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장 성령 사역의 일반적인 견해
예수 그리스도께서 하나님 아버지께로 가시기 바로 전에 제자들에게 주셨던 말씀을 주의 깊게 읽은, 사려 깊은 독자라면 그 말씀에서 성령의 사역이 그리스도 자신의 사역만큼이나 대단히 중요하다는 것을 금방 알아차릴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현대를 살아가는 약삭빠른 독자들은 성령께서 베푸시는 은혜의 가치를 평가 절하하거나 그 필요성을 너무나도 쉽게 간과하는 경향이 있다. 우리는 구세주에 대해서는 많이 이야기하지만 우리를 거룩하게 하시는 성령님에 대해서는 이야기하지 않는다. 그러나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 제자들을 떠나 가시기에 앞서 그들에게 하신 말씀은 성령의 사역이 얼마나 본질적이며 중대한지를 교훈하고 있다.
성령의 오심은 구세주의 떠나가심을 보상하고도 남을 만큼 충분한 것이다. 그것은 다음과 같은 구세주의 말씀을 통해서 잘 드러난다. “그러나 내가 너희에게 실상을 말하노니,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16:7).
그러나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라는 주님의 말씀의 첫 구절을 들었을 때, 놀라며 두려워했던 제자들의 모습을 상상해 보라. 그들이 섬기던 주님의 인격적인 임재의 상실로 인해 제자들이 처절하게 절망하였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는 사실이다. 그렇지만 제자들은 더 지고하고 숭고하신 그분의 성품과 인격을 바라보았다. 그리고 우리 주님께서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 내가 떠나가지 아니하면 보혜사가 너희에게로 오시지 아니할 것이요, 가면 내가 그를 너희에게로 보내리니”(요16:7)라는 이유를 제자들에게 말씀해 주셨을 때, 제자들이 성령이 오셔서 하실 그분의 직임과 사역을 분명하게 확신했을 것은 의심의 여지가 없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하다면 그리스도의 선언처럼 성령의 오심이 그리스도의 가시적 임재의 상실보다 더 큰 보상이라는 것을 감안할 때, 만일 성령께서 오셔야 할 필요성을 간과하거나 또는 그 신적인 보혜사의 사역을 평가 절하한다면, 현대를 살아가는 우리는 그리스도의 교훈과 가르침의 본질을 심각하게 왜곡하는 것이 아닌가? 그리고 그리스도의 말씀에 암시되어 있는 증언보다 성령 사역의 필요성과 가치에 대해 더 잘 설명해 주는 증언이 또 어디에 있는가?
우리는 이 말씀을 통해서 그리스도의 높아지심 이후에 성령의 선물이 주어진다는 사실을 배우게 된다. 성령의 선물은 그리스도의 은혜의 선물이며, 그분이 베푸시는 상급의 출현이자 증거이다.
1. 신약의 위대하신 약속-성령의 오심
예수 그리스도의 오심이 구약의 위대한 약속이라고 한다면, 성령의 오심은 신약의 위대한 약속이다. 그리스도께서는 육신이 되어 이 땅에 오시기 전부터 선지자로서, 제사장으로서, 그리고 왕으로서 당신의 직임과 사역을 수행하셨다. 마찬가지로 성령께서도 불의 혀같이 갈라지고 비둘기가 출현하는 것같이 오감(五感)으로 느낄 수 있는 모습으로, 엄숙하고도 가시적인 방식으로 임하시기 훨씬 전부터 이미 강력하게 부어졌던 것이다. 그러나 성령의 오심은 구약의 그것과는 매우 다른 방식으로 임함을 발견하게 된다.
