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신학 : 1919년 이전 (1) |
제 1장 서론 ; 1919년 이전 현 대 신 학 옮긴이의 글 이 「현대신학」 강의집은 개혁신학 연구원과 대학원에서 서철원 교수님께서 강의한 내용을 녹음했던 테이프를 그대로 옮겨 정리했던 것을 재차 본인이 정리하여 내놓게 되었습니다. 여러가지로 옮긴이의 부족함 때문에 책이 제대로 되어지지 못한 점이 많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작업을 통해서 개혁신학의 진수가 많은 분들에게 바로 전달 되어지기를 기대하는 소망으로 오로지 이 일을 하였습니다. 이 작은 수고를 통하여 서철원 박사님의 진리이해가 더욱 개진되어 나타나므로 그를 도우시는 성령의 역사와 함께 한국교회에 더욱 값진 열매로 나타나지기를 소망합니다. 앞으로 이 책이 더욱 많은 진리를 개진할 수 있는 계기가 되어지기를 바랍니다. 또한 이 글을 읽는 독자들로 인하여 세상의 헛된 철학과 속임으로 부터 진리를 보수하여 한국교회가 더욱 힘차게 복음의 은혜 아래 서기를 바랍니다. 1992년 정초 남도 어느 하늘아래서. 주용현 목사 識 목 차 제 1장 서론 : 1919년 이전 20세기 이전의 서구 사상의 주도적 경향 20세기의 시작 19세기 내재신학 변증철학인 희랍철학의 기원,동기 그리고 그 전제인 형상과 질료임마누엘 칸트의 현상계와 예지계에 대하여 이성주의적 자연신론의 시대에 불트만의 비신화화 개념역사비평적 방법 제 2장 1919년 이후 바르트의 계시관과 성경관 제 3장 신정통주의 제 4장 양식비평 제 5장 불트만의 비신화화 제 6장 구속사 제 7장 세속화 신학 제 8장 상황윤리 제 9장 소망의 신학 제 10장 역사의 신학 제 11장 진화론의 신학 제 12장 과정신학 제 13장 존재의 신학 제 14장 세대론 제 15장 근본주의 제 16장 신근본주의 20세기가 실제로는 1901년부터 시작하지만, 정치적으로는 세계 제 2차 대전이 발발했던 1914년 부터 20세기가 시작된다고 하며, 신학적으로는 Karl Barth의 로마서 주석이 나오던 1918년 혹은 1919년 부터 20세기라고 한다. 또 미국에서의 20세기 시작은, 소위 대공황이 시작되어 이 땅에 낙원이 이루어질 것이라고 하는 환상을 깨고서 자기 자각에로 되돌아가는 계기가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그래서 미국에서는 1929년을 20세기의 시작이라 한다. 20세기 이전의 서구사상의 주도적 경향 19세기는 과학의 발달로 구라파의 산업혁명이 거의 완결된 때였다. 그후 많은 신무기들을 생산하여 많은 식민지를 정복하므로 구라파인들의 시야는 더욱 넓어지며 그들의 통치영역은 전 세계적으로 확대되었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사상적으로도 무한한 진보의 가능성을 믿는 학설들이 난무하기 시작했다. 그래서 특별히 1959년경에 나온 다윈의 진화론의 ‘종의 기원’이 서양 사람들에게는 아주 결정적인 영향을 미치게 되었다. 그후 서구인들이 세계를 지배하는 영역도 넓어지고 자연을 지배하는 영역과 세력도 말할 수 없이 확장되게 되었다. 그러므로 19세기 사람들은 무한한 진보와 발전의 가능성을 믿었고 이성을 지도자로 해서 나아가는 한은 모든것이 분명하게 다 실현될 줄로 믿었다. 그뿐 아니라 19세기는 1884년, 그러니까 19세기 말엽에 우리나라가 복음을 받을정도로 기독교가 선교에 있어서 크게 성공하여 전 세계적으로 확장한 해로써, 아시와와 같은 미개지역에 그리고 아프리카, 저 산호반도들에 까지 선교가 확장되었던 선교의 세기였다. 그런 면에서 보면 20세기는 선교가 상당히 후퇴한 세대라고 할 수 있다. 지금은 서구가 탈 기독교한 상황이 되고 말았지만 19세기에는 서구가 정말 복음의 전파에 열을 가하여 제세계적으로 복음이 확장되자 이들은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가 온 인류를 포용할 수 있다고 그렇게 믿었다. 또 자기들이 사는 그 사리에도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의 사랑의 원리가 상당히 확장된 것으로 생각했다. 그래서 세계 제 1차 전쟁이 나기전 19세기말 1899년에 Adolf von Harnack은 베를린 전체 學部(신학부만 아니라)를 모아놓고 기독교의 본질을 강의했는데 그때 제일 중요한 주제는 기독교 종교개혁 이후에 300년을 사는동안 사랑의 종교인 기독교(인)가 사랑을 실천해 오므로 아직은 만족할 수 없지만 이와 같은 추세로 나아가면 우리의 모든 생활영역이 사랑의 정신으로 완전히 변화될 것이라고 역설했다. 이것은 서구 사람들의 보편적인 생각이었다. 사회복음주의 구라파가 그럴 때 미국에서 같은 경향을 가지고 있었는데 소위 미국의 사회복음주의를 부르짖던 라우센부쉬(Walter Rauschenbush)도 지금 기독교의 사랑의 정신이 온 미국의 생활영역을 침투했는데 정치와 경제영역만 기독교의 사랑이 정신으로 이루면 이 땅이 완전히 하나님 나라가 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니까 미국이 기독교정신에 의해서 점점 선해지고 잘 되어가는 것으로 확신했던 것이다. 이 라우센부시의 주장은 20세기에 들어와서 뉴욕 유니온 신학교 교수였던 라인홀드 니이버(Reinhold Niebuhr)에 의해서 깨지기 시작했다. 니이버는 사회복음주의가 기독교정신을 가지고 우리의 손으로 좀 더 나은 유토피아에 가까운 사회, 즉 하나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다는 생각을 깨트렸다. 인간은 개인적으로는 도덕적이고 윤리적이지만 사회적으로 단체에 들어가서는 윤리적인 표준으로 일하지 못하고 단체의 유익을 위하여 노동조합의 지도자들을 위해서 일하는 방식으로 일이 진행되므로 인간의 이상세계의 건설은 불가능하다고 라우센부시와 미국인의 생각을 정면으로 깨버렸다. 이와 같이 19세기의 사상들은 20세기에 와서 점점 무너지기 시작했는데 지금까지 기독교 정신에 의해서, 그리고 자연과학의 활용으로 자연을 정복하고 사람의 힘의 완력으로 많은 통치영역들을 확대하자 식민지역에서 대량의 쌍 물자들이 구라파와 미국으로 쏟아져 들어 왔다. 그러므로 서구인들은 자기의 이상으로 또는 기독교의 힘에 의해서 그러한 무한한 가능성을 개발하여 진보하고 발전하면 이런 자연과학적인 합리적인 공식과 기독교이 사랑의 정신으로 인간들이 꿈꾸던 이상세계, 즉 유토피아 또는 사랑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1914년 세계 제 1차 대전으로 인해서 자기들이 손으로 건축한 그 찬란한 서구의 문명을 자기들의 손으로 허물어 버린 것이다. 폴 틸리히(Paul Tillich) 특히 폴 틸리히(Paul Tillich)가 20세기 사상에 유명한 공헌을 한다. 그는 제 1차 세계대전 때 군목으로 일하면서 시체들 속에서 잠을 잤다. 그것이 그가 헤겔 철학에 굳게 매였던 데서 실존철학으로 돌아선 계기가 되었다. 틸리히는 이 경험으로 서구 사람들을 지배하던 유토피아적인 이상주의와 그들이 공약한 새로운 세계가 크게 열릴 수 있다는 기대감에 차있던 그런 의식구조들은 완전히 허물어지고 새로운 지각에로 되돌아 왔다. 그는 이 때의 경험으로 두 세계가 교차하는 그런 교차라고 제 1차 세계대전을 설명하였다. 헤겔 그러니까 헤겔은 그의 전 철학사에서 모든 인류 역사와 자연의 전체 진보과정을 소위 이념 혹은 절대이성, 또는 세계정신이라고 하는 그와 같은 로고스(Logos)의 작용이 자기를 현시하면서 저 낮은 단계에서 높은 사상적인 단계에로 올라가다가 헤겔과 같은 큰 철학자에 의해서 진보 발전해 가면서 완성되는 것으로 말한다. 