설교

[스크랩] 9/11 주일설교, 혈과 육의 유업

강대식 2016. 9. 11. 15:47

2016-09-11 주일설교

본문: 고전 15:50-55

제목: 혈과 육의 유업

 

혈과 육은 하나님 나라를 이어 받을 수 없고

또한 썩는 것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하느니라”(고전15:50)

 

혈과 육은 현재의 우리 몸, 즉 자연적이고 썩어지며 연약하고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을 가리킨다.

성경에서 혈과 육은 우리 육체의 생명을 강조한다.

육은 피가 흐름으로 생명이 있다.

 

육체의 생명은 피에 있음이라”(17:11)

모든 생물은 그 피가 생명과 일체이다”.(17:14)

모든 육체의 생명은 그것의 피인즉 그 피를 먹는 모든 자는 끊어지리라”(17:14)

 

죄의 삯은 사망이다.(6:23)

피흘림이 없으면 사함이 없다.(9:22)

피가 죄를 속하여 사망에서 살린다.(17:11)

 

구약에서 죄를 지으면 사망을 받을 자가 짐승의 피로 대신하여 사함을 받았다.

그것은 우리 주님이 성육신하여 오셔서 십자가에서 인류의 모든 죄를 사하시기 위해

피를 흘리실 것을 예표로 보여 준 것이었다.

 

혈과 육은 에베소서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우리의 씨름은 혈과 육을 상대하는 것이 아니요”(6:12)

 

히브리서에서도 사용하고 있다.

자녀들은 혈과 육에 속하였으매 그도 또한 같은 모양으로 혈과 육을 함께 지니심은

죽음을 통하여 죽음의 세력을 잡은 자 곧 마귀를 멸하시며”(2:14)

 

현대인들은 심혈관 질환으로 많이 사망하고 있다.

큰 병원들은 소화기병동처럼 심혈관병동을 두어 따로 전문 관리하고 있다.

혈과 육은 우리 살아 있는 몸을 대표하는 표현이다.

혈 없이 육이 있을 수 없고, 육 없이 혈이 있을 수 없다.

 

살아 있는 동안 혈과 육을 끔찍이 아끼고 조심하는데 결국은 죽음으로 썩고 부패하고 만다.

혈이 부패하고 오염되어 사망을 부르기도 한다.

현재 살아 있는 사람들이 혈과 육을 위해 애쓰고 애지중지하는데 성경은 썩는 것, 썩을 것이라고 한다.

 

죽으면 썩는 것으로 끝인 줄 알고 자살들을 하는데, 영혼은 결코 죽지 않는다.

심판을 앞당길 뿐이고 그 영혼은 하나님 앞에 가서 결산을 보아야 한다.

한번 죽는 것은 사람에게 정해진 것이요 그 후에는 심판이 있으리니”(9:27)

 

자살은 자기를 살인하는 6계명 살인죄에 해당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

우리나라는 OECD 국가 중 자살률 1위라는 오명을 계속 유지하고 있다.

이에 대해 정부가 정책과 예산을 쏟아야 할 일이다.

 

중요한 것은 이 혈과 육은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이어 받을 수 없다는 것이다.

썩는 것, 이 혈과 육은 썩지 아니하는 것을 유업으로 받지 못한다는 것이다.

믿는 자들의 몸이 하나님의 나라를 유업으로 받으려면 42절에서 말하고 있듯이

썩을 것으로 심고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야한다.

 

썩어질 부패한 몸이 변화되지 않고서는,

썩지 않고 더럽지 않고 쇠하지 않는 하나님의 나라의 유업을 받을 수 없다.(벧전1:4)

 

바울은 비밀을 알려주고 있다.

보라 내가 너희에게 비밀을 말하노니 우리가 다 잠 잘 것이 아니요

마지막 나팔에 순식간에 홀연히 다 변화되리니

나팔 소리가 나매 죽은 자들이 썩지 아니할 것으로 다시 살아나고 우리도 변화되리라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으리로다”(고전15:51-53)

 

나팔 소리는 큰 소리로 부르는 소리이기도 하지만,

죽은 자와 산자들이 다 그리스도의 심판대 앞으로 나오라고 부르는 소리다.

 

이 마지막 나팔에 대해서 우리 주님을 말씀하셨다.

그가 큰 나팔소리와 함께 천사들을 보내리니

그들이 그의 택하신 자들을 하늘 이 끝에서 저 끝까지 사방에서 모으리라”(24:31)

 

바울 사도도 이 나팔소리에 대해서 말했다.

주께서 호령과 천사장의 소리와 하나님의 나팔 소리로 친히 하늘로부터 강림하시리니

그리스도 안에서 죽은 자들이 먼저 일어나고

그 후에 우리 살아 남은 자들도 그들과 함께 구름 속으로 끌어 올려

공중에서 주를 영접하게 하시리니 그리하여 우리가 항상 주와 함께 있으리라”(살전4:16-17)

 

나팔 소리가 나면, 죽은 성도들은 무덤에서 다시 살아나게 된다.

