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존스

[스크랩] 로이드 존스, "복음"이란 말의 의미(로마서강해7권5장, 김영희강의안)

강대식 2015. 10. 16. 09:22

 

5 복음이란 말의 의미

 

하나님의 복음”(1:1)

 

복음이라는 말과 친숙한 나머지, 그 복음의 깊고 엄청난 의미를 인식하지 못한다는 생각이 든다. 복음이 좋은 소식을 의미한다고 말할 때, 진정으로 중요한 문제는 복음이 정말 우리에게 좋은 소식으로 왔느냐 하는 것이다, 그 복음의 내용 자체에 대한 참된 이해를 가지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바울은 이 점에 대해서 대단한 관심을 가지고 있다.

율법은 좋은 소식이 되기 위해 주어진 것이 아니다. 율법은 구원의 방도나 방식으로 주어진 적이 없다. 율법은 복음이 아니다. 그런데 이 점을 이해하지 못하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율법이 실패한 뒤에 복음이 사후 처리방식으로만 들어온 것으로 오해하는 사람들이 있다. 또한 복음을 단순히 우리의 죄 용서의 공표로만 생각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것은 복음이 아니며, 좋은 소식이 아니다. 또 이 복음은 사람들에게 선한 삶을 영위하며 도덕적이고 윤리적인 어떤 것을 행하라고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독교가 아니다. 사람들에게 호소하는 것과 사람들에게 좋은 소식을 전하는 것은 같지 않다. 그것은 오히려 그 정반대이다.

 

복음은 매우 특별한 것으로 하나님의 아들에 관한 것이다. 실로 그것은 하나님 자신과 하나님께서 행하신 일에 관한 무엇이다. 그것은 일차적으로 우리에게 어떤 것을 행하라고 호소하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선포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행하신 것을 우리에게 선언하는 것이다.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 하노니”. 어째서?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복음은 사람들더러 스스로 구원하라는 권면이 아니라 하나님의 구원의 방식이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그것은 구약에서 발견하지 못하는 하나님께로부터 온 의가 완전히 드러난 것은 새로운 것이다. 복음을 복음 되게 하는 것은 바로 그 특별하고 독특한 그것이다.


내가 부끄러워하지 않는다”. 바울은 내게는 다른 그 어느 것도 이보다 크지 못하다고 말하는 셈이다. 이것은 복음에 대해서 우리가 언제나 가장 먼저 인식해야 되는 요점이다. 이사야 55장에서 복음의 표현은 복음이 임하면 절뚝발이가 사슴같이 뛸 것이며 모든 사람이 노래하고 즐거워할 것이다”. 누가복음 21-20절을 보면 자기들에게 이르던 바와 같이 듣고 본 그 모든 것을 인하여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 찬송하며 돌아갔다 ---지극히 높은 곳에서는 하나님께 영광이요 땅에서는 기뻐하심을 입은 사람들 중의 평화로다”. 이것은 복음에 있어서 사활적이고 진수가 되는 부분임에 틀림이 없다.

 

복음이 우리에게 그처럼 임했는가? 복음이 우리가 들었던 것 중에서 가장 위대하고 가장 좋은 소식이라고 말할 수 있는가? 복음은 우리가 들었던 것 중 최대의 좋은 소식이든지 그렇지 않든지 둘 중에 하나이다.


복음이 가장 좋은 소식이라는 사실을 깨닫지 못함은, 첫째, 여러분이 죄의식을 갖지 못하고 있거나, 자신의 죄됨에 대한 바르지 못한 인식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그로 인해 언제나 주님을 즐거워 하지 못하고, 이 소식이 세상에 받았던 것 중에서 가장 좋은 소식임을 인식하지 못한다. 기쁨이 부족하다면 자신 속에서 어떤 기쁨을 일으키려고 애쓰지 말아야 한다. 성경 율법으로 나아가 자신의 죄됨을 알아야 한다. 기쁨에 이르는 적극적인 길은 죄의 깊이를 언제나 지니고 있어야 한다. 둘째, 죄의 결과들을 인식하지 못한 것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기에 모든 사람들이 다 구원받게 될 것이라고 믿는다. 죄의 형벌을 믿는 믿음을 그런 식으로 손상시키면 그에 따라서 복음의 좋은 소식도 손상시키고 있음을 알아야 한다. 셋째, 또 다른 경우는 구원 자체의 위대성을 인식하지 못하는 것이다. 많은 사람들은 죄의 용서로 만족해 한다. 그 복음의 높이와 깊이와 넓이와 길이를 채 알지 못하고 위대함을 이해하지 못한다. 우리가 복음이라는 말을 사용하면서 찬양과 감사를 하지 않는다는 것은 전혀 가당치 않는 일이다. 하나님께로부터 온 좋은 소식 그것이 바로 복음이다.

