는 참된 평안을 저해하는 반론들

‘예수님을 바르게 영접하기 위해 많은 빛과 지식을 가져야 하는데 나는 너무나 무지하다. 거듭나지 못한 육적인 자들이 오히려 나보다 더 많은 것을 알고 있다니...’

이러한 반론이 내면에서 일어나는 이유는 그 ‘종류’나 ‘정도’에 따라 구분되어져야 하는 것을 알기 못하기 때문이다. 그것을 알기만 한다면 자신이 느끼는 무지함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데에 결코 방해가 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게 될 것이다.

지식은 본성으로 습득하는 지식과 영적으로 주어지는 지식으로 구분할 수 있다. ‘본성적’ 지식은 교육을 통해 얻어지는 것을 말한다. 그 대상이 영적인 것이라 할지라도 교육을 통해 누구나 어느 수준의 이상의 지식도 습득이 가능한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높은 수준의 영적인 지식을 가진다 해도 그 지식을 영적인 것들을 분별할 수 있는 빛으로 보기는 어렵다. 빛의 차원에서 여전히 본성의 영역 이상을 벗어나지 못하는 것이다.

그러나 영적으로 주어지는 지식은 그렇지 않다. 그것은 ‘신령한 것을’ 깨닫는 일이며, 요한일서 2:27의 말씀처럼 ‘기름 부으심의 가르침’이다. 영적으로 주어지는 지식은 영혼에 역사하시는 성령님의 열매이다. 참된 ‘영적’ 지식을 가진다고 하는 것은 바로 그 은혜의 작용을 느끼고 이해하는 것으로, 본성적인 지식을 훨씬 능가하는 탁월한 것이다.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단 하나의 신령한 지식이 가지는 생명과 향기가 거듭나지 못한 사람들이 가지고 있는 거대한 지식보다 훨씬 더 탁월한 것이다. 영적인 빛과 지식은 결코 ‘양’의 문제가 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하늘은 그저 명석하고 섬세한 두뇌를 가진 자들을 위한 곳이 아니다.

2 신자들의 평안을 해치는 반론

‘나는 너무나 많은 의아심을 가지고 있다. 때로 나는 가공스러운 무신론적 생각들을 하곤 한다. 복음의 진리에 찬동하는 것 자체가 의롭다함을 받게 하거나 구원을 얻게 하는 직접적인 행위가 아니라는 것은 알지만, 바른 믿음을 갖기 위해서 확고한 지적 찬동은 필요하지 않을까?’

사탄은 죄에 대한 두려움을 대수롭지 않게 여기도록 하거나, 영적인 의무들을 가볍게 여기도록 끊임없는 시험을 가한다. 하지만 그러한 시험의 때에 어떻게든 양심의 끈을 놓치지 않으려는 마음이 든다면 그들이 가지는 지적찬동은 진실하다고 볼 수 있다.

자신의 영혼에 대한 확고한 결론을 내리는 일은 신자들에게 있어서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그것은 평안과 안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세상에는 자기 스스로 참된 믿음을 가지고 있다고 착각하는 사람들만큼이나, 자기 자신이 참된 신자임을 알지 못하고 있는 그리스도인이 많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 곧 구원 얻을 만한 믿음을 가지게 되는 일은, 그것이 설령 작고 낮은 수준의 정도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은혜의 풍요함과 부요함을 찬탄(讚嘆)하기에 충분한 이유를 가지고 있다. 우리에게 구원받을 만한 믿음이 주어졌다면, 그것이 아무리 적은 분량이라 할지라도 하나님의 엄청난 후대를 받은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하나님께서 배푸신 가장 작은 자비하심만으로도 이 세상에서 우리가 겪을 수 있는 모든 환란과 고통을 상쇄하기에 충분하다는 사실을 잊지말아야 한다.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영접하여 자녀의 권세를 받은 자는 누구나 ‘하나님은 나의 아버지이시오, 하늘은 내가 받을 기업이라’고 말할 수 있다. 그것은 결코 주제넘은 생각이 아니다. 그러니 믿음은 얼마나 보배로운가. 무엇으로 그 특권을 살 수 있다는 말인가. 그것은 세상의 천만 보화를 들여 살 수 있는 것이 아니다. 세상에 있는 모든 왕들의 왕관과 홀에 박혀 있는 보석들을 모아 팔아 보라. 하나님의 자비의 부스러기조차 살 수 없을 것이다.

