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존스

[스크랩] 로이드 존스, "성경적 복음전도를 위한 주도적 개념" (로마서강해7권25장, 강의안)

강대식 2015. 12. 7. 17:41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나나니”(1:18)

 

바울은 복음을 자랑하는 이유를 첫째는 그 복음이 정말로 무서울 정도로 필요하다는 것, 둘째는 복음이 아니고서는 어떠한 것도 그 필요에 합당한 만족을 줄 수 없다는 것이다. 여기서는 보편적인 진술을 하고 있다.

먼저 이유로 제시하는 것은 어떠한 체험에 대한 것으로 행복이나 어떤 마음의 상태나, 호소력을 가질 수 있는 어떤 것들의 차원에서 말하지 않고, 오히려 하나님의 진노의 차원에서 말하고 있다. 그는 그것을 맨 처음에 놓는다. 그것이 바로 복음전도의 동기이다. 사도는 무엇보다도 먼저 사람들이 하나님과 가진 관계와 하나님 앞에서 사람들이 서 있는 위치와, 하나님을 대면하여 그들이 갖게 될 영원한 운명에 관심이 있다. 사도 바울에 의해서 전파되었던 복음은 인간 중심적인 것이 결코 아니다. 그것은 필연적으로 하나님 중심적인 것이었다.

 

우리의 성경연구가 영적인 것이어야지 기계적인 것이어서는 안 된다. ‘하나님의 진노’- 그런 다음에 재빨리 그것을 지나가버리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모두 다 이러한 시대에 복음전도자들이다. 바울은 먼저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출발하지, 사람들의 필요나 문제들이나 사람들의 불행과 같은 문제로부터 다루지 않았다. 천만의 말씀이다!

구약성경을 읽어보라. 모든 선지서를 읽어보라. 선지자들은 언제나 이스라엘 자녀들로 하여금 하나님과 가진 관계를 상기시켜 주고 있다. 우리는 먼저 체험부터 시작해서는 안 된다. 여러분은 거짓된 기쁨과 거짓된 평안, 감격을 가지고 있을 수 있다. 신약성경에 이르면 세례 요한이 먼저 말한 것은 누가 너희를 임박한 진노로부터 피하라 하더냐이다. 역시 같은 요점이다. 우리 복되신 주님의 메시지도, 베드로의 오순절날 메시지도 동일한 것이었다. 그들이 그 메시지로 하나님과 대면하게 되었을 때 형제들아 우리가 어찌할꼬라고 부르짖게 되었다.

 

기독교 메시지와 모든 이단들을 구분하는 것은 바로 이 특별한 것이다. 이단들은 사람들에게 먼저 행복을 주겠다고 접근하여 자기들의 메시지를 특별하고 매력적으로 만들려고 애를 쓴다. “우리에게 오십시오. 이것을 해보십시오. 그러면 비참함에서 벗어나 만사가 형통할 것입니다그것이 이단의 특징이다. 복음은 필연적으로 하나님께로부터 출발하며, 사람들을 하나님과 대면시키며, 사람들과 하나님과의 관계를 맞바라보게 한다. 이점은 저를 깜짝 놀라게 한다. 우리 메시지 뿐만 아니라 방식에 있어서도 성경적이도록 하자.

오늘날 기독교 메시지에 있어서 바로 이 특별한 교리만큼 사람들로부터 미움을 받고 반대를 받는 것이 없다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여러분에게 그 진노의 위치와 신약의 복음전도에서 그것이 얼마나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고 있는지를 보여주기를 원한다.

 

불신자들은 하나님의 진노라는 개념을 특별하게 조롱한다. 만일 하나님이 계시다면 사랑의 하나님이 틀림없다는 논리를 편다. 그들은 하나님의 진노의 개념은 일종의 빅토리아 시대풍의 아버지의 개념을 하나님에게 전가한 것이라고 말한다. 또 다른 사람은 이렇게 말한다. “모든 종교는 두려움을 기초로 한다. 사람들에게서 이 두려움의 개념을 빼어버리면 종교를 떠나게 될 것이다. 심리학이 그것을 말한다”.


