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장 중보의 직무를 담당하신 그리스도의 사랑과 그 영광
-그의 낮아지심에 대한 첫 번째 묵상-
그리스도께서 중보의 직무를 담당하시게 된 유일하고도 강권적인 사랑이다.
(요 3:16, 개정)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계 1:5, 개정)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측량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왜냐하면 영광의 가장 큰 광채는 신적 사랑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그 사랑에는 무서움이나 공포 같은 것이 전혀 뒤따르지 않는다. 따뜻하고 무한한 새로운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Ⅰ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에 나타난 사랑의 본질
1 아버지의 사랑은 교회의 구속과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일에 대한 영원한 요인이다
성경은 끊임없이 이 사실을 가르친다. 이와 같은 아버지의 사랑이 ‘창세전’(엡 1:4)부터 아버지의 영원한 경륜 속에서 작용해왔고, 그 후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그 경륜을 효력 있게 하시는 일 속에서도 작용하였다(요 3:16).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비밀로 말미암아 인류 가운데 영원 전부터 선택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누리도록 인도받는 것도 바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살후 2:13, 개정)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살후 2: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벧전 1:2, 개정)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하나님의 이 영원하신 뜻이 선택받은 사람들의 상태와 조건을 실제로 인정하고 만족스럽게 여기신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로지 그들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만족해하실 상태와 조건으로 받아들여지고 개선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선택이 왜 하나님의 사랑이고 불리는가?
1)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스럽고도 탁월한 성품인 사랑에 부합하는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9). 그러므로 신적 속성들 가운데서 가정 먼저 겉으로 드러난 것도 분명 죄인들에게 전달된 사랑의 행동이었다. 하나님의 의지의 영원한 작용인 이 선택은 하나님 자신에게서 비롯된다.
2) 우리에게 있는 어떤 것이 선택받을 만한 자격이나 공로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값없이 선택이 주어지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선한 것이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그를 유익하려는 의도로 주어진다면 오직 사랑 때문이다. 가장 훌륭한 사람들 속에 선이 있다고 할 때, 그 선조차도 그분의 택하심의 열매이다.
3) 하나님의 택하심이 우리를 영원토록 선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므로 그 택하심의 원천은 사랑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택하심의 열매나 효과들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의 행위들이다. 그 택하심이 효력을 발생하게 된 것은 확장된 사랑의 행위로 말미암는다.
(요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렘 31:3)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2 사랑은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교회를 파생시킨 영원한 샘이다
이 영원한 아버지의 사랑의 모든 계획을 실행하고 완성시킨 것은 바로 아들의 사랑이다. 택하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로서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상태에 있다. 그런데 그들이 죄로 인해 이런 상태에서 떨어져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 이것이 이 세상과 영원한 세계에서의 모든 비참함의 원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으나 비참한 상태로 떨어졌으나 여전히 회복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피조물은 신적 긍휼의 대상이다. 우리는 우리의 비참함을 보신 그리스도의 눈 아래 있었기에 불쌍히 여기심과 긍휼히 여기심을 받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그런 상태에서 빠져나와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를 바라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기쁨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인류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시는 그리스도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셨다. 그 또한 사랑의 행위이다.
(잠 8:30-31, 개정) 『[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31]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딛 3:5, 개정)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그리스도께서 사랑과 긍휼에서 비롯되는 기꺼움과 기쁨을 가지고 계실 때에 우리를 회복하시는 방식에 관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다. 그 방식은 큰 난제와 복잡성을 가지고 있었다. 신성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전혀 어렵거나 무거운 문제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는 다른 성품을 가지셔야 했다. 즉, 그리스도께서 언제라도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을 정도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이다. 또한 자신의 영혼이 짓눌려 슬픔으로 죽을 지경이 되더라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분이 가진 기쁨을 계속 견지하면서 우리가 당한 고통을 맛보심으로써 고통 속에 있는 우리를 건져내셔야 했다. 그리스도께서 이런 온갖 어려운 문제들을 감당하면서 우리를 향한 사랑과 긍휼의 일을 조금도 등한시하지 않으셔야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신적 격위의 영원한 사랑 속에서 중보의 직무를 담당하사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려고 자원하는 마음을 가지신 후에, 그 일을 위해 한 몸이 예비되었다. 바로 이 일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몸을 입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방식으로 모든 은혜로 충만해지셨으며, 특히 인류에 대한 불타는 사랑을 가지시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입으신 인성은 그분의 영원한 사랑이 모든 열매를 맺도록 만드는 합당한 도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인성을 취하신 것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사랑의 행위이다(히 2:14,17). 그러나 그것은 그의 신성 속에서만 우러나오는 사랑의 행위였다. 왜냐하면 그 행위는 그분이 인성을 입기 전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그 일을 인성을 입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이로 인하여 그분은 영광스러우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영광을 본다. 하늘에 있는 성도의 복락과 하늘에서 성도가 차지하는 승리의 영광은 대부분 그리스도의 이 영광을 바라보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의 열매에 감사하는 데 있다는 말이다.
