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 2 부 노샘프턴 교회에서의 목회와 설교
1726년 에드워즈는 매사추세츠에 있는 노샘프턴 교회로부터 외할아버지 솔로몬 스타다드 목사의 동역자(부목사 겸 후계자)로 부름 받았다. 에드워즈는 1727년부터 1750년까지 23년간 목회하면서 성인기의 대부분을 그 교회에서 보내게 된다.
제 1 장 결혼과 가정
아내 사라 에드워즈의 경건
1727년 7월, 에드워즈는 사라 피에르폰트와 결혼했다.
에드워즈의 아내 사라는 대단히 경건한 여성이었던 것 같다. 특별히 그녀는 은혜의 체험에서 남다른 경지에 이른 사람이었다. 1743년에 출판된 「부흥에 관한 소고」에서 조나단 에드워즈는 자신이 그 무렵 “높고 비범한 황홀경”을 체험한 사람들을 많이 알게 되었다고 털어놓으면서 한 성도의 사례를 모범적으로 자세히 묘사하고 있는데 그 성도가 바로 자기 아내 사라였다.
물론 그녀도 과거에는 영적으로 아주 힘들고 저조한 시기들이 있었다. ‘은혜의 낮은 단계’에 머물러 있었고 영적으로 꾸준하지 못했으며 기복이 많았다. 또한 육체적으로 과민한 경향으로 인해 정신적으로도 악조건 속에 살았다. 청년 전기에는 심지어 종종 우울증에 빠져 때로는 그것에 짓눌리기도 했다. 그러나 1740년경에 사라는 자신의 그러한 약점들을 완전히 정복할 수 있는 은혜의 능력을 체험하게 되었다. 신적 빛이 그녀에게 비취어 그녀는 하나님께 자신의 전부를 온전히 맡겨 드릴 수 있는 능력을 가지게 되었다. 그 후 그녀는 “중단 없는 안식, 하나님 안에서의 겸허한 기쁨”을 누리게 되었으며, 단 한 시간의 우울증이나 어두움도 없이 계속 그처럼 은혜로운 상태에 거하게 되었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사라의 비상한 영적 수준을 소개한다. 그녀는 하나님을 위해서라면 저주를 기꺼이 감수하겠다는 결의를 보였다. “하나님의 영광이 그것을 원하신다면 .....”. 하나님이 그녀를 향해 당신의 얼굴을 가린다든지, 그녀가 영적 어두움과 공포 중에 살다가 죽는다든지 하는 것을 감수하겠으며 그것에 대해 어떠한 보상도 받지 않겠다는 정도의, 비범한 차원에 도달했다. 에드워즈는 그녀의 사랑과 용서 및 죄인들에 대한 비상한 동정심에 대해 언급했다. 그녀는 “인류에 대한 보편적 선의”를 가지고 “온 세상을 동정과 사랑의 팔 안에 품고 있었다”. 그녀가 원수로부터 “극단적 격노와 잔인”의 대상이 될 때도 그녀는 그들에 대한 “열렬한 사랑과 동정”으로 응수했다. 또한 죄인들에 대한 동정심이 북받쳐 올라 “먹지도 자지도 쉬지도 않고 오직 하나님께 나아가 그들을 위한 기도로 자신의 영혼을 쏟아내고픈 마음”뿐이었다고 에드워즈는 적고 있다. 이것은 은혜의 깊은 경지에 들어간 그리스도인들이 멸망해 가는 세상에 대해 얼마나 엄청난 영적 고뇌를 느끼는가에 대한 놀라운 시사일 것이다. 사라는 죄인들의 영혼을 위해 하나님께 간절히 그리고 열렬히 기도하면서 그녀의 “육신의 기력이 쇠해질” 정도였다.
사라는 완전한 구원의 확신을 소유하고 있었다. “하나님의 은총과 미래의 영광에 대한 아주 크고 충만하며 지속적인 확신”을 소유하고 있었던 것이다. 그리하여 그녀는 자신의 개인적인 문제에 대해서는 하나님을 전적으로 신뢰했다. 생사, 건강, 평안과 고통의 문제를 그녀는 온전히 하나님께 일임했다. 그리고 극단적이고 격렬한 고통 속에서나 당장 목숨을 잃을지 모르는 위험한 상황 속에서도 그러한 신뢰는 결코 흔들리거나 변하지 않았다.
