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경적 신앙

[스크랩] 청교도신학의 광산을 깊이 파헤치고 무진장한 영적 생동력을 얻자/ 박영호

강대식 2016. 10. 10. 15:40

청교도신학의 광산을 깊이 파헤치고 무진장한 영적 생동력을 얻자/ 박영호

 

청교도 실천신학은 개혁신학의 구체적 적용이며 뜨거운 심령으로 받아들이고 심각한 경건으로 소화한 것이다. 청교도들의 실천신학은 개혁신학을 철두철미한 신앙으로 소화하여 삶의 모든 분야에서 그 신학을 적용하여 하나님 앞과 사람 앞에 청정무흠하게 살도록 하는 것이었다.

 

청교도 실천신학은 성경적 인간관 확립과 신본주의 신앙생활의 매우 다양하고 변화가 많은 영적 체험이었다. 그리고 교리운동과 신앙부흥운동이었다. 일반적으로 청교도들은 교회생활을 함에 있어서 교회의 도덕적 부패와 타락으로부터 깨끗하게 되기를 추구하였던 사람들이었다.

 

1. 하나님 중심의 삶

 

청교도들은 신앙과 생활의 일관성을 추구하였다. 하나님을 먼저 생각하고 다른 모든 것들을 그분과 맺는 관계를 따져서 평가했다. 하나님의 거룩한 제도를 일차적으로 구축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원하시는 순전한 교회를 세우기를 바랬다. 청교도들은 실제적인 생활에 대한 꿈을 부수어 버린 것이 아니고 일구어 세웠다. 특별히 청교도들은 그리스도인의 관심을 교회의 질서나 개인의 복지에 제한시키지 않았다. 정치 경제 사회 문화와 함께 두 가지 면을 포함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청교도들은 이러한 사상을 자명한 것으로 믿었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은 자기들의 하나님께 대한 신성(神聖)’이라는 현실 생활의 모든 분야, 즉 교회의 신앙과 규례, 모든 평신도 예배자의 개인적 상태와 행동, 나아가 모든 공동체 행동들의 목표들과 기준들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한 것으로 믿었다. 하나님의 영원한 사랑 가운데 선택함을 입어 이 땅에 와서 은혜가운데서 구별되게 살다가 영원한 내세에 들어가 영광의 삶을 누리는 것이다. 청교도들의 삶은 은혜로부터 영광에 이르는 삶(Life from Grace to Glory)”이었다. 사람이 하나님만을 즐거워하는 은혜의 삶을 살 때 영원한 영광의 삶을 누리는 것이다.

 

청교도 실천신학은 인간의 양심과 그 문제를 꿰뚫는 신학적 신념의 흐름을 가지고 있었다. 일반들에게까지 그 흐름이 스며들었음을 알 수 있다. 설교에 대한 권위, 헌신 그리고 철저한 신앙훈련이 있었다. 청교도 지도자들의 설교와 교리 가운데서 공통적 사고방식은 하나님 중심의 삶이었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임재를 느끼며 기뻐하는 것이 지복(至福)이었다. 하나님 안에서 늘 기뻐하고 즐거워 하는 것이다. 하나님을 단단히 붙들고, 단단히 붙어 있으므로 그분의 소유가 되었다. 청교도들의 하나님 중심의 삶은 영적 도덕적 성결을 삶의 우선 과제로 삼는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의 영광· 그리스도 안에서 회심하는 영혼· 사죄· 영생 · 하나님을 친근히 함, 그리고 거룩한 생활이다.

 

2. 성경 중심의 삶

 

사도시대 이후에 있어서 과거나 현재를 막론하고 어떤 다른 기독교회의 교훈보다도 청교도들의 실천신앙이 정통개혁 주의자들에게 보다 더 실제적인 도움을 줄 수 있다. 청교도들은 개혁된 전통 안에서 신학을 배우려는 요구와 사도적 방법으로 성경을 해석하려고 하였다. 청교도 신학자나 설교자들은 지력(知力)이 뛰어난 사람들이었다. 그들의 마음속에는 건전한 학문에 의해서 훈련된 정신적 습관들이 하나님께 대한 불타는 열성과 사람들의 마음에 대한 세세한 지식과 결합되어 있었다. 그들의 모든 행위는 은사와 은총을 독특하게 융화시켜 나타내 주었다. 하나님의 최고 권위에 대한 그들의 이해는 심오하였으며 하나님의 말씀을 해석하는 데 있어서 청교도들의 성경 말씀에의 존경심은 매우 깊었다. 청교도들은 하나님께서 인간들을 다루시는 방법과 중보자이신 그리스도의 영광, 그리고 성도와 교회 안에서 이루시는 성령님의 역사에 대해서 그들 이후 어떤 사람들에게도 못지 않게 풍부하고 충분히 이해하고 있었다. 청교도들의 지식이 단순한 신학적 정통만은 아니었다. 청교도들은 하나님께서 주신 성경 말씀을 생활의 실천에 옮기려고 노력하였다.

