현대신학비판

[스크랩] 현대신학 : 1919년 이전(2)

강대식 2011. 6. 8. 19:41

현대신학 : 1919년 이전(2)
 
서철원

변증철학인 희랍철학의 기원, 동기 그리고 그 전제인 형상과 질료


모든 신학사상을 지배하는 종교적인 전제가 형상과 질료이다. 그러나 희랍사람들에게 있어서 더 기본적인 것은 무한하게 연속하여서 구체적인 형태로 나타나지 아니하고 살아 움직이며 흘러가는 그런 연속된 흐름인 질료에 더 근본원리를 둔다. 생명도 그냥 흘러가는 것으로 구체화되어 나타나는 것은 흘러가는 생명원리에 거스리는 것이다. 그래서 구체적으로 형상화된 것은 그 흐름을 반대로 거슬러 일어나는 것이다.

왜 죽음이 오느냐? 그 원리를 어기고 형체화, 즉 형상화 되었기 때문에 죽음이 온다고 한다. 희랍철학 사고에서 그런 것은 합리론적으로 설명될 수 있는 그런 것이 아니다. 생명이 무한히 흘러가고 돈다고 하는 사고방식 저변에 희랍 국민 전체에 종교의 기본이 전제되어 있다.

Dionisus는 장난의 신을 섬기는 흑암의 신이다. 그런데 백성들은 형상이 있는 이런 종교의식 속에서 살았다. 모든 것이 의식 속에서 흘러 내려간다. 그러다가 구체화 되는 것은 남는다. 생명은 영원히 흘러가는 것이며, 구체화 되는 것은 개별화 되어 나타나는 것이기 때문에 기본적인 흐름은 개별화 되는 것, 형체화 되는 것을 막는다. 하나의 흐름에 역행하는 것이다. 그럴 때 운명이라고 하는 것이 무엇이냐? 그것은 바로 이 흐름에 젖어들어 가는 것이다. 그러니 개인의 운명은 돌이킬 수 없다. 희랍사고에는 신이 개인의 운명에 개입해서 돌이키고 간여할 수 없다. 그것은 어둠의 연속적인 흐름, 그런 것을 상징하는 것이고 통속적인 형상의 빛에 나타나는 빛은 계몽된 사람들, 철학자의 계몽된 사고에서 나타난다. 이 두 흐름은 절대로 조화될 수 있는 개념이 아니다. 그런데 어둠에 빛, Apollo 신으로 대치되는 형상이 장난의 신으로 나타난 Dionisus와 합쳐졌다. 이 두개의 모순 개념이 함쳐진 것이다. 그래서 이 둘을 조화하기 위한 노력이 희랍철학의 영향이다. 이들은 이 둘을 모든 것의 기본으로 삼았다. 형상과 질료는 조화될 수 있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늘 변증법적으로 전개되고 사회에 긴장이 된다. 하나를 강조하면 절대화(ism)는 발생한다. 왜? 변증법적 긴장이 있으니까!

이들이 하나님을 절대화 하는 것은 변증법적 도식에 의한 것이다. 이것은 참 절대자의 근원을 떠나서 다른 것으로 참 절대자를 대체하기 때문에 우상 숭배이다. 그러니까 창조세계의 일부를 절대화하여 참 절대적인 절대자를 대체한다. 왜냐하면 하나님의 언약의 파기자인 인간은 참 절대자를 배제해 버렸으니까 자기가 절대자를 만들어서 거기에 자기를 종속시켜야 한다. 피조물의 기본 특성은 의존성인데 그래야 자기를 종속시켜 의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절대자에게 자기를 의존해야 한다. 그런데 참 절대자를 배제했기 때문에 결국 피조물을 절대화하여 대신 대체하면서 자기를 거기에 매달아 종속한다. 그러므로 여기는 긴장과 모슨이 없어지지 않는다. 그것은 반대되는 두 개념을 합쳤기 때문이다. 두 개념 형상과 질료에서 질료는 형체 없이 무 규정적으로 계속해서 흐르는 것이다. 그러면서 개체화 되고 형체화 되는 것을 막는다. 결국 그것을 용납하지 않고 없애버린다. 그런 때 형상은 어떤 형태로 나타난 그런 것이다. 그래서 형체화 됨으로 개별적으로 個物이 되어 나타나는데 질료가 그것을 헌다. 이것을 희랍철학은 운명이라 한다. 운명의 경우는 신들도 거기에 전혀 간섭하지 못한다. 그 때 형상은 이데아 혹은 빛으로 나타난 것이라고 한다. 두 개념이 형체화 되는 것은 흐름에 바로 모순 개념이다. 그런데 희랍사상은 이런 반대되는 두 개념을 합해가지고 형상화 하기에 여기에도 변증법적 긴장이 있다. 그러니 항상 한쪽 형상이 우위를 차지하면 질료가 보복을 한다. 결국 철학은 이것을 할 수가 없다. 그래서 이것을 소위 계몽된 지성인들이 종교로 표시한다. 그리고 이 변증법으로 만상을 설명한다.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으로 이것을 정식으로 표현을 했지만 그러나 아리스토텔레스가 처음으로 한 것은 아니다.

아리스토텔레스에 의하면 모든 個物은 형상과 질료가 합해서 된 것이다. 백묵은 백묵이라는 개념 그것이 형상, 혹은 이데아와 질료가 합해서 된 것이다. 책상은 책상이라는 개념과 나무란 질료가 합해졌다. 그러면 나무는 무엇이 그 형상이고 무엇이 그 질료인가? 책상을 만드는데 나무는 방금 책상이라는 개념의 질료였다. 그러면 나무는 다른 하나의 형상으로써 무엇과 무엇이 합친 것인가? 나무라는 개념에다 무엇을 합해서 나무가 되었는가? 이것은 형이상학적인 도식이지 실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은 못된다. 흙은 어떠한가? 흙이라는 개념에다 어떤 질료를 합한 것인가? 흙이라는 질료를 합치면 흙이 되는데 그러면 결국 무 규정자에 도달한다. 결국 그것이 원시 질료인 것이다. 물질은 결국 규정되지 않는 규정될 수 없는 그런 것에로 되돌아가고 만다. 그래서 플라톤에게는 흙과 먼지와 머리카락 같은 그런 이데아가 저 천상 세계에 있다고 그랬다. 사실 이것도 한계개념에 봉착한다. 흙이나 나무에 이르면 무엇이라고 정의될 수 없는 원시 질료재료에 돌아간다. 그러니까 둘은 상관개념이지 명확히 구분된 것이 못된다. 그래도 항상 질료는 흐름으로, 형상은 형체로 나타날려고 하는데 이렇게 나타나려는 것을 흐름은 없애려고 한다. 두 개의 모순 개념이 합쳤기 때문에 이와 같은 변증법적인 일이 야기 된다. 이것이 희랍철학의 존재론을 설명하는 기본 도식이다. 그러니까 형상도 철학적인 개념 같고 질료도 그냥 철학적인 개념 같아도 그 근본은 두 개의 대립된 종교의 전제들이 합친 것이다.

이런 형이상학적인 것 하나가 중세에 건너 왔는데 중세에는 자연에다 은혜를 합친 도식에 선다. 자연에다 은혜를 합친 것, 자연은 본래 주어져 있는 것이요, 그래도 고유한 존재로 있는 것이다. 그런 개념은 형상과 질료 개념으로 설명될 수 있는 독자적인 면이 있는 존재이다. 그러나 그 자체로 완전한 존재가 못된다. 불완전하고 미비한 존재이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에다가 은혜가 온다. 자연은 고유적으로 있는 것이고 은혜가 와서 끌어올려 앙양을 한다.