(계 5:9-10, 개정) 『[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하늘에서는 이 영광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광채로 빛난다. 하늘에서 영광을 소유하게 된 성도들의 영혼은 그 영광의 광채를 봄으로써 완전한 만족과 행복을 느낀다. 그런 광채와 만족을 우리는 생각할 수조차 없으며,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그 사랑은 이 땅에서의 지각을 초월한다. 하늘에서 비로소 그 사랑의 여러 국면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다만, 이 땅에서라도 우리가 게으르거나 육적인 상태에 빠져 있지 않다면, 그 사랑에 대한 소망으로 마음에 큰 위로와 기쁨을 가질 수 있다.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마음으로 그 사랑에 대해 감겨하게 되는 것이다.
Ⅱ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나타난 영광을 보기 위한 지침
1 하늘에 속한 것들을 묵상할 수 있도록 마음을 항상 준비하라
만일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이 육신적이고도 감각적인 상태에 빠져 있거나 세속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다면, 그리스도의 사랑과 영광에 대한 바른 지각이 마음속에 머물 수 없다. 또한 합법적이긴 하지만 인생의 여러 경우들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가득 차서 분주하다면, 그것은 인생 가운데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합당하게 교통하는 것을 방해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의 활동과 그 교통하는 것이 그들의 내적인 영혼의 상태를 잘 보여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은 끊임없이 땅에 속한 것을 구석구석 살피고 그런 것들을 생각하느라 분주하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나타난 영광을 묵상하라고 촉구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먼저 신령한 원리들을 힘입어 마음을 거룩하게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또 하늘에 속한 것들을 통해서 마음의 기쁨을 얻도록 힘써야 한다. 신적 영광의 많은 탁월성을 부단하게 생각하고, 아울러 하늘에 속한 것들의 샘 근원 속에 영혼이 잠겨야 한다.
2 그리스도의 사랑의 중요한 국면을 특별하게 묵상하라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기만당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마음으로 그 어떤 영광도 느끼지 못하도록
그리스도의 사랑을 일반적인 관념으로만 생각하고 끝내 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적 격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가치를 인정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보편적인 관념만 가지고 있을 뿐, 그에 대한 특별한 개념들은 가지고 있지 않다. 실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그 사랑의 중요한 국면에 대해서 특별하게 묵상할 필요가 있다.
1) 먼저, 그것이 누구의 사랑인지를 생각하라.
하나님의 아들의 신적 격위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다. 우리가 그 사랑이 누구의 사랑인지를 항상 생각할 수 있도록, 성경은 그 사랑이 표현될 때마다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요일 3:16).
2) 하나님의 아들의 이 놀라운 사랑이 어떤 방편과 방식을 통해서 드러났는지를 생각하라.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신성 안에서 그에 합당한 지혜와 선하심과 은혜의 영원한 행위를 통해서 나타났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고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그 긍휼하심의 모든 열매들이 맺힌다.
3) 그 사랑은 자원하는 사랑이다
(요일 4:10, 개정)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6장 중보의 직무를 이행하시는 그리스도의 영광
-그의 낮아지심에 대한 두 번째 묵상-
그리스도께서는 중보의 직무를 맡으시는 데 영광스러우셨으며, 그 직무를 직접 감당하시는 데에도 영광스러우셨다. 그분이 행하신 모든 일 속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영광이 서려 있었고, 그분이 당한 모든 일 가운데 그 영광이 배어 있었다. 세상적인 눈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을 홀로 심판하실 이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영광을 보았다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영광이 나타나 보였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요 1:14)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분에게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사 53;2)이 있음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날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는 이점에 대해 몇 가지를 관찰해 보려고 한다. 먼저 순종하시기 위해 그분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살펴볼 것이며, 그 다음에는 맡으신 직무를 감당하면서 그분이 당한 고난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볼 것이다.
1 그리스도가 하신 모든 일들은 자원하는 심정으로 택한 일들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직무를 감당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셨다.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8]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 40:7-8, 개정).
신적 격위 속에서 그리스도는 율법의 주인이었다. 그분은 율법보다 더 위에 계신 분이었다. 율법의 명령에 복종할 필요도 없었고, 율법의 저주를 받으실 필요도 없었다. 또한 그 후에도 무죄하셨기 때문에 율법의 저주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분은 율법 자체와 그 모든 세력보다 모든 면에서 위에 계셨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순종의 본질적인 영광이다. 그렇게 하기로 작정하신 그분의 지혜와 은혜와 사랑과 겸비하심이 모든 행동 속에 배어 있고, 그 순종이 모든 의무 가운데 스며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으시고,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요한에게로 나가시자 요한은 그리스도 자신을 위해서는 세례 받으실 필요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분에게 세례를 베푸는 마땅한 도리를 사양한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마 3:15, 개정). 만유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것에 순종하신 것이야말로 영광스러운 은혜의 증거가 된다.
2 이 순종은 그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순종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지만 순종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원하심이 아니었다면 순종해야 할 아무런 의무가 없었지만 그 일을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존귀를 하락하시되, 한편으로 모든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게’ 사셨다(롬 5:19). 하나님께서 존귀와 영광을 그리스도에게 허락하시되, 그분의 순종을 교회의 완전한 순종으로 여기시고는 교회를 의롭다고 칭해 주시는 방식을 취하신 것이다.