그러기 때문에 헤겔의 영향에서도 항상 正,反,合에 의해서 새로운 단계로 밑의 것을 지향하면서도 正과 反이 변증법적으로 투쟁하고 충돌할 때에 그 양쪽을 지향해 가면서 그 좋은점들을 포용하여 제 3에 가면서 운동하고 운동해서 항상 변증법적인 발전과 진보를 거쳐서 더 나은 세계로 혹은 자기 자신에로 충분히 이르러 온다. 그리고 혹은 헤겔의 말대로 이데아(Idea) 혹은 절대이데아가 점점 이런 완전에 이르러가는 과정 즉, 그런 완전의식, 혹은 절대의식의 단계가 소위 그들이 말하는 神개념이다. 그러면 그 神이 자기자신(혹은 말을 바꾸어 절대정신)으로 되돌아 가느냐? 그것은 철학자의 의식이다. 철학자의 의식에서 자연과학적인 측정에서 벗어나서 모든 사물의 본질을 다루고 사고하고 깨닫기 때문이다. 물론 지금은 자연과학적인 발전이 많아지니까 다르지만, 철학은 책상을 만든 사람이 책상 길이를 정확하게 재는 그런 지식을 논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과학이 어떤 지식에 대해서 다 확실하게 옳다해도 철학은 그것이 정말 인간이 가지고 있는 기본권리, 즉 이성에 의해서 반성되고 사고되어 완전하고 분명하고 확실한 보편타당한(어떤 면에서 “보편타당”이란 말이 맞는 말은 아니지만) 지식인가를 따진다. 그렇게 완전히 반성되고 개발되어 그 안에 자기가 지나온 모든 과거를 다 포용하면서 완전할 수 있는 그런 보편타당한 지식, 그런 의식을 하는 것이 철학이다. 그러니까 모든 학문은 그 대상에 대해서만 맹목적으로 한다. 헤겔은 철학자의 완전한 의식으로 분명하게 사고된 지식, 즉 철학적인 절대 배경인 그 보편개념을 철학자의 의식에 나타난 절대정신의 역활로 알 수 있다고 했다. 그리고 19세기까지 그런 철학적사고가 이성으로 포착한 보편타당하고, 영구히 타당한 진리를 포착하고 만들어 낼 수가 있고 계시할 수 있다고 한다. 그렇게 해서 지식의 무한한 확대 가능성을 생각해 냈던 것이다. 이성으로 획득한 지식의 불확실성 그런데 지금 과학자들은 천체 물리학에서도 어느 한계를 넘어서면 더 이상 그 별의 연대를 확정할 수 없다는 것이 그들의 결론이다. 물질의 기본단위를 따지는 미시세계도 소립자가 있는 줄 알았는데 사실상 없는 것이 입증되었고, 그것은 우리가 지어낸 법칙이 아니라 물질 그 자체에 고유한 법칙이 있어서 파장과 소립자가 상반되지만 또 상호 보완하므로 상보성원리 그리고 양자의 법이 세워졌다. 젊은 친구들의 이야기를 들으면 이런 물질의 현상태를 어떻게 해석해야 옳으냐 할 때 고민이 많다고 한다. 왜냐하면 창조 되었으면 물질의 기본단위가 있을 줄 알았는데 물질이 에너지 즉 파동으로 바뀌어 버리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20세기 후반에 와서는 지성인들이 해결점을 찾지 못하고 있는 것이다. 그래서 불교에서 말하는 “많은 사람의 마음의 표현”이라는 그런 사고가 많은 호소력을 갖는 것이다. 그러니까 19세기 혹은 제 2차 세계대전 전까지만 해도 거시세계나 미시세계와 같은 이 현상세계에 대해서 확실하게 알 수 있을 뿐만 아니라 영원한 진리까지도 다 이성으로 탐구할 수 있을 것으로 믿었다. 그런데 세계대전을 거치는 동안 큰 벽에 부딛친 것이다. 아리스토텔레스의 인간본질의 정의는, 인간은 본래 합리적인 존재여서 합리성이 인간 본질이라 하면서 인간이 두 다리를 가지는 것은 우연적인 것이지만 이성은 합리적인 것으로 그 지성적인 것이 본질이라고 한다. 이 사고가 서구 2천년사의 계속된 지배적 사상이다. 그래서 이성을 활용하므로 인간에게 가지고 있는 문제들을 다 해결할 것으로 믿었다. 그러니까 18세기는 이성이 종교를 생산해 내는 해였다. 그런데 그렇게 이성으로 모든 만능을 이루어낼 것으로 생각했는데 제 1차 세계대전을 만나서 다른 외부의 세력이 아닌 인간 자신의 손으로 자기들이 세운 문명을 다 부숴버린 것이다. 이것은 서구 지성인들에게 참으로 큰 충격을 주었다. 18세기에도 낭만주의가 한참 팽배하고 있을 때 리스본에 지진이 일어나서 4천 명이 죽었다. 나라 인구도 얼마 안되는데 보통 큰일이 아니었다. 이때 하나님이 이 세계를 합리적으로 지으셨고 또 다스리면 이런 불합리한 천재지변으로 그 많은 사람이 죽느냐고 반문했다. 그래도 이성에 대한 확신 그 신앙을 무너뜨리지는 못했다. 그러나 제 1차 세계대전은 그들에게 의미가 달랐었다. 그렇게 이성을 신뢰하고 확신에 차 있던 서양 지성인들이 자기들의 손으로 전쟁을 일으켜 제 2차 세계대전 전까지 인류역사상 가장 많은 사람을 죽이고 그 손으로 세운 문명을 깨트리므로 서구 지성사에 일대 변혁이 일어났다. 그래서 인간의 합리적인 데 대해서, 영원한 진리에 대해서, 진보 발전에 대해서 신뢰를 받았던 그들의 사고가 깨어지게 되었고 인간이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불합리적인 존재란 것을 깨닫게 되면서 항상 인간 외부로만 향하던 데서 인간 자신의 내부로 돌아와 인간 실존의 연구가 다시 시작되었다. 그래서 실존주의에 대한 좋은 책들이 나오면서 “인간의 기본이 무엇인가? 인간의 본질은 지성이다. 지성은 실용적인 것이 아니고 진리 자체를 탐구하는 것이다”라고 했다. 지금이야 실용주의 시대여서 모든 것이 실용적으로 응용되는 것만 최고로 좋고 또 그런 지식을 좋아하지만 얼마전 까지만 해도 문과대학이나 공과대학 보다 물리대에서도 순수물리학이 훨씬 좋은 것으로 인기가 있었다. 그것은 실존주의 영향으로 순수한 지적인 할동으로 세계의 구조를 바로 탐구하고 인간의 본질을 탐구하는 것이기 때문이었다. 그러기 때문에 철학하는 사람들이 그 지적인 할동에로 일생을 바치기로 작정을 했던 것이다. 특히 아리스토텔레스가 그 대표적인 사람인데 그는 인간이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불합리한 존재란 것을 깨닫게 되었고 그렇다면 인간의 능력 또한 무한하지 못함을 알게 되었다. 그리고 이렇게 유한하고 불합리한 존재는 이 현상계를 넘엇 더 멀리 확대 적용하여 어디든지 지식으로 알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을 깨달은 것이다. 한 개인이 생을 마치고 죽을 때 무상함을 느끼는 정도를 넘어서 소위 인간의 이성으로 못할 것이 없다고 하는 그런 확신에서 인간은 불합리하고 유한하며 그 유한이 죽음을 만들어 내므로 실존주의에서는 남의 일처럼 여겼던 죽음을 자기 문제로 심각하게 받아들인 것이다. 예컨데 옆집에 김아무개가 죽을 때는 별로 심각하지 않으나 중병에 걸려서 정말 죽음이 자기 문제로 다가올 때 얼마나 불안하고 초조하고 절망적이고 좌절이 넘치고 공포에 쌓여서 떨게 되는가? 그러니까 인간이 그토록 이성적이고 합리적인 존재가 아니라 불안하고 죽음 앞에서는 죄의식이 있고 불합리한 존재임을 깨닫는 것이다. 20세기의 시작 그래서 1914년이 20세기을 시작하기 위한 사건이다. 그러나 신학적으로는 1918년에서 1919년에 20세기가 시작했다고 할 것이다. 그것은 Karl Barth가 바로 그 전쟁 기간에 그 로마서 강해를 썼던 것이다. Karl Barth는 회상하기를 그렇게 기독교 본질을 강의하면서 사랑의 종교를 외치던 자기의 선생 Adolf von Harnack으로 부터 시작하여 89명 신학자들이 제 1차 세계대전 수행에 가표를 던져 찬동을 했고 서명을 했던 것을 생각하면서, 죄의 심각성을 그토록 강조하던 종교개혁자 칼빈의 글로 다시 되돌아간 것이다. 칼빈이 인간의 전적 부패와 무능을 말하면서 인간이 할 수 없음을 탄식하며 절규하는데, 이것은 인간 본성에 대해서 깊고 예리한 통찰을 한 것이다. 