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나단 에드워즈

[스크랩] 양낙홍, "조나단 에드워즈의 생애와 사상", 제5부 종교적 정서(신앙적 감정)

강대식 2016. 3. 23. 10:02

제5부 「종교적 정서」


제1장 「종교적 정서」의 배경


찰스 촌시는 에드워즈의「뉴잉글랜드의 현재 종교 부흥에 대하여」(=균형잡힌 부흥론)에 대항하는 목적으로「뉴잉글랜드의 종교 상태에 대한 생각들」(1743년)을 출판했는데, 그는 그 책에서 부흥운동에서 발견되는 무절제한 방종들을 총망라하였다. 종교에 있어 “이성”과 “감정”의 기능에 대한 실재적인 견해 차이가 촌시와 에드워즈를 갈라놓았다. 촌시는 “사탄이 감정을 통해 이성에 역사한다. 성령은 이성을 통해 감정에 역사한다”고 주장했다. 그는 종교에 있어 감정의 표출에 대해서는 지극히 회의적이었다. 한편 에드워즈는 인간을 재창조되어야 하는 죄인으로 보고, 재창조가 가능해지는 것은 오직 하나님이 인간에게 “마음의 새 감각”을 주실 때였다고 말한다. 새 감각은 인간 존재의 중심에 있는 거룩한 정서로서, 전인을 통해 그 변화의 능력을 발산한다고 보았다.

 

촌시를 비롯한 반부흥주의자들이 합리적인 성향을 노출하고 있었다면 반대편 극단에는 다소 광신적인 그룹(대표적으로 제임스 데이번포트)이 있었다. 이들도 본의는 아니었지만, 건강한 부흥 운동에 합리주의자들 못지않게 큰 해를 끼치는 세력으로 작용하고 있었다. 이들은 감정의 표현을 인정할 뿐 아니라 감정이 지나쳐서 열광적 내지 광신적인 수준에 이른 사람들이었다. 에드워즈는 참된 종교적 정서의 표지들과 거짓된 종교적 정서의 표지들을 구별해 줄 필요를 느꼈다. 그리하여 그는 1742년과 1743년 초에 그 문제에 대한 설교를 이어갔다. 이 설교들이 나중에 1746년 출판된 「종교적 정서」(=신앙 감정론)의 일부를 이룬다. 그 시리즈 설교의 본문은 베드로전서 1장 8절, “너희가 그를 보지 못하였으나 사랑하는도다 지금도 보지 못하나 믿고 말할 수 없는 영광스러운 즐거움으로 기뻐하니.....”였다.


제1차 대각성 기간 중에 신앙고백을 한 사람들을 에드워즈는 “봄에 개화한 꽃망울”에 비유했다. “나무 위에는 그러한 꽃망울들이 수없이 많이 맺혔다. 그것들은 모두 아름답고 소망스러웠다. 그러나 그것들 중 다수는 아무런 열매도 맺지 못하고 끝나버렸다.” 에드워즈는 어떤 사람이 참으로 회심되었는지 즉 그가 진정한 은혜를 체험했는지 아닌지를 판단할 수 있는 근거는 “꽃의 아름다운 색깔과 냄새가 아니라 그 후에 오는 잘 익은 열매들”이라고 확신했다. 그리하여 그는 「종교적 정서」에서 진정한 종교의 본질을 규명하는 작업에 착수했다. 하나님 보시기에 참된 신앙의 속성이 무엇인가 하는 것이었다. 사실, 에드워즈가 평생 동안 가장 깊은 관심을 가졌던 주제는 바로 이것이었다.


「종교적 정서」는 3부로 나누어진다. 1부는 종교에 있어 정서의 중요성과 절대 필요성에 관한 변증이요, 2부는 참된 종교적 정서의 표지가 될 수도 있고 되지 않을 수도 있는, 그러나 종종 참된 표지로 받아들여지는 열두 가지요, 3부는 참된 종교적 정서의 열두 가지 표지에 대한 해설이다.