이 괄목한 만한 위대한 성령의 출현과 부어 주심은 이미 구약에서 여러 선지자들이 예언했던 것이다. 우리는 이 위대한 예언과 성취를 사도행전 2장에서 찾아볼 수 있다. 그때 사도 베드로가 일어나 “이는 곧 선지자 요엘을 통하여 말씀하신 것이니 일렀으되, 하나님이 말씀하시기를 말세에 내가 내 영을 모든 육체에 부어 주리니 너희의 자녀들은 예언할 것이요, 너희의 젊은이들은 환상을 보고 너희의 늙은이들은 꿈을 꾸리라. 그 때에 내가 내 영을 내 남종과 여종들에게 부어 주리니 그들이 예언할 것이요”(행2:16-18)라고 말했다. 바로 이것이 우리 주님께서 제자들과의 대화 중에 말씀하신 성령의 현현인 것이다.
성령의 오심에 대한 이러한 주님의 언급은 다른 곳에서도 잘 나타난다. 눅24:49, 행1:4-5, 행1:7-8. 이 구절들을 통해 우리는 주님이 떠나가신 후에 성령의 출현과 놀랄 만한 부어 주심이 있었으며, 그것은 하나님 우편에 앉으시는 주님의 높아지심의 증거와 상징으로서, 의도적으로 유예되었다는 것을 알게 된다. 요한복음은 이를 다음과 같이 인상적으로 말씀하고 있다. “예수께서 아직 영광을 받지 않으셨으므로 성령이 아직 그들에게 계시지 아니하시더라”(요7:39). 따라서 성령의 출현은 그리스도의 낮아지심이 종결되고 그의 높아지심이 시작될 때까지 의도적으로 보류되었던 것이다.
그러므로 성령의 선물은 그리스도의 사역이 종결되었다는 것에 대한 독특하고도 분명한 최고의 증거로서 명백하게 예비되었다. 그것은 하나님 편에서 인정하신 것으로서 그의 백성을 위한 효능이 완전히 보장되고 그리스도께서 행하신 사역의 결과, 약속된 선물을 획득하며 하늘의 모든 권세자이시며 세상의 구주이신 주님의 위대한 구속계획의 완전한 수행을 위해 우리 주님에게 수여된 사역인 것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역사에 관한 모든 사실, 그의 삶의 모든 역정(Progress)들은 성령 강림의 강력한 증거들인 것이다.
2. 성령 사역의 대주제-예수 그리스도
만일 그리스도의 높아지심이 성령의 선물로 말미암아 증명되고 나타나는 것이라면, 그리고 만일 이것이 지정되고 예고된 이 영광스러운 진리의 증거라면, 성령의 선물은 구속자의 승리의 열매이자 상징인 것이다. 또한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죽으심으로 획득하신 다른 모든 축복들의 보증인 것이다. 이러한 축복의 보증인 성령은 그리스도 예수의 이름을 믿는 모든 이들에게 주어질 것이다.
우리가 이러한 점을 염두에 두고 본 주제를 고찰한다면, 우리 주님께서 성경을 통해 “내가 떠나가는 것이 너희에게 유익이라....”라고 말씀하신 구속계획의 신적 지혜를 깨달을 수 있을 것이다. 또한 그리스도의 약속을 따라 실제로 성령께서 친히 강림하셨을 때, 제자들은 확실히 그것을 그리스도께서 높아지신 증거로 간주했을 것이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나누신 대화를 통해 성령 사역의 본질과 계획에 대해 포괄적으로 설명하신다. 성령 사역은 두 가지 서로 다른 결과와 완전히 상이한 두 부류의 사람을 위하여 계획되었다. 그것은 한편으로는 세상을 책망하시기 위해 설계되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교회를 인정하고 위로하시기 위해 계획된 것이다. 성령께서는 ‘불신 세상은 책망하실 것’이지만 ‘구별된 세상, 즉 하나님의 독특한 백성은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실 분’이시다. 불신자들은 성령의 오심으로 책망을 받게 되지만, 신자들은 성령의 오심을 통해 의롭다 여김을 받으며 교양과 훈계를 받게 될 것이다.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16:14). 따라서 성령의 선물은 세상과 교회 모두에게 중대한 영향을 끼치기 위해 의도적으로 계획된 것이다.