계속해서 칼빈이 말하기를 우리의 타락한 본성은 죄를 필연적으로 짓는다고 했다. 이 말은 우리가 죄를 짓고 싶으면 짓고 안짓고 싶으면 안짓는게 아니며 또 강제로 밀어서 짓게한다는 말이 아니라 타락한 본성이 죄를 필연적으로 짓도록 만든다는 것이다. 실제적으로 생각해 보아도 우리가 죄를 지으면 죄과에 대한 용서를 받은 것으로 끝나지 않고 또 하나의 메커니즘을 형성해서 제 2의 천성으로 역사하여 더 죄를 잘 짓도록 역사하여 끊을 수 없도록 한다. 우리의 경험을 보더라도 내 힘으로 안 하려고 하면 긴장과 함께 더욱 심하게 강박하여 영의 법으로 혹은 복음의 권세가 아니면 도저히 끊을 수 없도록 세력 행사를 하여 죄를 짓게 한다. Karl Barth는 이렇게 인간의 죄과를 말하는 종교개혁의 글들과 소위 키에르케골의 변증법, 즉 실존주의 사상에로 되돌아 간다. 그러므로 20세기 실존주의는 Karl Barth에게서 시작했다고 할 수 있다. 물론 하이덱거가 20세기 최대의 형이상학자로 인정을 받지만 Karl Barth 이후에 “존재와 시간”이란 책을 썼던 것이다. 그러니 Karl Barth 이전까지 종교는 저 하나님에 대해서 연구한 것이 아니고 인간이 왜 종교적인가를 연구하여 특히 인간의 종교의식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해명하는 것을 신학의 사명으로 여겼다. 루이스 벌콥 교수는 그의 조직신학 서론에서 “인간은 치료 불가능하니 종교적이다”라고 했고 키스트 막커(Simon J. Kistemaker)도 “인간은 특정한 종교를 가지고 있지 않아도 다 종교적이라”고 했는데 이 때 철학도 마찬가지 인간이 갖는 이 종교의식을 정교하게 학적으로 분석하고 해명한 것을 철학자의 영역으로 생각했다. 그러니까 슐라이허막허(Friedrich Ernst Daniel Schlieiermacher) 이후의 이후의 내재신학은 하나님의 말씀을 연구하여 하나님께로 되돌아간 것이 아니라 인간과 인간의 종교 감정을 대상으로 연구하여 인간으로 끝이 난다. 물론 Karl Barth가 완전히 개혁신학으로 돌아왔다고는 할 수 없으나 최소한 이제까지의 신학적 흐름과 판도를 안전히 바꾸는데 유명한 공헌을 한 것이다. 그래서 신학의 문제가 무엇인가를 다시 묻고 이제까지 완전히 내적인 종교체험과 종교의식만 계산하던데서 문제를 다시 제시하여 소위 전통적인 종교개혁이 출발한 하나님 말씀에로 되돌아가는 일이 시작되었는데 그런 면에서 Karl Barth가 로마서 강해를 냈던 1919년이 신학적으로 큰 의미를 갖는다고 할 것이다. 19세기 내재신학 우리는 20세기를 좀더 이해하기 위해서 19세기를 이해해야 되겠다. 19세기가 중요한 것은 이때 부터 전폭적으로 내재신학이라는 것이 시작되기 때문이다. 이렇게 된 것은 칸트의 공헌이 결정적으로 크다 하겠다. 언제든지 그랬지만 이성을 중심으로 하는 서양의 사고방식에서는 이성의 능력과 그 범위가 무한대까지 미칠 수 있을 것으로 생각했다. 그런데 칸트는 순수한 이성 자체만을 연구하여 그 이성의 능력가 권리가 어떠한지를 밝히기 시작했다. 칸트 칸트 이전에는 소위 합리론이다 해서 인간의 이성으로 논리적인 사고의 전기, 즉 개념에 의해서 모든 체계를 설명할 수 있고 체계를 구성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니까 밖에 있는 경험도 중요하지만 합리론에서는 밖에 있는 대상경험을 그렇게 중요하게 생각하지 않는다. 더 중요한 것은 개념이고 이성으로 모든 사물의 체계를 구성하고 그 본성을 다 설명할 수 있다고 했다. 그러면 밖에 있는 경험이라든지 현상세계는 어떤 것이냐? 그 자체로 중요한 것이 아니라 사실은 이미 이성이 해놓은 것을 증명해 주는 보완조치 밖에 안되었다. 그러니까 합리론에서는 이성 자체에서 모든 사상 체계와 세계의 구조와 본성이 다 흘러 나온다. 그러니 이들은 인간 이성으로 못할 것이 없다고 믿었다. 그런데 칸트는 이성 자체를 연구 했으면서도 오히려 이성의 능력과 그 활용 범위에 관해서 축소하는 일을 했다. 이제까지는 이성이 영원의 세계, 무한의 세계까지 학장하고 침투하지 못할 부분이 없었지만 칸트에게서는 그 범위를 현세계의 영역으로 좁히고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온 경험의 내용이 더 중요했던 것이다. 보편한 것이 아니라 구체적인 것, 그리고 영원한 것이 아니라 시간적인 것, 그리고 이성이 진리가 아니라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온 사물의 이해가 중요했고 그것이 진리의 표준이고 진리를 결정하는 기준으로 삼았다. 영원한 진리 같은 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개별적인 사물의 경험, 구체적인 내용의 이해가 결정적이고 중요하다. 보편 타당한 진리가 아니라 시간과 공간대에서 구체적으로 경험된 사실이 진리를 결정학 종교의 진리까지고 경험으로 결정하도록 한 것이다. 데이빗 흄 그것은 영국의 데이빗 흄의 영향이 칸트에게 작용했던 것이다. 이제까지 다 합리론을 생각했고 칸트도 합리론을 믿고 있었으나 흄의 영향을 받고 부터는 이성으로 마음대로 공상해서 체계를 이루어 놓는 그것이 중요한 것이 아니라 경험의 근본은 감각인데 우리의 구체적인 감각기관을 통해서 구체적인 외계의 상을 받아들이는 것을 중요하게 생각했다. 그러면 칸트에게 있어서 도대체 경험이 어떻게 성립하느냐 하는 것이 중요했다. 또 경험에 의존하면서 어떻게 학문이 학문으로써 성립할 수 있느냐 하는 문제였다. 지금 데이비드 흄은 18세기 사람으로, 지식은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온 그런 인상이 연상작용, 즉 습관에 의해서 이루어진 경험의 결합으로 생각했다. 그렇다면 그것은 완전한 경험, 많은 사람이 다같이 공통적으로 경험할 수 있는 보편타당한 경험을 만들어 낼 수가 없는 것이다. 지금이야 다 파편적인 지식개념 이지만 그러나 학문이 성립하려면 눅수든지 다 공통으로 이해되어지는 보편타당성이 있는 지식이라야 한다. 그래서 칸트는 어떻게 순수학이 성립할 수 있느냐를 생각했다. 그럴려면 근본지식의 재료는 단지 이런 외부의 감각기관을 통해서 들어온 그런 인상들 혹은 표상들을 그냥 무질서하게 습간으로 연결하다 보니까 시간과 공간이라는 개념, 인과율의 법칙이 그냥 성립한 것이 아니라 이런 감각경험에다 이성이 법칙과 질서를 넣어 주므로 가능했던 것이다. 그러니까 감각경험에다 이성이 법과 질서를 넣어 주므로 이 둘이 합치하여서 지식이 성립한다. 그러니 칸트에게 있어서 지식은 단지 경험으로, 경험에서 부터 시작한 것이 아니고 경험과 함께 시작한다. 그러기 때문에 이 현상내의 경험이 이성 때문에 질서있게 우리 안에 들어 온다. 이전의 합리론에서 처럼 인간이서의 영역은 공간적으로 무한대로 시간적으로 영원한 세계까지 확장될 수 있는 것이 아니며 또 이성이 스스로 경험까지 만들어내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러나 칸트는 지식은 이성 자체로 공급한 것과 감각기관을 받아들인 표상 혹은 감각기관에서 들어온 재료 그런 것을 합쳐서 이루어지므로 인간 이성이 알 수 있는 영역은 무한한 것이 아니라 감각기관이 경험될 수 있는 세계로 축소시켰는데 그것이 바로 현상세계 혹은 현상계라 한다. 우리는 믿음의 사람들이니까 이런 말이 실감이 날 것이다. 영일만에 석유가 난다고 믿고 믿음으로 투자를 했다. 믿음은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지 못하는 것들의 증거라 했으니 이제 석유가 나오는 줄 알고 정말 좋아했다. 