3 절대적으로 보편적이고 완전한 그리스도의 순종은 율법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의 위대한 표현이다
하나님의 손이 돌판에 십계명을 기록하셨을 때 영광이 나타났다. 또한 신자들의 마음속에 그것이 신령하게 새겨졌을 때는 더욱더 탁월하게 보였다. 그러나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완전하게 이루신 그리스도의 거룩과 순종 안에서만 그 율법이 완전하게 실증될 수 있다. 율법 안에 하나님의 거룩이 들어 있었다고 할 때,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순종하신 일은 그분의 영광에서 결코 작은 부분이 아니었다. 율법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이 바로 그 순종을 통해서 나타났으며, 인성적인 차원에서 볼 때 참으로 그것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거룩이 온전히 표현된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난관과 대적을 물리치고 순종을 완성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인성 속에 침입하여 들어온 그 엄청난 손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분이시다. 우리 속에 들어온 그 성품의 손상은 내적으로 율법에 순종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는일을 전혀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께서는 밖에서 침입하여 들어오는 모든 대적과 온갖 시험과 고난과 거스름에 대해 우리 모든 사람들보다 더 잘 대처하셨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영광스러운 말씀이 나온 것이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히 5:8).
5 이 순종이 누구의 순종인지를 생각할 때 그 영광이 참으로 놀랍게 드러난다
이 순종이 바로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의 순종이셨다. 그분은 한 인격 속에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 되셨다. 하늘에 계시며 모든 만유보다 높으신 만유의 주임이 이 세상에서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사셨으며, 하나님의 모든 율법에에서 가장 엄격한 순종의 길을 걸으셨다. 하늘의 모든 천사들과 피조물들의 경배를 받으실 분이 하나님께 밤낮 기도를 드리셨으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든 의무를 부단히 행하셨다. 하나님의 집을 맡은 주인이신 그분이 그 집에서 가장 작은 직무를 충성되게 감당하셨다(히 3:6).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 듯이 모든 사람을 지으신 분이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엄격한 공의의 원칙을 지키셨다. 그가 합당히 행해야 할 모든 일을 다 행하신 것이다. 그분이 그렇게 행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는데도 가장 엄격한 사랑의 원칙을 지키셨다. 바로 이것이 자신의 책임을 감당하시면서 드린 그 순종을 신비롭고도 영광스럽게 만든 요인이다.
1) 그리스도의 고난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신 직무 때문에 당한 고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우리에게 떠오른다. 그리스도의 직무와 승리와 성공과 그분의 개선자적인 승리에는 큰 영광이 함께한다(사 63:1-3). 그러나 그보다 먼저 그분에게는 고난이 요구되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눅 24:26, 개정).
그러나 우리의 부족한 지각으로는 그리스도의 이런 고난을 바르게 생각할 수 없다. 이 고난은 우리의 지성을 금방 물러가게 만든다. 어느 누구도 자기의 묵상으로는 금방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바다 속에 들어가 그 깊이를 잴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
2)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의 중압감을 가지고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죄와 죄인들에게 항상 경고하셨던 그 모든 악을 스스로 담당하셨다. 우리는, 죽을 정도로 슬퍼하시면서 고뇌에 차고 핏방울 같은 땀을 흘리시는 그분의 모습과 통곡하면서 간구하시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또한 무시무시한 시련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시면서 자신에게 다가올 일들을 아시고는 놀라시는 그분의 모습도 볼수 있다. 그분은 이 모든 일을 통해서 자신의 영혼을 속죄제로 드리셨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사 53:8, 개정).
우리가 그런 일들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죽음에 내주셨다(롬 8:32).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거기에 수반되는 모든 불행을 당하셨다. 그것도 우리처럼 불쌍하고 가련하며 타락한 죄인들을 위해서 말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본성이 당해야 할 그 불행을 스스로 당하셨다.
이 모든 일을 생각할 때 그리스도의 영광이 신자들의 눈에 얼마나 놀랍게 드러나는가! 주님께서는 죄를 깨닫고 두려워하는 죄인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죄인들을 자기에게로 초청하실 때에도 여전히 말씀하신다.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눈앞에 분명하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으로 나타난다(갈 3:1). 그분의 영광을 이루고 있는 것 안에서, 또한 자신이 담당한 직무 때문에 당해야 하는 고난 안에서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난해지고 멸시와 핍박과 질책을 받으며 욕설을 들은 후에 나무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분이 하신 모든 일이 성경에 기록되고 읽히고 설교되며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은, 바로 그 목적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 이 일들 가운데서 어떤 영광을 볼 수 있는가? 모든 유대인과 이방인이 바로 그 일 때문에 넘어지지 않았는가? 그들에게 주님은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도록 지명되지 않았는가? 다른 사람의 비참함을 통해서 도움과 구원을 얻으리라 기대한다는 것이 어리석게 여겨지지 않는가?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써 살 소망을 가진다는 것이 어리석게 여겨지지 않는가?
사도는 고린도전서 1장18-25저에서 그것이 어리석게 여겨진다는 사실을 상세하게 선언한다. 세상의 지혜로는 그것이 어리석어 보이지만, 믿는 사람들에게는 바로 그 일 때문에 그리스도가 존귀하고 영화로우며 보배로우시다(벧전 2:6-7). 왜냐하면 그 안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고전 1:24)가 되시기 때문이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에 관한 사람들의 생각과 이해가 그처럼 나우어져 있는 이유를 상세하게 선언한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3-6).
