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

[스크랩] 양낙홍,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 제 3 부 코네티컷 골짜기 부흥

강대식 2016. 2. 17. 09:58

제 3 부 코네티컷 골짜기 부흥

제1장 배경


시대적 상황

1734년에 에드워즈가 속해 있는 햄프셔 군의 일부 목사들 중 교리적으로 철저하지 않은 사람들이 있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여기서 교리적 문제란 알미니안주의에 관한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그 문제가 교회의 존립을 뒤흔들 정도로 심각한 사안이라 판단하고 자기 교회에서 알미니안주의에 대항하는 일련의 설교를 시도한다. 이 설교들이 1734-1735년 사이 노샘프턴에서 일어난 “놀라운 회심들”을 유발했다. 그 제목들은 “오직 믿음에 의한 칭의”, “하나님의 나라로 침노해 들어감”, “룻의 결단”, “죄인들의 정죄에 나타난 하나님의 정의”,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성”이었다. (1738년 「여러 중요한 주제들에 대한 다섯 설교들: 영혼들의 영원한 구원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출판.)


수백 명의 회심 속에서의 하나님의 놀라운 역사

부흥은 노샘프턴을 넘어 햄프셔 군 전체에 확산되었고 나아가 매사추세츠와 코네티컷의 다른 지역들로 확산되었다. 그것이 주로 코네티컷강을 따라 형성된 마을들에서 일어났기 때문에 후에 교회사가들은 그것을 “코네티컷 골짜기 부흥”이라 불렀다. 에드워즈는 그 부흥의 전말을 편지로 보스턴의 벤저민 콜만 목사에게 보고했고, 그 편지를 읽은 콜만 목사는 1736년에 「노샘프턴에 있는 수백 명의 회심 속에서의 하나님의 놀라운 사역에 관한 충실한 서술」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했다(이 책은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라는 제목으로 한국어로 번역출판).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에는 단 몇 개월 사이에 영적 각성이 온 마을을 뒤덮게 된 과정, 그리고 그 결과 약300명의 사람들이 회심의 은혜를 체험하게 되었던 과정이 상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이 무렵, 에드워즈는 흔히 “사랑 장”이라 불리는 고린도전서 13장을 강해 설교했다. 먼 훗날인 1852년에 「사랑과 그 열매들」이라는 제목으로 출판한다(한국에서도 「사랑의 열매」로 출판). 아마 사랑의 속성을 분석한 설교들 가운데 교회사에서 가장 탁월한 것들에 속할 이 설교집은 특별히, 겸손에 대한 에드워즈의 해설은 이 책의 백미라 할 수 있다. 이 책은 기독교적 성품 형성에 큰 도움을 얻을 수 있다.


신비한 체험

골짜기 부흥의 열기가 식어 버린 직후인 1737년, 에드워즈는 생애 중 가장 놀라운 신비적 체험을 하게 된다. 바로 삼위일체 중 세 번째 위격의 영광을 여러 번 감지하는데, 성령은 그에게 있어 무엇보다 “성화시키는 분”이었다. 또 그는 신적 조명과 생명을 영혼에 전달하는 사역을 하는 분이었다. 그리고 그는 “신적 영광과 달콤함의 무한한 원천”으로 보였다.


죄에 대한 깨달음

에드워즈가 일반인들보다는 물론이요 대부분의 그리스도인들보다 훨씬 더 경건하고 깨끗한 삶을 살았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는 실로 교회사에 나타난 어떤 인물들보다 흠이 적은 인격과 생활의 소유자였다. 그것은 우리가 앞서 살펴본 그의 유년기부터의 경건 훈련과 영적 체험에 대한 기록을 대강 보아도 능히 확신할 수 있는 일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는 자신의 죄성과 악함에 대해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깊은 자각을 가지고 있었다. 보통 사람들이 보기에 아무런 특별한 결함을 찾을 수 없는 인물이 세상 어떤 사람보다 더 죄를 깊이 깨닫고 있었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다. 에드워즈는 고백한다. “나는 그 일이 아주 흔한 일이었고 때로는 나를 상당한 시간 내내 큰 소리로 울게 만들었다. ..... 나는 회심 전보다 회심 후에 나 자신의 사악함과 나쁜 마음에 대해 훨씬 더 큰 감각을 가지게 되었다. 만일 하나님이 나의 죄악을 표시해 두신다면 나는 세상 시작 이래 지금까지 있었던 모든 인간들 중 가장 나쁜 자로 나타날 것처럼 보였다. 나는 지옥에서도 가장 낮은 자리에 있어야 할 자로 보였다.”


