심리학비판

[스크랩] 마케팅 교회의 교회적 배경 : 부흥주의, 자유주의, 신복음주의/ 옥성호(강의안)

강대식 2016. 8. 16. 20:17

마케팅 교회의 교회적 배경 : 부흥주의, 자유주의, 신복음주의

 

1. 찰스 피니와 부흥주의 출현

 

프래그머티즘이 오늘날 교회 속에 깊게 뿌리내리도록 한 사람 중의 일등 공신을 꼽는다면 그 자리는 단연 19세기 미국의 부흥사 찰스 피니이다. 1792년에 태어난 피니는 변호사로 사회 생활을 시작했다. 어느 날 성령이 전기 충격과도 같은 강력함으로 자신의 몸을 씻어 내리는 체험을 하게 된다. 그 체험 바로 다음 날 변호를 의뢰하러 온 사람에게 말했다. “나는 이제 예수님만을 변호하면서 살도록 정해진 사람이요. 나는 당신을 변호할 수 없소.”

 

존 맥아더, “찰스 피니는 하나님의 선택 교리를 하나님의 독재적이고 변덕스런 주권적 행위로 치부하고 무시함으로 처음부터 잘못된 길로 들어섰다. 그는 회심이 오로지 하나님의 역사하심에 의한 것이라는 교리를 거부했다. 그는 대신 믿음이란 철저히 인간의 결정에 달린 것이고 따라서 구원은 죄인 스스로가 하나님을 향해 나아감으로 이루어질 수 있다고 가르쳤다.”

 

찰스 피니는 하나님의 주권을 철저히 인간의 선택으로 대체함으로 미국의 교회 속에 프래그머티즘이 본격적으로 자리잡을 수 있도록 든든한 신학적 토대를 만든 인물이다. 그 토대 위에 그의 뒤를 이어서 노먼 빈센트 필, 로버트 슐러, 헤리 포스딕과 같은 그의 제자들이 20세기 프래그머티즘으로 대표되는 미국 기독교의 꽃을 활짝 피웠다.

 

존 맥아더, “ 피니는 인간의 전적 타락과 하나님의 주권적 구원은 결코 복음주의와 양립할 수 없는 개념이라고 결론을 내렸다. 피니는 거룩하신 하나님이 사람들의 죄를 예수 그리스도에게 전가하거나 예수 그리스도의 의를 죄인들에게 줄 수 있다는 기독교의 교리 자체를 부인했다. 피니는 로마서 3,4,5장에서 분명히 가르치는 이 칭의의 교리를 신학적 소설이라고 결론 내렸다. 간단히 말해 피니는 결국 복음주의 신학의 핵심을 부인한 것이다.”

 

피니는 어떤 소원이 있을 때 최대한 구체적으로 열거하면서 기도하기만 하면 모든 것을 다 얻을 수 있다는 새로운 기도의 법칙까지 만들어 냈다. 오늘날 널리 퍼진 왜곡된 기도의 진원지인 셈이다.- 이안 머레이, “부흥과 부흥주의

 

오늘날 우리에게 너무 자연스러운 구원 초청도 피니가 시작한 새로운 방법이었다. 피니가 이룬 대중적인 성공은 그로 하여금 자신의 잘못된 신학에 대해 더욱더 확신을 주게 된다. 숫자가 이룬 그의 성공은 여간해서 사람들로 하여금 그에게 의문을 제기하지 못하도록 했다. 의문을 제기한다면 이렇게 되겠지요, “그래, 너 똑똑하다. 그런데 똑똑한 너는 사람들을몇 명이나 모았는데?”

 

제리 파웰(미국 극우 보수주의를 대표하는 목사), “피니는 나의 영웅 중의 한 명이다. 나뿐 아니라 빌리 그레이엄을 포함한 많은 복음주의자의 영웅이기도 하다.” 키스 그린과 같은 복음송가 가수가 가장 자주 인용하는 사람이기도 하다. 빈야드 운동, 교회 성장 운동, 정치적/사회적 켐페인, 텔레비전 부흥사들, 그리고 프라미스 키퍼스 운동에 이르기까지 그의 영향은 끝이 없다. 휘튼 대학의 학장을 역임했던 한 인물은 피니여, 영원하시라!”라고 말했다.