-그의 낮아지심에 대한 첫 번째 묵상-
그리스도께서 중보의 직무를 담당하시게 된 유일하고도 강권적인 사랑이다.
(요 3:16, 개정) 『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계 1:5, 개정) 『또 충성된 증인으로 죽은 자들 가운데에서 먼저 나시고 땅의 임금들의 머리가 되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있기를 원하노라 우리를 사랑하사 그의 피로 우리 죄에서 우리를 해방하시고』
그리스도께서는 참으로 측량할 수 없는 방식으로 우리를 사랑하심으로써 자신의 영광을 드러내셨다. 왜냐하면 영광의 가장 큰 광채는 신적 사랑의 영광이기 때문이다. 그 사랑에는 무서움이나 공포 같은 것이 전혀 뒤따르지 않는다. 따뜻하고 무한한 새로운 위로와 용기를 주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Ⅰ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에 나타난 사랑의 본질
1 아버지의 사랑은 교회의 구속과 구원을 위해 그리스도께서 하신 모든 일에 대한 영원한 요인이다
성경은 끊임없이 이 사실을 가르친다. 이와 같은 아버지의 사랑이 ‘창세전’(엡 1:4)부터 아버지의 영원한 경륜 속에서 작용해왔고, 그 후 자신의 아들을 보내사 그 경륜을 효력 있게 하시는 일 속에서도 작용하였다(요 3:16). 그리스도의 피와 성령의 거룩하게 하시는 비밀로 말미암아 인류 가운데 영원 전부터 선택받은 사람들이 하나님을 누리도록 인도받는 것도 바로 하나님의 사랑 때문이다.
(살후 2:13, 개정) 『주께서 사랑하시는 형제들아 우리가 항상 너희에 관하여 마땅히 하나님께 감사할 것은 하나님이 처음부터 너희를 택하사 성령의 거룩하게 하심과 진리를 믿음으로 구원을 받게 하심이니』
(살후 2:16)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와 우리를 사랑하시고 영원한 위로와 좋은 소망을 은혜로 주신 하나님 우리 아버지께서』
(벧전 1:2, 개정) 『곧 하나님 아버지의 미리 아심을 따라 성령이 거룩하게 하심으로 순종함과 예수 그리스도의 피 뿌림을 얻기 위하여 택하심을 받은 자들에게 편지하노니 은혜와 평강이 너희에게 더욱 많을지어다』
하나님의 이 영원하신 뜻이 선택받은 사람들의 상태와 조건을 실제로 인정하고 만족스럽게 여기신다는 의미는 아니다. 오로지 그들이 하나님께서 인정하시고 만족해하실 상태와 조건으로 받아들여지고 개선되는 것을 그 내용으로 하고 있다.
그렇다면 이러한 선택이 왜 하나님의 사랑이고 불리는가?
1) 그것이 하나님의 영광스럽고도 탁월한 성품인 사랑에 부합하는 하나님의 행위이기 때문이다. ‘하나님은 사랑’이시다(요일 4:8-9). 그러므로 신적 속성들 가운데서 가정 먼저 겉으로 드러난 것도 분명 죄인들에게 전달된 사랑의 행동이었다. 하나님의 의지의 영원한 작용인 이 선택은 하나님 자신에게서 비롯된다.
2) 우리에게 있는 어떤 것이 선택받을 만한 자격이나 공로를 제공하는 것이 아니라 그저 값없이 선택이 주어지기 때문에 ‘사랑’이라는 말로 표현된다. 선한 것이 받을 만한 자격이 전혀 없는 사람에게 그를 유익하려는 의도로 주어진다면 오직 사랑 때문이다. 가장 훌륭한 사람들 속에 선이 있다고 할 때, 그 선조차도 그분의 택하심의 열매이다.
3) 하나님의 택하심이 우리를 영원토록 선하게 만들기 위한 것이므로 그 택하심의 원천은 사랑임에 틀림없다. 하나님의 택하심의 열매나 효과들은 생각조차 할 수 없는 놀라운 사랑의 행위들이다. 그 택하심이 효력을 발생하게 된 것은 확장된 사랑의 행위로 말미암는다.
(요3:16)하나님이 세상을 이처럼 사랑하사 독생자를 주셨으니 이는 그를 믿는 자마다 멸망하지 않고 영생을 얻게 하려 하심이라
(렘 31:3) 『옛적에 여호와께서 나에게 나타나사 내가 영원한 사랑으로 너를 사랑하기에 인자함으로 너를 이끌었다 하였노라』
2 사랑은 그리스도의 중보로 말미암아 교회를 파생시킨 영원한 샘이다
이 영원한 아버지의 사랑의 모든 계획을 실행하고 완성시킨 것은 바로 아들의 사랑이다. 택하심을 받은 모든 사람들은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은 피조물로서 하나님과 사랑을 나누는 상태에 있다. 그런데 그들이 죄로 인해 이런 상태에서 떨어져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 이것이 이 세상과 영원한 세계에서의 모든 비참함의 원인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형상으로 지음 받았으나 비참한 상태로 떨어졌으나 여전히 회복의 가능성을 지니고 있는 피조물은 신적 긍휼의 대상이다. 우리는 우리의 비참함을 보신 그리스도의 눈 아래 있었기에 불쌍히 여기심과 긍휼히 여기심을 받았다. 그리스도께서 우리가 그런 상태에서 빠져나와 회복될 수 있다는 것을 아시고 우리를 바라보시기 때문에 그리스도의 사랑이 기쁨으로 작용하는 것이다. 인류가 구원받아 하나님의 영광에 이르게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보시는 그리스도는 말할 수 없는 기쁨을 누리셨다. 그 또한 사랑의 행위이다.
