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강해·존스

[스크랩] 로이드 존스, "부흥의 필요성" (로마서강해7권29장, 강의안)

강대식 2015. 12. 14. 06:46

 


하나님을 알되 하나님으로 영화롭게도 아니하며 감사치도 아니하고 오히려 그 생각이 허망하여지며 미련한 마음이 어두워졌나니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의 우상으로 바꾸었느니라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1:21-24, 32)

 

죄 가운데 있는 인간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살지 않는다. ‘하늘이 하나님의 영광을 말하고창조계 전체가 다 그 일을 하고 있다. 그러나 사람은 하나님의 창조의 정점에 있으며 다른 어떤 것보다도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도록 지어졌다. 그러나 시:104편의 기자가 말하듯이 사람만이 그러한 일을 하지 못한다. 거기에서만 멈추지 않고 하나님을 영화롭게 하지 못할 뿐 아니라 감사치도 아니하였다’. 우리는 각자 다 그러한 잘못을 저질렀다! 우리는 햇빛을 당연한 것으로, 비도 당연한 것으로 생각한다. 그러나 인류는 그것을 깨닫지 못한다.

 

인류가 이러한 일을 행하는 세 번째 방식은,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28) - ‘그들이 하나님을 인정치 않았다는 것이다. 인류가 하나님을 생각해 보고 하나님을 시험해 보고 하나님을 점검해 보고 하나님을 물리치기로 작정했다는 것이다. 그것이 바로 하나님을 향한 인류의 자세이다. 그들은 재판장이 되어서 하나님을 시험해 본다. 그리고 그렇게 해보고는 더 이상 진력할 만한 가치가 없다는 것이다. “너는 하나님을 믿는다고 한다. 아 토론 하는 것이 재미있는데, 하나님께서 이러한 일을 하셔야 하나? 하시지 않아야 하나?” 그런 식으로 계속 지껄여댄다. 사도 바울이 1900여년 전에 이것을 썼으나 오늘날 인류의 모습을 얼마나 완벽하게 그려주고 있는가?

 

네 번째 방식은, “저희가 이 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32) - 그들이 의도적으로 죄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을 아는 지식을 무시한다는 뜻이다. 인간들은 그러한 것을 행할 뿐 아니라 그러한 일을 행하는 사람들을 보고 즐거워하고 그들에 대해서 농을 하고 그러한 일들에 대해서 자랑한다. 그들은 자기 스스로를 짐승들로 만들 뿐 아니라 다른 사람들에게 그러한 일을 얘기하는 것을 좋아한다. 그들은 그것을 의도적으로 행한다.

 

이론에 있어서 이 온전한 지식을 한쪽으로 밀어붙일 뿐 아니라 그러한 것을 원치 않는다고 마음을 정해버린다. 그리고 하나님께 대한 그들의 태도도 자기의 신을 따르며 숭배하겠다고 결심한다. “썩어지지 아니하는 하나님의 영광을 썩어질 사람과 금수와 버러지 형상으로 바꾸었느니라”(23). 그들은 하나님에 대한 관념 자체를 없애버리기는 원치 않으나, 자신을 계시하는 그러한 하나님은 싫어한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 나름의 신을 만들어 섬긴다. 여러분들은 이방인들이 섬기는 신상의 사진들을 보았을 것이다. 그것들 중 어떤 것들은 사람과 같이 생겼고, 새의 모양, 네 발 가진 짐승의 모양, 심지어 뱀이나 지네 같은 기는 짐승 형상도 있다. 이 모든 것들을 신으로 바꾸어 신상을 만들어 놓고 섬기기 시작한다.


하나님의 진리를 거짓 것으로 바꾸어 피조물을 조물주보다 더 경배하고 섬김이라 주는 곧 영원히 찬송할 이시로다 아멘”(25). 그들이 하나님에 관한 진리를 실제로 진리가 아닌 이른바 자기 생각이 진리라고 생각하는 것으로 바꾸어버린다는 것이다. 신화들, 그에 첨가하여 미신과 모든 형태의 우상숭배들이 있다. 이러한 모든 것을 통해서 사람들은 창조주 자신보다 피조물을 앞세우고 있다.

