로이드 존스, 산상 설교(상권), 문창수역, 정경사, 1999
서문
본서는 주일 오전예배에서 계속해서 전한 60편의 설교를 모은 것으로
많은 사람들로부터 책으로 출판하라는 압력을 받아 출판하였다.
저는 오늘의 교회에 가장 절실히 요구되는 것은 강해설교로 돌아가는 것이라고 깊이 느끼고 있다.
설교는 수필이 아니며 출판하기 위한 것도 아니다. 설교는 청중에게 들려져서 즉각 충격을 주는 데 있다.
여기의 설교는 거의 수정을 가하지 않은 당초의 설교 그대로이다.
저의 최대의 바람과 소원은 이 설교들이 강해설교에 대해 새로운 관심을 자극할 수 있었으면 한다.
설교자들은 주일 오전 예배에 40여분 행해지는 이 같은 강해설교가
오늘에도 도심지교회에서도 행하여질 수 있음을 알고 격려를 받을 것이다.
나의 최선의 비평자요 가장 가혹한 비평자는 나의 아내였다는 점을 인정한다.
1959년 3월 런던 웨스트민스터 교회에서
로이드 존스
1 장 총 서론
무릇 어떤 교훈을 검토할 적에는 일반적인 것에서부터 시작하여 구체적인 것으로 전개하여 나가는 것이
현명한 방책이라 하겠다.
이것이 ‘나무들 때문에 숲을 보지 못하는 위험을 피할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기도 하다.
이 방법은 산상설교와 관련해서 생각해 볼 때 특히 중요하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선 이 유명한 산상설교에 관한 몇 가지 일반적인 설문과 함께
기독교인의 생활, 사상, 견해에서 차지하는 이 설교의 위치에 관하여 알아보아야 하겠다.
- 어떤 이유로 해서 산상설교를 검토해야만 하는가?
산상보훈에 관하여 설교하게 된 이유는 성령의 타이르심과 강요하심과 인도하심을 감지하였음을 근본적으로 전제한다.
만약 저 자신의 선택에 맡겨졌다면, 산상보훈에 관한 설교를 하지 않았을 것이다.
또 다른 특별한 이유는 오늘날 교회 생활의 특수 상황 때문이다.
오늘날 교회생활의 가장 두드러진 특징이 그것의 피상성이다.
현대의 복음전도 활동을 과거의 교회들이 실현했던 위대한 복음전도 노력과 비교 대조하여 볼 때,
오늘날의 교회는 요란스러움과 우리의 선조들을 두렵게하고 충격을 주었을 끔찍스러운 수단의 사용을 보여주고 있다.
이러한 피상성은 교회 성결 개념과 성화론에 대한 교회의 접근방식에 이르기까지 두루 미치고 있는 것이다.
이것의 원인은 성경에 대한 우리의 태도가 잘못되어 있다는 것이다. 성경을 신중히 여기고,
성경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지 않는다.
성경이 우리에게 스스로 말씀하시도록 놓아두지를 않는다. 성경은 우리의 교범이요, 유일한 자료요, 유일한 권위이다.
성경을 떠나서는 하나님에 대하여 그리스도인의 생활에 대하여 참된 의미에서 아무것도 알 수 없다.
우리는 주관적인 체험에만 의존할 수는 없다. 선한 영도 있지만 악한 영도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가짜 체험도 있기 마련이다. 중요한 것은 성경에 대한 접근 방법이 올바라야 한다는 점이다.
성경을 읽는 것만 가지고는 충분하지 않다. 성경을 기계적인 방법으로 읽음으로써 아무런 유익을 얻지 못하는 수도 있다.
계획에 의해 그 날의 분량을 읽은 다음 생각도 묵상도 하지 않고 그저 읽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도록 주의해야 한다.
“그 중에 알기 어려운 것이 더러 있으니 무식한 자들과 굳세지 못한 자들이 다른 성경과 같이
그것도 억지로 풀다가 스스로 멸망에 이르느니라”(벧후3:16)
우리는 이론을 가지고 성경을 대한다. 그리고 읽는 모든 것은 그 이론의 조정을 받는다.
