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6-10-09 주일설교
본문: 빌 3:7-9
제목: 믿음으로 난 의
1. 믿음으로 하나님께 난 의를 가져야 한다.
“내가 가진 의는 율법에서 난 것이 아니요 오직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니
곧 믿음으로 하나님께 난 의라”(빌3:9)
율법을 지켜서 행위로 난 의가 있고, 믿음으로 하나님께 난 의가 있다.
우리가 율법을 다 지켜서 의로울 수는 없기 때문에 율법의 행위로는 의롭게 될 자가 없다고 하는 것이다.
우리의 의는 의로워 봤자, 다 더러운 옷과 같다는 것이 성경의 말씀이다.
“무릇 우리는 다 부정한 자 같아서 우리의 의는 다 더러운 옷 같으며”(사64:6)
“의인은 없나니 하나도 없으며”(롬3:10)라는 말씀도 마찬가지다.
우리가 서로 보기에는 더 의로운 자도 있고 의롭지 못한 자도 있겠지만,
거룩한 하나님 보시기에는 다 한결 같이 더러운 옷을 입은 것에 지나지 않는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율법의 일부를 행한 것으로 의를 삼고 구원 받은 줄로 착각하였다.
“내가 증언하노니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이 있으나 올바른 지식을 따른 것이 아니니라
하나님의 의를 모르고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였느니라”(롬10:2-3)
이것이 바로 이스라엘이 하나님의 백성으로 선택 받았으면서도 멸망한 이유이다.
그들이 하나님께 열심은 있었다. 율법도 가지고 있었다.
그러나 그 열심은 올바른 지식, 성경(율법)을 바로 해석하고 따른 것이 아니었다.
서기관, 제사장, 바리새인들, 거짓 선지자들이 율법의 해석을 잘못하고 가르쳤다.
자기들의 죄를 합리화하고 탐욕과 방탕으로 살기 위해서였다.
그들이 사람의 계명으로 교훈을 삼아 가르치니 나를 헛되이 경배한다고 하셨다.(마15:9)
그들은 옳은 부분은 말만 하고 그렇게 살지 않았다.
현대의 교인들도 마찬가지이다.
이스라엘이 율법을 가졌듯이 그들도 성경을 가지고 있다.
교회에 열심이다.
문제는 성경에 대한 올바른 해석과 그에 따른 순종의 삶이다.
성경을 통해 하나님의 의가 무엇인지를 알지 못하였다.
자기의 의, 자기의 철학적이고 도덕적인 의를 하나님의 의로 해석하면 되는 줄 알았다.
그것은 자기 의를 세우려고 힘써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는 것이었다.
사사시대 300년, 하나님의 의에 복종치 아니하며,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다가 암흑시대가 되었다.
중세 1000년, 이 역시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아니하며, 힘써 자기들의 의를 세우다가 암흑시대가 되었다.
종교개혁이 일어나 하나님의 의로 바로 돌아갔지만, 그 이후 500년,
개신교는 열심은 있으나 자기들의 의을 세우려고 하나님의 의에 복종하지 않고 있다.
그 끝은 이스라엘처럼 멸망으로 이어질 것이다.
왜? 하나님의 의를, 하나님의 백성이란 사람들이, 교인이라는 사람들이 모르는가?
참으로 아이러니가 아닌가?
교회를 다닌다고, 성경을 가지고 있다고, 그에 대해 좀 안다고, 하나님의 의를 아는 것이 아니다.
이스라엘 백성들과 현대 교인들은 그렇게 착각을 하고 있다.
성령을 받고 거듭나야 하나님의 의를 알 수 있는 것이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눈으로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사람의 마음으로 생각하지도 못하였다 함과 같으니라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셨으니 --
우리가 세상의 영을 받지 아니하고 오직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았으니 이는 우리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로 주신 것들을 알게 하려 하심이라 —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 분별하느니라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의 일들을 받지 아니하나니 이는 그것들이 그에게는 어리석게 보임이요
또 그는 그것들을 알 수도 없나니 그러한 일은 영적으로 분별되기 때문이라”(고전2:9-14)
제도권을 장악한 종교 조직의 높은 자리에 앉았다고, 신학공부를 많이 했다고,
교회를 오래 다녔다고, 하나님의 의를 아는 것이 아니다.