이처럼 처절한 죄의식을 소유했음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는 스스로 “일반인들보다 더 큰 죄의 자각을 가지고 있다고는 추호도 생각하고 싶지 않았다”고 고백한다. 즉 그는 자기 죄의 자각이 “극히 작고 희미하다”고 생각했다. “내가 나의 죄에 대한 더 많은 감각을 갖고 있지 못한 것이 나를 놀라게 한다. 나는 내가 나의 죄성에 대한 극히 작은 감각만을 갖고 있음을 확실히 안다. 내 죄가 그처럼 크게 보이는 것은 다른 그리스도인들보다 죄에 대한 깨달음을 더 크게 가지고 있기 때문이 아니라 내가 그만큼 더 많이 악하기 때문이며 깨달아야 할 사악함을 그만큼 더 많이 가지고 있기 때문으로 생각된다. 내가 내 죄를 인해 울고 부르짖는 일들을 경험할 적마다 나는 내 죄에 비하면 나의 회개는 아무 것도 아니라고 생각했다.”


깊은 죄의식은 에드워즈로 하여금 겸손의 영을 유지하게 했다. 겸손은 에드워즈에 의하면, 하나님 앞에서 자기의 참 모습을 발견한 자들이 소유할 수 있는 미덕이었다. 그러기에 그것은 그에게 있어 참된 종교적 정서의 존재 여부를 판단하는 중요한 시금석이었다.


영적 성장

영적 체험기를 쓸 무렵 에드워즈는 하나님의 은혜와 능력, 그리고 자신의 의에 대한 혐오감을 이전보다 훨씬 더 많이 느끼고 있었다. 에드워즈는 스스로 “아직도 교만하고 자기 의를 내세우는 영으로 인해 고통당하고 있으며 그것을 전보다 훨씬 더 뼈저리게 느끼고 있다”고 고백하고 있었다. 에드워즈는 세월이 흐르는 동안 자신이 영적으로 성장했음을 인식했다. 그는 전보다 하나님의 절대 주권, 그리고 그 주권으로 인한 기쁨에 대해 보다 충만하고 지속적인 느낌을 가지고 있다고. 그리고 복음에 나타난 바대로 중보자로서의 그리스도의 영광에 대한 더 큰 감각을 가지게 되었다고.


제2장 「놀라운 회심의 이야기」


코네티컷 골짜기 부흥

1733년 말경 에드워즈가 목회하고 있던 노샘프턴 교회에는 비범한 현상의 조짐이 나타나기 시작했다. 평소에는 무리를 지어 떠들기를 좋아하고 다소 세속적이던 교회 젊은이들이 목사의 충고에 귀를 기울이고 고분고분하며 규모 있는 사람들로 변화되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듬해 봄, 한 청년이 갑자기 병으로 세상을 떠나고 이어서 한 젊은 주부가 사망했는데 이 일이 젊은이들에게 더 큰 종교적 관심을 가지게 만들었다. 가을에, 에드워즈는 교회 청년들에게 목요 강좌 이후 저녁 시간에 소그룹으로 모임을 가지라고 권고했고, 나이든 사람들도 덩달아 그러한 소그룹 모임을 가지기 시작했다.