한편, 사라의 은혜는 도피적이 아니라 현실적인 경건이었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높은 체험과 종교적 정서를 소유하고 있었지만 그렇다고 해서 사라가 “세상적 책임”을 소홀히 한 것은 아니었다. 독서와 기도 등 경건의 훈련과 함께 그녀는 세상일도 아주 즐겁고 민첩하게 수행했다. 그러한 일을 “하나님에 대한 봉사의 일환”으로 행할 때는 그것이 “기도만큼이나 좋은 일”이라는 것을 발견한다고 그녀는 말하곤 했다. 나아가서, 그녀는 사회윤리적인 일에도 열심이었다. 즉 “사회적 책임”에도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거기에 관련된 일들을 처리했다고 한다.
에드워즈의 자녀들
에드워즈와 사라는 딸 여덟과 아들 셋, 도합 열한 명의 자녀를 낳았다. 에드워즈 부부는 자녀들 모두와 친밀한 관계를 즐겼다. 바쁘고 스트레스 많은 일과 중에도 에드워즈는 자녀들을 위해 아침 예배와 식사 시간, 그리고 저녁 시간을 할애했다. 에드워즈의 자녀들은 자라서 법률가, 정치인, 대학 학장 및 목사가 되었다. 아들 셋 중에 하나 조나단은 아버지의 뒤를 이어 목사이자 대학 학장이 되었다. 에드워즈의 손자 손녀는 모두 72인이었다. 그 중 그의 딸 메리가 낳은 에드워즈의 외손자 디모데 드와이트는 후일 예일 대학의 학장이 되어 영광스러운 예일 대학 부흥의 주역이 되었다.
제2장 성숙과 진출
노샘프턴에서의 영적 성숙
노샘프턴에 온 후에도 에드워즈의 신령한 은혜 체험은 계속되었다. 그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운 완전과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성에 눈이 열릴 때마다 하나님을 마음속으로 즐거워하고 있었다. 하나님은 다른 무엇보다도 그의 “거룩하심”으로 인해 영광스럽고 사랑스러운 존재로 보였다. 에드워즈의 영적 만족과 행복은 교리에 근거한 것이었다. 그는 막연한 감정이나 근거 없는 환상에 도취되어 있는 몽사가나 신비주의자가 아니었다. 하나님의 절대적 주권, 값없는 은혜, 성령의 사역에 대한 인간의 전적 의존 같은 교리들이 그에게 너무나 달콤하고 영광스러워 보였다. 그러한 교리들이 그의 기쁨의 원천이었다. “그리스도에 의한 구원의 길”은 그에게 영광스럽고 탁월하며 가장 즐겁고 아름다운 것으로 보였다. 한마디로, 그는 복음의 교리들을 사랑했다. 그에게는 “복음이 가장 진귀한 보화로 보였다.” 그는 하나님의 말씀의 “탁월성”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했다. 그에게 있어 성경은 “생명의 말씀”이요 “생명의 빛”이었다. 그것은 “달콤하고 탁월하고 생명을 주는 말씀”이었다.
에드워즈가 지적 이해만으로 이루어지는 신앙에 큰 가치를 부여하지 않았던 이유는 이처럼 그가 너무나 실재적이고 체험적인 신앙 즉 마음으로 느끼고 누리는 신앙을 가졌기 때문이었다.
청교도 뉴잉글랜드에서 알미니안주의의 대두
칼빈주의에 비해 알미니안주의는 구원에 있어 인간의 역할과 능력을 어느 정도 인정하는 신학이라 할 수 있다. 알미니안주의는 죄인이 자신의 자유 의지를 사용하여 결단함으로 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믿을 수 있다고 주장한다. 그러나 죄인이 죄를 미워하고 하나님을 사랑할 능력을 가진다는 주장은 에드워즈가 보기에 죄의 속성에 대한 이해 빈약에서 오는 착각이었다. 에드워즈의 평생에 걸친 확신들 중 하나는 하나님이 당신의 주권적이며 선하신 뜻에 의해, 그리고 자신의 은혜의 영광을 찬미케 하기 위해서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것이었다. 그것은 또한 청교도들의 전통적 신념이기도 했다.