이 두 가지에 관하여 그리스도는 성령의 선물이 설명하기로 계획된 위대한 주제인 것이다. 그리스도의 인격과 그분의 직임과 사역, 그리고 구속자로서의 그리스도를 설명하고 깨닫게 하시는 것이 바로 성령께서 하시는 위대한 사역이다. 다시 말하면, 성령은 세상을 책망하시기에 충분하신 그리스도의 신적 사명과 그분의 중보자적 권위를 넉넉하게 증거하시는 그리스도의 증인이 되시는 것이다. 성령은 그분의 제자들에게 진리를 가르치시고 인식할 수 있는 힘을 제공하시며, 믿음 안에서 그리스도를 섬길 수 있도록 그분의 영광을 깨닫게 하시고, 그리스도를 섬기는 것과 그를 위해 사는 삶을 사모하게 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신다.
3. 성령의 책망하시는 사역
이제 이 두 부류의 사람들, 즉 신자들과 불신자들, 또는 세상과 교회에 관한 성령의 사역에 대해 간단하게 살펴보도록 하겠다. 전자에 관해서 성경은 다음과 같이 선언하고 있다. “그가 와서 죄에 대하여, 의에 대하여,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시리라. 죄에 대하여라 함은 그들이 나를 믿지 아니함이요, 의에 대하여라 함은 내가 아버지께로 가니 너희가 다시 나를 보지 못함이요, 심판에 대하여라 함은 이 세상 임금이 심판을 받았음이라”(요16:8-11). 여기서 ‘책망하다’라고 번역된 단어는 사실 그 원문의 뜻을 정확하게 나타내는 단어는 아니다. 또한 이 본문에 제시되어 있는 세 가지 중대한 주제에 공통적으로 사용된 이 단어의 정확한 원문의 뜻을 찾는 것도 쉽지 않다. 그러나 ‘책망하다’라는 단어는 죄에 대하여 적용되는 단어이다. 죄는 책망되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의와 심판에 대하여는 그다지 어울리는 표현은 아니다.
성령의 선물이 의도적으로 나타내시기로 계획하신 명백하고 설득력 있는 빛의 주제는 다름 아닌 그리스도의 인격과 직임에 관한 것이다. 무엇보다도 성령이 오시면 첫째로, ‘세상의 죄’를 책망하실 것이다. 왜냐하면 세상이 그리스도를 믿지 않았기 때문이다. 성령이 오시면 그들이 거짓말쟁이라고 거부한 분이 사실은 그리스도 자신께서 밝히신 대로 메시야이심을 증거하실 것이다. 성령이 오시면 그리스도의 신적 사명에 대한 증거들을 제시하심으로써 그리스도의 주장에 대해 그들이 의심하고 부정하며 거부했던 심각한 죄악을 정죄하실 것이다.
둘째로, 성령이 오시면 ‘의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다. 이는 성령께서 그리스도의 의를 선언하심으로써 이루어질 것이다. 성령이 오시면 유대인들이 악인이요 죄인이라고 정죄했던 그리스도께서 실상은 의로우신 분이심을 선언하실 것이다. 의를 위한 율법의 목적은 모든 이들로 하여금 그리스도를 믿게 하려는 것이다.
마지막 세 번째로, 성령이 오시면 ‘심판에 대하여’ 세상을 책망하실 것이다. 성령이 오시면 전체 구속사에 나타난 일반적 심판에 대해 책망하실 것이다. 뿐만 아니라 더욱 특별한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실 것인데, 그것은 거대한 배교의 우두머리인 사탄에 대해 내려진 심판의 책망이다. 그것은 그리스도께서 ‘여인의 후손으로 오셔서 뱀의 머리를 상하게 하실 때’ 이미 시작된 심판이다. 또한 그리스도께서 부활하여 승천하셨을 때, ‘포로 된 자를 사로잡으실 때’, 그리고 ‘정사와 권세 잡은 자를 정복하시고 그분의 십자가에서 이루신 승리를 공개적으로 나타내실 때’ 이미 이루어진 심판이다.