 

청교도 자신들의 양심을 성경 말씀에 조명하여 얽매이게 하였고, 또한 그들이 행한 모든 일들에 대해서 신학적 정당화를 자신들에게 요구하였다. 청교도들은 개인적인 세계뿐만 아니라 교회, 가족, 국가, 예술과 학문 그리고 경제의 세계까지 깊은 주의를 기울였다. 이렇게 함으로써 이 세상 모든 것들의 창조자이시요 주인이 되시는 하나님께 영광을 돌리도록 하였다. 청교도들은 옥스포드와 케임브리지 대학교의 출신이었고 고위층의 위치를 확보하였다. 청교도들이 예배 의식에서 흰옷과 장백 사용을 거절하고 교회에서 화려한 비품을 거절한 것은 미학의 진수를 몰라서가 아니라 성경 말씀의 바탕에서 판단하였기 때문이다. 청교도들은 순결한 단순성 가운데서 아름다움을 찾았고 특성화된 인간의 모조품들을 영적 퇴폐에서 오는 것으로 믿었다.

 

청교도들은 특히 조각한 우상을 배척하였고 하나님의 영광이 교회의 채색된 창문에나 조각에서 적당하게 결코 그려질 수 없다고 주장하였다. 버나드 메닝, “만약 사람들이 진정한 의미에서 그리고 올바른 인식 가운데서 하나님의 이름을 부른다면 그것은 그 자체가 너무나 거대하고 위로로 가득찬 행위이기 때문에 어떤 감각적이거나 예술적인 과장된 표현은 햇빛을 그리거나 시들어가는 백합화를 그리는 정도에 불과하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을 알 뿐 아니라 인간에 대해서도 알고 있었다. 청교도들은 인간을 하나님의 형상대로 지음을 받아 하나님의 세계를 지배하도록 창조 받은, 근본적으로 고귀한 존재로 보고 있다. 그리고 타락 이후 죄에 대해서 사회문제를 유발하는 잔인한 인간으로 변신되었다고 믿었다. 청교도들은 믿음과 도덕의 모든 문제를 확인하기 위해서 지속적인 성경연구에 박차를 가하였다. 그들의 견해는 하나님의 말씀이 시금석이 된 것이다. 청교도들은 하나님의 율법과 주권 그리고 거룩함의 조명 안에서 인간들이 죄를 깨달을 수 있다고 주장하였다. 거기에다 성령께서 죄인들을 믿음과 그리스도 안에서의 새로운 삶으로 이끌어 주시며, 성도들이 좀더 겸손하게 성장하도록 은총에 점점 더 의지하게 함으로써 예수 그리스도의 마음을 닮도록 하였다. 이 사실을 깨닫게 됨으로써 청교도들은 자신들의 시대에 있어서 훌륭한 설교자들이 되었다.

 

청교도 신앙운동은 유혈사태가 일어나지 아니하였고, 영적이며 설교적이며 실제적이었다. 청교도 설교가 영국 민족의 생활과 사상을 좌우하였다. 그들의 성경적 설교는 영감에 의한 명백한 신념과, 성경의 완전 무흠을 확신한 것에서 놀라운 영적 능력을 가져왔던 것이다. 청교도 목사들의 설교내용은 양심에 대한 강조, 죄의 심판, 지옥 불에 대한 설교로서 전체 설교의 50%에 해당하였다. 하나님의 은혜와 구속하시는 하나님의 사랑의 지식에 이르도록 영혼을 일깨우는 설교를 하였다. 그 설교는 인간의 두뇌와 지성에 호소한 것이 아니라, 인간의 영혼을 위한 열렬한 관심을 갖고 전인(全人)을 겨냥하고 있었다. 그러므로 청교도들은 항상 설교가 사람을 변화시키고, 하나님의 대리자로서의 일임을 확신하였다.

 

청교도 운동은 화형대에 묶여 조소를 당하고 불 속에 던져저서 새까맣게 태워지는 화형을 당하고 추운 겨울에 목사직에서 추방을 당하여 자녀들과 함께 거리에 버려지므로 막을 내리는 듯이 보였다. 그러나 그들의 신앙정신은 오늘의 세계교회 앞의 신앙의 지침과 방향이 되고 앞으로도 끊임없이 계속되리라고 본다. 왜냐하면 청교도의 신앙은 오직 성경적 삶이었고 절대적으로 하나님께 의존하는 하나님의 주권을 믿었기 때문이다.

 

3. 실천생활 중심의 삶

 

청교도들은 실천생활을 높이 외쳤다. 진정한 기독교의 표지는 전인격적인 삶이었다. 성도는 말뿐만 아니라 실제 삶에서 생활로 말하고, 신앙을 논할 뿐 아니라 삶으로 살아야 했다. 존 오웬은 우리가 행복해지느냐 불행해지느냐 여부는 복음의 사실을 알고 있는 데 달려 있지 않고, 오히려 그것을 행하는 데 달렸다라고 말했다. 존 번연도 종교의 생명은 실천이라고 말했다.