제2장 종교에서 정서의 위치


「종교적 정서」제1부에서 에드워즈는 감정 혹은 정서(affections)의 본질 및 종교에 있어 그것들의 중요성을 논한다. 먼저, 그는 ‘정서’가 무엇인가 하는 것을 밝힌 후, 그것이 없으면 참된 신앙이 아니라는 점을 성경적으로 증명한다. 그래서「종교적 정서」제1부에서 에드워즈가 제시하는 주제는 “참된 신앙은 대체로 거룩한 정서에 있다”는 것이다.


한국어에는 영어 단어 “affection”에 꼭 맞는 단어가 없다. 영한사전에는 애정, 감정 등으로 번역되어 있으나 에드워즈는 이 단어를 그러한 의미로 사용하고 있지 않다. 에드워즈는 ‘정서(affections)’를 “영혼의 성향과 의지의 보다 왕성하고 감지될 수 있는 활동들”로 정의한다. 그러므로 에드워즈가 사용하는 이 단어는 의지와 선택을 동반하는 것이다. 그것은 단순히 감정, 정열, 혹은 심지어 ‘의지’가 아니라, 그보다 더 근본적으로, 사람을 중립 상태로부터 혹은 단순한 동의로부터 움직여 그의 마음이 어떤 것을 소유하거나 거부하게 만드는 것이다.


흔히, 인간은 지성, 감정, 의지의 세 가지 능력을 가지고 있다고들 말한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하나님이 인간 영혼에 두 개의 기능, 혹은 능력을 주셨다고 보았다. 하나는 지각하고 사색하는 능력이다. 그것에 의해 인간은 분별하고 판단하고 보는 능력, 즉 이해력을 가진다. 다른 하나는 단지 어떤 것을 지각하고 볼 뿐 아니라 보거나 생각하는 것으로 기울어지는 기능이다. 이 후자의 것은 때로 “기울어짐”, “경향”이라고 불린다. 행동에 관계될 때는 ‘의지’라 불린다. 그리고 ‘정신’이 이 기능과 관련될 때는 ‘마음’이라 불린다고 에드워즈는 분류한다. 에드워즈는 이 경향성 혹은 기울어짐이 우리의 행동을 지배한다고 보았다. 그리고 정서와 경향성, 혹은 의지는 본질적으로 같은 것이라고 보았다. 단지 그 정도가 다를 뿐이다. 즉, 그 움직임의 활발함과 감지되는 정도가 다를 뿐이다.


에드워즈는 구체적인 종교적 정서들의 예로서 “사랑, 기쁨, 감사, 소망(하나님을 바라는 것), 바램(갈망), 동정(자비), 열심, 미움(죄에 대한), 분노, 두려움(경외심), 슬픔(죄에 대한)” 등을 든다. 이런 정서가 참 신앙의 본질적 요소라는 것. 그러면서 성경은 도처에서 종교란 많은 부분이 이런 감정으로 이루어진다는 사실을 보여 준다고 그는 주장한다. 성경적 예, “의인은 은혜를 베풀고 주는도다”(시37:21). “궁핍한 사람을 불쌍히 여기는 자는 주를 존경하는 자니라”(잠14:31). “저는 종일토록 은혜를 베풀고 꾸어 주니.....”(시37:26). “선한 일에 열심 하는 친 백성이 되게”(딛2:14).


에드워즈는 “사랑”은 감정들의 으뜸이요, 모든 다른 종교적 정서들의 원천으로, 하나님, 그리스도, 하나님의 백성, 그리고 인류에 대한 것이다. ‘하나님에 대한 강렬하고 열렬하고 감동적인 사랑에서 필연적으로 모든 다른 종교적 정서들이 우러나온다’고 말한다.