이단자는 결코 부정직한 사람들이 아니었다.
그저 판단을 그르친 사람들이었다. 그들은 하나의 이론을 발전시켜 그것에 만족을 느끼고,
이 이론을 가지고 성경에 임하게 되었으며, 성경의 이곳저곳에서 그 이론을 찾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위험은 주로 율법과 은혜의 관계를 다루게 될 경우 두드러지게 나타나는 경향이 있다.
어떤 사람들은 율법의 측면만 강조한 나머지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한낱 도덕률의 집합쯤으로 변형시키고 만다.
또 기억해야 할 것은 율법을 희생하고 은혜만을 지나치게 강조함으로써
신약성경의 복음이라 할 수 없는 이질적인 요소를 가지게 될 수도 있다는 것이다.
바울은 은혜를 강조한 것 때문에 자주 오해를 받았다.
은혜 아래 있으므로 율법과는 아무 관계도 없으며 율법을 잊어버릴 수 있다고 말하는 것은 성경의 가르침이 아니다.
우리는 율법대로 살게 되어 있다. 아니 그 이상으로 살게 되어 있다.
우리의 의는 서기관과 바리새인들의 의보다 나아야 한다.
그리스도는 율법을 폐하러 오시지 않았고, 온전케 하러 오셨다.
이 점을 망각하기 때문에 율법과 은혜를 서로 반대되는 것으로 보게 된다.
이제 나는 우리가 구주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얼마나 진지하게 대하고 있는가에 대하여 의구심을 가질 수밖에 없다.
이 문제에 집중하는 최선의 방법은 산상설교를 대면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 산상설교는 우리에게 무엇을 의미하는가? 산상설교는 우리 생활과 어떤 관계가 있으며,
또 우리의 사고와 관점에서 그것은 어떤 위치를 점하고 있는가?
또한 산상설교는 누구를 위한 것이겠는가? 산상설교의 목적은 사실상 무엇이겠는가? 서로 상반된 견해가 많이 있다.
① 사회복음적 견해 – 신약성경에서 중요한 것은 사실상 본 설교뿐이며, 이 속에 사회복음의 기초가 있다.
사람들이 어떤 삶을 살아야 하는가에 대한 여러 원칙이 그 속에 깔려 있으며 우리가 행해야 할 바 모든 것은
산상설교에 적용하는 것이다. 그렇게 함으로써 하나님의 나라를 건설할 수 있으며 우리의 모든 문제도 끝이 난다.
사회복음주의의 잘못은 산상설교의 처음 말씀인 “심령이 가난한 자는 복이 있나니”와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를
항상 무시해 왔다는 것이다. 이들 말씀이야말로 사람은 그 누구도 도움을 받지 않고서는
스스로 산상보훈대로 살 수 없음을 의미한다.
② 모세 율법의 해석(정교화) - 주님은 율법을 잘못 풀이하고 있음을 아시고
산상설교에서 모세의 율법을 정교화하고 해석하심으로써 율법에 보다 높은 영적 내용을 더하셨다는 것이다.
산상설교가 어떤 점들에서는 율법을 해석하고 설명하는 것은 사실이나,
팔복은 율법의 범위를 완전히 초월하는 영역으로 우리를 이끌어 간다.
③ 세대주의 견해 – 산상설교가 현대 기독교인들과 아무 관계가 없다.
그들은 우리 주님은 천국에 대해 설교했으나 유대인들이 예수의 가르침을 믿지 않았다.
산상설교는 천국의 시작과 관계가 있다. 그래서 주님은 천국을 세울 수 없었으므로
때늦은 방편으로써 십자가 위의 죽음이 오고, 교회와 교회 세대가 오게 된 것이다.
그 때가 되면 우리 주님이 천국을 가지고 재림하실 것이며
그때 다시 산상설교가 소개될 것이라는 것이다. 산상설교는 천년왕국 시대를 위한 것이라고 말한다.