이 세 가지 교훈은 한 가지 중대한 주제, 즉 그리스도 자신에 그 초점을 맞추고 있다. 이 세 가지 교리는 모두가 다 한 성령에 의해 교훈된 것들이며, 동일한 증거를 통해 증명된 것들이다. 각각의 경우에 제시된 증거는 모두 성령에 의해 제공되는데, 단순히 그분의 오심과 그분의 계시를 통해 표현된다. 성령의 강림은 그것 자체로 세상을 책망하고 대적하는 일을 증명하기에 충분하다.
그렇다면 하나님의 백성, 또는 세상 가운데서 구별하여 세우신 교회를 위하여 성령이 하시는 일은 무엇인가? 그것은 바로 그 백성의 교육과 훈계와 위로이다. “내가 아직도 너희에게 이를 것이 많으나 지금은 너희가 감당하지 못하리라. 그러나 진리의 성령이 오시면, 그가 너희를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리니 그가 스스로 말하지 않고 오직 들은 것을 말하며, 장래 일을 너희에게 알리시리라. 그가 내 영광을 나타내리니 내 것을 가지고 너희에게 알리시겠음이라”(요16:12-14).
사도들은 주께서 그들에게 부여하신 사명, 즉 온 세상에 복음을 전하는 선교적 사명과 모든 세대를 향한 교회의 교육과 훈계를 위해 주께서 하신 순전한 진리의 말씀을 기록해야 할 사명을 수행하기 위해서 성령의 은사를 선물로 받아야만 했다. 그들은 오순절에 자신들이 태어난 지역의 언어를 사용하여 모든 이들이 들을 수 있는 설교를 하기 위해 방언의 은사를 받았다. 그들은 그 방언의 은사를 통해 그리스도의 약속을 선포했으며, 진리를 기억해 내기 위해 그들의 기억을 되살리는 능력을 부여받았고, 전 구속 계시의 완성을 위한 은사를 받은 것이다.
4. 모든 신자에게 임하시는 성령의 은사
성령의 은사는 비단 사도들만의 전유물이 아니다. 그것은 모든 교회의 성도들과 신자들의 것이다. 물론 그들 모두가 성령의 감동을 받은 것은 아니며, 그들 모두가 다 성령의 놀랄 만한 이적적 은사를 부여받은 것도 아니다. 그러나 그들 모두는 성령의 새롭게 하심과 거룩하게 하시는 은혜에 참예한 자들이다.
우리 주님께서는 신자들의 영혼 내부에 역사하시는 성령의 열매로서의 이 영적 사역을 가리켜 신자들이 반드시 수여받아야만 하는 것이라고 강조하셨다. 따라서 우리는 오순절에 발생한 사건에서 성령 하나님의 놀랄 만한 은사 뿐만 아니라 회심과 구원의 은혜 역시 풍성하게 부어졌음을 발견하게 된다. 삼천 명의 영혼이 흑암에서 빠져 나와 기이한 빛으로 즉시 옮겨지는 기적의 역사가 나타난 것이다.
이 신기한 기사를 읽으면서 우리는 종종 사도들의 설교에 수반되어 수많은 영혼들을 어둠에서 빛으로, 사탄의 권세에서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 놓은 갱신과 회개와 거룩의 은혜에 관심을 기울이기보다는 사도들에게 수여된 불가사의한 은사와 그들의 입으로 방언을 말하게 했던 성령의 감동에 더 큰 관심을 기울이는 경향을 보인다.