 

청교도들은 실천 지향을 지녔기 때문에 믿음의 경험적 본질을 강조했다. 교리를 지적으로 수긍하는 정도로 만족하지 않고, 하나님의 삶, 참되고 진지한 실제적인 삶을 추구했다. 청교도들이 애용하는 단어 가운데 하나가 실천함’(doing), 경험하는단어였다. 그러므로 성도의 삶은 곧 경험이었으며 역사적인 믿음과 온몸으로 느끼는 믿음을 구분했다.

 

청교도들은 거룩한 공동체의 이상을 구현하며 하나님께 대한 깊은 경외심과 삶의 심오한 도덕적 진지성을 사모했다. 그러므로 삶의 어떤 부분도 소홀히 다루지 않고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그들은 그들의 신학을 모든 삶의 하나하나에 적용하였다. 교회의 순결을 강력하게 열망했고, 시민의 자유를 열렬히 옹호하였다. 순결한 교회를 바라는 불타는 열망은 교회 출석과 안식일 준수를 강조하였다. 하나님의 집과 하나님의 날을 엄격히 시행하였다. 청교도들은 낮에는 일을 하고 선한 행실을 하며 하늘에 계신 하나님 아버지를 영화롭게 하며 밤에는 주인이 도적 같이 와서 그가 빈둥거리고 있음을 보지 않도록 하기 위해서 정결한 밤을 보냈다.

 

4. 우리의 새로운 각오

 

한국교회는 청교도 실천신학에서 계속하여 많은 것을 배워야 한다. 청교도 실천신학은 교회 질서와 훈련, 깊이 있는 신앙의 철저함을 요구하였다. 그들은 주일날에 오락이나 운동, 물건사기를 금하고, 철저한 성수주일을 지켰다. 주일 하루는 오직 말씀을 듣고 기도와 찬송, 가난한 이웃 봉사로 보냈다. 이에 반해 한국교회의 일각에서는 주일 오전 11시의 교인만 많아지고 있다. 목회자들은 직업주의에 빠져 진리를 외면해 버리고 형식을 복음보다 중요시하고, 웅변과 능변, 적극적 사고와 기복신앙이 본질이 되고 말씀은 슬쩍 넘겨 버리고 있지나 않는가? 목회자들의 태도가 우연적이고 기회주의적이며 성공병에 시달리며 침착하지 못한 성급함으로 이루어졌다고 말함이 혹독한 표현일까? 딱딱한 학문, 겸손한 자기반성, 훈련된 묵상 그리고 소명 의식과 피나는 기도 가운데서 주어진 힘든 사역에 대해 흥미를 잃어가고 있지 않는가?

 

청교도 목회자들은 모든 삶에서 하나님의 영광’(Soli Deo Gloria)을 위해서 살았으나, 한국교회의 일부 목회자들 가운데 자신이 마치 우주의 중심이나 되는 것처럼 생각하고 자기 자신의 주위만을 맴돌고 있지 않는가? 그리고 복음주의 교회가 자랑하는 신학과 신앙이 공허하고 앙상한 뼈만 남아가는 것이 명백히 드러나고 있지 않는가? 복음을 전파하는 데 있어서도 율법이 없는 복음과 회개가 없는 신앙을 강조하고 있다. 구원의 은총은 강조하나 그리스도인으로서 치러야 할 사명감에는 소홀히 하고 있다. 늘 기쁨과 화평, 행복과 만족, 영혼의 안식과 세상에서의 축복만을 바라고 있다. 그리고 영적침체 상태에 빠져서 신비주의에 매혹을 느끼고 있다. 그러므로 개종하겠다고 고백하였던 많은 사람들이 교회의 문을 떠나서 타락하고 있는 것은 그렇게 놀라운 일이 아니다.

이러한 시점에서 한국교회에는 영적 치료를 할 수 있는 청교도 실천신학이 필요하다. 청교도 실천신학의 광산을 좀더 깊이 파헤치고 무진장한 영적 생동력을 얻으면 얼마나 큰 유익이 되겠는가! 우리 한국교회도 청교도들이 읽던 성경을 가지고 있다. 그리고 우리도 청교도들이 믿었던 하나님을 믿고 있다. 그런데 왜 우리는 청교도의 실천신학을 가지고 있지 못한 것일까? 이제라도 한국 교회가 청교도의 실천신학을 배워야 하며, 나아가 우리 한국교회도 청교도 목회자들처럼 영적 부흥을 일으켜야 한다.

 

- 박영호, ‘청교도 실천신학’, 끝맺는 말, 우리의 새로운 각오, pp 639-645


출처 : 청교도 아카데미
글쓴이 : 강대식 원글보기
메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