(잠 8:30-31, 개정) 『[30] 내가 그 곁에 있어서 창조자가 되어 날마다 그의 기뻐하신 바가 되었으며 항상 그 앞에서 즐거워하였으며 [31] 사람이 거처할 땅에서 즐거워하며 인자들을 기뻐하였느니라』
(딛 3:5, 개정) 『우리를 구원하시되 우리가 행한 바 의로운 행위로 말미암지 아니하고 오직 그의 긍휼하심을 따라 중생의 씻음과 성령의 새롭게 하심으로 하셨나니』
그리스도께서 사랑과 긍휼에서 비롯되는 기꺼움과 기쁨을 가지고 계실 때에 우리를 회복하시는 방식에 관한 하나님의 뜻이 나타난다. 그 방식은 큰 난제와 복잡성을 가지고 있었다. 신성의 입장에서 보면 그것은 전혀 어렵거나 무거운 문제가 아니다. 그렇지만 그는 다른 성품을 가지셔야 했다. 즉, 그리스도께서 언제라도 자기 자신을 돌보지 않을 정도로 우리를 불쌍히 여기신 것이다. 또한 자신의 영혼이 짓눌려 슬픔으로 죽을 지경이 되더라도, 우리를 구원하기 위해서 그분이 가진 기쁨을 계속 견지하면서 우리가 당한 고통을 맛보심으로써 고통 속에 있는 우리를 건져내셔야 했다. 그리스도께서 이런 온갖 어려운 문제들을 감당하면서 우리를 향한 사랑과 긍휼의 일을 조금도 등한시하지 않으셔야 했던 것이다.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신적 격위의 영원한 사랑 속에서 중보의 직무를 담당하사 우리의 구원을 이루시려고 자원하는 마음을 가지신 후에, 그 일을 위해 한 몸이 예비되었다. 바로 이 일을 이루기 위해 그리스도께서 몸을 입고, 말로 형용할 수 없는 방식으로 모든 은혜로 충만해지셨으며, 특히 인류에 대한 불타는 사랑을 가지시게 된 것이다. 그러므로 그리스도께서 입으신 인성은 그분의 영원한 사랑이 모든 열매를 맺도록 만드는 합당한 도구이다.
예수 그리스도께서 우리의 인성을 취하신 것은 말로 형용할 수 없는 사랑의 행위이다(히 2:14,17). 그러나 그것은 그의 신성 속에서만 우러나오는 사랑의 행위였다. 왜냐하면 그 행위는 그분이 인성을 입기 전에 일어난 일이기 때문이다. 그 일을 인성을 입고 나서야 비로소 시작된 것이 아니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의 사랑이다. 이로 인하여 그분은 영광스러우시다.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서 믿음으로 말미암아 그분의 영광을 본다. 하늘에 있는 성도의 복락과 하늘에서 성도가 차지하는 승리의 영광은 대부분 그리스도의 이 영광을 바라보는 것을 골자로 하고 있다. 다시 말하면, 그리스도의 사랑의 열매에 감사하는 데 있다는 말이다.
(계 5:9-10, 개정) 『[9] 그들이 새 노래를 불러 이르되 두루마리를 가지시고 그 인봉을 떼기에 합당하시도다 일찍이 죽임을 당하사 각 족속과 방언과 백성과 나라 가운데에서 사람들을 피로 사서 하나님께 드리시고 [10] 그들로 우리 하나님 앞에서 나라와 제사장들을 삼으셨으니 그들이 땅에서 왕 노릇 하리로다 하더라』
하늘에서는 이 영광이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광채로 빛난다. 하늘에서 영광을 소유하게 된 성도들의 영혼은 그 영광의 광채를 봄으로써 완전한 만족과 행복을 느낀다. 그런 광채와 만족을 우리는 생각할 수조차 없으며, 그 어떤 말로도 표현할 수 없다. 그 사랑은 이 땅에서의 지각을 초월한다. 하늘에서 비로소 그 사랑의 여러 국면들을 이해하게 될 것이다. 다만, 이 땅에서라도 우리가 게으르거나 육적인 상태에 빠져 있지 않다면, 그 사랑에 대한 소망으로 마음에 큰 위로와 기쁨을 가질 수 있다. 다 이해할 수는 없지만 마음으로 그 사랑에 대해 감겨하게 되는 것이다.
