9장 그리스도의 초청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이 말씀은 우리를 부르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목소리이다. 우리의 귀에 매일 이 기쁨의 목소리가 들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커다란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의 이 초청의 말씀은 앞 구절과의 즉각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이 말씀으로 주님은 당신 자신의 사명과 권위와 구원하시는 능력의 충만함을 말씀하고 계신다. 다른 어떠한 길로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선언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28절의 말씀을 주심으로 죄를 깨달아 겸비해진 영혼이 너무 낙담에 빠지지 않도록 위로하셨다.
먼저 두 강조적인 동사로 표현된 영혼의 신령한 곤고함을 보라. 본문은 ‘수고하다’ 그리고 ‘짐을 지다’로 영혼이 처한 부담을 표현하고 있다. ‘수고하다’라고 변역된 단어는 기진하여 완전히 쇠미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 ‘짐 진’이라는 단어로 더 이상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기경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은 이어서 ‘내게로 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 표현으로 주님께서는 ‘나를 믿으라, 무거운 짐을 지고 신음하는 영혼을 내게 맡기고 쉬라. 내가 너희 모든 짐을 가볍게 하겠다. 율법의 의식을 통한 노력이 주지 못한 의와 평안을 주겠다. 스스로를 개선하여 의로워지려는 헛된 노력에서 시달린 나희들을 쉬게 하겠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은 죄의 상태를 고집하거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사람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만이 그 은택을 입는 것이다. 자기 죄 때문에 마음 상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가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의 참회는 결코 그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슬픔이 결단코 참된 안식에 이르게 하지 못할 것이다.
Ⅰ 그리스도의 초청하시는 통로 : 양심
양심의 직무
하나님의 율법은 그 영적 성질과 능력으로 사람에게 임하여 그 양심이 죄를 깨닫게 함으로 죄에 대한 회개와 회오감을 가지게 한다.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내가 젊었을 때에 지은 죄를 내가 받게 하시오며”(욥 13:26). 주님께서 죄인들의 마음을 각성시키시어 죄를 깨닫게 하실 때에 바로 그 책을 펼쳐보이시는 것이다. 이것이 양심의 첫 번째 직무이다.
양심의 송사(訟事-고발)는 정말 무섭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 양심은 그렇게 진노의 하나님으로 영혼을 몰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양심의 2차적인 사역이다.
양심의 세 번째 직무는 ‘선고와 정죄’이다. 이는 정말 감내하기 힘든 짐이다. 양심의 정죄는 율법의 정죄와 맞먹는 것이다. 율법이 율법을 범한 모든 이를 저주하듯이(갈 3:10), 양심이 가책을 느끼는 영혼을 저주하는 것이다. 양심은 하나님의 이름과 권위로 선고를 내린다. 가인과 가롯 유다의 마음에 그 양심이 어떠한 효과를 발휘했는지 생각해 보라. 그들에게 그것은 지옥의 고통을 미리 맛보는 것이었다.
양심은 죄인을 그 비참 아래 가두어 놓은 채 끊임없이 그를 책망한다. 이것이 양심의 네 번째 직무이다. 양심의 이 효력으로 말미암아 매우 큰 공포심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양심이 주는 고통의 짐이다. 그 어떤 고통도 그와 같이 무겁지 않을 것이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여읜 슬픔도 영혼 깊숙이 이러한 고통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다른 고통들은 피조물의 즐거움으로 잠시 잊거나 경감시킬 수 있다. 그러나 양심의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는 그러한 것들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다. 그 상처는 너무나 깊어 예수 그리스도의 피 외에는 어느 것으로도 치료되지 않는다.
양심의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에게 몇 가지 위로
1 양심의 고통을 느끼는 영혼들은 아주 가라앉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언약을 파기하고도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약속을 최초로 받았던 아담에게처럼, 우리를 자애롭게 돌보시며 우리에 대한 관심을 끊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서는 고통 받고 있는 우리의 영혼 속에 하나의 소망을 남겨 두신다.
3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부요함에 대해 생각해 보라. “여호와께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시 130:7-8). 그 은혜는 가장 악한 죄인들에게도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은혜를 받은 영혼은 고통 가운데서도 긍휼을 발견한다.
Ⅱ ‘긍휼의 하나님이 왜 사람들의 영혼에 죄의 짐을 무겁게 얹어 놓으시는 것인가?’
1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죄의 쓴 맛을 체험함으로 우리 마음이 죄에서 멀리 떠나길 바라신다.
우리의 마음은 본성적으로 죄의 길로 가려는 성향이 있다. 죄의 조각들은 우리의 본성에 너무나 달콤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에서 떠나려는 마음을 가질 때는 죄의 쓴 맛을 느낄 때 뿐이다. 죄의 쓴 맛으로 그 위장이 경련을 일으키며 죄를 거부하게 만들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는 죄인의 영혼이 자기 정욕을 떠나게 하는데 매우 효과적이고 훌륭한 방식이다.
2 그것은 또한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달갑고 간절하게 영접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취하시는 방식이다. 죄가 우리에게 ‘쓴 것’이 아닌 상태에서는 그리스도를 결코 달게 여기지 않는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마 9:12).
죄의 찌르는 아픔으로 상처난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보배로운 분으로 여긴다. 그러한 영혼은 세상에서 빈곤하고 환난에 처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을 가장 갈망한다. 죄가 죄로 드러나기 전까지는 은혜가 은혜로 보이지 않는다. 죄에 대한 의식이 깊어질수록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지각이 깊어지는 것이다. 바울은 죄인 중의 괴수인 자신에게 은혜가 주어졌다고 말했다(딤전 1:15).