로마교회도 기독교이니까 앙양만 말하고 마는 것이 아니라 로마교회도 은혜가 와서 죄 문제를 해결하고 치료한다고 말한다. 그러나 근본적으로 은혜는 부족한 자연을 높은 차원으로 끌어 올린다. 자연개념은 희랍철학에서 왔고 은혜는 기독교에서 온다. 은혜가 와서 죄의 문제를 해결한다고 한다. 그러나 죄문제의 해결은 회복이 아니라 죄를 해결함과 동시에 높은 차원으로 앙양시킨다. 이렇게 함으로 처음 기독교의 은혜가 가져온 자연에 내린 과격 선언은 없어지고 은혜와 자연이 둘이 조화함으로 은혜를 첨가하면 그저 있는 것보다 좀더 나은 상태로 되는 것으로 말하게 되었다. 그러니까 비단도 그 자체로 좋은 것이지만 수를 놓으면 얼마나 좋은가? 부드럽기는 마찬가지이지만 보기는 더 좋아서 금상첨화격 이듯이 은혜가 와서 자연을 끌어 올린다고 한다. 이렇게 자연과 초자연, 자연과 은혜의 이원론적 2층 구조가 되어 있기 때문에 인간의 자연이성으로 자연영역을 알 수 있으나 그리스도의 구속의 은혜와 삼위일체 신비 같은 것은 은혜로 아는 것이지 자연이성으로 자연을 탐구함으로 알 수 있는 것이 못되는 것이다. 다른 모든 영역은 자연이성으로 자연을 탐구함으로 알 수 있게 되었다. 그리고 누구든지 자연의 사물 본성의 이치 같은 것을 탐구하는게 아니다. 빵을 굽는 사람은 빵 굽는 일에 바빠서 사물의 일이 어떻고 그 본질이 어떻고 그런 것을 따질 겨를이 없다. 물론 우리 한국에는 쌀을 자급자족하니까 농사짓는 사람은 쌀로 돈 바꾸기 바쁘지 쌀의 본질이 어떻고 따지지 않는다. 그렇지만 농부가 해준 쌀밥을 먹고 여유있어서 쌀의 본성이라든지 이런 것을 따지는 사람이 있다. 그래서 그것을 조금 더 보편화하면 하나의 學으로 될 때에 그런 것은 자연의 이성으로 했어도 신앙의 대상으로 삼는다. 이성 그 자체와 자연 그 자체가 죄 때문에 타락하고 어려운 것이 아니라 부족한 정도이다. 그래서 은혜가 와서 그 부족을 보충한다. 그리스도 성육신의 은혜와 삼위일체 신비같은 것은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없다. 그러니까 그런 경우에는 신앙을 통해서 믿음으로 은혜로만 알 수가 있다.

이 두 개념은 상당히 많은 경우에 희랍적 사고와 기독교적인 것과 합친 것이기 때문에 아주 어려운 조화를 이룬다. 그래서 나중에 인간의 이성만 취택하게 되면 자연은 필요없게 되고 은혜만 강조하게 되고 은혜를 취택하면 이성의 길이 배척되게 된다. 그래서 중세가 끝날 때 이성과 자연을 많이 택하여 근세 계몽주의가 되고 은혜만을 택하는 종교개혁이 나왔다. 이것과 함께 세번째 기본전제가 있는데 이것은 희랍적 사고, 즉 자연개념에다가 기독교의 은혜 두 개의 전혀 상반된 것을 합친 것이다.

그 다음에 근세에 들어와서 소위 자연과 자유이다. 자연은 그대로 두고 은혜라는 개념을 자유로 바꾼다. 그런데 이제는 중세 때와는 다른 의미로 자유와 자연이 역사하는 것이다. 자연은 인과율이 적용되는 그런 세계로써, 완전히 물질의 자연법칙이 적용되는 그런 세계이다. 인과율이 그 기본이고 인간은 그것을 넘어서서 자유를 가진 인격이어서 자유를 가진다. 그래서 근세인은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것이 그 理想이었다.

이제까지 인간이 너무 자기에게 주어진 이성을 사용하고 외적인 권위에 얽매여 살면서 하나님 말씀의 권위, 그리고 모든 것을 신부에게 물어서 하고 신부님 가르쳐 준대로 하고 신부님 해석한대로, 상담한대로 했다. 신부님 말이 곧 하나님 말씀이었고 교황의 말이 곧 하나님 말씀인 것이다. 그래서 자기의 이성을 활용해서 자기가 판단하는게 없었던 것이다.

그런데 종교개혁이 많은 사람들에게 이런 율법적인 속박에서 또 자연의 속박에서 해방을 가져다 주었다. 그렇지만 종교개혁이 가져다 준 그 자유는 죄로 부터 자유이고 나를 얽어매는 악으로 부터 자유이며 해방이었다. 그런 은혜가 가져오는 자유와 해방의 개념을 근세인들은 역으로 바꾼 것이다. 그것은 하나님 은혜로 부터 오는 죄로 부터의 자유가 아니라 외적인 권위의 종속화된 것에서 자기 스스로 자기 발로 서는 것, 더 이상 외적인 권위를 어떤 형태로든지 받지 않는 것, 그것을 진짜 자유라고 생각했다. 모든 것을 외적인 권위에 의존하는 것이 아니라 제 발로 자기의 주어진 시점에서 주어진 재능을 활용하여 자기가 판단하고 선다.

그런데 지금까지 그런 외적인 권위에서 벗어나기 위해서 자유를 다시 해석했다. 또 인간은 자연으로 부터 많은 속박을 받아왔던 것이다. 그런데 자연과학이 발달하니까 길을 다니기 편리하게 만들고 질병도 막아 전염병도 막을 수 있고 홍수도 막을 수 있고, 한재도 어느정도 막을 수 있었다. 이제까지 자연은 신들의 거소요, 영역이어서 거기서 일어난 것은 신들의 영역이기 때문에 감히 사람들이 접근했다가는 사람이 크게 벌 받는 것으로 생각했다. 그렇기 때문에 자연을 마음껏 다스리고 통제하고 다스릴 수 없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연과학이 발달하게 되므로 자연의 이치와 법칙을 알아서 적용하면 자연을 어거할 수 있다고 믿기 시작했다. 그러니까 베이컨이 한 말 가운데 “지식이 힘”이란 말은 그것을 두고 한 말이다. 질병은 다 하나님의 진노로 생각했는데 병명이 무엇인가 연구해서 주사를 맞으니까 전염병이 없어졌다. 자연의 이치를 알아서 자연을 어거할 수 있게 되었다. 그러니까 자연을 마음껏 지배하므로 자유를 100%로 누릴려고 했다. 자연을 지배함으로 자연 위에 자유를 누리는 것이 근세인의 이상이요 모든 외적인 권위로 부터 해방되고 또 자연의 억압으로 부터도 벗어나는 것이다. 그래서 자연의 비밀을 하나씩 하나씩 캐내어 그것을 지배하므로 인간의 자유를 확대해 갔다. 무서운 동물들도 그 동물의 생리를 잘 이용하면 다 다룰 수 있다. 호랑이 하면 벌벌 떨었는데 지금은 다 잡아다가 동물원에 넣어놓고 구경한다. 그렇게 이성을 활용해서 자연을 마음껏 지배하므로 자유를 확보하려고 한 것이가. 그것이 근세인의 이상이요 이성을 마음껏 활용한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이성의 무한한 탐구의 영역을 이성에게 열어준 것이다. 이성으로 못할게 없이 이성으로 다 할 수 있도록 믿게 했다.

그런데 자연과 자유, 이 둘이 서로 상반된 개념이다. 자연은 필연의 법칙이요, 다위의 세계요, 자유는 인격의 세계, 인간의 세계인 것이지, 자연의 세계에 있는 것이 아니다. 그래서 현재처럼 자연과학이 발달해서 자연 위에 큰 행사를 한 때가 없었다. 그러나 자연계에 행한 이러한 자유의 행사가 인간에게 까지 적용되므로 굉장히 자우로운 것 같지만 말할 수 없이 제한되어 있다. 근세 현대인 만큼 개인의 내적 무력감을 절감한 때가 없었다. 자연은 필연의 법칙이고 자유는 당위의 세게이다. 할 수도 있고 안할 수도 있는 것이다. 그러니 상반된 두 개의 개념, 자연과 자유가 서로 다툰다. 그러니 늘 긴장이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당위를 말하면 실존주의가 되는데 그래서 실존주의는 인간의 존엄, 인간의 자유를 위해 기계문명을 막으려 한다. 그렇지만 어디 막아지는가? 현대문명이 가는 길을 막을 길이 없게 되었다. 우리 교회들도 전부 다 개교회주의로 있는 한은 해결할 길이 없는 것이다. 정책의 문제를 항의해 보아도 개교회 뿐이니까 힘이 없다. 자유의 이 두 개념은 그 전체에 있어서 서로 상반된 두 개념이 합친 것이니 변증법적 긴장이 있다. 참 자유는 종교개혁이 가져온 은혜에서 온 자유이고 다른 것은 세속화한 자유이다. 그러니 상반된 두 개가 합친 것이다.