그러나 17세기가 채 끝나기도 전에 영국에서는 알미니안주의에 대한 태도 변화가 있었다. 즉 알미니안주의 문제를 가지고 계속 논란할 필요가 있는가 라고 생각하며 엄격한 칼빈주의에 대한 불명확한 태도가 점점 시대를 장악하기 시작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는 청교도 신학과 작품들을 높게 평가하고 설교하는 쪽을 택했다.
제3장 신적 초자연적 빛
“하나님의 영에 의해 영혼에 직접 수여된 신적 초자연적 빛이 성경적이고 이성적인 교리임을 증명함”은 에드워즈의 가장 유명한 설교들 중 하나일 뿐 아니라 에드워즈의 신학의 핵심 주제가 담겨 있다. 이것은 칼빈의 강조점인 “성령의 조명” 사상을 아주 새롭고 이성적인 방법으로 변호한 설교이다. 이 설교에서 에드워즈는 성령의 조명을 “신적이고 초자연적 빛”이라 표현한다. 그는 이 영적 조명이 없는 사람은 영적인 사실에 대해 장님에 불과하다고 단언한다. 교리에 대한 지성적, 관념적, 사변적 지식이 아무리 많아도 복음이 사실임을 믿고 확신하는 데 이르게 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사람이 하나님, 예수 그리스도, 그리고 복음에 대해 확신을 얻기 위해서는 필히 성령이 직접 영혼에 비추어 주시는 신적 초자연적 빛이 있어야 한다. 신령한 빛에 관한 에드워즈의 지론을 담은 설교의 본문은 마태복음 16장 17절이었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바요나 시몬아 네가 복이 있도다 이를 네게 알게 한 이는 혈육이 아니요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시니라”
신적이고 초자연적 조명이 아닌 것들
먼저, 그는 신적 조명이라는 것이 무엇인지를 밝히기 위해 신적 조명이 아닌 것을 몇 가지 열거한다. 첫째, 자연인도 자기의 죄와 비참에 대해 확실한 깨달음을 가질 수 있지만 그것은 특별 은혜가 아닌 자연 은혜의 산물일 수 있다. 에드워즈는 성령의 역사를 일반적 역사와 특별한 역사 두 가지로 구분한다. 죄에 대한 자연인의 깨달음은 성령의 일반 은혜의 결과다. 일반 은총은 단지 인간이 가진 자연적 능력을 보조할 뿐이다. 그러나 특별 은총은 은혜를 전달하거나 자연 이상의 어떤 것을 부여한다. 그것은 성령의 갱신하시고 성화시키는 역사다. 그는 성령이 비중생자의 마음속에서는 단지 “간헐적인 외적 행위자”로 작용한다고 주장한다. 성령은 비중생자와는 연합하지 않으시나 성도와는 연합하신다는 것이다. 그 분은 성도를 자기의 성전으로 삼고 “생명과 행위의 새로운 초자연적인 원리”로서 성도에게 “영향을 주고 그를 움직인다”. 성령은 경건한 사람들의 영혼 속에서 “자신을 전달”한다. 즉 자신의 고유한 본성인 “거룩을 그에게 전달”한다. 에드워즈는 성령의 특별한 역사로 인해 성도에게 일어나는 그러한 변화를 죽었던 시체가 살아 움직이게 되는 것에 비유한다.