3 양심의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죄로 미끄러져 들어가지 않도록 하시려는 의도를 가지신다. “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백성들과 통혼하오리이까?”(스 9:14).
4 하나님께서는 한 영혼에게 이러한 과정을 겪게 하심으로써 같은 고통 중에 있는 또 다른 영혼을 위로할 수 있는 긍휼에 찬 사람으로 만드신다. 그러한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가장 효과적으로 위로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몸소 같은 일을 경험한 사람일 것이다.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란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 할 수” 있는 것이다(고후 1:4).
우리의 짐을 짊어지신 그리스도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사 53:6). 우리가 죄짐을 지고 있었을 때 우리는 많은 위로와 도움을 받는다. 우리의 친구들이 우리를 위로하기도 하고 불쌍히 여겨주기도 했다. 또 하늘로부터 오는 위로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는 그러한 것이 전혀 없었다. 고통의 날에 그리스도의 모든 친구들은 다 그를 버렸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부터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셔야 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양심의 찌름으로 이 땅에서 고통당하는 영혼에게는 소망이 있다. 복음은 소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바로 그들의 소망이다. 그러나 지옥에는 어떠한 소망도 존재하지 않는다. 저주받은 자들은 절망 속에서 영원토록 양심이 찢기는 고통을 당할 것이다.
Ⅲ 죄 짐으로 곤비해 있고 무거운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몇 가지의 권고
1 다른 사람들에게 불평을 늘어놓는 일로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지 마십시오. 그것은 분명 열매 없는 일이다. 어떤 이에게 우리의 고통을 쏟아내느라 그리스도를 망각하게 된다면 이것은 분명 우리들의 눈을 가리려는 마귀의 술책이다.
2 ‘거짓된 평안’을 경계하십시오. 이것은 죄의 고통보다 훨씬 더 위험천만한 것이다. 사람들을 가장 망하게 하는 평안이 있다. 그것은 ‘죄에도 불구하고 가지는 평안’ 또는 ‘죄로 인해 가지는 평안’이다. 자신도 평안을 누리지 못한 상태에서 우리의 상처를 치료하겠다고 덤비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맡기지 마십시오. 입으로 평안을 외치면서 다가오는 그들의 기만적인 제안을 거절하십시오. 그들이 주겠다고 하는 평안으로 우리는 더 큰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렘 6:14).
3 결코 현재 받고 있는 내면적 고통을 근거로 자신의 영혼에 대한 절망적인 결론을 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이르는 길로 계속 나아가고 있다면 우리가 겪고 있는 지루하고 곤고한 밤이 지나 빛을 보게 될 것이다. 죄에 대하여 애통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마땅한 의무이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자신에게 소망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포기하는 것은 죄이다.
4 죄에 대한 고통이 필요 이상으로 길게 지속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리스도께 믿음으로 나아가지 않는 한, 평안이나 안식은 없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 나아가자, 평안과 안식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그리스도께서는 죄 짐으로 괴로워하는 영혼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부르시는 이 음성은 죄인에게 있어서 영혼이 들었던 중 가장 기쁨에 찬 소리입니다. 그 소리는 그리심 산에서 들려오는 복락의 음성, 시온산에서 들려오는 황홀한 음성입니다 ‘너희는 중보자 예수님께 나아오라.’
Ⅳ ‘그리스도께 나아간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같은 의미
두 말 모두가 믿음의 본질과 필연성을 담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 나아간다’는 말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교대적으로 쓰이는 것이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오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다만 ‘믿음’이라는 단어 속에는 우리에게 많은 탁월하고 부요한 것들을 암시해 주는 개념들이 있다. 죄의 각성을 받고 죄짐으로 무거워하던 영혼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실체를 보기 시작한다.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에 자기들의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분간하는 것이다. 자기들의 생명과 행복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다는 것을 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그런 식으로 그리스도께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1 ‘그리스도께 나온다’는 것에는 구원을 위한 다른 방도가 없음을 그 영혼이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영혼은 모든 본성적인 방도가 무익함을 깨달을 때 믿음의 길을 시도한다. 자기들의 유일한 마지막 처방책이 그리스도라는 사실 아래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2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영혼은 자신의 본성적인 모든 능력들을 훨씬 뛰어넘는 행동이다. 곧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길은 초자연적이고 전능하신 능력에 의한 일임을 암시하고 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리니...”(요 6:44).
3 그리스도를 향하여 움직이는 사람의 영혼에는 기꺼운 마음이 존재한다. 아버지의 이끄심에는 인격을 억제하는 강제력이 없다. 그 영혼의 자발성을 파괴시킴으로 영혼을 이끄시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권능과 압도적인 달콤함을 통해 그 의지를 설득하여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하시는 것이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 110:3).
4 하지만 그리스도께 나아감에 있어서 어떠한 의무들이나 규례들을 목적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영혼이 취하는 방편이다. 그저 방편에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들이나 규례들은 그 자체만으로 정말 탁월한 것들이다. 그렇지만 그 방편 자체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영혼에 안식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다. 신자가 궁극적으로 도달하여야 할 목적지와 순례의 도착지는 그리스도이다.