구원 받을 만한 믿음은 적은 분량이라도 영혼을 완전한 칭의의 상태에 들어가도록 한다.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한 믿음이라면 그리스도 안에서, 그리스도와 함께 값없이 베풀어 주시는 은혜롭고 완전한 죄의 용서를 받기에 충분하다. 가장 작은 믿음으로 가장 큰 죄의 사면을 받아내는 것이다. “이 사람을 힘입어 믿는 자마다 의롭다 하심을 얻는 이것이라”(행 13:39).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믿음을 가진 자에게는 정죄함이 없다(롬 8:1). 그의 죄가 아무리 많다 할지라도 말이다.

하지만 누구나 쉽게 믿음을 가질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믿음은 모든 사람의 것이 아니니라”(살후 3:2). 믿음을 선물로 받지 못한 세상의 귀인들과 힘 있는 자들을 보라. 그들은 많은 재물과 권세를 가진 사람들이다. 하지만 그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지 않다. 그들에게는 그리스도도, 용서도 없다. 세상의 모든 권세를 가지고 있지만, 하나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가지지 못했다(고전 1:26-27). 그러니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세상 가운데 가장 낮고 비천하고 곤고한 조건에 처해 있더라도 이렇게 외치십시오. “내 영혼아 네 평안함으로 돌아갈지어다 여호와께서 너를 후대하심이로다”(시 116:7).
믿음의 모든 행사는 그리스도를 향하게 하시는 아버지의 이끄심의 효과이다(요 6:44). 하나님께로부터 나온 영광스럽고 저항할 수 없는 능력으로부터 그것이 산출되는 것이다. 그것은 전적인 ‘하나님의 역사’이다(골 2:12).

우리의 믿음이 작게 느껴지십니까? 하지만 그렇다 할지라도 그 안에 쌓여 있는 무한히 거대하신 하나님의 놀라운 자비하심은 간과하지 마십시오.

Ⅱ 믿음의 진실성을 분변하기

우리가 진실한 믿음을 가지고 있다면, 그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모든 시험을 견뎌내도록 할 것이다. 그러나 우리가 가진 믿음의 실상이 그렇지 않다면 어떻게 할 것인가? 믿음의 문제는 영원한 운명과 직결된 문제이다. 이 문제에 대하여 지극히 진지하고 세심한 태도를 가져야 한다는 것은 누구에게나 당연한 일이다.

그러기 위해서 믿음에 ‘선행되는 사항들’ 즉 성령의 예비적인 역사가 영혼 속에서 일어나는지 돌아보아야 한다. 성령의 역사들은 흔히, 하나님의 선택하신 백성의 영혼 속에서 그 믿음으로 안내하는 역할을 한다. 그 사람의 마음을 비추시어 사람들로 하여금 간절한 마음을 가지도록 하시는 것이다.

1 ‘빛을 비추시는 일’(illuminnation)

성령께서 영혼에 ‘빛을 비추시는 일’(illuminnation)은 믿음에 있어서 필수적인 선행사항이다. 하나님께서 우리 영혼의 눈을 열어 우리 자신의 죄를 보게 하시고, 주 예수 그리스도 안에서만 그 문제의 해결책이 있음을 알게 하시기 전까지는 믿음은 일어나지 않는다. 성령의 이 작용이 믿음의 본질과 시간적 순서에 있어 가장 처음에 놓이는 것이 이치이다. 이후 영혼 속에서 일어날 모든 일들의 서곡인 것이다. “그 눈을 뜨게 하여 어두움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께로 돌아가게 하시고”(행 26:18).

이처럼 믿음에 있어서 가장 먼저 선행되어야 할 그 분명한 ‘빛’이 없다면, 그 믿음은 ‘눈먼’ 것에 불과하다. 정말 그러하다. 하나님께서 우리의 눈을 열어 그 전에는 보지 못하던 죄와 비참함을 보게 하셨습니까? 하나님께서 구원을 위해서 빛을 비춰주심으로 우리의 영적인 눈을 열어 주셨다면 죄를 바라보는 관점은 이전과 완전하 차이를 보일 것이다. 벽이나 종 위에 그려진 ‘사자’만 보다 길에서 진짜 사자를 만나는 것처럼 말이다. 죄에 대한 이러한 새로운 지각은 ‘죄를 뉘우치는 일’(conviction)을 수반하다.

