본문: 고전 2:1-5
1. 예수 그리스도와 십자가에 못 박히심만 알기로 작정하여야 한다.
“내가 너희 중에서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신 것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아니하기로 작정하였음이라”(고전2:2)
복음이 왜 기쁜 소식인가?
예수 그리스도와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심을 전하기 때문이다.
자기 백성을 죄에서 구원하는 예수는 그리스도, 곧 만왕의 왕, 구세주로 오셨다.
그가 십자가에 못 박히심으로 자기 백성들의 죄 사함과 칭의를 이루셨다.
십자가에 못 박히심은 세상 죄를 지고가는 어린 양으로 대속 죄물이 되신 것이다.
그로써 하나님과 화목하게 하셨기에 그 제물은 화목 제물이었다.
십자가에 희생하셨기에 그 제물은 희생 제물이다.
“인자가 온 것은 섬김을 받으려 함이 아니라 도리어 섬기려 하고
자기 목숨을 많은 사람의 대속물로 주려 함이니라”(마20:28,막10:45)
구약의 희생 제사는 오직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의 예표였다.
자기 죄를 짐승의 머리에 안수하여 전가한 후에 그 짐승을 죽이고 그 피를 뿌림으로 용서 받았다.
죄 값은 사망이고, 피 흘림이 없으면 죄 사함이 없기 때문이다.
예수 그리스도가 희생 제물이 되어 피 흘리신 제사는 단번으로 영원한 제사를 드린 것이었다.
그래서 우리의 과거, 현재, 미래의 죄를 다 용서하실 수 있는 것이다.
“오직 그리스도는 죄를 위하여 한 영원한 제사를 드리시고 하나님 우편에 앉으사 --
그가 거룩하게 된 자들을 한 번의 제사로 영원히 온전하게 하셨느니라”(히10:12,14)
교회는 오직 이 진리를, 이 복음을, 전함으로 사람들을 죄에서 구원하도록 가르치고 인도하여야 한다.
교회는 이 진리와 교리를 전하는 터와 기둥이 되어야 한다.
그러할 때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지 못한다.
하나님은 십자가의 도를 전도의 미련한 것으로 전하여 믿는 자들을 구원하시기를 기뻐하셨다.
“유대인은 표적을 구하고 헬라인은 지혜를 찾으나 우리는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전하니
유대인에게는 거리끼는 것이요, 이방인에게는 미련한 것이로되 오직 부르심을 입은 자들에게는
유대인이나 헬라인이나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니라.(고전1:22-24)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
만왕의 왕인 구세주가 어떻게 가장 극형인 십자가에서 죽을 수 있는가?
자기도 못 구원하는 자가 어떻게 인류를 구원한단 말인가?
그래서 장로들과 대제사장들과 서기관들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를 희롱하고 조롱하였다.
“성전을 헐고 사흘에 짓는 자여 네가 만일 하나님의 아들이어든 자기를 구원하고 십자가에서 내려오라”
“그가 남은 구원하였으되 자기는 구원할 수 없도다
지금 십자가에서 내려올지어다 그리하면 우리가 믿겠노라”(마27:40,42)
유대인들은 그리스도라는 표적을 보여주지 못하면 믿을 수가 없었다.
그들은 성경을 보면서도, 재림 그리스도의 권세와 영광스러운 모습의 말씀만 보았지,
초림 그리스도의 고난을 받는 그리스도를 예언한 말씀은 외면하였다.
현대의 유대인들, 현대 교회의 교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축복과 영광을 주는 그리스도만 찬양하지, 십자가에 못 박힌 그리스도는 외면한다.
신앙을 고백한다고,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는 것이 아니다.
주님의 말씀대로 “오직 물과 성령으로 거듭난 자”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하나님이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시는 성령의 역사가 없이는 이 십자가의 도를 믿을 수가 없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14)
이방인들이나 지혜를 구하는 헬라인들이 보기에는 십자가의 도가 미련하게 보일 수밖에 없다.
그것이 인간 본성의 어리석음이요 과학과 이성의 한계인 것이다.