5 ‘그리스도께 나온다’는 것은 또한 영혼이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만일 그러한 기대나 소망이 없다면 누가 그리스도를 향해 움직여 나가겠습니까? 소망은 활동의 샘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있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은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에 관해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결론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에는 그리스도 안에 모든 충분함이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충분함이야말로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할 정당한 근거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히 7:25). 그것은 상대적으로 자신의 영혼이 아무런 능력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교만한 본성을 가진 영혼은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않는다. 깊은 곤고함과 겸비함을 가진 영혼만이 그리스도께 나아갈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온전히 의존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의 길인 것이다.
Ⅴ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초청하는 방식
1 그 일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주장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영혼의 내면에서 그 일을 주장하시는 것이다(요 5:26). 사명받은 사신들이 복음을 설교하는 일은 외적인 방편이다. 그러나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이런 모든 외적 방편들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존한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으면 그 모든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2 성령은 죄인들의 의지에 ‘예증적 일’을 하십니다. 죄인들의 눈을 열어 자기들이 처한 위험과 장래의 비참을 바르게 볼 수 있게 역사하시는 것이다. 자기가 처한 위함과 비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현재의 자리를 떠나려 하지 않는다.
3 성령은 말씀 안에서 ‘권위 있는 부르심’을 발하십니다. 그 음성은 법적 위엄과 권세가 충만한 음성입니다. 그리스도께 나오라는 이 성령의 부르심은 사람들의 영혼이 가질 수 있는 커다란 장벽을 제거합니다. 자신의 무가치함과 죄책을 구실로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반역으로 단정지으시는 것이다. 성령은 그리스도께 나오는 영혼을 ‘약속들’로 격려한다. 이는 물론 조건적 약속이다.
4 성령께서는 또한 ‘감동적인 실례’를 통해 영혼을 움직이신다. 가장 깊은 죄책과 낙담 아래 있던 죄인들이 그리스도께 나아 긍휼을 얻었다는 사실에 대한 실례를 말씀으로 영혼에게 주시는 것이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5-16).
5 성령께서는 ‘효과적인 설득’을 통해 죄인들의 마음과 의지에 역사하십니다. 죄인들의 영혼을 설득함으로 그리스도께 나오지 않으면 안 될 마음을 가지도록 역사하시는 방식인 것이다.
‘성령께서는 왜 우리 죄인들을 그토록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 하시는가? 왜 그리스도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영혼들을 초청하시는가?’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께 친히 주신 사명입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사 61:1).
그러나 그리스도의 초청에 앞서 성령의 역사가 선행되어야 한다. 죄에 대한 각성을 먼저 받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의롭다 하심을 받을 만한 것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죄에 대한 각성으로 고통당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않는다(요 16:6-8). 이것이 복음의 질서이다. 안타깝도다. 죄의 악함을 알지도 느끼지도 못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안에 있는 안식과 평안과 용서를 누리라고 말하다니! 그런 사람들은 복음의 초청을 가치 없는 것으로 멸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초청에 대한 의문
‘그러나 나는 너무나 많은 가증한 일들을 저지르지 않았는가? 그 큰 죄들을 지은 내가 긍휼을 받을 자격이 있겠는가? 내가 감히 그리스도께 어떻게 나아갈 수 있겠는가!’
우리의 죄가 그토록 크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갈 더 많은 필요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할 ‘동기’를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로 삼지 마십시오. 자신의 큰 죄를 구실로 그리스도의 피와 하나님의 긍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와 하나님의 긍휼을 크게 모독하는 일이다.
‘오! 그러나 때가 너무 늦지 않았는가?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이 복음의 초청을 받았는지 모른다. 난 그때마다 그 부르심을 거부하였다. 나의 때는 이미 지난 것이 아닌가?’
모든 은혜의 때가 지나갔다면, 지금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죄에 대한 깨달음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우리가 느끼는 마음의 고통은 희망이 없는 사람이 가질 수 없는 마음가짐입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우리와 같은 표증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대체 언제까지 고통스러워하기만 할 것입니까? 그리스도께 나오는 것은 우리에게 분명히 제시된 의무입니다. 어째서 머뭇거리기만 하시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이런 반론을 제기하는 것 자체로 그리스도께 나아가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라하실 때 나아가는 것은 결코 주제넘거나 뻔뻔한 일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입니다.
주께서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다 내게로 오라’.
주님께서는 우리의 무거운 짐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죄가 어떠하였는지, 지금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가리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그 분만이 우리를 쉬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히 7:25).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충만한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분은 당신께 나오는 가련한 영혼을 거절하지 아니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 중 누구라도 주님으로부터 거절을 받는 유일한 사례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나아가 누릴 행복한 필연 위에 서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두가 다 그것을 추구하지만 그것은 그들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히 4:3).