2 ‘죄를 뉘우치는 일’(conviction)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막 1:15). 헛되고 부질없는 마음은 죄로 인한 각성으로 찔리고 고통을 당해야 한다.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바른 믿음을 가지려면 말이다. 회심하는 자들이 당하는 영적 고통은 정도나 기간에 있어서 차이가 있지만, 믿음은 어떠한 고통도 없이 그냥 생겨나는 것이 아니다. 죄의 각성은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에 빛을 비추신 결과이다. 그 빛이 우리의 실상을 적나라하게 드러내도록 조명하는 것이다. 자신의 비참함을 알게 된 영혼은 아픔을 느끼지 않을 수가 없을 뿐만 아니라 크게 절망하지 않을 수 없게 되는 것이다. 그 절망감은 자신 속에 구원의 소망이 없다는 것을 아는 것으로부터 나오는 것이다. 곧 믿음은 자신의 힘으로 그 비참에서 벗어나지 못한다는 것을 깨달으면서 느끼는 절망감에서 비롯된다.

3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

이 말은 자신들의 구원에 대해 깊은 절망감을 느낀 사람들의 울부짖음이었다. 비참에 처해 있는 자신을 깨닫고 그 비참에서 도망치려는 자들의 외치는 음성인 것이다. 그들은 탈출의 방도를 알지 못했다. 정말이지 큰 절망감에 빠진 자들이었던 것이다. 도망칠 수 있는 오직 하나의 비상구를 찾으려고 우왕좌왕하며 절규하는 자들과 같은 것이다. 영혼이 멸망을 피할 수 있는 길은 오직 그리스도 한분 뿐이시다. 그들의 절망감이 그들을 그리스도 앞으로 몰아간다.
4 ‘갈망하고 부르짖음’

결국 이러한 각성과 절망은 영혼으로 하여금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늘로부터 오는 도움을 향해 ‘갈망하고 부르짖게’ 한다. 자신의 영혼을 건져 구원할 강한 반석으로 옮겨 주시기를 타원하게 되는 것이다. 폭풍의 바다를 피할 수 있는 안전한 항구는 오직 그리스도라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영혼은 자기 자신에게는 그리스도께로 마음을 열어 능히 영접할 능력이 없음을 알고 있다. 곧 믿음의 역사가 전적으로 초자연적인 하나님의 행사임을 알게 되는 것이다. 그것을 알게 된 영혼이 어찌 “주여, 나의 믿음 없음을 도와주옵소서”(막 9:24)라면 울부짖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주여, 저로 하여금 그리스도께 나갈 힘을 주소서.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않으면 저는 영원히 망할 수밖에 없나이다. 저의 피는 아무런 유익이 없다는 것을 압니다. 오 주여, 믿음의 일은 하나님의 일이시오며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나이다. 그 일을 저의 영혼에 하시옵소서! 그리스도를 주옵소서! 믿음을 주소서!’

우리가 살아왔던 지난날의 삶의 자취들을 되돌아보십시오. 하늘을 우러르며 그러한 울부짖음으로 하나님께 간구한 적이 있었습니까? 그리하였다면 그것은 믿음이 영혼 속으로 들어왔다는 하나의 좋은 증거입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애통한 마음의 울부짖음은 믿음의 길을 닦는 ‘믿음의 선구자’이기 때문입니다.

Ⅲ 믿음이 영혼에 어떤 것들을 ‘수반(隨伴)’하는지 점검하기

이것은 우리의 영혼에 믿음을 통해 그 전과는 다른 심령의 기풍을 가지게 되었는지에 대한 문제이다. 그리스도를 바르게 영접한 사람들의 심령에는 분명 함께 수반되어 나타나는 여러 가지 기풍이 있기 마련이다.