이 신적 초자연적 빛은 ‘상상력에 새겨진 어떤 인상’이 아니다. 그것은 외적 빛이나 영광, 혹은 형태나 용모의 아름다움, 혹은 어떤 대상의 가시적 광채나 찬란함에 관한 개념도 아니다. 물론, 영혼이 영적인 것들을 생생하게 발견하여 신적 빛의 능력에 크게 감동되면 그러한 것들이 동반될 수는 있다. 그리고 에드워즈는 영적 조명이 오직 하나님의 “말씀에 있는 진리를 부각”시킬 뿐 성경에 없는 어떤 새로운 진리나 명제를 제시하는 것은 아니라고 주장한다. 새로운 진리나 교리를 제시하는 것은 선지자들과 사도들이 받았던 “영감”이다. 에드워즈 당시 어떤 광신자들이 그러한 영감을 받은 척했다. 그러나 신령한 빛은 그러한 영감과는 아주 다른 것으로 하나님, 그리스도, 내세에 대해 성경에서 가르치지 않는 어떤 새로운 사실을 나타내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성경이 가르치는 것들을 제대로 이해하게 해 줄 뿐이다.
신적 초자연적 빛
그러면 이 영적, 신적 빛은 무엇인가?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말씀에 나타난 신적 탁월성에 대한 진정한 지각” 혹은 “이해” 그리고 “그것들의 진실성과 실재성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이라고 대답한다. 신령한 빛이 영혼에 비쳐 우리의 영안이 열릴 때 비로소 복음의 진리를 확실히 이해하고 “보고”, “지각할”수 있다는 것이다. 그러한 체험을 가진 사람은 하나님이 영화로우시다는 사실을 단지 “이성적으로 믿는”데서 끝나지 않고 자기 마음속에 하나님의 영화로우심에 대한 감각이 있다. 하나님이 은혜로우시다는 사실을 단지 사변적으로 판단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얼마나 사랑스러우신가를 감지한다는 것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선에 관한 두 종류의 지식이 있다. 하나는 사변적이거나 순이론적인 지식이다(견해로서의 지식). 다른 하나는 마음의 감각으로 이루어지는 지식이다(감각으로서의 지식). 그것은 어떤 것의 아름다움, 사랑스러움, 혹은 달콤함에 대한 감각이다. 전자에는 사변적 기능, 이해력이 활용된다. 후자에서는 의지나 영혼의 성향 혹은 마음이 주로 관련된다. 예를 들어, 꿀은 달다는 이성적 판단을 가지고 있는 것과 그것의 달콤함에 대한 감각을 가지는 것과는 다르다. 전자는 단지 머리에만 머무르는 것으로 오직 사변만이 그것에 관련되어 있다. 그러나 후자에는 마음이 관련되어 있다. 어떤 것의 아름다움과 사랑스러움을 마음으로 지각할 수 있을 때는 그 이해로부터 필연적으로 즐거움이 우러나게 된다.
말씀의 신적 탁월성에 대한 감각이 진리를 확신시켜 주는 두 가지 방법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말씀에 포함된 것들의 신적 탁월성에 대한 이 감각으로부터 그것들의 진실성과 실재성에 대한 확신이 온다고 주장한다. 그런데 그것이 오는 방법은 두 가지다. 첫째는 간접적인 방법인데, 하나님의 일들의 진실성에 대한 편견들이 제거된다. 자연인의 마음은 하나님의 일들을 적대시하는 편견으로 가득하다. 그러나 기독교 교리들의 신적 탁월성을 발견하게 되면 이 적대심이 사라지고 편견들이 제거되며 이성이 성화되어 그것들의 진실성에 대한 논증들의 능력에 개방적으로 된다. 둘째로, 하나님의 말씀의 신적 탁월성에 대한 진정한 감각은 그것들의 진실성을 보다 직접적으로 확신시켜 준다.