결 론
믿는 자들의 영적인 안식은 양심의 평온으로 말미암아 이미 지상에서 시작됩니다. 그렇게 시작된 안식은 하늘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영혼은 그제서야 무거운 짐이 벗겨지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영혼이 그리스도께 자신을 온전히 맡김으로 회복되고 새로워져 재창조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 세상에 알려진 것들 중 가장 높은 재창조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지만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자마자 모든 영혼의 두려움과 고통, 슬픔 모두가 단번에 종식된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후에라도 얼마든지 세상의 많은 고통거리가 찾아 올 수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큰 고통이 찾아 올지도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고후 7:5)라고 말하였습니다. 사탄은 더 맹렬한 공격을 퍼부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우리는 죄와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되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안식과 위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우리가 즉시로 온전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하나님과의 화평의 상태에 즉시 들어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화평의 열매가 아닌 씨앗으로 받습니다.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장차 하늘에서 성취될 약속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안식은 그 약속을 바라보는 데서 오는 안식입니다. 신자는 그처럼 하나님의 손에서 보증 받은 안식과 평안의 약속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온전한 실제적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안식을 향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의 일은 어떠합니까? 우리 중 아직 만족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아직 충분한 안식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도 확실하게 보이지 않고 마음도 충분히 깨끗하지 못한 것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은혜보다 죄가 여전히 강하게 득세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지고 많은 것들이 어긋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깨닫지도 못하고 죄가운데서 허우적거리며 살았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께 나아감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만족하지 않지만 죄를 깨닫고 고통스러워하며 몸부림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적어도 어디로 가야할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결심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께 가리라. 그리스도의 명령과 부르심에 모든 것을 걸리라!’. 아직 그 약속의 증거를 조금 밖에 가지고 있지 못한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맡기기로 결심했다는 것 자체가 정말 복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떠한 조건 속에서도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가 곧 평강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수고하고 무거운 짐진자들아 다 내게로 오라 내가 너희를 쉬게 하리라” (마 11:28)
이 말씀은 우리를 부르시는 주 예수 그리스도의 목소리이다. 우리의 귀에 매일 이 기쁨의 목소리가 들린다면 그것이야말로 커다란 은혜가 아닐 수 없다. 그리스도의 이 초청의 말씀은 앞 구절과의 즉각적인 연관성을 가지고 있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은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 11:27).
이 말씀으로 주님은 당신 자신의 사명과 권위와 구원하시는 능력의 충만함을 말씀하고 계신다. 다른 어떠한 길로도 하나님께 나아갈 수 없음을 선언하고 계시는 것이다. 그러나 주님은 바로 28절의 말씀을 주심으로 죄를 깨달아 겸비해진 영혼이 너무 낙담에 빠지지 않도록 위로하셨다.
먼저 두 강조적인 동사로 표현된 영혼의 신령한 곤고함을 보라. 본문은 ‘수고하다’ 그리고 ‘짐을 지다’로 영혼이 처한 부담을 표현하고 있다. ‘수고하다’라고 변역된 단어는 기진하여 완전히 쇠미한 상태에 이르렀다는 것을 말해준다. 또 ‘짐 진’이라는 단어로 더 이상 그 무게를 감당할 수 없는 기경의 상태를 말하고 있는 것이다.
본문은 이어서 ‘내게로 오라’고 표현하고 있다. 그 표현으로 주님께서는 ‘나를 믿으라, 무거운 짐을 지고 신음하는 영혼을 내게 맡기고 쉬라. 내가 너희 모든 짐을 가볍게 하겠다. 율법의 의식을 통한 노력이 주지 못한 의와 평안을 주겠다. 스스로를 개선하여 의로워지려는 헛된 노력에서 시달린 나희들을 쉬게 하겠다’. ‘내게로 오라’고 말씀하고 계시는 것이다.
물론 그리스도께서 주시겠다고 하신 약속은 죄의 상태를 고집하거나, 수고하고 무거운 짐을 내려놓지 않으려는 사람들에게는 전혀 해당되지 않는다. 오직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사람들, 그리스도를 믿는 사람들만이 그 은택을 입는 것이다. 자기 죄 때문에 마음 상하여 눈물을 흘리는 사람이 있다 할지라도, 그가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않는다면 아무런 소용이 없다. 그의 참회는 결코 그를 구원하지 못할 것이다. 그의 슬픔이 결단코 참된 안식에 이르게 하지 못할 것이다.
Ⅰ 그리스도의 초청하시는 통로 : 양심
양심의 직무
하나님의 율법은 그 영적 성질과 능력으로 사람에게 임하여 그 양심이 죄를 깨닫게 함으로 죄에 대한 회개와 회오감을 가지게 한다. “주께서 나를 대적하사 괴로운 일들을 기록하시며 내가 젊었을 때에 지은 죄를 내가 받게 하시오며”(욥 13:26). 주님께서 죄인들의 마음을 각성시키시어 죄를 깨닫게 하실 때에 바로 그 책을 펼쳐보이시는 것이다. 이것이 양심의 첫 번째 직무이다.
양심의 송사(訟事-고발)는 정말 무섭다.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명백한 증거들을 가지고 있다. 양심은 그렇게 진노의 하나님으로 영혼을 몰아가는 것이다. 이것이 양심의 2차적인 사역이다.
양심의 세 번째 직무는 ‘선고와 정죄’이다. 이는 정말 감내하기 힘든 짐이다. 양심의 정죄는 율법의 정죄와 맞먹는 것이다. 율법이 율법을 범한 모든 이를 저주하듯이(갈 3:10), 양심이 가책을 느끼는 영혼을 저주하는 것이다. 양심은 하나님의 이름과 권위로 선고를 내린다. 가인과 가롯 유다의 마음에 그 양심이 어떠한 효과를 발휘했는지 생각해 보라. 그들에게 그것은 지옥의 고통을 미리 맛보는 것이었다.
양심은 죄인을 그 비참 아래 가두어 놓은 채 끊임없이 그를 책망한다. 이것이 양심의 네 번째 직무이다. 양심의 이 효력으로 말미암아 매우 큰 공포심을 가지게 된다.
이것이 양심이 주는 고통의 짐이다. 그 어떤 고통도 그와 같이 무겁지 않을 것이다. 가장 사랑하는 사람을 여읜 슬픔도 영혼 깊숙이 이러한 고통을 주지는 못할 것이다. 다른 고통들은 피조물의 즐거움으로 잠시 잊거나 경감시킬 수 있다. 그러나 양심의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는 그러한 것들이 아무짝에도 소용이 없다. 그 상처는 너무나 깊어 예수 그리스도의 피 외에는 어느 것으로도 치료되지 않는다.
