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장 우리는 어떻게 교리를 발견하는가
(요일 2:18-21) 18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19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21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
이 구절에 주목하는 이유는 성경이 가르치는 구체적인 교리들을 다루기에 앞서 또 하나의 일반적인 원리를 고찰해 봐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우리는 교리 자체로서의 교리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인도하는 교리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무한한 은혜와 인자하심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창조와 역사와 섭리에서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하게는 우리가 성경이라 부르는 이 책에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어서 우리는 영감에 대해 몇 가지 사항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사실로 인해 던지는 질문은 성경과 그것이 담고 있는 계시는 신뢰할 만한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살펴본 후에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책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우리는 성경 자체가 축자 영감의 교리라고 알려진 그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과 실천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성경이 완전하고, 최종적이며, 무오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Ⅰ 왜 이 주제를 살펴보아야 하는가
성경은 진술된 교리들의 모음이 아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많은 역사가 있습니다. 왕들, 왕자들, 탄생들, 죽음들, 결혼 이야기들 등에 대해 많은 것이 나와 있습니다. 성경이 그저 명확하게 진술한 교리들의 모음이라면, 전혀 어려움이 없을 것이며, 우리는 1페이지를 찾아서 첫 번째 교리를 보고, 그것을 해설하고 함께 살펴보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질문이 제기됩니다. 성경에서 이런 교리들을 어떻게 찾아야 합니까? 교리들을 발견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나는 교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성경만 읽습니다. 교리에 대한 논증은 저 똑똑한 사람들이나 마음껏 하라고 하십시오. 나는 성경만 있으면 족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결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매우 어리석고 실로 우스꽝스런 말입니다. 성경을 접한 사람들은 그것을 읽은 결과 뭔가를 믿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사람들이 믿어야만 하는 바를 믿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에 매우 널리 퍼져 있는 사이비 종교들은 그들 종교가 성경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것을 다 믿어요. 우리의 가르침은 성경에 기초하고 있지요.’ 실제로 이 사람들 중 일부는 성경을 매우 잘 아는 듯이 보입니다. 그래서 그저 성경을 믿기 때문에 그들이 믿는 것을 당신은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든 구원하기 원한다면, 이 사람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참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성경에서 교리를 발견하는 방법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들이 어떤 점에서 잘못되었고 어떤 점에서 성경적이 아닌지 설명하고, 그들이 자기 잘못의 원인을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만 합니다.
초대 교회가 바로 그런 위치에 서 있었습니다. 기독교 교회에는 진리를 믿는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의 말에 따르면 그들 중 일부는 떠나간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함이니라”(요일 2:19). 그들은 다양한 모습의 오류와 이단성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상황도 초대 교회의 그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들이 무엇을 믿으며 왜 그것을 믿는지 알아야 할 의무가 현재와 같이 심각하게 요구되었던 적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교리에 대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가 권위 있고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으로 믿고 있는 책, 즉 유일무이한 방법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신탁,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이 책으로부터 교리를 찾아 낼 수 있는 것일까요?
Ⅱ이성, 오성, 지성의 역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첫 번째로 다루어야 할 것은 이성(reason), 오성(understanding), 지성(intellect)이 이 문제에서 차지하는 위치입니다. 이성만으로는 아무도 하나님께 이를 수 없다는 것과 지성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고전 1:21). 전후 시대에 그토록 높게 평가되었던 인간이 이제는 그들의 정신과 이성의 전적인 무능함을 드러내 보이고 있고, 정신과 이성을 넘어서는 무언가의 필요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개념을 다소 다른 방식으로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몇 가지 명제의 형태로 여러분에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1 우리의 최종적 권위는 성경이다
우리가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계시의 모든 문제에 대하여 성경이 우리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권위라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존 웨슬리의 표현처럼 ‘한 책’의 사람이 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여기에 나의 유일한 근원, 나의 유일한 권위가 있습니다.
2 우리는 성경에 완전하게 복종해야 한다
이 말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성경과 그 교리를 읽을 때는 스스로에게 지금 나의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는 영역에 들어가고 있노라고 말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분명히 나의 이해력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들을 다루게 될 것입니다. 계시라는 말 자체가 분명히 이와 같은 사실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시도하고 있는 일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그분에 관한 교리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진리는 우리의 이해의 범주를 넘어설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대등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만일 내 생각이 하나님의 대한 진리를 이해하고 거기에 미칠수 있다고 한다면 내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동등한 것이 될 것이고, 그것은 분명 완전히 잘된 말입니다.