그러면 어떻게 이 빛이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주어지는가 하는 질문에 에드워즈는 세 가지로 답변한다. 첫째, 하나님은 인간의 이해력을 사용하셔서 그 초자연적 빛을 주입하신다. 그렇다고 해서 인간의 능력이 원인이 된다는 말은 아니다. 둘째, 이 일에서는 복음이 사용된다. 복음은 유리잔처럼 그것에 의해 이 빛이 우리에게 전달되게 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이 구원하는 교훈의 내용을 마음에 전달하기 위해 사용될 뿐이다. 물론, 우리는 말씀 없이 영적 빛을 얻을 수는 없다. 그렇다고 해서 말씀이 그 빛을 야기하는 것도 아니다. 셋째, 하나님이 그것을 우리에게 주신다는 말이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먼저, 교리가 우리 정신 속에 있지 않으면 우리는 어떤 교리의 탁월성을 볼 수 없다. 예를 들어, 그리스도가 계시며 그는 거룩하고 은혜로운 분이라는 인식은 하나님의 말씀에 의해 우리 정신에 전달된다. 그러나 그 거룩함과 은혜 때문에 그가 탁월하시다는 감각은 성령의 직접적 사역이다.
성경적 근거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직접 마음속에 집어넣어 주시는 신령한 빛이라는 것이 있다는 성경적인 증거들을 말한다. 성도가 불신자들과 다른 점은 하나님에 대한 지식, 그리고 하나님과 예수 그리스도를 보는 눈을 가진다는 것임을 성경은 누누이 보여 준다고 그는 주장한다. “범죄하는 자마다 그를 보지도 못하였고 그를 알지도 못하였느니라”(요일3:6). “선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께 속하였고 악을 행하는 자는 하나님을 뵈옵지 못하였느니라”(요삼1:11). “세상은 다시 나를 보지 못할 것이로되 너희는 나를 보리니”(요14:19). “영생은 곧 유일하신 참 하나님과 그의 보내신 자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이니이다”(요17:3).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이러한 지식은 결코 단지 사변적 지식일 수는 없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보는” 것과 “아는” 것이라고 되어 있기 때문이다. 이러한 지식은 단지 정도의 차이뿐 아니라 본질적으로 그 종류가 다른 지식이라는 것이다. 성경에 따르면 이러한 빛과 지식은 항상 하나님으로부터 직접 주어지는 것이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그 때에 예수께서 대답하여 가라사대 천지의 주재이신 아버지여 이것을 지혜롭고 슬기 있는 자들에게는 숨기시고 어린 아이들에게는 나타내심을 감사하나이다 옳소이다 이렇게 된 것이 아버지의 뜻이니이다 내 아버지께서 모든 것을 내게 주셨으니 아버지 외에는 아들을 아는 자가 없고 아들과 또 아들의 소원대로 계시를 받는 자 외에는 아버지를 아는 자가 없느니라”(마11:25-27). 여기서 이 지식을 주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주권적 선물과 역사로 되어 있다는 것이다.
성경은 인간의 회심 시에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 대한 지식을 주신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내 어머니의 태로부터 나를 택정하시고 은혜로 나를 부르신 이가 그 아들을 이방에 전하기 위하여 그를 내 속에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실 때에”(갈1:15-16). 성경은 그러한 지식이 분명히 하나님의 직접적인 선물이라고 말씀한다. “내 눈을 열어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하소서”(시119:18). 여기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이란 에드워즈에 의하면 “말씀의 명령들과 교리들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과 완전성의 아주 놀라운 탁월성들과 경이로운 표현들, 그리고 거기 계시되어 있는 저 하나님의 역사들과 경륜들이다”. 그리하여 성경에 따르면, 하나님의 섭리, 은혜 언약, 그리고 자기 백성들을 향한 은혜의 방도에 대한 지식이 성도들에게 고유한 것이며 오직 하나님에 의해 주어지는 것이라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여호와의 친밀함이 경외하는 자에게 있음이여 그 언약을 저희에게 보이시리로다”(시25:14).