 

마틴 로이드 존스, “피니야말로 오늘날 복음주의와 관련한 혼란에 가장 큰 책임을 져야 할 사람이다. 이제 사람들은 교회가 약해져 가는 상황을 보면서 하나님께로 돌아갈 것을 생각하고 하나님이 주시는 부흥을 위해 기도하는 대신 위원회를 조직하며 복음 캠페인을 기획하고 프로그램을 준비, 광고, 발족시킬 준비를 하고 있다.”

 

피니는 다양한 이벤트 성의 행사들을 통해 인간의 가장 취약한 부분을 공략하는 데 집중했다. 바로 인간의 감정이다. 피니는 무엇보다도 인간을 움직이는 데 가장 효과적인 영역인 인간의 감정을 자극하는 데에 설교를 포함하여 자신의 모든 아이디어를 집중했다.

 

2. 슐라이어마허와 자유주의의 출현

 

현대신학은 슐라이어마허가 현대 세계관에 기초하여 기독교의 전통적인 진리를 현대의 정황에 맞게 재해석함으로써 현대 신학이 나아갈 방향을 제시함으로 이루어졌다. 그는 기독교에 대한 현대 세계의 도전에 신학적으로 응답한 최초의 신학자였다. 이로 인해 그는 현대 신학의 아버지라는 칭호를 얻게 되었다. 그는 칸트 이후 이론적으로 가사상태에 빠진 신학을 학문의 세계에서 인정 받을 수 있는 수준으로 정립하여 제시한 최초의 신학자였다. 그러나 그의 신앙고백을 보자. 자기 아버지에게 보낸 편지의 한 부분이다.

 

나는 자신을 인자, 사람의 아들이라고 부른 그 사람이 진짜 영원한 하나님이라고 도저히 믿을 수가 없습니다. 나는 그 사람의 죽음이 다른 사람들을 위한 대속의 죽음이라고 믿을 수 없습니다. 왜냐하면 그는 자신의 입으로 그런 말을 한 적이 없으니까요. 그리고 그런 대속의 죽음이라는 것이 애초에 전혀 필요하지 않았다고 생각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이 인간에게 결코 완전을 요구하실 리가 없지 않겠습니까? 왜냐하면 하나님은 애초에 인간을 전혀 완전하지 않게 창조하셨으니까요. 물론 인간이 완전을 추구하는 것은 가능하겠지만요. 그러니 하나님이 인간이 완전함을 달성하지 못했다는 이유로 인간을 영원한 벌에 처하실 리도 없지요.”

 

슐라이어마허가 그의 신학의 토대로 삼은 것은 성경이 아니었다. 그는 대신 개개인이 느끼는 종교적 경험을 신학의 출발점으로 삼았다. 자신의 신앙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

기독교인으로서의 나의 느낌은 내 속에서 꿈틀거리는 신적 영혼에 대한 자각이다. 이 느낌은 나의 이성과는 별개의 것이다. 지성적으로 볼 때 나는 철학자다. 그러나 감정으로 볼 때 나는 매우 헌신된 사람, 아니 바로 크리스천이다.”

 

그는 기독교는 교리가 아니라 삶이라고 정의했다. 성경이란 애초에 성경의 저자들이 자신의 느낌을 적은 주관적인 기록에 불과하다고 말했다. 개인의 체험 모음집에 불과한 성경 위에 나 자신의 체험을 얼마든지 추가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의 놀라운 업적은 성경의 진리를 아무리 많이 무시하거나 아예 전면 부정하더라도 크리스천이 될 수 있는 이론적 토대를 만들었다는 점이다. 각각의 인간 속에 체험을 통해 발견되는 내재된 진리가 있는데 굳이 외부의 성경이 필요하지 않게 된 것이다. 그는 성경에 계시된 하나님이 없는 기독교를 만들어 냈다.

 

슐라이어마허가 이룬 신학적 업적이란 신학의 대상을 성경 말씀에서 인간 내부로 전환한 것이다. 신학을 계시에 대한 연구에서 인간에 대한 연구로 바꿔친 것이다. 하나님의 이름을 빙자하지만 그 중심에 인간을 둔 신학 아닌 신학, 자유주의 신학이 슐라이어마허가 현대 세계의 도전에 응답한 신학적 방법이었다.