현대인은 사두개인들처럼 도무지 영적인 세계, 영적인 존재를 믿지 아니한다.
그래서 하나님과 그분의 역사를 믿지 못하고, 사탄과 그 권세를 믿지 못하는 것이다.
십자가의 도가 오직 부르심을 받은 자들에게는 하나님의 지혜가 되고 하나님의 능력이 된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십자가의 도가 하나님의 지혜이고 진리인 것을 알게 된다.
성령의 역사하심으로 그 도를 믿게 됨으로 회심(죄를 회개하고 그리스도를 영접함)하고
새로운 존재로 변화되는 하나님의 능력을 경험하게 된다.
2, 하나님의 증거는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으로 전하는 것이 아니다.
“형제들아 내가 너희에게 나아가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아니하였나니”
“내 말과 전도함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로 하지 아니하고”(고전2:1,4)
거듭나지 못한 교인들과 세상 사람들은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좋아한다.
육에 속하여 하나님의 영을 받지 못하였기 때문이다.
세상의 교육과 영상 매체들은 듣기 즐겁고 아름다운 지혜의 경쟁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으로 출세하고 돈 벌고 원하는 것을 다 이루고자 한다.
그러나 세상 지혜로는 하나님을 알 수도 없고 그 배후에는 사탄의 권세가 도사리고 있다는 것이다.
영혼에는 독이 될 뿐이고, 심판을 받고, 지옥에서 영벌을 받는 귀결이 기다리고 있다.
주님은 날마다 잔치하며 호화스러운 생활을 했던 부자가 죽어서는
혀를 서늘하게 해줄 물 한 방울을 구하며 지옥에서 고통스러워하는 비유를 말씀해 주셨다.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를 들어가는 것이 더 쉽다고 하셨다.
세상의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으로는 복음의 진리도 지옥의 참상도 알 수가 없다.
오늘날 교회가 타락하여 세상화 되고 세속화 되어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이 주류를 이루고 있다.
복음 진리를 전해야 할 목사들이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 지혜의 아름다운 것을 전하고 있다.
교인들은 그것을 좋게 여기고 그들에게로 몰려들고 있다.
멸망으로 인도하는 문은 크고 길이 넓어 그리로 가는 자가 많다고 하셨다.
거짓 선지자(목사)들을 삼가라고 하셨다.
그들이 양의 옷을 입고 나아오나 속에는 노략질하는 이리가 들어있다고 하셨다.
열매를 보면 알 수 있다고 하셨는데도, 열매는 아랑곳하지 않고,
오직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에, ‘설득력 있는 지혜의 말’에 현혹되고 있다.
그 점에 있어서는 가방끈이 긴 자나, 짧은 자나 초록이 동색이다.
베뢰아 사람들처럼 사도가 전하는 설교나 가르침일지라도
그러한가 하여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여야 한다.
그것이 참된 그리스도인이 해야 하는 가장 중요한 의무와 책임이다.
날마다 성경을 상고하질 않으니,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 것에, 설득력 있는 지혜에 넘어가고 멸망의 길로 가는 것이다.
사람들의 미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너희가 사람의 미혹을 받지 않도록 주의하라 많은 사람이 내 이름으로 와서 이르되
나는 그리스도라 하여 많은 사람을 미혹하리라”(마24:4-5)
“(그때에) 거짓 선지자가 많이 일어나 많은 사람을 미혹하겠으며 불법이 성하므로
많은 사람의 사랑이 식어지리라 그러나 끝까지 견디는 자는 구원을 얻으리라”(마24:11-13)
영적인 일은 영적으로라야, 곧 오직 성령과 성경으로라야 분별할 수 있다.
오늘날 교회 안에 난무하는 철학과 헛된 속임수, 온갖 교훈의 풍조에 섞이거나 흔들리지 않아야 한다.
바울 사도는 하나님의 증거를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지 않았다고 강조하고 있다.
그 위험성과 허구와 거짓을 알기 때문이다.
그 당시에도 교회 안에 수많은 사람들이 하나님의 말씀을 그렇게 혼잡하였다고 말하고 있다.