12월 말경, 교인들 위에 성령께서 비상한 방식으로 역사하기 시작하셨다. 그 중에는 마을에서 가장 사교적인 젊은 여성이 포함되어 있었는데, 그 여성의 회심 소식은 온 동네에 큰 센세이션을 불러일으켜 그 때까지 있었던 일들 중 가장 큰 영적 각성의 계기가 되었다. 이 때부터 종교 문제가 온 마을 사람들의 일반적 관심사가 되었다. 사람들의 대화 주제는 예외 없이 내세와 영혼, 천국과 지옥의 문제로 집중되었다.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을 수 있을까 하는 것에 온통 사람들의 관심이 집중되었다. 마을은 영광스럽게 변화되기 시작했다. 이듬해인 1735년 봄과 여름 동안에는 하나님의 임재가 온 동네에 가득했다. 집집마다 구원의 기쁨이 넘쳐났고 교회도 변화되었다. 주일 예배는 생기로 넘쳤고 모든 교인들이 열심히 공중 예배에 참석했다. 설교가 선포되면 교인들은 그것을 한 말씀도 놓치지 않으려고 숨을 죽였으며 그 말씀을 눈물로 받아들였다. 찬양에도 활기가 넘쳤다. 이러한 비상한 은혜의 역사는 전염성이 있어 주변 마을로 확산되기 시작했다.


에드워즈는 이 부흥이 여러 모로 “비범”했다고 주장한다. 첫째, “보편성”에 있어 비상했다. 그것은 남녀노소, 빈부귀천 모든 이에게 영향을 미쳤다(그 전의 부흥들이 주로 젊은이들과 여자들 사이에 국한되었다면). 둘째, 회심자들의 “수”에 있어 비상했다. 부흥 후 교회 성찬에 참여하는 수는 620여 명에 달하게 되었는데, 600여 명의 수는 마을 성인을 거의 다 망라하는 수였다. 부흥 중 사람들은 문자 그대로 “떼를 지어”교회에 몰려 왔다. 에드워즈는 반 년 동안 약 300명이 “그리스도에게 나아와 구원을 얻었다”고 추산한다. 셋째, 하나님의 역사는 그 “속도”에서 비상했다. 많은 사람들의 심령 안에서 성령은 아주 신속하게 역사하셨다. 성령의 역사가 마을에서 다른 마을로 확산되는 과정도 신속했다. 넷째, 성령의 영향의 “정도”가 비상했다. 즉 각성, 죄의 깨달음, 구원의 체험의 정도와 범위가 비상했다는 것이었다. 이 부흥의 절정은 1735년 봄, 즉 3월과 4월이었다고 에드워즈는 회고한다. 하루에 네 사람, 일주일에 거의 30명이 회심되는 일이 대여섯 주간 계속되었다.


회심의 과정에 대한 관찰

책의 제2부에서 에드워즈는 성령이 사람들의 마음에 역사하신 방법을 상술한다. 물론, 그는 그 방법의 다양성을 인정했다. 성령이 역사하시는 방법은 “관련된 사람들의 수만큼이나 다양”하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거기에는 또한 많은 점에서 “커다란 유사성”이 있기 때문에 그러한 패턴을 언급할 필요성이 있다고 그는 생각했다. 회심에 있어 첫 번째 단계는 각성이었다. 노샘프턴의 죄인들은 먼저 자신들이 생래적으로 얼마나 비참한 존재인가를 의식하게 되면서 각성되었다. 말하자면, 그들의 영혼이 영원히 멸망할 위험한 처지에 있다는 사실과 그러한 멸망을 피해 신속히 달아나야 한다는 것을 깨닫는 것이 첫 번째 현상이었다. 각성의 속도에는 두 가지가 있었다. 어떤 이들은 갑작스럽게, 어떤 이들은 서서히 각성되었다. 양심에 갑작스런 “찔림”을 얻은 자들은 마치 심장을 “화살이 꿰뚫은” 것처럼 되었다. 점진적인 각성의 경우에는 사람들이 먼저 이전보다 신중해지고 그 후에는 죄에 대한 깨달음을 얻으려 노력한 후 각성이 심화되면 자신의 비참에 대한 의식에 사로잡혔다.


각성의 결과는 두 가지였다. 하나는 즉각 죄악과 방종을 버리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다툼, 중상, 다른 사람의 일에 간섭하는 일을 즉시 중지했다. 술집은 비고 대신 목사관이 붐비게 되었다. 다른 하나의 결과는 구원의 수단을 아주 진지하게 사용하기 시작하는 것이었다. 사람들은 성경읽기, 기도, 묵상, 예배 참석, 소그룹 모임에 큰 열심을 보이기 시작했다. 그들은 “내가 어떻게 해야 구원을 얻으리까”고 부르짖었다.