Ⅱ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나타난 영광을 보기 위한 지침
1 하늘에 속한 것들을 묵상할 수 있도록 마음을 항상 준비하라
만일 여러분의 마음과 생각이 육신적이고도 감각적인 상태에 빠져 있거나 세속적인 것들로 가득 차 있다면, 그리스도의 사랑과 영광에 대한 바른 지각이 마음속에 머물 수 없다. 또한 합법적이긴 하지만 인생의 여러 경우들에 대한 생각으로 마음이 가득 차서 분주하다면, 그것은 인생 가운데서 주 예수 그리스도와 합당하게 교통하는 것을 방해한다.
거의 모든 사람들의 활동과 그 교통하는 것이 그들의 내적인 영혼의 상태를 잘 보여준다. 대부분의 사람들의 마음은 끊임없이 땅에 속한 것을 구석구석 살피고 그런 것들을 생각하느라 분주하다. 그런 사람들에게 그리스도의 사랑 가운데 나타난 영광을 묵상하라고 촉구하는 것은 쓸데없는 일이다.
먼저 신령한 원리들을 힘입어 마음을 거룩하게 만드는 일이 필요하다. 또 하늘에 속한 것들을 통해서 마음의 기쁨을 얻도록 힘써야 한다. 신적 영광의 많은 탁월성을 부단하게 생각하고, 아울러 하늘에 속한 것들의 샘 근원 속에 영혼이 잠겨야 한다.
2 그리스도의 사랑의 중요한 국면을 특별하게 묵상하라
많은 사람들이 스스로 기만당하는 문제가 있다. 그것은 마음으로 그 어떤 영광도 느끼지 못하도록
그리스도의 사랑을 일반적인 관념으로만 생각하고 끝내 버리는 것이다. 그리스도의 신적 격위를 믿는 모든 사람들은 그리스도의 사랑의 가치를 인정한다. 그렇지 않은 사람들은 그리스도인이 아니다.
그러나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저 보편적인 관념만 가지고 있을 뿐, 그에 대한 특별한 개념들은 가지고 있지 않다. 실로 그리스도의 사랑이 무엇인지 알지 못하는 것이다. 이런 함정에서 벗어나기 위하여 그 사랑의 중요한 국면에 대해서 특별하게 묵상할 필요가 있다.
1) 먼저, 그것이 누구의 사랑인지를 생각하라.
하나님의 아들의 신적 격위에서 우러나오는 사랑이다. 우리가 그 사랑이 누구의 사랑인지를 항상 생각할 수 있도록, 성경은 그 사랑이 표현될 때마다 그분이 하나님이심을 분명하게 가르치고 있다. “그가 우리를 위하여 목숨을 버리셨으니 우리가 이로써 사랑을 알고”(요일 3:16).
2) 하나님의 아들의 이 놀라운 사랑이 어떤 방편과 방식을 통해서 드러났는지를 생각하라.
그 사랑은 그리스도의 신성 안에서 그에 합당한 지혜와 선하심과 은혜의 영원한 행위를 통해서 나타났다. 그리고 우리를 위해서 일하시고 고난을 받으심으로써 그 긍휼하심의 모든 열매들이 맺힌다.
3) 그 사랑은 자원하는 사랑이다
(요일 4:10, 개정) 『사랑은 여기 있으니 우리가 하나님을 사랑한 것이 아니요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사 우리 죄를 속하기 위하여 화목 제물로 그 아들을 보내셨음이라』
6장 중보의 직무를 이행하시는 그리스도의 영광
-그의 낮아지심에 대한 두 번째 묵상-
그리스도께서는 중보의 직무를 맡으시는 데 영광스러우셨으며, 그 직무를 직접 감당하시는 데에도 영광스러우셨다. 그분이 행하신 모든 일 속에 눈에 보이지 않는 영광이 서려 있었고, 그분이 당한 모든 일 가운데 그 영광이 배어 있었다. 세상적인 눈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그것이 보이지 않았다. 그러나 세상을 홀로 심판하실 이의 눈에는 그렇지 않았다. 사람들이 그 영광을 보았다면, 영광의 주님을 십자가에 못 박지 않았을 것이다. 물론 어떤 사람들에게는 그 영광이 나타나 보였다. “우리가 그의 영광을 보니 아버지의 독생자의 영광이요”(요 1:14)라고 말하였던 것이다. 그러나 다른 사람들은 그분에게 ‘흠모할 만한 아름다운 것’(사 53;2)이 있음을 전혀 알지 못했다. 그리고 오늘날도 역시 마찬가지이다.
나는 이점에 대해 몇 가지를 관찰해 보려고 한다. 먼저 순종하시기 위해 그분이 어떤 일을 하셨는지를 살펴볼 것이며, 그 다음에는 맡으신 직무를 감당하면서 그분이 당한 고난이 어떤 것인지를 살펴볼 것이다.
1 그리스도가 하신 모든 일들은 자원하는 심정으로 택한 일들이다
그리스도는 자신의 직무를 감당함에 있어서 하나님의 율법에 순종하셨다. “그 때에 내가 말하기를 내가 왔나이다 나를 가리켜 기록한 것이 두루마리 책에 있나이다 [8] 나의 하나님이여 내가 주의 뜻 행하기를 즐기오니 주의 법이 나의 심중에 있나이다 하였나이다”(시 40:7-8, 개정).