개인적으로는 현대인 만큼 무력하고 무능감을 절감하는 때가 일찌기 없다. 왜 그런가? 다 그릇된 종교적인 전제 위에 입각해서 서 있기 때문이다. 자유가 근세인의 신앙이요, 자연도 마찬가지인데 그렇기 때문에 바른 學이 안 나오고 ism(이데올로기)이 나와서 사회를 파멸로 이끈다. 소위 모든 사람들에게 이 모든 철학의 전제에 있는 종교적인 전제를 발견해 내는 일을 도예베르트가 했다. 그것이 그의 훌륭한 공이다.

그러면 성경은 어떤 전제이냐? 창조와 타락과 구속이다. 여기서만이 변증법적인 긴장이 없는 일을 할 수 있고 인간에게 참 자유와 생이 보장된다.

여기서 말하려고 하는 바르트의 이야기 중에는 근세인의 기본 전제되는 자연과 자유의 원리가 그의 신학을 지배하고 있다는 것이다. 하나님 말씀에로 되돌아가는 것 같아도 그것이 아니고 근세인의 근본 종교적인 전제가 바르트 신학에도 지배하고 있다.

여기 무한정 통제할 수 있는 것이 자연이다. 그리고 자유도 인간의 이성으로 마음껏 자연을 지배할 수 있는 그런 이치를 말한다. 그래서 자기 사고를 지배하는 아무런 외적 통제가 없는 것을 자유라고 하지만 그러나 실제로는 이런 기본 전제가 그 바탕에 흐르고 있다. 이 자연과 자유의 개념으로 근세인들이 세계를 다 설명하였다. 이 자연의 개념으로 기독교를 배척하기 위해서 최초로 나온 것이 영국의 理神論 혹은 自然神論이다. 이신론에 의하면 그 이상 외부의 간섭과 보충이 필요없이 자연은 그 자체로 충족하다는 것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께서 자연이라는 큰 기계를 만들어 놓으시고 그 이상 자기가 간섭하지 않아도 돌아가게 하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하나님은 자기가 직접 지은 자연에서 후퇴하신 것이고 더 이상 간섭하실 필요가 없게 되었다. 이것이 지금의 무신론의 원조상이 되었다. 그게 그럴듯 하고 좋게 보인다. 하나님이 전능하시사 천지를 만드셨으면 게속해서 간섭하고 일하실 필요가 있겠는가? 자식들도 늘 간섭하면 좋아하지 않는다. 스스로 서게 하는 것이 좋다. 그래서 자율이 생긴다. 인간이 인간 자신에게 법이 되는 것이다. 그 말은 인간이 이성을 표준으로 해서 이성을 지도자로 해서 이성이 내린 판단을 바르고 합당한 것으로 믿고 그렇지 않는 것은 배척한다는 뜻이다.

근세인은 참이고 거짓이고를 이성에 의해서 판단한다. 그리고 선악의 판단도 마찬가지로 이성으로 한다. 하나님 말씀의 권위에 의해서 선악과 진위를 판단하고 믿는게 하니다. 이성의 판단에 비추어서 맞으면 옳고 안맞으면 틀린 것으로 결정한다. 2+3=6, 이것은 수학공식에 안맞으니 틀린 것이다. 1+1=1, 이것은 될 수 있다. 만년필 뚜껑을 열면 두개, 다시 끼우면 하나가 된다. 1+1=1의 경우 사과를 하나 놓고 또 하나를 놓으면 둘이 된다. 2+3=5인데 6이라고 하면 착각을 한 것이다. 지각에 안맞기 때문에 거부한다. 진위와 선악을 이성의 판단에 의해서 결정한다. 그러니까 모든 진위와 선악의 최후 심판이 이성이다.

그러니까 자율이란 말은 인간은 피조물인데 하나님 말씀을, 하나님 법을 그 권위로 받아들이지 아니하고 그것을 버리고 자기의 이성과 판단을 모든 것의 표준으로 삼는 것을 말한다. 그러니까 그것은 거짓 자율이다. 물론 자율해서 스스로 서야할 것이다. 우리는 너무 의존심이 많아서 제 정신으로 제 스스로 서야할 필요가 있다. 그러나 이런 자율이 아니다. 현대인은 진리에 대한 궁극적인 표준, 그리고 최후의 심판관을 바로 이성으로 삼는데 이렇게 되면 안된다.

칸트에게 있어서 인간의 자율이라고 하는 것은 성경에서 자기 자신을 계시하신, 自證하신 그 하나님의 계시 대신 인간의 자율적인 이성이 그 자리를 대신한다. 더 이상 하나님의 계시된 말씀이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말씀하시는 것이 아니라 인간의 이성이 결정한다. 그런데 그 이성이 개개인들에게 있는 것도 되지만 누구든지 다 보편타당할 수 있는 이성, 온 인류에게 공통된 그 이성, 어느 특수한 사람들이 갖은 그와 같은 이상한 직관, 통찰, 투시, 그런 것이 아니고 누구든지 갖는 보편한 이성, 그런 것이 궁극적으로 모든 것을 결정한다고 한다. 그러니까 하나님 사역을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내가 구원에 합당히 이르도록 일하는 것이다. 왜냐하면 내가 할 수 있는 능력이 있으니 내가 한다고 한다. 할 수 없는 죄인이 은혜를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다. 그러니 구원자가 밖으로 부터 오실 필요가 없게 된다. 인간 스스로 자기를 구원할 수 있는 능력이 있다고 믿는다. 그래서 이성을 신적인 높은 존재로 본다. 보통 탁월한 존재가 아니어서 인간의 이성을 神的이라고 한다. 그것은 그 사고 때문에 그런다.


임마누엘 칸트의 현상계와 예지계에 대하여


근세 칸트 이후의 신학은 다 칸트의 기본원리를 집행한 것이다. 칸트에 의하면 인간이 이성으로 알 수 있는 영역이 현상계라 해서 그 위에 혹은 그 밖의 세계를 예지계라 한다. 그리고 현상계만 인간의 이성으로 알 수 있다. 왜냐하면 인간이 무엇을 안다고 할 때는 감각기관으로 받아들이기 때문이다. 이것을 백묵이라고 하는 것도 보고 만져서 아니까 백묵이라고 한다. 그러나 귀신 이야기나 물 위로 걸어서 강을 건너는 이야기나 지옥에 갔다온 이야기는 감각적 감각기관으로 알 수 있는 경험의 대상이 못된다. 그 영역은 우리 인간의 감각능력으로 알 수 있는게 못되기 때문이다. 안다고 할 때 들여다 볼 수 없다고 해도 그것의 특징이 외적으로 나타나 있다. 그것을 가져다가 실험해 보고 분석해 보고 검증해서 말하고 더 확실하게 하기 위해서는 실제로 정확하게 있는지를 알기 위해서는 과학적인 방법으로 시추를 해 본다. 실제 금이 있는지 은이 있는지 확힌해 보고 그 증거들이 나오면 금, 은이 있다고 한다. 그냥 봐서 표증은 안 나타나도 그 속에 있다고 투시하는 사람이 보는 것과는 다르다. 그러면 지옥에 가 보았는가? 마음 속에 있는 지옥을 보았다는데 부인해 버리라는 것이다. 실제 고통을 느끼는 것은 있다고 생각하니까 그렇지 않은가? 그러니 거절해 버리면 될 것이라고 한다.

우리가 무엇을 안다고 할 때는 경험으로 가능한 것을 안다고 한다. 하나님을 안보고도 믿는다는데 감각기관의 대상이 아니기 때문에 우리가 알 수 있다고 말할 수 없다고 한다. 그런 존재는 현상계에 속하지 않는다. 그러니 하나님을 우리가 알려면 하나님이 현상계, 시공의 제약속에 들어오셔야 우리가 알 수 있다. 원인이 있으면 결과가 있고 결과가 있으면 원인을 추적할 수 있는 그런 것만 과학적으로 알 수 있는 것이다. 믿어서 아는 것 말고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만지고 우리의 이성으로 보고 판단할 수 있는 세계를 칸트는 현상계라 하고 그 이상은 예지계라고 하여 하나님을 초월의 세계, 저 예지계로 추방해 버린다.