 

그러므로 인류가 죄 가운데서 행한 일은, 하나님의 본질적인 영광을 제쳐놓고 하나님에 관한 참된 진리를 제거한다. 하나님의 영이라고 하는 사실과 물질이 아니라는 사실을 간과해 버리고, 그들은 하나님을 물질적인 존재로 만들어버린다. 하나님에게 어떤 몸의 형체를 입히고 어떤 모습을 지닌 분으로 만든다. 그것은 하늘에 계신 영원하시고 영구하신 영광스러운 하나님을 인간이 이해할 수 있는 차원, 인간이 마음대로 다룰 수 있는 차원으로 끌어내리려는 시도이다. 같은 원리로 철학자들은 자기 자신의 상념들을 구체화 시킨다. 어떠한 상징과 그림도 하나님을 나타낼 수 없다. 그것은 언제나 하나님을 훼손시킨다.

 

아멘’ - 사도가 그 시점에서 아멘이라고 말하는가? 하나님의 이름 자체가 경배의 대상이 되어야 한다. 사도는 우리로 하여금 그 의식을 되찾으라고 촉구한다. 우리는 하나님을 말할 때 외경감과 거룩한 두려움으로 말해야 한다. 사도는 아멘이라고 말한다. 왜냐하면 멈추어서 하나님의 이름 자체를 언급할 때 경배하지 않고서는 그와 같이 하나님에 대해서는 말할 수 없기 때문이다. 우리가 성경의 계시 앞에 어떤 우리 자신의 한 가지 생각이라도 놓는다면 그것은 창조주보다 피조물을 더 섬기는 것이 된다.

 

나의 친구들이여! 우리는 성경에서 읽는 모든 것을 전부 이해할 생각을 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의 이지는 너무 작고, 우리는 죄 가운데 태어났다. 우리는 어린아이처럼 성경으로 나아가 그것을 경배하고 찬미하고 받아들여야 한다. 그러므로 우리는 말씀에 접근할 때 경외심과 겸손함으로 접근하고 성령의 조명을 구하도록 하자. 시편 73편에 나오는 사람과 같이 어려운 때를 맞고 있을 때 어째서 하나님께서--?” 그런 생각이 가슴 속에 떠오르거든 멈추어 서서 썩지 아니할 하나님, 영광스러운 존재요, 거룩과 무한과 위엄을 갖추신 그 하나님에 관해서 말하고 생각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하자. 우리는 입을 가리우고 하나님께서 당신의 목적을 우리에게 밝히시기까지 기다리는 것으로 만족하자. 생각 없이 무가치한 방식으로 하나님께 대하여 말하는 잘못을 범한다는 것은 정말 언어도단이다!

 

교훈의 요약)

첫 번째, “스스로 지혜 있다 하나 우준하게 되어”(22) - 이 진리를 억압한 결과로 사람들이 미련하게 되었다. 자기가 하나님을 시험할 수 있고, 시험한 다음에 하나님을 기억(거역?)할 수 있다고 생각하는 사람은 어느 누구든지 자기는 미련통이라고 말하고 있는 셈이다. 예를 들어 베토벤의 음악에는 별로 들을 것이 없고 재즈는 대단히 훌륭하다고 생각하고 말하는 사람은 베토벤에 대해서 아무것도 말할 것이 없다는 것을 드러내는 셈이다. 음악을 아는 지식의 입장에서 볼 때 사실은 다 자신들에 관하여 말하고 있는 것에 불과하다.

 

두 번째, 그들이 무엇을 숭배하는지 보라. 그들은 하늘의 하나님을 섬기는 일은 저급한 일이라고 느끼고 사람을 숭배할 것이다. 지도자를 숭배하고 마치 그들이 신들이나 되는 것처럼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 앞에 머리를 숙이라고 말하면 그들은 매우 모독적으로 느낀다. 유명인의 팬들은 그러한 사람을 보려고 몇 시간을 서서 기다린다. 그러나 하나님께 시간을 드리는 것은 모독적이다.