신적 격위 속에서 그리스도는 율법의 주인이었다. 그분은 율법보다 더 위에 계신 분이었다. 율법의 명령에 복종할 필요도 없었고, 율법의 저주를 받으실 필요도 없었다. 또한 그 후에도 무죄하셨기 때문에 율법의 저주와 아무 상관이 없었다. 그분은 율법 자체와 그 모든 세력보다 모든 면에서 위에 계셨다.
이것이 바로 그분의 순종의 본질적인 영광이다. 그렇게 하기로 작정하신 그분의 지혜와 은혜와 사랑과 겸비하심이 모든 행동 속에 배어 있고, 그 순종이 모든 의무 가운데 스며있다. 이것이야말로 하나님이 보시기에 좋으시고, 우리에게 유익한 것이다. 그래서 그리스도께서 세례를 받으시기 위해 요한에게로 나가시자 요한은 그리스도 자신을 위해서는 세례 받으실 필요가 전혀 없다는 사실을 알고서 그분에게 세례를 베푸는 마땅한 도리를 사양한 것이다. “예수께서 대답하여 이르시되 이제 허락하라 우리가 이와 같이 하여 모든 의를 이루는 것이 합당하니라 하시니 이에 요한이 허락하는지라”(마 3:15, 개정). 만유의 주가 되시는 그리스도께서 그 모든 것에 순종하신 것이야말로 영광스러운 은혜의 증거가 된다.
2 이 순종은 그분 자신을 위한 것이 아니라 우리를 위한 것이다.
우리는 마땅히 순종해야 할 의무를 가지고 있지만 순종하지는 못했다. 그러나 그리스도는 자원하심이 아니었다면 순종해야 할 아무런 의무가 없었지만 그 일을 하셨다. 그래서 하나님께서 그리스도에게 존귀를 하락하시되, 한편으로 모든 교회를 위한 ‘그리스도의 순종하심으로 많은 사람이 의인이 되게’ 사셨다(롬 5:19). 하나님께서 존귀와 영광을 그리스도에게 허락하시되, 그분의 순종을 교회의 완전한 순종으로 여기시고는 교회를 의롭다고 칭해 주시는 방식을 취하신 것이다.
3 절대적으로 보편적이고 완전한 그리스도의 순종은 율법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의 위대한 표현이다
하나님의 손이 돌판에 십계명을 기록하셨을 때 영광이 나타났다. 또한 신자들의 마음속에 그것이 신령하게 새겨졌을 때는 더욱더 탁월하게 보였다. 그러나 율법이 요구하는 바를 완전하게 이루신 그리스도의 거룩과 순종 안에서만 그 율법이 완전하게 실증될 수 있다. 율법 안에 하나님의 거룩이 들어 있었다고 할 때, 그리스도께서 율법에 순종하신 일은 그분의 영광에서 결코 작은 부분이 아니었다. 율법 안에 있는 하나님의 거룩이 바로 그 순종을 통해서 나타났으며, 인성적인 차원에서 볼 때 참으로 그것을 통해서만 하나님의 거룩이 온전히 표현된 것이다.
4 그리스도께서는 모든 난관과 대적을 물리치고 순종을 완성하셨다
그리스도께서는 우리의 인성 속에 침입하여 들어온 그 엄청난 손상과는 아무런 관계가 없는 분이시다. 우리 속에 들어온 그 성품의 손상은 내적으로 율법에 순종하는 것을 어렵게 만들었다. 율법에 완전히 순종하는일을 전혀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그런데도 그리스도께서는 밖에서 침입하여 들어오는 모든 대적과 온갖 시험과 고난과 거스름에 대해 우리 모든 사람들보다 더 잘 대처하셨다. 그래서 다음과 같은 영광스러운 말씀이 나온 것이다. “그가 아들이시면서도 받으신 고난으로 순종함을 배워서”(히 5:8).
5 이 순종이 누구의 순종인지를 생각할 때 그 영광이 참으로 놀랍게 드러난다
이 순종이 바로 사람이 되신 하나님의 아들의 순종이셨다. 그분은 한 인격 속에서 하나님이시면서 동시에 사람이 되셨다. 하늘에 계시며 모든 만유보다 높으신 만유의 주임이 이 세상에서 자신을 온전히 비우고 사셨으며, 하나님의 모든 율법에에서 가장 엄격한 순종의 길을 걸으셨다. 하늘의 모든 천사들과 피조물들의 경배를 받으실 분이 하나님께 밤낮 기도를 드리셨으며, 하나님께 예배하는 모든 의무를 부단히 행하셨다. 하나님의 집을 맡은 주인이신 그분이 그 집에서 가장 작은 직무를 충성되게 감당하셨다(히 3:6).
토기장이가 진흙으로 그릇을 만들 듯이 모든 사람을 지으신 분이 모든 사람들 중에서 가장 엄격한 공의의 원칙을 지키셨다. 그가 합당히 행해야 할 모든 일을 다 행하신 것이다. 그분이 그렇게 행하지 않으면 그만이었는데도 가장 엄격한 사랑의 원칙을 지키셨다. 바로 이것이 자신의 책임을 감당하시면서 드린 그 순종을 신비롭고도 영광스럽게 만든 요인이다.