하나님의 의는 오직 성령, 하나님으로부터 온 영을 받아야 알 수가 있다.
하나님이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을 위하여 예비하신 모든 것은
거듭나기 전의 사람의 눈으로는 보지 못하고, 귀로 듣지 못하고, 마음으로 생각지도 못한 것이다.
오직 하나님의 성령으로 이것을 우리에게 보이신다.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나야 새로운 존재가 되어야 눈이 떠져서 볼 수 있는 것이다.
귀가 열리고 마음으로 생각할 수가 있는 것이다.
육에 속한 사람은 하나님의 성령이 하신 일들을 받지 않는다.
영적인 일은 영적인 것으로만 알고 분별할 수 있기 때문이다.
육에 속한 사람이 누군가?
이스라엘 백성이면서도, 교인들이면서도, 거듭나지 못한 자들이다.
아무리 많이 배우고, 높은 자리 차지해도, 교회를 오래 다녔어도,
그들의 생각과 눈으로는 하나님의 의가 어리석게 보이고 그것을 알 수도 없다.
그들은 한사코 자기들의 의 곧 자기 소견에 옳은 것들을 하나님의 의라고 주장하고 가르친다.
그것들은 어둠의 세상 지혜와 철학들로 치우치고 오염된 지식들이다.
세상의 초등학문과 초등교사들의 영향을 받은 것이요, 철학과 헛된 속임수일 뿐이다.
그들은 하나님의 의를 주시기 위해서 오신 예수 그리스도를 십자가에 못 박아 죽였다.
지금 현대 교인들도 자기들의 의를 하나님의 의로 주장하기 위해 그리스도 예수를 죽이고 있다.
사도와 선지자들이 전하여 기록한 성경의 바른 지식을 따르지 않고 철학적인 지식을 따르기 때문이다.
사람이 성령과 말씀으로 거듭나기 전에는, 의라고 주장하는 것들은 다 자기 소견에 옳은 것일 뿐이요,
자기의 의일 뿐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세상이 시끄럽고 날로 악해지는 것은 자기의 의를 하나님의 의라고 주장하기 때문이다.
교인들이 하나님의 의를 알려면 열심만 가지고 안 되고, 바른 지식을 따라야 한다.
기독교는 역사적인 종교여서, 역사를 통하여 바른 지식을 유산으로 갖고 있다.
초대 교부들의 신학이요, 종교개혁자들의 신학이요 청교도들의 신학이다.
그들의 신학은 같다. 한 성령의 해석이기 때문이다.
(신학은 성경을 해석하는 것이다. 신학 없는 사람 없고, 철학 없는 사람 없다.)
이에서 벗어난 현대적인 신학들은 바르지 못한 지식들이다. 한 성령의 해석과 다르다.
시대의 사상과 세상 풍속과 세상 가치관이 베어 있는 것들이다.
세상인지 교회인지 분간을 못하게 하는 지식들이다.
이스라엘 시대에 제도권을 장악한 세력들이 잘못된 신학들을 가르쳤듯이
현대 교회도, 제도권을 장악한 세력들이 대교단과 유명신학교들에서
올바른 지식들의 유산을 가르치지 않고, 바르지 못한 현대의 신학들만을 가르치고 있다.
세력이 크다고, 다수가 간다고, 유명인들이 많다고, 따라갔다가는 그 길이 바로 멸망의 길이다.
생명의 길은 문이 좁고 길이 협착하고 찾는 이가 적은 곳이라고 주님 말씀하셨다.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는 예수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은 것이다.
하나님이신 분이 인간의 몸을 입고 오셔서 ‘세상 죄를 지고 가는 어린 양’이 되어
십자가에서 우리 모든 죄의 형벌을 대신 지고 죽으시고 부활하셨다.