그리하여 에드워즈는 이러한 거룩한 정서가 없다면 참 신앙도 없다고 단정한다. “종교적 정서가 거의 없는 자들은 분명히 신앙도 거의 없다.” 그는 마음에 거룩한 정서를 낳지 않는 어떤 이성의 빛도 선한 것이 아니라고 단정한다. 은혜로운 정서를 낳지 않는 “어떤 마음의 습관이나 원리도 선하지 않으며 그러한 정서들로부터 나오지 않는 어떤 외적 열매도 선하지 않다.”


그렇다면 제1차 대각성 때에 큰 종교적 감정을 소유했던 것처럼 보였던 많은 이들이 마치 개가 토한 곳으로 되돌아가는 것처럼 행동했는데 어떻게 봐야 할 것인가?(실수를 범함)

그리고 어째서 그처럼 많은 회심자들이 신앙에서 탈락해 버렸는가? 교회 앞에서 대단한 고백을 해서 성도 중의 성도로 받아들여졌던 이들이 탈락해 버리는 일이 왜 흔하게 되었던가? “왜 그처럼 많은 꽃송이들이 아무런 영속적인 열매를 맺지 못했는가” 제2부에서 에드워즈는 그 이유를 분석한다.


제3장 종교적 정서의 시금석이 될 수 없는 열두 가지 표지들


첫째, 단지 종교적 감정을 강하게 표출하는 것이다.

누가 강한 종교적 감정을 드러낸다고 해서 그것 자체만 가지고 그것이 진짜라거나 가짜라고 단정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어떤 사람들은 강한 종교적 감정을 무조건 정죄한다. 누군가 종교적 감정이 비범한 수준에 이르면 그들은 즉시 그것을 망상으로 치부해 버린다. 그러나 참된 종교는 많은 부분이 종교적 감정으로 이루어진다. 따라서 진정한 신앙이 크면 클수록 종교적 감정도 커진다.


한편, 단지 크다고 해서 그 종교적 감정이 정말 은혜롭고 신령한 것이라는 증거도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반대편 측면을 지적한다. 예를 들어, 출애굽한 이스라엘 백성들은 홍해 바다에서 하나님이 행하신 구원을 보고 하나님을 찬양했다. 언약을 제시했을 때 그들은 “여호와의 모든 말씀을 우리가 준행하겠나이다”고 약속했다. 그러나 그들은 얼마나 신속히 다른 신에게로 향했는가? 불과 얼마 후 그들은 금송아지를 만들어 놓고 주위를 돌면서 춤추고 즐거워하지 않았는가? 예수 시대의 유대인들도 마찬가지였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호산나를 외치던 그들이 얼마 후 “십자가에 못박으소서”라고 외치는 폭도들로 변했다. 에드워즈는, 종교적 감정이 고조된 경우라 할지라도 참된 신앙은 전혀 없는 경우가 있을 수 있다는 것이 모든 “정통 신학자들”의 일치된 견해라고 결론 짓는다.


둘째, 종교적 감정들이 신체에 커다란 영향을 미쳤다고 해서 그것이 참된 종교적 본질을 소유한 것이라는 사실을 입증하는 것도 아니요 반증하는 것도 아니다. 당시 부흥회에 참여한 사람들 중에는 집회 중에 경련을 일으킨다든지 까무러친다든지 소리를 지른다든지 하는 신체적 반응을 보이는 경우들이 종종 있었다. 그들은 그것이 바로 자기들이 은혜 받은 증거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그러한 신체적 반응이 꼭 은혜 받은 증거인 것은 아니라고 못을 박았다.


에드워즈는 “모든 감정은 어떤 식으로든 어떤 면으로든 신체에 영향을 미친다”고 말함으로 인간의 감정과 신체의 관계에 대한 예리한 관찰을 보여 준다. 그는 “영혼과 육체의 연합의 법칙”이라는 개념까지 사용하면서, 마음이 활발하고 왕성하게 작동할 때는 예외 없이 신체가 영향을 받는다는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영향은 지각되는 종류의 것이다. 그렇다면 그러한 감정이 크면 클수록 신체에 미치는 영향도 그만큼 더 커진다는 말이 된다. 그러나 어떤 감정이 신체에 커다란 영향을 준다고 해서 그것이 영적이라는 확증은 전혀 아니다. 왜냐하면 그러한 영향은 종종 종교와는 전혀 무관한 세상적인 일로 인해서도 일어나기 때문이다.