“우리는 수많은 사람들처럼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지 아니하고
곧 순전함으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하나님 앞에서와 그리스도 안에서 말하노라”(고후2:17)
순전한 하나님의 말씀을 혼잡하게 하는 주범이 바로 설득력 있는 지혜와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이다.
오늘날 형통복음 믿음신학을 전하는 목사들이 얼마나 잘 팔리고 있는지 모른다.
대형교회를 초스피드로 이루고 초베스트 셀라의 작가가 되고 대형 집회와 티비 집회를 석권하고 있다.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에 끌리고 있다면,
돌아보고 회개하고 순전한 말씀에로 돌아와야 한다.
가시나무에서 포도를, 엉겅퀴에서 무화과를 딸 수 없다.
주님의 말씀이다.
“나더러 주여 주여 하는 자마다 다 천국에 들어갈 것이 아니요
다만 하늘에 계신 내 아버지의 뜻대로 행하는 자라야 들어가리라
그 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 그 때에 내가 그들에게 밝히 말하되
내가 너희를 도무지 알지 못하니 불법을 행하는 자들아 내게서 떠나가라 하리라”(마7:21-23)
이 땅에서 일어나고 있는 무섭고 놀라운 일에 참여하지 말고, 그 포로가 되지 말아야 한다.
거짓 목사들의 설교에, 거짓 목사들의 권력에, 다수 교인들의 미혹에 넘어가지 말아야 한다.
주님의 순전한 말씀을 듣고 행하는 자가 그 집을 반석위에 지은 지혜로운 사람이다.
성경을 읽어야 한다. 영혼의 양식으로 먹어야 호흡해야 내 영혼이 산다.
성경을 연구해야 한다. 좋은 참고서를 함께 보아야 한다.
진정한 그리스도인은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입에서 나오는 말씀으로 산다.
의인은 믿음으로 말미암아 살리라.
그 믿음은 오직 하나님의 말씀을 들음으로만 견고해질 수 있다.
성경을 즐거워하고 주야로 묵상하는 자가 복 있는 사람이다.
성경을 입에서 떠나지 말게 하고 그대로 행하는 자가 하는 일마다 형통하게 된다.
3. 하나님의 증거는 성령의 나타남과 능력으로만 전해야 한다.
“내가 너희 가운데 거할 때에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었노라 ---
다만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하여
너희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다만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하려 하였노라”(고전2:3-5)
말과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는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 필요가 없다.
거짓 선지자들이 얼마나 강하고 담대하고 자신만만해 하는지를 보면 알 수 있다.
하나님의 증거를 전할 때에는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어야 하는 것이 정상이다.
하나님의 말씀을, 하나님의 강단에서, 하나님을 예배하면서, 하나님을 대신하여 전하는데,
어찌 자신의 힘과 지혜에 의지하여 강하고 담대할 수 있겠는가?
순전한 말씀은 하나님 앞에서 그리스도 안에서 하나님께 받은 것 같이 전하는 것이다.
오직 성령을 구하고 의지하여 그분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전하는 것이다.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전할 때에만 듣는 자들의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된다.
그렇지 않고 사람의 지혜의 아름다운 것으로 전하게 되면
듣는 자들의 믿음은 사람의 지혜에 머물고 말 것이다.
사람의 지혜에 있게 되면 그 영혼은 세상으로 흘러가고 육신의 정욕, 사탄의 포로가 되고 말 것이다.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이라고 하니까,
그것을 구하기 위해 산으로 기도원으로, 성령 집회라고 하는 것에 가라는 것이 아니다.
대체로 그러한 곳에 가서 받았다고 하는 것들은 사탄의 나타나심과 그 능력인 것을 알 수가 있다.
그들이 내놓는 열매를 보면 성령의 열매가 아니고 아주 현저한 육체의 열매들 뿐이기 때문이다.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은 오직 그분이 기록한 순전한 말씀 안에 있다.
그리고 거듭난 영혼 안에, 영혼 위에 함께 역사하고 계신다.
말씀을 떠나 경건과 은사 또는 신비체험을 구하던 자들은 교회 역사에서 하나 같이 이단으로 떨어졌다.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도 그 열매로 알 수 있다.