 

그가 기독교 신앙에 끼친 피해는 끔찍하다. 성경의 진리와 아무런 관계가 없이도 크리스천이 될 수 있는 환경에서 믿음이라는 단어는 사치스런 장식품일 뿐이다. 신앙을 삶으로 정의하는 순간 나름대로 고귀하고 최선을 다해 삶을 산 사람들은 다 천국이 보장되는 길이 열렸다. 무신론자라고 하더라도 그가 사랑으로 충만한 삶을 살았다면 그 삶 자체가 믿음이 되어 그는 구원 받는다. 입으로는 비록 하나님을 부정했지만 그는 삶으로 하나님의 존재를 인정했기 때문이다. 그의 이런 자유주의 신학의 물결은 유럽을 중심으로 전세계의 영어권 속으로 급속하게 퍼져 나갔다. 그가 열어놓은 이 자유주의 신학의 길은 성경을 기독교로부터 완전히 실종시켰다. 이 자유주의 신학은 피니로 대표되는 프래그머티즘과 결합하여 말씀을 점점 더 신앙의 중심에서 변두리로 밀어냈다.

 

그 영향으로 내가 무엇을 믿는지도 잘 모르지만 교회를 열심히 다니는 것만으로 크리스천의 충분조건이 채워졌다고 느끼는 사람들이 많이 있다. 교회 속에 활발한 소규모 모임은 피차간에 감동적으로 살았던 생활 이야기들로는 차고 넘치지만 결코 논쟁의 여지가 있는 성경의 진리를 놓고 머리를 맞대는 일은 결코 없다. 많은 크리스천들이 벤저민 프랭클린이 한 유명한 말, “하늘은 스스로 돕는 자를 돕는다를 성경 구절인 줄 알고 있다. 교리에 무지한 복음주의 교회 속에서 뭔가를 확실히느끼게 해주는 데 매우 효과적인 성령운동파와 오순절 계통의 가르침이 번성하는 것은 당연할 수 밖에 없다.

 

3. 빌리 그레이엄과 신복음주의의 출현

 

빌리 그레이엄은 자신의 집회를 현대적 오염으로부터 지키기 원했다. 그러나 그가 거둔 성공들은 그의 이 결심을 약하게 만들었다.”

 

빌리 그레이엄은 가톨릭을 수용하는 것에서 한 걸음이 아니라 수백 걸음 나아가 기독교가 아닌 이방 종교들을 통해서도 하나님은 인간을 구원하신다는 요지의 발언을 했다가 서둘러 취소하는 등의 소동을 일으키기도 했다. 그는 논쟁의 여지가 있는 기독교의 몇몇 교리에 대해 의견을 달리하고 있는 것이 아니다. 그는 기독교의 핵심 진리 자체를 부정하고 있다. 20064월 미국의 시사 주간지 뉴스위크와의 인터뷰에서도 빌리는 변함없는 자신의 다원주의적 구원관을 피력했다. 빌리의 주장이 슐라이마허의 주장과 무엇이 다른가?

 

풀러신학교의 시작도 빌리 그레이엄의 사역도 또 이들이 힘을 합쳐 만든 크리스차너티 투데이의 발간도 분명 하나님의 복음을 위한 열정이 그 발판이 되었음은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아무리 세상을 구원하려는 열정이 넘치더라도 우리에게는 분명 지켜야 할 선이 있다. 결코 놓아서는 안 될 성경의 진리에 대한 원칙을, 세상을 구한다는 명분으로 조금씩 양보하기 시작하면 그 양보는 조만간 걷잡을 수 없는 상황에 빠지게 된다. 역사가 이를 증명하고 있다.