본 설교는 첫 제자와 그 이후에 항상 이것을 실천하도록 작정된 사람에게 설교된 것이다.
뿐만 아니라 산상설교에 있는 교훈이 하나도 빠짐없이 신약성경의 서신들에서도 나타나 있다는 점은 중요한 사실이다.
산상설교는 우리 주님이 말씀하신 바 ‘새 계명’, 그가 우리를 사랑하신 것 같이 우리도 서로 사랑하라는 것이다.
산상설교는 이 명령을 장중하게 정교화한 것에 지나지 않는다. 우리는 산상설교에서 이것을 실천하는 법을 보게 된다.
천국은 어떤 의미에서는 아직 땅 위에 임하지 않은 것이 사실이다. 하지만 천국은 동시에 이미 땅 위에 임한 나라이다.
천국은 ‘하나님의 통치’, ‘그리스도의 통치’라는 뜻이며, 그리스도는 오늘 모든 참된 기독교인 속에서 다스리고 있다.
산상설교는 천국생활의 완전한 표현이다. 마태는 천국을 끝까지 강조하려 했다. 산상설교가 마태복음 첫 머리에 놓인 것도
이 때문이라는 것을 의심하지 않는다. 유대인들은 거짓된 물질적 천국관을 가지고 있었다.
본 설교의 목적은 천국을 본질적으로 영적인 것으로 설명하려는 것이다.
산상설교에는 ‘이렇게 살아라, 그래야 기독교인이 될 것이다’란 말씀이 없고 ‘너희가 기독교인이니까 이렇게 살아라’ 이다.
- 왜 우리는 이 문제를 연구하고 본 설교대로 살려고 해야 하는가?
① 주 예수 그리스도께서는 우리가 산상설교를 살 수 있게 하시기 위해 돌아가셨다.(딛2:14)
② 산상설교만큼 중생과 성령과 그의 내적 사역의 절대 필요함을 보여주는 것은 없다.
팔복의 말씀은 나를 바닥에 꿇어 엎드리게 한다. 산상설교처럼 복음과 복음의 은혜로 이끌어 주는 것은 없다.
③ 산상설교를 듣고 실천하면 할수록 우리가 더 많은 축복을 체험한다.
만일 여러분이 생활의 능력을 얻으며 축복 받기를 원한다면
산상설교로 곧장 가서 산상설교를 살며 실천하며 몸을 내어 맡기라.
만일 여러분이 배부르기를(채워지기를) 원한다면 어떤 신비한 축복(체험)을 찾지 말라.
이 축복을 얻으려고 여러 집회로 달려가지 말라.
그 대신 산상설교와 그 의미와 요구를 정면으로 대하라. 그러면 그것을 얻게 될 것이다. 이것이 축복의 지름길이다.
오늘의 세계는 참된 기독교인들을 찾고 있고, 절실히 요구하고 있다.
오늘의 교회가 해야 할 일은 외부사람들을 끌어 드리기 위해 전도단을 조직하는 일이 아니라,
교회 자체가 기독교인의 삶을 다시 살기 시작해야 할 것이며
교회가 그렇게 할 때 사람들은 우리의 건물 속으로 밀려 들 것이다.
공산주의에서 기독교로 돌아선 사람의 말은 유식한 설교나 논증의 결과가 아니라
기독교인에게서 자기를 철저하게 부정하고 다른 사람들을 위한 관심을 본 결과라고 했다.
우리 모두가 산상설교를 살기만 한다면 사람들은 기독교가 살아 움직이는 종교임을 알 것이다.
그들은 ‘여기에 그것이 있다’라고 말하게 될 것이다. 진정한 부흥은 사람들이 항상 산상설교를 신중히 여기고
본 설교에 자기들을 대면케 하였을 때에 일어났다.
그러므로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되어야 하는가를 보여주는 본 설교를 세심히 연구해 보자.
우리가 어떤 사람이 될 수 있는가를 알기 위해 연구해 보자.
산상설교는 요구사항만 말씀하고 있지 않고 힘의 공급원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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