준비 과정의 다양성

각성 상태에서 사람들이 경험했던 두려움과 괴로움의 정도는 다양했다. 어떤 이들은 처음부터 위로와 소망 가운데 진행했고 어떤 이들은 “저주의 위험”에 대한 두려움이 커 밤잠을 이루지 못할 정도였는데 때로는 그것이 신체에까지 영향을 미쳤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에드워즈는 각성된 죄인이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에 대한 공포의 감정을 가지는 것이 회심과 구원에 필수적인 것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별다른 공포를 느끼지 않고도 아주 신속히 회심한 경우들도 있었다”는 것이다. 회심의 방법상의 다양성을 인정함에 있어 에드워즈는 그 전의 청교도들보다 훨씬 더 개방적이었다. 죄에 대한 깨달음을 가지게 된 “죄인들을 다룸에 있어 하나님은 어떤 특정한 방법에 매이시는 일이 결코 없어 보였다”는 것이 에드워즈의 관찰이었다. 심지어 청교도들에 의해 회심의 은혜를 받기 위해 거의 필수적 준비 작업이라 여겨졌던 “죄에 대한 깨달음” 조차도 에드워즈는 그것이 회심 전에 그리 깊지 않았다 하더라도 회심 후에 훨씬 더 깊게 되는 경우들이 있다고 보았다. 그리고 회심의 은혜를 체험하기 전에 사람들이 죄를 깨닫고 하나님의 진노와 심판을 두려워하는 기간도 천차만별이라고 에드워즈는 적고 있다.


죄에 대한 확실한 깨달음

각성된 죄인들은 점차 자신의 죄를 확실히 그리고 깊이 깨닫게 되었다. 성령이 그들의 사악함과 죄악 됨, 그들의 불충분한 의와 오염, 그리고 무력함을 깨닫게 해 주셨다는 것이다. 죄에 대한 깨달음은 각성의 초기 단계에서는 자신들의 외적 악행이나 죄악들에 집중되었지만, 그 후에는 내적 죄 즉, 마음의 죄에 대한 깨달음이 더 강해졌다. 그들의 부패한 본성, 교만, 불신 등 자신들의 내면에 있는 오염을 보게 되면 그들은 그 더러움을 씻어 내고 깨끗케 되기 위해 애를 쓰기 시작했다. 각성의 초기 단계 즉 옛날 죄를 기억하고 하나님의 진노를 두려워하게 되는 시기에 사람들은 흔히 자기 힘으로 의를 세우려는 율법적 노력에 호소했다고 에드워즈는 적고 있다. 그러나 그러한 율법적 노력은 실패로 돌아가고 만다. 실패가 거듭되는 만큼 실망도 거듭된다. 때로 그들은 그러한 추구를 완전히 포기하고 싶은 유혹을 느끼거나 하나님을 원망하기도 한다.

 

이런 때에 도움이 된 것은 죄인들을 향한 하나님의 무한하신 자비, 그리고 그리스도의 충족성에 대해 과거에 어디선가 읽거나 들은 복음적 내용이었다고 에드워즈는 보고한다. 이것은 죄인들에게 하나님의 말씀을 전할 때 하나님의 용서와 은혜의 메시지도 처음부터 전파되어야 할 필요성을 보여 준다. 결국 죄인들을 구원에 이르게 하는 가장 효과적인 메시지는 율법의 말씀과 은혜의 말씀이 골고루 섞인 것이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했다.


겸비해짐

각성이 구원의 체험으로 연결되는 경우, 이 단계에서 그들은 청교도적 용어로 소위 “겸비해짐”을 체험했다. 하나님이 그들을 영원히 버리시더라도 그것은 “전적으로 정당하고 의로운 행위”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들은 “설령 저주를 받는다고 하더라도 자신들을 대적하시는 하나님의 편에 설 것이며, 그의 정의로우심을 찬양”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은 그것을 “기꺼이 저주받고자 하는 마음”이라고 불렀다. 이 정도에 이르면 그들은 대개 “값없고 충족한 은혜”를 분명히 감지하게 된다고 에드워즈는 말한다.