셋째, 누가 종교적인 일들에 대해 유창하게 열렬히 그리고 많이 말한다고 해서 그의 정서가 참 은혜의 결과인지 아니면 거짓인지 판단할 수는 없다. 사람이 종교적인 일에 관해 많은 말을 하는 것은 분명히 마음이 그것에 의해 감동을 받았다는 의미다. 그러나 그것만으로는 그가 은혜를 받았는지 받지 않았는지 판단할 근거가 못 된다. 에드워즈는 “잎사귀가 지나치게 많은 나무치고 열매를 많이 맺는 경우는 드물다”고 꼬집음으로써 자기의 종교적 체험에 대해 말을 많이 하는 사람에 대해서는 약간 부정적이다.


넷째, 자기 힘으로 혹은 자기 노력으로 어떤 종교적 정서들을 불러 일으킨 것이 아니고 그것들이 저절로 떠올랐다고 해도 그것이 참된 정서라는 보장은 없다. 아마도 당시 어떤 이들은 자기가 어떤 애를 쓰지 않고 가만히 있었는데 저절로 모종의 종교적 정서가 내면에 일어나는 것을 체험했던 모양이다. 그들은 그것이 참된 은혜라고 주장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단지 어떤 정서가 저절로 일어났다고 해서 그가 참 은혜를 받았다는 확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당시 “내적 체험”의 교리 혹은 “성령의 직접적 능력과 작용을 감지”할 수 있다는 교리는 많은 사람들의 비난을 받았다. 에드워즈 역시, 지정된 은혜의 수단의 사용을 소홀히 하면서 성령의 구원하시는 영향을 기대하는 것은 불합리한 주제넘음이요 광신임을 인정했다. 그리고 어떤 경우에는 성령께서 보다 은밀하고 점진적으로 역사하신다는 것을 인정했다. 그러나 사람의 심령에 구원의 은혜를 낳기 위해 절대적으로 필요한 능력이라면 아주 ‘분명하고 명백하며 감지되는 방식으로’ 나타날 수 있다고 생각하는 것은 전혀 불합리한 일이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다섯째, 성경본문과 함께 어떤 종교적 정서가 생겨났다고 해서 그것이 참된 은혜의 결과거나 그것이 아니라는 증거는 될 수 없다고 에드워즈는 주장했다. 즉, 어떤 성경 구절이 놀라운 방식으로 갑자기 마음에 떠오르는 것이 참 은혜의 임재의 결과일 수도 있지만 그렇지 않을 수도 얼마든지 있다는 것이다.


여섯째, 종교적 정서 안에 사랑의 외양이 있다는 것은 그가 구원받았다는 증거가 될 수도 있고 되지 못할 수도 있다. 왜냐하면 사랑이 가장 소중한 것이긴 하나 모조품이 있을 수 있다. 어떤 것이 탁월한 것일수록 모조품이 더 많다. 에드워즈는 사랑과 겸손만큼 많은 모조품을 가진 은혜는 없다고 주장한다.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리스도에 대한 사랑을 가진 것처럼 보일 수 있다. 그리고 그것이 아주 격렬한 감정일 수도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들이 은혜를 전혀 갖지 못했을 수 있다. 저 은혜 없는 유대인들이 바로 그러한 사람들이었다.