1 ‘진지’한 기풍

믿음을 가진 자는 영적인 문제에 대해 매우 ‘진지’한 기풍을 가지게 된다. 사람들은 ‘나와 내 권속들이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에 대해 온 마음을 쓴다. 자기 자신의 육신에 관련된 일이라면 어찌나 민감한 반응을 보이는지 모른다. 그러나 영혼이 구원에 대한 심각성을 깨닫게 되면 빌립보의 간수가 던진 것과 같은 질문들, 즉 “선생들이여 내가 어떻게 하여야 구원을 얻으리이까?”라는 질문을 던질 수밖에 없게 된다.

자기가 무엇을 먹고 마실지에 대한 문제보다 마음에 훨씬 더 깊은 진지한 인상을 가지게 되는 것이다. 물론 영적인 문제에 대해 생각하는 무게의 분량은 사람마다 차이가 보인다. 하지만 그들 모두가 세상의 그 어떤 일보다 그 문제를 더욱 엄숙하고 외경스럽게 염려하는 모습을 가지는 것이다.

2 마음의 겸비함

그런 상태에 들어가는 자의 마음은 겸비하고 자신을 낮춘다. 자기 스스로는 구원을 위해 아무 일도 할 수 없다는 것을 알고 있는 영혼이 어떠한 심령의 자세를 가지겠습니까? 의롭고 거룩하신 하나님의 저주 밖에는 기대할 수 없었던 영혼에 그리스도의 여명(黎明)이 밝아온다면, 그 심령이 어찌 겸비한 마음을 가지 않을 수 있겠냐는 말이다.

‘오 주여, 제가 누구관대 저를 먹이시고 보존하시나이까! 제가 누구관대 이렇게 오랫동안 저를 아끼시고 참으시나이까! 제가 누구관대 예수 그리스도를 저에게 주시나이까! 저 같은 자가 그리스도의 인격과 연합하여 영광을 누리고 용서와 평강의 피로 구원을 받게 되다니요! 벌레 같은 저에게 어찌 그런 일이 일어날 수 있다는 말입니까! 저를 위해 그리스도를 내어 주시다니요! 어찌 저에게 그 큰 복락을 베푸시나이까! 하나님을 그토록 대적했던 저에게 말입니다!’

겸비한 영혼은 울며 눈물로 그리스도의 발을 씻는다. 완전히 녹아버린 심령을 가지고 말이다. “예수의 뒤로 그 발 곁에 서서 울며 그 발을 적시고...”(눅 7:38).

3 ‘갈망하는 상태’

자신의 곤비함을 깨달은 영혼은 ‘갈망하는 상태’에 들어가기 마련이다. 시냇물을 간절히 찾는 사슴이나, 그늘에 들어가 쉬기를 간절히 바라는 말도 예수 그리스도를 갈망하는 영혼만큼 간절하지는 않을 것이다. 법정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이 사면(赦免)을 소원하다고 해도 예수 그리스도를 갈망하는 영혼만큼은 아닐 것이다. 다윗은 말하였다. “누가 베들레헴의 샘물을 길어 나로 마시게 할까!” 겸비해진 죄인은 말한다. ‘누가 나로 하여금 그리스도의 피의 샘을 마시게 할까! 그 보배로운 피 한 방울이라도 내게 떨어뜨려 주었으면! 내가 세상에서 버림받고 평생을 곧고하게 산다할지라도 하나님께서 내게 그리스도를 주기만 하신다면!’

4 ‘갈등의 상태’

그리스도를 영접하기 직전 영혼은 ‘갈등의 상태’에 빠진다. 영혼은 소망과 두려움, 용기와 좌절 사이에 서있게 된다. 그러한 영혼은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길목에서 몇 번이고 발걸음을 멈추어 선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자신의 죄에 대한 생각은 그를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하도록 한다. 그러다가도 그리스도의 자비하신 은혜의 풍성함에 대한 소망이 그를 다시 세워준다. 사탄은 쉽게 포기하지 않는다. ‘너 같이 더러운 자가 자비하심을 얻다니. 그런 일이 가능할 것 같아?’ 이 말은 들은 사람들은 고개를 떨굴 수밖에 없다.

그러나 구원의 길은 오직 하나 밖에 없다. 어떠한 어려움이 있더라도 오직 한 길을 향하여 나가는 수밖에 없는 것이다. 우리와 같은 수많은 이들이 하나님의 자비하심을 얻었다는 사실을 기억하십시오. “내게 오는 자는 결단코 내어 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이 말씀을 의지하여 일어나십시오. 이 소망으로 영혼을 고양시키십시오. 우리의 믿음을 가지고 나아가십시오.

