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 장 애통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나니
-두 번째 복, “애통하는 자는 복이 있나니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임이요” 이 복도 그리스도인과 세상에 속한 사람들과 구별되게 한다. 세상이 적어도 피하고 싶어 하는 것이 하나 있다면 그것은 애통이다. 할 수 있는 대로 행복하자고 말하는 것이 세상이다.
하지만 복음은 참으로 애통하는 자들만이 행복하다는 것이다. 누가복음 6:25의 병행어구를 보면 주님은 “화 있을진저 너희 웃는 자여 너희가 애통하며 울리라”라고 말씀하셨다. 주님은 화를 선언함으로써 이 세상의 웃음과 유쾌함과 행복을 정죄하고 있다.
이것은 영적인 애통인 것으로 이 세상에서의 우리의 자연적 삶과는 아무 관계가 없다. 오늘날 교회에서 많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대로, 교회 자체는 모두 옳고 교회가 해야 할 일은 모두가 바깥 세상을 복음화하는 것뿐이라는 생각보다 더 비극적이고 근시안적인 생각은 없다.
모든 부흥운동은, 교회 자체가 기독교회로써 그리고 여기 팔복에 서술된 내용에 근사한 개개 그리스도인으로서의 참된 기능을 발휘하기 시작할 때에 교회밖에 있던 사람들이 이끌려 들어온 사실을 증명하고 있다.
- 불행히도 오늘의 교회가 과거에서처럼 이 점이 분명하지 않은 이유는, 가짜 청교도주의에 대한 반동으로 나타난 것이다. 거짓된 청교도주의는 지난 세기말과 금세기 초에 가장된 경건의 모양으로 나타났다. 이것은 내부로부터 나온 것이 아니므로 신앙생활은 거의 비참한 것이라는 인상을 주었고, 그리스인은 매력이 없다는 인상을 주었다.
또 한 가지 원인은 그리스도인이 아닌 사람을 끌어 들이려면 일부러 밝고 명랑한 모양을 가장해야겠다는 생각이 유포되었다는 사실이다. 많은 사람들이 내부에서 생긴 기쁨과 행복을 가지려 애쓰지 않고 겉치레를 도모했다. 이러한 피상성과 가장된 쾌활이 오늘의 교회생활에서 애통의 특징이 사라진 이유인 것 같다.
이 모든 것에 대한 궁극적인 원인은 잘못된 죄의식과 잘못된 죄론 때문이며, 그리스도인의 기쁨의 참 성격을 이해하지 못하는 데에도 원인이 있다. 과거와는 달리 죄에 대한 참되고 깊은 확신이 없으며 피상적인 기쁨과 행복만이 있다.
이처럼 잘못된 죄론과 피상적인 기쁨과 행복관이 복합 작용하여 필연적으로 피상적인 유의 인간과 매우 부적당한 유의 기독교 생활을 낳고 있는 것이다. 죄와 기쁨에 대한 교회의 이중개념이 이처럼 잘못되어 있고 부당한 것이라면 교회가 전도에 실패하고 있는 것은 무리가 아니다.
- 산상설교는 부정적인 면부터 시작한다. 죄의식은 필연적으로 개심에 선행해야 한다는 것이다. 즉 구원의 참 기쁨이 있기 전에 죄의식이 있어야 한다. 이것은 복음의 본질이다. 오늘의 기독교인들은 정죄의식을 떠나서 기쁨을 원한다. 하지만 이것은 불가능하다. 개심하여 참으로 행복하고 복되려는 사람은 무엇보다 먼저 애통하는 사람이어야 한다. 기독교인은 주 예수 그리스도를 닮는 사람들이다. 주님은 ‘많은 형제 가운데 첫째 아들’이시다. 이것이 우리들의 궁극적인 목표이다.
주님에 대한 이사야 예언을 보면, 주는 ‘슬픔이 많이 겪었으며 질고를 아는 자, 그의 용모는 너무 상하여 아무도 그를 바라지 않을 정도일 것”이라고 기록되어 있다. 요한복음 8:57에 “네가 아직 오십도 못 되었는데 아브라함을 보았느냐”라고 한 것을 보면 우리 주님이 실제 나이보다 훨씬 더 들어보였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의 전 생애를 통틀어 웃음의 기록은 없다. 하지만 그가 나사로의 무덤에서 우셨고, 그가 돌아가시기 전에 예루살렘을 보시며 우셨다.
바울은 “누가 이 죽음의 몸에서 나를 건져내랴”(롬7:24)라고 외친다. 이 구절은 애통의 의미가 무엇인가를 말해 준다. 기독교인은 자기에 대하여 철저한 절망감을 가지고 바울처럼 “내 안에 곧 내 육신 안에는 선한 것이 있지 않다”는 것을 안다. “나는 내가 원하는 선은 행하지 않고 도리어 원하지 않는 악을 행하고 있다”라고 말할 수 있는 체험이 무엇인지 알아야 한다. 바울은 마음의 법과 몸의 지체의 법과의 사이에 비참한 싸움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우리가 참된 기독교인이 되어야 한다면 이 사도 바울과 기타 사도들과 모든 세대의 성도들을 닮아야 한다.