1) 그리스도의 고난
그리스도께서 담당하신 직무 때문에 당한 고난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영광이 우리에게 떠오른다. 그리스도의 직무와 승리와 성공과 그분의 개선자적인 승리에는 큰 영광이 함께한다(사 63:1-3). 그러나 그보다 먼저 그분에게는 고난이 요구되었다. “그리스도가 이런 고난을 받고 자기의 영광에 들어가야 할 것이 아니냐 하시고”(눅 24:26, 개정).
그러나 우리의 부족한 지각으로는 그리스도의 이런 고난을 바르게 생각할 수 없다. 이 고난은 우리의 지성을 금방 물러가게 만든다. 어느 누구도 자기의 묵상으로는 금방 그리스도의 고난이라는 바다 속에 들어가 그 깊이를 잴 수 없다는 것을 발견할 수밖에 없다.
2) 하나님의 진노와 율법의 저주의 중압감을 가지고 이 땅에서 그리스도를 바라보기
그리스도께서는 하나님께서 죄와 죄인들에게 항상 경고하셨던 그 모든 악을 스스로 담당하셨다. 우리는, 죽을 정도로 슬퍼하시면서 고뇌에 차고 핏방울 같은 땀을 흘리시는 그분의 모습과 통곡하면서 간구하시는 모습을 바라볼 수 있다. 또한 무시무시한 시련 속으로 들어가려고 하시면서 자신에게 다가올 일들을 아시고는 놀라시는 그분의 모습도 볼수 있다. 그분은 이 모든 일을 통해서 자신의 영혼을 속죄제로 드리셨다.
“그는 곤욕과 심문을 당하고 끌려 갔으나 그 세대 중에 누가 생각하기를 그가 살아 있는 자들의 땅에서 끊어짐은 마땅히 형벌 받을 내 백성의 허물 때문이라 하였으리요”(사 53:8, 개정).
우리가 그런 일들에 대해서 뭐라고 말할 것인가? 하나님께서는 자신의 아들을 아끼지 않고 죽음에 내주셨다(롬 8:32). 그리고 그리스도께서는 거기에 수반되는 모든 불행을 당하셨다. 그것도 우리처럼 불쌍하고 가련하며 타락한 죄인들을 위해서 말이다. 하나님의 영원한 아들이 우리를 위해서, 우리의 본성이 당해야 할 그 불행을 스스로 당하셨다.
이 모든 일을 생각할 때 그리스도의 영광이 신자들의 눈에 얼마나 놀랍게 드러나는가! 주님께서는 죄를 깨닫고 두려워하는 죄인들에게 말씀하신다. 그리고 죄인들을 자기에게로 초청하실 때에도 여전히 말씀하신다. 복음 안에서 그리스도께서는 우리 눈앞에 분명하게 ‘십자가에 못 박히신 분’으로 나타난다(갈 3:1). 그분의 영광을 이루고 있는 것 안에서, 또한 자신이 담당한 직무 때문에 당해야 하는 고난 안에서 말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가난해지고 멸시와 핍박과 질책을 받으며 욕설을 들은 후에 나무에 달리신 그리스도를 바라보아야 한다. 그분이 하신 모든 일이 성경에 기록되고 읽히고 설교되며 우리에게 제시되는 것은, 바로 그 목적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가 여기서 무엇을 볼 수 있는가? 이 일들 가운데서 어떤 영광을 볼 수 있는가? 모든 유대인과 이방인이 바로 그 일 때문에 넘어지지 않았는가? 그들에게 주님은 부딪치는 돌과 걸려 넘어지게 하는 바위가 되도록 지명되지 않았는가? 다른 사람의 비참함을 통해서 도움과 구원을 얻으리라 기대한다는 것이 어리석게 여겨지지 않는가? 그리스도가 죽으심으로써 살 소망을 가진다는 것이 어리석게 여겨지지 않는가?
사도는 고린도전서 1장18-25저에서 그것이 어리석게 여겨진다는 사실을 상세하게 선언한다. 세상의 지혜로는 그것이 어리석어 보이지만, 믿는 사람들에게는 바로 그 일 때문에 그리스도가 존귀하고 영화로우며 보배로우시다(벧전 2:6-7). 왜냐하면 그 안에서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능력이요 하나님의 지혜’(고전 1:24)가 되시기 때문이다.
사도는 그리스도의 십자가와 고난에 관한 사람들의 생각과 이해가 그처럼 나우어져 있는 이유를 상세하게 선언한다. “만일 우리의 복음이 가리었으면 망하는 자들에게 가리어진 것이라 [4] 그 중에 이 세상의 신이 믿지 아니하는 자들의 마음을 혼미하게 하여 그리스도의 영광의 복음의 광채가 비치지 못하게 함이니 그리스도는 하나님의 형상이니라 [5] 우리는 우리를 전파하는 것이 아니라 오직 그리스도 예수의 주 되신 것과 또 예수를 위하여 우리가 너희의 종 된 것을 전파함이라 [6] 어두운 데에 빛이 비치라 말씀하셨던 그 하나님께서 예수 그리스도의 얼굴에 있는 하나님의 영광을 아는 빛을 우리 마음에 비추셨느니라”(고후 4:3-6).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박성수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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