찰스 브리지스

[스크랩] 찰스 브리지스, "청교도 목회학", 1부 목회사역의 개관(1)-강의안

강대식 2016. 5. 18. 06:58

저자 및 책 소개

찰스 브리지스(Charles Bridges, 1794-1869)는 케임브리지 퀸스칼리지(Queens College, M.A.)를 졸업하고 1827년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는 헤리엇 톨래스(Harriet Torlesse)와 결혼하여 두 아들을 두었으며, 1823년부터 1849년까지 올드 뉴턴(Old Newton)의 교구목사를 지낸 설교자요 신학자였다. 브리지스는 존 C. 라일(J.C. Ryle)주교와 목사 수련회의 강사로 함께 활동한 청교도 신앙의 전통을 계승한 개혁주의 목사요 부흥사로 영국교회에 널리 알려져 있다.


브리지스는 8권의 저서를 남겼으며 이 책 「청교도 목회학」(The Christian Ministry)은 스펄전의 「목사 후보생들에게」와 함께 쌍벽을 이루는 실천신학 분야의 고전으로 읽혀지고 있다. 스펄전 목사는 이 책을 금보다 더 값진 가치 있는 책이라고 찬사를 보냈으며 또 브리지스 목사를 제2의 존 번연과 같은 목사라고 칭송을 했다.


원래 이 책은 「비효과적인 목회」(Ministerial inefficiency)라는 주제를 가지고 사랑하는 한 친구에게 쓴 편지에서 시작되었다. 그 후「크리스천 옵저버」(Christian Observer)에 이 글이 실리게 되었는데, 저자가 원하기도 하였거니와「크리스천 옵저버」편집자의 배려도 있어서, 내용을 좀 더 확대해 몇 가지 더 삽입하였다. 그리고 실제적인 적용 사례와 그 주제를 좀 더 폭을 넓혀 다시 썼던 것이 결국 현재의 확대판이 된 것이다. 이 책은 총 6부로 구성되어 있다.


제1부 목회사역의 개관


1장 하나님이 교회와 그 사역을 제정하시다


교회는 하나님의 성품의 광채를 온전히 반사해 주는 거울이다. 이것은 대단한 장관이다. 그 장관 속에서 여호와 하나님의 완전하심이 우주 전체에 드러난다(엡3:10). 하나님은 교회에 계시를 나타내시고, 무엇보다도 “예수 그리스도의 인격 속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나타내셨기 때문에, 천사들조차 자세히 들여다보고 싶어 할 만한 전혀 새로운 주제들이 생겨나게 되었다(벧전1:12).


교회를 세우실 때 사용하신 수단 또한 그 위대한 창시자의 지혜를 잘 보여주고 있다. ‘모든 약한 것들을 고치는 권능’을 나타내셔서 중대한 목적, 즉 ‘그 어떤 육체도 하나님 앞에서 영광을 가로채지 못하게 하시겠다는’ 목적을 효과적으로 달성하고 계신 것이다. 한 무리의 사람들이 하나님의 교회의 기초를 놓고 그 위에 구조물을 쌓는 위대한 작업에 헌신하였다. 겨울 열두 명밖에 안 되는 사람들이 사명을 받아 최초의 교회를 구성하였던 것이다. 그 교회는 ‘임마누엘의 땅’이라 일컫는, 얼마 안 되는 좁은 땅덩어리 이내로 국한되었다. 그러나 후에는 축복의 약속에 따라 “모든 족속”에게까지 확대되었다(마10:1-6; 28:18-20; 막16:15; 눅24:47). 사도들에게 부과된 사역 내용이 늘어남에 따라, 그에 맞추어 일꾼들의 수를 늘려야 할 필요성이 생겼다. 이 절박한 사정을 해결하기 위하여, 위대한 중보자께서는 그분 자신이 주신 사명을 능히 감당할 수 있는 권능을 충성스러운 일꾼들에게 주셨다(요20:21). 그리하여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서 사도들은 ‘모든 교회에 장로들을 임명하였다.’ 성령의 임명을 받아 장로들은 양떼를 감독하는 사람들이 되었다(행6:1-6; 14:23; 20:28). 사도들은 계속해서 다른 이들에게 임명권을 맡겼는데(딤후2:2; 딛1:5), 이는 한 특별한 약속대로 교회의 사역이 계속 되어나가게 하기 위함이었다. 그 특별한 약속이란 다름 아닌, “세상 끝날까지”(마28:20) 이 사역이 계속될 것이란 점이다.