양심의 고통을 받고 있는 이들에게 몇 가지 위로
1 양심의 고통을 느끼는 영혼들은 아주 가라앉지 않는다. 하나님께서 우리를 버리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첫 번째 언약을 파기하고도 하나님으로부터 그리스도의 약속을 최초로 받았던 아담에게처럼, 우리를 자애롭게 돌보시며 우리에 대한 관심을 끊지 않으실 것이기 때문이다.
2 하나님께서는 고통 받고 있는 우리의 영혼 속에 하나의 소망을 남겨 두신다.
3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값없이 베풀어주시는 하나님의 부요함에 대해 생각해 보라. “여호와께는 인자하심과 풍성한 속량이 있음이라 그가 이스라엘을 그 모든 죄악에서 속량하시리로다”(시 130:7-8). 그 은혜는 가장 악한 죄인들에게도 값없이 주어지는 것이다. 은혜를 받은 영혼은 고통 가운데서도 긍휼을 발견한다.
Ⅱ ‘긍휼의 하나님이 왜 사람들의 영혼에 죄의 짐을 무겁게 얹어 놓으시는 것인가?’
1 하나님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죄의 쓴 맛을 체험함으로 우리 마음이 죄에서 멀리 떠나길 바라신다.
우리의 마음은 본성적으로 죄의 길로 가려는 성향이 있다. 죄의 조각들은 우리의 본성에 너무나 달콤한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죄에서 떠나려는 마음을 가질 때는 죄의 쓴 맛을 느낄 때 뿐이다. 죄의 쓴 맛으로 그 위장이 경련을 일으키며 죄를 거부하게 만들 필요가 있는 것이다. 이는 죄인의 영혼이 자기 정욕을 떠나게 하는데 매우 효과적이고 훌륭한 방식이다.
2 그것은 또한 영혼이 예수 그리스도를 아주 달갑고 간절하게 영접하도록 하기 위해 하나님께서 취하시는 방식이다. 죄가 우리에게 ‘쓴 것’이 아닌 상태에서는 그리스도를 결코 달게 여기지 않는다. “예수께서 들으시고 이르시되 건강한 자에게는 의원이 쓸데없고 병든 자에게라야 쓸데 있느니라”(마 9:12).
죄의 찌르는 아픔으로 상처난 영혼은 예수 그리스도를 가장 보배로운 분으로 여긴다. 그러한 영혼은 세상에서 빈곤하고 환난에 처할지라도 그리스도를 모시는 것을 가장 갈망한다. 죄가 죄로 드러나기 전까지는 은혜가 은혜로 보이지 않는다. 죄에 대한 의식이 깊어질수록 그리스도 안에서 베푸시는 하나님의 은혜에 대한 지각이 깊어지는 것이다. 바울은 죄인 중의 괴수인 자신에게 은혜가 주어졌다고 말했다(딤전 1:15).
3 양심의 고통을 주시는 하나님은 우리로 하여금 다시 죄로 미끄러져 들어가지 않도록 하시려는 의도를 가지신다. “우리가 어찌 다시 주의 계명을 거역하고 이 가증한 백성들과 통혼하오리이까?”(스 9:14).
4 하나님께서는 한 영혼에게 이러한 과정을 겪게 하심으로써 같은 고통 중에 있는 또 다른 영혼을 위로할 수 있는 긍휼에 찬 사람으로 만드신다. 그러한 고통 중에 있는 사람을 가장 효과적으로 위로하고 이해할 수 있는 사람은 몸소 같은 일을 경험한 사람일 것이다. “하나님께 받은 위로로써 모든 환란 중에 있는 자들을 능히 위로 할 수” 있는 것이다(고후 1:4).
우리의 짐을 짊어지신 그리스도
“우리는 다 양같아서 그릇 행하여 각기 제 길로 갔거늘 여호와께서는 우리 무리의 죄악을 그에게 담당 시키셨도다”(사 53:6). 우리가 죄짐을 지고 있었을 때 우리는 많은 위로와 도움을 받는다. 우리의 친구들이 우리를 위로하기도 하고 불쌍히 여겨주기도 했다. 또 하늘로부터 오는 위로를 받기도 했다. 그러나 그리스도께는 그러한 것이 전혀 없었다. 고통의 날에 그리스도의 모든 친구들은 다 그를 버렸다. 그리스도께서는 하늘로부터 진노하시는 하나님의 얼굴을 보셔야 했다. “나의 하나님 나의 하나님 어찌 나를 버리셨나이까?”
양심의 찌름으로 이 땅에서 고통당하는 영혼에게는 소망이 있다. 복음은 소망으로 가득 차 있기 때문이다. 그리스도가 바로 그들의 소망이다. 그러나 지옥에는 어떠한 소망도 존재하지 않는다. 저주받은 자들은 절망 속에서 영원토록 양심이 찢기는 고통을 당할 것이다.
Ⅲ 죄 짐으로 곤비해 있고 무거운 고통 가운데 있는 자들에게 몇 가지의 권고
1 다른 사람들에게 불평을 늘어놓는 일로 자기 자신을 만족시키지 마십시오. 그것은 분명 열매 없는 일이다. 어떤 이에게 우리의 고통을 쏟아내느라 그리스도를 망각하게 된다면 이것은 분명 우리들의 눈을 가리려는 마귀의 술책이다.