하나님은 이 역사적 사실을 성령에 의해 믿는 자들을 그 믿음을 보시고 하나님의 의를 입혀주신다.
오직 십자가에 못 박혀 죽으신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는 하나님의 의이다.
이제 그 하나님의 의를 알고 믿고 그 의로 사는 사람이 진정한 그리스도인이다.
이 의의 열매를 많이 맺음으로 하나님의 영광과 찬송이 된다.
2. 내게 유익하던 것을 그리스도를 위하여 해로 여겨야 한다.
“그러나 내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내가 그리스도를 위하여 다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김은 내 주 그리스도 예수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기 때문이라”(빌3:7-8)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받은 의, 곧 하나님으로부터 난 의를 받고,
그 의를 살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있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내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다 해로 여겨야 한다.
우리의 믿음 생활에 진보와 성숙이 없는 가장 확실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우리의 마음과 생활의 공간은 한정되어 있다.
이왕에 가지고 있는 것을 버리지 않고서는 새로운 것을 받을 수가 없다.
내 주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다면, 곧 놀랍고 탁월하고 최고의 것이라면,
그 지식을 알기 전에 가졌던 것들, 곧 내게 유익하던 모든 것을
그를 위해 해로 여길뿐더러 또한 모든 것을 해로 여겨야 할 것이다.
그동안 나를 유익하게 해주던 특권들, 소유들, 신분들을 해로운 것으로 여겨야 할 것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리스도를 아는 지식이 가장 고상하지 않다는 것을 반증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우리에게 ‘극히 값진 진주’와 같다.
우리의 소유를 다 팔지 않으면 그 진주를 살 수가 없는 것이다.
그런데도, 예수 믿는다고 하는 사람들이 절대 자기 소유는 하나도 팔지 않는다.
그렇게 팔아서 살 ‘극히 값진 진주’로는 여기지도 않기 때문일 것이다.
내걸 왜 파냐? 그냥 그 위에 하나 더 얹으면 되는 거지 하는 걸거다.
비오는 날 미친 여자는 손에 든 보따리들이 다 젖어 못쓰게 되었는데도 절대로 안 버리고
거기다가 또 한 보따리를 더 챙기느라 여념이 없다.
자기 소유를 하나도 안 버리고 예수만 챙길려고 하는 것과 무엇이 다른가?
나는 회심하여 참 기독교 신앙을 얻고서는 기왕의 모든 철학적 지식과 신념을 다 버렸다.
목사가 되고 10년이 지날 무렵, 종교개혁자들과 청교도들을 제대로 만나고서는,
그들이야말로 ‘밭에 감추인 보화’인 것을 알고, 확신하고서는,
기왕에 배운 신학들을 해로운 것으로 여기고 다 버렸다.
다른 교훈과 다른 복음 다른 예수를 전하고 있는 교단도 다 버렸다.
최근 10년 동안 청교도 신학을 좋다고 여기는 사람들을 만나 보았다.
그러나 그것을 얻기 위해 자기에게 유익하던 것을 해로 여기고 버리는 것을 보지 못했다.
그래서 또 하나의 지식으로 끝나고 아무 진전이 없는 것을 보았다.
3.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겨야 한다.
“내가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김은
그리스도를 얻고 그 안에서 발견되려 함이니”(빌3:8-9)
십자가에 못 박히신 그리스도를 믿는 믿음으로 말미암아 난 하나님의 의를 받고
그 의를 살려면 우리가 해야 할 일이 추가로 하나 더 있다.
모든 것을 해로 여길뿐더러 그를 위하여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겨야 한다는 것이다.
기독교 신앙을 악세사리 하나 더 얹는 것으로 여겼던 사람들은 아마 기절초풍할지도 모른다.
모든 것을 해로 여기는 것도 어려운데, 모든 것을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겨요?
아니, 그 아까운 것들을 말예요? 하는 사람도 있을 것이다.