교회의 머리되신 예수 그리스도는 자신의 진리를 보관할 곳으로 세 가지를 제정하셨다. 악의에 찬 공격이 있을 것에 대비해서, 그분의 섭리 가운데 성경 속에 그것을 보관해 놓으셨다. 또한 배교가 널리 퍼져 있는 것이 분명한 상황 아래서는, 그리스도인의 마음 속에 성령의 전능하신 능력으로 진리를 보관해 놓으셨다(왕상19:18; 롬11:4-5). 그리고 주님은 오고 오는 세대에서 교회를 가르치고 양육하기 위해 목회사역 가운데도 ‘질그릇 속에 보화를’ 저장해 놓으셨다.


거룩한 이 직분은 적법한 권한을 가진 대리인을 통해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사람들에 의해서 수행되며(갈1:1; 행13:2-3), 하나님께서는 이들을 믿으시고 풍성한 축복을 책임 있게 행사하도록 이들에게 맡겨놓으셨다(딛1:11). 할 수 있는 최고의 섬김을 자기 형제들에게 시행하도록 하신 것이다.


처음 교회에 허락하시고 제정하셔서 교회에 주신 더 없이 귀중한 이 선물은 하나님의 아들이 행하신 중보 사역에 속한 것이다. 즉 이 사역은 낮아지신 그분을 희생으로 하여 우리 것이 된 것이며, 이 사역은 그분의 영광을 직접 부여해주신 결과물인 것이다(엡4:8-10).


이 직분이 수행 능률성이 있을 뿐만 아니라 대단한 탁월성까지 있다는 것은, 목회사역이 다양하게 분화되고 있는 현상에서 잘 나타나고 있다(엡4:11-12). 이 직분은 도구이다. 이 도구로 말미암아 교회가 누리는 특권은, 교회가 그 영광스런 머리와 연합한다는 것과 다양한 관계 속에서 지체들이 교제를 나누며 피차 의지할 수 있다는 것이다. 그리하여 몸은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것과 아는 일에 하나가 되어 온전한 사람을 이루어 그리스도의 장성한 분량이 충만한 데까지 이르”(엡4:12-13)게 하는 것이다. 각 지체는 이 제도가 정착하는데 이바지한다.

목회사역을 이렇게 전체적으로 보면, 오직 하나님만이 그 창시자임이 분명하다! 한 기계가 여러 가지 큰 목적들에 고루고루 잘 맞게 돌아가도록 설계할 생각을 해낸다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그 기계가 이바지해야 할 것은 바로 교회의 완성이요, 세상의 갱생이다.


만일 그 기계가 완벽하게 효과적으로 돌아가고 있기만 하다면, 교회는 세상에게 아주 중요한 축복된 존재가 될 것이다. 칠흑과 같이 어두운 세상에 복음의 빛과 생명을 쏟아 붓는 굉장한 매개체가 될 것이다. 이 위대한 대리기관, 이 거룩한 직분은 성삼위 하나님으로부터 시작되었다. 즉 “모든 것이 하나님께로 났으며 그가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우리를 자기와 화목하게 하시고 또 우리에게 화목하게 하는 직분을 주셨다”(고후5:18). 또한 우리가 이미 본 바대로, 높임을 받으신 그분의 아들을 우리에게 선물로 주셨는데, 이는 그 아들이 승천하시기 이전에 하나님께서 교회에게 약속하신 것이었다(마28:19-20). 그것은 “만물을 충만하게 하려”하시는 그분의 영광스러운 권능의 첫 번째 조치이기도 하였다(시68:18, 엡4:10-11).