물론 사람의 눈에는 방언을 말하는 광경이 더욱 충격적이며 인상적일 수 있다. 그러나 수많은 영혼을 하나님의 나라로 옮겨 놓은 이 성령의 은혜보다 더 중요한 것은 없을 것이다. 전자는 수단이요, 증거이자 표적이다. 그러나 후자는 모든 회심의 효과적인 원인이 된다. 바로 이것이 그리스도의 교회에 있어서 성령의 통상적이고 영원하며, 영구한 사역인 것이다.
우리는 현재 소위 ‘성령 사역의 시대’라고 불리는 시대에 살고 있다. 그것은 바로 부활하신 주께서 승천하신 이후, 모든 나라와 모든 시대의 하나님의 백성들이 성령의 교훈과 지도를 받는 시대를 가리킨다. 이 시대는 그야말로 더없이 영광스럽고 완전한 은혜로운 계획의 마지막 시대이다.
우리 시대에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가 거의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이 세상에서 성령께서는 여전히 그리스도의 증인이시고, 그리스도를 대신하시는 교회의 주인이시다. 첨단을 달리는 현대에도 성령께서는 여전히 이 세상의 죄와 의와 심판에 대하여 책망하실 수 있는 충분한 증거를 가지고 계신다. 성령께서는 여전히 ‘그의 백성들을 모든 진리 가운데로 인도’하시고, 그리스도의 영광을 나타내시며, 그리스도의 것을 가지고 ‘그것을 그의 백성들에게 보이심’으로 교회의 교사로, 또한 다시 살리시고 거룩하게 하시는 분으로, 그리고 보혜사로 역사하신다.
‘성령의 현현은 모든 사람의 유익을 위해 동시에 주어진 것’으로서 성령의 내적 역사하심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 거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그것은 성령께서 ‘우리 안에서 동행하시고 그의 모든 선하시고 기뻐하시는 뜻으로 우리 안에서 믿음을 통해 능력으로 역사하시는 것’을 의미한다. 우리가 앞으로 살펴보겠지만, 모든 영적 은혜의 시행과 각양의 영적 축복의 향유는 우리 영혼 안에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직접적이며 내적인 사역의 결과이다.
5. 기적보다 더 놀라운 성령의 역사
‘성령께서 역사하시는 성령의 시대’를 살아가는 목회자라면 그의 목회사역을 강화해 주는 이 성령에 관한 교리에 대해 더욱더 열정적인 태도를 취해야 할 것이다. 더욱이 그 자신이 ‘영으로 역사하는 사역자’라고 묘사된 자라면 더더욱 그러해야 할 것이다.
만일 우리가 그리스도께서 자신의 떠나가심보다 더 큰 보상이 될 것이라고 선언하신, 교회를 위해 베푸시는 성령의 능동적인 역사하심을 어리석고 광신적인 개념으로 간주한다면, 그리고 전 교회의 소망이자 기대가 되는 성령의 역사하심을 조소하고 멸시한다면, 그것은 성령의 교리에 대한 비통해할 만한 무지일 뿐만 아니라 복음의 전 계획과 본질에 대한 통탄할만한 무지인 것이다. 만일 목회자가 그의 목회사역을 능력 있게 하시는 유일하신 성령의 사역을 대수롭지 않게 여긴다면 그 목회는 어떤 복도 받지 못할 것이다.
오늘날 성령의 초자연적인 현현이나 가시적인 기적들, 표적들이 사라졌다고 한탄하는 사람들이 있다. 이들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눈으로 직접 보고 그분의 말씀을 들으며, 그분이 행하시는 놀라운 기적들의 증인이었다면, 확실히 예수님을 믿었을 것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나 당시 주님이 행하신 기적들을 직접 보고, 주님의 말씀을 직접 들은 군중들을 보라. 그들은 확신을 얻기는커녕 오히려 불신앙과 적의(敵意)로 그 마음이 강퍅해졌음을 우리는 안다.