일곱째, 여러 종류의 종교적 정서가 한꺼번에 나타난다고 해서 그것이 은혜로운 정서의 결과인지 아닌지 판단할 수 있는 기준은 못 된다. 여러 가지의 거짓 감정들이 다양하게 나타날 수 있다. 하나님에 대한 사랑이나 형제들에 대한 사랑에 있어서와 같이 모든 종류의 은혜로운 감정들에도 모조품이 있을 수 있다. 죄에 대한 경건한 슬픔도 모조품이 있다. 바로, 사울 왕, 아합 왕, 광야의 이스라엘 백성들이 그러한 경우였다.


여덟째, 위로와 기쁨이 양심의 각성과 죄에 대한 깨달음 뒤에 오는 것이 종교적 감정의 성격을 확정할 수 있는 기준은 전혀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청교도들(윌리엄 퍼킨스, 토마스 셰퍼드, 토머스 후커)의 회심론에 의하면, 회심은 먼저 각성, 공포, 그리고 끔직한 불안 후에 전적 죄성과 무력함에 대한 인식 속에서 율법적 겸비가 따르고 그 다음에 이러저러한 빛과 위로가 오는 순서를 따른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어떤 사람들은 그러한 단계와 방법으로 회심되는 것이 ‘인간의 고안’이라고 비판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그러한 순서대로 회심을 체험하는 것이 꼭 그 체험이 가짜라는 증거는 아니라는 것이었다. 즉, 그러한 순서대로 체험한 정서가 참된 회심의 표지일 수 있다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이 점을 거듭거듭 강조한다. 회심되기 원하는 자들은 먼저 “비통한 재앙과 무서운 비참”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 후에 “느껴지는 방식으로” 구원과 행복의 상태에 있어야 한다. 그들은 먼저 그들의 “절대적 극도의 필요”를 느낀 후 “그리스도의 충족성과 그를 통한 하나님의 자비”를 느껴야 한다는 것이다. 에드워즈는 어떤 의미에서 칼빈의 “죽임”과 “살림”에 해당하는 이 두 단계의 체험을 회심의 거의 필수적 요소로 본다. 그에 의하면 하나님의 “통상적” 구원 방식은 사람으로 하여금 먼저 “광야”의 체험을 거치게 한 후 “위로”하는 것이었다. 즉 먼저 인간의 무력과 비참을 깨닫게 한 후 죄인들의 심령에 은혜를 베푸시는 것이 하나님의 일반적 구원 순서라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일종의 “낮아짐”과 “높아짐”의 이중적 단계를 거치는 것이 성경적 구원 방법이라고 주장한다.


다른 한편, 기쁨과 위로가 커다란 공포와 지옥에 대한 엄청난 두려움 뒤에 따라온다고 해서 그 기쁨과 위로가 올바른 것이라는 증거도 아니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회심의 전제 조건이 죄에 대한 깨달음이라는 청교도들의 주장, 그리고 사람이 참으로 죄를 깨닫게 되면 대개 하나님의 진노에 대한 두려움과 형벌에 대한 심한 공포를 체험한다는 경험적 관찰은 어떤 사람들로 하여금 지옥에 대한 두려움과 형벌에 대한 공포가 죄에 대한 깨달음의 본질이라고 오해하게 했다. 그리하여 에드워즈는 그러한 오해를 시정하면서 회심론의 핵심들중 하나를 지적한다. 즉, 비록 “양심이 죄를 깨닫는” 단계가 회심의 전 경험으로 필요하며, 그러한 죄에 대한 양심적 확신이 종종 공포를 야기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공포가 죄에 대한 깨달음의 본질은 아니다.


나아가서, 에드워즈는 당시의 청교도 전통 속에서는 아주 급진적인 주장을 제시한다. 그는 그 죄의 각성과 위로의 “분명한” 체험이 없다고 해서 회심되지 않았다고 말할 수는 없다는 다소 기존의 자기 주장과 상반되는 듯한 주장을 내어 놓는다. “단계와 방법에 관한 이 명료성이 있는 것처럼 보이는 것이 어떤 사람이 회심했다는 분명한 표지는 아니듯이 그것이 없다고 해서 어떤 사람이 회심되지 않았다는 증거도 전혀 아니다”. 여기서 독자는 에드워즈가 왔다갔다 한다는 인상을 받을 수 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깨달음의 필요성에 관한 자신의 강조를 고수하고 있다.