그러니까 믿음으로 했으니 석유가 나와야 할텐데 왠일인지 석유는 나오지 않아서 낭패가 컸다. 그러나 자연과학에서 확실하게 안다고 하는 것은 검증해서 증명이 있어야 되는 것이지 믿음으로 한다고 되는게 아니다. 그러니까 “學”이 체계를 구성해서 학문이 될려면 꼭 뺄 수 없는 중요한 첫째 요건은 주장하는 이론에 대한 확실한 증거, 증명, 즉 신임장이 제시되어야 한다. 어떤 이론이나 가설을 낼 때에 필요 불가결한 것이 증거자료인 것이다. 신학도 마찬가지 학문이기 때문에 누구의 경험적 자료든지 아니면 성경의 증거를 제시하든지 둘 중 하나를 제시해야 한다. 그러나 인간의경험적인 증거를 대면 자유주의가 되고 신비주의가 되어 버린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증거자료로 삼는다. 그러므로 신학도 그냥 되는게 아니라 성경과 교리사적인 증거, 또는 교부들의 증거를 인용해서 한다. 칼빈이 기독교강요를 쓸 때에도 쓸데없이 성경을 인용하고 교부들을 인용하는 것이 아니라 학문에는 반드시 증거물, 증명할 재료, 즉 신임장을 제시해야만 學이 되기 때문이다. 그러니까 영일만에 석유가 있다고 알 수 있는 것은 실제로 탐사를 해서 매장량이 얼마만큼 있는지를 확인해서 증거물을 뽑아 올렸을 때 이런 과학적인 조사를 미리 해서 석유가 얼마만큼 있다는 것을 알고 투자를 하는 것이다. 이성은 마찬가지로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할 때에는 분명히 우리의 감각기관으로 접촉할 수 있는 것 만을 안다고 한다. 그래서 칸트는 감각기관이 접촉하여 경험이 가능한 영역까지만 이성이 알 수 있는 영역이며 그것이 현상계라 한다. 그것이 곧 경험세계, 즉 시간과 공간이 있는 세계, 즉 그것은 물질의 세계 뿐이다. 그래서 자연과학에서는 2천년동안 이런 천태만상의 물질의 기본단위가 무엇인가를 찾아 보았다. 그러나 결국은 찾지를 못하고 있는 실정이다. 이미 말했듯이 원자를 물질의 최종적인 기본단위로 생각했지만 이제는 전자와 핵이 있고 핵 속에는 양자, 중성자, 중간자들이 수없이 많은데 결국 물질인 입자로 남는데 아니라 파동과 결로 남는데 파동은 물질이 아니다. 아인슈타인은 물질을 에너지와 등치 시켰는데, 물질을 빛의 속도로 가르면 완전히 에너지로 변화된다고 한다. 그러니까 잡히는 것은 없고 신기루가 되어 물질에 현상계의 설명마저도 없는 것이다. 지금 과학이 상당히 발달했으나 다 허무맹랑한 가설의 영역을 넘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두뇌사고에 의해 활동할 뿐 영이 보이지 않아 증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라 한다. 그것은 감각기관의 경험이 가능한 물질의 세계, 시간과 공간이 있는 세계, 인과율이 적용되는 세계, 에컨데 불을 때면 연기가 나고 난로가 따뜻하고, 햇빛이 비치기 때문에 창가에 서면 따뜻하고, 오래 공부하고 수면이 부족한 원인 때문에 피곤한 결과가 있고 해서, 항상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으면 원인을 추적할 수 있는 세계에 살기 때문에 우리의 이성이 사물을 알 수 있을 뿐, 영이나 내세는 경험 불가능하기 때문에 알 수 없는 것으로 배척해 버린다. 그러면 어떻게 내세를 말하고 영혼을 증명할 것인가? 성경으로 증명 한다는데 성경은 어디서 왔는가? 성경이 하나님께로 부터 온 계시라는 사실을 확실히 증명할 길이 있는가? 종교사학적으로 그 출처를 파 헤쳐봐도 그런 증거가 없는데 영감되었다는 것은 어떻게 믿을 수 있는가? 이런 질문들이 신학계에 일기 시작했다. 불투만 같은 사람은 궁켈의 제자로서 양식사학파를 완성한 사람인데, 이런 사고 때문에 그의 복음사라고 하는 것이 순수한 계시의 전개가 아니라 초대교회가 예수에 대한 신앙을 고백한 것이 복음서로 나타났을 뿐, 복음서의 내용은 역사적 사실에 기초한 예수 그리스도의 산물이 아니라 초대교회의 산물이라고 하므로 더이상 하나님 말씀으로 믿을 수 없게 되어 버렸다. 슐라이허막허 그래서 칸트 이후 슐라이어막허에 의하면 종교는 증명이 불가능하므로 지식의 일로가 아니라 물질의 세계를 만지면 알 수 있는 느낌, 바로 그 느낌이고 神의 세계는 그 느낌으로 온다는 것이다. 그러니 종교를 지식의 영역에서 분리하여 감정의 일로 만들어 버린 것이다. 예를 들어 백묵을 안다고 할 때, 백묵인지 아닌지는 눈으로 보고 손으로 만져보고 안다. 그렇지만 만질 수 없고 볼 수 없는 것은 어떻게 아는가? 그것은 느낌으로 안다고 말한다. 그러니까 슐라이어막허는 종교란, 절대의존의 감정이라고 정의한다. 슐라이어막허의 아버지가 개혁교회 목사여서 그 영향을 받았던지, 그가 개혁교회 냄새를 풍겨 절대의존이란 말을 쓰는데 그냥 비판없이 그 말이 맞는 것으로 받아들이면 안된다. 만일에 그대로 믿는다면 인격적인 절대자가 있는 것이 아니라 절대의존의 감정, 즉 느낌이 하나님이 되는 귀결에 이르고 만다. 흔히 우리는 믿음의 세계만 이야기하면 되는데, 그 선을 넘어서 다른 학문과 연결을 시키면 말문이 막히는데 변증학 공부를 다시 더 해야할 필요가 많이 있다. 이렇게 슐라이어막허가 종교를 감정의 일로 정의하는 배후에는 칸트의 순수이성비판이 서 있다. 그래서 슐라이어막허를 칸트 이후의 신학자라고 한다. 또 칸트에게는 흄이 서 있다. “자연종교에 관한 대화”라는 말을 했는데 예를 들면 집을 짓다가 그만둔 것을 보면 거기에 시공자가 있었던 것을 알 수 있다한다. 왜냐하면 우리가 다른 집을 지을 때 시공자가 짓는 것을 여러번 반복적으로 보아왔기 때문이다. 그래서 완공되지 않은 집을 볼 때도 배후에 시공자가 있음을 알 수 있다고 한다. 그러나 그것을 확대해 보면 이와 같은 큰 세계는 하나 뿐이어서 여러 집을 건축한 것을 경험하듯 그런 식으로 여러 세계가 건축된 것을 아무도 경험한 일은 없다. 그렇다면 세계는 하나 뿐인데 이 한번의 경험을 가지고 이와 같은 세계의 건축자가 있다는 것을 증명해낼 길이 없다는 것이다. 이것이 흄의 이야기인데 그러니까 세계에 대해서나 하나님에 관한 것은 알 길이 없고 감각기관으로 증명되거나 포착되지 않기 때문에 지식의 대상에서 제외시켜 버린다. 칸트는 그런 감각할 수 없는 세계, 드러나지 않은 세계를 예지계라 하고 드러난 세계를 현상계라 한다. 이 현상계는 볼 수 있는 세계인 것이다. 이런 도식을 전제하는 자연과학에서도 안다는 것은 우리가 달에 대해서 확실한 것은 몰라도 검증이 가능하고 그래서 달에까지 가서 보고 알듯이 검증이 가능해야만 한다. 그런데 그 검증이 가능한 영역은 감각기관으로 접촉이 가능한 현상세계 뿐이다. 그러나 영혼의 존재가 있느냐를 따지는 것이 para psychology 혹은 이상심리학인데 여기서는 투시나 원시 같은 서로 감정을 통하는 것을 따지는 學인데 이런 것들은 감각기관으로 포착할 수 없는 것들이 아닌가? 그러나 para psychology에서는 분명히 여기 앉아서 볼 수 있는 거리는 한정되어 있는데 그 밖에서 이루어지는 일을 보며, 내가 한번도 본적이나 이야기해 본 일이나 그 사람의 글을 읽어본 일이 없는데 저쪽 사람의 생각과 통한다. 그런데 아이러니칼 하게도 소위 물질로 표현된 것만을 제일로 하는 공산세계의 대학에서 이 이상심리가 제일 많이 연구되고 있다니 괴이한 일이다. 이들까지도 그 이론이 공리공론이 안되기 위해서 자기 생각을 혹은 추측을 사실로 하여 그 생각을 증거로 한다. 나를 따르면 정통이 되고 따르지 않으면 이단시 해 버리는 이런 부류의 사고방식은 학문의 세계에서는 설 자리가 없다. 분명히 자기의 말을 할 때는 거기에 상응한 증거물을 제시해야만 그 말의 타당성이 성립한다. 