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이 복음은 모든 믿는 자에게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첫째는 유대인에게요 또한 헬라인에게로다 복음에는 하나님의 의가 나타나서 믿음으로 믿음에 이르게 하나니 기록된 바 오직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함과 같으니라”(롬1:16-17)
15절의 끝으로 사도 바울은 자신의 소명에 대한 개인적인 언급을 마치고, 로마서의 대주제를 공표하게 되었다. 16절에서는 그 주제를 진술하고 17절에서는 그 주제를 일반적인 방식으로 설명한다. 그런 다음에 18절에서는 그것을 상세하게 다루어 나간다. 바울이 얼마나 논리적이며 한 걸음 한 걸음 얼마나 논리적인 방식을 취하는지 주목하게 된다. 그는 새로 다루는 문제는 이제까지 말해 왔던 것의 연속임을 매우 분명히 알게 한다. 그러면서도 전혀 새로운 것을 말해 나아간다. 우리는 이 로마서 연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하고 획기적인 지점에 와 있다. 이 두 구절이 프로테스탄트 종교개혁을 주도한 동인이 되었다. 그러므로 이 두 구절은 복음전도의 문제에 있어서 사활적인 중요성을 가진다.
“내가 부끄러워하지 아니하노니” - 곡언법(적극적인 역설을 부정형식으로 표현)으로 자기가 진실로 복음을 자랑하고 영광스럽게 생각한다고 말하는 것을 다른 방식으로 표현한 것이다. 그는 그 복음을 자랑했고, 십자가의 도를 자랑했다. 왜 바울은 반부정적인 방식으로 그 점을 표현하였을까? 그는 의도적으로 자신에 관한 진술도 하였지만 로마에 잇는 지체들을 돕기 위해서도 그렇게 하였다. 그리스도인이기는 하지만 무언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였던 사람들이 있었다. 디모데와 같은 사람도 그러한 잘못을 한 것으로 보인다. 바울은 그에게 편지를 쓰면서 “그러므로 네가 우리 주의 증거와 또는 주를 위하여 갇힌 자된 나를 부끄러워 말고”라고 말했다(딤후1:8). 그가 후에 오네시보로에 대해서는 자신이 로마에 있었을 때 “저가 나를 자주 유쾌케 하고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한 것”이라고 말을 한다(고후1:16). 많은 사람들은 바울이 옥에 갇혔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모르는 체하고 복음을 부끄러워했다. 그래서 바울은 특별한 방식으로 표현함으로써 그들을 돕고, 능하게 하고, 두려움에서 그들을 끌어내려 한 것이다.(딤후1:7) 여기 로마에 있는 그리스도인들에 대해서도 그와 같은 일을 행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여러분은 이 점에 대해서 무언가를 알고 있는가? 만일 여러분이 이 특별한 시험을 모른다면 여러분이 훌륭한 그리스도인이기 때문에서라기보다는 기독교 메시지에 대한 여러분의 이해가 명백한 적이 없기 때문일 것이다. “난 믿은 이후 한 번도 의심의 시험을 받은 적이 없어. 나는 부끄러워하는 시험을 받은 적이 없어”라고 말하는 것은 훌륭한 것이 아니다. 성도들의 생애에 대한 전기를 읽어보면, 그들이 얼마나 심각한 공격을 받았는지를 발견할 것이다. 세상은 언제나 복음을 조롱하며 복음을 전혀 어리석은 젓으로 여긴다. 이 복음이 “유대인에게는 거치는 것이요 헬라인에게는 미련한 것”임을 명백히 말한다. 사람은 본질상 조롱받기를 싫어한다.
어째서 세상이 복음을 미워하는가? 복음은 정말 지독히 가난한 가운데 태어난 한 분을 선포한다. 구유에서 태어나 작은 마을에서 목수로 훈련받으신 그 분을 세상 가운데서 내세워야 한다. 그 분은 스스로 굉장한 것을 외치고서는 정말 무능한 모습으로 못 박혀 죽으셨다. 우리가 선포하는 것이 바로 그 점이다. 바로 이 분이 세상의 구주요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선포하므로 세상은 그것을 조롱하고 비웃는다. 세상은 철학을 조롱한 적이 없다. 세상은 철학을 매우 잘 배우고 또 놀라운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복음은 철학이 아니다. 여기에는 위대한 철학적인 논증이 하나도 없다. 복음은 사실들을 진술한다. 특히 주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죽으심과 부활에 대해서 말하기 시작할 때 더욱 그러하다. 그들에게는 이는 미련한 것이요, 넌센스에 불과하다.
이러한 것들이 때때로 진정으로 그리스도인이 된 사람들에게도 어느 정도의 수치심을 갖게 하였다. 특히 학식과 교양이 있는 철학적인 지성을 가진 사람들이라고 하는 자들 앞에서는 그러한 느낌을 가지게 되었다. 이 편지를 받는 그리스도인들은 세계의 중심지인 로마에 살고 있었다. - 어떤 사람이 로마에 와서 유대 땅 나사렛의 한 목수가 하나님의 아들이요, 세상의 구주라고 하더라. 그가 십자가에서 힘없이 죽음으로써 세상을 구한다고 하더라. 얼마나 우스운가! 그것은 학식 있는 사람들이 복음에 대해서 나타낸 반응이다. 바울은 대단한 지성을 가진 유능한 사람이었다. 그래서 그는 의도적으로 자기는 그리스도를 위해서 어리석은 자가 되었다고 말한다. 그리고 “너희 중에 누구든지 이 세상에서 지혜있는 줄로 생각하거든 미련한 자가 되어라 그리하여야 지혜로운 자가 되리라”고 말한다.