그러므로 에드워즈가 여기서 말하고자 하는 것은 다음의 것이다. 즉, 참된 회심자라 할지라도 그가 회심에 이르는 은혜를 받는 과정에, 그리스도에 대한 신앙의 행위에 포함된, 혹은 신앙의 행위에 전제된 그 요소들이 때로는 희미하게 나타나 마치 어떤 것들이 생략된 것처럼 보일 수도 있다는 것이다. 그는 청교도들의 회심의 정형화, 획일화하는 것에 반발하고 있는 것이다. 바람이 분다는 것은 그 소리를 들어 혹은 그 영향을 보고 알 수 있지만 그것이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는 알 수 없는 것처럼 회심에 있어서 성령의 역사도 신비하고 다양해서 인간이 측량하기 어렵다는 일반적 진리를 에드워즈가 여기서 다시금 확신하고 있다고 볼 수 있다. 그래서 결국 누군가가 정말 회심의 은혜를 체험했는지를 판단할 수 있는 최종적 시금석은 “열매” 즉 영혼에 일어난 “결과의 성격”이라고 에드워즈는 주장한다. 

 

아홉째, 교회에서 살다시피 하는 것이 참 회심의 증거는 아니다. 아홉 번째 사항은 특히 한국 교회가 귀담아 들어야 할 점이다. “종교적인 문제에 많은 시간을 사용하고 예배와 외적 의무들에 열심히 참여하는 것”이 “참 신앙의 본질”을 소유하고 있다는 확실한 표지는 아니라는 것이다. 참된 은혜는 사람으로 하여금 성경 읽고 기도하고 찬송하고 설교를 듣는 등의 종교적 활동들을 즐거워하게 만드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구약의 이스라엘 백성들의 예배는 하나님께 가증한 것들이었다. 그들은 월삭, 안식일, 대회 등의 절기가 아주 많았다. 손을 펴고 많이 기도했다(사 1:2-15). 구원 얻는 신앙이 없는 자들도 종교적 의무와 규례를 각근히 준수할 수 있다.

 

한국 교회는 교회의 여러 집회에 많이 참석하고 교회 활동을 많이 하면 그것이 ‘믿음 좋은’ 증거라고들 많이 생각한다. 에드워즈는 여기서 바로 그러한 오해를 시정해 준다. 단지 교회에서 많은 시간을 보내고 각종 교회 집회나 모임에 부지런히 참석하는 것이 참 은혜를 받았다는 증거는 못 된다는 것이다. 물론, 그것이 구원받지 못했다는 증거도 아니다.


열 번째, 입에 “할렐루야”, “아멘”을 달고 다니는 것이 참 은혜의 증거는 아니다. 한국을 비롯한 여러 나라의 소위 “은혜 충만한" 사람들, 특히 일부 은사주의자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내용이다. 그것은 “입으로 하나님을 많이 찬양하고 영화롭게 하는 것으로는 종교적 정서의 본질에 대해 어떤 것도 확실히 알 수 없다”는 것이다. 그것이 참 회심의 표지가 될 수 없으며 또 거짓 은혜의 증거도 아니다.