이 말씀은 분명히 성경에 있는 말씀이고 우리 생각을 덧칠하거나 에누리할 부분이 없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난 의는 악세사리용 의가 아니고 목숨을 거는 의이다.
예수님의 제자가 되는 길은 자기를 부인하고 매일 자기 십자가(죽음)를 지고 주님을 따르는 길이다.
주님이 친히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너희 중의 누구든지 자기의 모든 소유를 버리지 아니하면 능히 내 제자가 되지 못하리라”(눅14:33)
“자기 목숨을 얻는 자는 잃을 것이요 나를 위하여 자기 목숨을 잃는 자는 얻으리라”(마10:39)
우리의 안일하고 나태한 믿음이 이 말씀 앞에서 정신을 차리고 깨어나야 한다.
하나님의 나라와 그 의를 먼저 구할 때 하나님은 모든 것을 더해주신다고 약속하셨다. 하늘의 계산법이다.
모든 것을 더해 달라고만 기도하는 사람들은 순서가 잘못되고 뒤바뀐 것을 알아야 한다.
세상 계산법에서 떠나지 못하는 것은 하늘 계산법을 만나 보지 못했기 때문이다.
하나님의 성실을 맛보아 알지 못했기 때문이다.
모든 것을 잃고 배설물로 여긴 사람만이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의 모든 소유를 얻는 것이다.
모세가 본 하늘 계산법은 이러하다.
“그리스도를 위하여 받는 수모를 애굽의 모든 보화보다 더 큰 재물로 여겼으니
이는 상 주심을 바라봄이라”(히11:26)
모든 것을 잃고 배설물로 여기라심은 더 큰 상을 주시기 위함이다.
이 땅의 모든 것들은 죽을 때 다 두고 가야 하는 것들이다.
하늘에서 받는 상은 영원한 것이다.
믿음이 없으니 더 크고 영원한 것은 보지 못하고 작고 보잘 것 없고 배설물처럼 없어지고 말 것만을 본다.
특권과 소유의 유익한 것만을 보고, 보이지 않는 것들의 영원한 유익을 보지 못하는 것이다.
믿음이 없거나 믿음이 적기 때문이다.
“믿음이 없이는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지 못하나니 하나님께 나아가는 자는
반드시 그가 계신 것과 그가 자기를 찾는 자들에게 상 주시는 이심을 믿어야 할지니라”히11:6)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라 했다.(히11:1)
우리의 겪는 고난들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을 이루게 한다.
“우리가 잠시 받는 환난의 경한 것이
지극히 크고 영원한 영광의 중한 것을 우리에게 이루게 함이니”(고후4:17)
믿음은 심고 거두는 수확의 법칙을 하늘의 계산법으로 믿는 것이라 할 수 있다.
“스스로 속이지 말라 하나님은 업신여김을 받지 아니하시나니 사람이 무엇으로 심든지 그대로 거두리라
자기의 육체를 위하여 심는 자는 육체로부터 썩어질 것을 거두고
성령을 위하여 심는 자는 성령으로부터 영생을 거두리라
우리가 선을 행하되 낙심하지 말지니 포기하지 아니하면 때가 이르매 거두리라”(갈6:7-9)
믿음으로 난 의는 그리스도의 십자가로 말미암았고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이다.
그리스도를 믿음으로 난 의를 가졌으면, 하나님께로부터 난 의를 가졌으면,
위의 것을 찾고 위의 것을 생각해야 한다.
그럴려면 땅의 것을 생각지 말고 해로 여기고 배설물로 여길 줄 알아야 한다.
그리스도를 얻고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가 발견되기 위함이다.
비우지 않으면 가장 고상한 것을 채울 수 없고,
해로 여기고 잃어버리고 배설물로 여기지 않고서는 그리스도를 얻을 수 없다.
가진 것을 버리지 않고서는 새로운 것을 얻을 수 없다.
살고자 하면 죽고 죽고자 하면 산다는 역설을 믿는 것이 믿음이다.
왜 내 믿음에 진보와 성숙이 없는지를 돌아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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