5 완전히 녹아내린 마음

“믿음을 가진 영혼은 하나님의 은혜와 긍휼 앞에서 완전히 녹아내린 마음을 가진다. 내가 다윗의 집과 예루살렘 주민에게 은총과 간구하는 심령을 부어 주리니 그들이 그 찌른 바 그를 바라보고 그를 위하여 애통하기를...”(슥 12:10).

6 그리스도와 그의 길들과 그 백성들을 사랑하게 된다

또한 믿음을 가진 영혼은 그리스도와 그의 길들과 그 백성들을 사랑하게 된다. “사랑으로 역사하는 믿음”(갈 5:6)은 영혼으로 하여금 하나님의 사랑을 표현함으로 모든 순종의 행위를 하도록 한다. 하나님의 그리스도를 향한 사랑은 믿음의 확실한 표증 중 하나인 것이다.

7 정결한 마음

또한 믿음은 정결한 마음을 가지게 한다. “믿음으로 저희 마음을 깨끗이 하사”(행 15:9). 믿음은 ‘손’의 행실뿐 아니라 ‘마음’을 깨끗케 합니다. 믿음이 아닌 다른 원리로는 마음을 정결케 하는 일은 불가능하다. 도덕성이 그 행실로 내면의 부패를 감춘다고 해도 그 내면의 부패는 결코 ‘정결’하게 만들지 못하는 것이다. 오직 믿음만이 그 마음을 부패로부터 ‘정결’하게 할 수 있다.

8 그리스도의 계명에 순종한다

마지막으로 진실로 믿음을 가진 자는 그리스도의 계명에 순종한다(롬 14:26). 믿음은 곧 순종으로 말할 수 있다. 왜냐하면 믿음으로 그리스도를 주로 받아 영혼으로 하여금 순종하도록 하는 강력한 논증을 그 영혼에게 부과하기 때문이다.

우리가 이러한 믿음의 표증들을 가지고 있다면 우리는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그런데도 아직 진실한 믿음을 가졌는지에 대해 확신이 없으십니까? 만일 죄에 대한 깊은 각성을 가지고 이전에 의지했던 모든 육신적인 피난처를 벗어나 그리스도께 나아간 일이 있다면, 더 이상 의심하지 마십시오. 우리가 그리스도를 가장 높고 존귀한 분으로 여기며, 마음으로 진정 그분을 갈망하여 세상 어느 것보다 그리스도의 형상을 닮아 가는 일을 사모하고 있다면 그리스도의 사람입니다.

우리의 집이 금과 은으로 가득 채워지기보다 우리의 영혼이 그리스도의 성령으로 충만하게 되는 것을 더 소원하십니까? 그리스도께서 우리를 사랑하신다는 단 하나의 표증으로 미소 지어 주시는 것을 세상이 주는 어떠한 영예보다 소중히 여기려는 마음을 가지십니까? 그렇다면 더 이상 의심할 필요가 없습니다.
우리는 스스로 가장 불쌍한 자라고 생각할지 모르지만 우리는 분명 가장 부요한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를 멸시하고 거부하는 이들 속에는 전혀 발견할 수 없는 것들을 우리가 가지고 있으니 말입니다.

Ⅳ 불신자들을 향한 권면

권면의 요점은 복음의 규범이다. 곧,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것에 대한 문제이다. 그리스도 안에 과연 무엇이 있는지 숙고해 보고, 그것을 알기만 한다면, 지금처럼 그 분에 대해 무관심하거나 거절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1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이 계십니다’(고후 5:19). 하나님의 신성의 충만이 예수 그리스도의 육체에 거하신다. 그리스도는 ‘육체로 나타나신 하나님’이신 것이다(딤전 3:16). 그러니 그리스도를 영접하면 하나님을 영접하는 것이 되는 것이다.

2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의 권위가 있습니다’(고후 5:19). “너희는 삼가 그의 목소리를 청종하고 그를 노엽게 하지 말라 그가 너희의 허물을 사하지 아니할 것은 내 이름이 그에게 있음이라”(출 23:21).