열한 번째, 구원의 확신이 있다고 자신 있게 말하는 것도 그 정서가 참된 것이거나 거짓된 것이라는 표지가 못 된다고 에드워즈는 지적한다. 이것은 한국의 많은 그리스도인들에게 의미심장한 경고가 된다. 특히 복음주의적 신자들 사이에서는 구원의 확신을 너무 쉽게 말하는 경우들이 발견되기 때문이다. 물론 에드워즈는 구원의 완전한 확신이 존재하지 않는다는 생각은 잘못된 것으로 보았다. 그는 “충만하고 절대적인” 확신 즉 “은혜에 대한 의심의 여지가 전혀 없는” 확신이 지상 교회에서 기대될 수 없다고 주장하는 로마 가톨릭의 가르침을 반대했다. 어떤 성도들은 분명히 구원의 확신을 가졌기 때문이었다(노아, 아브라함, 이삭, 모세....). 신자가 구원의 확신이 없다는 것은 책망 받을 일이라고 그는 주장한다. “그리스도가 그들 안에 있는지 없는지 알지 못하는 것은 그리스도인에게 아주 합당치 않은 일이며 또 크게 비난받을 만한 일(고후13:5)”이라는 것이었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본인들 스스로 표명하는 자신감이 구원의 확실성의 근거가 될 수는 없다고 본다. “그것이 얼마나 크고 강한가의 여부와 상관 없이 그들의 자신감만 보고서는 어떤 확실한 단정도 내릴 수 없다.” 바리새인들은 자기가 성도이며 “가장 휼륭한 성도”임을 결코 의심하지 않았다. 오히려, 참 성도들이 가끔 자신의 구원에 대해 의심을 한다.


믿음의 전제조건으로서의 영적 빛

에드워즈는 여기서 “사람이 어떻게 믿음을 가질 수 있게 되는가?”의 문제를 다룬다. 그는 복음의 빛이 비취어야 믿을 수 있다고 본다. 억지로 믿거나 믿기로 결단할 수는 없다는 것이다. 성령의 조명 없이 자기 의지만으로 믿음을 가질 수는 없다는 것이다. 이것은 현대에 유행하는 일반적 복음전도 방식에 중대한 도전이 되는 주장이다. 왜냐하면 현대의 복음 전도자들은 청중들이 자기 의지를 발동해서 믿기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을 강조하기 때문이다. 즉, 영적 조명에 대한 언급은 없이 단지 누구나 지금 이 자리에서 복음을 믿기만 하면, 혹은 받아들이기로 결단만 하면 구원받는다는 것이 현대 복음 전도의 핵심이다. 그러나 에드워즈는 “아무 영적 빛이나 조명 없이 사람들에게 밀어붙이거나 촉구하는 것은 흑암의 왕자의 기만을 크게 도와 주는 경향이 있다”고 주장한다. 에드워즈는 참된 믿음을 얻기 위해서는 신령한 조명이 꼭 필요하며 그것이 없는 믿음은 거짓 믿음이라고 확신했다. “영적 빛이 없는 믿음은 빛의 자녀들의 믿음이 아니라 어두움의 자녀들의 주제넘은 상상이다.” 소위 무조건 믿으면 구원받는다는 “싸구려 믿음주의”에 대한 정면 공격인 것이다.


에드워즈는, 우리가 조명 받은 만큼만 믿을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은 어떤 영적 빛이 없이는 믿음을 구사할 수 없을 뿐 아니라 영적 빛을 가진 꼭 그 정도만 믿음을 구사할 수 있다.” 에드워즈에게 있어 믿음은 신령한 지식과 거의 동의어였다. 빛을 받아 보게 되는 것은 어떤 사실을 알게 되는 것이고, 알기 때문에 믿을 수 있는 것이었다. 알지 못하고는 믿을 수 없었고 빛을 받지 못하고는 알 수 없었다. “인간은 하나님을 아는 만큼만 그를 신뢰할 것이다. 그리고 인간은 하나님의 충만하심과 신실하심을 본 것 이상으로 한 치도 더 그분에 대한 믿음을 구사할 수 없다.”