칸트에 의하면 우리가 알 수 있는 영역은 현상계이고, 그 이상의 세게, 예지계, 혹은 물 자체의 세계는 알 수 없다. 그러니 하나님도 物자체, 즉 예지계에 속한 분이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분이 아니다. 다만 우리가 알려면 우리의 감각기관에 접촉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칸트가 이처럼 이성의 한계와 능력에 대한 설정을 했기 때문에 칸트 이후의 모든 신학과 철학는 칸트의 원리를 그대로 이해하는 것을 그 임무로 하였다. 철학도 경험을 강조하게 되었고, 신학도 현상계 밖에 있는 것은 알 수 없는 것으로 되어 체럼을 강조한다. 계시하고 하는 것도 저 현상계 밖의 초월의 세계에서 자연적인 것이 아니라, 자연적인 世界內事件, 혹은 內世界的事件으로 간주하였다. 다시 말하면 밖에서 계시가 온 것이 아니라, 우리 마음으로 부터 계시된 사건을 만나는 것이다. 그런데 특이한 일은 계시란 구체적으로 알아 들을 수 있는 언어로 오는 것이 아니고 우리 마음 안에서 순간 순간 결정되고 일어나는 결단이라는 것이다. 즉 계시는 명제 형태로 오는 것 즉 주어와 술어를 가진 문장의 형태로 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계시가 內世界的事件으로, 밖으로 부터 온 것이 아니라 안으로 부터(ab inter) 나오기 때문이다. 모든 경우에 계시는 안으로 부터 인간의 신적 요소로 부터 오게 된다는 것이다.

예를 들어 시편을 우리가 계시로 수납하는데, 그러면 시편이 안으로 부터(ab inter)인가, 혹은 밖으로 부터(ab extra)인가? 우리는 시편은 초자연적 계시이고 밖으로 부터 온 것을 믿는데, 그러나 칸트 이후 도는 슐라이어막허 이후에 완전히 경우가 바뀌었다. 모든 것을 內世界的 현상으로 혹은 분명한 용어로 설명하도록 되어졌다. 이것이 현대의 신학작업 이다. 18세기에 정착한 중요한 신학 작업의 원칙이 있는데 그것은 우리의 모든 신앙의 내용을 그 당대의 언어로 번역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것이 18세기의 개신교신학 작업의 원칙이 되었다. 기독교가 혹은 계시가 당대의 그들에게 그들의 언어로 당대인들에게 말해야 하며 다른 방법으로는 말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러면 철학이 18세기 이후 부터는 초자연의 영역을 생각하지 않고 內世界的 사상으로 진행되는데 이런 사상에다 기독교를 변형시키고 있다. 계시가 초자연적에서 오지 않고 內世界的 사건이면, 신의 존재도 초자연적으로 있는지 없는지 말할 수 없게 된다. 다만 현상계 내로 들어온 일에 대해서만 설명이 가능하다는 것이다.


이성주의적인 자연신론의 시대에 불트만의 非神話化 개념


불트만의 비신화화도 근세인의 사상과 같다. 그리고 칸트의 원칙에 의해 충성되이 일을 진행한다. 우리가 믿는대로는 성육신을 보좌에 계신 이가 땅에 내려 오셔서, 여인의 몸으로 들어가서, 육을 입으시고, 사람으로 나오셨다. 그들에 의하면 이런 일이 있을 수 있을 것인가? 정말 그런 존재가 저 밖에 계시는 분인지 우리는 알 길이 없어지게 된다. 그것은 알 수 있는 것이 현상세계 뿐이어서 칸트에 의하면 이런 것들은 현상계에 맞지않기 때문이다. 우리에게는 이것이 기적중의 기적이고 신비이지만 이들에게는 어려운 문제중의 하나로 대두되게 된다.

하나님이 여인의 몸에 들어가시고 사람으로 오신 성육신을 어떻게 이해해야 할 것인가? 그러니 18세기 이후의 신학책들이 예수 그리스도를 하나님의 아들이라고 진술했어도 그 내용은 전통적인 신학이해와 반대가 된다. 그런 초자연적으로 계시다가 초월해 계신이가 어떻게 들어 오셨는지 초월을 연결할 길이 없다. 그래서 완전히 시공내에 역사안에 살았던 사람으로서의 예수 그리스도만 생각한다. 역사에서 출생하고, 낳고, 죽은 사람이 되어버린다. 어떤 의미로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겠는가? 뭐라고 전도해서 예수 믿으라고 해야할 것인가? 이런 과학적 사고로 예수는 완전히 역사에 소속되어 역사에서 출생하고 역사에서 죽게 되어 버린 것이다.

어떤 의미로 어떻게 하나님의 아들이 될 수 있겠는가? 그럴 수 없게 되어버린 것이다. 우리는 그러면 고난주간, 부활주간에 어떤 설교를 해야 하는가? 예수의 부활로 하나님의 아들로 입증되었다 해도 문제는 예수를 믿어야 한다는 당위성을 어디서 구할 것인가? 그러니 성육신도 內世界的, 生物學的 사건이 되고 만다. 불트만은 과학적으로 불가능하므로 동정녀 탄생을 부인해 버린다. 그는 우리가 안다는 하나님은 예수 그리스도 외에 다른 분이 없는데, 초자연적 존재를 우리가 만났으며, 만남의 증거는 예지계에 속하지 않고 현상계에 속한다는 결론이 된다. 그처럼 증명이 된다고 한다면, 감각세계, 시공세계에 속하게 된다. 그런 것은 하나님의 존재로 볼 수 없다.

키엘르케골이 역설적으로 강조하는데, 무한한 질적으로 다른 영원하신 이가 시간 속으로 들어 오셨다. 즉 무한하신 이가 유한한 세계로 들어 오셨다. 그러면 유한 속에 무한이 담기워질 수 있는가? 작은 그릇에 큰 그릇을 담는 것이 불가능하듯 그럴 수 없다는 것이다.

현대신학의 문제가 멀리 있는 것이 아니고 또한 남의 문제만이 아니다. 우리 기독인들은 합리적인 것이 아니면 믿지 않는 실정이어서 계시가 합리적이 아니고 불합리한 것인데 어떻게 받아 들일 수 있겠는가? 1+2=3이 아니고 2 라고 한다면 어떻게 그런 계시를 받아 들일 수 있겠는가? 처녀 탄생과 성육신, 부활은 현대인들에게 그와 같이 불합리한 것으로 여겨진다. 하나님의 계시라는 것은 종교현상학적 사건으로 처리하고 內世界的 사건으로서 다루어 버린다. 神을 만난 사람이 어디 있으며, 어떤 형태로 존재하는가? 입증할 길이 없는 것이다. 그러니 성경도 역사적 산물로 귀속해 버린다.

좀 더 심각한 문제는 계시가 오면 이성을 희생하는가 하는 문제이다. 그러니 성경에서 시작해서는 일이 안되게 되어 있다. 자연주의와 초자연주의, 두 부류가 있는데 자연과학자들은 초자연주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물리학의 법칙을 이야기 하는데 그 배후에 지성이 있고, 하나님의 섭리가 있고, 창조가 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것은 항상 물질로 나타난 것만 보아 알기 때문이다. 물질로 표현된 것을 형상과 질료라고 할 때, 경험론이 대두되기 전까지 강조점이 질료에 있었는데 경험론이 들어 오면서 부터 질료가 문제가 아니라 물질에 표현된 것 뿐 그걸 넘어서서는 생각하지 않는다.

우리는 그것을 넘어서서 하나님의 존재와 경륜과 창조를 믿음으로 전제하는 것이지 증명하는 것이 아니다. 증명으로 나아가면, 증명할 길이 없다. 그러니 존재하는 것을 믿는 것 뿐이다. 즉 그것을 넘어서서 믿는 것이며, 믿음은 과학으로 증명할 수 없다. 그러니 그들은 믿음은 지식의 분야가 아니라 한다. 그것은 지식으로 증명해 버리면 믿음의 영역이 아니라, 학문이 되어 버린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신앙의 영역을 학문하고 있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계심을 전제 한다. 인격적으로, 영적으로 무한하신 분을 전제하고 믿는데 전제한다는 것은 믿는 것이다. 그러나 우리 만이 전제로 부터 출발하는 것이 아니고 자연과학 역시 전제에서 출발한다. 그리고 출발점으로 돌아온다.