그들이 죽을 때에 지니고 있던 썩어질 몸이 아니라,

영원히 썩지 아니할몸으로 다시 살아나게 될 것이다.

 

그리고 그 때에 죽지 않고 여전히 살아 있는 성도들은 홀연히 순식간에 변화되어서

이 썩을 것이 반드시 썩지 아니할 것을 입겠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것이다.

 

썩지 아니하는 영역에서 살기 위해서는,

영원한 기업을 소유하는 행복을 누리기 위해서는,

썩을 몸은 썩지 아니할 것으로, 죽을 수밖에 없는 몸은 죽지 아니할 것으로 변화되어야 마땅하다.

 

이 무너지고 썩어질 구조는 다시 창조되어야 한다.

성도들은 다른 형체가 아니라 그 자신의 형체로 나아올 것이다.

아무리 영화롭게 변화되어도 우리는 능히 그리고 확실히 알아 볼 수가 있다.

 

변화산상에서 보여주셨던 주님의 모습이 우리의 미래 모습이다.

그 얼굴이 해 같이 빛나며 옷이 빛과 같이 희어진 모습이었다.(17:2)

 

사도 요한이 계시록에서 뵈온 주님의 모습이 우리의 미래 모습이다.

그의 머리와 털의 희기가 흰 양털 같고 눈 같으며 그의 눈은 불꽃 같고

그의 발은 풀무불에 단련한 빛난 주석 같고 그 얼굴은 해가 힘있게 비치는 것 같았다”.(1:13-16)

 

주님 오시는 날 순식간에 우리가 변화될 우리의 모습이 바로 이와 같다.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안다고 하였고,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라 하였다.

 

사도 요한의 말이다.

우리가 지금은 하나님의 자녀라 장래에 어떻게 될지는 아직 나타나지 아니하였으나

그가 나타나시면 우리가 그와 같을 줄을 아는 것은 그의 참모습 그대로 볼 것이기 때문이니요일3:2)

 

이렇게 영화로운 모습으로 변화된 다음에 죽음은 더 이상 없다.

이 썩을 것이 썩지 아니함을 입고 이 죽을 것이 죽지 아니함을 입을 때에는

사망을 삼키고 이기리라고 기록된 말씀이 이루어지리라”(54)

 

이루어지는 기록된 말씀은 이사야서와 호세아서이다.

사망을 영원히 멸하실 것이라 주 여호와께서 모든 얼굴에서 눈물을 씻기시며

자기 백성의 수치를 온 천하에서 제하시리라”(25:8)

 

내가 그들을 스올의 권세에서 속량하며 사망에서 구속하리니

사망아 네 재앙이 어디 있느냐 스올아 네 멸망이 어디 있느냐”(13:14)

 

바울 사도도 55절에서 비슷한 표현을 한다.

사망아 너의 승리가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네가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

 

우리는 그리스도를 통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기 때문에,

주님과 같은 영화로운 모습으로 변화되며, 영원하고 행복한 기업과, 사망 없는 영생을 누리게 된다.

썩어질 혈과 육으로 사는 기간은 영생에 비하면 그림자에 불과하고 나그네 삶에 불과하다.

 

우리는 이 땅에서 문제와 현실에 붙잡혀서 이런 모습을 까맣게 잊고 산다.

우리는 어떻게 하여 하나님의 자녀가 될 수 있었는지,

그 하나님의 자녀에게는 어떤 영광이 보장되어 있는지, 시선을 향할 줄 알아야 한다.

 

우리가 겪고 있는 현실의 문제들은, 어떻게 보면 우리의 눈을,

주님 자신에게, 그리고 주님이 친히 희생으로 주신 우리의 신분과 미래 영광에 돌리게 하기 위한 것이다.

 

우리를 긴 광야의 길을 걷게 하신 것이,

주리게도 하시고 낮추기도 하신 것이,

사람이 떡으로만 살지 않고 하나님의 말씀으로 산다는 것을 가르치기 위함인 것과 같다.

 

우리가 누구인가 하는 사실만 확실히 깨닫게 된다면,

우리가 어떤 삶을, 살아야 할것인가의 문제도 해결이 될 수 있다.

신분을 알며, 정체성을 알면, 그에 합당한 삶이 묻어나오기 때문이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이라는 신분, 하나님의 자녀라는 신분을 확실히 알고 깨달으면,

그에 합당한 삶을 자연스럽게 살 것이다.

그것을 망각하고 중요시 여기지 않으니까,

눈앞에 있는 현실과 일어나는 문제에만 집착하면서 실패와 불행만을 낳게 된다.