동시에 이 직분을 “성령의 사역”(고후3:9)이라고 강조하여 불렀다. 이 사역에 우리를 불러 일을 시키시는 것은 그분의 권한이다(행13:2). 목회사역 속으로 우리를 이끄시는 것도 그분이 인도하심이다(행16:6-7). 그리고 필요한 은사와 은혜를 공급해 주시는 것도 성령의 권능이다(고전12:7-11). 그러므로 복음의 사역은 말씀의 깊이와 신비함을 더욱 드러내는 것이다(고전12:4-6).


목회사역은 각각의 삼위 하나님과 동등한 관계를 맺고 있으며, 또한 각각의 삼위 하나님께 의존하고 있기도 하다. 사역은 또한 삼위 하나님 각자에게 동등한 영광을 돌리고 또한 그분들을 각각 섬긴다. 그러니 이 신성한 지상명령의 원천이 영원한 보좌의 발등상에게까지 거슬러 올라간다고 하면, 우리는 얼마나 겸손한 마음으로 이 엄중한 의무를 감당해야 하겠는가!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라고 한 선지자는 하나님의 거룩한 음성에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사6:5-8)라고 응답하였던 것이었다. 사도 중의 으뜸이라고 할 수 있는 바울조차 “누가 이 일을 감당하리요”(고후2;16)라고 말할 뿐, 자기가 맡은 책임감이 막중함을 달리 어떻게 표현하지 못하는 것도 이상한 일이 아니다.

인간이나 천사 중, 그 누가 비밀 속에 감춰져 있는 하나님의 지혜를 열기에 합당할 것인가?

영혼을 돌보는 이 두려운 일을 누구라서 감당할 수 있겠는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고후12:9)라고 우리 주님이 친히 약속으로 대답해주지 않으셨다면, 정신이 온전한 자 그 누구라서 이렇게 두려운 사역을 시작할 수 있을 것인가? 혹시 시작했다 하더라도, 그 누구라서 이 사역을 계속할 수 있을 것인가?


2장 목회사역은 존엄성이 있다


목회사역의 기원이 하나님께 있다는 것 자체만으로도, 목회사역에는 이 땅 위의 그 어떤 영광이나 존귀보다 훨씬 뛰어난 위엄이 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믿음이 없어 이 사역을 비웃는 자라 할지라도, 이 사실만큼은 결단코 격하시킬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엄중한 준비 단계를 거쳐 교회의 승인을 받아 세상에 나온 기관의 지위가 낮을 리가 없다. 인간에 대해 정통하게 알고 있으며, 불멸의 영혼들을 돌보는 일을 맡고 있으며, 세상을 바꾸고 교회를 세우기 위해 제정된 주요 도구인, 이 기관의 지위가 낮을 리가 결코 없다. “하나님의 동역자”라는 직분은, 영원하신 하나님의 보좌 가장 가까이에서 섬기는 천사장에게 주어진 영광처럼 그렇게 뒤떨어지는 영광이 아닐 것이다. 이 사역은 소명과 사명이며, 그리고 이 지상에서 사셨던 주님이 그 삶의 마지막 몇 년 동안에 행하셨던 영광스럽고 기쁜 일이기도 하였다. 그리고 이 사역은 주님의 교회에 항상 있어야 할 것으로서, 또한 말세에 자신의 뜻을 나타내실 매개체로서 주님 자신이 제정하신 것이었다.


“다른 사람들에게 하나님의 진리를 비추는 거울이 된다는 것은, 또는 그 진리의 전달자가 될 만큼 영혼에 조명을 받았다는 것은, 이 현세에서 인간이 가질 수 있는 최대의 행복이라고까지는 할 수 없다 할지라도 최고의 위상”임에는 분명하다. 이렇게 숭고한 직분으로부터 우리가 주춤거리며 뒤로 물러날 수 있겠는가? 이렇게 고귀하고 거룩한 것들을 다루는 직분으로부터 우리가 뒷걸음칠 수 있겠는가? 우리는 이미 죽은 자들로서 다른 이들에게 생명을 전하는 것이다. 이 영광을 자기 자신의 더러움과 비교해 볼 때,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사6:5)라고 옛 선지자는 외치지 않을 수 없었던 것이다. 이 막중한 지상명령을, 이 중차대한 위임을, 어찌 우리가 생각이나 해볼 수 있었겠는가? 도무지 감당하지 못할 은혜라고 밖에는 말할 수 없다(엡3:8; 딤전2:12). 그러므로 이 사명의 거룩한 위엄을 기억하여, 좀 더 신중하게 우리의 사역들을 감당하자.