- ‘애통한다’는 것은 ‘심령이 가난한’ 데서 필연적으로 따라오는 것이다. 내가 하나님과 그의 성결을 대면하고, 내가 살아야 할 삶을 응시해 볼 때 나의 철저한 무능과 절망을 본다. 참으로 자기와 대면하고 자기 삶을 검토하는 사람이면 자기 죄 때문에 필연적으로 애통해 할 것이다. 내 속에 나를 이처럼 행동하게 하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내 속의 무엇일까? 라고 물어야 한다. 그리고 이 싸움이 그의 지체들 속에 있음을 발견하며 그것을 미워하며 그것 때문에 애통해 한다.
애통은 불가피한 것이며, 실제 체험이며 사실이다. 이것은 매우 철저한 시금석이다. 만일 이와 같은 유의 가르침을 반대한다면, 그것은 곧 내가 주의 백성이 아니며 주 그리스도의 가르침을 반대하고 있는 것이다. 하지만 내 속에 있는 이런 것들 때문에 애통한다면 나는 참으로 애통하는 사람이다.
참된 기독교인은 여기에 머물러 서 있지 않고 다른 사람들의 죄 때문에도 애통한다. 기독교인은 사회 상태와 세계 상태에 관심을 가지고 세상의 도덕적 혼란과 인류의 고통을 보면서 애통해 한다. 이것이 모두 죄 때문이라는 것을 알며 이 때문에 애통한다.
우리 주님이 ‘슬픔을 많이 겪었고 질고를 아는 자’이셨던 까닭도 이와 같다. 주님은 죄라고 하는 무섭고 더러운 것을 보며, 나사로의 무덤에서 우셨고, 예루살렘 성을 보고 애통해 하신 것이다. 그의 성품을 받은 사람도 그래서 애통해 한다. 죄 그 자체의 성격 때문에 애통해야 하며, 죄가 세상에 들어와 이런 무서운 결과를 가져온 것 때문에 애통해야 한다. 죄가 할 수만 있으면 하나님의 마음을 찢으려는 이 무서운 실재를 알며 사람들의 반역과 오만과 사탄에게 귀를 기울인 결과를 알기 때문에 애통한다. 신약성경에서 이 영적 의미의 애통이 곧 그것이다.
- 세상의 표어는 ‘먹고, 마시고, 즐기자’이다. 우리 주님은 팔복에서 “애통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다“라고 말씀하신다. 이것은 하나의 역설이다. 죄의 상태 때문에 참으로 애통하는 사람은 회개하며, 자기의 철저한 죄성과 절망을 보고 구주를 찾는다. 그는 그리스도 안에서 구주를 발견한다.
애통의 의미를 먼저 알기 전에 주를 그의 구주로, 구속주로 알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가 참으로 애통한다면 그리스도가 나의 죄로 인하여 돌아가셨으며, 하나님 존전에서 나의 변호인으로 서 계심을 본다. 그는 그 속에서 하나님께서 예비하신 완전한 준비를 보며 위로를 받는다. 슬픔은 기쁨으로 변한다. 이것은 개심에 있어서 그러할 뿐 아니라 그리스도인에게 계속되는 일이다. 그리스도인의 삶은 이렇게 애통과 기쁨이, 슬픔과 행복이 교차하는 삶이다.
그리스도인에게 제공되는 또 다른 위로, ‘복된 소망’이 있다. 그는 그리스도께서 돌아오실 날이 동터 올 것을 안다. 그러면 땅 위에서 죄는 물러갈 것이며 ‘의가 있는 곳인 새 하늘과 새 땅’(벧후3:13)이 임할 것이다. 애통하는 사람들은 복이 있다. 그들이 위로를 받을 것이기 때문이다. 궁극적인 영원한 소망이 있다. 저 영원한 상태에서 복을 누리게 될 것이다.
이것을 알지 못한다면 기독교인이 아니다. 용서받은 죄로 인한 기쁨, 화해의 기쁨, 하나님에게서 이탈해 나갔을 때 우리를 도로 찾으신 것을 아는 기쁨, 앞에 있는 영광의 기쁨, 영원한 상태를 기대하는 데에서 오는 기쁨을 아는 것이다.
- 애통하는 사람은 슬픈 사람이지만, 병적이거나 비참한 사람은 아니다. 신중하고 위엄 있는 사람이지만 결코 냉정하거나 부정적인 사람은 아니다. 위엄 속에는 따스함과 끌어당기는 힘이 있다. 그는 삶을 심각하게, 삶을 영적으로 응시하며, 삶 속에서 죄와 결과를 본다. 그는 속으로 신음한 바울과 같지만 그리스도를 체험함과 장차 올 영광 때문에 행복하다.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거룩한 기쁨이요, 그리스도인의 기쁨은 신중한 행복이다.
우리 주를 닮아서 신음하고 울지만, 앞에 있는 기쁨으로 인하여 십자가와 수치를 참는다.
이것이 애통하는 사람이다. 이것이 그리스도인이다.
심오한 죄론과 차원 높은 기쁨의 교리, 이 둘이 합하여 애통하며 동시에 위로를 받는,
복되고 행복한 사람을 만들어 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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