 

우리의 모든 문제의 원인은 다른 데 있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신분과 그 신분의 위대성과 위상과 영광을

충분히 인식하지 못하는 데 있다.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너희는 먼저 하나님의 나라와 그의 의를 구하라 하신다.

그러면 모든 것을 더해 주신다고 하신다.

그런데도 여전히 우리는 우리의 신분을 망각하고서 땅의 것만을 구하고 염려하고 있다.

 

주님을 깊이 생각하라고 해도 땅에 보이는 것만을 깊이 생각하고 있다.

함께 하늘의 부르심을 받은 거룩한 형제들아

우리가 믿는 도리의 사도이시며 대제사장이신 예수를 깊이 생각하라”(3:1)

 

우리는 하나님의 자녀로서 그리스도인으로서 영광에 이르는 길을 가고 있다.

포도나무 비유처럼 우리는 그리스도 안에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있다.

우리는 혼자 살지 않고 주님과 함께 우리 안에 주님을 모시고 살고 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2:20)

 

이것이 그리스도인의 신분이고 삶이고 특권이다.

이러한 하나님의 자녀보다 더 높은 신분은 세상에 없다.

장차 주어질 영광 또한 그보다 더 높은 영광은 없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에게 하나님의 자녀에게 보장된 확신이다.

너희 안에서 착한 일을 시작하신 이가

그리스도 예수의 날까지 이루실 줄을 우리가 확신하노라”(1:6)

 

이 말씀은 우리가 비록 어리고 별 볼일 없고 무가치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착한 일, 곧 구원을 시작한 하나님이 주님 오시는 날까지

책임지고 인도하시며 이루신다는 보장이다.

 

우리가 이 땅의 것만을 고집하고 집착한다면 사랑의 징계와 채찍은 계속 이어질 것이다.

그러나 하나님의 거듭난 자녀이기에, 성령이 안에 계시기에, 깨닫게 하시고,

회개하고 돌이키게 된다. 아들의 형상을 닮아가게 된다.

 

주님과 같이 될 것이라는 소망을 가진 자는 자신을 깨끗하게 할 것이다.

주님의 깨끗하심과 같이 자기를 깨끗하게 한다고 했다.(요일3:3)

 

억지로가 아니라 거룩하신 주님과 같아지고 함께 있을 것을 생각하면

자신을 자연스럽게 깨끗하게 한다는 것이다.

 

주님과 같이 영광된 몸으로 영광된 삶을 사는 소망을 가졌다면,

그 소망을 매일 매일의 삶과 생활에서 적용하고 살아야 한다.

꿈과 소망이라는 것은 오늘 이 땅 현실에서 적용하며 살지 않으면 허황한 것에 지나지 않은 것이다.

 

행함이 없는 믿음, 행함이 뒤따르지 않은 소망은, 헛것이기 때문이다.

믿음에 대한 고백(주장)이 생활에서 보여지지 않는다면, 그 고백(주장)은 아무 소용이 없다.

성경의 진리를 진실로 믿으면 그에 따른 행함은 자연스레 나오게 되어 있다.

 

그래서 그리스도인은 행함에 문제가 있다면, 그것은 진리에 대한 믿음에 문제가 있는 것이다.

성경의 교리를 확실히 믿으면 행함은 나오고 표현될 수 밖에 없다.

교리에 대한 믿음이 불확실하니까 행함이 따르지 않고 다른 길로 가는 것이다.

 

성경의 교리를 진리로 확실히 붙드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 수 있다.

진리를 붙든 그리스도인이 아니고서는 결코 그리스도인의 삶을 살 수가 없다.

성경은 항상 먼저 교리를 말하고 그런 연후에 그에 따른 삶을 명령하고 확신시켜 주고 있다.

 

누구를 무엇을 바라보느냐가 오늘 우리가 어떻게 살고 어떤 모습이 될 것인지를 결정해 준다.

주님을 바라보며 그분을 깊이 생각할 때 우리는 영광에서 영광으로 그분을 닮아가게 될 것이다.

그분과 같이 영광스럽게 될 것을 소망하는 사람은 자연 그분의 깨끗하심 같이 자신을 깨끗하게 할 것이다.

성경은 이러한 소망과 믿음 없이 도덕률을 명령하고 강제하지 않는다.

 

성경은 먼저 반드시 하나님이 우리를 위해 해주신 일들과 우리가 얻게 된 신분을 교리로 먼저 말해주고

그 연후에야 그 신분에 맞게 미래의 소망에 맞게 살라고 하신다.

그리고 그 일은 내가 주님과 함께 주님이 나와 함께 이루어 가신다

   

하나님의 자녀로, 그리스도인으로의 삶을 살기 위해

성경을 사랑하고 교리를 진리로 붙드는 공부를 게을리하지 말자.

삶은 교리와 진리로부터 흘러나온다는 것을 잊지 말자.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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