우리가 사람들에게 어떤 말을 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대리해서 말하고 있다는 사실을 기억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 직분에게 주어진 성경적인 참 표준이다. 위대한 사도 바울은 말한다.

“오직 하나님께 옳게 여기심을 입어 복음을 위탁 받았으니 우리가 이와 같이 말함은 사람을 기쁘게 하려 함이 아니요 오직 우리 마음을 감찰하시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려 함이라”(살전2:4).


사명은 또한 의무들을 책임 있게 수행해야 하는 것과도 관련이 있다. 우리는 위엄성을 잃지 않아야 한다. 그렇지만 복음의 격려를 받아 이 위엄의 무게가 주는 부담감을 덜기 바란다. 사도 바울은 어느 것에도 견줄 수 없는 우월성을 사역이 가지고 있음을 보여준 후, “그러므로 우리가 이 직분을 받아 긍휼하심을 입은 대로 낙심하지 아니”(고후4:1)한다고 말하고 있다.


3장 목회사역의 용도와 그 필요성


목회사역의 대상은 하나님과 사람들 모두임을 우리는 반드시 알고 있어야 한다. 우리가 전심으로 애를 쓰는 것은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고자 함이요, 또한 사람들을 구원코자 함이다.


말씀사역은 교회를 심고 교회에 물을 주기 위해 제정되었다(고전3:6). 각 교회에 편지들이 보내졌는데, 이들 교회들은 복음 전도를 통해서 세워진 교회들이었다. 입으로 복음을 전할 사역의 장소를 마련하기 위해, 그 교회들의 질서와 연합을 회복시키기 위해, 또 각 교회들을 확고부동한 믿음 안에 세우기 위해, 그리고 그들을 그리스도의 완전함에까지 나아가도록 하기 위해서, 이 편지들을 썼던 것이다.


이렇게 복음을 선포하는 것은 교회 전체와 개별적인 지체들이 각자의 형편에서 지속적으로 진보를 하기 위함이다. 복음이 선포되는 이유는 “성도를 온전하게 하여 봉사의 일을 하게하며 그리스도의 몸을 세우려”(엡4:12)함에 있다. 말씀사역은 데살로니가 교인들의 “믿음에 부족한 것을 보충”(살전3:10-11)하기 위해 처방된 치유책이었다. 베드로는 두 번째 편지를 “이미 진리에 서 있는” 사람들에게 썼지만, 그러나 그 때문에 “항상 너희에게 생각나게 하는”(벧후1:12) 일을 게을리 하지 않게 하는데 있다.


그러면, 이 직분에 대한 성경의 다양한 비유들은 각각 이 직분의 성질, 그리고 이 직분의 필요성과 관련이 있다. 만일 교회를 양떼라고 부른다면, 사역자는 잃은 자를 찾고 연약한 자들에게 힘을 북돋아 주며 아픈 자들을 치료하며 믿음에서 떠난 자들을 다시 모아들이는 목자의 역할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만일 그리스도의 교회를 한 권속으로 부른다면, 사역자는 가족들의 필요에 따라 양식을 나누어 주는 “충성스럽고 지혜로운 청지기”(눅12:42)이다. 만일 하나님의 교회를 한 도성으로 부른다면, 사역자는 잠자는 자들을 깨워 그들에게 닥친 위험을 경고해주는 파수꾼이 된다(겔33:7). 만일 하나님의 교회를 농사짓는 일로 말한다면, 사역자는 땅에 씨를 심고 물을 주며, 흙에서 돌멩이를 제거해 주며, 식물이 자라는 것을 지켜보고, 수확을 거두어들이는 “일꾼”(고전3:9)이 된다. 만일 교회를 건물이라 부른다면, 사역자는 산돌이신 예수 그리스도의 든든한 터 위에 영적인 집을 지어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되게”(벧전2:5; 엡2:20-22)하는 “지혜로운 건축자”(고전3:10)가 된다.