예를 들어, 다음 강의에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교리를 다룰 것입니다. 당연히 이것은 어느 누구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교리입니다. 이 교리를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이 사실에 동의합시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성경을 펼쳐 들고 지적 자살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것은 다만 이성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이성은 우리를 계시의 영역에 들어갈 때까지 이끌어 주며, 거기에서 하나님은 자비 가운데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두 번째 요점은 우리가 진리들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완전히 설명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 진리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는 당연한 사실에 동의할 뿐 아니라, 어떤 교리에 직면했을 때 그것이 성경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떠나 그 교리를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다른 무엇보다 철학과 계시를 뒤섞으려는 끊임없는 유혹을 온 힘을 다해 피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특정한 교리들을 거부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혹은, 그 교리들을 아예 거부하지는 않지만 성경이 그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믿기를 주저합니다. 사람들이 특정한 진술을 접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기꺼이 믿겠습니다.’라고 말하기보다는,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어떻게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일 수 있단 말이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 순간 이 사람들은 철학자로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문제는 자유주의자가 기적에 대해 취하는 것과 똑같은 행동을 복음주의자도 행합니다. 우리는 기적의 문제에 대해서는 대부분 올바른 태도를 취하지만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예정과 선택의 교리에 대해서는 자유주의자가 자신의 철학을 내세우는 것과 같이 똑같은 논증을 펼칩니다. ‘그 말이 맞다면 도대체 하나님이 어떻게 공평하시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러므로 이 주의 사항은 우리 모든 사람에게 적용해야만 합니다. 나는 나와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 교리를 믿는 일을 주저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또한 내가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교리를 거부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리이고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라면, 내가 이해하든 못하든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3 자신의 논리와 체계를 지나치게 강조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완벽한 체계를 갖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것은 철학자들이 언제나 완전한 전체를 원하고,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기를 원하고, 모든 것을 진술할 수 있기를 원하기 때문이며, 우리는 그와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 자신의 논리나 체계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성경의 가르침을 넘어서 버리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다시 죄와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진술을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의 체계를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성경의 한 구절이라도 축소하거나 무시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4 이성, 오성, 지성의 역할에 대한 결론
우리는 성경의 권위에 우리 자신을 복종시켜야 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인도와 영감, 그리고 조명에 대해서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다른 책을 읽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성경을 읽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방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성령이 나를 깨우치시고 조명해 주셔서 오류와 미묘한 위험들을 피해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 후에야 성경으로 나아가 이미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는 마음, 그리고 성령에 의해 깨우침을 받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성경의 교리들을 발견해 나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Ⅲ 교리에 도달하는 방법
성경은 단순히 교리들의 모음집이 아니라는 것을 상키시고자 합니다. 그저 몇 개의 성경 구절을 열거한다고 해서 성경의 교리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효과를 거둘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교리에 도달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제가 제안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모아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특정한 주제를 언급하는 모든 성경 구절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모은 구절들을 서로 대조해 본 후 그 기저에 놓여 있는 교리들을 발견하려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작업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들이 제기하고 있는 교리는 무엇입니까? 이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이 모든 구절에서 공통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의 교리입니다.
1 교리를 발견해 나갈 때 지켜야 할 일반적 규칙
1> 교리는 성경에 명확하게 기술된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믿는다고 주장하는 모든 교리는 언제나 성경에 명확하게 기술된 것이어야 합니다. 성경으로 그 교리를 증명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가 주장하는 교리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거나 성경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증할 수 없을 경우에는 그 교리를 거부해야 합니다. 누가 그 말을 하는지, 혹은 그가 얼마나 엄청난 체험을 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말이 성경에서, 그리고 성경으로 확증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2>교리는 오로지 성경으로부터 온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교리는 오로지 성경적인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명백히 성경 밖에서 온 모든 교리를 거부해야 할 뿐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성경적이고 나머지는 다른 무엇인가부터 온 교리 역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교리의 근원은 순수하고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성경이어야 합니다. 철학의 성향-슬며시 기어들어오는-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요점입니다.
3> 교리는 명료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개신교의 선조들이 사용했던 중요한 어휘입니다. 그들은 성경 교리의 명료성(perspicuity)으로 참된 성경교리는 언제나 평이하고 명백하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자체가 도처에서 명료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전제합니다.
성경이 어떤 사람들을 향해 씌어진 것인지 상기해 보지 않은 채 성경 연구에 착수하면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바울서신서들이 철학자나 대학교수를 향해 씌어진 것이 아니라 노예들과 평민들, 보통 사람들에게 씌어진 사실입니다.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지혜로운 자가 많이 아니하며......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에베소서와 골로새서 등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씌어진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이 서신서들을 썼을 때, 그는 그 들을 받는 사람들이 당연히 자기의 글을 이해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조들이 성경의 명료성이란 말을 사용했을 때 의미했던 바입니다.
언제나 헬라어나 히브리어 단어의 뜻에 의지해 자신들의 교리를 전개해나가는 사람들을 볼 때 그 태도는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으로부터 교리의 의미를 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 어떤 특별한 권위의 지도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가름침은 필요치 않다고 합니다.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디고 거짓이 없나니.....”(요일 2:27). 그래서 우리는 보통 사람들은 성경을 읽기에 적합하지 않고 오직 가톨릭 교회만이 성경을 바르게 해설할 수 있다고 하는 로마가톨릭의 주장을 거부합니다. 같은 이유로 우리에게 이해하기 쉽고 정확한 번역본이 주어진 한,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 어떤 특별한 철학이나 언어학적 이해, 혹은 다른 언어에 대한 지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도 완전히 거부합니다. 똑똑하고 철학적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신학은 당연히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교리의 명료성을 믿습니다.