또 그들보다 더 포악하게 반대하는 자유주의 신학자들이 있다. 그 사람들은 스스로 그리스도인이라고 주장하며 이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전체 개념을 전적으로 부정한다. 그들이 내세우는 것은, 그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개념은 구약의 종족 신의 잔재나 유물에 불과하다. 구약의 여호와는 무서운 존재요, ‘피에 굶주린존재이다. 그러한 신은 부족적인 신이요,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은 아니다. 사랑에 관해서 가르치고 하나님의 부성애에 대한 개념을 가르치는 예수님의 교훈과는 전혀 들어맞지 않는다는 것이다. 바울은 바리새인이어서 랍비적인 태도를 가지고 있었고 그리스도인이 된 뒤에도 그것을 다 떨쳐내지 못했다. 그들은 구약이 참된 계시가 아니라고 말하면서 자기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의 하나님과 아버지, 오직 사랑만 하시는 하나님만 믿는다고 주장한다.

 

세 번째 부류는 복음적인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은 그것을 믿고 이론적으로는 받아들이지만 실제에 있어서는 부정한다. 그들은 이렇게 말한다. “믿습니다. 그러나 조심해야 합니다. 오늘날과 같은 시대에 하나님의 진노를 맨 먼저 말해서는 안 됩니다. 맨 먼저 말하면 설교를 듣지 않을 것입니다. 사람들에게 복음은 매력적인 것이 되게 해야지요”. 실제로 부정하는 것은 이론적으로 부정하는 것이나 마찬가지이다. 문제는 실제로 우리가 이 교훈을 받아들이는가? 우리가 그 교훈에 의해서 통제를 받고 있느냐? 하는 것이다. 이 교리를 실제로 부정하는 사람들은 그리스도를 하나의 친구나, 돕는 자나, 불쌍히 여기는 자나, 사람들을 이해할 수 있는 자로 소개한다. 그것은 절대로 진리가 아니다.

복음을 믿지만 인간의 지혜와 인간의 전략적인 차원에서 즉각 생각하기 시작하는 것은 얼마나 쉬운 일인가. 비극은 우리가 사도 바울처럼 성령의 권능을 믿지 않는데 있다. ‘성령께서 사람들에게 경고하실 것이다. 그것이 바로 능력이 되는 복음이다. 우리가 해야 할 일은 진리를 전하는 것이고, 그 적용은 성령께서 하신다.

 

바울은 이 한 서신에서 이 개념을 열 번이나 거듭 되풀이 언급하고 있다.

1:18

2:5 “다만 네 고집과 회개치 아니한 마음을 따라 진노의 날 곧 하나님의 의로우신 판단이 나타나는 그 날에 임할 진노를 네게 쌓는도다

2:8 “오직 당을 지어 진리를 쫒지 아니하고 불의를 쫒는 자에게는 노와 분으로 하시리라

3:5 “그러나 우리 불의가 하나님의 의를 드러나게 하면 무슨 말을 하리요 내가 사람의 말하는 대로 말하노니 진노를 내리시는 하나님이 불의하시냐


4:5 “율법은 진노를 이루게 하나니 율법이 없는 곳에는 범함도 없는니라

5:9 “그러면 이제 우리가 그 피를 인하여 의롭다 하심을 얻었은즉 더욱 그로 말미암아 진노하심에서 구원을 얻을 것이니

9:22 “만일 하나님이 그 진노를 보이시고 그 능력을 알게 하고자 하사 멸하시기로 준비된 진노의 그릇을 오래 참으심으로 관용하시고


12:19 “내 사랑하는 자들아 너희가 친히 원수를 갚지 말고 하나님의 진노하심에 맡기라. 기록되었으되 원수 갚는 것이 내게 있으니 내가 갚으리라고 주께서 말씀하시니라

13:4 “그는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네게 선을 베푸는 자니라 그러나 네가 악을 행하거든 두려워하라 그가 공연히 칼을 가지지 아니하였으니 곧 하나님의 사역자가 되어 악을 행하는 자에게 진노하심을 따라 보응하는 자니라

13:5 “그러므로 굴복하지 아니할 수 없으니 노를 인하여만 할 것이 아니요 또한 양심을 인하여 할 것이라

 

바울은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좇아 임하는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거대한 개념의 차원에서가 아니고서는 복음을 생각할 수조차 없다. 그것은 로마서에서만 국한된 것이 아니며 바울 서신 어디에서나 발견된다.