“오직 성령의 열매는 사랑과 희락과 화평과 오래 참음과 자비와 양선과 충성과 온유와 절제니
이같은 것을 금지할 법이 없느니라 그리스도 예수의 사람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았느니라 만일 우리가 성령으로 살면 또한 성령으로 행할지니
헛된 영광을 구하여 서로 노엽게 하거나 서로 투기하지 말지니라”(갈5:22-26)
이 아홉 가지 열매를 맺는 사람들이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으로 사는 사람들이다.
그들은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는다.
육체와 함께 그 정욕과 탐심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다면 그 성령은 의심스러운 것이다.
성령의 역사와 육체의 열매들은 함께 할 수가 없기 때문이다.
성령으로 행하면 육체의 욕심을 이룰려고 하지 않는다.
육체의 소욕은 성령을 거스르고 성령은 육체를 거스린다.
“육체의 일은 분명하니 곧 음행과 더러운 것과 호색과 우상 숭배와 주술과 원수 맺는 것과
분쟁과 시기와 분냄과 당 짓는 것과 분열함과 이단과 투기와 술 취함과 방탕함과 또 그와 같은 것들이라 —
이러한 일을 하는 자들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지 못할 것이요”(갈5:19-21)
분명한 육체의 일로 가득한 사람이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 운운하는 것은 소도 하품할 일이다.
그런데도 영적인 분별력이 없는 사람들은 그들의 집회에 설교에 홀라당 넘어가고 있다.
그리고 그 거짓 선지자들에게서 확실한 육체의 영향을 받고 와서 그들 자신도 육체의 일들만을 행한다.
그로 인하여 하나님의 이름이 믿는다는 자들 때문에 모독을 받고 영광을 가리게 된다.
열심이 있으면 뭘하며 성령을 입에 달고 다니면 무슨 소용이 있는가?
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기 때문에 자기 의를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에 힘써 복종하지 않을 뿐이다.
성경을 제대로 배울려고 하지 않는 이들이 아주 쉽게 빠지는 현상들이다.
성경을 배우기는 싫어하고 시간이 없는 사람들이 다른 일에는 열광하고 시간 바치기를 즐거워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주님 말씀하시지만, 넓은 문으로만 달려가는 것이 문제이다.
육체와 마음의 원하는 대로 살면 공중권세 잡은 악한 영의 포로가 되고 만다.
사도 바울은 약하고 두려워하고 심히 떨면서 하나님의 증거를 전하였다.
우리도 하나님의 말씀을 이러한 마음으로 살아야 한다.
예수 그리스도와 그의 십자가에 못 박히심 외에는 아무 것도 알지 않기로 작정해야 한다.
십자가에 못 박히신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믿음 중심에, 우리 영혼 중심에, 자리잡아야 한다.
세상의 아름답고 화려한 다른 것들이, 그것들에 대한 욕구가, 중심에 자리하면 구원은 흘러가고 말 것이다.
빛의 자녀들처럼 모든 착함과 의로움과 진실함으로 살아야 한다.
사람의 말과 지혜의 아름다움을 좋아하면 우리의 믿음은 사람의 지혜에 머물고 말 것이다.
오직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을 구하고 의지해야 우리의 믿음이 하나님의 능력에 있게 된다.
성령이 친히 쓰신 성경을 사랑하고 즐거워하고 그대로 사는 것이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을 힘입게 된다.
그렇게 하지 않기에 음부의 권세가 교회를 이기고 사탄의 권세가 교회를 분탕질하고 있다.
순전한 진리의 복음로 터고 삼고 기둥으로 세워 음부의 권세를 이겨야 할 교회가 말이다.
하나님의 교회는 티나 주름잡힌 것이 없이 거룩하고 영광스러운 교회로 세워져야 한다.
물로 씻어 말씀으로 깨끗하게 하고 거룩하게 해야 한다.
성령의 나타나심과 능력이 교회 안에 내 안에 머물게 해야 한다.
우리의 믿음이 사람의 지혜에 있지 아니하고 하나님의 능력에 있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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