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신앙

[스크랩] 칭의에서 믿음은 행위도 조건도 자격도 아니다/ 호라티우스 보나르

강대식 2016. 4. 17. 21:59


믿음은 믿는 행위일 수 없다. 로버트 트레일, “우리는 칭의에 있어서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믿음은 행위도 아니고 조건도 아니며 자격도 아니라고 말한다. 또 믿음의 본질은 은혜의 선물을 제외한 다른 모든 것들을 거부하는 것이라고 말한다.”

 

그리스도께서는 죽은 나사로를 다시 살리셨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부활이 죽은 자의 행위일 수는 없다. 믿음도 마찬가지이다. 우리는 믿음이 은혜로 말미암는 하나님의 선물임을 인정한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믿음이 우리의 행위일 수는 없는 것이다. 나사로의 부활 같은 경우는 하나님께서 생명을 그 사람에게 주입해 주신 것이고, 믿음의 경우는 하나님께서 그것을 전달해 주신 것인데, 두 가지 경우 모두 인간의 어떤 행위가 있어야만 한다는 것을 보여 주기는커녕 오히려 결코 인간의 행위 같은 것은 있을 수 없다는 사실을 명백하게 보여 준다.

 

행위는 믿음 후에 온다. 행위는 믿음의 열매로서 뒤따라온다. ‘사랑으로써 역사하는 믿음’(5:6)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의 경우 자신의 믿음을 사랑의 역사를 통해서 드러낸다는 뜻이다.

 

믿음이 역사하지만 믿음이 역사 자체는 아니다. 그렇다. 믿음은 역사한다. 사랑도 그렇고, 소망도 그렇다. ‘믿음의 역사’(살전1:3)는 믿음 때문에 우리가 행하게 되는 역사를 의미한다. ‘사랑의 수고는 하나님이나 다른 사람을 사랑하기 때문에 하지 않을 수 없는 노고를 의미한다. ‘소망의 인내도 우리에게 소망이 있기 때문에 우리가 발휘할 수 있는 인내를 의미한다.

 

그러나 잘 생각해 보라. 믿음이 역사한다고 해서 믿음이 곧 역사(役事)인가? 사랑이 수고한다고 해서 사랑이 곧 수고인가? 소망이 우리로 하여금 인내하도록 한다고 해서 소망이 곧 인내인가?

 

잘 생각해 보라. 이스라엘이 광야에서 놋뱀을 바라본 것은 인간의 다른 모든 치료법을 버리고 하나님의 방법을 좇아 놋뱀을 바라봄으로써 자신들의 몸에 건강이 회복되도록 허용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렇다고 해서 눈을 들어 놋뱀을 바라보는 일이 구원 얻는 근거 행위였는가?

 

복음은 영생을 얻기 위해서 우리가 해야 하는 일을 결코 명령하지 않는다. 오히려 복음은 그리스도께서 이미 이루어 놓으신 것을 통해서 생명을 얻어 살라고 명령한다. 그렇기 때문에 영생을 주는 복음의 진리를 아는 지식은 고된 수고라 아니라 안식이다. 그것은 우리로 하여금 헛되지 않은 모든 수고를 행할 수 있도록 만들어 주는 안식이다. 왜냐하면 그리스도를 영접할 때 우리는 안식을 얻기 위해서 행위를 하는 것이 아니라, 참된 행위를 하기 위해서 안식을 얻기 때문이다.

 

믿을 때, 우리는 이전에 죄사함을 얻으려고 우리 스스로 행하던 모든 행위를 멈추게 된다. 오히려 이제는 이미 받은 죄사함을 근거로 해서 선한 행위를 시작하게 된다. 사실, 선한 일을 하는 가운데 경험하게 되는 기쁨이 아무리 클지라도, 또 선한 일을 행한 다음에 얻게 되는 보상이 아무리 클지라도, 죄사함을 확신하고 분명하게 깨닫는 것보다 더 탁월한 기쁨과 보상이 어디 있겠는가?

 

믿음이 낳는 행위들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 사람이 믿음을 소유하기 전에도 여러 가지 신앙적인 윤리적 행위를 할 수 있다. 그러나 우리가 알기로는 그러한 행위들은 아무런 유익도 없다. 왜냐하면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할 수 없기 때문이다(11:6). 반대로 사람이 믿음을 소유하면 그 다음에 여러 가지 선한 행위가 뒤따르게 된다. 이런 행위들은 하나님을 크게 기쁘시게 한다. 왜냐하면 이런 행위들은 믿음을 가지고 있는 사람들의 열매이기 때문이다.

 

종교개혁에 속하는 모든 신학은 믿음을 행위로 변질시키는 것을 무가치한 궤변이나 교황주의의 교묘한 잔재로 보고 강력하게 반대했다. 실로 믿음은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우리가 믿는 계시와 그 계시를 믿을 수 있는 능력 모두 하나님으로부터 온다. 성령께서는 성경을 기록하셨고, 성경 말씀을 우리들에게 보내사 우리로 그 말씀을 믿어 구원을 얻도록 하셨다. 믿음은 들음으로 말미암고, 들음은 하나님의 말씀으로 말미암는다.

 

성령은 죽은 영혼을 소생시키사 그 영혼으로 하여금 믿을 수 있도록 하신다. 그 영혼이 믿음을 가지면 성령께서는 그 사람 안에 들어가셔서 내주하신다. 그래서 성경은 우리가 듣고 믿음으로’(3:2) 성령을 받았다고 말하는 것이다.

 

성령께서는 우리로 하여금 손을 펴서 하나님이 주시는 선물을 받게 하신다. 그리고는 친히 우리의 손에 하나님의 선물을 쥐어 주신다. 여기에서 우리가 결코 잊지 말아야 할 진리가 있다. 믿음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역사하신 결과로 있는 선물인 동시에, 내주하시는 성령으로서 그분을 영접하는 주인공이기도 하다. 그래서 우리의 믿음에 비례하여 우리 안에 있게 될 성령의 충만함의 정도도 결정되는 것이다.

 

이것은 성경에 기록된 수많은 양면적인 진리들과 양면적인 역사에 속하는 또 다른 부분이다. 다시 말하자면, 성령은 우리로 하여금 믿을 수 있는 능력을 주신다. 그런데 우리는 성령께서 주신 바로 그 믿음으로 성령 자신과 그분의 모든 은사들을 영접하게 된다. 그래서 성령께서 우리 안에 얼마나 풍성하게 거하시느냐 하는 여부는 우리의 믿음에 정비례하는 것이다.

 

- 호라티우스 보나르, 거룩한 길로 나아가라, pp 60-65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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