자연의 제 일성 때문에 자연을 탐구해서 법칙을 발견한다. 물론 그것이 얼마만큼 타당하다고 말할 수 있겠는가? 이 자연의 제 일성을 모든 자연과학이 증명함 없이 전제하고 시작할 뿐, 증명하지 못한다. 왜 제 일성인가를 자연과학자가 더 이상 생각하지 않는다. 그러나 제 일성을 바르게 설명할 수 있는 것들이 무엇인가는 창조주 하나님의 경륜 뿐이다. 현대신학이 항상, 멀리 있는 사람들, 믿지 못하는 사람들에게 있는 것으로 생각하는데 그것이 아니라, 이런 요소는 우리 안에 있다. 다만, 자연과학자들은 훨씬 더 일관성 있게 전개하고 그러나 우리는 단지 신앙이라는 것 때문에 다소 주춤할 뿐이다.

이런 것들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것이 문제가 된다. 바로 이런 문제에 칸트가 분기점이다. “칸트 이전에 칸트 없고, 칸트 이후에 칸트 없다”는 말은 칸트 이전의 사상과 칸트 이후의 사상이 완전히 다르다는 것이다. 그런데 교회에서 바른 개혁신학과 바른 진리는 안 가르치고 부흥가 축복만 가르치며, 큰 문제에 봉착하게 된다. 이제는 고등학교에서도 철학과 논리학을 가르치는데, 우리는 철학 책을 읽을 때 혹은 그런 사상을 분별할 눈이 없다. 칸트 이전과 이후의 용어는 같으나 안의 내용은 전혀 다르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고 무분별하게 받아 들인다. 그리고 그것은 철학의 일이니 성경만 가지고 된다고 하지만 지금 철학과 신학이 구분된 것이 아니다.

데이빗 흄은 18세기 영국 스코틀란드의 철학자인데 개혁교회 출신이다. 스코틀란드의 개혁교회인데 교회의 분위기들이 너무 그를 배타하도록 만들었다고 이야기한다. 죤 낙스 때문데 스코틀란드는 장로교이며 개혁신앙 아래 있어 왔지만 지금은 바르트 영향 아래 다 있게 되었다. 그에 의하면 지식의 영역에 있어서 우리가 알 수 있는 것은 감각 뿐이다. 감각적 재료 곧 표상이다. 즉 외부에서 들어온 인상이다. 이런 것들은 습관이 지배적이다.

내 경험으로도 웨스트민스터에 있을 때 3년 내내 동쪽과 서쪽을 구분하기 어려웠다. 잠실 살다가 서초동으로 갔을 때도 어디가 남쪽인가를 오랫동안 따져야 했다. 습관이 쉽게 무엇을 생성해 내는 것이다. 흄은 인과율이라는 것을 자연의 법칙으로 인정하지 않는다. 인과율이란 반복해서 경험하므로 그렇게 말할 수 있을 따름이다. 즉 모든 경우에 인가율의 형성은 우리의 습관이며 관습이다. 인과율을 자연의 법칙이라 하지 않는다. 그것은 우리가 받아들이는 인상과 그것에서 나오는 Idea(관념), 그것이 부합해서 여러 세계가 되었을 뿐이지 우리가 밖에서 받아들이는 것은 생래적 관념, 즉 神 존재를 믿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생래적으로 안다고 생각한다. 그렇다면 어린아이들도 알아야만 된다. 인도에서 이리에 의해 키워진 두 아이들이 있었는데 이 경우는 어떻게 할 것인가? 영국의 경험론이 제기하는 바는 생래적 관념이 있으면 어린 아이들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 이리 소년은 아무 것도 몰랐다. 그래서 안다는 것은 속에서 절로 나오는 것이 아니라 모두 밖에서 끌어들여 오는 것, 경험으로 부터 가져오는 것이라고 했다. 이들의 주장은 좋은 생각도 일단 밖에서 들어와 가지고 나가는 것이며 독창적이 아니라 한다. 이렇게 되면 많은 경우의 인과율이 습관게 관한 것이 된다. 즉 난로 가까이 가면 따뜻해지는 것도 자꾸 경험했으므로 따뜻하다고 느낀다. 그러면 인과율이라 하는 것이 밖에 객관적으로 쓰임 받는 것이 아니라 이런 사물이 실제로 존재하는 것도 분명히 말할 수 없다. 늘 우리에게 있으니까 있는 것으로 인정할 뿐이다. 그러나 자연과학도 수치가 나오니까 사실인 것 같아도 가설의 영역에 속한다. 인간의 규정을 수치화한 것이다. 뉴우톤 때는 절대적인 공간, 절대적인 시간을 상정해서, 여기에 타당한 법칙이 반드시 그대로 나탕하다고 믿었다. 지금은 그렇게 말할 물리학자는 없다. 절대적 공간이 어디 있겠는가? 여기서 적용되는 만유인력 법칙이 그대로 다른 것에 타당하다는게 성립되지 않게 되었다. 또한 밖에 어떤 사물이 존재하는 것도 정말 확실히 증명할 수 없다. 더구나 하나님이 세상을 만들었다는 것은 증명할 길이 없어지고 말게 되었다.

앞에 집을 짓다가 헐어버렸는데 우리는 헐기 전에 수많은 경험으로 집을 완성할 줄 알았다. 그것은 계속 같은 경험을 해왔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 세상을 하나님께서 만드셨다는 것, 이 세상의 불완전한 것들이 앞으로 재림 때 완전해진다는 것을 어떻게 알 수 있을 것인가? 우리가 경험하지도 못한 것이다. 경험이 반복되어야 증명할 수 있다고 흄은 말한다. 그러니 이 세계에 조물주(author)가 있다고 상정할 수 없다는 것이다. 이 인과율도 확실한 것을 알 수 없다. 영국의 대부분의 경험론에 의하면 회의주의가 대부분이다. 감각재료를 가지고 있을 뿐 그 이상은 없다. 즉 인과율을 그 배후에로 증명할 길이 없다. 태양동승도 우리가 보아왔던 우리의 습관의 산물이지 우리의 주거지를 떠나면 그것이 똑같이 반복된다고 주장할 수 없다. 인과율은 습관에 의해 우연적으로 연결된 것 뿐이다.

이 기본 입장을 칸트가 받아들였다. 그러나 이 방식으로 인과율을 생각하면 학문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래서 칸트는 인과율을 인간이 세운 보편 타당한 법칙으로가 아니고 우리의 이성이 넣어준 법칙으로서 보편 타당하다고 한다. 인과율을 무한정 적용하면 안되고 인과율을 적용할 수 있는 한계는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시공세계 거기에만 국한을 한 것이다. 그 외에 그걸 넘어서서 하나님이라든지 구원이라든지 불멸같은 것은 경험할 길이 없기 때문에 그것은 지식의 영역에서는 도저히 다룰 수 없는 영역이 된다. 그러면 현대인에게 하나님이 어떤 존재로 요청되느냐?

우리의 모든 경험을 다 합쳐보자. 우리의 경험, 서울에 있는 사람의 경험, 대한민국 사람의 경험, 온세계 사람의 경험을 다 합치면 그것은 뭐가 되는가? 어떤 개념에 이르러 가는가? 모든 사람의 경험을 다 합치면 그것이 세계라는 개념에 이르게 된다. 그것은 누구도 경험한 적이 없는 개념이다. 세계 경험헤 보았는가? 얼마만큼 경험을 했는가? 그것은 우리의 경험을 통일하는 한 규제개념이지 세계를 누가 경험했는가? 그런 것은 전부 다 현상과 우리의 경험 전체를 다 통괄하는 통일 원리로 서 있을 뿐인데, 이 궁극적인 개념을 하나님으로서 상정한다. 마찬가지로 우리의 경험을 다 모으니까 누구도 경험할 수 없는 한계개념에 이른다. 그건 한계개념이지 우리가 경험하는 것이 아니다. 그 세계보다도 그렇게 만들어 주는 기본개념 그것을 하나님이란 개념으로 한계개념으로 설정한다. 하나님은 체계를 구성하기 위한 한계개념으로, 모든 것을 구제하는 것이 아니고 한계개념으로, 체계를 위한 하나의 한계개념으로 필요한 것이다.

