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7 장 복음의 계속성
“이 복음은 하나님의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롬1:2)
에덴동산에서 인간이 타락한 때와 하나님의 아들이 오셔서 구속하고 구원한 때 사이의 간격이 그처럼 길고, 모든 구약의 역사가 필요했는가? 또 어째서 하나님을 아는 지식이 한 족속에게만 국한되고 다른 모든 세상 사람들은 어둠과 적대감 속에 머물러 있어야 하는가? 우리는 그 최종적인 완전한 답을 모른다. 그러나 성경의 가르침의 도움을 받아 갈 수 있는 데까지 가보는 것이 우리가 할 일이다.
첫째, 그것은 죄의 깊이를 드러내시는 하나님의 방식이요, 인간을 폭로시키시는 하나님의 방식이요, 죄의 실상이 어떠한 것이며 죄가 얼마나 무서운 것이며, 죄가 단순히 가벼운 불순종의 행동이나 실수가 아니라, 무섭고 끔찍한 결과를 가져오는 무서운 영혼의 질병임을 가르치시는 하나님의 방식이다. 죄에 대해 참으로 무서운 일은, 죄는 우리의 눈을 어둡게 하여 하나님의 진리를 보지 못하게 한다는 점이다. 요한복음 5장에서 우리 주님께서 말씀하신 논리는 이러하다. 이 사람들은 구약성경에 대해서 전문가들이라고 스스로 자랑한다. 그 모세의 책을 읽어보라. 왜냐하면 모세가 나에 대해서 썼기 때문이다. 그러나 비극은 그들이 그것을 보지 못했다는 점이다. 사도 바울도 고린도후서 3장에서 유대인들의 비극은 매 안식일마다 모세의 글을 읽으면서도 진리를 보지 못하며, 그들의 눈은 감겨있고 그들의 마음에 수건이 덮혀 있다고 말한다. 죄란 바로 그러한 것이다. 그러므로 죄의 본질을 드러내는 것이 하나님의 목적의 일부이다.
둘째, 하나님께서는 이러한 방식을 통해서 인간이 자신을 구원하기 위해서 아무리 애쓴다 할지라도 소용없음을 최종적으로 입증하고 계시는 것이다. 하나님께서는 인간이 할 수 있는 대로 자신을 구원하도록 모든 기회를 제공하셨다. 바벨론, 애굽, 로마 같은 위대한 문명국들이 결국 다 실패하고 말았다. 물론 인류는 그것을 인정하지 않고 받아들이지도 않는다. 바울은 “세상이 자기 지혜로 알지 못했다”(고전1:21)고 그 점을 지적하고 있다. 하나님께서는 구약의 역사를 통하여 율법을 주신 일마저 인류로 하여금 자신을 구원할 수 없었음을 입증하셨다.(롬8:3) 율법은 사람을 구원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그렇게 하신 것은 만물에 대한 자신의 주권을 보여주고, 자신의 절대적 통치권과 자신의 최종적 권위를 보여주기 위함이었다. 구약역사를 보면 하나님의 자의적인 행동들과 하나님의 허용을 볼 수 있다. 인간의 삶의 현장에 들어 오셔서 노아의 홍수, 소돔과 고모라의 멸망, 홍해를 건너게 함, 요단이 갈라진 일 등 하나님의 능한 행위가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또한 모든 일이 제멋대로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시는 것 같은 기간이 있기도 했다. 그것은 마귀의 입을 막으려는 궁극적인 목적이 있었다고 확신한다. 즉 인간이 스스로 자기를 구원해 볼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제공하신 것이다.
사도는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복음’을 말하고 싶어 한다.