2 ‘거짓된 평안’을 경계하십시오. 이것은 죄의 고통보다 훨씬 더 위험천만한 것이다. 사람들을 가장 망하게 하는 평안이 있다. 그것은 ‘죄에도 불구하고 가지는 평안’ 또는 ‘죄로 인해 가지는 평안’이다. 자신도 평안을 누리지 못한 상태에서 우리의 상처를 치료하겠다고 덤비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맡기지 마십시오. 입으로 평안을 외치면서 다가오는 그들의 기만적인 제안을 거절하십시오. 그들이 주겠다고 하는 평안으로 우리는 더 큰 상처를 입게 될 것이다(렘 6:14).
3 결코 현재 받고 있는 내면적 고통을 근거로 자신의 영혼에 대한 절망적인 결론을 내리지 말아야 합니다. 우리가 그리스도께 이르는 길로 계속 나아가고 있다면 우리가 겪고 있는 지루하고 곤고한 밤이 지나 빛을 보게 될 것이다. 죄에 대하여 애통한 마음을 가지는 것은 마땅한 의무이다. 그러나 그런 마음을 가지고 자신에게 소망이 없다고 결론을 내리고 포기하는 것은 죄이다.
4 죄에 대한 고통이 필요 이상으로 길게 지속되지 않도록 조심하십시오.
그리스도께 믿음으로 나아가지 않는 한, 평안이나 안식은 없다.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리스도께 나아가자, 평안과 안식으로 들어갈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믿음으로 말미암아 의롭다함을 받았으니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과 더불어 화평을 누리자”(롬 5:1).
그리스도께서는 죄 짐으로 괴로워하는 영혼들을 부르고 계십니다. 그리스도의 부르시는 이 음성은 죄인에게 있어서 영혼이 들었던 중 가장 기쁨에 찬 소리입니다. 그 소리는 그리심 산에서 들려오는 복락의 음성, 시온산에서 들려오는 황홀한 음성입니다 ‘너희는 중보자 예수님께 나아오라.’
Ⅳ ‘그리스도께 나아간다’는 것은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같은 의미
두 말 모두가 믿음의 본질과 필연성을 담고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께 나아간다’는 말이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교대적으로 쓰이는 것이다. “내게 오는 자는 결코 주리지 아니할 터이오 나를 믿는 자는 영원히 목마르지 아니하리라”(요 6:35).
다만 ‘믿음’이라는 단어 속에는 우리에게 많은 탁월하고 부요한 것들을 암시해 주는 개념들이 있다. 죄의 각성을 받고 죄짐으로 무거워하던 영혼들이 믿음으로 그리스도의 실체를 보기 시작한다. 그들은 이제 그리스도의 필요성을 인식하는 자들이다. 그리스도와 연합하는 것에 자기들의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분간하는 것이다. 자기들의 생명과 행복이 그리스도와의 연합에 있다는 것을 안다. 만약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그런 식으로 그리스도께 나오는 일은 없을 것이다.
1 ‘그리스도께 나온다’는 것에는 구원을 위한 다른 방도가 없음을 그 영혼이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영혼은 모든 본성적인 방도가 무익함을 깨달을 때 믿음의 길을 시도한다. 자기들의 유일한 마지막 처방책이 그리스도라는 사실 아래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되는 것이다.
2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영혼은 자신의 본성적인 모든 능력들을 훨씬 뛰어넘는 행동이다. 곧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길은 초자연적이고 전능하신 능력에 의한 일임을 암시하고 있다. “나를 보내신 아버지께서 이끌지 아니하시면 아무도 내게 올 수 없으리니...”(요 6:44).
3 그리스도를 향하여 움직이는 사람의 영혼에는 기꺼운 마음이 존재한다. 아버지의 이끄심에는 인격을 억제하는 강제력이 없다. 그 영혼의 자발성을 파괴시킴으로 영혼을 이끄시지는 않는다는 말이다. 권능과 압도적인 달콤함을 통해 그 의지를 설득하여 그리스도께 나아가게 하시는 것이다. “주의 권능의 날에 주의 백성이 거룩한 옷을 입고 즐거이 헌신하니 새벽 이슬 같은 주의 청년들이 주께 나오는도다”(시 110:3).
4 하지만 그리스도께 나아감에 있어서 어떠한 의무들이나 규례들을 목적으로 삼지 말아야 한다. 그것은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영혼이 취하는 방편이다. 그저 방편에 머물러 있지 말아야 하는 것이다. 물론 하나님 앞에서 마땅히 행해야 할 의무들이나 규례들은 그 자체만으로 정말 탁월한 것들이다. 그렇지만 그 방편 자체가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영혼에 안식을 가져다 주는 것이 아니다. 신자가 궁극적으로 도달하여야 할 목적지와 순례의 도착지는 그리스도이다.
5 ‘그리스도께 나온다’는 것은 또한 영혼이 그리스도에 대한 기대와 소망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함축한다. 만일 그러한 기대나 소망이 없다면 누가 그리스도를 향해 움직여 나가겠습니까? 소망은 활동의 샘이다.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구원에 대한 소망을 가지고있지 않은 사람은 결코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말씀은 그리스도에 대한 소망에 관해 분명하게 말하고 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결론적으로 우리가 그리스도께 나아가는 것에는 그리스도 안에 모든 충분함이 있다는 것을 함축하고 있다. 그리스도의 충분함이야말로 사람들이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할 정당한 근거이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히 7:25). 그것은 상대적으로 자신의 영혼이 아무런 능력도 가지고 있지 못하다는 것을 인식하고 있다는 것을 말해준다. 그러나 사실을 인지하지 못하는 교만한 본성을 가진 영혼은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않는다. 깊은 곤고함과 겸비함을 가진 영혼만이 그리스도께 나아갈 확신을 가질 수 있는 것이다. 그래야만 그리스도의 충만함을 온전히 의존할 수 있는 것이다. 그것이 믿음의 길인 것이다.