3 ‘그리스도 안에는 무한하신 하나님의 지혜가 있습니다.’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골 2:3). “그 안에는 지혜와 지식의 모든 보화가 감추어져 있느니라”(골 2:3).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만큼 당신 자신의 지혜를 드러내신 일이 없다. 그 지혜는 “천사들도 살펴보기를 원하는 것”이었습니다.

4 ‘성령의 충만함’이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하나님께서는 그 어떤 피조물에게도 그리스도에게와 같이 한 없는 성령으로 충만케 하신 일이 없습니다. “이는 하나님이 성령을 한량없이 주심이니라”(요 3:34).
다른 존재들에게 주어진 성령의 분량은 한계가 있습니다. 그들 가운데서도 서로 간에 차이가 있습니다. 그러나 오직 그리스도께서는 성령이 한없이 계십니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동료들’보다 더 크게 성결의 영으로 기름부음을 받으신 분입니다(시 45:2,7). 사람들은 저마다 각각의 다른 은혜들을 가지고 있습니다. 어떤 사람은 지혜를, 어떤 사람은 믿음을, 그리고 어떤 사람은 인내를 말입니다. 하지만 그리스도 안에는 그 모든 것이 하나도 빠짐없이 들어있습니다.

5 그리스도 안에는 ‘하나님의 의’가 있습니다. 그 의는 죄책을 가진 죄인을 하나님 앞에서 의롭다하심을 받게 할 의입니다(고후 5:21). 우리는 오직 그리스도의 의로만 하나님 앞에서 의롭게 될 수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여호와 우리의 의”이시며(렘 23:6), 우리 의의 원조가 되시는 것입니다.

6 ‘하나님의 사랑’이 그리스도 안에 있습니다. 그리스도께서는 혈과 육으로 감싸이신 하나님의 사랑입니다(요일 4:9). “하나님의 사랑이 우리에게 이렇게 나타난바 되었으니”(요일 4:9).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위해 당신의 아들을 보내셨습니다. 세상에 이보다 높은 차원의 사랑이 있을 수 있습니까? 이것이야말로 하나님께서 행하신 최고의 사랑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7 그리스도께서는 사랑과 함께 ‘하나님의 자비하심과 긍휼하심’을 가지고 계십니다(유 21). 가련한 죄인들이 원하는 것은 하나님의 자비하심입니다. 마지막 숨을 내쉬면서 울부짖으며 바라는 것도 바로 그것입니다. 그 큰 심판의 자비를 얻을 수만 있다면 무엇을 드리지 않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은 그리스도 안에 있는 자비하심을 얻게 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떠나서는 어떠한 하나님의 자비도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이 모든 것이 그리스도께 있기에, 그리스도는 곧 ‘하나님의 구원’이 되시는 것입니다. 구원을 얻게 할 다른 이는 없습니다. 오직 그리스도께서 구원의 문이십니다.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구원을 위해 제시하신 위대한 방식입니다.

“이러므로 우리가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사신이 되어 하나님이 우리로 너희를 권면하심과 것같이 그리스도를 대신하여 간구하노니 너희는 하나님과 화목하라”(고후 5:20). 오! 자비의 하나님께서 우리를 위해 얼마나 당신 자신을 낮추셨습니까! 온 우주의 창조자이신 하나님께서 피조물인 여러분에게 우리에게 간청하고 계시다니요!

그리스도를 제안하시는 하나님의 간청을 거절하고 무시하는 죄악과 위험에 주목해 보십시오. 그것은 정말 엄청난 죄입니다. 모든 죄의 극악함과 비참의 총체가 바로 그 죄 속에 들어 있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은 피조물이 할 수 있는 한 창조주 하나님을 가장 경멸하는 처사를 저지르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는 당신의 공의와 자비, 지혜와 모든 속성을 다 동원하여 그리스도 안에서 가장 영광스럽게 빛나도록 하셨습니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처럼 확연하게 과시된 적은 없습니다. 그런 예수를 멸시하다니요! 그것이야말로 인간들이 하나님의 영광에 대해서 할 수 있는 가장 커다란 모욕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불신앙은 자신을 살해하는 행위입니다. 생명과 구원의 길을 거부함으로 자신의 영혼을 죽음으로 내모는 악을 행하는 것입니다. 그리스도를 거절하는 것은 그리스도를 모른 채 멸망한 다른 사람보다 더 큰 정죄가 있는 것이 아닙니까? 가장 큰 죄인은 그리스도의 복음을 듣고도 믿지 않는 자들일 것입니다.
Ⅴ 믿는 자를 향한 권면