2 실제적인 지침
이상이 일반적 규칙들입니다. 지금부터는 특별 규칙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들을 한 곳에 모았으니 이제 어떻게 할까요? 해야 할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때로는 성경 구절들로부터 교리를 추론하는 일이 상당히 간단할 수도 있습니다. 이 구절들을 읽고 의미를 이끌어 내는 방법인 연역법입니다.
하지만 귀납법이라고 부르는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예로 들어 봅시다. 성경 어디에도 암시적으로 삼위일체 교리가 진술된 곳은 없습니다. 하지만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에 대해 언급한 구절들을 접하게 되면 여러분은 스스로 이 구절들을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세 위격이시라는 삼위일체 교리의 증거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특정한 구절들로부터 교리를 세워 나가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연역과 귀납이라는 두 과정을 통해 교리에 도달합니다.
1> 단 구절만으로 교리를 이끌어 내면 안된다
이렇게 해서 잘못된 길로 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한 구절의 절반에만 의존하여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절반의 구절만 그들의 의견과 일치했기 때문에 나머지 반을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이런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2>다른 성경과 모순을 일으키는 결론을 끌어내면 안된다
우리는 언제나 성경과 성경을 비교해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딤후 2:15). 그것이 성경의 권고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교리에 도달했는데 그 교리가 성경의 다른 명확한 진술과 모순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면, 그 교리가 분명히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의 위대한 메시지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완벽한 전체를 형성하기 때문에 한 부분이 다른 부분과 모순을 일으키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사의 큰 인물들이 이 간단한 규칙을 잊어보리는 바람에 주요한 이단이 되어 버린 일이 많았는지 아시면 놀라실 겁니다.
Ⅳ 교리의 대한 의견의 차이
‘목사님이 지금까지 말씀해 오신 것들에 비추어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인 모든 성경 교리에 대해 다른 그리스도인과 일치된 의견을 갖는 것이 당연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 간에 의견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만큼 분명한 것도 없을 텐데요. 이걸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1의견차가 발생하는 이유
1>잘못된 방법으로 이끌어 낸 교리
자신의 철학을 끌어들이거나, 단 하나의 본문, 혹은 본문의 절반에만 근거해 교리를 만들어내는 등의 잘못을 저지릅니다. 사람들이 이런 일을 계속한다면,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기에 의견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고, 결국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학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2> 기존의 이론에 교리를 끼워 맞추는 경우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자기 자신의 이론을 이미 가지고 있는 채로 출발하려는 경향이 있고, 그렇게 시작한 후에는 성경을 자신의 이론에 끼워 맞추려 합니다. 이 점이 바로 로마가톨릭이 범하는 오류의 핵심입니다. 많은 개신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습니다. 자유의지나 특정한 이론을 가지고 출발한다면, 그 사람은 어떤 성경의 교리들에 대해서는 어려움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확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선입견이나 편견, 철학적 이론들을 개입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것이 분쟁과 논쟁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대단히 많습니다.
3>확실치 않은 사실에 대한 독단적 주장
사람들이 교리에 대한 차이를 보이는 또 다른 이유는 확실치 않은 세부 사항에 대해 자신들만의 이론을 만들어 내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언’이란 주제를 다룰 때 가장 위험한 점이 이런 잘못을 범하는 것일 겁니다. 우리는 예언을 누구도 완전히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는 세부적인 설명들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성경으로 입증할 수 없는 이론을 만들어 낼 권리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4>지나친 문자적 해석
또 다른 어려움의 원인은 사람들이 명백히 상징적인 의도로 씌어진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길 고집한다는 것입니다. 예들 들어, 로마가톨릭교도와 토론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에 분명히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고 말하여 문자적 해석의 문제들 다루도록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상징적인 의도로 기록된 것을 문자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상징적인 의미인 요한계시록과 같은 책에 대해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을 많이 만나 보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상징을 문자적으로 취급하는 바람에 얼마나 많은 심각한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는지요.
5>분파주의와 편견
단지 우리가 어려서부터 익숙하게 들어 왔고, 또 우리 조상들이 그렇게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특정한 편견을 가진 채 출발하거나,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편견을 변호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교파주의의 가장 끔찍한 재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파 정신으로부터, 그리고 언제나 분파 정신의 특징으로 나타나는 편견들로부터 해방되도록 기도합시시다.
2 성경에는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들이 존재한다
성경에는 그 경건성이나 능력이 동등한 사람들 사이에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일치할 수도 없는 그런 문제들이 존재합니다. 이런 문제들 만났을 때는 분명히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우리는 그런 문제들을 입증할 수 없으며 장차 우리가 영광에 이르러 모든 것이 명백하고 분명하게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지금 이순간에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고전 13:12)하게 부분적으로 알고 이해합니다. 우리의 지식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최종적이지 않습니다. 주어진 계시로 만족하도록 합시다.
3 반드시 알아야 하는 최종적이며 절대적인 교리도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가 완전하게 알고 있고, 또 알아야만 하는 확실한 교리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길에 필수적인 교리들입니다. 구원의 절차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에 이르러서는 경건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종종 의견이 나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이런 일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서,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서,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과 문자적, 육체적인 부활에 대해서는 어떤 이의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 문제들에 대해서는 어떤 논쟁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 교리는 최종적이며 또한 절대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최종적이거나 절대적인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다른 모든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상대의 말을 들어 줍시다. 관용하도록 합시다. 우리에게 이러한 문제을 입증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고, 우리 모두가 참여하는 위대한 구원을 함께 누리며, 장차 감추어진 일들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주님이 우리를 아시듯 우리가 알게 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합시다.
