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상 기도가 실제로 무엇을 포함하는지는 다음 글이 분명하게 묘사하고 있다.
관상 기도의 좀 더 깊은 층위로 들어가면, 조만간 공, 빔, 무를 경험한다--심원한 신비의 침묵--무념무상의 상태를 경험하는 것이다
황당하게도 나는 이 “신비한 침묵”이, 뉴에이지 수련자들이 침묵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하는 똑같은 방법들, 즉 만트라와 호흡법에 의해 이뤄지는 것임을 알게 됐다! 관상 기도는 이성이 아니라 심령이 신을 관조하는 상태에 이르기까지 기도의 말 혹은 거룩한 언어를 반복하는 것이다. 제이거는 이 점을 드러낸다.
단어의 뜻을 숙고하지 말라. 사고와 고찰을 그쳐야 한다. 모든 신비주의 저자들이 주장하는 것처럼, 그저 그 말을 고요히 “소리내라” 모든 감정과 생각은 떨쳐 버리라.
약간이라도 신학 훈련을 받은 사람은 이 가르침이 역사적으로는 마이스터 에크하르트, 아빌라의 테레사, 십자가의 요한 그리고 노리치의 줄리안과 같은 인물들로 수 세기 거슬러 올라가는 것임을 알아차릴 것이다.
이 주제에 관한 가장 널리 알려진 글 가운데 하나는 14세기, 무명의 저자가 쓴 ‘무지의 구름’이다. 관상기도로 초심자들을 인도하는 책이다.
말을 적게 하라. 두 음절보다는 한 음절이 낫다--이 말로 망각의 구름 아래로 모든 생각을 떨쳐 버려야 한다.
이 말의 근거는. 진정으로 신을 알기 위해서는 신비주의를 연마해야 한다는 것이다. 지성은 가라앉아야 하고 꺼버려야 한다. 그래야 신의 임재가 기다리고 있는 무지의 구름을 경험할 수 있다. 이 방법으로 수련하는 자들은 만약 그 거룩한 말들이 기독교적인 것이면, 수련자가 그리스도를 만나게 된다고 믿는다. 방법이 신비주의 혹은 동양적인 수련론이라 할지라도 문제가 되는 것은 의도일 뿐이다.
따라서 기독교인인 우리가 우리 자신에게 던져야 할 질문은 이것이다. “왜 안되는가? 왜 이런 신비주의 기도법을 우리의 삶에 받아들이면 안되는가?” 이 질문의 답은 성경에서 찾을 수 있다. 성경의 어떤 구절은 신비 경험에 대해 말한다. 그러나 하나님이 인간에게서 나온 신비주의를 인정한다는 증거는 그 어디에도 없다. 정당한 신비 경험은 언제나 하나님이 일으키신다. 그것도 어떤 사람들에게 특정한 계시를 주시기 위함이었다. 결코 의식의 전환과 같은 방법에 의존하지 않았다. 행 11:5에서 베드로는 기도 중에 비몽사몽에 들어간다. 그러나 베드로가 아니라 하나님이 이 황홀경을 일으키신다.
반면 신비가는 정의상으로 말하자면, 자신의 내면에 있는 신성을 활성화하기 위한 시도로 틀에 박힌 방법을 사용하는 사람이다. 이런 방법들을 사용하는 사람들은 신의 허가 혹은 보호 없이도 어떤 황홀경에 스스로를 끌어넣는다. 대단히 위험한 접근을 하는 것이다. 게다가 성경의 어디에도 이런 신비한 수련을 하라는 명령이 나오지 않는다. 하나님은 기독교인들이 하나님의 반응을 사전에 얻어 내는 방법을 수련하지 않아도 영적인 선물을 수여하신다.
관상 기도 지지자들은 이렇게 반응할 것이다. 그러면 시편 46편 10절은 무엇인가? “너희는 가만히 있어 내가 하나님 됨을 알지어다.” 관상 기도 지지자들은 이 구절을 자주 내세운다. 표면적으로는 이 논쟁이 정당해 보일 수도 있다. 하지만 “잠잠하다”는 말의 의미를 관찰하고 나면, 어떤 관상적인 연결도 차단된다. 이 단어의 히브리어 의미는 속도를 ‘늦추다’, ‘중단하다’ 혹은 ‘감하다’이다. 벌어지고 있는 일들에 어쩔 줄 몰라 하지 말고 느긋하게 하나님을 신뢰하라는 것이 문맥의 정황이다. 마음을 편하게 하고 하나님이 일하시는 것을 보라.
그 앞의 두 구절을 읽으면 그것을 알 수 있다.
와서 여호와의 행적을 볼지어다 그가 땅을 황무지로 만드셨도다 그가 땅끝까지 전쟁을 쉬게 하심이여 활을 껶고 창을 끊으며 수례를 불사르시는도다 이르시기를 너희는---
이 말씀은 어떤 변화된 의식의 상태로 들어가는 것을 말하지 않는다! 중생도 하나님의 직접적인 행동이다. 성령님이 한 때 죽은 영을 그리스도를 통해 살아 있는 영이 되도록 거듭나게 하신다. 하나님이 개인을 변화된 의식상태로 놓지 않고 이 일을 이루신다.
행 2장에 기록된 오순절에도 모인 사람들이 방언으로 말하기 시작했을 그때, 정신없이 중얼거리거나 만트라와 같이 공허한 반복을 했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이들은 황홀경에 빠져 있던 사람들이 아니었다. “우리가 다 우리의 각 언어로 하나님의 큰 일을 말함을 듣는도다”고 하였다.
따라서 신약 성경에서 가장 신비 경험에 까까운 사건으로 기록된 두 사건(중생과 오순절)을 볼 때, 의식의 변용을 추구한 흔적도 없고 그런 것이 일어나지도 않았다. 사실 신 구약 성경을 철저하게 연구하면, 그 수혜자가 온전한 정신 상태를 하고 있지 않아도 체험하는 하나님이 허용하신 딱 두 부류의 경험이 있다. 하나는 꿈이고 다른 하나는 환상이다. 그런데 이 각각의 경우에서도 경험은 하나님이 주도하신다. 반대로 성경에서는 자기 주도적인 황홀경은 하나님께서 예외를 두지 않고 정죄하시는 것을 아래 성구들을 통해 간단 명료하게 확인할 수 있다.
신 18:9~13)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주시는 땅에 들어가거든 너는 그 민족들의 가증한 행위를 본받지 말 것이니 그의 아들이나 딸을 불 가운데로 지나게 하는 자나 점쟁이나 길흉을 말하는 자나 요술하는 자나 무당이나 진언자나 신접자나 박수나 초혼자를 너희 가운데에 용납하지 말라 이런 일을 행하는 모든 자를 여호와께서 가증히 여기시나니 이런 가증한 일로 말미암아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그들을 네 앞에서 쫓아내시느니라 너는 네 하나님 여호와 앞에서 완전하라
위 구절에서 사용하고 있는 용어들의 히브리적 의미를 살펴보면 상당수가 주문 외우는 일과 관련이 있다. 그리고 문맥에서 주문은 황홀경을 뜻한다. 달리 말해 하나님께서 무의식 상태로 이끄실 때는 꿈 혹은 환상 가운데서이다. 그러나 사람이 황홀경으로 들어가는 것은 주문 혹은 최면의 형태를 빌려서다. 한편 성경은 어디에도 침묵이 “하나님의 능력”과 동일시되지 않는다. 하나님의 능력은 확고부동하게 “십자가의 메시지”(고전1:18)이다.
-레이 윤겐, '신비주의와 손잡은 기독교', 2장 서양의 요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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