우리의 영혼이라고 하는 것도 그렇다. 경험해 본 사람 있는가? 그러나 우리의 의식구조, 우리의 속에서 좋은 것도 나오고, 선한 것도 나오고, 음탕한 것도 나온다. 이런 모든 현상들이 어디서 나오는가? 그냥 우리의 육체에서만 나오는가? 근원을 생각하게 된다. 그러니까 영혼이라는 것이 있어서 그러한 것이 다 나오는 것을 생각하는 것이다. 그러나 누가 영혼을 보고 또 경험을 했는가? 그러니 영혼도 경험의 통일개념으로 근원되는 개념으로 한계개념으로 필요하다. 실제로 있는 것을 누가 알 것인가? 영혼, 세계, 하나님 은은 우리의 경험의 영역으로 접촉 불가능하다. 그러나 한계개념, 즉 체계를 구성하기 위해서는 전제함이 필요하다고 칸트는 말한다. 지식의 영역으로는 하나님과 세계와 영혼의 존재를 알 길이 없다. 체계를 구성하기 위한 한계개념으로 설정함이 필요하다. 그러나 사람이 지식 만으로 사는 것이 아니다. 사람은 인간 공동체에서 사는 것이다. 그러니 지식만 가지고 이야기 할 것이 아니라 윤리로 하자는 것이다.

그러면 그의 윤리관을 살펴보자. 윤리를 이야기 하려면 어떻게 해야 하는가? 자발적으로 하는 것이 참된 선행 아닌가? 방아쇠를 들이대서 내놓는 것은 죽기싫어 내놓는 것이다. 자발적으로 낼려면 사람이 자유가 있어야 되지 않겠는가? 그러나 자유를 증명할 수 있는가? 많은 경우에 객관적으로 가치가 같은 것을 두 가지 놓고 선택하라고 하면 참으로 어려운 것이다. 그러니까 중세 때 이런 이야기가 있었다.

말(馬)이 있는데 양쪽에 동등한 가치 있는 먹이를 주었다. 어느쪽을 먼저 먹는가? 결국은 어디를 선택할 줄 몰라 결국 말라 죽게 되는 이야기가 있다. 이와 같이 우리에게 있는 자유는 완전한 자유인가? 선택하고는 이미 어떤 일이 일어난 다음에 후회한다. 자유가 있으면 후회하도록 결정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자유를 증명할 길이 없지만 윤리생활이 바로 될려면 자유를 전제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칸트는 실천에서, 윤리의 영역에서 자유를 전제한다.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는 알 길이 없다. 그러나 이 짧은 세상에 이걸로 그친다면 뭐가 되겠는가? 우리 인간의 근본이 윤리적, 도덕적인 존재로 세상에서 완전한 사람이 못되고 덕을 현세에서는 완성시키지 못한다. 그러니까 내세까지 연장시켜 우리의 덕을 완성시켜야 되지 않겠는가? 즉 우리의 삶이 현세에서 끝나버린 것이 아니고 내세에까지 연장된다고 전제해야 되지 않겠는가? 그래서 내세를 요청한다. 그저 내세가 있기를 바란다. 그리고 하나님이 계셔서 우리의 선악을 벌하시고 상주시는 그런 분이 계셔야 할 것으로 요청한다.

지금 이런 이야기는 단지 20세기 후반부에만 나오는 이야기가 아니다. 플라톤의 국가론과 법을 읽어도 세상에서는 의로운 것, 좋은 것이 아니고 불의한 것, 악한 것이 좋다. 왜? 악을 크게 일으키면 영웅이 되고 사령관이 되고 정치인이 되고 나라를 세울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악하고 불의한 것이 좋다. 그렇게 국가론이 시작되고 이야기를 전개할 때, 그것이 2천년 전의 일이 아니라 그것은 오늘의 이야기도 된다. 지금이야 우리 한국사회도 7계를 범해도 다 관대해서 다 그럴 수 있는 것으로 통상화 된다. 그런데 하나님이 안계시고, 내세가 없으면 얼마나 자유롭게 하겠는가? 그러니 하나님란 존재가 계셔야 되지 않겠는가? 그런 하나님을 알 길이 어디 있는가? 천지를 창조한 신이 어디 있는가? 그렇지만 그 하나님이 윤리세계를 위해 있으면 좋다는 것이다. 있기를 바라고 요청할 뿐, 실제 있는지는 모른다. 이것이 칸트가 말하는 神觀이다.

윤리의 세계를 위해서 하나님의 관념의 필요성 때문에 하나님의 관념을 생성해 낸다. 없어도 되지만 윤리생활을 하려면 하나님과 내세와 자유가 전제 되어야 한다. 그러니 우리는 영혼의 존재도 전제해야 한다. 우리도 영혼이 있는지 없는지를 모르지 않는가? 어떻게 생겼는가? 그래서 그런 정도의 한계개념으로 인간 필요의 요청으로 하나님이 필요한 것이다. 실제로 천지를 창조하시고 모든 역사를 주관하시는 그런 하나님은 현대 칸트철학 이후에서는 자리가 없다. 그러니 하나님이 인간에게서 분리되어 있고, 더 이상 알 수 있도록 연결되는 길이 없다. 단지, 하나님이 계시다 하는 것이 무엇인가? 칸트에 의하면 우리 인간이 윤리의식을 갖는 것이다. 칸트가 인정한 유일한 신 존재 증명으로 우리가 윤리의식을 갖는다는 것 그것이 神意識을 갖는 것이다.

그러니 칸트가 현상계와 예지계로 구분하는 것이 실존주의 철학에서는 Historie와 Geschichte, 즉 달력상의 역사와 의미로서의 역사로 분리되었다. Historie는, 아침에 일어나면 해가 뜬다. 그러면 밥을 먹고, 옷을 갈아입고 학교에 가고 피곤하니 저녁에 자고 더 이상은 없다. 무슨 의미가 있는가? 이런 삶이 뭐 대단한가? 중요한 것이 아니다. 그런 것은 누구나 경험하는 일이요, 달력상의 시간, 날짜의 일일 뿐이다. 그러다가 그 사람에게 큰 轉機가 일어났다. 술을 먹고 늘 방탕하던 사람이 어느날 改過遷善해서 아버지의 뜻을 받들어 살기로 결심했다 하자. 그때 그 사람이 새로 시작한 삶은 이전의 삶이 아니라, 새로운 세계가 열린 것이다. 기독교적으로 말하면 예수 그리스도의 십자가의 선포에 그 사람 마음이 변화되어 새로운 삶이 시작되었다. 물론 해는 뜨고 진다. 밥은 먹고 잠은 잔다. 그렇지만 이제까지 살던 삶의 차원은 전혀 다른 차원이 되었다. 정말 그건 의미가 있는 것이다. 진정한 삶을 사는 것이다. 그때의 그 시간은 시간적으로는 짧아도 그 의미에 있어서는 얼마나 귀중한가? 그것이 바로 Geschichte 이다. 예수 그리스도의 죽음은 분명히 Historie에서 발생했다. 달력상의 역사이다. 그런데 이들은 그리스도의 부활은 달력상에서 생긴 것이 아니라고 하고 의미없게 생각한다. Geschichte에서 생긴 일로 돌린다. 그걸 구분 못하니 뭐가 뭔지 전혀 알 길이 없다. 진정으로 예수 그리스도의 일이 Historie에서 생겼으면 누구든지 가서 사진을 찍어야 되지 않겠는가? 예수 부활을 사진 찍어야 될게 아닌가? 이들에 의하면 사진 찍어둘 수 있었던 것이 아니다. 누구든지 예수의 부활을 만났는가? 생각해 보자. 불신앙이니까 자유주의자들이니까, 그렇게만 해버리지 말고 생각해 보자. 다 만난 것이 아니지 않는가? 엠마오로 가는 길에도 두 제자 밖에 만나보지 못했다. 달려갔던 두 제자들 중에 요한은 못 만나고 베드로는 만났다. 같이 갔던 여인들도 막달라 마리아만 주님을 만났다.

지금 현대신학의 문제들이다. 이런 문제는 우리와 무관한 이야기가 아니다. 불트만과 바르트의 이런 역사관이 즉 Geschichte가 그와 같은 의미의 역사라면 불트만에 와서는 새로운 시간의 구분이 생겼는데 현재, 미래, 이 세상, 현재세계는 부조화의 세계이다. 악이 성한 세상이다. 그러나 미래가 오면 자유가 생기는 것으로 인간이 자유로워지고 압제와 탈취로 부터 해방된다고 한다. 그리고 인간이 본래 자기 자신의 인생에로 되돌아가고 자유를 마음껏 누리는 자유의 세계에 도달한다. 이런 미래가 불트만의 이야기이다. 전에는 밑에서 위로 생각하던 것이 이제는 앞에서 자유의 나라가 기다리고 있다. 앞에 하나님의 나라가 기다리고 있다. 그러므로 소망을 미래에 두고 미래에 가치를 부여하는 것으로 그의 역사관과 신학을 전개한다.