(요일 2:18-21) 18 아이들아 지금은 마지막 때라 적그리스도가 오리라는 말을 너희가 들은 것과 같이 지금도 많은 적그리스도가 일어났으니 그러므로 우리가 마지막 때인 줄 아노라 19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 함이니라 20 너희는 거룩하신 자에게서 기름 부음을 받고 모든 것을 아느니라 21 내가 너희에게 쓰는 것은 너희가 진리를 알지 못하기 때문이 아니라 알기 때문이요 또 모든 거짓은 진리에서 나지 않기 때문이라
이 구절에 주목하는 이유는 성경이 가르치는 구체적인 교리들을 다루기에 앞서 또 하나의 일반적인 원리를 고찰해 봐야 하는 이유가 무엇인지 정확히 보여주기 때문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을 아는 지식입니다. 우리는 교리 자체로서의 교리에 관심이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를 하나님을 아는 지식으로 인도하는 교리에만 관심이 있습니다. 그러므로 문제는 어떻게 하나님을 알 수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우리 자신의 노력으로 하나님께 도달할 수 없습니다. 하나님이 자신을 계시하셔야만 합니다. 그리고 그분은 무한한 은혜와 인자하심으로 그렇게 하셨습니다.
창조와 역사와 섭리에서뿐만 아니라, 가장 중요하게는 우리가 성경이라 부르는 이 책에서 그렇게 하셨습니다. 이어서 우리는 영감에 대해 몇 가지 사항을 살펴보았습니다. 이 사실로 인해 던지는 질문은 성경과 그것이 담고 있는 계시는 신뢰할 만한가 하는 것입니다. 이 문제를 살펴본 후에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책이라는 결론에 도달했습니다. 우리는 성경 자체가 축자 영감의 교리라고 알려진 그 사실을 가르치고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믿음과 실천의 모든 문제에 있어서 성경이 완전하고, 최종적이며, 무오하다는 사실을 받아들입니다.
Ⅰ 왜 이 주제를 살펴보아야 하는가
성경은 진술된 교리들의 모음이 아님을 발견하게 됩니다. 거기에는 많은 역사가 있습니다. 왕들, 왕자들, 탄생들, 죽음들, 결혼 이야기들 등에 대해 많은 것이 나와 있습니다. 성경이 그저 명확하게 진술한 교리들의 모음이라면, 전혀 어려움이 없을 것이며, 우리는 1페이지를 찾아서 첫 번째 교리를 보고, 그것을 해설하고 함께 살펴보기만 하면 될 것입니다. 하지만 성경은 그렇게 단순하지가 않습니다.
그러므로 이런 질문이 제기됩니다. 성경에서 이런 교리들을 어떻게 찾아야 합니까? 교리들을 발견하는 방법은 무엇입니까? ‘나는 교리에는 관심이 없습니다. 나는 성경만 읽습니다. 교리에 대한 논증은 저 똑똑한 사람들이나 마음껏 하라고 하십시오. 나는 성경만 있으면 족합니다.’라고 말하는 것으로 결코 충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매우 어리석고 실로 우스꽝스런 말입니다. 성경을 접한 사람들은 그것을 읽은 결과 뭔가를 믿어야만 하기 때문입니다. 문제는 그 사람들이 믿어야만 하는 바를 믿고 있는가 하는 것입니다.
오늘날 세계에 매우 널리 퍼져 있는 사이비 종교들은 그들 종교가 성경에 기초하고 있다고 주장합니다. 그들은 말합니다. ‘물론 우리는 성경에서 말하는 것을 다 믿어요. 우리의 가르침은 성경에 기초하고 있지요.’ 실제로 이 사람들 중 일부는 성경을 매우 잘 아는 듯이 보입니다. 그래서 그저 성경을 믿기 때문에 그들이 믿는 것을 당신은 믿지 않는다고 말하는 것은 아무 소용이 없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어떻게든 구원하기 원한다면, 이 사람들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 되고 참으로 하나님을 알게 되기를 원한다면 우리는 성경에서 교리를 발견하는 방법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들이 어떤 점에서 잘못되었고 어떤 점에서 성경적이 아닌지 설명하고, 그들이 자기 잘못의 원인을 이해하도록 도울 수 있는 위치에 있어야만 합니다.
초대 교회가 바로 그런 위치에 서 있었습니다. 기독교 교회에는 진리를 믿는다고 주장하는 많은 사람이 있었습니다. 하지만 요한의 말에 따르면 그들 중 일부는 떠나간 자들이었습니다. “그들이 우리에게서 나갔으나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하였나니 만일 우리에게 속하였더라면 우리와 함께 거하였으려니와 그들이 나간 것은 다 우리에게 속하지 아니함을 나타내려함이니라”(요일 2:19). 그들은 다양한 모습의 오류와 이단성을 보이고 있었습니다.