“이 복음은 하나님의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 아들로 말미암아 성경에 미리 약속한 것이라”(1:2) “그러므로 율법의 행위로 그의 앞에 의롭다 하심을 얻을 육체가 없나니 율법으로는 죄를 깨달음이니라”(3:20), - “이제는 율법 외에 한 의가 나타났으니 율법과 선지자들에게 증거를 받은 것이라--”(3:21)
“나의 복음과 예수 그리스도를 전파함은 영세 전부터 감추었다가 이제는 나타내신 바 되었으며 영원하신 하나님의 명을 쫒아 선지자들의 글로 말미암아--이 복음으로 너희를 능히 견고케 하실 지혜로우신 하나님께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영광이 세세 무궁토록 있을지어다 아멘”(16:25-27) 그것부터 시작하여, 그것을 가리키며, 결국 그것으로 끝마친다.
첫 번째 문제는 사도는 어째서 계속 ‘성경대로’라는 말을 되뇌이고 있는가? -
첫째, 이 복음이 새롭고 이상한, 과거와는 무관한 것이 아님을 증거하고 싶었기 때문이다.
둘째, 유대인들은 메시야가 군사적이고 정치적인 큰 인물일 것이라는 민족적인 개념을 가지고 있었다. 십자가에 못 박혀 죽은 나사렛의 목수가 메시야라는 생각은 넌센스처럼 보였다. 그것은 거침돌이었다. 그러므로 사도가 첫 번째 요점은 그들이 가진 성경으로부터 메시야는 고난을 받고 배척받아 죽음을 당한 뒤에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나야 한다는 것을 입증해야 했다. 이 위대한 설교자가 설교할 때마다 강조하는 요점은 “뜻을 풀어 그리스도가 해를 받고 죽은 자 가운데서 다시 살아야 할 것을 증명하고”- “내가 너희에게 전하는 이 예수가 곧 그리스도라 하니”(행17:3) 그렇기 때문에 그는 그런 일을 할 때마다 성경을 사용했다. 모든 하나님의 약속은 그 안에서 예와 아멘이 된다.(고후1:20) 그리스도 안에서 그 모든 하나님의 약속이 영 단번에 성취되었다. 그는 구약 전체의 완성이시다.
두 번째 문제는 구약성경에 하나님께서 유대인들에게 주신 놀라운 약속들이 많은데, 그 증거가 별로 없는 것 같다. -
9, 10, 11장에서 구약성경의 교리가 궁극적으로 남은 자의 교리임을 보여준다. “이스라엘에게서 난 그들이 다 이스라엘이 아니요” 혈육에 따른 이스라엘이 있고, 영을 따른 이스라엘이 있다. 그러므로 이제 일어난 그 일은 성경을 부인하기는커녕 성경을 성취하고 있다고 말한다. 오늘날에도 성경을 강해하는 데 있어서 진수가 되는 부분이다.
세 번째 문제는 몇 가지 교훈들이 포착된다. - 우리가 놓치지 않아야 하는 것들이다.
첫째, 성경은 완전하다는 것이다. 우리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 위에 세움을 받았다. 터에다 더 이상 보탤 것이 없다. 새로운 계시는 전혀 없다. 그러므로 계시라고 주장하는 것은 무엇이든지 다 이 기준에서 시험해 보아야 한다.
둘째, 성경만이 권위가 있고, 우리의 오직 유일한 법칙이요 표준이다. 성경에서 분명히 진술되지 않았거나 성경으로부터 궁극적으로 유추해낼 수 없는 것이면 어느 것도 믿어서는 안 된다.
셋째, 구약성경은 그러므로 진수임에 틀림없다. 우리는 그리스도인들로서 언제나 오늘날도 구약을 필요로 한다. 왜냐하면 구약과 신약의 통일성 때문이다.
넷째, 신약을 해석한 것이 구약의 가르침과 마찰되어서는 안 된다. 속죄교리를 생각해 보면 구약성경의 모든 가르침은 속죄- 죄의 형벌이다. 구약성경은 피를 흘리고 희생제물을 드려야 한다고 가르친다. 신약 안에 있는 죽음을 그러한 희생제사와 속죄제의 차원과 상관없이 해석한다면 그 해석은 잘못된 것이다. 신약의 어느 지점이나 어느 국면에서도 신약이 구약의 완성임을 보여주지 못하는 식으로 해석하지 않도록 주의하라.