역사비평적 방법

계몽주의는 역사적 비평적 방법을 수집하게 되었다. 그래서 기독교의 전통적인 신앙의 내용을 권위로 받는 것이 아니라 일단 인간의 자유성에 의해서 판단하게 되었다. 이것은 최근 현대의 역사주의(Historicism)가 그 공헌이 크다 이 역사주의가 등장하기 전에는 그래도 이성의 영원한 진리를 믿었다. 그런데 사고가 더욱 역사적이 되고 부터는 모든 시대에 타당한 영구한 진리가 있는 것이 아니라 진리는 다 그 시대의 역사적 산물이라고 생각하게 되었다. 그렇기 때문에 이성으로 말한 그 진리는 역사적인 시대제약성을 갖고 만세에 타당한 진리가 못되게 되었다. 그리고 모든 것, 자연까지도 역사화 하기 시작하였다. 그런 의미에서 기독교도 역사적인 산물이기 때문에 기독교의 진리가 그 시대에 타당한 것이라고 해서 지금도 이 시대에 맞는 타당한 진리라고 주장할 수 없다는 귀결에 이르렀다. 그러니 성경이 어떻게 해서 역사적인 문서로 이루어졌는지를 역사적, 비평적 방법으로 탐구하는 것이 역사 비평적 방법이다. 이 역사비평적 방법으로는 모든 것이 역사의 산물이기 때문에 그 자체로 타당한 객관적 진리라는 그런 지식이 성립하지 않는다. 그러니 이들은 기독교 계시라는 것도 역사적인 상황에서 생긴 것이기 때문에 그 시대 상황에서 살피고 과감하게 비판을 시도한다.

또 자연과 하나님에 관한 理神論的 개념은 초자연적 하나님의 개입을 배제하며, 축자영감설의 교리도 다 배제한다. 이것은 기독교가 들어오면서 본격적으로 무신론이란 논의가 가능해진다. 왜냐하면 역사를 다스리고 창조하시고 섭리하시는 참 하나님은 한분 뿐이라고 하는 그와 같은 주장을 반동으로 하나님이 계시다는 것을 부정하는 무신론이 가능한데 그 무신론을 시작하게 하는 그 이론이 소위 理神論 혹은 自然神論이다.

이 자연신론 혹은 이신론은, 하나님이 세계라는 기계를 만들었다고 한다. 이 세계기계(창조)는 참으로 훌륭한 기계여서 만들 때 그 안에 법칙과 질서와 사물의 본성을 넣었다. 그래서 그것으로 완전해서 신이 더이상 간섭하고 섭리하는 그와 같은 일이 필요 없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세계라고 하는 큰 기계를 만들어서 저절로 돌아가게 해 놓았으니 하나님은 더 이상 자연의 일에 또 인간세상의 일에 개입하시고 보존하시고 섭리하실 필요가 없다는 것이다. 처음 만들 때 부터 저절로 굴러가게 하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일단 창조로 부터 또는 인간세계로 부터 하나님의 섭리를 배제하므로 이 역사적 비평적 방법이 본격적으로 가능하게 되는 地盤을 조성했다. 자동기계 처럼 모든 자연은 절로 돌아가는데 하나님이 들여다 보고 계속 만질 필요가 없게 된다는 결론이다. 그렇기 때문에 하나님이 초자연적으로 인간세계와 그의 창조를 간섭하신다는 그와 같은 주장을 완전히 배격하게 되었다.

이런 눈으로 보면 모든 것은 하나님이 계셔서 그 섭리 때문에 역사가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그냥 저절로 있는 역사적인 산물이 된다. 그리고 여기서 논리는 잘 안맞게 되었지만 첫째, 이들은 하나님의 말씀(神言)과 둘째, 성경을 구분한다. 하나님의 말씀은 무엇인가? 성경에 보면 귀신의 말도 있고 사울이 신접한 여인들과 대화한 말도 있다. 그것도 하나님 말씀인가? 또 성경 역사서에 보면 다른 것을 인용한 말도 있다. 역사서에 보면 첫째, 사건의 기록이 있고 둘째, 인용이 많다. 역사서 뿐 아니라 여호수아서에도 인용이 있다.

그리고 선지서를 보면 선지자가 받은 멧세지가 기록으로 옮겨가기 전에 계시가 말씀과 환상의 형태로 왔다. 그런데 이 말씀과 환상으로 온 형태가 그대로 성경에 다 기록된 것이 아니다. 그것은 일단 계시를 수납한 사람의 이해과정을 통과해서 왔다. 그래서 선포된다. 그 다음에 기록된다. 그러나 이 기록도 선포될 때 즉각 기록된 것이 아니라 상당히 시일의 간격이 있다. 예례미야의 경우를 보더라도 예례미야가 선포를 했고 그 후에 바룩이 기록을 했다. 그리고 불러주어서 기록한 것도 있다. 그러나 처음 계시가 왔을 때 그냥 기록되는 것도 아니고 바로 선포된 것도 아니고 상당한 시간을 두고 기록되었다. 그러니까 처음에 온 계시와 기록간에 상당한 시일과 내용의 차이가 있다. 그러므로 동일재생산이 아니다. 지금 우리가 가지고 있는 계시는 기록된 계시 뿐이다. 그런 의미로 보면 특별계시의 범위가 기록된 성경의 계시보다 더 넓다. 왜냐하면 받은대로 다 기록하고 쓴게 하니며 선포된 대로 다 쓴것이 아니다. 그러니까 선지자에게 멧세지가 왔을 때 그대로 동일 재생산이 아니다. 선지자의 이해과정을 거쳐 상당한 시간이 흐른 뒤에 성경으로 기록되었다. 그렇게 되니 이런 과정들 때문에 비평주의자들은 중심 메세지와 나변의 것을 구분하고 하나님 말씀(神言)과 성경을 구분한다. 그래서 자유주의는 진정으로 하나님 말씀이 무엇인가를 찾는 작업을 계속해 왔다.

그러니까 이 성경 기록 속에는 역사서나 선지서의 사건도, 인용도 많다. 그러니 그중 직접 선지자가 처음 받은 계시의 핵심 내용이 무엇이냐를 찾고 그것만 하나님 말씀이라 한다. 역사 비평주의자들(자유주의)은 이런 작업을 계속하고 있다. 그러니까 이들은 성경 속에 神言 즉 하나님 말씀이 있다고 한다. 그러나 우리는 성경에 하나님 말씀이 담겨져 있지만 기록된 성경이 모든 하나님 말씀 자체라고 믿는다.

다음 단계로 그것은 성경에서의 기록, 혹은 계시의 이야기고 우리들의 현실적인 설교로 옮아가 보자. 목사들이 고난주간에는 고난주일 설교를 많이 할 것이다. 왜 우리는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면 그것만 읽지 않고 설교를 하고 그 설교를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는가? 성경을 이해하도록 우리는 풀어서 설교한다. 어느 것이 진짜 하나님 말씀인가? 성경이 진짜인가? 설교가 진짜인가? 성경과 설교가 다 하나님 말씀이라면 설교 듣는이들이 졸거나 또 은혜를 못받는 경우는 어떤가? 선지자들이 말씀을 선포할 때는 선지자가 나라가 망하리라 하면 그 말씀과 함께 나라가 망한다. 지금은 설교후에 “수고 하였습니다”라고 말은 해도 “감사합니다”란 말은 좀처럼 드물다. 왜 그런가? 설교문제를 진지하게 생각해 보자. 자유주의가 멀리 있는게 아니다. 그럼 설교 내용 전부가 다 하나님 말씀인가? 하나님 말씀이 선포되면 예수를 믿고 회개하고 성령을 받아야 되고 또 성령 받고 예수 믿는 사람에게는 기쁨과 평안이 생겨나야 된다. 성령의 역사가 일어나기 때문에 기쁨의 역사도 일어난다. 그런데 왜 냉냉한가? 또 하나님 말씀을 선포하는데 교회안에서 하나님 말씀 듣는 사람이나 교회 밖의 사람이나 다른게 무엇인가? 어떤 선교사의 이야기를 빌리면 현재 그리스도인과 비그리스도인과 틀린 것이 별로 없다. 구분이 있다면 불신자는 주일날 놀러가고 신자는 교회에 와서 예배하려고 모이는 차이 밖에 없다 하는데 우리가 이미 공감하는 이야기이다.