오늘날의 상황도 초대 교회의 그것과 마찬가지입니다. 또한 하나님의 백성에게 그들이 무엇을 믿으며 왜 그것을 믿는지 알아야 할 의무가 현재와 같이 심각하게 요구되었던 적은 일찍이 없었습니다. 우리가 어떻게 교리에 대한 지식에 도달할 수 있습니까? 우리는 무엇을 해야 합니까? 우리가 권위 있고 하나님의 영감을 받은 것으로 믿고 있는 책, 즉 유일무이한 방법으로 계시된 하나님의 신탁, 하나님의 말씀, 하나님의 진리가 우리에게 주어졌습니다. 과연 어떻게 해야 이 책으로부터 교리를 찾아 낼 수 있는 것일까요?
Ⅱ이성, 오성, 지성의 역할
원하든 원하지 않든 첫 번째로 다루어야 할 것은 이성(reason), 오성(understanding), 지성(intellect)이 이 문제에서 차지하는 위치입니다. 이성만으로는 아무도 하나님께 이를 수 없다는 것과 지성만으로 충분치 않습니다. “이 세상이 자기 지혜로 하나님을 알지 못하므로”(고전 1:21). 전후 시대에 그토록 높게 평가되었던 인간이 이제는 그들의 정신과 이성의 전적인 무능함을 드러내 보이고 있고, 정신과 이성을 넘어서는 무언가의 필요성을 드러내고 있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개념을 다소 다른 방식으로 강조하고 싶습니다. 그래서 그것을 몇 가지 명제의 형태로 여러분에게 제시하는 것입니다.
1 우리의 최종적 권위는 성경이다
우리가 첫 번째로 해야 할 일은 계시의 모든 문제에 대하여 성경이 우리의 완전하고 최종적인 권위라는 사실에 동의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먼저 존 웨슬리의 표현처럼 ‘한 책’의 사람이 되기로 결심해야 합니다. 여기에 나의 유일한 근원, 나의 유일한 권위가 있습니다.
2 우리는 성경에 완전하게 복종해야 한다
이 말에는 특별한 의미가 있습니다. 첫째, 성경과 그 교리를 읽을 때는 스스로에게 지금 나의 이해의 범주를 넘어서는 영역에 들어가고 있노라고 말하는 것으로 시작해야 합니다. 분명히 나의 이해력의 범위를 넘어서는 일들을 다루게 될 것입니다. 계시라는 말 자체가 분명히 이와 같은 사실들을 함축하고 있습니다. 우리가 시도하고 있는 일은 하나님을 아는 것이며 그분에 관한 교리를 연구하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이러한 진리는 우리의 이해의 범주를 넘어설 수밖에 없습니다. 만일 내가 하나님을 이해할 수 있다고 한다면, 그것은 하나님과 대등한 존재라는 의미입니다. 만일 내 생각이 하나님의 대한 진리를 이해하고 거기에 미칠수 있다고 한다면 내 생각은 하나님의 생각과 동등한 것이 될 것이고, 그것은 분명 완전히 잘된 말입니다.
예를 들어, 다음 강의에서 우리는 삼위일체의 교리를 다룰 것입니다. 당연히 이것은 어느 누구도 도저히 이해할 수 없는 교리입니다. 이 교리를 살펴보기에 앞서 먼저 이 사실에 동의합시다. 하지만 이렇게 하는 것이 성경을 펼쳐 들고 지적 자살을 하는 것이라고 생각해서는 절대로 안 됩니다. 그것은 다만 이성에는 한계가 있음을 인정한다는 의미입니다. 우리의 이성은 우리를 계시의 영역에 들어갈 때까지 이끌어 주며, 거기에서 하나님은 자비 가운데 우리에게 자신을 나타내시기를 기뻐하십니다.
두 번째 요점은 우리가 진리들을 이해하지 못하거나 완전히 설명하지는 못한다 하더라도 그 진리들을 받아들여야 한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우리는 모든 것을 이해할 수는 없다는 당연한 사실에 동의할 뿐 아니라, 어떤 교리에 직면했을 때 그것이 성경에 있는 것이라면 우리가 이해할 수 있는지의 여부를 떠나 그 교리를 받아들여야만 합니다.
다른 무엇보다 철학과 계시를 뒤섞으려는 끊임없는 유혹을 온 힘을 다해 피해야만 합니다. 우리는 언제나 특정한 교리들을 거부할 준비가 되어 있습니다. 혹은, 그 교리들을 아예 거부하지는 않지만 성경이 그것을 분명히 가르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렇게 믿기를 주저합니다. 사람들이 특정한 진술을 접하게 되었을 때 ‘나는 그것을 이해할 수는 없지만 기꺼이 믿겠습니다.’라고 말하기보다는, ‘만일 그게 사실이라면, 어떻게 하나님이 사랑의 하나님일 수 있단 말이오?’라는 식으로 말하는 것을 종종 보게 됩니다. 그 순간 이 사람들은 철학자로서 말하고 있는 것입니다.