교회는 하나님이 제정하신 것이다. 세상을 향하신 하나님 자신의 사랑의 목적들을 성취하시기 위해 하나님이 만드신 수단의 질서 속에서 반드시 있어야 할 것으로 교회를 만드신 것이다(약1:18; 엡4:12-13). 하나님이 절대 주권을 가지시고 교회를 통한 목회사역을 구원 과정의 첫 번째 고리로 제정하셨다. 그래서 목회사역이 아니고는 말씀을 들을 수 없게 하셨던 것이다. 말씀을 들을 수 없으면 그 말씀이 전하고 있는 유일하신 구세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이 생길 수 없고, 믿음이 없으면 그분의 이름을 부를 수 없고, 따라서 구원도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말씀 사역은 하나님이 정하신 회심의 도구가 되며, 그 후에 그리스도인의 삶의 각 단계에서 확정케 하는 도구가 된다. 그리고 하나님의 권속으로 들어와야 하는 죄인이 단 한 명이라도 남아있는 한, 또는 성도의 마음속에 있는 단 한 점의 은혜라도 완전함에 나아가야 하는 한, 교회를 통한 말씀사역의 필요성은 언제나 존재하는 것이다.


4장 목회사역의 시련과 어려운 점


중요한 일을 할 때에는 먼저 거기에 들어갈 비용이나 대가를 계산해 보아야 할 필요가 있다는 우리 주님의 예화는 목회사역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눅14:28-30). 기도하면서 따져보고 계산하는 일을 소홀히 했기 때문에, 이렇게나 중요한 일을 단념하고 싶다는 유혹을 받는 경우가 종종 있다.


사역에는 어려움이 따르기 때문에, 신중하고 생각할 줄 아는 사람이라면 사역이 쉽고 편안할 것이라는 기대는 잠시라도 하지 말아야 한다. 다른 많은 직업들은 즐거운 일이 많을 것이라는 기대를 하게 만든다. 하지만 예외적으로 이 사역은 매일 십자가를 지고 가야 하는 일과 연결되어 있다. 그리고 이 사역에는 심한 시련들이 있을 것을 예상해야 한다. 때로는 어찌할 줄 모를 정도의 시련들이 있음을 예상하고 있어야 한다. 이 시련들은 신앙 고백 위에 세워진 교회 내부로부터 오기도 하고, 세상으로부터 오기도 하고, 사탄의 권세로부터 오기도 하고 그리고 우리 자신으로부터 오기도 한다.


그래서 칼빈은 다음과 같이 말했던 것이다.

“목회는 쉬운 것도 아니고 자기 마음대로 되는 것도 아니다. 목회는 치열하고 어려운 전투이다. 이 전투에서 사탄은 우리를 넘어뜨리려고 그가 가진 모든 힘을 기울인다. 우리를 교란시키려고 모든 수단을 다 동원하는 것이다.”


그러나 결국, 가장 큰 어려움은 바로 우리 자신에게서 오는 것이다. 쉬운 일만을 좋아하는 우리의 자연적인 성향을 극복하는 것은 결코 쉬운 일이 아니다. 자기를 부인하면서 전폭적인 헌신까지 해야 하는 일을 하기가 주저되는 자연적 성향을 극복하는 것도 쉬운 일은 아니다. 그리고 자기에게 쓰디쓰게 들리는 진리의 말씀들을 선포하기가 부끄러워서, 짐짓 조심성 있는 체하며 뒤로 미루고 싶은 자연적 성향을 극복하는 것도 쉬운 일이 아니다. 그러나 우리가 주님을 배반했던 흔적을 가지고 있는 한, 끊임없이 노력하지 않고서는 그리고 때로는 살을 깎아내는 노력을 하지 않고서는, 단 한 발자국도 앞으로 나아갈 수 없을 것이다.