그러나 이들처럼 감각기관의 영역만으로 지식의 영역을 한정한다면 그것에서 벗어나는 일은 알 길이 없게 된다. 그러니 하나님에 대해서, 신에 대해서 혹 영혼이나 내세에 대해서는 어떻게 알 수가 없게 되어버리는 귀결에 이른다. 우리는 하나님의 형상으로 창조 되었으니 자기 마음속에 하나님이 깨달아져서 안다고 믿는다. 결국 기독교의 진리를 가지고 기독교를 판단하는 일 밖에 없는 것이다. 이것은 주관적인 이야기와는 다른데, 성령께서 오셔서 우리를 하나님의 진리를 받게 하시고 혹은 믿게 하셔서 하나님을 믿고 아는 사람으로 변화 시키므로 아는 것이다. 종교에서 제일 기본이 되는 존재가 영혼의 존재 또는 내세 그리고 하나님의 존재인데, 저들의 도식에 의하면 우리는 전혀 그런 것을 알 수 없고 모른다는 결론이다. 영혼을 본 사람이 있는가? 어떤 시골 할머니 한분이 혼 나가는 불을 보았다는데 왜 다른 사람은 보지 못하는가? 또 목사님 같은 신령한 세계를 믿고 전파하는 사람은 왜 보지 못하는가? 어느것이 진짜 바른 경험인가? 그런 것은 보편타당성이 없으므로 받을 수 없다고 거절한다. 하나님은 물체를 알듯이 알 수 있는 분이 아닌데, “그렇다면 어떻게 하나님을 아는가?”라고 반문하면서 여러분이 하나님을 사실적으로 아는데 아니라 신학체계에서 얻은 지식을 가지고 있을 뿐이라고 힐난한다. 어느 정도는 개연성이 있는 이야기일 수 있다. 사실은 우리가 그런 경우가 허다하다. 여기서 우리의 바른 신학인 개혁신학과 신앙을 정립할 필요를 더욱 느끼면서 반성을 촉구한다. 또 하나님이 아브라함을 부르듯 그렇게 부름을 받았는가? 혹시 그렇게 음성이 들렸다 해도 목소리가 내 속에서 오는 소리인지 하나님에게서 들려오는 소리인지 어떻게 구별하며, 또 검증할 수 있겠는가? 증거를 요구할 때 제시할 수 있겠는가? 여의도에 63층 빌딩이 있다고 했을 때는 가서 확인하여 검증이 가능하고 미국에 100층이 넘는 빌딩이 있다면 한국에서 그와 비슷한 계속적인 같은 경험을 하니까 내가 실제로 안봐도 수납할 수 있지 않은가? 또 그것이 어느 때 검증이 가능하기 때문에 받아들일 수 있다. 그렇지만 성경은 하나님이 말씀하셨다고 어떻게 수납하고 받아들일 수 있느냐? 그것이 하나님이 말씀하신 줄 안다면 무슨 근거로 알 수 있느냐는 것이다. 그래서 흄의 도식을 받은 칸트는 神은 현상계에 속하지 않고 예지계에 속한다고 인간의 감각영역 밖으로 내어쫓고 지식영역을 현상계로 국한하면서 만약에 하나님이 인간의 감각기관으로 접촉이 가능하고 눈으로 보고 검증이 가능하다면 그것은 벌써 하나님이 아니라고 하며, 하나님이기를 그친다고 한다. 왜냐하면 그것은 벌써 현상계에 포함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만약 경험 되었다면 그것은 내 감정이고 그런 감정은 내 속에 일어난 내재적인 사건일 뿐이다. 그 이유는 그것이 우리 영역 밖에서 왔다는 증거가 없기 때문이라고 한다. 그러니 內世界的인 주관적인 이야기로는 하나님을 알 길이 없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실명한 사람이라 할지라도 점자를 이용해서 적고 보지는 못하지만 손으로 만지고 느껴서 감각하여 시간과 거리, 그리고 길을 알고 지식을 포착한다. 그러나 하나님은 현상계 밖의 예지계에 속하기 때문에 우리는 믿음으로 본다. 그러나 칸트는 믿음으로 보지 않고 우리가 알 수 있는 세계는 감각세계, 현상계 뿐이고 신은 예지계에 속하여 우리의 경험이나 과학에 의해서 검증될 수 있는 존재가 아니므로 우리가 전통적으로 하나님은 존재하고 이와 같은 성품을 가지신 무한한 영적 인격적 하나님으로 알 수 없으니 하나님에 관해서는 말할 수 없다고 제껴둔다. 그래도 신학은 하나님에 관하여 연구하는 학문이니까 하나님을 말해야 할텐데, 알 수 없으니 말할 수 없다 하여 지식의 대상에서 제외시켜 버리는 것이 칸트가 그의 실천이성비판에서 내린 결론이다. 이 결론에 근거하여 슐라이어막허는 그래도 기독교라는 것이 존재하기 때문에 종교를 감정의 일로 말하여 버리므로, 엄격하게 말하면 슐라이어막허는 칸트의 이론에서 신학을 시작한 것도 아니고 그렇다고 저기 초월해 계시는 천지를 창조하신 하나님에게서 시작한 것도 아니다. 그래서 그는 종교를 감정 느낌의 일로 보아 내재신학을 시작한다. 우리 중에도 이와 비슷한 성향을 보는데, 우리는 하나님을 어디에서 만나는가? 어떤 느낌에서 만나는가? 중생의 체험이라고 한다. 예수 믿고 정말 기쁨과 즐거움이 있고 평안한 마음이 생기면 하나님이 와 계시는 것 같이 느끼지 않는가? 그러니까 슐라이어막허의 질문은 그것은 감정의 일이니까 안다고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보자, 미국 그랜드캐년에 가면 정말 아름다운 그 경치가 장관이다. 그런데 남편이 그 낭떠러지를 보다가 심장마비로 죽어버렸다 하자. 그때 그 여자에게서 감탄이 나오겠는가? 남편이 죽은 그 여인의 감정은 결코 그랜드캐년의 그 경치가 좋을리 없다. 그 여자에게는 결코 좋을리 없다. 이와 같이 모든 것은 객관적 사실에 근거한 것이 아니라 여인의 감정이 모든 것을 결정해 버린다. 여인의 감정이 아름답다 하면 아름답고 아름답지 못하다 하면 그것은 아름답지 못한 것이 되어 버린다. 많은 경우 우리의 경우가 이와 같을 때가 많다. 결국 우리도 내재주의에서 크게 벗어났다고 말하기 어렵게 되어 버렸다. 슐라이어막허가 내재신학을 인간의 감정에서 출발한 것은 그가 진센돌프에게서 나온 경건주의 운동에 가담하여 모라비안파와 접촉을 했고 소위 느낌을 강조하는 낭만주의 시인들, 문인들, 그리고 철학자들과 많이 어울렸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는 종교는 느낌, 즉 감정의 일이고 주관적인 체험의 일인 것이다. 루터교의 경우도 루터의 중생체험에서 출발하므로 루터교도 중생체험을 많이 강조한다. 우리는 중생의 체험이 있는가? 아니면 교회를 다니다 보니 기도도 많이 연습하고 성경도 많이 읽어서 교회의 규칙생활에 자연히 훈련되어 젖어들어서 신학교도 오게 되지 않았는가? 그래서 그 느낌, 감정으로 그것을 경험한다. 하나님이 내게 와 계신 것 같이 느껴지면, 유대인이 온 세계가 자기들을 위해서 이스라엘을 위해서 더 나아가면 율법 지지자들을 위해서 만들어졌다고 믿듯이, 하나님이 나를 위해 이렇게 역사하시고 나를 사랑하시니까 세계가 다 나를 위해 있는 것 같아 보인다. 철저히 나를 위한 하나님으로 느낀다. 그렇게 느끼지 않으면 성경이 뭐라고 해도 믿으려 들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는 중생체험에서 내 경험 속에서 하나님을 만나려 한다. 그래서 중생을 많이 강조한다. 우리가 중생체험을 가지면 하나님의 신이 나를 구원하시기 위해서 사람이 되어 오시고 십자가에 못박혀 죽으시고 성령님이 내게 오시사 나를 새사람 만드시고 이 기쁨과 이 평안의 충만한 감정을 내게 허락하셨다고 좋아한다. 그러니 우리가 중생체험에서 하나님 만나기를 추구하면 종교감정 혹은 체험에서 하나님을 만난다는 내재신학으로 들어가는 문턱에 선 것이다. 그러니까 현대신학에서는 초월해 계시는, 객관적으로 계시는 하나님으로 부터 신학을 출발할 수가 없다. 그래서 그들은 자기의 내재신학을 정당화 하기 위해서 중생의 체험에서 접촉점을 찾아 기독교로 들어 온다. 우리가 하나님을 만나는 출발점, 즉 출처의 계시가 중생체험이 아닌가? 하나님이 나를 성령으로 변화시키지 않는가? 더 구체적으로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그리스도께서 영으로 오셔서 나를 변화시키고, 나를 새사람 만들고, 나로 하여금 기쁨이 있게 하고, 평안이 넘치게 하고, 그리고 모든 세계가 나를 위해 움직이고, 하나님이 나를 위해 죽으시고, 나를 위해 자녀로 삼으셨으니, 이런 은혜와 감사가 또 어디 있겠는가?”