세 번째,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사 저희 몸을 서로 욕되게 하셨으니”(24) - “이를 인하여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 두었으니 곧 저희 여인들도 순리대로 쓸 것을 바꾸어 역리로 쓰며 이와 같이 남자들도 순리대로 여인 쓰기를 버리고 서로 향하여 음욕이 불 일듯 하매 남자가 남자로 더불어 부끄러운 일을 행하여 저희의 그릇됨에 상당한 보응을 그 자신에 받았느니라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 합당치 못한 일을 하게 하셨으니”(26-28)

사람들은 그렇게 해놓고도 뻔뻔스럽게 그러한 일에 아주 신기한 것이, 아름다운 것이 있다고 말하려고 한다. 우리는 사도가 사용하는 그 분명한 언어를 사용하자. 사도는 그것이 부패하고 포악하고 사악하게 되었다고 말한다.

 

네 번째, “곧 모든 불의, 추악, 탐욕, 악의가 가득한 자요 시기, 살인, 분쟁, 사기, 악독이 가득한 자요 수군수군하는 자요 비방하는 자요 하나님의 미워하시는 자요 능욕하는 자요 교만한 자요 자랑하는 자요 악을 도모하는 자요 부모를 거역하는 자요 우매한 자요 무정한 자요 무자비한 자요 저희가 이같은 일을 행하는 자는 사형에 해당하다고 하나님의 정하심을 알고도 자기들만 행할 뿐 아니라 또한 그 일을 행하는 자를 옳다 하느니라”(29-31)

 

사람들이 자기들의 지혜를 높이고, 자기들의 생각과 총명을 높이면 그러한 결과를 가져온다. 우리는 오늘날 세계에서 그 모든 것을 발견한다. 그것이 홍수사건 때이든, 바울의 시대 때이든, 오늘날 이든 견주어 보면 아무런 차이가 없이 같은 일들이 계속 반복되어 보편적으로 나타난다. 우리는 다른 사람들을 인도하여 그것들을 알도록 해야 한다. 사도는 여기서 현재의 상황을 보시는 하나님의 관점에 대해서 말하고 있고, 또한 그 모든 것에 대하여 임하는 하나님의 심판에 대해서 말하고 있기 때문이다.

 

다섯 번째, 하나님께서 그 모든 것에 대해서 무엇이라고 말씀하시는가? 사도는 세 번이나 반복하여 대답하고 있다. “그러므로 하나님께서 저희를 마음의 정욕대로 더러움에 내어버려 두사”(24), “또한 저희가 마음에 하나님 두기를 싫어하매 하나님께서 저희를 그 상실한 마음대로 내어버려 두사”(28) “하나님께서 저희를 부끄러운 욕심에 내어버려 두셨으니”(26) 사도가 그 점을 지적하고 싶어 견딜 수 없었으면 세 번이나 거듭 말했겠는가! 인류가 영리한 체하며 하나님을 내던져버릴 때, 하나님께서는 정확히 그러한 일을 인류에게 행하신다. 그들이 하나님을 버렸고, 하나님도 그들을 버렸다. 그것은 모든 것 가운데 가장 가공스럽고 무서운 일이다. 인간의 마음이 상실하면 인간의 소망이 없다.

 

여섯 번째, 그 결과는 27절에 묘사된 것과 같은 방식으로 행동하게 된다. 이 세상에서 도덕성을 유지하시는 분은 하나님이시다. 하나님께서 제어하시는 은혜를 철회하시면, 죄의 결과로 인간 속에 있는 모든 비열함과 어리석음이 고삐가 풀려 제멋대로 굴게 되어 방종하게 되고 세상은 산 지옥과 같이 되어버린다.

오늘날 세상의 형편은 하나님의 진노가 불의로 진리를 막는 사람들의 모든 경건치 않음과 불의에 대하여 하늘로 좇아 나타난다는 것에 대한 가능한 최대의 증거이다. 이해할 수 없는 도덕적인 난제, 믿기지 아니하는 도덕적인 시궁창, 갈수록 증가하는 모든 더러움과 추악과 미련함으로 가득한 오늘날의 세상이야말로 사도가 여기서 말하는 것을 절대적으로 증거하고 있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김영희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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