 

사도는 그 점에서만 머물지 않고 우리를 복되신 성삼위의 위대하고 중심적인 교리로 이끌어 간다. “이 복음은 하나님이 선지자들로 말미암아 그의 아들에 관하여 성경에 미리 약속하신 것이라 이 아들로 말하면 육신으로는 다윗의 혈통에서 나셨고 성결의 영으로는 죽은 가운데서 부활하여 능력으로 하나님의 아들로 인정되셨으니 곧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시니라”(2-4) 복음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이 관계된 복음이다. 삼위의 각 위가 참여하신 특별하고 영광스러운 삼위의 사역이다. 이 점을 강조해야 하는 것은 절대적으로 중차대한 것이다.


첫째, 복음을 단지 성부의 차원에서만 생각하고 있는 것 같은 사람들이 있다. 이 위험은 육신적인 신비에 빠진 사람들에게 특별한 위험이다. 그들은 하나님에 관하여 대단히 많은 것을 말하지만, 아들의 이름은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신비가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가 없이 하나님을 직접 체험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들은 사람이 자신을 돌이켜 자신의 속을 들여다 보면 하나님이 거기에 있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라고 말한다.


둘째, 성자만을 강조하는 사람들도 있다. 그들은 그들을 용서하도록 하나님을 설득하는 예수님으로 그리고 있고, 성부는 자기 아들의 탄원을 마지못해 들어주는 것 같은 모습을 띠고 있다.


셋째, 오직 성령만을 강조하는 위험이다. 그들은 체험이나 능력을 원한다. 이것은 아주 교활한 위험이다. 제 자신이 이러한 위험 속에서 상당한 기간을 보냈기 때문에 이 위험에 대해서 잘 알고 있다. 그들은 거듭남, 중생을 건전하고 바르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인데도 불구하고 속죄를 믿지 아니하는 자들이다. 그들은 새 생명과 새 능력의 필요성을 알고 그것이 주어진다는 것도 안다. 그런데도 불구하고 그들은 십자가를 지나쳐서 직접 그리로 나아가고 있다. 그 각각의 위험은 다 약간의 진리를 가지고 한 부분을 진리의 전체로 과장시키는 것으로 그처럼 위험스런 것이 없다.

 

구원은 첫째 일차적으로 성부의 계획이고 성부의 구원이며 성부가 시작한 일이다.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3:16).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친히 이 점을 강조하느라 애를 쓰셨다. “아버지여---아버지께서 내게 하라고 주신 일을 내가 이루어 아버지를 이 세상에서 영화롭게 하였사오니”(17:). 주님의 생애 중심은 바로 그것이었다. 예수님은 중심이 아니기 때문에 예수님을 중심에 놓으면 잘못된 것이다. 중심은 성부이시다. 성자가 하신 일의 전체 목적은 우리를 성부 하나님께 인도하는 것이다.(벧전3:18)


구원을 생각할 때 구원으로 말미암아 기쁠 수도 있고 죄를 짓지 않을 수도 있다. 만일 구원을 거기서만 머물러 생각하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않는다면, 그러한 구원 개념은 신약성경에서 발견하는 것과는 전혀 다르다. 그 뿐만 아니라 구원의 결과인 행실과 행동도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는 것이어야 한다. 우리는 죄를 우리가 하지 않아야 하는 이것저것을 행하는 것을 의미한다. 죄의 진수는 하나님께 영화롭게 하지 못하는 것이다. 사람은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기 위해 지은 바 되었다.(소요리 문답)

 

죄가 그러한 것이라면, 구원은 우리가 하나님을 영화롭게 상태와 조건으로 인도하는 것을 의미하는 것이어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의 삶의 중심이요, 우리 행실의 중심이다. 사도는 그로부터 출발한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이다. 복음은 성자로 말미암아 성자를 통해서 이루어진 것이다. 아버지께서 성자를 보내사 그 일을 하게 하셨다. 그래서 성자께서 두 번째 위치에 온다. 복음은 성령으로 말미암아 우리게 적용된 무엇이다. 성령께서 아들을 능하게 하셨다. 하나님께서는 그리스도를 성령으로 충만케 하셨고, 성자께서는 성령을 통해서 자기의 일을 행할 권능을 얻으셨다. 복음은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의 전능하신 행위이다. 우리는 그 복음을 통해서 구원함을 받는다. 복음은 절망적인 궁핍과 곤경에 빠진 우리를 위한 하나님의 조처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성경에서 직설적으로 진술된 적은 없다. 사도가 여기서 진술하는 방식이 성경이 삼위일체 교리를 진술하는 바로 그 방식이다. 삼위일체 교리는 기독교의 심장이다. 하나님을 믿는 종교는 기독교 외에도 여럿 있다. 그러나 복되신 삼위의 교리를 가르치고 전하는 것은 기독교 밖에 없다. 사도가 이 교리로부터 출발하는 것은 이상하지 않다. 우리는 삼위일체 주의자들이어야 하며, 이점에 대해서 우리의 생각을 흐트러뜨리도록 내버려두어서는 안 된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PBA
글쓴이 : 김영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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