라고 반문한다. 그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문제는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을 만나는 장소가 지식의 영역이 아니라 중생의 체험의 자리, 즉 감정의 자리, 느낌의 자리가 아니냐고 악수를 청하면서 교묘히 들어온다. 이것은 개혁신학이 아니고는 막아낼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므로 현대 기독교가 분별 없이 내재신학을 두 팔을 벌리고 받아들이고 있다. 그래서 18세기에 들어와서는 객관적으로 계신 하나님에게서 시작하던 전통적인 신학의 전제를 버리고 인간의 감정에서, 인간의 종교성에서 신학을 출발하여 종교체험을 강조하면서 그 일환으로 중생체험을 강조하기 시작하였다. 하나님을 어디서 만나는가? 어쩌다 영을 본 사람이 있어서 좋지만, 어떤 사람은 보고 어떤 사람은 보지 못한다. 또 그 경험의 그본이 다 다르다. 그래서 어느 경험이 진짜 표준되는 경험인지 다 달라서 표준을 정할 수 없다. 그것이 종교적인 경험의 문제점이다. 그러니 종교적인 경험을 표준으로 삼을 수는 없는 일이다. 우리의 신앙을 다시 검토해 보고 생각해 보자. 어디서 예수를 만나는가? 우리의 대답은 중생의 체험에서 종교적인 경험에서 만난다는 것이 한결같은 대답일 것이다. 산에 올라가서 만나는 것도 아니고, 비행기를 타야 만나는 것도 아니고, 아니면 제임스 오웰처럼 인공위성을 타고 달나라 갈 때 실제로 만나는 것도 아니다. 많은 경우 우리는 하나님의 임재를 강하게 느꼈다고 한다. 그것은 하나님을 느낀 것이지 본 것은 아니다. 그래서 우리도 하나님을 지식의 대상으로 알 수 있는데서 시작할 수 없다는 현대신학에 동의하여 종교적 감정에서 중생의 체험을 통해서 하나님을 만나려 하고 구체적 체험을 중요시 한다. 그러니 사변적인 데서 경험적이 된 것이다. 우리 한국도 이처럼 기도원과 성령체험의 부흥회가 난무하고 오순절 운동이 적극적으로 지지받는 이유가 바로 여기 있다고 할 것이다. 그렇다고 개혁신학과 신앙은 감정을 부인하고 목석이 된다는 의미는 결코 아니다. 오히려 성령으로 중생하면 영의 사람의 감정으로 순화되어 성령님의 인도를 따라 사랑과 희락과 화평을 이룬다. 특히 오순절 운동에 가담한 사람들은 체험해 보았느냐면서 아무리 그것이 영원한 보편의 진리라도 개인 경험으로 짓밟아 버린다. 아예 진리를 분별할 분별력이 없는 것이다. 그러면 그들의 신학의 임무는 무엇인가? 그것은 종교적인 감정을 정확하게 분석하고 기술하는 것이라고 한다. 그러므로 그들의 모든 신학의 출발점을 하나님에게서 세계 안으로 가져오고, 특히 인간의 경험 안으로 혹은 느낌으로 끌고 와서 이제는 출발점이 인간의 감정이고 최종 참조점도 내 종교적 체험이 되므로 인간에서 출발하여 인간에게 되돌아 간다. 이것이 그의 내재신학이다. 이 내재신학에서는 “우리는 절대자가 있다는 것을 알 수 없다”고 한다. 그러니 이들이 말한 종교는 절대자가 있는 것처럼 그냥 매어 달린다. 절대자가 있어서 거기에 내가 종속되기를 원할 뿐이다. 절대자는 알 길이 없으므로 있는 것처럼 자신을 내어 맡기는 절대의존의 감정이 종교라 한다. 그러므로 근세신학은 Schleiermacher의 내재신학 이다. 그래서 Schleiermacher를 내재신학의 아버지, 혹은 근세신학의 아버지라고 하여 19세기에 제일 중요한 신학자로 높인다. 그것은 전통적인 신학을 완전히 180도 회전시켰기 때문이다. 그가 쓰는 용어가 19세기 이후 신학 용어와 같기 때문에 근본진리가 같은 것으로 오해해서는 안될 것이다. 그가 전통적인 용어를 사용해도 그 내용은 하늘과 땅의 차이이다. 그러니까 전통적으로는 객관적으로 창조주로써 절대적 존재로 계신 하나님과 그의 말씀과 계시에서 모든 것을 끌어내므로 전통적인 신학을 완전히 새롭게 재구성한 것이다. 소위 “글라벤스레벨”, “복음주의 신학론”이란 책은 완전히 종교적인 체험으로 종교의식에서 그의 모든 신학을 재구성하는 대표적인 책이다. 내재신학에서는 예수 그리스도가 우리의 구주락 할 때 그 의미는 전통적인 견해와 전혀 다르다. 이미 말했듯이 예지계에 속하는 초월해 계시는 하나님은 알 수 없으므로 우리의 지식의 대상이 못되고 또 형상계에 속하면 그는 神일 수가 없다. 그러니 예수 그리스도를 존재론적인 면에서 초자연적으로 삼위일체로 선재해 계신 하나님의 아들, 즉 삼위일체 제 2위격으로서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말하지 않고 다만 우리는 신에 대한 생각이 약하고 또 변하며 때때로 바꾸지만 예수에게는 神意識, 즉 종교적인 체험, 또 그 의식의 도가 무한하다는 그런 면에서 그가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한다. 그가 우리의 구주라고 할 대도 그가 선재해 계신 하나님의 아들로써 도성인신 하시어 십자가에 우리를 위하여 대신 죽으심으로 우리를 구원해 주시는 큰 역사를 하신 그리스도이시기 때문에 구세주라기 보다는 그가 갖는 그 무한한 신의식이 그를 믿을 때 우리에게 전달해 온다는 의미로써 구주라고 말한다. 이것이 그의 기독론이며 구원론에 있어서도 실제로 죄에서 구원받아 천국가는 구원은 없다. 물론 18세기가 슐라이어막허 같은 자가 나오도록 준비를 했지만 19세기 부터 이렇게 하늘과 땅의 차이를 내는 큰 전기를 갖는다. 그러므로 내재신학에서 “믿는다” 할 때 객관적 계시가 있고 계시자가 있기 때문에 믿는 믿음이 아니라 하나의 종교적인 의식을 믿음이라고 할 뿐이다. 그가 쓴 “종교에 대하여”(Uber die Religion)이란 책에서 그는 이렇게 말한다. “이 현상계, 즉 유한세계는 무엇인가? 무한자 혹은 절대자가 자기를 현시하는 방식 혹은 매개체이다.” 이것은 그가 스피노자의 영향을 받아서 나온 이야기인데 스피노자는 이 현상세계를 그 유일한 실체, 혹은 절대자를 나타내는 형태 혹은 양태라고 한다. 그러므로 이 현상세계에 우리와 전혀 다른 질적인 것이 나타난다. 그런데 그것은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것이 아니라 신비에 속한다. 그 신비가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는 없지만 구체적으로 나타날 때는 두려움으로 나타난다. 예컨데 거대한 산 아래 섰을 때 쏟아지는 폭포 그 장관을 볼 때 오히려 두려움과 공포를 느끼는데 이런 신비한 현상이 종교를 느끼게 하며 종교를 생산해 낸다고 한다. 그러니 Schleiermacher에게 감정은 배제할 수 없는 필수적인 요인이다. 또 그는 종교가 지식의 영역이며 과학이 되며 종교일 수 없으며 감정이기 때문에 배척할 수 없다고 말한다. Schleiermacher에게는 모든 종교현상은 종교의식일 뿐이며 모든 사건이 계시와 종교적인 현상이 이 세계 내의 사건일 뿐, 초자연적으로 외부에서 오는 것이 아니며 主語도 述語도 모두 다 인간일 뿐이다. 여기서 예수는 저 초자연의 세계에서 온 존재가 아니라 이 현상계에 속한 존재로써 다만 무한한 종교감정으로 신 의식을 가지고 그것을 분명히 해줄 뿐 아니라 또 다른 이에게 神意識을 갖게 하는 훌륭한 종교교사요, 탁월한 윤리교사일 뿐 아니라 완전한 인간 완성이요, 종교 천재라고 하면서도 그의 초자연성을 부인한다. 사실 Schleiermacher는 예수의 피를 믿는 사람이 아니다. 그는 포도주 대신 물을 마시며 성찬식을 한 사람으로 예수의 보혈의 공효를 믿는 사람이라고 할 수 없다. 