체험과 은혜와 믿음의 상관관계

에드워즈는 “생생한 은혜의 역사” 혹은 “감지되는 기독교적 체험”없이 하나님을 굳게 신뢰하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여기서 은혜의 체험이란 바로 신령한 빛을 비췸 받아 하나님과 그의 진리를 보게 되는 것과 동의어이다. 그러므로 영적 조명을 통해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지식이 생기기 전에는 하나님과 그의 말씀에 대한 믿음 내지 신뢰를 가지는 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것이었다. 에드워즈는 체험, 즉 영적 조명 없이 “믿음으로 산다”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믿음에 대한 터무니없는 개념을 가지고 있다고 주장한다. 성경에 의하면 믿음은 그것에 의해 구원으로 인도되는 것이지 자기가 이미 구원받았다고 믿는 것이 아니었다. 그것은 “자기가 믿음을 가졌다고 믿는 것”이거나 “자기가 믿는다고 믿는 것”에 불과하다는 것이었다. 이것은 요즘처럼 전도를 통해 그 자리에서 예수를 영접하고 믿게 되었다고 생각하는 많은 사람들에게 중요한 도전이 되는 주장이다.


에드워즈는 체험 외에는 은혜의 다른 증거가 없다고 보았다. “대단한 체험을 하는 것은, 만일 그 체험들이 참된 것이고 언급할 가치가 있는 것이라면, 대단한 은혜를 받는 것과 동일한 일이다.” 참 체험이 있으면 반드시 은혜가 따른다. “참 체험들치고 은혜의 역사가 없는 것은 없다. 그리고 은혜와 성결의 정도는 참 체험의 정도에 정확히 비례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에드워즈는 체험에 의지해 산다거나 혹은 체험을 파먹고 사는 경우들이 있다고 말한다. 그것은 자기 체험을 의로 삼고서 그리스도의 탁월성과 하나님의 영광을 바라보지 않는 경우다. 즉, 그들은 자기에게로 눈을 돌려 자기 성취와 자기의 높은 체험, 그리고 자기들이 만났던 위대한 일들만 바라보면서 즐거워한다.

 

그것들이 그들의 눈에는 너무나 찬란하고 아름다워 보인다. 그래서 하나님도 자기들의 그러한 체험들에 대해 자기들만큼이나 대단한 평가를 하고 계시리라 생각한다. 에드워즈는 이러한 태도가 하나님 보시기에 불신자의 엄청난 부도덕보다 더 가증한 것이라고 비난한다. 과거의 어떤 체험을 의지하여 하나님과 자신의 관계를 낙관하는 이들이 귀담아 들어야 할 지적일 것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옛날에 받은 은혜가 있다고 하더라도 현재 “정욕과 부패”가 영혼을 지배하고 있어 영적으로 어두워져 있으면 “은혜로운 자신감과 확신”을 가질 수 없다.


열두 번째, 어떤 사람의 외적 모습과 자기 자신에 대해 하는 말이 경건한 자들이 듣기에 아주 감동적이고 유쾌하여 그들의 호의를 얻고 마음을 사로잡는 것이다. 에드워즈에 의하면, 위선자들도 많은 종류의 종교적 정서를 소유할 수 있다.

우리는 에드워즈가 참과 거짓을 구별하는 데 얼마나 엄격한지를 본다. 그리고 참 회심과 거짓 회심, 참 구원의 은혜와 거짓 은혜가 외양에 있어서 얼마나 비슷할 수 있는지를 본다. 염소들도 양들과 얼마나 비슷할 수 있는지를 본다. 한편, 한국 교회는 이런 참 신앙과 거짓 신앙의 구분에 얼마나 무관심하며 무능력한지를 느낀다. 얼마나 쉽게 번쩍이는 것은 모두 금이라 간주하는가? 어쩌면 한국 교회는 그러한 구분을 하고 싶지 않은지 모른다. 지금 한 사람이라도 교인으로 더 받아들여 교인 수를 늘리고 싶은 판에 언제 진짜와 거짓을 구분한다는 것인가? 이러한 현상은 에드워즈 식으로 옥석을 가리다가는 교회에 한 사람도 남아 있지 않게 될 것이라는 두려움과 반발심 때문일 수도 있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유정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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