이런 끔찍한 성향으로 말미암은 많은 상황들이 어려움을 가중시킨다. 마음이 내키지도 않고 나약한 상태에 있을 때에는, 우리는 더욱 분발해야 한다. 여기에 위험이 도사리고 있기 때문이다. 세상의 강한 세력이 그 힘을 우리에게 사용하는데, 우리가 약해져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사역에 대한 의욕을 점점 잃어 자기를 부인하지 않을 온갖 핑계를 찾아내고, 결국에는 열의까지 잃어버리고 의기소침한 상태에 빠지게 되면 안 되기 때문이다. 또한 우리가 전하는 메시지를 사람들이 배척할 때, 이기적이고 교만한 우리 마음이 충동질을 받을 수도 있다. 심지어 인기는 더욱 위험한 것이다. 인기가 가진 유혹의 힘에 피해를 입지 않고 도망친 사람들은 소수에 불과하며, 이들도 사실은 고통스러운 갈등을 겪었던 사람들이다. 이 사람들이 이 불같은 시련으로부터 구원 받은 것은 거의 기적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자기를 낮추고 늘 경계를 늦추지 아니 하는 습관으로 자기 삶이 조절되어 있지 않다면, 성공의 징후들은 자만심만을 부추길 따름이다. 반면에, 이런 특징이 보이지 아니하면, 즉 성공의 징조가 보이지 않으면 조급해하거나 낙담에 빠지는 경우도 비일비재하다. 그래서 결국 우리가 사방에서 공격을 받을 때, 우리에게는 “의의 무기를 좌우에 가질” 필요가 있는 것이다(고후6:7).


느헤미야와 그의 수하의 사람들처럼 우리는 한 손에는 흙손을 들고 다른 손에는 칼을 쥐고 일하지 않으면 안 된다(느4:17). 흙손을 놓으면, 사역의 진행은 중단될 것이다. 칼을 칼집에 꽂으면, 원수가 일시적이나마 유리한 고지를 획득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지혜로우신 건축가이시며 우리 구원의 사령관이신 우리 주를 의지하면서 저항의 자세를 유지하는 것만이 유일한 길이다.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주신 것에 대해 불평할 이유가 전혀 없다. 하나님이 주신 것에는 우리에게 주실 큰 축복이 가득 들어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축복된 하나님의 사역의 목적을 섬겨줄 하나님의 섭리가 따를 것이기 때문이다.

근거없는 지나친 자신감을 억누르는 데에는 십자가의 가르침만큼 좋은 약이 없다. 하나님의 약속에 대한 끊임없는 자신감을 확립하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가르침이 필요하다. 믿음의 능력과 기도의 특권과 하늘로부터 하나님의 말씀의 지지를 받고 있다는 입증을 갖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고난이 필요하다. ‘학자들의 혀’를 가지기 위해서는, 십자가의 가르침이 우리에게 필요하다.


목회사역 현장에서 어려움에 봉착했을 때는 믿음의 시각을 되살리는 것이 대단히 중요하다. 무력감을 의식하고 있으면, 책임감이라는 무거운 짐을 감당하지 못한다. 우리의 연약함을 도우시겠다는 전능하신 하나님의 약속들과 연결시켜주는 것은 바로 믿음이다(출4:10-12; 렘1:6-10; 마28:20; 고후12:9). 그리고 믿음은 우리로 하여금 어려움이라는 산에게 이렇게 외칠 수 있게 만들어준다. “큰 산아 네가 무엇이냐 네가 스룹바벨 앞에서 평지가 되리라”(슥4:7).


마지막으로, 교회 일을 하면서 치러야 하는 희생이 아주 많다는 것과, 구주의 사랑이 우리를 강권하는 힘이 있다는 것과, 그리고 전능하신 하나님의 은혜가 우리를 붙들고 계시는 버팀목이 된다는 것을 깨닫는 것 이외에, 낙심의 늪에 빠져 들어가는 것에서 우리를 구해줄 수 있는 것이 또 무엇이 있겠는가?

그래서 잘 참고 견디고 부족한 점을 고치기만 하면, 낙심은 결국 열매를 풍성히 맺는 자원이 되어 우리의 힘을 더욱 북돋아 주는 것이 된다. 또 다른 면에서 보자면, 우리에게 맡겨진 일을 사랑하면, 모든 어려운 일들을 극복하게 되어있다.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유정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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