 

슐라이어마허의 새로운 기독교, 자유주의 사상으로부터 가장 먼저 영향을 받은 나라는 영국이다. 슐라이어마허가 사망한 1834년에 영국에서 태어난 스펄전 목사는 그의 생애 마지막 4년간을 자유주의 바람으로 말미암아 영국 교회 전체를 휩쓴 연합 운동과의 싸움으로 힘겹게 보내야 했다. 일반적으로 the Down-Grade Controversy로 알려진 이 논쟁은 말씀의 진리를 사수해야 한다는 스펄전 목사의 외로운 목소리와 당시 대다수 교회가 지향한 교리를 넘어선 일치의 목소리 간에 벌어진 일대 격전이었다. 교리를 수호하려는 스펄전 목사의 외로운 싸움은 하나를 외치는 거대한 목소리에 밀려날 수밖에 없었다. 모든 복음주의자로부터 예외 없이 수십 년에 걸쳐 존경을 받았던 스펄전 목사는 어느 날 갑자기 복음주의 진영 내부의 비판에 둘러싸이게 되었다. 당시 복음주의 진영 전체는 하나 됨, 조화, 합동 그리고 형제애로 향해 가고 있었다.

 

이처럼 전반적으로 통합으로 치달은 영국은 20세기에 들어서자 로이드 존스 목사 등을 대표로 하는 복음주의, 성경의 복음을 가감 없이 전하는 복음주의 세력은 개신교 내에서 아주 작은 세력으로 전락한다. 그러나 이 작은 세력조차 1954년의 빌리 그레이엄의 영국 집회를 기점으로 중대한 변화를 겪게 된다 영국의 복음주의 세력들마저도 빌리 그레이엄의 집회를 통해 새로운 가능성을 발견하게 된 것이지요. 자유주의를 포함한 세력들과 힘을 합칠 때 더 큰 하나님의 일을 할 수 있다는 확신이었다. 빌리 그레이엄 집회를 보고 모든 교단이 힘을 합칠 때 하나님의 부흥이 도래할 수 있다는 꿈을 갖게 된 것이다. 18세기의 휫필드와 웨슬리 시대가 빌리 그레이엄을 통해 다시 올 수 있다는 꿈에 부풀었던 것이다.

 

영국은 1966년을 기점으로 존 스토트 목사를 중심으로 한 영국 복음주의 성공회는 공개적으로 교회의 일치또는 에큐메니칼 운동을 표방한다. 1950년대 로이드 존스 목사와 함께 교리를 넘어선 일치에 대해 가장 큰 반대 목소리를 내던 제임스 패커 목사마저도 이 일치 운동에 본격적으로 참여한다. 오늘날 교회 역사가들은 20세기 중반에 세계를 휩쓴 이 에큐메니칼 운동에 대해 공개적인 반대 목소리를 낸 대표적인 복음주의자는 단 두 명에 불과하다고 말한다. 로이드 존스 목사와 프랜시스 쉐퍼 박사이다. 그러나 이들의 반대는 단지 분열주의자라는 오명만을 그들에게 가져다 줄 뿐이었다. 영국의 복음주의자 중 한 명은 왜 로이드 존스 목사가 영국에서 복음주의 진영을 분열시키는 사탄의 도구로 쓰이고 있는지 모르겠다고 말했다고 한다.

 

1953년 영국 집회를 시작할 때도 빌리 그레이엄 목사가 가장 먼저 지지를 요청한 사람이 로이드 존스 목사였다. 실패한 빌리는 1960년대 들어 존스에게 다시 공개적인 지지를 요청한다. 이와 관련해서 로이드 존스 목사는 한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했다.

나는 전도를 위한 켐페인 조직을 찬성하지 않습니다. 믿은 사람은 앞으로 나오라는 콜링 시스템은 더더욱 반대하고요. 한 가지 분명히 말하면 나는 빌리 그레이엄이 진실하고 정직하며 순수한 사람임을 잘 알고 있습니다. 그는 1963년에 베를린이 아니라 로마에서 개최되기로 한 첫 번째 복음주의 연합회의 의장을 맡아 달라고 요청했습니다. 그 제안에 나는 다음과 같이 대답했습니다. ‘당신이 자유주의자들과 가톨릭에서 받고 있는 지원을 거절하고 그들을 강대상에 세우지 않고 또 사람들을 앞으로 부르는 콜링 시스템을 하지 않는다면 최선을 다해 나는 당신을 도울 것입니다. 의장직도 당연히 맡겠습니다.’라고요. 우리는 그 문제로 약 세 시간 동안 대화를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내 제안을 거절했습니다.---”