다섯째, 신약성경은 구약성경을 완성 짓고 있다. “그런즉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율법을 페하느뇨 그럴 수 없느니라 도리어 율법을 굳게 세우느니라”(3:31). 구원은 율법을 이루는 것이다. 오늘날 의롭다 하심을 받고도 성결하지 못할 수 있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리스도를 주로 받지 않았다면 그리스도를 받은 것이 아니다. 지금 그리스도를 구주로 받겠지만 나중에 가서 주로 받겠다는 식으로 말할 수 없다. 그는 언제나 주시요, 여러분은 그를 주로 받아야 한다.
여섯째, 구약성경을 보면 온 세상을 구원할 목적이 있음을 알 수 있다. 창세기 11장에서 하나님께서 이 한 민족을 택하기 전에 세상에 대한 그림을 전체로 그려줌으로써 그 점을 강조한다.(창11:1) 로마서 11장에 “이방인의 수가 차기까지”- “모든 이스라엘” 완벽한 계획이다.
일곱째, 복음전도와 부흥 사이의 문제를 생각할 때 구약성경을 주목하는 것이 중요하다. 복음전도의 임무는 사람들의 난제를 해결하는 것만이 아니다. 심리학, 이단도 그 일을 해낼 수 있다. 복음과 다른 교훈을 차이 나게 하는 것은 복음은 일차적으로 하나님과 우리의 관계에 대한 선포라는 것이다. 거룩하신 하나님과 거룩한 율법 앞에서 우리가 정죄 받고 있다는 문제를 다룬다. 바로 그것이 복음전도이다. 그러므로 복음전도는 가장 우선적으로 회개를 다룬다. 구약성경은 회개의 문제를 떼어 내버릴 수 없음을 부단히 상기시켜 준다.
구약성경은 하나님께서 부흥의 방식을 통해서 자기의 나라와 진리를 지키심을 명백히 보여준다. 모든 것이 끝이 왔다고 생각되고 생명 없는 시기들이 있었다. 이러한 죽은 시기가 갑자기 어떻게 달라지게 되었는가? 사람들이 합세하여 무엇인가를 조직한 것인가? 절대 그렇지 않다. 단 한 번의 경우도 그러한 예는 없었다. 그 즈음에, 하나님께서 갑자기 예기치 않게 아주 기이한 방식으로 어떠한 일을 행하셨다. 자기의 일을 부흥시키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 때에 하나님의 방식대로 하나님께서 선택하신 사람을 통해서 그리하신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인에게 있어서는 구약성경에 익숙해지는 것처럼 위안을 주고 용기를 주는 것은 없다. “무엇이든지 전에 기록된 바는 우리의 교훈을 위하여 기록된 것이니 우리로 하여금 인내로 또는 성경의 안위로 소망을 가지게 함이니라”(15:4)
여덟째, 하나님의 방식에 우리를 절대적으로 복종시키고 의문을 제기하지 않는 법을 배워야 한다. 자신과 관련된 모든 것을 하나님의 손에 전적으로 맡기라는 것이다. 이사야서를 통해서 말씀하셨다. “내 생각은 너희 생각과 다르며 내 길은 너희 길과 달라서 하늘이 땅보다 높음같이 내 길은 너희 길보다 높으며 내 생각은 너희 생각보다 높으니라”(사55:8-9). 여러분의 경우도 하나님의 손에 맡기라. 여러분의 삶에 있어서 바로 그것이 난제가 아닌가? 그 난제를 버리라. 구약으로 가서 하나님께서 에덴동산에서 여자의 후손에 관한 약속을 하신 이후 사천 년이란 긴 시간이 흐르고서야 여자의 후손이 베들레헴에서 아기로 태어나 오셨다. 포기하지 말라. 바로 그것이 하나님의 방식이다.
여러분은 교회 상태나, 회중의 감소나, 세상의 곤경이나, 세상의 힘이나 그러한 것들 때문에 고민하는가? 구약성경으로 가서 위로와 위안을 받으라. 시편 37편을 읽는 것만으로도 충분하지 않은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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