Ⅴ 그리스도께서 사람들을 초청하는 방식
1 그 일은 하나님의 성령께서 주장하시는 일이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우리영혼의 내면에서 그 일을 주장하시는 것이다(요 5:26). 사명받은 사신들이 복음을 설교하는 일은 외적인 방편이다. 그러나 사람들을 그리스도께 인도하는 이런 모든 외적 방편들은 전적으로 성령의 역사하심에 의존한다. 하나님의 성령께서 역사하시지 않으면 그 모든 것들은 아무런 의미가 없다.
2 성령은 죄인들의 의지에 ‘예증적 일’을 하십니다. 죄인들의 눈을 열어 자기들이 처한 위험과 장래의 비참을 바르게 볼 수 있게 역사하시는 것이다. 자기가 처한 위함과 비참을 알지 못하는 사람은 결코 현재의 자리를 떠나려 하지 않는다.
3 성령은 말씀 안에서 ‘권위 있는 부르심’을 발하십니다. 그 음성은 법적 위엄과 권세가 충만한 음성입니다. 그리스도께 나오라는 이 성령의 부르심은 사람들의 영혼이 가질 수 있는 커다란 장벽을 제거합니다. 자신의 무가치함과 죄책을 구실로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않는 사람들의 마음을 반역으로 단정지으시는 것이다. 성령은 그리스도께 나오는 영혼을 ‘약속들’로 격려한다. 이는 물론 조건적 약속이다.
4 성령께서는 또한 ‘감동적인 실례’를 통해 영혼을 움직이신다. 가장 깊은 죄책과 낙담 아래 있던 죄인들이 그리스도께 나아 긍휼을 얻었다는 사실에 대한 실례를 말씀으로 영혼에게 주시는 것이다. “15 미쁘다 모든 사람이 받을 만한 이 말이여 그리스도 예수께서 죄인을 구원하시려고 세상에 임하셨다 하였도다 죄인 중에 내가 괴수니라 16 그러나 내가 긍휼을 입은 까닭은 예수 그리스도께서 내게 먼저 일체 오래 참으심을 보이사 후에 주를 믿어 영생 얻는 자들에게 본이 되게 하려 하심이라”(딤전 1:15-16).
5 성령께서는 ‘효과적인 설득’을 통해 죄인들의 마음과 의지에 역사하십니다. 죄인들의 영혼을 설득함으로 그리스도께 나오지 않으면 안 될 마음을 가지도록 역사하시는 방식인 것이다.
‘성령께서는 왜 우리 죄인들을 그토록 그리스도께로 인도하려 하시는가? 왜 그리스도께서는 수고하고 무거운 짐 진 영혼들을 초청하시는가?’
그것은 하나님 아버지께서 그리스도께 친히 주신 사명입니다. “주 여호와의 영이 내게 내리셨으니 이는 여호와께서 내게 기름을 부으사 가난한 자에게 아름다운 소식을 전하게 하려 하심이라 나를 보내사 마음이 상한 자를 고치며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갇힌 자에게 놓임을 선포하며”(사 61:1).
그러나 그리스도의 초청에 앞서 성령의 역사가 선행되어야 한다. 죄에 대한 각성을 먼저 받지 않고는 어느 누구도 의롭다 하심을 받을 만한 것이 오직 그리스도 안에만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지 않을 것이다. 죄에 대한 각성으로 고통당하지 않는 사람은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않는다(요 16:6-8). 이것이 복음의 질서이다. 안타깝도다. 죄의 악함을 알지도 느끼지도 못한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안에 있는 안식과 평안과 용서를 누리라고 말하다니! 그런 사람들은 복음의 초청을 가치 없는 것으로 멸시하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초청에 대한 의문
‘그러나 나는 너무나 많은 가증한 일들을 저지르지 않았는가? 그 큰 죄들을 지은 내가 긍휼을 받을 자격이 있겠는가? 내가 감히 그리스도께 어떻게 나아갈 수 있겠는가!’
우리의 죄가 그토록 크다면, 우리는 예수 그리스도께 나아갈 더 많은 필요성을 가지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께 나아가야 할 ‘동기’를 그리스도께 나아가지 못하게 하는 ‘방해물’로 삼지 마십시오. 자신의 큰 죄를 구실로 그리스도의 피와 하나님의 긍휼로 나아가지 않는다면 그것은 그리스도의 피와 하나님의 긍휼을 크게 모독하는 일이다.
‘오! 그러나 때가 너무 늦지 않았는가? 나는 그동안 얼마나 많이 복음의 초청을 받았는지 모른다. 난 그때마다 그 부르심을 거부하였다. 나의 때는 이미 지난 것이 아닌가?’
모든 은혜의 때가 지나갔다면, 지금 우리 마음속에서 일어나는 죄에 대한 깨달음은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우리가 느끼는 마음의 고통은 희망이 없는 사람이 가질 수 없는 마음가짐입니다. 소망이 없는 사람들에게는 우리와 같은 표증이 나타나지 않습니다.