고전3:13-17 모든 사람의 공적이 심판을 받을 것이라고 말한다.

고전11:30-32 성찬식에 관해서 말하면서 병든 사람도 많이 있고 심지어 죽어 잠든 사람들도 많이 있다고 말한다. 그들은 하나님의 심판을 잊고 있었던 사람들이었다.


고후2:15-17 ‘사망에 이르는 냄새와 생명에 이르는 냄새, 바울은 우리의 메시지가 사람들을 나눈다고 말한다. 그 메시지가 어떤 사람들의 진노와 정죄의 위치임을 확증해 준다.

고후5:10 “이는 우리가 다 반드시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에 나타나게 되어 각각 선악간에 그 몸으로 행한 것을 따라 받으려 함이라주님의 사랑을 그처럼 넘치도록 아는 이 사람은 우리가 주의 두려우심을 앎으로 사람들을 권면하거니와--”라고 말한다. 불신자들이나 자유주의자들 속에는 그 개념이 발견되지 않는다. 그 뿐만 아니라 복음적인 교회들에게서도 그것이 빠져나갔다. 바울은 그 지식을 가지고 심판대에 서게 될 것이다! 만일 여러분이 바울이 시작하는 그 지점에서 시작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모든 방식 전체가 그릇되어 나갈 것이다. 우리 모두는 출발해야 하는 이것을 가지고 사람들을 대면하지 아니하고 그저 사람들에게 인기를 끌고 즐겁게 해주는 일에 관심을 가지고 있다. 참으로 무서운 위험이다.


2:3, 5:6, 3:6, 살전5:2, 살후1:7-8 어느 곳에서나 그 개념이 나타난다. 이 사활을 좌우하는 교리로부터 도망칠 수 없다.

 

오순절날 베드로가 한 메시지는 이 패역한 세대에서 구원을 받으라 임박한 진노를 피하라는 회개의 메시지였다. 요한계시록은 하나님의 진노에 관하여만 쓰여진 것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우리의 복되신 주님께서도 회개하라고 말씀하셨다. 산상설교 속에서도 반석 위에 지은 집과 모래 위에 지은 집, 두 종류의 선지자들, 열매로 나무를 알아보는 법, 그것은 언제나 심판이다. 마태복음 24장과 25장은 심판자로서의 하나님에 대한 교리에 전부 할애되어 있다. 누가복음 16장에서 부자와 나사로에 관해서 말씀하시며, 큰 구덩이로 심판이 고정되어 있다. 그것이 성경적인 증거이다.

 

교회사에서 위대한 복음전도자들의 삶이나 설교에 대한 기록을 보면, 그들 모두 다 그것을 되풀이하여 말했다는 것을 발견한다. 어거스틴, 루터, 존 칼빈, 휫필드, 웨슬레, 조나단 에드워드도 그것을 전했다. 이러한 문제에 나이나 시간이 무슨 문제가 되는가? 하나님께서는 변하지 아니하셨다. 그는 여전히 소멸하는 불이시다. 복음의 임무는 교회를 채우는데 있는 것이 아니라, 사람들을 하나님께로 이끌어 하나님과 화해하도록 하는 데 있다. 임박한 진노에서 사람들을 구하는 것이다. 그러므로 필연적으로 이 하나님의 진노로부터 출발해야 한다.


농담을 섞어 복음을 전하거나 사람들의 느낌을 더 생각하는 사람들을 이해할 수 없다. 하나님께 힘있게 쓰임 받은 사람들의 생애를 보면, 그들은 주의 두려우심을 앎으로바울처럼 다 말을 했다. 사람들을 두려워하지 않았고, 하나님께서 그것에 대해 어떻게 생각하시는지에 대해서만 두렵게 생각했다. 하나님께서는 그것을 사용하셔서 복음을 믿었던 사람들은 놀라운 평강과 기쁨과 구원과 능력을 체험하기 시작했고, 복되고 영구한 소망의 희미한 조짐들을 가지기 시작했다. ! 하나님께서 이 진리를 깨닫게 하소서!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김영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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