이 내재신학자에게는 교회도 예수에게 무한히 있는 신의식을 부여받은 사람들이 모인 단체일 뿐 그렇게 중요한 것이 못된다. 이 때 실제로 중요한 것은 성경이 제시하는 가장 구체적인 예수의 인간성을 어떻게 귀결 지을 수 있는가 하는 것이었다. 그래서 역사적으로 가장 신뢰할 만한 정확한 예수상을 구현하는 일이 19세기의 중요한 신학의 과제였다. 그러나 19세기 말경 부터 20세기 초까지 진행되었던 역사적 예수 탐구는 학적으로 가장 잘못된 비기독교 사상으로 나갔던 것이다. 그런데 변증신학자 불투만이 나와서 역사적 예수 탐구를 무너뜨리므로 그 제자들에 의해서 새 역사적 예수 탐구가 시도 되었다. 이렇듯 역사적 에수 탐구의 덕으로 예수는 탁월한 윤리의 교사, 종교의 천재가 되고 모든 것은 인간으로 시작해서 인간으로 끝나는 데에로 더욱 나아가게 되었다. 그래서 헤겔 이후 포이에르바하(Ludwig Andreas Feuerbach)가 신학은 신학이 아니라 인간학이라 했고 또 사람이 신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신이 인간에 의해 창조 되었다고 했다. 헤겔의 종교철학을 구체적으로 예를 들면 자연풍경을 그린 그림은 사실을 그렸다고 할 수 있다. 그러나 상상화 혹은 추상화를 그렸을 경우는 대행물이 있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다만 화가의 머리 속에서 나온 것일 뿐이다. 하나님도 마찬가지 자기 안에 있는 생각 혹은 의식 밖에 있는 나무와 풀들과 같은 자연에 투영해 놓았다고 한다. 그러므로 저 그림을 보면 화가가 어떤 생각을 했는지 알듯이 저 밖의 사물들을 보면 하나님이 어떤 생각으로 저 사물들을 만드셨는지를 알 수 있다. 그러나 그 사물 자체는 자기 자신을 의식하지 못하지만 그것을 나무면 나무로 인식해 주는 것은 인간의 의식이다. 그러니 자연에서 인간 의식으로 되돌아 온다면 그것은 Idea로 혹은 사상으로 안다. 또한 거기서 그치는 것이 아니라 종교의 수준으로 오면 하나님을 경배하고 생각한다. 그것은 하나님이 자기를 경배하는 그 사람의 마음에 자기 자신을 많이 알리셨기 때문이다. 그렇다고 해도 그 종교의 수준은 아직 종교의 본질을 직접 직관하는 단계는 못된다. 왜냐하면 하나님을 많이 나타내기 위해서 여러 다른 상징들과 상징적인 언어를 많이 사용하시기 때문이다. 그래도 다른 미술이나 예술의 차원보다 하나님에 대한 것이 직접적으로 가장 많은 데가 종교이지만 신학도 상징적인 지식을 많이 써야 하니까 본질적인 지식 자체를 다루지 못한다. 철학은 하나님을 직접 대상 하면서도 상징적인 용어는 쓰지 않는다. 그러나 하나님을 그 본질 자체대로 의식하는 것이 어딘가? 철학자의 인지 즉 철학자의 마음의 의식이라는 것이다. 그러므로 하나님은 철학자의 마음의 의식에 자기를 가장 많이 알리셨기 때문에 철학자의 의식을 떠나서는 하나님의 자기계시가 존재하지 않는다고 헤겔은 말한다. 그러면 결국 하나님이 인간의 마음에 자신을 계시한 것이 되고 그 말을 바꾸면 결국 인간의 의식이 하나님을 만들어 내는데 귀착한다. 그러니까 헤겔 이후 포이에르바하가 사람이 하나님에 의해 창조된 것이 아니라 하나님이 인간에 의해 인간의 형상으로 창조된 것이라고 하면서 인간을 인간이 논하므로 신학은 결국 인간론, 혹은 인간학이라고 했다. “도대체 어떤 하나님이기에 신학하는 사람들이 그토록 문제가 많은가?”라고 질문하면서 최근에 폴 틸리히는 기독교가 너무 작아서 제한이 너무 많으므로 관용하지 못한다고 했다. 그러나 모든 것은 하나님 안에 있다(Panen theism). 그런데 결국 현대 기독교가 많은 제약을 만들어서 전능의 하나님을 너무 축소시켰다고 했다. 결국 기독교의 진리에서 벗어나 인간에게 필요한 하나님을 만든 것이다. 여기에 남는 것은 인간 뿐이다. 그런데 19세기 말엽 부터 20세기 초에 들어오면서 역사적인 예수에 대한 연구가 새로운 각도로 진행되었다. 그것은 예수의 선포에 종말론적 긴장이 너무 많다는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18세기에서 19세기 까지의 예수는 정말 친숙하고 훌륭한 종교의 교사요, 탁월한 윤리 교사이며 인간의 완성자로써 참으로 우리가 가까이 할 수 있는 친근한 존재였는데 이제 다시 예수의 선포와 행적을 살펴보면 우리와 친근해질 수 있는 사람이 아니라 우리가 접근하거나 하나가 될 수 없는 생소함이 있다. 그리고 우리와 같은 일상적인 종교나 증거를 필요로한 사람이 아니다. 그의 선포에는 우리가 이해 못할 생소한 종말론적 선포, 아주 급박한 하나님의 나라가 곧 도래한다는 긴박성이 그에게 있는 것을 발견했다. 예수의 선포는 우리가 마음대로 조정하거나 어거할 수 있는 그런 하나님을 결코 말하지 않고 심판으로 오시는 하나님, 하나님 나라를 가지고 오시는 그런 하나님인 것을 선포했다. 그러므로 그런 예수의 삶 속에서 발견한 것은 예수는 우리가 그렇게 쉽게 적용할 수 있는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래서 Johanes Weiss는 “Die Pkdigt Jesu”, 즉 “예수의 선포”라는 책에서 최초로 이상과 같은 내용으로 문제를 제기했다. 바로 그 뒤를 이은 사람이 Albet Schweitzer 이다. 슈바이쳐에 의하면 예수가 자기 일생에 하나님께서 자기 나라를 가지고 오시는 걸로 믿고 확신했다. 그래서 그는 때가 찼고 하나님 나라가 가까왔으니 회개하고 복음을 믿으라 하고 선포했다. 이미 하나님께서 예수 자기의 인격에서 자기를 심판하시고 자기의 나라를 세우실 것으로 믿고 기대했는데 그것이 실지로 이루어지지 않자 예수는 자기가 비극적인 죽음을 죽음으로 하나님 나라를 강제로 끌어 들이려 했다. 그런데 그 뜻이 이루어지지 않고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 종말론적 예수의 선포의 국면을 본 사람들은 대부분 하나님은 심판주로 오시는 분으로 말을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은 우리와 친숙한 그런 존재가 아니라는 것이다. 이와 때를 같이하여 Rudolf Otto가 “Des Heilige”, 즉 “거룩”이란 책에서 “종교라고 하는 것은 합리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그런 대상이 아니다. 그러므로 그것은 내 마음대로 내것으로 할 수가 없는 것이다. 또 그것은 억압하는 존재가 아니라 Mysterium, 즉 신비이다. 그래서 인간이 얻을 수 있는 것은 아니며 또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는 존재”라고 한다. 다만 신은 우리와 동질선상에 있는 존재가 아니어서 종교의 대상으로 나타날 때는 두렵고 떨리는 존재로 혹은 두렵고 떨림으로 나타난다. 모세의 경우도 호렙산에서 불이 나타날 때 두려워 했고 그래서 신을 벗었다. 그런 것은 무엇이라고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 없다 한다. 또 베드로도 예수를 처음 만났을 때 두렵고 떨면서 나를 떠나라고 했다. 그러니 그것은 인력으로 설명될 수 있는 그런 영역이 아니라고 한다. 그래서 Otto가 하나님을 전통적으로 친숙한 존재에서 우리와 동일선상에 들어올 수 없는 존재, 우리하고는 별개라고 하는 전적 타자라는 개념을 준비했다. 하나님은 우리를 구원하러 오시는 자 이고 또 심판자로 오실, 전적으로 우리와는 다른 존재란 것이다. 슈바이쳐는 이 타자의 관념, 즉 미래 종말에 심판하러 오신다는 것을 변증신학으로 순간, 현재 심판하시는 결단으로 바꿨을 뿐이다. 