이러한 발견으로부터 복음의 진리에 대한 “참되고 구원 얻는 믿음”이 생긴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지론이었다. 이러한 주장에 대한 성경적 근거로 그는 요한복음 6장 40절을 제시했다. “내 아버지의 뜻은 아들을 보고 믿는 자마다 영생을 얻는 이것이니......” 또 요한복음 17장 6-8절에서도 그것이 나타난다. “세상 중에서 내게 주신 사람들에게 내가 아버지의 이름을 나타내었나이다 지금 저희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것이 다 아버지께로서 온 것인 줄 알았나이다 나는 아버지께서 내게 주신 말씀들을 저희에게 주었사오며 저희는 이것을 받고 내가 아버지께로부터 나온 줄을 참으로 아오며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줄도 믿었사옵나이다.” 요한복음 12장 44-46절에서도 마찬가지다. “예수께서 외쳐 가라사대 나를 믿는 자는 나를 믿는 것이 아니요 나를 보내신 이를 믿는 것이며 나를 보는 자는 나를 보내신 이를 보는 것이니라 나는 빛으로 세상에 왔나니 무릇 나를 믿는 자로 어두움에 거하지 않게 하려 함이니라.” 그리스도를 믿는 것과 그를 영적으로 보는 것이 병행적으로 나타난다는 것이다.
에드워즈의 해석에 따르면, 베드로는 사도들이 “그리스도의 신적 영광을 본 것”이 복음의 진리에 대한 확신을 얻게 된 계기였다고 말한다.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의 능력과 강림하심을 너희에게 알게 한 것이 공교히 만든 이야기를 좇은 것이 아니요 우리는 그의 크신 위엄을 친히 본 자라”(벧후1:16).
적용
이 신적 초자연적 빛이 그처럼 중요한 것이라면 우리는 어떻게 해야 하는가 하는 질문에 대한 에드워즈의 대답은 자명했다. 우선 이러한 신적 빛이 우리 영혼 속에 흘러 들어온 적이 있었는지 우리 자신을 검토해야 한다. (우리가 하나님의 영으로 가르침을 받은 적이 있는가? 우리가 하나님의 아들을 본 적이 있는가? 그리고 그를 믿은 적이 있는가? 복음 진리에 대한 우리의 믿음이 그리스도에 대한 영적 시각에서 생겨난 것인가?) 나아가서 에드워즈는 우리 모두가 이 빛을 진지하게 추구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에드워즈는 이 신적 초자연적 빛이 가져다 주는 유익을 언급한다. 그는 인간이 그 빛을 받을 때 참된 행복과 만족 그리고 평안을 얻게 된다고 생각했다. 기쁨과 즐거움이야말로 인간이 궁극적으로 추구하는 것이라면 이 지식이야말로 다른 어떤 것들보다도 “달콤하고 기쁜” 것이라고 그는 자신 있게 추천한다. 에드워즈는 자신 있게 이렇게 외쳤다. “이 빛은 가장 절묘하게 아름다울 뿐 아니라 이해력의 눈을 즐겁게 해 줄 수 있는 것들에 대한 시각을 준다. 이 영적 광명은 마음속에 동트는 영광의 빛이다. 고난 중에 있는 사람을 이것처럼 힘 있게 지탱해 주는 것은 없다. 그리고 이 험하고 어두운 세상에서 이것처럼 마음에 평안과 광채를 주는 것은 없다”.
에드워즈는 이 신적 초자연적 빛이야말로 인간을 변화시키는 능력이 있다고 믿었다. 이 빛이 비칠 때 비로소 사람의 성품이 변화된다는 것이었다. 성화의 비결은 바로 이 신적 조명을 받는 데 있었다. “이 빛은 우리의 성품에 효과적으로 영향을 미쳐 영혼의 성질을 바꾸어 놓는다. 그것은 본성을 신적 본성으로 동화시킨다”.
마지막으로, 이 교리는 우리로 하나님의 선하심을 묵상하게 만든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조나단 에드워즈' 카테고리의 다른 글
[스크랩] 양낙홍,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 제4부 대각성 (0) | 2016.03.09 |
---|---|
[스크랩] 양낙홍,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 제 3 부 코네티컷 골짜기 부흥 (0) | 2016.02.17 |
[스크랩] 양낙홍,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 제 1 부 에드워즈의 출생과 형성 (0) | 2016.01.28 |
[스크랩] 양낙홍,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 3장 토머스 셰퍼드의 회심론 (0) | 2016.01.20 |
[스크랩] 양낙흥,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 1장 영국의 청교주의, 2장 교회원의 자격 (0) | 2016.01.2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