그러므로 우리 주님으로부터 성령께서 강림하셔야 한다는 말씀을 들어야만 했다는 사실에 주목하기를 바란다. 이는 교회를 향한 성령의 은혜가 그리스도 자신의 개인적 임재보다 더욱 중요하다는 사실을 시사하는 것이다. 더 이상 기적이 나타나지 않는다는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당신에게는 기적보다 더 놀라운 성령의 증거가 있다. 따라서 만일 당신이 ‘모세와 선지자들’ 또는 그리스도와 전도자들과 사도들을 믿지 않는다면, ‘죽은 자가 다시 살아난다 해도 결코 복음을 믿지 않을 것’이다.
성경에 매우 분명하게 표현된 성령의 이적적 은사와 내적 은혜들 사이에 나타난 특징과 차이점들을 진지하고 심각하게 살펴보고, 이 둘 가운데 어떤 것이 더욱 가치 있고 중요한 것인지를 자문해 보라! 이것들은 성경에서 서로 구별된 채 매우 독특하게 묘사되어 있다.
초기에는 성령의 기적적인 능력을 부여받지는 않았지만 성령의 은혜를 통하여 많은 사람들이 새롭게 되고 거룩하게 되었다. 반면에 어떤 이들은 놀라운 성령의 은사들을 받았지만 그의 구원하시는 은혜의 참예자가 되지는 못했다. 이러한 실례는 구약 시대의 사울 왕에게서 명백히 드러난다. 사울 왕은 예언의 은사를 받았지만 그 마음은 새롭게 되지 못했다. 신약 시대의 가룟 유다도 이와 같은 경우이다.
마지막 시대에 이러한 사람들은 더욱 많아질 것이라고 우리 주님께서 엄숙히 예언하셨다. “그날에 많은 사람이 나더러 이르되, 주여 주여 우리가 주의 이름으로 선지자 노릇하며, 주의 이름으로 귀신을 쫓아 내며, 주의 이름으로 많은 권능을 행하지 아니하였나이까 하리니....”(마7:22-23). 따라서 성령의 기적적인 은사와 성령의 내적인 은혜들은 확연하게 구별되는 것일 뿐만 아니라 서로 독립적으로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하다면 이 둘 중에 어떠한 것이 더욱 가치 있는 것인가? 그것은 두말 할 필요 없이 영혼의 구원과 관계된다. 이는 성경에 직접적이며 명백한 증언은 없지만 성령의 내적 은혜만이 영혼을 구원할 수 있다는 단순한 사실에 의해 입증될 것이다. 그러나 보다 면밀하게 살펴보면, 이 주제에 대하여 성경이 침묵하고 있지 않다는 것을 발견하게 된다. 이 두 가지 주제를 직접적으로 비교하면서 사도 바울은 성령의 모든 이적적인 은사들을 다 합친 것보다도 인간의 마음속에서 역사하시는 구원의 은혜가 훨씬 더 중대하다고 확신 넘치게 선언한다.
병 고치는 은사와 기적의 은사와 각종 방언의 은사를 말한 후에, 이 은사들을 전혀 경시하지 않으면서도, 사도 바울은 “너희는 더욱 큰 은사를 사모하라 내가 또한 가장 좋은 길을 너희에게 보이리라”(고전12:31)라고 말하고 있다. 그러하다면 여기서 더욱 큰 은사는 무엇인가? 이에 대해 사도는 다음과 같이 말한다. “내가 사람의 방언과 천사의 말을 할지라도 사랑이 없으면....”(고전13:1-2).
여기서 사도 바울은 ‘성령의 열매는 사랑’이라는 성령의 내적 은혜를 가려내고 있다. 사도는 이러한 성령의 열매로서의 사랑이 모든 이적적인 은사를 다 합친 것보다도 중요하고 가치 있는 것이라고 선언하는 것이다.
그러하다면 이제 한 가지 남아 있는 질문은 이 두 가지 은사와 은혜 중에 어떠한 것이 교회의 영원한 기업이 될 것인가 하는 문제이다. 그것은 의심의 여지 없이 이 둘 모두 더욱더 가치 있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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