대체 언제까지 고통스러워하기만 할 것입니까? 그리스도께 나오는 것은 우리에게 분명히 제시된 의무입니다. 어째서 머뭇거리기만 하시는 것입니까? 여러분이 이런 반론을 제기하는 것 자체로 그리스도께 나아가고 싶어하는 마음을 가지고 있다는 것을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오라하실 때 나아가는 것은 결코 주제넘거나 뻔뻔한 일이 결코 아닙니다. 그것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부르심에 대한 순종입니다.
주께서 지금 우리에게 말씀하십니다. ‘다 내게로 오라’.
주님께서는 우리의 무거운 짐이 무엇인지 알고 계십니다. 우리의 죄가 어떠하였는지, 지금 어떤 고통을 당하고 있는지 알고 계십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님께서 우리를 부르고 계시지 않습니까? 우리의 죄가 그리스도의 부르심을 가리지 못하였습니다. 우리를 부르신 그 분만이 우리를 쉬게 하실 수 있습니다.
“그러므로 자기를 힘입어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들을 온전히 구원하실 수 있으니...”(히 7:25).
그리스도께서는 우리를 구원하실 충만한 능력을 가지고 계십니다. 그 분은 당신께 나오는 가련한 영혼을 거절하지 아니하십니다. “아버지께서 내게 주시는 자는 다 내게로 올 것이요, 내게 오는 자는 내가 결코 내어쫓지 아니하리라”(요 6“37).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우리 중 누구라도 주님으로부터 거절을 받는 유일한 사례가 되지 않을 것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께 나아가 누릴 행복한 필연 위에 서 있습니다. 세상에 있는 모두가 다 그것을 추구하지만 그것은 그들 모두에게 주어지는 것이 아닙니다. “이미 믿는 우리들은 저 안식에 들어가는도다”(히 4:3).
결 론
믿는 자들의 영적인 안식은 양심의 평온으로 말미암아 이미 지상에서 시작됩니다. 그렇게 시작된 안식은 하늘에서 완성될 것입니다. 영혼은 그제서야 무거운 짐이 벗겨지는 것을 발견하게 될 것입니다. 영혼이 그리스도께 자신을 온전히 맡김으로 회복되고 새로워져 재창조 되는 것입니다. 믿음은 이 세상에 알려진 것들 중 가장 높은 재창조를 불러일으킨다는 사실을 잊지 마십시오.
하지만 그리스도와 연합하게 되자마자 모든 영혼의 두려움과 고통, 슬픔 모두가 단번에 종식된다고 생각하지는 말아야 합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한 후에라도 얼마든지 세상의 많은 고통거리가 찾아 올 수 있습니다. 아니 오히려 더 큰 고통이 찾아 올지도 모릅니다. 사도 바울은 “우리 육체가 편치 못하고”(고후 7:5)라고 말하였습니다. 사탄은 더 맹렬한 공격을 퍼부을지 모릅니다. 우리가 이 세상에 살고 있는 한, 우리는 죄와 고통에서 완전히 해방되기를 기대하지 말아야 합니다.
안식과 위한 또한 마찬가지입니다.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 우리가 즉시로 온전한 안식을 누릴 수 있는 것이 아닙니다. 물론 우리는 그리스도와 연합함으로써 하나님과의 화평의 상태에 즉시 들어갑니다. 하지만 우리는 화평의 열매가 아닌 씨앗으로 받습니다. 곧 믿음으로 말미암아 장차 하늘에서 성취될 약속을 받는 것입니다.
우리가 지상에서 누릴 수 있는 안식은 그 약속을 바라보는 데서 오는 안식입니다. 신자는 그처럼 하나님의 손에서 보증 받은 안식과 평안의 약속을 가진 사람들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온전한 실제적 안식에 들어가지 못했음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약속을 바라보며 믿음으로 안식을 향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현재의 일은 어떠합니까? 우리 중 아직 만족하지 못하는 분들이 있을 것입니다. 아직 충분한 안식으로 들어가지 못한 것처럼 보일 수도 있습니다 그리스도도 확실하게 보이지 않고 마음도 충분히 깨끗하지 못한 것이 느껴질 수도 있습니다. 은혜보다 죄가 여전히 강하게 득세하고 있는 것처럼 보입니다. 아지고 많은 것들이 어긋나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입니다. 그러나, 우리가 죄를 깨닫지도 못하고 죄가운데서 허우적거리며 살았던 때를 생각해 보십시오.
우리는 그리스도께 나아감으로 하나님의 약속을 받았습니다. 만족하지 않지만 죄를 깨닫고 고통스러워하며 몸부림치고 있지 않습니까! 지금은 적어도 어디로 가야할지 알고 있지 않습니까! 그리고 우리는 결심했습니다. ‘나는 그리스도께 가리라. 그리스도의 명령과 부르심에 모든 것을 걸리라!’. 아직 그 약속의 증거를 조금 밖에 가지고 있지 못한다 할지라도 말입니다. 그리스도께 모든 것을 맡기기로 결심했다는 것 자체가 정말 복된 일이 아니고 무엇이겠습니까!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어떠한 조건 속에서도 안식을 얻을 수 있는 사람들입니다. 그리스도가 곧 평강이시기 때문입니다. “이것을 너희에게 이르는 것은 너희로 내 안에서 평안을 누리게 하려 함이라 세상에서는 너희가 환난을 당하나 담대하라 내가 세상을 이기었노라”(요 16:33).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PBA
글쓴이 : 박성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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