사실 문제는 자유주의자가 기적에 대해 취하는 것과 똑같은 행동을 복음주의자도 행합니다. 우리는 기적의 문제에 대해서는 대부분 올바른 태도를 취하지만 쉽게 받아들일 수 없는 예정과 선택의 교리에 대해서는 자유주의자가 자신의 철학을 내세우는 것과 같이 똑같은 논증을 펼칩니다. ‘그 말이 맞다면 도대체 하나님이 어떻게 공평하시다는 건지 모르겠어요.’ 그러므로 이 주의 사항은 우리 모든 사람에게 적용해야만 합니다. 나는 나와 맞지 않는다고 해서 그 교리를 믿는 일을 주저해서는 절대 안 됩니다. 또한 내가 이해할 수 없다고 해서 교리를 거부해서도 안 됩니다. 이것이 하나님의 진리이고 성경이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는 것이라면, 내가 이해하든 못하든 그것을 받아들여야 합니다.
3 자신의 논리와 체계를 지나치게 강조하지 말아야 한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완벽한 체계를 갖는 것을 좋아합니다. 이것은 철학자들이 언제나 완전한 전체를 원하고, 모든 것을 이해할 수 있기를 원하고, 모든 것을 진술할 수 있기를 원하기 때문이며, 우리는 그와 같은 존재입니다. 우리 자신의 논리나 체계를 너무 강조한 나머지 성경의 가르침을 넘어서 버리는 것은 위험한 일입니다. 그렇게 할 때 우리는 다시 죄와 오류를 범하게 됩니다. 우리는 성경의 모든 진술을 존중해야 합니다. 우리의 체계를 완벽하게 만들기 위해 성경의 한 구절이라도 축소하거나 무시하는 일은 없어야 합니다.
4 이성, 오성, 지성의 역할에 대한 결론
우리는 성경의 권위에 우리 자신을 복종시켜야 할 뿐만 아니라, 성령의 인도와 영감, 그리고 조명에 대해서도 그렇게 해야 합니다. 다른 책을 읽는 것과 똑같은 방식으로 성경을 읽어서는 절대로 안됩니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방법으로 이해해야 한다는 사실을 알아야만 합니다. 그러므로 언제나 성령이 나를 깨우치시고 조명해 주셔서 오류와 미묘한 위험들을 피해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도록 하나님께 간구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해야 합니다. 그렇게 한 후에야 성경으로 나아가 이미 자신의 한계를 알고 있는 마음, 그리고 성령에 의해 깨우침을 받은 그런 마음을 가지고 성경의 교리들을 발견해 나가기 시작하는 것입니다.
Ⅲ 교리에 도달하는 방법
성경은 단순히 교리들의 모음집이 아니라는 것을 상키시고자 합니다. 그저 몇 개의 성경 구절을 열거한다고 해서 성경의 교리를 찾을 수 있게 되는 것은 아닙니다. 그렇게 하는 것만으로는 충분한 효과를 거둘 수 없기 때문에 이것은 교리에 도달하는 방법이 아닙니다.
제가 제안하는 방법은 다음과 같습니다. 우리가 본문을 모아야 하는 것은 사실입니다. 특정한 주제를 언급하는 모든 성경 구절을 찾아내야 합니다. 그리고 나서 모은 구절들을 서로 대조해 본 후 그 기저에 놓여 있는 교리들을 발견하려는 작업을 해야 합니다. 우리는 이 작업에 관심이 있는 것입니다. 이 구절들이 제기하고 있는 교리는 무엇입니까? 이들은 우리에게 무엇을 말해 주고 있습니까? 이 모든 구절에서 공통의 기초를 이루고 있는 것이 무엇입니까? 이것이 바로 우리의 교리입니다.
1 교리를 발견해 나갈 때 지켜야 할 일반적 규칙
1> 교리는 성경에 명확하게 기술된 것이어야 한다
우리가 성경을 통해 믿는다고 주장하는 모든 교리는 언제나 성경에 명확하게 기술된 것이어야 합니다. 성경으로 그 교리를 증명할 수 있어야만 합니다. 내가 주장하는 교리가 성경에서 찾아볼 수 없는 것이거나 성경이 그것을 증명하고 있다는 사실을 확증할 수 없을 경우에는 그 교리를 거부해야 합니다. 누가 그 말을 하는지, 혹은 그가 얼마나 엄청난 체험을 했는지는 전혀 중요하지 않습니다. 그 말이 성경에서, 그리고 성경으로 확증될 수 없다면 그것은 아무런 가치도 없습니다.
2>교리는 오로지 성경으로부터 온 것이어야 한다
우리의 교리는 오로지 성경적인 것이 되어야만 합니다. 명백히 성경 밖에서 온 모든 교리를 거부해야 할 뿐 아니라, 부분적으로는 성경적이고 나머지는 다른 무엇인가부터 온 교리 역시 받아들이지 말아야 합니다. 교리의 근원은 순수하고 아무것도 섞이지 않은 성경이어야 합니다. 철학의 성향-슬며시 기어들어오는-을 생각해 볼 때 이것은 대단히 중요한 요점입니다.
3> 교리는 명료해야 합니다
이것은 우리 개신교의 선조들이 사용했던 중요한 어휘입니다. 그들은 성경 교리의 명료성(perspicuity)으로 참된 성경교리는 언제나 평이하고 명백하다는 의미입니다. 성경자체가 도처에서 명료성을 강조하고 그것을 전제합니다.