드디어 은혜를 체험함

율법적으로 겸비해진 사람들에게 은혜가 처음으로 나타날 때의 양상은 아주 다양했다. 이 점에서 앞선 청교도들과 견해가 달랐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이 인간의 영혼에 역사하실 때 “어떤 특정한 단계나 방법”을 따른다고 생각했다. 그 때문에 그들은 “자신들의 체험을 다른 사람들의 규범으로 삼는 경향이 있었다”고 그는 비판한다. 에드워즈는 사람들이 은혜를 체험하는 “무한한 다양성”을 인정했다. 그 중에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것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갈망 속에서 하나님을 알고 사랑하며 그리스도와 교제하고 싶어했다. 이러한 체험이 시작될 때는 다른 경험들이 뒤따라왔다고 에드워즈는 적고 있다. 즉 어떤 이들은 “하나님의 자비와 은혜의 충족성”을 보고, 또 어떤 이들은 그 분의 진실하심과 신실성, 구원하실 수 있는 하나님의 무한한 능력을, 어떤 이들은 하나님이 자신들을 참으로 초청하신다는 것을 깨닫게 되는, 또 어떤 이들은 어떤 특별한 성구가 마음에 머무르면서 위로가 되고, 영혼이 점점 더 만족을 얻었다고 한다.


은혜 받은 자들의 반응

은혜를 받은 사람들은 놀라운 감정적 반응을 보였다. 어떤 사람들은 펄쩍펄쩍 뛰었고, 어떤 이는 갑자기 웃음을 터뜨리면서 눈물이 홍수처럼 흘러내리면서 큰 소리로 울기도 했고, 때로는 큰 소리를 지르면서 큰 감사를 표현했다. 이들은 자기들이 누리게 된 영혼의 그 기쁨과 즐거움의 최고의 탁월성에 경탄했다. 그것은 “지상의 모든 즐거움을 훨씬 능가”하는 것이라고 그들은 평가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지상의 쾌락이 얼마나 헛되고 잡되며 무가치한 것인가를 느끼게 되었다. 그들의 마음은 “하나님과 그리스도의 영광의 탁월성”에 대해 가장 깊은 주의를 기울였다. 종종 “하나님의 사랑에 대한 황홀한 감각”이 거기에 동반되었다. 이러한 은혜 체험을 묘사하는 단어들도 다양했다(보았다, 발견했다, 실감케 하는 확실한 깨달음, 마음의 생생한 혹은 느껴지는 감각).


회심되고서도 그것을 모르고 있는 자들

그리스도를 통해 “영혼의 거룩한 평정”을 누리게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자신들이 아직 회심되었다고 생각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었다고 에드워즈는 적고 있다. 그것은 “영접”에 대한 잘못된 인식 때문이었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그들은 은혜를 발견하고 기뻐하고 순종하는 것이 바로 “영접”임을 몰랐다. “하나님의 자비와 완전한 구원 안에서 그들이 느끼는 달콤한 만족”이야말로 그 자비를 받아들였다는 명백한 증거임을 몰랐다는 것이었다.


은혜의 최초의 움직임이 드러나는 정확한 시간에 관해서는 사람마다 큰 차이가 있다는 것이었다. 어떤 사람들은 그 시각을 쉽게 식별하지만, 어떤 사람들은 그것을 전혀 파악할 수 없다. 그 정확한 때를 모르는 사람들이 많다고 에드워즈는 인정한다. 최초의 은혜를 체험하고 있으면서 그것이 “회심의 은혜”인지 아닌지를 모른다는 것이다. 때로는 그 체험 후 한참이 지나도 그것이 회심이었다고 생각지 않고 있다. 또 많은 사람들이 자신의 회심 날짜를 잘못 잡고 있다. 그 이유는 회심의 체험의 양상이 워낙 다양하기 때문이라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은혜 체험 후에 변화된 모습들

회심의 은혜를 체험한 사람들은 종종 종교적인 일들이 새삼스럽게 느껴졌다. 설교가 새롭게 들린다. 그들은 하나님의 영광과 놀라운 은혜, 예수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사랑에 대한 묵상을 하느라고 몰두한다. 어떤 어린이들은 부모와 세상 전부를 떠나 그리스도와 함께 있고 싶은 마음이 많다고 고백한다. 그리고 온유와 겸손의 영으로 충만하여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 성경만큼 즐거워한 책도 없었다. 그리고 주일만큼 귀히 여김을 받는 시간도 없었다. 예배당만큼 사람들이 원하는 곳도 없었다. 회심자들은 서로에 대한 사랑으로 놀라운 연합을 이루고 있었다. 회심자들은 다른 영혼들의 회심에 대해 지극한 소원을 가졌다.