세상은 지성에 대단한 의미를 부여하고, 또한 도덕적인 노력에 대해서도 큰 의미를 부여한다. 그러나 복음은 그렇지 않다. 그렇다고 해서 복음이 지성을 죽여 버리라고 말한다든지 유능한 사람은 그리스도인이 될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은 아니다. 복음은 지성적인 면에서 매우 부족한 사람이나 유능한 사람이나 정확히 같은 수준으로 끌어내린다. 복음은 지성적인 것만은 성령께서 사람의 영혼을 다루실 때 최후까지 항거하는 성채라고 한다. 복음은 처음부터 여러분의 모든 의는 ‘더러운 옷’과 같고, 여러분의 놀라운 공적은 ‘분토’나 ‘배설물’과 같을 것이라고 말한다. 바울은 자기를 비웃고 있는 사람들에게 원한다면 그러한 사람을 대면할 수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지만, 그렇게 해서는 안 된다는 것도 알고 있었다. 그렇게 하면 자신이 전하는 복음을 부인하는 것이 되기 때문에 어리석은 자가 되어야 했다.
참된 복음은 언제나 육신에 속한 자연인의 마음을 상하게 한다. 복음 설교가 중생하지 못한 자연인이 미워하지 않고 칭찬한다면, 그 설교에는 무엇인가 그릇되어 있다고 역설하는 바이다. 그리스도를 영웅이나 한 모범자로 나타내 보라. 그러면 사람들은 그것을 좋아할 것이다. 사람들은 산상설교를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가르침이라고 말하고, 그들은 그것을 실천할 수 있다고 믿는다. 그러나 산상설교가 진정으로 무엇을 의미하며, 그래서 율법의 진정한 깊이를 대면하게 되면, 그것은 자신을 정죄하기 때문에 미워하게 된다. 주 예수그리스도를 사람들의 난제를 해결해 주고 영 단번에 행복하게 만들 수 있는 분으로 말하는 적이 얼마나 많은가? 그 분을 어떤 고상한 류의 귀인으로든지 윤리 도덕적 모본으로든지 놀라운 삶의 철학을 제공하는 분으로 나타내 보라. 그렇게 하면 어느 사람의 마음도 상하지 않을 것이며, 사람들의 박수갈채를 받을 수 있을 것이다.
십자가에 거치는 것은 이러하다. ‘나는 정죄받고 상실되어 있으며 너무 무능하여, 만일 예수 그리스도께서 나를 위해 죽어 주지 아니하셨더라면, 나는 하나님을 알지 못했을 것이고 용서 받을 수 없었을 것이다’. 그것이 마음을 괴롭게 하고 사람의 마음에 상처를 준다. 복음 자체가 사람들 속에서 거부반응을 산출한다. 초대교회로부터 지금까지 교회역사 속에서 하나님께서 가장 뚜렷하게 사용하셨던 사람들의 생애를 보라. 그들은 모두 하나같이 이 조롱을 받았다는 것을 발견할 것이다. 휫필드는 사팔눈이 되었기 때문에 런던의 ‘예의 바른 사회’에서 ‘사팔뜨기 박사’로 알려졌고 그가 전하는 복음을 멸시했다. 웨슬레 형제도 어머니와 친척들에게마저 ‘다른 사람들처럼 설교할 수 없느냐? 왜 평범하고 무식한 사람들을 향하여 설교하느냐?’라는 말을 들어야 했다. 복음설교를 가늠하는 매우 중요한 시금석이다. 사도는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여기서 나는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고 말하고 있다.
“복음은 구원을 주시는 하나님의 능력이 됨이라” -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를 밝히고 있다. 사람들이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를 제시하는 것을 보면, 복음의 참된 성격을 이해하고 있는지를 알 수 있다. 어떤 사람들은 복음이 그로 하여금 행복한 사람이 되게 하였으며, 그를 여러 방면에서 건져주었다고 말한다. 그 이유는 순전히 주관적인 것으로 그것은 단순히 우리에게서 끝나고 우리에게 일어나는 어떤 일에만 국한되어 있다. 모든 이단들을 다 둘러보면 똑같은 말을 하는 것을 발견한다. 심지어 어느 심리학자의 강의를 들으면 역시 같은 말을 한다.
바른 이유를 댈 수 있다는 것은 얼마나 중요한 일인지 알아야 한다. “내가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다”라고 말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하지 않다. 문제는 어째서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가, 그 이유가 무엇인가? 이다. 그것은 하나님의 복음이기 때문이며, 그것은 하나님의 능력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그 온전한 내용에 있어서 구원이며, 그것은 참되고 유일한 구원의 길이며, 확실한 길이며, 계시된 길이기 때문이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으로부터 온 의이다. 복음을 부끄러워하지 않는 이유는 독특하고 유별나고 구별되어야 한다. 하나님께서 영광을 받으시는 이유가 되어야 한다. 그리스도께서 영화롭게 되어야 한다. 성령을 높여 드려야 한다. 하나님의 은혜의 부르심을 받아 거듭나 새로운 본성을 받고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을 어떻게 하셨는지를 이해하는 사람 외에는 아무도 그것을 말할 수 없다. 하나님께서 우리 모두 다 그러한 식으로 말할 수 있게 하시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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