성경이 어떤 사람들을 향해 씌어진 것인지 상기해 보지 않은 채 성경 연구에 착수하면 큰 실수를 저지르게 됩니다. 바울서신서들이 철학자나 대학교수를 향해 씌어진 것이 아니라 노예들과 평민들, 보통 사람들에게 씌어진 사실입니다. “너희를 부르심을 보라......지혜로운 자가 많이 아니하며......문벌 좋은 자가 많지 아니하도다”(고전 1:26). 에베소서와 골로새서 등은 바로 이런 사람들에게 씌어진 것이었습니다. 바울이 이 서신서들을 썼을 때, 그는 그 들을 받는 사람들이 당연히 자기의 글을 이해하리라 생각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선조들이 성경의 명료성이란 말을 사용했을 때 의미했던 바입니다.
언제나 헬라어나 히브리어 단어의 뜻에 의지해 자신들의 교리를 전개해나가는 사람들을 볼 때 그 태도는 분명히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본문으로부터 교리의 의미를 도달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렇게 하기 위해 어떤 특별한 권위의 지도가 필요한 것이 아닙니다. 사도 요한은 우리가 기름부음을 받았기 때문에 그런 의미에서 가름침은 필요치 않다고 합니다. “아무도 너희를 가르칠 필요가 없고 오직 그의 기름부음이 모든 것을 너희에게 가르치며 또 참디고 거짓이 없나니.....”(요일 2:27). 그래서 우리는 보통 사람들은 성경을 읽기에 적합하지 않고 오직 가톨릭 교회만이 성경을 바르게 해설할 수 있다고 하는 로마가톨릭의 주장을 거부합니다. 같은 이유로 우리에게 이해하기 쉽고 정확한 번역본이 주어진 한, 성경을 이해하기 위해 어떤 특별한 철학이나 언어학적 이해, 혹은 다른 언어에 대한 지식이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는 생각도 완전히 거부합니다. 똑똑하고 철학적인 사람만이 이해할 수 있는 신학은 당연히 잘못된 것입니다. 우리는 성경 교리의 명료성을 믿습니다.
2 실제적인 지침
이상이 일반적 규칙들입니다. 지금부터는 특별 규칙을 살펴보겠습니다. 본문들을 한 곳에 모았으니 이제 어떻게 할까요? 해야 할 일이 두 가지 있습니다. 때로는 성경 구절들로부터 교리를 추론하는 일이 상당히 간단할 수도 있습니다. 이 구절들을 읽고 의미를 이끌어 내는 방법인 연역법입니다.
하지만 귀납법이라고 부르는 또 다른 방법이 있습니다. 삼위일체 교리를 예로 들어 봅시다. 성경 어디에도 암시적으로 삼위일체 교리가 진술된 곳은 없습니다. 하지만 ‘성부 하나님’, ‘성자 하나님’, ‘성령 하나님’에 대해 언급한 구절들을 접하게 되면 여러분은 스스로 이 구절들을 하나님은 한 분이시며 세 위격이시라는 삼위일체 교리의 증거라고 생각하게 됩니다. 이것은 특정한 구절들로부터 교리를 세워 나가는 방법입니다. 그러므로 연역과 귀납이라는 두 과정을 통해 교리에 도달합니다.
1> 단 구절만으로 교리를 이끌어 내면 안된다
이렇게 해서 잘못된 길로 간 사람들이 있습니다. 어떤 이들은 한 구절의 절반에만 의존하여 교리를 만들었습니다. 절반의 구절만 그들의 의견과 일치했기 때문에 나머지 반을 버린 것입니다. 우리는 절대로 이런 일을 하지 말아야 합니다.
2>다른 성경과 모순을 일으키는 결론을 끌어내면 안된다
우리는 언제나 성경과 성경을 비교해야 합니다. 우리는 “진리의 말씀을 옳게 분별”하는 “일꾼”이 되어야 합니다(딤후 2:15). 그것이 성경의 권고입니다. 그러므로 내가 어떤 교리에 도달했는데 그 교리가 성경의 다른 명확한 진술과 모순을 일으킨다는 사실을 발견했다면, 그 교리가 분명히 잘못된 것임을 알 수 있습니다. 성경은 하나의 위대한 메시지입니다. 성경은 언제나 완벽한 전체를 형성하기 때문에 한 부분이 다른 부분과 모순을 일으키는 일은 있을 수 없습니다. 교회사의 큰 인물들이 이 간단한 규칙을 잊어보리는 바람에 주요한 이단이 되어 버린 일이 많았는지 아시면 놀라실 겁니다.
Ⅳ 교리의 대한 의견의 차이
‘목사님이 지금까지 말씀해 오신 것들에 비추어 보면, 모든 그리스도인인 모든 성경 교리에 대해 다른 그리스도인과 일치된 의견을 갖는 것이 당연할 것 같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인들 간에 의견의 차이가 있다는 사실만큼 분명한 것도 없을 텐데요. 이걸 어떻게 설명하시겠습니까?’