회심된 자들에게 남아 있는 부패

회심된 자들이 자신들의 영적 상태에 대해 두려움과 의심을 가진 가장 큰 원인은 그들 마음속에 남아 있는 너무나 많은 “부패” 때문이었다. 처음 은혜를 체험할 때 온통 생기로 가득했던 영혼이 차츰 둔감한 상태로 변하기 시작하면 그들은 놀라게 되었다. 교만, 시기, 원한, 복수심 등 아직 자신들 속에 남아 있는 세상적 성향을 발견할 때 그들의 마음은 실망으로 철렁 내려 앉았다. 그리하여 이들은 자신들의 체험이 모두 헛것이며 자기들은 위선자일 뿐이라고 결론짓게 된다. 그들은 자기의 강퍅하고 사악한 마음으로 인해 울부짖는다. 그러나 성령의 영향이 회복되어 은혜의 활발한 움직임이 되살아나면 의심과 두려움은 곧 사라졌다.


에드워즈 교회의 부흥에 대한 주변의 반응

이러한 놀라운 회심의 역사가 진행되고 있을 때 노샘프턴 교회 신자들과 에드워즈는 외부의 오해도 많이 받았다. 어떤 경우에는 그들이 퀘이커교도들과 유사하다고 비난했고, 어떤 경우에는 종말론과 관련해 오해하기도 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자신이 진술하는 이 역사가 과거의 부흥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일이라고 주장했다.

 

부흥의 종결

유감스럽게도 이 특별한 성령의 역사는 오래가지 못했다. 결정적인 사건은 주일 아침에 에드워즈의 이모부인 조셉 홀 리가 자살했다는 소식이 전달되었다. 이유는 영적인 문제에 대한 갈등과 우울증 때문이었다. 그는 노샘프턴 부흥이 시작될 무렵 자기 영혼의 구원 문제에 대해 비상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으나 자신이 구원받을 수 있으리라는 소망을 가지지 못했다. 그리하여 그는 낙심했고 우울증이 급속히 악화되면서 그는 어떤 충고도 받아들이지 않는 상태로 들어가 버렸다. 마귀는 그를 절망적인 상태로 몰아넣었다. 그는 오랫동안 잠을 자지 못했고 마침내 일상 업무를 제대로 처리할 수 없는 지경에 이르렀다. 검시관은 그가 정신착란이었다고 판정했다.


그러나 마을의 젊은이들 중 과거의 해이하고 방종한 생활로 돌아간 자는 하나도 없었다고 에드워즈는 적고 있다. 하나님은 분명히 그들을 “새로운 백성”으로 만드셨다고 에드워즈는 감격했다. 그들은 “사물들에 대한 새로운 감각” 그리고 “예수 그리스도 및 복음의 위대한 일들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전망”을 가지게 되었다. 그들의 마음은 때로 “새로운 달콤함과 기쁨”으로 감동되고 채워졌다. 과거에 기질과 태도가 거칠었던 어떤 이들은 놀랍게 부드러워지고 달콤해졌으며 어떤 이들의 영혼은 “빛, 사랑, 그리고 위로”로 오랫동안 충만했다.

결론적으로, 에드워즈는 코네티컷 골짜기 부흥이 교회사에 나타난 위대한 부흥들의 연장선상에 있는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것은 하나님 자신의 “고유하고 직접적인 일”이라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칼빈주의자답게 그 부흥에서 나타난 영광을 전적으로 하나님의 “전능하신 능력과 주권적 은혜”에 돌린다. 그는 그것에 대한 감사와 찬양으로 말을 맺는다. “우리는 분명히 하나님의 복을 받은 백성들이다! 여기 세계의 이 구석에 하나님이 거하시면서 그의 영광을 나타내셨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유정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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