그러니 슈바이쳐를 비롯한 현대 신학자들의 종말도식은 미래적 종말 도식이 아니라 매 순간 순간 위에서 밑으로 내려오는 심판으로, 변증법적인 도식으로 바뀌었다. 지금 여기에서 우리에게 말씀하실 때마다 하나님의 말씀은 위에서 내려와 심판하는 개념으로 바뀐 것이다. 그러나 그는 우리와 동일선상에 놓인 것이 아니라 벗할 수 없는 전적인 타자로 오신다. 이렇게 헤겔의 영향으로 다윈의 진화론의 힘을 입어 무한한 진보의 가능성을 내다보고 기독교의 사랑의 정신으로 잘되어 나가는 것으로 철저히 믿고 있던 서구인들에게 제 1차 세계대전이 일어나서 자기들의 손으로 건설한 문명을 자기들의 손으로 파괴한 이것을 도저히 합리적으로 설명할 수가 없었다. 제 1차 세계대전은 이제까지 전쟁중 최악의 전쟁으로 가장 많이 사람을 내세우던 자들이 가장 많은 사람을 죽였던 것이다. 그래서 인간이 합리적인 존재라는데 큰 충격과 회의가 일어나면서 인간은 죽음 앞에서는 유한한 존재로 우리의 이성도 죽으면 끝나는 불합리한 존재인 것을 깨닫게 되었고 무엇이든지 가능하다고 믿언 이성으로 포착할 수 없고 설명할 수 없는 것이 있음을 알았다. 그런데 제 1차 세계대전이 진행중인 그 무렵 Karl Barth가 모든 신학공부를 마치고 처음으로 제네바의 옛날 칼빈의 교회에 와서 부목사로 일을 했다. 그리고는 스위스 Safenwil에 가서 목회를 했다. 그는 선생 Adolf von Harnack에게 배운데로 비평적 방법으로 종교사적으로 열심히 연구하여 설교를 했었다. 그런데 교인들이 자기 설교는 들으러 오지 않고 주말이면 다 산으로 가고 시골이라서 어린 아이들만 온다. 그래서 말씀을 들으러 와야할 하나님의 백성들이 자기의 설교를 외면한 것을 보고 결혼도 하지 않은 젊은 목사는 커텐을 열어놓고 그것을 바라보면서 고민을 했다. 그래도 지각을 가지고 꿈을 가지고 목회하러 왔는데 답답함과 괴로움이 참으로 많았던 것이다. 그때 그는 자기 선생에게 배운 자유주의 신학 가지고는 도저히 안되는 줄을 안 것이다. 그 때 마침 키에르케골의 저서들이 독일어로 번역되기 시작했고 키에르케골은 변증법적으로 전개하여 하나님은 우리와 전적으로 다른 존재로써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무한한 거리가 있다고 썼다. 스위스에는 두 종류의 종교개혁 교회가 있다. 그것은 칼빈의 노선과 다른 노선인데 Karl Barth는 종교개혁자의 교회로 되돌아가서 무명의 인사로서 그는 로마서 강해를 쓰기 시작했고 그 첫판이 1918-19년에 나왔다. 그는 그 책에서 역사 비평적인 방법으로 서양문화가 갖는 그 선에서 연속되는 그 신학작업을 강렬하게 비판하고 인간과 하나님이 같은 선에 서 있다는 자료를 깨부수기 시작했다. 그때는 전쟁 중이기 때문에 위기의식이 가장 높아져 있었고 또 전쟁이 끝날 무렵의 그 위기의식이 Karl Barth의 변증신학을 탄생시킨 것이다. Karl Barth의 책이 출판되자 지금까지 내재신학으로 그처럼 평화롭던 곳에 그것이 폭탄으로 작용하기를 시작했고 신학계가 온통 깜짝 놀란 것이다. 사실 Karl Barth 자신도 그렇게 큰 반항이 일어날 줄 상상도 못했지만 전통적으로 놀던 신학자들의 신학의 주제를 빼앗아 간 것이었다. 그는 말씀하시는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는 전통적인 개신교 신학의 주제를 다시 찾아주면서 새방향을 선정해 주었던 것이다. 이것이 서구 19세기에서 20세기 사회로 넘어오는 큰 전환점이다. 하나님이 말씀하셔도 인간의 이성을 통해서 내적으로 말씀해서 오신 그런 하나님이 아니라 위로 부터 말씀해 오시는데 오실 때 마다 그냥 심판주로 심판하시기 위하여 위기에 나타나신다는 것이다. 이것이 그렇게 큰 반항을 일으킬 줄 몰랐기에 그 변화를 어린아이가 밤중에 종탑에 올라가서 떨어지려고 해서 붙잡은 것이 종 줄이었다. 그래서 매달렸더니 종이 사방에 울려 사람들이 다 잠에서 깨어 버렸다. 종을 칠려고 했거나 사람을 깨울려고 하지 않았지만 깨우게 되었다는 비유를 들어서 그때는 설명한다. 이때 그의 선생 Adolf von Harnack이 제일 먼저 Karl Barth의 신학적인 전개를 반대하였고 그가 제일 많이 논쟁을 벌인 것은 그의 선생 Adolf von Harnack 이었다. Adolf von Harnack은 “네가 그 길로 가면 이제까지 기독교가 쌓아온 역사적인 비평방법이 설 자리가 없어진다”고 했다. 그러나 Karl Barth는 신학 강의를 하러와서 신학 강의를 한 것이 아니라 설교 원고를 읽었던 것이다. 1921년에 재판이 나왔는데 그는 대학교수로 청빙되었다. 여기까지가 Karl Barth에게 오기까지 19세기에서 20세기 초엽가지의 신학사상의 대략이다. 현대신학은 1919년에 시작한 것이 아니라 그보다 200년 이전 계몽주의자 칸트에 의해서 소개되었다고 할 것이다. 여기서 부터 인간으로 출발해서 하나님이 말씀하신다로 바꾸어졌으니까 쿠페르니쿠스적 전환이라고 한다. Karl Barth가 로마서 주석을 쓰던 1918년에서 1919년 이전과 이후의 달라진 신학적 배경을 알아야 하는데 그것은 계몽주의, 즉 자율주의 이다. 칸트가 계몽, 즉 성숙이 무엇이냐 할 때, “자기 발로 서는 것이다”라고 했다. 그 때 까지만 해도 주어진 이성을 자유롭게 활용하는 것이 아니라 외적인 교회의 권위에 의존하여 교회의 승인을 받아야 했다. 그런데 바로 그 외적 권위에서 놓여나서 자기 이성을 활용하는 것이 계몽인데 칸트와 현대 계몽주의 정신에는 다 이런 사상이 있다. 우리는 Karl Barth 비판이 없어서 Karl Barth가 그전과 차이점이 아직 없고 결국 근본적으로 같다고 하니까 무슨 이야기인 줄 몰라서 Karl Barth가 종교개혁으로 완전히 돌아간 것으로 오해하면 안된다. 결국 Karl Barth는 전통적인 의미의 개혁신학에로 돌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근세인의 의식에 의존하고 또 이성에 의해서 표준을 삼는 신학에 머무르고 만다. 결국 Schleiermacher의 그늘을 벗어나지 못했다고 해야 맞다. 결국 이성이 계몽한다는 말은 낙원에서 부터 시작했는데 하나님이 먹지 말라는 외적인 그 말씀의 권위에서 벗어나 먹으면 죽는다 했는데도 독립된 이성으로 죽을지 어떨지 내 판단에 의해 먹어본 것이다. 그러니 현대신학은 Karl Barth가 서 있는 공동 地盤 위에 칸트가 같이 서 있다. 더 거슬러 올라가면 그것은 아담과 하와의 태도이다. 하나님의 외적인 권위의 말씀에 의존하지 않고 자기의 이성으로 자기의 종교적인 의식으로 했기 때문에 Karl Barth가 인간에서 새롭게 하나님 말씀에로 되돌아 간 것 같아도 결국 칸트를 지나서 에덴동산까지 간다. 이런 면에서 토마스 아퀴나스의 중세의 종합된 사상은 자연을 초자연적인 면에서 해방시켜 놓았다. 사실 인간의 마음을 잘못 전개해 놓았지만 희랍세계에서의 인간 마음은 종교를 어떻게 구성했느냐 이다. 그러니까 모든 사상의 밑바탕에 종교적인 전제가 들어 있다. 그러나 그 전제들은 성경적 기본 전제들을 배척하기 때문에 항상 상호 모순되는 두 개념으로 종교적인 전제들을 만들었다. 그것은 변증법적 철학적 사고인데, 신학과 종교 뿐 아니라 모든 사상을 지배하는 종교적인 공동 전제인데 그것이 희랍적 사고인 형상과 질료이다 |
http://www.reformednews.co.kr/sub_read.html?uid=609§ion=sc26§ion2=
출처 : 영적 분별력
글쓴이 : 진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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