그리스도를 영접했다는 확신을 가진 신자가 누리는 기쁨과 행복은 정말이지 귀한 것입니다. 이제는 안전하고 행복한 자리에서 이전에 빠져있던 위험의 자리를 떠올리며 느끼는 안도감이 어떨지 생각해 보십시오. 그리고 장차 들어가게 될 영광의 처소를 생각하는 그 기쁨을 세상 무엇과 바꾸겠습니까!

그리스도를 영접한 것에 대해 우리로 하여금 흔들리지 않는 확신을 갖도록 도와주는 표증들을 놓치지 마십시오. 우리가 가지는 그리스도의 연합에 대한 확신은 곧 구원의 확신의 터가 될 것입니다. 우리에게 주어진 요한보음 1:12의 믿음의 표지가 우리 속에 있습니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를 인치실 준비를 끝내셨습니다. 그것은 성령께서 기쁘게 감당하시는 직무입니다. “그러므로 너희가 그리스도 예수를 주로 받았으니 그 안에서 행하되”(골 2:6).

Ⅵ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려는 자를 향한 권면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방편과 목적을 혼동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이 문제에 대해 많은 이들이 실수를 범하고 있습니다. 기도와 설교를 듣는 일은 분명 우리를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방편입니다. 그 자체가 그리스도는 아닙니다. 그러한 방편들을 친밀히 행하는 것과 그리스도와 친밀하게 되는 것은 별개의 문제입니다.

또한 우리는 ‘현세의 고요함만을 위해 그리스도를 영접하지 않기를 바랍니다’. 많은 사람들이 그러합니다. 양심의 가책이 주는 공포와 죄책으로부터 해방되기 위해서만 그리스도의 피를 찾는 이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그러한 양심의 폭풍이 잦아들면, 그들은 더 이상 그리스도를 말하지 않습니다. 그들이 원하는 것은 그리스도가 아니라 마음의 고요함이었던 것입니다. 평안과 그리스도를 혼동하는 실수를 범하지 않도록 주의하십시오.

그리고 ‘그리스도께서 나오는 우리의 손은 언제나 비어있어야 합니다’. “경건치 아니한 자를 의롭다하시는 이를 믿는 자에게는...”(롬 4:5). 스스로가 아무런 가치도 없다는 깊은 의식은 그리스도와 함께 하는 가장 훌륭한 마음의 상태입니다. 많은 사람들이 이 문제에 대하여 깨닫지 못하는지 모르겠습니다. 그들은 여전히 그리스도로부터 멀찌감치 떨어져 있습니다.

자신들이 너무나 부족하여 그리스도를 영접할 마땅한 준비를 하지 못한다는 이유로 말입니다. 그들은 빈손으로 나아가려 하지 않습니다. 그리스도를 나아갈 어떠한 자격을 갖춰야 한다는 생각을 하는 것입니다. 이는 어처구니없는 마음의 교만이요, 마귀의 올무입니다. 우리가 진정 갖춰야 할 자격은 우리 자신이 아무런 가치도, 어떠한 탁월함도 없다는 것을 깨닫는 겸비한 마음뿐입니다.

우리의 생명은 한치 앞도 내다볼 수 없을 정도로 불확실한 삶을 살고 있지 않습니까! 그러니 지체하지 말고 우리의 온 마음을 다해 그리스도께 전체를 영접하십시오. 그리스도 전체를 영접한다는 것은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의 모든 직무를 다 한꺼번에 받아들이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의 총명과 의지와 정서 전체를 모두 동원하여 온전히 그리스도를 영접하십시오(행 8:37).

주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는 일은 우리 자신의 능력으로 되어지는 일이 아닙니다. 그 일에 주의 팔이 필요합니다(사 53:1). 그러니 간구하십시오. 하나님의 발 앞에서 엎드려 마음을 쏟아 간구하십시오. 그리스도를 영접하도록 해 주시길 말입니다.

주 예수 그리스도를 인하여 하나님께 감사하리로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PBA
글쓴이 : 박성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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