 

전도를 위해 조직화에 힘쓰는 한, 사람들은 하나님께 무릎꿇고 자신들을 회복시켜 달라고 간구하지 않습니다. 켐페인적 접근은 내가 보기에 성령의 능력 대신 테크닉에 더 의존합니다. 나는 진정한 교제는 인간성과는 다른 차원의 문제라고 봅니다. 나는 근본적인 진리를 공유하지 않는 사람들과 어떻게 진정한 교제가 가능한지 잘 모르겠군요.“

 

자유주의 신학에서 비롯한 에큐메니칼 운동이 가져다 준 큰 비극은 크리스천의 정의가 성경의 가르침과 관계 없이 너무 넓어졌다는 사실이다. 빌리 그레이엄과 로버트 슐러의 인터뷰에 따르면 예수 그리스도를 떠나서도 얼마든지 가능하게 되었다. 무자격 의사를 양산하는 것보다 더 큰 비극이 에큐메니칼 운동이다. 복음과 관련 없는 크리스천의 양산이다.

 

가톨릭과의 연합은 카톨릭 교리를 인정하는 것을 의미한다. 루터의 시대보다 더 잘못된 가톨릭과 어떻게 교리를 떠나 하나 될 수 있는가? 얼마 전 사망한 요한 바오로 2세는 미국의 시사주간지 <타임>과의 인터뷰에서 말했다.

누구라도 깨끗한 삶을 산 사람은 다 구원받는다. 비록 그가 예수 그리스도와 로마 카톨릭을 믿지 않더라도 관계 없다.”

 

필립 얀시는 사실상 기독교의 교리를 버리고 또 종교라는 굴레를 벗고 전 인류가 하나 되자는 주장을 하고 있다. 스컷 펙의 심리학 책이 미국의 저명한 신학교들에서 교재로 채택되는 현실도 안타깝기 그지 없지만 필립 얀시가 그의 책에서 제시하는 은혜가 마치 성경에서 말하는 하나님의 은혜인 양 포장되어 한국 교회에서 많은 목사들의 추천사를 등에 업고 꾸준히 팔리고 있는 것은 더욱 안타까운 일이다. 필립 얀시와 같은 사람은 오늘날 복음주의라는 이름이 일치와 화합이라는 이름으로 사실상 하나님의 말씀에서 얼마나 멀리 떠나 있는지를 보여 주는 한 예이다.

 

하나 되는 것에서 무엇보다 중요한 것은 무엇으로 연합하느냐이다. 큰 교회들일수록 분명한 신학 대신 각종 방법만이 넘쳐 나는 것은 오늘날 우리가 주목해야 할 중요한 신호이다. 이 모든 현상은 교회 속에서 지켜야 할 교리들이 사라지기 때문이다.

 

말년에 많은 사람에게 고집불통 늙은이라는 소리를 들은 로이드 존스 목사는 누구보다도 교리의 회복이 진정한 복음주의의 회복임을 잘 알고 있었다. 교회가 교리를 통해 하나 되는 것만이 진정한 하나 되는 길임을 너무 잘 알고 있었다.

 

이안 머리, “로이드 존스에 대한 기억은 철저한 강해 설교, 기독교 교리의 필요에 대한 주장, 일치 운동의 위험에 대한 경고, 그리고 성령의 능력의 회복에 대한 갈망 등으로 요약되고 있다.”

 

로이드 존스 목사야말로 오늘날 우리에게 가장 필요한 진정한 의미의 복음주의자였다. 교리에 무지하거나 교리를 무시하는 사각 지대에 빠진 교회는 마케팅의 유혹에 벗어나기 어렵다. 일치와 단합에 의해 세상에 더 큰 영향력을 끼치고자 하는 신복음주의의 열망에 마케팅이야말로 날개를 달아 주는 역할을 하고 있는지 모른다. 마케팅은 교회가 어떻게 변해야 세상이 좀 더 교회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이게 하는지에 대해 알려 주기 때문이다.

 

- 옥성호, "마케팅에 물든 부족한 기독교", 3장 요약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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