1의견차가 발생하는 이유
1>잘못된 방법으로 이끌어 낸 교리
자신의 철학을 끌어들이거나, 단 하나의 본문, 혹은 본문의 절반에만 근거해 교리를 만들어내는 등의 잘못을 저지릅니다. 사람들이 이런 일을 계속한다면, 그렇게 하기를 거부하는 사람들도 있을 것이기에 의견의 차이가 있을 수밖에 없고, 결국 서로 다른 생각을 가진 학파들이 생겨나게 됩니다.
2> 기존의 이론에 교리를 끼워 맞추는 경우
사람들에게는 언제나 자기 자신의 이론을 이미 가지고 있는 채로 출발하려는 경향이 있고, 그렇게 시작한 후에는 성경을 자신의 이론에 끼워 맞추려 합니다. 이 점이 바로 로마가톨릭이 범하는 오류의 핵심입니다. 많은 개신교도 똑같이 적용할 수 있습니다. 자유의지나 특정한 이론을 가지고 출발한다면, 그 사람은 어떤 성경의 교리들에 대해서는 어려움에 빠지게 될 것이라고 확언할 수 있습니다. 우리는 선입견이나 편견, 철학적 이론들을 개입시키지 않도록 주의해야 합니다. 이것이 분쟁과 논쟁의 원인이 되는 경우가 대단히 많습니다.
3>확실치 않은 사실에 대한 독단적 주장
사람들이 교리에 대한 차이를 보이는 또 다른 이유는 확실치 않은 세부 사항에 대해 자신들만의 이론을 만들어 내는 경우가 많다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예언’이란 주제를 다룰 때 가장 위험한 점이 이런 잘못을 범하는 것일 겁니다. 우리는 예언을 누구도 완전히 확실하다고 말할 수 있는 세부적인 설명들을 만들어 내고자 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에게 성경으로 입증할 수 없는 이론을 만들어 낼 권리는 주어지지 않았습니다.
4>지나친 문자적 해석
또 다른 어려움의 원인은 사람들이 명백히 상징적인 의도로 씌어진 구절을 문자적으로 해석하길 고집한다는 것입니다. 예들 들어, 로마가톨릭교도와 토론을 벌이게 되었습니다. 그는 성경에 분명히 “이것은 내 몸이니라”고 기록되어 있지 않느냐고 말하여 문자적 해석의 문제들 다루도록 만들었습니다. 우리가 상징적인 의도로 기록된 것을 문자적인 것으로 받아들이기 시작하면 필연적으로 문제에 봉착하게 됩니다. 모든 것이 상징적인 의미인 요한계시록과 같은 책에 대해 이런 일을 하는 사람을 많이 만나 보지 않았습니까? 그들이 상징을 문자적으로 취급하는 바람에 얼마나 많은 심각한 문제들이 일어나고 있는지요.
5>분파주의와 편견
단지 우리가 어려서부터 익숙하게 들어 왔고, 또 우리 조상들이 그렇게 믿었다는 이유만으로 특정한 편견을 가진 채 출발하거나,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그 편견을 변호해야 한다고 말하는 것은 교파주의의 가장 끔찍한 재앙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분파 정신으로부터, 그리고 언제나 분파 정신의 특징으로 나타나는 편견들로부터 해방되도록 기도합시시다.
2 성경에는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문제들이 존재한다
성경에는 그 경건성이나 능력이 동등한 사람들 사이에도 의견이 일치하지 않고, 일치할 수도 없는 그런 문제들이 존재합니다. 이런 문제들 만났을 때는 분명히 모른다고 말하는 것이 우리의 의무입니다. 우리는 그런 문제들을 입증할 수 없으며 장차 우리가 영광에 이르러 모든 것이 명백하고 분명하게 될 때까지 기다리는 것으로 만족해야 합니다. 지금 이순간에는 “거울로 보는 것같이 희미”(고전 13:12)하게 부분적으로 알고 이해합니다. 우리의 지식은 완전하지 않습니다. 그것은 최종적이지 않습니다. 주어진 계시로 만족하도록 합시다.
3 반드시 알아야 하는 최종적이며 절대적인 교리도 존재한다
하지만 우리가 완전하게 알고 있고, 또 알아야만 하는 확실한 교리들이 있습니다. 그것은 구원의 길에 필수적인 교리들입니다. 구원의 절차에 대해 말하고 있는 것이 아닙니다. 이 문제에 이르러서는 경건한 사람들 사이에서도 종종 의견이 나뉘는 모습을 볼 수 있으며, 이런 일은 받아들일 수 있습니다. 하지만 그리스도의 인격에 대해서, 기적적이고 초자연적인 현상에 대해서, 십자가의 대속적 죽음과 문자적, 육체적인 부활에 대해서는 어떤 이의도 있어서는 안 됩니다. 이 문제들에 대해서는 어떤 논쟁도 있을 수 없습니다. 이 교리는 최종적이며 또한 절대적인 것입니다.
하지만 최종적이거나 절대적인 결론을 내릴 수 없는 다른 모든 문제에 대해서는 서로 상대의 말을 들어 줍시다. 관용하도록 합시다. 우리에게 이러한 문제을 입증할 능력이 없음을 인정하고, 우리 모두가 참여하는 위대한 구원을 함께 누리며, 장차 감추어진 일들이 명백하게 드러나고 주님이 우리를 아시듯 우리가 알게 되는 날이 오기를 고대합시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박성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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