그동안 교회 부흥 성장 많이 하고 민족 복음화는 많이 했는데 한국사회는 달라진 것이 없다. 그리스도인이 이처럼 많이 생겨났으면 이 사회가 변화되어야 하는데 우리 현실은 별 변화가 없다. 정말 하나님 말씀을 바르게 선포했다고 할 것인가?

그러면 선포한 내용이 어디까지 하나님 말씀인가? 또 왜 설교가 하나님 말씀이 되는가 생각해 보자. 왜 은혜를 받는가? 우리의 실제 문제이다. 결코 멀리있는 문제가 아니다. 우리는 자유주의가 아니다. 하지만 실제 방법상에서 자유주의적 요소들을 크게 벗어났다고 할 수 일을런지 반성할 필요가 있다.

목사들이 하는 설교에 많은 오류를 내포하고 있다. 그것은 그 설교 속에 하나님 말씀도 있도 내 말도 있고 잘못이 있다는 뜻이다. 그럼에도 하나님 말씀이라고 하는 이유는 무엇인가? 또 성경은 설교를 안하고 덮어두어도 하나님 말씀으로 역사하는가? 잘 생각해 보자. 기록된 말씀이 있고 선포하지 않아도 말씀으로 역사하는가? 선포해야 말씀으로 역사한다고 했는데, 그러면 “설교로 선포한 것 만이 하나님 말씀이다” 라는 결론에 이르게 된다. 그 문제는 어떻게 생각하는가? 기록된 자체가 선포된 것이라는 말과 설교자는 안내한 것 뿐이라는 말을 하기도 하는데 많이 생각해야 할 것이다.

역사 비평주의자들은 하나님 말씀과 성경 사이에 구분을 자꾸 생각한다. 그래서 결국 하나님 말씀이 성경에 들어 있다면 그 핵심 진리만 분명하면 다른 부분에 오류가 있어도 상관 없다고 하는 귀결점에 이른다. 그러니까 성경을 연구할 때 다른 과거의 문서들 처럼 역사적인 방법으로 연구한다. 그래서 성경에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한다. 그러니까 자유주의의 근본은 그 핵심진리, 즉 하나님 말씀이라고 인정된 수 있는 부분은 믿을만 하고 권위가 있지만 그 나변의 역사적인 사실들에는 오류가 있을 수 있다고 한다.

기록된 말씀이 혹은 성경이 하나님 말씀이라고 했는데 이것이 선포되지 않고도 하나님 말씀으로 역사하는가? 또 사건 전달만으로 역사하는가를 잘 생각해 보자. 그리고 선포된다 해도 어떻게 될 때 하나님 말씀으로 역사하느냐?

여기에서 역사와 신앙의 과격한 분리 문제가 있는데, 가령 판넨베르그가 예수의 부활을 빈무덤으로 말하기 이전까지 우리가 예수의 부활을 생각해 보자. 우리는 분명히 예수의 부활을 믿는다. 그렇다면 역사적 증거가 있는가? 누가 사진 찍었는가? 제자들 몇 사람 외에 부활자 그리스도를 누가 만났는가? 대제사장이 만났는가, 서기관이 만났는가, 바리새인이 만났는가? 복음서에 보면 막달라 마리아의 증언도 보고가 서로 상충된다. 베드로도 부활하신 주를 처음 만났다고 되어 있다. 그러나 요한복음에는 그렇게 되어 있지 않다. 마가복음도 그렇다. 좀 자세히 반복해서 4복음서를 함께 대조해서 자꾸 반복해서 읽어보기 바란다. 어떻게 같이 일치하고 어떤 것이 차이가 있는가를 살펴야 할 것이다.

우리는 2천년 동안 예수 그리스도가 부활했다고 분명히 믿고 선포해 왔다. 그 증거가 무엇이냐고 요구할 때 이 세계가 이렇게 변화하여 새로워진 것이라고 제시했다. 그런데 부활하신 예수 그리스도를 만난 사람들은 다 신앙인 이었다. 그리스도 밖에 있는 사람은 만난적이 없다. 대제사장, 제사장, 서기관, 왕이 만나지 못했다. 만난 사람은 막달라 마리아와 몇명의 여인과 베드로, 엠마오로 간 두 제자, 갈릴리 바닷가의 11명의 제자였다. 그리고 바울에 의하면 그의 동생 야고보에게 나타났고 오백여 형제들에게 나타나셨다고 했다. 그렇다면 그것을 역사적인 증거자료로 제시할 수 있느냐? 증거가 무엇인가? 빈무덤이 증거인가? 그렇게 설명한 사람도 있다. 그러나 여자들이 밤중 미명에 찾아가니까 그것이 예수 무덤인 줄 알았더니 다른 곳이었다고 그들의 착각으로 돌린 사람도 있다. 반박할 수 있는가? 무덤에 예수의 시체가 없으니 부활했다고 한다. 십자가와 부활의 사실을 역사적으로 증명할 수 있는가? 부활이 해가 뜨는 달력사건에서 몇월 몇일 몇시에 일어난 사건이면 사진을 찍어야 되지 않느냐고 역사주의자들은 다그친다. 사진 찍을 수 있었다면 대제사장도 천부장도 부활하신 예수를 만날 수 있었어야 할 터인데 그러지를 못했다. 부활하신 예수를 만난 자들은 이미 예수를 믿는 자들 이었다. 그러니 신앙의 눈으로 그리스도의 부활을 만났다. 그러면 부활을 대표적인 증거의 사실로 받는 것이 아니라 믿음으로 받아야 한다고 한다. 그렇게 되면 우리는 예수의 부활을 역사적인 사건에 기초를 둘 수 없게 되어 버린다.

레싱의 말을 빌리면 “기독교 신앙은 대표적인 사건과 넘지 못할 큰 도랑이 있다”고 했다. 그러면 어떻게 뛰어넘을 것인가? 그런 문제점 때문에 현대 역사주의자들은 기독교의 역사적인 사건은 부인해 버리고 기독교의 핵심진리만 취하고 있다. 기독교의 가르침, 그 진리의 내용, 그것만 붙잡는다.

불트만 이야기도 다른게 아니다. 그리스도의 부활은 역사적으로 증명할 길이 없으니까 예수가 부활했다고 선포한 내용을 받으면 받아들인 사람의 마음에서 부활한 것이라고 한다. 반대로 예수가 부활하지 않았다고 믿으면 부활하지 않은 것이 된다. 그러니 그 내용을 받은 사람의 마음의 일이지 객관적, 역사적 사실로 실제 부활한 예수에 대해서 알 길이 없다고 한다. 그것은 증명할 길이 없기 때문이다. 그러니 예수가 사실로, 실제로 부활한 것이 아니라 즉 부활했다고 생각하면 그렇게 생각하지 않는 사람과는 차이가 발생하는데 그렇게 생각하는 사람의 변화를 부활이라고 한다. 그들은 예수가 사실적으로 부활했다는 데는 관심이 없다. 그냥 받아들여 믿으면 그 믿음에로 믿는 그 심리 현상에로 부활한 것이다.

레싱만 그런 것이 아니라 다 마찬가지 이다. 계몽주의 이후에 모든 자유주의 근본이 그렇다. 그런데 2천년 동안 교회는 부활을 선포해 왔다. 그러니 이들도 같은 용어를 쓰기 때문에 우리도 쉽게 받아들인다. 예수 자신이 자기가 그리스도라고 했다 하나님 아들이라고 했다. 그런데 그 말을 대제사장들이 받아들이지 않았기 때문에 처형했다고 한다. 나사렛의 예수가 자기가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주장을 대제사장들이 받아들였으면 처형하지 않았을 것인데 거부했으니까 처형했다고 한다. 여기서 예수의 죽음은 하나님의 경륜 때문에 돌연적으로 이루어진 것인데 이들은 단순히 안죽을 수도 있었는데 영웅적인 죽음으로 혹은 실패로 본다.

 

 

http://www.reformednews.co.kr/sub_read.html?uid=610§ion=sc26§ion2=

출처 : 영적 분별력
글쓴이 : 진실 원글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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